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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특급시

last modified: 2015-03-24 20:58:32 by Contributors




여권법에 의한 여행금지국가
아프가니스탄리비아소말리아시리아예멘이라크
별도의 국내법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지역
북한(국가보안법) 남극(남극활동법)


위험 : 이곳은 여행금지 또는 기타 법률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국가·지역입니다. 이 국가는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여행경보 4단계인 여행금지 또는 특별여행경보 2단계인 특별여행경보로 지정된 국가입니다. 현지에 체류하시는 분들은 즉시 철수 및 귀국해야 하며 외교부의 허가 없이 방문하면 여권법에 의해 처벌됩니다. 특히 이런 지역은 테러, 전쟁 등으로 인해 매우 위험해 다른 국가에서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국민들의 탈출 시도도 빈번한 매우 위험한 국가이니 어떤 이유로든 절대로 가면 안됩니다. 또한 국가보안법 및 남극활동법으로 입국이 금지된 국가를 방문하여도 관련 법률에 의해 처벌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법률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군사목적 등의 이유로 현지 법률로 출입을 금지하는 지역도 있기에 이러한 지역 주변을 여행할 때는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여행금지국가 이외에도 특별여행경보 발령 국가, 철수권고 국가 등 방문시 위험한 곳이 있습니다. 해외로 여행하시려는 분들은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사이트에서 해당국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숙지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위 권고사항을 따르지 않았을 시 발생한 피해나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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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산에서 고속도로를 향해 내려다 본 개성 시내의 천국의 오르막길 풍경
창문이 없어서 순간 핵맞은줄


자남산에서 내려다본 개성시가

開城特級市 / Kaesŏng Municipal City

性特級市 / Personality Municipal City

Contents

1. 개요
2. 지리
3. 역사
3.1. 후기 신라시대
3.2. 고려시대
3.3. 조선시대
3.4. 일제강점기
3.5. 광복 이후
3.5.1. 6.25 전쟁
3.6. 북한 치하의 개성
3.6.1. 개성직할시 - 북한 치하의 경기도
3.6.2. 개성특급시 - 개성공단과 개성관광
3.7. 통일 한국의 개성?
4. 인문
4.1. 개성상인(송상)
4.2. 풍속
4.3. 명승지
5. 교육기관
6. 하위 행정구역 (1950년 당시)
7. 개성 출신인 인물/캐릭터
8. 외부링크


1. 개요

개성
開城 / Kaesŏng[1]
광역시도 경기도(북한에서는 황해북도)
서울에서 40분 (59.23km)
평양에서 1시간 32분 (136.3km)
면적 179.263㎢

대한민국 경기도개성 넘치는 도시. 고려 왕조수도였으며, 당시 개경(開京)이라 불렸다. 과거 소나무가 많아 송악(松岳/松嶽) 또는 송도(松都)라는 별칭이 있다.[2]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행정구역(이북 5도 체계)으로는 경기도 개성시이며,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개성특급시이다. 남쪽은 바로 휴전선을 경계로 파주시가 있다.[3]

현재 인구는 30.8만~35만 명(2008년 통계)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것은 근교의 농촌지대의 인구를 합친 숫자로, 시가지 인구는 15만~19.2만 명(2008년 통계) 정도로 추정된다. 남한의 구리시와 비슷하다. 과거 개경의 면적은 25~30㎢로 추정되며, 1950년 당시에는 17개 동에 면적은 82㎢였다.

엄밀히 말하면 개성특급시는 현재 황해북도 관할이기 때문에 광역행정구역으로 놓기는 어렵지만, 남북분단 이후 상당 기간 동안 개성직할시라는 광역행정구역으로 있었고, 특급시 자체가 흔치 않을 뿐더러, 남포특별시라선특별시처럼 다시 광역행정구역으로 부활할 가능성도 높아서 리그베다 위키에는 광역행정구역에 사리 기재해 둔다.

2. 지리

개성은 북쪽에는 송악산, 서쪽은 오공산(蜈蚣山, 지네산), 남쪽에는 용수산(용백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성 지형이다. 따라서 같은 분지도시로 유명한 대구광역시와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추위가, 여름에는 더위가 심하다. 아울러 서울보다는 추위가 심한 편이다. 시내 중앙에는 서울의 남산처럼 자남산(子男山)이라는 언덕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김일성동상이 세워져 있어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주변에 송악산으로 대표되는 험준한 산맥이 있고, 한강과 하구에서 만나는 예성강(례성강)과 임진강 사이에 있어서 거의 ""과 같은 지리적 위상을 지녔다. # 지도 수비하기 상당히 좋은 곳이지만, 방어력이 더 좋은 평양도 털리는 판국이었으므로, 전란이 있을 때마다 단골로 털리는 신세였다.

교통 측면에서는 경의선 철도가 지나며, 분단에 따라 개성역이 사실상 평부선[4]의 종점이 되었다. 개성역 외에 손하역이 있다. 또한 개성은 개성평양간 고속도로의 종점이다. 신의주서울, 목포로 가는 1번 국도, 개성을 출발하여 옹진으로 가는 50번 국도가 지난다.

3. 역사

3.1. 후기 신라시대

경덕왕때 지명의 한화로 송악군, 개주현이라고 불렀다. 이 개주현이 고려시대 개경 전체를, 송악군이 왕성만를 가르키는 뜻이 되면서 상하가 뒤집힌 게 개성이란 이름의 시작. 후삼국시대 후고구려 초기에 잠깐 수도였고 이것이 개성의 전성기의 시작. 궁예는 한때 철원으로 천도했지만 왕건쿠데타로 도읍은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다.

3.2. 고려시대

고려 시대에는 왕조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개경(開京)이라고도 불렸다. 인구는 당시 약 10만 호 정도로 추정하는 경우도 많은데, 변수가 많지만 한 호당 5명으로 치는 일반적인 계산법을 따르면 현재 개성의 인구를 능가할 지도 모른다.

대몽항쟁(몽골의 침략) 때 강화도(강도)로 피난간 38년을 제외하면 446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주요건축물인 만월대는 왕건 즉위 직후인 919년(2600칸 왕궁)에 지어졌으며, 여요전쟁으로 파천 당시 신나게 털린 이후에 전후 강감찬 장군의 건의로 1029년(현종 20년)에 외성(外城)인 라성(羅城)이 축성 되었다. 가도가 장정 24만명과 기술자 8천여명과 현종 즉위년부터 20년간 쌓았으며, 현종 당시 성안의 관아 및 민가들은 5부(동, 서, 남, 북, 중) 35방 344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광종 11년에 칭제건원하면서 잠시 황도로 불리기도 했다. # 개경의 당시 모습

개성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구획되었기 때문에 질서정연한 정(井)자형 도시와는 기본적으로 큰 차가 있어 당나라의 장안성, 신라금성, 발해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 시대헤이안쿄와 같이 질서정연한 형태의 도시구조가 아닌 풍수지리적인 자연스러운 도시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북송의 수도 역시 운하로 둘러싸인 카이펑이었으니 중세 수운에 걸맞는 수도라고 할만하다. 다만 후대의 한성이나 송의 카이펑과는 달리 수도 인접 지역에 큰 강이 없었던게 당대에도 약점으로 지목되고 있었던듯.[5]

여러 전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때의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개성 남대문, 선죽교, 만월대터, 공민왕릉, 박연폭포, 송악산 등. 고려인삼, 화문석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화도로 이주한 개성사람들이 이런 문화를 이었다고 한다. 개성 남대문 외에도 내성에는 동대문, 동소문, 서소문, 북소문, 진언문 등 6개의 성문이 더 있었는데 문루는 대개 없어지고 남대문만 1954년에 복원 한 모습대로 남아 있다.

3.3. 조선시대

조선 건국 직후에는 수도의 위치를 유지했으나, 태조 이성계는 곧 수도를 남쪽의 한양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때 나성 안쪽에 다시 내성(1391~1393, 반월성)을 쌓았다. 정종 시대에 일시적으로 개성으로 복귀했으며, 개성 시내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이 한양으로 이전한 뒤로는 개성은 정치적으론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된다.[6]

조선 말기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들의 기행문에 의하면 개성 사람들은 그 때까지도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를 싫어하였다고 한다. 개성에는 본래부터 고려의 관료와 지지층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왕조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전하고 그 풍조가 500년 뒤에도 내려온 것일 수도 있고, 또 수도의 지위를 빼앗긴 것이 개성 사람들의 자존심에 큰 타격이 된 것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500년 동안이나 싫어한다는 것도 대단하다. 심지어 개성 사람들은 서울(한양)에 가는 것을 서울에 내려간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평양에도 내려간다고 할려나?[7]

이성계가 돼지띠였으므로[8], 돼지를 잡으면서 성계육 무학대사, 노린것인가! 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 난 은 이쌀(李쌀)이라고 부르고, 개성에서 난 쌀은 왕쌀(王쌀)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개성의 유명음식 중 하나인 조랭이 떡국은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고 해서 조랭이 떡국이다. 다른 떡국 떡과 달리, 가늘게 뽑은 뒤 손으로 작게 두 덩어리를 떼어내어 둥글게 만든 뒤에 비틀어 이어 붙인다. 조선시대에 대놓고 이성계를 욕할 수는 없으니까, 설날 떡을 빚으며 이성계의 주리를 트는 것(...)으로 원한을 달랬다. 하지만 정작 개성에서는 설날에 만두를 먹었다. 조랭이 떡국은 만둣국에 곁가지로 들어갔을 뿐이다. 아라사에서는 이성계가 개성 주민들의 주리를 틉니다!

조선왕조 초기에 개성에는 미신이 횡행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산을 돌아다니며 미신을 숭배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마 왕조와 수도를 박탈당하고,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도 조선왕조 치하에서는 억압당하자 일종의 노미 상태에 빠져 신흥종교가 유행한 듯하다. 학문적으로는 서경덕을 비롯한 북인의 거점이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그나마의 기반도 날아갔다. 근데 사실 서경덕계 북인은 북인 중에도 이미 소수파였다. [9] 게다가 서경덕은 기론을 주장했는데, 북인의 주류인 조식리론을 주장했다. 콩가루네)

그와는 별개로 서경덕, 황진이, 연폭포가 '송도 3절'로 유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절(絶)을 '절개'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이 글자에는 '빼어나다'라는 뜻도 있다.

3.4. 일제강점기

# 1930년에 분리된 개성부(구 개성군 읍내시가지역) 지도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일제 때 이 도시에 있던 일본인 상점이 1곳뿐이었다고 하니….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상업도시여서 그런지 일본인들도 진출하려고 애썼지만 서비스고 가격이고 뭐고 무조건 개성 사람의 가게만 쓰는지라서 그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오오.

기반자체가 없으니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도량기구는 일본인만 취급하게 했지만 그마저 개성 외부로 떠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서써서 결국은 도량가게라도 기반을 다지게 하려던 게 실패했다는 일화도 있을정도.[10] 그래서 당대의 개성은 일본인 인구비중이 2%(1944년)에 불과해, 일본인 인구비중이 가장 적었던 도시(府)였다.[11]

1930년 개성군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되고,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은 개풍군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당시 인구 7만2천, 1944년 당시 인구 7만6천으로 전국 10대 도시, 전국 15대 도시에 들어갔다. 이 이야기는 개성의 입지를 나타내는 거지만, 거꾸로 말하면 1940년대 시작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개성의 인구가 당시 크게 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3.5. 광복 이후

1945년 해방 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는 38선 이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미치는 도시가 되었다.[12] 서로 적대하는 체제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상 개성의 주민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은 것(사실상 줄어 들은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13]

게다가 개성 바로 북쪽에 있는 악산은 38선 이북이었고 덕분에 38선 이남의 방어진지와 개성 시가지가 다 내려다 보이므로 대한민국이 방어하기 어려운 곳 중 하나로 선정될 지경이었다. 참고로 개성 외에도 연백 평야옹진반도 일대도 전면전시 일단 철수하는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게다가 이 결정은 당시 이 지역을 지키던 제1보병사단의 건의에 따른 것이며, 그 전에는 현실을 망각한 채 병력과 장비도 안주고 1개 사단에게 적이 고지대에서 빤히 쳐다볼 수 있고 38선 후방에 평야와 바다가 펼쳐진 총합 100km의 전선을 담당하라는 어이없는 명령만 있던 상태였다.

당장 한국전쟁 이전에도 개성은 송악산에 있는 북한의 때문에 무진장 두들겨맞는 도시였다(…). 게다가 1949년에는 북한군이 개성 시가지를 포위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국지전에서는 보기 힘든 사단급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육탄10용사 사건도 이때 벌어진 것.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여기 출신의 이성득 의원이 당선되었다. 민선 개성시장을 지냈으나, 임기를 마친 직후 한국전쟁이 벌어져 전쟁중에는 전라북도 지사(1951~52)를 지내야했다. 또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 유학으로 유명한 신문만화가, 삽화가였고[14]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김동성 화백이 2대 국회의원이었는데, 당선 직후 피난을 해야했고 이후로 1954년까지 명목상의 임기만을 지냈다.

여담으로 해방 이후에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된 박물관이 전국에 몇 개가 있었다. 본관은 서울, 분관은 부여, 공주, 대구, 평양, 개성에 있었다. 그런데 38선이 그인 후에 북한은 평양 쪽만 소유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개성 지역이 북한에 너무 가까워 불안한 나머지 개성 박물관에 있던 상당량의 문화재를 열차에 실어 서울로 옮겼고 본격 한국판 국립고궁박물원 나중에 북한에 개성을 점령했을 때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물론 옮기는 도중에도 북한의 도발은 수시로 벌어졌고, 유물들을 기차에 싣고 있는데 역 앞 광장에 야포탄이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현재 남한 지역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들이 (간송미술관의 매병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 때 옮긴 것이다.

3.5.1. 6.25 전쟁

결국 6.25 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군 제6사단이 비밀리에 철도를 수선한 후 열차에 탑승하여 돌격하는 바람에 함락되었다(…)는 떡밥이 있어 논쟁중이다. 다음 두 링크 참조 함락설반박.[15]

그 후에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잠시 탈환되었다가 1.4 후퇴 때 다시 북한에게 넘어간 후 휴전협정이 벌어지던 판문점은 개성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 한국군은 이 이상 북진할 수 없었고(북한 측에서 의도했다는 설이 있다), 결국 휴전선이 개성 남쪽을 지나는 바람에 현재는 북한 영토가 되었다.아아 지못미... 반면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원산 이남까지 밀고 가기 위해 일단 고성군의 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전쟁 초기보다 동부 전선이 상당히 올라가자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UN군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전과 같이 개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을 것이지만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며, 싸워서 쟁취한 강원도 북부 지역이 다시 북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는 개성, 연백, 옹진의 영유권을 휴전 이후 꽤 오랫동안 주장했다.[16] 정부차원에서 1957년정도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궐기대회를 조직하거나 항의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17] 함락 이후에도 경기도청에서도 임시로 개성시청을 두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18] 참고로 한국전쟁 직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옹진군, 연백군의 국회의원들은 1953년 휴전 이후 자신들의 지역구를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임기와 직책, 지역구를 다음 총선이 있는 1954년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

3.6. 북한 치하의 개성

일제강점기만 해도 개성은 그래도 전국 10위, 남북한 5위~6위권 도시[19]안에 들어있었고, 북한 편입 이후에도 사실상 도청소재지급(우리로 치면 광역시) 도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함흥, 청진, 남포)에 비해 80년대 이후 인구 성장이 정체되었고, 개성특급시로 장풍군 등을 분리시킨 이후로는 단천시, 개천시, 사리원시[20] 등의 도시에 밀려 2008년 현재는 북한에서도 8~9위권이 되었다. (남한으로 치면 순위 외일 것이다. 안습.)

결국 북한치하에서 개성의 인구는 딱 북한의 평균 인구증가율(60년간 3~4배) 만큼만 증가한 셈이다. 순위가 떨어진 이유로는 북한 도시들이 죄다 30만명 선에서 고만고만(...) 해서 순위가 밀리기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21] 단, 장풍군의 인구를 더하면 개성권역의 인구는 37.7만명 선인데, 이렇게 되면 역시 인구가 행정개편으로 반토막난 남포(36.7만명)보다 많아 북한 제4의 도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증가가 더딘 것은 분명하므로 향후에는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3.6.1. 개성직할시 - 북한 치하의 경기도

휴전을 하면서 경기도도 강원도처럼 남북으로 잘렸는데 상당부분이 북쪽으로 잘린 강원도에 비해 경기도는 거진 대부분을 남한이 먹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북한 경기도의 대부분은 개성근처인데 북한의 김씨왕조는 숫제 북한 경기도를 아예 개성으로 싹 묶어버렸다. 그래서 북한 경기도는 그냥 개성 하나다. 다만 일제시대 때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던 일부 지역은 강원도 철원군으로 편입시켰다.

전쟁중인 1951년부터 개풍군을 폐지하고 "개성지구"로 만들었으며, 1955년에는 북한이 점령한 경기도의 나머지 지역인 장풍군, 문군을 편입시켜 개성직할시(1957년 6월)로 만들어버렸고, 1960년에는 강원도와 황해북도에서 추가로 확장하였다.

이후로는 부침이 있었다. 예컨데 개성직할시의 리즈시절인 1972년에는 인구 32만으로 당시 북한 4대 도시(평양, 함흥, 청진 다음)였던 적도 있었다. 함흥은 1960년에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1970년에 강등되었으므로, 진정 리즈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80년대 잠깐 개성시로 격하되었으며, 이때 인구가 1/3토막(10~11만명)이 났다(...) 다시 1980년대 중반 이후 복귀하여 1993년 당시 33.4만명으로 그래도 이때만 해도 북한 5위권이었으니 북한의 주요 도시라 할만 했다. 그러나...

3.6.2. 개성특급시 - 개성공단과 개성관광

2003년 개성특급시로 강등되면서 판문군이 폐지되고, 개풍군과 장풍군(長豊郡)이 분리되어 나가 황해북도로 편입되었다. 이로서 인구가 일부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UN 조사단을 통한 북한 인구 센서스에서 개풍군의 인구는 없으며, 장풍군의 인구는 6만9천명이다. 장풍 역시 순서에서 개성의 바로 아래에 있는 등으로 보아, 개성의 인구에 개풍의 인구가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개성공단 덕분에 개성주민들은 평양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잘사는 편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상당한 특혜를 누렸기도 했지만.) 2003년 당시 개성특급시 일부와 구 판문군 일부를 합쳐, 개성공업지구를 신설했으니 여기에 개성공단이 있다. 항목 참조. 2000년 김정일정몽헌 현대그룹 회장(대아산)의 합의로 정해져 2003년 6월 기공, 2006년 완공되었다.

대아산편으로 개성시내관광(물론 제한된 장소만)을 하기도 했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후로 금강산과 함께 중단되었다.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남북관계 악화와 함께 매우 지지부진해졌다.

2013년에 이곳에 존재하는 개성의 성곽과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사, 왕건릉과 공민왕릉 등 고려 왕릉들이 개성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3.7. 통일 한국의 개성?

현 서울 수도권과 가깝고, 개성 자체가 원래 경기도 지역이었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는 황해도에 잔류하기보다는 종전대로 경기도로 재편입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통일된 이후 남한과 북한 지역을 별개의 경제 구역으로 둘 가능성이 높기[22] 때문에 편의상 계속 황해도 지역권에 묶어 놓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어차피 통일이라는 가정적 상황에서 또 다시 개성을 어떻게 할지를 가정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일각에서는 파주철원, 고양 등과 함께 통일 한국의 수도로 삼자는 떡밥이 있으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는 미지수. 소설가 복거일이 자신의 세계관에서 통일한국의 수도(연방제 하의 명목상 수도 -> 진정한 수도)로 개성을 그린 적은 있다.

다만 남북 화합차원의 상징적 차원[23]을 이유로 만약 서울 이외에 다른 곳을 통일수도로 선정한다면, 통일수도가 될 확률이 다른 지역보다는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다른 도시들의 수도 떡밥이 일부 지자체 정치인, 개인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과 달리 20년 전(1994년)부터 대통령자문위원회의 건의#나 오자복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1997년)도 개성 수도론을 주장했던 이력이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이런 논의들이 종북이라며 여당이나 보수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 주장은 드물게 되었지만.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도 서울특별시장 시절부터 개성 수도론을 거론하면서 행정수도 이전(세종시)에 반대했던 적이 있었다. 대통령 퇴임 당시의 인터뷰에 따르면, 서울평양 사이에 있다는 것, 유지라서 돈이 들지 않는 것, 인천국제공항 가까이에 있다는 것 역시 장점이라는 것을 거론하였다.#

물론, 서울과 평양 사이에 있으나 위의 거리에서 보듯 서울에 두 배 가까우며, 서울과 평양의 진짜 중점은 황해북도 평산군으로 좀더 북쪽이다. 인구가 남한이 두 배 많으니까 게중심 확정

통일이 된 뒤 통일 한국의 수도로 개성이 될지 안 될지 확실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통일 이후에는 수도권과 하나가 되거나 수도권의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서서 북한 지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할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더구나 남한에서 장기간 개성 지역에 투자를 많이 했으므로, 인프라도 평양이나 라선을 제외한 북한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잘 갖추어진 편이다. 다만, 개성시에 있는 고려 시대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발에는 제한이 있으므로 개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개발은 유적지가 몰려 있는 개성시내가 아니라 그 옆 개풍군 지역을 개발하여 통일 한국의 수도로 삼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개성시에는 공항이 없으므로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을 이용하게 될 가능성이 큰 편인데 김포국제공항제선 노선 취항에 제약이 걸려 있으므로 인천국제공항이 실질적인 관문의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공항은 활주로 용량이 허용하는 한 한 데 뭉쳐 허브가 될수록 좋기도 하고.

4. 인문

4.1. 개성상인(송상)

아예 조선왕조에 벼슬하는 것도 싫어했는지, 조선왕조 내내 개성은 양반 관료보다는 상인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서울한강한성의 시전을 본거지로 한 경강(京江)상인들과 양대 상인 세력으로 대립했다. 덕분에 개성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대신 상업의 거점으로 남게 되었다. 서경덕같은 문사가 없는건 아니었다.

개성상인들이 얼마나 지독했는 지는 개성에서 나고 자란 분들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독한 상인들은 일부러 배가 고파도 음식을 덜 먹을 요량으로 쉬어 버린 떡만 값싸게 사서 쉰떡으로 요기를 때우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쉰떡을 먹으면 값이 쌀 뿐 아니라 배가 아파서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어 돈이 두 배로 절약되곤 했다니...... 약값은? 그리고 개성에선 거름으로 쓴다며 각 가정의 를 돈주고 수거해 가곤 했는데, 가끔 물을 타서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찍어서 맛을 보고 사갔다고 한다. 조선의 유태인들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4.2. 풍속

분단되기 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전통적인 식문화가 매우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전통 사회에서 식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선 산물이 풍부하고 풍류 문화가 잘 발달해야 하는데, 개성 또한 발달된 상업을 바탕으로 이러한 기반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데 고려의 궁중 음식이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개성 음식 중 유명한 것으로는 개성 쌈김치, 조랭이떡국, 개성편수, 개성약과 그리고 성계육 등이 있다. 개성(및 그 이북지역)에선 설날만두를 먹었다. 본래 이남지역에서는 만두를 먹지 않다가 개성 요리가 남하하면서 만두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개성 사람들에게는 개성이 강한 특이한 풍속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우선 개성 사람들은 매우 폐쇄적으로 다른 지역에 나가 사는 것을 꺼리고, 다른 지역에서 개성에 와서 사는 사람도 꺼렸다. 제주도? 심지어 바깥으로 시집장가를 가도 언젠가는 반드시 개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교토급의 보수성!

하지만 위에서 보듯 결과적으로 이런 인문적 풍토와 지리적 배경(삼면이 물), 역사적 배경(접경지역)이 도시를 확고한 "섬"으로 만들었으며, 결국 도시의 위상 역시 떨어진 셈이 되었다. 개성공단으로 새로운 전기가 되었으나 이것 역시 2010년대 들어 지지부진하다.

4.3. 명승지

  • 만월대 - 옛 고려 왕궁.
  • 남대문 -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내성(內城)의 남대문이기 때문이다. 개성나성의 남쪽 문은 고남문(古南門).
  • 관덕정 - 자남산에 있는 정자.
  • 성균관 - 조선시대 이후로는 향교이고, 간판만 성균관일 뿐이었다.
  • 개성유수영 - 고려성균관 부지 내로 건물 이전.
  • 양서원 - 정몽주를 제사지내는 서원.
  • 선죽교 -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곳으로 유명한 곳.
  • 충사 - 선죽교 옆에 있으며 정몽주의 충절을 기념하는 비각.
  • 목청전 - 태조 이성계의 옛집.
  • 경덕궁 터 - 태조 이성계의 옛집으로, 개경으로 잠시 환도했을 당시 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터만 남았다.
  • 화사 - 송악산 기슭의 절.
  • 보제사

수천 채에 달하는 옛 한옥들이 남아 있다. 통일 이후에도 경주부여처럼 개발제한 크리를 먹을 가능성이 높은 도시다. 교외에는 왕건릉, 흥왕사지, 대흥산성과 박연폭포 등의 명승고적들이 많다. 2013년에 개성 성곽, 개성 남문,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왕릉, 7왕릉, 명릉, 공민왕릉의 12개 유적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평양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북한의 2번째 세계유산.


5. 교육기관

1950년 당시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개성중학교[24][25], 개성여자중학교, 송도중학교, 호수돈여학교, 정화여학교, 개성사범학교, 개성상업학교가 있었다.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송도국민학교, 명덕국민학교, 만월국민학교[26], 선죽국민학교, 동현국민학교, 중경국민학교, 남산국민학교 등이 있었다.

6.25전쟁 이후 일부 교육기관들은 남한으로 내려와 다시 문을 열기도 했다. 대전의 호수돈여자고등학교도 개성시에 있던 것이었으며, 인천의 송도고등학교 역시 한영서원에서 출발했던 유서깊은 개성지역의 교육기관이었다. 또 서울의 정화여상, 정화여중 또한 개성 정화여학교가 그 전신이다. 심지어 경인교육대학교 역시 원래 송도사범학교에서 출범했으니 짧은 시간이나마 대한민국에 소속되어서 그런지 개성의 흔적은 우리 주변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Wikimapia에 보면 대한민국 시절까지 존재하던 옛 학교들이나 흔적들을 더욱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6. 하위 행정구역 (1950년 당시)

1950년 당시 기준 17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수창동(壽昌洞) : 이름은 고려의 별궁이자 조선 초기에는 조선의 궁궐로도 쓰였던 수창궁에서 유래히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대화정(大和町)이라 불렸다. 시청을 비롯해 관공서가 밀집해 있었으며, 개성 제일의 번화가였다.
  • 동흥동(東興洞)
  • 서흥동(西興洞)
  • 남안동(南安洞)
  • 북안동(北安洞)
  • 선죽동(善竹洞) :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가 있는 곳. 동네 이름도 선죽교에서 따왔다.
  • 자남동(子男洞)
  • 용산동(龍山洞)
  • 관훈동(冠訓洞)
  • 동현동(銅峴洞)
  • 손하동(孫河洞)
  • 고려동(高麗洞) : 이름 그대로 고려에서 따온 동네 이름.
  • 만월동(滿月洞) : 고려의 정궁인 만월대가 있는 곳. 동네 이름도 만월대에서 따왔다.
  • 태평동(太平洞) : 개성역 소재지.
  • 사직동(社稷洞)
  • 운학동(雲鶴洞)
  • 덕암동(德巖洞)

이북 5도청에서는 북부, 서부, 남부, 동부 4명의 동장을 임명하고 있다.

8. 외부링크

개성 송도의 옛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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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한민국의 로마자 표기법에 의하면 Gaeseong
  • [2] 松이 소나무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로서 수도를 의미하는 서울(솔)의 음차였다고 보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 항목 참조.
  • [3] 원래는 동쪽은 장단군, 서, 남, 북쪽은 개풍군. 1960~70년대 장단군이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파주시, 연천군에 임시 편입되었기 때문에 개성시와 파주시가 일단은 맞붙어 있게 되었다.
  • [4] 남한에 남은 서울역~도라산역 구간을 제외한 경의선의 북한 구간을 평양역을 기점으로 반으로 나누어 북쪽을 평의선, 남쪽을 평부선으로 나눈 것이다. 평양역~부산역이라는 의미로 서울역을 지나가는 흔한 중간역 1로 치는 것이다.
  • [5] 예성강, 임진강이 동서로 지나기는 하나 시가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반면 한양은 위의 두 하천보다 넓은 한강이 지척에 위치하여 수운에서는 유리했다.
  • [6] 그래도 전 왕조의 수도였던 만큼, 현재의 광역시급인 유수부를 두었다. 참고로 조선 4유수부는 개성, 강화, 광주(경기도), 수원.
  • [7] 여담이지만, "내려간다"느니 "하행선"이라는 표현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현대의 한국은 분단된 상황이며, 남한으로 한정하면 서울이 거의 최북단 끝 지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려간다고 하면 자연히 서울에서 남쪽인 삼남지방(호서, 호남, 영남)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 뿐이다. 이게 다 북쪽의 그 반국가단체 때문이다
  • [8] 1335년생, 그러니까 1995년으로부터 660년 전 태생이다.
  • [9] 있어봐야 허난설헌허균의 아버지 허엽근데 이분도 이황이랑 공동 제자네?, 이산해, 멀리는 허준이 분은 아예 중인이네? 의술만 배웠네?정도.
  • [10] 참고로 당시 개성의 경제력은 웬만한 일본 도시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 [11] 참고로 1944년 당시 타 도시의 일본인 인구비중은 예를 들어보면 경성 16%, 부산 19%, 광주 11%, 대구 10%, 진주 6%, 평양 9%, 나진 26%였다.
  • [12] 구역 상으로는 송악산의 남쪽 사면의 북쪽 일부가 북측에 속했지만 북측의 행정상 개성시가 설치되지는 않았다. 후술하지만 그곳에는 북한군이 주둔하여 남한을 무진장 괴롭혔다.
  • [13] 1948년 당시 인구는 인구 87,962명, 1949년 당시 인구는 8만9천이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인구가 더 적었던 목포시(11만)나 전주시(10만), 마산시(9만)보다도 인구가 작았다. 결국 남한에서도 7대 도시에서 남한 10대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 [14] comic을 (아마도 일본을 거쳐서였겠지만) '만화'라고 번역한게 1923년 이 분이 최초라고 여겨지고 있다!
  • [15] 철도 수송설은 한국 전쟁 서적중 가장 유명한 데이비드 햄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도 소개되었다. 또한 저명한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톨랜드의 서적에서는 거의 정설로 쓰여져 있다.
  • [16] 그건 이북 5도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 [17] 휴전 직후 신문기사에서 개성시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이런 기사이다.
  • [18] 물론 현재도 이북 5도 위원회에서는 북한 치하의 모든 도·시·군·읍·면·동의 장(長)을 계속 임명하고 있다.
  • [19] 원산보다 적고 남포와 비슷했다
  • [20] 황해북도 도청소재지. 2008년 현재 인구가 거의 동일하다.
  • [21] 평양, 함흥, 청진을 제외하고는 10여개 도시가 모두 27~36만명선.
  • [22] 이건 연방제와는 다르니 주의. 대한민국 내 전문가들 대다수는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북한 정권을 존치시킨 상태로 통일하려는 꼼수)에도 당연히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남한 주도로 통일된 뒤 남한과 북한으로 구성된 연방제를 도입하는 것도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경우가 많다. 또 남한과 북한이라는 경계선을 무시하고 그냥 전국의 광역자치단체별로 고도의 자치권을 주는 형태의 연방제로 전환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애초에 그게 가능하면 벌써 남한은 연방국가로 이행됐을 것이다. 통일 전의 서독이 건국 당시부터 연방국가였던 것과 마찬가지... 그러나 남한 위주로 통일된 뒤 단일국가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을 장기간 다른 경제 구역으로 나눠놓는 형태로 가는 방안은 많이 논의되고 있어 도입 가능성이 크다. 남북한의 경제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갑자기 합치면 남북 주민 모두 손해를 보기 때문에 갈라놓는 것이다.
  • [23] 서울에 버금가는 고려 500년 수도의 역사성, 인지도, 개성공단이나 개성관광 같은 남북협력 시도의 현장, 한때나마 대한민국의 영토였던 점 등.
  • [24] 1951년까지는 고등학교가 없었고 중학교 6년제였다.
  • [25] 부산에도 같은 명칭을 가진 학교가 있다. 다만 이쪽은 부산상업고등학교에서 분리된 학교이며, 한자가 다르다.(開城과 開成)
  • [26] 1907년 개교하여 개성 최고(最古)의 초등학교이다. 전원주도 이 곳 출신.
  • [27] 실향민이다.
  • [28] 정확히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출신. 원래 개성군이었다가 1930년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되면서, 개성군의 잔여지역이 개풍군으로 개칭되었다.
  • [29] 집안 대대로 개성 출신이라고 한다.
  • [30] 정작 본인은 이름 때문에 딴 곳 홍보를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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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4 20: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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