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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last modified: 2015-04-07 15:21:07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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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ɔ) Ilya Repin from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방식
4. 사례
4.1. 유명인
4.2. 독일
4.3. 오스트리아
4.4. 일본
4.5. 프랑스
4.6. 한국
4.7. 현대?
5. 창작물 속의 결투
5.1. 은하영웅전설의 은하제국

決鬪, duel

1. 개요

서양에서 양자간 합의로 입회자(second)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이는 싸움.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역시 유럽인들은 전투종족이라고 깔 때마다 언급되는 단골 메뉴 중 하나지만, 희한하게 오히려 주로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잘 배운 계층의 양반이었다. 보통사람들은 먹고 사느라고 바뻐서 이런 뻘짓 할 시간이 없었다.

2. 역사

역사적으로 결투는 중세의 결투 재판[2], 아니면 기독교화 이전 바이킹 사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된다. 결투 재판은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이후에도 결투 재판을 행하는 지역이 많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3세기 이후부터는 성직자노인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대리인을 내세운 결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여성끼리의 결투도 있었다. 이때도 일반적으로 검과 총을 사용했지만, 단 한 건 모래를 채운 스타킹[3]으로 결투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19세기에는 보통 총이 사용되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냉병기보다 총이 다루기 쉬운 편인 만큼, 수련에 따른 실력차가 비교적 적어져서 공정성이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결투용 총(duelling pistols)을 따로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근현대로 넘어가면서 결투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영국,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반을 전후로 결투가 거의 사라졌고, 설령 하더라도 가볍게 취급했다. 입회자로 지목된 사람이 결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대포라든가, 망치, 돼지 비료같이 이상한 무기를 골라주는 경우도 있었다. 잠깐만 대포랑 망치는 흉기인데? 대포를 준다고 했지 포탄도 준다고는 안했음. 들고 휘둘러 볼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결투를 하려고 했다가 무기를 콜레라에 걸린 소시지생화학 무기로 골라주는 바람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3. 방식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여길 때 장갑으로 얼굴을 치는 것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이것은 중세시대 기사 서임식에서 기사가 되는 청년의 얼굴을 치는 종교적 의식에서 유래했다고 추측한다. 기사처럼 결투에 응하라는 의미. 혹자는 장갑으로 얼굴을 때리는 것만으로는 결투 성립이 안 되고, 장갑을 던져야 비로소 결투 신청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단 근대화되면서 장갑을 내던지는 것보다는 초청장(?)에 가까운 결투장을 만들어 보내서 결투 방식, 규칙, 입회인 등을 결정했다. 결투시 무기이나 중 무엇을 쓸것인가 혹은 규칙은 언제까지, 즉 피를 흘릴 때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결투를 할 것인가, 따위를 합의했다. 중세에서 멀어질수록 진짜로 죽을 때까지 결투하는 비율이 줄어들었다. 반면 중세에서 좀 격식있는 결투가 되면, 양자 모두 결투장에 나올때 관과 그 위에 덮을 천을 준비해와야 했다. 둘 중 한쪽이 관에 실려나가야 하니까.

결투는 모욕한 사람이나 모욕당한 사람 모두 같은 신분이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사가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 모욕당했을 때는 결투를 할 필요없이 하인을 시켜서 패면(...) 되었다. 영국 신사들은 하인까지 갈 것도 없이 직접 팔 걷어붙이고 복싱으로 때려잡았다. 중세 시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농노-자유민 사이의 결투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결투를 위해 영주가 일시적으로 농노를 자유민으로 신분 상승을 시켜주는 경우는 있었다. 또 양쪽 모두가 결투를 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성립이 되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 모욕당했을 경우는 보통 대리인을 시켜서 결투를 하지만, 굳이 여성 본인이 결투를 하고 싶다고 할 경우에는 남자에게 몇 가지 페널티를 주고 결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례로 구덩이를 파놓고 남자는 들어가 머리와 팔만 내놓고 싸운다든가.

결투는 새벽에 하는 경우가 보통[4]이고 아침이나 오후의 결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양쪽이 모두 신뢰하는 입회자로 하여금 장소나 결투할 무기를 선택하게 한다.

총의 경우 새벽녘 입회자가 지정한 공터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다가 입회자가 사격 표시를 하면 등을 돌리고 발사한다. 일단 처음 한 발 발사 후, 아무리 사소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모욕당한 측이 자존심이 회복되었다고 만족하면 결투가 끝나지만, 반대로 어느 한쪽이 결투를 계속하지 못할 정도로 다칠 때까지(아니면 죽을 때까지!) 계속할 수도 있었다. 다만 3발 이상 교환했는데도 결투를 계속하겠다고 하는 것은 야만적으로 보았다. 피를 보는 것보다는 모욕당한 쪽이 명예를 충족하고, 희생 없이 끝내는 것을 최우선의 결투로 쳤다.말이야 쉽지 결투까지 신청할 정도의 모욕을 당했다 싶으면 결국 피를 봐야 끝나는게 대부분이었다.

검으로 결투를 할 경우에는 근대의 경우 입회자가 칼을 땅에 꽂는 것과 손수건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을 알린다. 중세의 결투는 그냥 평복으로 하는 경우와 갑주를 입고 하는 경우 모두 있는데, 특이하게 전신 타이츠 비슷한 결투복을 입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옷깃이나 머리카락이 붙잡히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한 복장으로, 생사결로서의 결투를 진지하게 파고든 사례. 무구는 양자 합의 하에 대등한 무장을 가지고 하는데, 양손검, 검과 방패, 검과 곤봉 등 양쪽이 같은 무장을 지닌다. 단검 소지 여부도 합의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싸우다가 드잡이질 간격에 들어가면 단검으로 찔러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기 때문. 갑주 대결은 당연히 갑주를 소지할만한 계급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편이다.

일각에서는 결투의 존재로 인해서, 서양에서 소위 티켓으로 불리는 예절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형법에서 말하는 위법성 조각 사유 중 정당방위의 유래가 이 결투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미국에서 말하는 정당방위의 허용범위가 한국보다 넓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희박하다. 미국의 경우에는 총기가 흔한 사회 문화와 현실적인 치안 문제와 관련이 더 깊다.

결투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 박게 되기는 한다. 가혹행위 하면서 인격 모욕을 주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사람이 죽는 것에 빗대면 좀 그렇지만.

4. 사례

근대에서는 결투가 으로 금지되었지만 신사가 모욕당했을 때 모욕을 씻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흔히 결투를 권장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결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5]

결투로 죽어도 살인죄는 적용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 프랑스의 수학자 갈루아, 러시아 작가 레르몬토프(Lermontov 1814-1841)등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유럽미국에서 결투로 인한 인명사고는 18세기 중반까지도 흔한 것이었다.

4.1. 유명인

유명한 결투는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단테스의 결투,러시아 시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와 니콜라이 마르티노프 소령의 결투, 영국의 시인 벤 존슨(육상선수 아님)과 요크 공작의 결투, 영국 수상 소 피트와 조지 티어니의 결투, 앤드류 잭슨과 찰스 디킨슨(작가 찰스 디킨스가 아니라 유명한 듀얼리스트)의 결투, 웰링턴 장군의 결투 등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도 변호사 시절 제임스 실즈와 결투를 할 뻔 했으나 입회인들이 말려서 무산으로 끝났고, 러시아 차르[6]도 귀족에게서 결투 신청을 받고 결투한 적이 있다고 한다. 미국 전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결투에서 아들을 잃고 자기도 결투에서 죽었다. 결투 상대는 현직 부통령 에런 버! 버는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정치가 경력은 쫑났다.

마크 트웨인의 경우 자서전에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웃기는(...) 결투에 얽힌 일화를 남긴 바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신문 편집장으로 일하던 시기, 그 지역에서는 언론인들끼리 서로를 사설이나 논평으로 모욕하는 해괴한 풍습이 유행했고, 마크 트웨인 역시 이 유행에 발맞추어 경쟁 신문사의 편집장을 약올리는 사설을 자신이 편집하는 신문에 게제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상대 편집장은 이 모욕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고, 화끈한 결투극을 기대하고 있던 친구들은 상대가 별 반응이 없자 시무룩해졌지만(...) 마크 트웨인은 신이 나서 어그로성 논평을 계속 계제했다. 키워 본능 쩐다 진짜 그리고...결국 참다 못한 상대 편집장이 마크 트웨인에게 결투장을 보내왔다.(!) 결투장을 받아든 마크 트웨인은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지고 급격히 시무룩해졌지만, 친구들은 그때부터 신나서 마크 트웨인의 결투준비를 도와주겠다고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도 친구라고!

    결국 결투 당일 이른 새벽, 마크 트웨인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유언장을 작성하고(유언장을 작성하면서 특히 기분이 심하게 나빠졌다고...) 친구들과 함께 결투장소 근처의 숲에 나가서 사격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마크 트웨인의 사격 실력이 정말 형편없었다는 것. 표적삼아 세워둔 널판지도 못 맞출 정도였다고.(...) 게다가 그 널판지는 결투 상대보다 더 넓었는데.(...) 그런데, 이젠 다 틀렸다 싶을 무렵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트웨인과 함께 왔던 친구 하나가 나뭇가지 위에 작은 새 한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 총으로 쏴서 정확하게 머리를 맞춰서 잡은 것. 그리고, 결투 상대의 친구 중 한명이 마크 트웨인쪽의 동정을 살피러 왔다가 총에 맞아서 떨어진 새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누가 한 거냐고 묻자, 정작 새를 잡은 친구는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클레멘스(마크 트웨인의 본명)가 했지" 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상대측 입회자가 자기는 마크 트웨인이 헛간 문짝도 못 맞출 줄 알았다며(사실 그랬다) 얼마나 잘 맞추냐고 묻자, 여섯번 쏴서 다섯번 정도 맞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친구를 사귀자 결국,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측 입회자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서둘러 돌아가고, 잠시 후 다른 친구가 쪽지를 가져왔다. 쪽지의 내용은 무슨 조건이든 다 들어줄테니 결투를 중단하자는 것. 물론 마크 트웨인은 아무 조건 없이 수락했다.(...)

    결국 결투가 중단되고 집에 돌아간 마크 트웨인은 새로운 쪽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마크 트웨인의 친구인 주지사가 보낸 쪽지였다. 또 이 쪽지의 내용은 새로 입법된 결투금지법이 안 지켜지는 데 빡친 치안판사가 지역 유명인사끼리 결투를 벌였다는 이야기에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얼른 튀라는 것이었다.(...) 날 밝으면 보안관들을 보낼거고, 그 때 집이 비어있으면 형식적인 가택수색이나 하고 돌아오겠지만, 집에 머무르고 있으면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하고 절대 안 봐주고 징역 2년 먹일 거라는 것. 마크 트웨인은 당연히 튀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자신은 결투나 그걸 하는 사람들, 하라고 남을 충동질하는 사람들 전부를 극히 증오하게 되었으며, 특히 남에게 결투 해 보라고 충동질하는 사람들은 으슥한 데로 끌고가서 쏴 죽여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앰브로스 비어스는 소설 <왼발 가운데 세 발가락>이란 작품에서 신사도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단검가지고 싸우는 걸 남부신사라고 하던 19세기 중순 미국 남부 일부에서 벌어진 대결을 두고 살인 시도를 신사도라고 개소리로 포장한다고 깠다.

자코모 카사노바 역시 결투에 관한 일화를 남긴 바 있다. 폴란드-러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당시, 폴란드의 귀족 신사와 사소한 시비끝에 결투를 벌인 것. 재미있는 점은, 이 신사가 정말 신사적인 신사였다는 것이다. 카사노바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카사노바를 패 죽이려고 드는 자기 친구들을 제지하며 "내가 죽거나 의식을 잃으면 더 이상 제지할 수 없을테니 얼른 튀어라, 지금 수중에 돈은 있냐, 혹시 숙소에 지갑을 두고 왔으면 내 지갑을 가져가라"고 챙겨줬다고 한다. 천만 다행히도 그 신사는 죽지 않았고, 카사노바 역시 그 결투때문에 법적으로 위험한 처지가 되어 얼른 도망쳐야 했지만... 대귀족 가문의 신사와 결투를 벌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평판이 높아졌다. 당대 결투란 동등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신분이 다른 사람과 벌이는 것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대귀족과 결투했으니 카사노바 역시 귀족 신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4.2. 독일

독일에서는 19세기에 대학에서 결투 클럽이 크게 유행했으며, 독일의 유명인사들도 이 결투 클럽을 많이 거쳐갔다. 가능한 치명상을 입지 않기 위해 눈과 몸통에는 보호장구를 착용했으나, 얼굴에는 아무 보호조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켰기 때문에 얼굴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상처가 나도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임석한 의사나 의과대학생들이 즉석에서 알콜로 소독하고 대충 꿰메는 정도의 치료만 했으므로 흉터가 크게 남았는데, 이게 다른 학생들이나 아가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히려 상처 없는 인간이 고자취급을 당하고 얼굴의 상처가 멋의 상징이 되는 바람에 결투를 할 용기는 없지만 여자는 꼬시고 싶은(...) 학생들이 일부러 얼굴에 칼로 상처를 냈다가 발각되어 망신을 산 사례도 있다. 결투로 인한 전형적인 상처는 오토 스콜체니 항목의 사진 참조.

원래는 펜싱검이 결투의 무기였으나 보호장구를 장착하고도 사망사고가 자주 터진데다 결정적으로 1839년에 예나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펜싱검의 사용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후 무기가 세이버로 바뀌었으며, 결투는 대학생의 상징이자 특권으로서 계속 존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반유대주의가 범람하였을 때 우파 학생조직이 내세운 반유대주의 실천조치 중 하나가 "유대인 학생으로부터 결투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일 정도였다.

현재도 독일 대학에 결투 클럽은 남아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많이 온건해졌다고 한다. 막스 베버도 대학시절 결투클럽에서 활동했고 그 덕택에 소시적의 비사교적인 성격이 많이 고쳐졌다고 회상한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의 본문중에 나오는 결투 클럽은 여기서 창안한 듯.

여담으로, 현대적인 명예훼손모욕죄의 시초가 독일이라는 설이 있는데, 상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결투가 잦아져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모욕을 법으로 다스리기 시작했고, 이는 독일의 법제를 받아들인 일본을 통해 한국과 대만에도 전해지게 된다. [7]

4.3.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도 윗 나라 독일과 비슷하게,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결투가 성행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무슨 일이 있건 간지와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오스트리아 신사들이 결투를 옹호했고, 군대에서도 결투가 장교 간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권장되었다고 한다.

이 풍조는 스페인에서 온 어떤 여행객이 결투가 만연하는 오스트리아의 풍조에 경악하여 사회운동을 벌여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결국 의회에서 결투를 불법으로 못박았다. 하지만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투에 연관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황제가 친히 사면장을 베풀었다고 한다.

4.4. 일본

일본에서도 결투와 유사한 문화가 존재하긴 하지만 서양식 결투와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하기는 다른 점이 많다. 결투장을 보내서 신청하는 결투도 있었지만, 칼집에서 을 뽑는 것 자체가 결투신청으로 여겨졌으며 상대방이 거기에 응해서 칼을 뽑는 것으로 결투가 성립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듯.

에도 시대에는 결투를 금지하는 법령이 발표되어 개인적인 결투가 일절 금지되었으며[8], 결투를 벌인 자는 이기고 진 것에 관계없이 쌍방 모두를 할복형에 처할 정도로 그 처벌 또한 무거웠다. 이 때문에 양쪽이 상처를 입고 끝나면 그냥 병이나 우연하게 생긴 부상으로 입을 맞추고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현행법상으로도 아직 결투죄가 남아있는데, 바로 메이지 22년(1889년) 12월 30일 법률 제34호 『결투에 관한 건』이다. 무려 1889년 제정되고 지금까지 그대로인 법률이라서 한자는 전부 구자체로 되어 있고 히라가나는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으며, 문법과 용어도 옛날 방식이다. 그리고 징역과 벌금의 무거움이 현재와의 괴리가 엄청나다... 결투도응죄(결투 신청하거나 받아들이는 것)는 징역 6월 이상 2년 이하라는 중형임에도 벌금은 10엔 이상 100엔 이하에 불과하다. 결투죄는 3년 이상 5년 이하 20엔 이상 200엔 이하, 결투살상죄는 각각 형법의 살인죄와 상해죄로 처단, 결투입회·장소대공(貸供)죄(결투를 구경하거나 사정을 알면서 장소를 빌려주거나 제공하는 등 방조하는 것)는 1월 이상 1년 이하 5엔 이상 50엔 이하, 비훼죄(결투에 응하지 않았다고 상대를 비방하는 것)는 형법의 명예훼손죄로 논한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벌금은 다 부가하는 거다. 징역과 벌금 둘 중 하나만 하는 게 아니라 둘 다 해야 한다. 하지만 형법시행령에서 징역에 벌금을 부과하는 것은 폐지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푼돈을 아낄 수 있다. 마지막 제6조에는 형법이랑 비교해서 형량이 더 센 걸 적용한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리 봐도 이 법이 더 세 보인다. 구경만 해도 최소 징역 1월인데 ㄷㄷㄷ

이 법은 당연히 사문화된 법 취급을 받아왔지만, 최근 들어서 동네 양아치나 폭주족들에게 이 법을 적용할 수 있다획기적인 발상을 한 경찰관들이 등장하여 양아치들이 '결투한답시고' 벌이는 싸움에다가 이 법을 적용하여 적극적으로 체포하고 있다고 한다.게임서 1:1 PVP하면 체포할기세 ㅎㄷㄷ

4.5.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결투자들이 기구에 타고 결투를 벌인 적도 있다고 한다. 리슐리외가 귀족들의 사적 결투를 금지해서 악당취급을 받기도 했다.[9] 앙시앵 레짐 밀기까지도 결투가 귀족 사회에서 만연했는데, 한 육군 보병연대소위가 결투를 거절한 뒤부터 동료 장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소속 연대를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근데에도 이는 이어져서, 프랑스의 수학자였던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1832년 5월 30일 결투에서 총에 맞고 21세의 나이에 요절하기도 했다.

4.6. 한국

한국에는 서양이나 일본에서와 같이 무력을 숭상하는 관습이 없어서 결투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었다. 무신정권 시대라면 혹 모르지만 이때도 결투보다는 암살이나 내전의 상황이었고. 그대신 신하가 왕한테 키배를 뜰 정도로 붓으로 하는 결투가 발달했다.

다만 현대에 와서 인터넷의 보급률이 높아진 대한민국에서는 현피병림픽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나타났다. 사실 이것도 진짜 결투를 하러 만나는가 하면 어찌저찌 잘 해결돼서 밥먹고 헤어지는 일도 있고, 키배(현피)라는 것도 한국에서만 있는게 아니라서 애매하다. 스타로 결투신청을 하는 경우가 간간히 있고, 온라인 게임을 한다면 캐삭빵을 벌이기도 한다.

4.7. 현대?

알게모르게 현대에도 결투가 남아있다. 방식이 스포츠로 바뀌었을뿐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우베 볼이 자신의 영화를 깠다는 이유로 권투로 결투를 신청했는데 결과는 권투를 좀 했었던 우베 볼이 이겼다. 그 이후 그의 작품을 깔때는 권투로 결투신청을 조심해서 작품을 평가해야 됐다고 한다. 걍 결투 신청 자체를 뭔 병신짓이냐며 씹고 계속 까는 사람들도 많다.

2012년에 벌어진 결투 이벤트로 무한도전결투특집 하하 VS 홍철이 있다. 입회자는 무려 3450명!

5. 창작물 속의 결투

5.1. 은하영웅전설의 은하제국

은하영웅전설 외전 OVA판 애니메이션 '결투자' 편에서 머스킷 권총세이버로 싸우는 결투장면을 볼 수 있다. 이쪽 세계관이 중세 독일의 귀족과 같은 형식이라 가능했던 것. 징징스러운 결투 재판과 대리인 결투를 감상할 수 있다.

권총 결투의 경우, 몸에는 상처를 입히지 않고 상대편의 권총에 총알을 명중시켜 땅에 떨어트리는 것을 최고로 쳐주고 그 다음으로 손>어깨, 다리 순으로 점수를 쳐준다. 몸통을 맞히거나 상대가 사망하면 이겨도 캐병신 새키라며 매장당한다. 사실상 스포츠화된 시합이다.

참고로 은하제국의 현역 군인 사이에는 사적인 결투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라도 계급이 다르면 결투 불가. 허용하면 하극상 쩌는 막장이 될테니 오스카 폰 로이엔탈은 여자 문제로 하루에 세 차례의 결투(권총, 칼, 권총)를 해서 세 상대 전원을 병원으로 보내버린 전과가 있고, 그 대가로 네 사람 모두 1계급 강등을 당했다. 네 명 모두 계급이 대위(한명만 중위)로 계급도 비슷한 데다 신분도 모두 국기사로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가벼운 처분이 내린 것으로, 1계급 강등과 전방으로의 전출 외에는 어떤 처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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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현재 대한민국에는 결투 자체를 처벌하는 법률은 없다. 보통 합의 하에 특정 조건을 걸고 싸운 경우 목숨이 오가지 않는 이상 형법 제24조(피해자의 승낙 : 처분할 수 있는 자의 승낙에 의하여 그 법익을 훼손한 행위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벌하지 아니한다.)에 따라 벌하지 아니한다.
  • [2] 원고와 피고, 혹은 그 대리인이 무기를 들고 싸워서 이기는 쪽이 무죄, 지는쪽이 유죄. 강한자가 옳다가 아니라 신께서 옳은 자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개념이다.
  • [3] 사실상 양말에 모래를 채운 흉기로서 흔히 언급되는 사제 무기 중 하나다. 소위 말하는 블랙잭도 이 계통 무기.
  • [4] 앰브로스 비어스도 단편 소설 <왼발 셋째 발가락>이란 작품에선 신사도라는 이름으로 새벽에 결투벌이는 것을 깠다. 젊은 신사들이 무뚝뚝하게 앉아있던 중년 신사에게 당신은 여기 있을 자격이 없어보이는데? 라는 말 한마디 한 것에 "나도 신사이니 가만히 둘 수 없다. 결투다..."라고 하여 입회인이 보는 가운데 새벽에 유령의 집이라고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은 집에선 칼로 대결을 벌이는 묘사가 나온다.
  • [5] 겁스에서 캐릭터의 성격을 표현하는 특성 중 '명예원칙'이란 단점이 있다. 그 단점에 지정된 상황에서 지정된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단점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무시당하거나 본인이 배알이 꼴리는 걸 나타낸 단점인데, 이 '명예원칙' 중 '신사도'의 내용 중에 "모욕은 사과 또는 결투로만 지울 수 있습니다." 라는 게 있다.
  • [6] 어느 차르인지 확인 바람.
  • [7] 박경신, 진실유포죄. P.51
  • [8] 에도시대에는 무사들이 함부로 칼을 쓰는 것을 금하는 규율이 많았다. 특히나 성내에서는 영주의 허락없이 칼을 뽑는 것만으로도 대역죄인이 되고 일가친척 모두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 [9] 실제로 삼총사 초창기의 상황이 결투가 막 금지된 프랑스의 모습이다. 그래서 결투하고 도주하고, 다시 결투하고 잡으러와서 도주하고의 반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투가 꿋꿋하게 이어지는게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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