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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last modified: 2015-04-12 11:13:57 by Contributors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戒安佚而存敬畏 以享皇極之福 聖子神孫 繼繼承承 傳于千萬世矣) - 정도전,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Contents

1. 개요
2. 역사와 복원
3. 크기에 관한 논란
4. 주요 건축
4.1. 궁성
4.2. 외조
4.2.1. 정전 권역
4.2.2. 편전 권역
4.2.3. 궐내각사 권역
4.3. 내조
4.3.1. 침전 권역
4.3.2. 연침 권역
4.3.3. 동궁 권역
4.3.4. 내전 권역
4.3.5. 빈전 권역
4.3.6. 건청궁 권역
4.4. 박물관
5. 야간 개장
6. 기타

1. 개요

© 螺钉 (cc-by-sa-3.0) from
경복궁 전경도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로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소재.

조선시대의 정궐(법궁)로, 태조 이성계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인데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년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잔치 끝에 천자에게 바치는 노래였는데 정도전은 연회 중 대취한 태조 이성계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붙인 것도 모두 정도전이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도 정도전이 붙인 이름.

임진왜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왕이 자주 머물지는 않았지만[1]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중요한 궁궐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금지로 묶인 채 200여 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흥선 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지어진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과의 모습은 다소 달랐던 것으로 추측된다.[2]

많지야 않겠지만 '경북궁'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묘하게도 경복궁의 별칭은 북궐(北闕)이다(창덕궁 - 창경궁은 동궐, 경희궁은 서궐로 불렸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3호선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광화문 안쪽이다. 그리고 3호선 안국역이나 5호선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거리라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로이다.(동명도 세종로다.)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거리는 자동차도로인 현 세종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그 유명한 인사동 거리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

2. 역사와 복원

무학대사가 궁궐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과 왕십리가 합류하는 부근으로 터를 잡으려다가 지나가던 노인이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충격받은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10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고, 처음 터가 왕십리[3]가 되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라는 일화로 유명하다. 땅값을 올리기 위한 노인의 처절한 몸부림

또한 풍수를 고려해서 지은 것으로 유명한데,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고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지자 무학대사가 두 가지 예언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첫 번째 예언은... 그리고 두 번째 예언은... 흠좀무

여담으로 한양성을 쌓을 때 어떤 바위를 성 안에 넣느냐 마냐로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싸운 적이 있다 한다. 풍수지리상 그 바위가 성 안에 들어가면 유교가 흥하고 바깥에 나오면 불교가 흥한다는 것이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워낙 강하여 결정을 못 내리던 중 눈이 바위를 성곽 안에 포함하는 둘레를 그리며 쌓였고 무학대사는 불교가 이번 왕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하여 체념하였고 눈 울타리, 즉 설울이 훗날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풍수지리에 대한 위의 이야기는 야사로써,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한없이 높다. 일단 정도전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풍수지리를 잡술, 미신이라고 엄청 싫어했다. 그리고, 서울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신라수도였던 서라벌[4]이 변화해서 탄생한 단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국왕이 머무는 궁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은 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다시 임진왜란 때 한양이 일본군에게 함락당하며 불에 타 모조리 소실된다. 종래에는 선조가 파천하자 성난 군중들이 불을 질렀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한양 함락 당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나오면서 일본군이 태운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5]

왜란 후 선조때 월산대군의 사저를 경운궁[* 현재 덕수궁으로 개칭하고 임시 처소로 쓰다가 광해군은 경복궁의 재건을 포기하고 창덕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새로 경희궁[6]과 인경궁[7]을 지었고, 200년 후 고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 건물들은 대부분 흥선대원군 시절에 재건한 것이다[8]

고종 당시의 경복궁 조감도

조선 말기 급변하는 역사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였으나, 당백전 발행 등의 무리한 정책으로 인해 결국 실각했다. 개항 후에는 전등을 설치하고,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을 초빙해 건천궁 내에 있던 관문각을 2층 크기의 양관으로 바꿨다.[9] 그리고 일본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건청궁 안 곤녕합)도 경복궁이다. 경술국치 직후 일본 국기가 근정전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경술국치 항목 참조.

일제에 의해 충격과 공포의 모습으로 훼손된 경복궁. 천하의 개쌍놈들

한일강제병합 후에는 식민지의 사기를 꺾고 실용성도 따질 겸 일본 총독부의 만행으로 인해 가장 훼손된 정도가 큰 궁궐이기도 하다.[10] 일제는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고[11], 전각들을 훼손하거나 통째로 일본으로 밀반출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 청사 및 총독 관저의 경비를 맡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이 잔재가 남아서 수도경비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소속 30경비단 병력[12]이 경복궁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1996년 30경비단이 33경비단과 통폐합해 제1경비단을 창설하고 부대를 이전하면서 해결하였다.

광복 이후 경복궁을 다시 복원하려는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무산되거나 혹은 체계적이지 않게 복원되었다.

우선, 엄연히 따진다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 또한 경복궁의 뒷뜰에 해당되기 때문에[13] 완전 복원을 위해서는 청와대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그럴리는 없잖아? 우린 안될꺼야 아마 이참에 청와대를 옮기면 되지 뭐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경복궁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정확한 고증과 철저한 준비 없이 시도하였다가 광화문에 콘크리트칠을 해놓는 등 뭔가 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현판도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에, 위치조차 잘못되었다. 일제가 시멘트를 바르면서 습기가 차 제습기를 돌리면서 그 진동으로 현재 균열이 진행중인 석굴암을 군사정권 시절에도 그대로 보수하고 방치했듯이 전반적인 문화적 교양 없이 탁상행정으로 결정해버린 폐해가 드러난 사건. 사실 도로 짓겠다고 위치를 옮겨버린 독립문 같은 사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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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권은 경복궁 복원에 별 욕심이 없었는지 광화문만 옮겨 짓고 궁궐 부지 안에 불교양식을 듬뿍 바른 민속박물관 같은 건물을 지어올리는 엉뚱한 정책만 반복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에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연화교·칠보교의 건축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건축 당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지어진 것이다.) 앞으로의 복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박물관 건물을 세운건 둘째로 치더라도, 숭유억불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나라의 궁궐에, 어울리지도 않게 불교 건축을 크게 올렸으니 이건 뭐...

근정전 앞을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가로막고, 그 건물을 또 콘크리트 광화문이 가로막고 있는 괴랄한 광경
김영삼 정부에서 총독부 건물을 없애기 전까지는 이런 모습이었다.

광화문 복원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은 뜨거운 감자였는데, 광화문이 후에 다시 복원될 때 그 현판의 보존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결국 박정희 현판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됐다. 현판은 당시 것을 복원 하기로 하고 복원은 광화문 유리원판 사진을 바탕으로 고종 당시 영건도감 제조로 광화문 현판 서사관이 된 임태영이 쓴 현판을 디지털 복원 하기로 하였다.

결국 민주화 이후 들어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복원 공사중이다. 때문에 경복궁 권역 어딘가는 항상 공사 중.

1990년 당시 경복궁 내의 전각은 36동만 남았다. 고종 당시 전각의 7% 수준으로 말그대로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공터가 돼버렸다. 궁내 잔디 밭은 대부분 건물터다.

2009년도 기준 경복궁 조감도[14] 다시 불러온 고종 당시의 경복궁 조감도

1990년 시작한 20년 간의 복원사업에 목재 800톤, 석재 5,000톤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복원한 전각은 89동. 그나마 이것도 일부인데, 태조 시절에는 종묘까지 건립하면서 1년 정도가 걸렸고 대원군때는 한참 만들다 화재가 발생하여 그만두자는 여론이 일었으나 당백전까지 발행하며 10년여 만에 완공했지만 결국 대원군이 실각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10년 광화문 복원 후 경복궁 내의 전각은 모두 125동. 고종 중건 당시 전각 500여 동의 25% 수준이다.

1990년 ~ 1995년 : 강녕전 및 침전 권역 복원
1995년 ~ 1999년 : 자선당 및 동궁 권역 복원
1996년 ~ 2001년 : 흥례문 권역 복원
1997년 ~ 2005년 : 태원전 권역 복원
2001년 ~ 2010년 : 광화문 및 건천궁 권역 복원

2010년 이후 다시 2030년 까지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을 시행 중이다. 이를 위해 선 경복궁 내 민속박물관과 고궁박물관, 주차장, 그리고 청와대를 철거 해야 한다. 예산이 가장 큰 문제. 100%는 사실상 불가능한게, 예전에 건물이 있던 자리에 나무들이 자라버린 경우도 있고, 새 건물이 들어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청와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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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이후 경복궁의 부분 복원이 완료될 때의 모습
그림에 보이는 회색 바닥들은 건물 기초와 초석만 복원하는 곳이다

2011년 12월 8일 문화재청은 경복궁의 사정전, 수정전, 향원정을 창덕궁의 금천교, 부용정, 낙선재와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그리고 2011년 10월 3일 2차 복원 계획이 시작되었다. 총 6단계로 이루어졌으며 2030년에 완료될 예정으로 대장금의 무대로 알려진 소주방을 시작으로 마방이 있던 자리인 고궁박물관을 철거하는 것으로 2차 복원 사업이 끝난다.

3. 크기에 관한 논란

중국한국사이에 관광객이 오가면서 나온 논란으로, 자금성에 비하면 궁궐이 초라하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경복궁이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 크기다 라고 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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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말이다. 일단 부지 면적을 비교하면 60%[15]정도이기 때문에 작다고 비하될 정도가 아니다.화장실 한 칸에 월세사는 사람인가보다.

물론, 건물의 규모나 화려함, 격식을 비교해보면 자금성이 앞선다. 자금성은 면적내에서도 건물이 빼곡한데다가 화려한 멋이 있는반면 경복궁은 중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안정을 우선했던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하였고, 주제(周制)라고 불리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반화된 궁궐의 법식에서 제후국의 형식을 채택했기에 황제국의 형식을 택한 중국과는 차이가 있다.[16] 하지만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수십년 먼저 지어졌기에 열화된 모방이 아니며, 조선은 개국 당시부터 검소함을 지향하는 왕도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에 궁궐의 장식이나 규모에서도 검소함을 지향했고 균형미와 조화로움도 추구했기 때문에 단순한 면적과 전각의 수로만 비교하기 어렵다.

또한 경복궁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한국 고유의 궁궐 건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만의 개성으로 나타나는 단청의 색과 문양, 창덕궁만큼은 아니지만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 등은 북악산과 이루는 조화를 통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로 따질 수 없는 고유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명확하며 그 완성도도 수준급이다. 단순히 규모로만 아름다움을 따지기에는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세세한 아름다움이 매우 많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인 것이다. 일본의 토 고쇼히메지성 같은 건축물이 자금성보다 규모가 작다고 덜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크기로 나타낼 수 만은 없다.

여담으로, 자금성 내에 경복궁이라는 이름의 전각이 실제로 존재한다(…). 한자까지 똑같다. OTL 위치는 자금성 내 동북쪽 가장자리. 관련 포스팅

4. 주요 건축

4.1. 궁성

사진 설명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 처음 지어질 때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했다가 1425년(세종 7) 광화문으로 개칭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4년(고종 1) 중건했으나 일제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이후 복원공사에 들어가 1968년 12월 11일 준공했지만 원위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라는 한계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이전·복원공사에 착수해 2010년 8월 15일 준공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광화문 항목 참조 바람.
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왕족·외척·상궁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 12월 25일 상량했다.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 10월 25일 상량했다. 1926년 4월 27일 궁성 주변에 부설된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무너졌다가 1975년 원위치에서 40m 내려간 남쪽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다.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 태조가 창건할 때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15) 궁성의 사대문을 맞추기 위해 건설했다. 다만 풍수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주 닫혀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신무문 바깥으로 경복궁의 후원과 연결되었지만 청와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경호 문제로 비공개되었다가 2007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에 개방했다.
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로서는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전각. 7단으로 이루어진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1867년(고종 4) 지어졌으나 1924년 도로를 확장할 때 궁장을 헐면서 길 한복판에 섬처럼 놓이게 되었다. 광화문과 남쪽 궁장을 복원하면서 일제 때 헐려나간 궁장을 동십자각과 연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교통 문제 때문인지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서쪽 맞은편에 있던 서십자각은 일제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철거되었는데, 이쪽은 복원하지 않고 남쪽 궁장을 서쪽 궁장과 맞바로 연결해버렸다.

4.2. 외조

4.2.1. 정전 권역

사진 설명
흥례문(興禮門)
광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1395년(태조 4) 지어졌으며 1426년(세종 8) 홍례문(弘禮門)이라 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휘하여 흥례문으로 개칭했다. 1916년 일제조선총독부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다가 85년 뒤인 2001년 10월 26일 복원되었다.
유화문(維和門)
근정문에 들어서기 전 그 서쪽에 있으며, 궐내각사로 통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유화문도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1916년에 철거되었다가 2001년 복원되었다.
근정문(勤政門)
근정전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1867년(고종 4) 중건되었으며 일곽의 행각과 함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여기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근정전의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다포식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며,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조각의 발톱이 7개인 것이 특징이다. 1395년(태조 4) 건설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 중건했다. 일제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4.2.2. 편전 권역

사진 설명
사정전(思政殿)
왕의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편전으로 사용하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부의 바닥이 마루였기 때문에 주로 여름에 사용했다. 1395년(태조 4) 지어진 뒤 1553년(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모두 전소되었고, 이후 1867년(고종 4) 중건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각의 사방이 벽 없이 창과 문으로만 된 점이 특징이며, 내부의 어좌 위에는 운룡도가 있다.
만춘전(萬春殿)
사정전의 동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봄에 사용했다. 전각이 세워진 뒤 불탔다가 중건되는 과정은 사정전과 동일하나 만춘전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은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궁궐의 온돌 시설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었지만 1988년 원위치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천추전(千秋殿)
사정전의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만춘전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다. 1452년(문종 2) 5월 14일 문종이 37세를 일기로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4.2.3. 궐내각사 권역

사진 설명
수정전(修政殿)
경복궁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전각이다. 월대 위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된 꽤 큰 건물로, 궁궐에 부속된 관청이 밀집한 궐내각사 권역의 중심이었다. 세종대왕 때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고종 4) 중건했고, 고종 때는 군국기무처와 내각이 이곳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2백여 칸의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만 남아있다. 2차 복원정비사업의 2단계가 진행될 2013~2018년에 주변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4.3. 내조

4.3.1. 침전 권역

사진 설명
강녕전(康寧殿)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며, 1553년(명종 8)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희정당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경복궁에 있을 때는 없던 용마루가 생겼다.
연생전(延生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오른쪽에 동소침으로 지어졌으며, 서쪽에 있는 서소침인 경성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왼쪽 서소침으로 지어졌으며, 동쪽에 있는 동소침인 연생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응지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연길당(延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응지당(膺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교태전(交泰殿)
정면 9칸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부속 전각으로 동쪽에는 원길헌(元吉軒), 서쪽에는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는 아미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누마루인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아미산(峨嵋山)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세 단의 화계(花階)로 교태전의 뒷편에 있다. 여기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흠경각(欽敬閣)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1438년(세종 20) 세종대왕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관측기구가 있었으나 1553년(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함원전(咸元殿)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소주방(燒廚房)
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으며,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상궁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4.3.2. 연침 권역

사진 설명
자경전(慈慶殿)
원래 이 자리에는 자미당(紫薇堂)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고종 25) 중건했다. 동쪽 정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자경전이고, 여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燕樓)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실이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꽃담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서울특별시가 '서울 10대 대표색'을 선정하면서 이 꽃담의 색깔을 '꽃담황토색'으로 명명해 포함시켰다. 서울시내의 택시 중 꽃담황토색으로 도색된 차량이 종종 보이는데,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주 보니까 익숙해져서 친근해진 모양.#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이다. 전돌을 쌓아 만든 담장 벽면의 중앙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거북·사슴·불로초 등의 십장생과 그밖의 각종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배치해 자경전의 주인인 대왕대비 조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과 합쳐서 지정된 게 아니라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된 것.

4.3.3. 동궁 권역

사진 설명
자선당(資善堂)
1427년(세종 9) 세자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궁(東宮)으로 세자였던 문종단종을 얻고 아내 현덕왕후 권씨를 잃은 곳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어 순종이 세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지냈다. 아관파천 이후 주인을 잃었으며 1914년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뜯어간 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불타 기단만 남은 채 방치된 유구가 199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원래는 반환된 유구를 복원에 사용하려 했지만 훼손이 심각해 건청궁 뒤쪽에 갖다놓았는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999년 복원한 자선당도 원래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비현각(丕顯閣)
1427년(세종 9) 세자의 공부방 겸 집무실로 지어진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전각이다. 자선당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었지만 일제강점기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9년 복원했다.

4.3.4. 내전 권역

사진 설명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아미산의 북쪽에는 흥복전(興福殿), 광원당(廣元堂), 다경각(多慶閣),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永熏堂) 등의 여러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던 것을 2006년 함화당과 집경당을 연결하는 복도각과 주변의 행각만 복원해 2009년 1월 24일 일반에 개방했다. 1890년(고종 27)에 지은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곳이자 궁중의 서화를 수장하던 공간이었다.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조각을 새겼다고 하나 1867년(고종 4)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0000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회루 항목 참조 바람.

4.3.5. 빈전 권역

사진 설명
태원전(泰元殿)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 지은 전각으로, 태조 이성계어진을 봉안했다. 남쪽에는 건용문(建庸門)과 경안문(景安門)이 있고, 영사재(永思齋)가 태원전 오른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공묵재(恭默齋)가 있다. 태원전 서북쪽에는 간의당(簡儀堂)이 있고, 동서 양쪽에는 각각 세답방(洗踏房)이 있으며,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다. 명성황후 민씨의 빈전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이 헐렸다가 2005년 복원되었다.

4.3.6. 건청궁 권역

사진 설명
장안당(長安堂)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뒷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왼쪽은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은 협길당(協吉堂)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창덕궁에 있었으나 1888년(고종 25)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물을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국풍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서재, 어진 봉안처, 외국 사절 접견소 등으로 사용했다.
향원정(香遠亭)
건청궁 남쪽 연못의 섬에 있는 2층의 누각.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져 있다.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국전[17] 출품작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였다.

4.4. 박물관

사진 설명
국립고궁박물관
(國立故宮博物館,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홈페이지. 전신은 1908년 설립된 제실박물관이다. 1909년 순종이 일반에 공개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간 뒤 1945년 광복 후부터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운영되었지만 공간이 협소해 전시와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칭하고 경복궁 내의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옮겨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 관련 유물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자격루의 실물크기 복원모형과 창덕궁에 있던 순종 부부의 어차가 이곳에 있다. 경복궁 전각들은 근대 이전의 나무 건축이라 전기 배선에 노출될 경우 화재의 위험성이 있고 현대적인 난방, 냉방 기구의 설치와 전시시설을 갖추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고궁 박물관은 왕실 유물 전시실로 그대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 건물도 민속박물관에 비하면 겸손하게 궁궐 건축과 어울리는 모습이라 그렇게 튀지도 않는다.
국립민속박물관
(國立民俗博物館,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홈페이지. 전신은 1924년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출범, 남산 구 통감관저에 있었다가 1950년에 국립박물관에 통합되며 자취를 감췄다가 1965년에 '한국민속관'으로 재출범하면서 경복궁 수정전에 자리잡았다가 1975년에 경복궁 구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에 입주하였다가 1993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으며 7,089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대표적인 불교 사찰을 조합해서 만든 기이한 외관 때문에 유교 국가의 정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18] 그냥 무식하게 불교 사찰을 때려 밖은 외관 때문에 민속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에도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위의 불탑들은 어떻게 해야한다.(...)

5. 야간 개장

2010년 G20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615년만에 처음으로 야간의 경복궁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많은 인기를 끌자 문화재청은 매년 상,하반기로 나누어 5일씩 연2회(연간 10일)로 정례화했다. 2013년 하반기부터는 12일씩 연 4회(연간 48일)로 야간 개방을 확대할 예정이다. 개장 시간은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이며, 입장 마감시간은 관람 종료 1시간 전인 9시까지다. 개방 범위는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 근정전, 경회루 권역으로 경복궁 전체 면적의 40%정도이며, 관람 비용은 3000원이다.

시기 일시 관람 인원
2010년 가을 11월 9일 ~ 12일4일 69,753명
2011년 5월 18일 ~ 22일5일 - 72,101명
가을 10월 5일 ~ 9일5일 -
2012년 5월 16일 ~ 20일5일 116,298명 224,581명
가을10월 3일 ~ 7일5일 108,283명
2013년 5월 22일 ~ 5월 26일5일 182,513명
가을 10월 16일 ~ 28일12일 [19] 1500명/일[20]
2014년 겨울 2월 12일 ~ 2월 17일 6일
7월 30일 ~ 8월 11일 13일
여름 - -
가을 - -

해를 거듭할수록 관람인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경복궁 야간개장 행사는 문화재청의 안일한 관리·운영과 미성숙한 시민의식등 많은 문제로 2013년 5월, 공중파 언론에 보도되며 대차게 까였다.

2013년 상반기의 경복궁 야간개장 소식이 알려지자 실시간 인기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며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실시된 온라인예매서비스에 몰려들었고 딱히 인원제한을 두지 않았던 문화재청 예매 시스템은 개장 첫 주말인 5월 25일에만 4만명 이상을 받는등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에 놀란 문화재청은 예매를 긴급 중단하고 인터넷 예매 일 3만명, 현장판매 1만명으로 제한을 걸었지만...개방 첫 토요일인 5월 25일 야간개장 3시간동안4만 5천명여명의 관람객이 입장하며 엄청난 혼잡이 발생했다. 데스월드

엄청난 혼잡뿐만 아니라 낮은 시민의식도 도마에 올랐는데 인터넷 예매가 무색하게 티켓확인이 허술해 한명이 예약한 뒤 가족단위로 우루루루 입장이 하는 행태, 일부 사진가라고 쓰고 민폐라고 읽는 들은 그 혼잡한 와중에 삼각대까지 설치해가며 사진을 찍으며 관람을 방해하기도 했다.[21] 그런데 찍사들은 차라리 양반이다. 뜰에서 돗자리 펴고 앉아 갓 튀긴 맛있는 치킨을 곁들여 소주와 막걸리를 배불러 처마시고는 꾸랴꾸랴 궁 내를 배회하며 아무데나 오줌을 갈겨대는 술꾼들을 보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간개장을 해놓고 관리도 안하는 지 알 수가 없다. 진짜 조금이라도 어둑어둑한데로 가보면 지린내가 진동하면서 어둠속에서 꾸물럭주물럭 몸을 뒤틀며 오줌을 싸고 있는 환장할 인간들을 볼 수 있다. 갓 튀긴 맛있고 바삭한 치킨을 어디서 사서 경복궁 안으로 갖고 들어오냐 하면 광화문 앞 노점에서 사온다. 야간개장이 시작된 이후 광화문 앞에는 온갖 노점이 LPG통을 달고 술과 음식을 파는데 여기서 치킨과 소주를 사서 다이렉트로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광화문도 날려먹어야 정신 차리려나 입장할 때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말리지도 않는다. 물론 궁내에 통제하는 직원들이 있긴 하지만 말려도 꼭 실랑이를 거친다. 치킨을 가득 처문 닭기름이 질질 흐르는 탐욕스런 입으로 우어우웅어우


특히 근정전 주위는 명당자리 취급을 받는다. 평평해서 돗자리도 펴기 좋은데다가 소주 빨기에 풍경도 좋아서 그렇다. 카하 이것이 조선의 풍류일세 게다가 돗자리를 펴고 앉아 갖고 들어온 음식에 술만 마시는 게 아니라 아예 불판에다 삼겹살을 구워 꾸역꾸역 처먹으며 소주를 마시는 인간들도 발견되었다.

다만 노상방뇨는 화장실의 줄이 너무 길어서 어쩔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확실히 수용인원을 훨씬 넘긴 인원이 입장하고 있는 것은 맞다.

사실 모든 문제들은 야간개장을 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문화재청의 잘못이 크다. 티켓 확인과정이 허술했으며, 시간별 입장객 수에 대해서 제대로 통제를 하지 않아 엄청난 혼잡을 야기했고, 음주가무, 노상방뇨들을 단속할 관리요원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 문제들은 개장 초부터 언급되다 전년대비 3배이상 폭증한 2012년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2013년 상반기에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는게 문제다. 오히려 관리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채 무제한 예매시스템과 보도자료들만 내놔 혼잡만 늘려 지옥문을 열었다 그걸 고칠 생각을 안 하는 철밥통들 덕분에 경복궁만 몸살을 앓는 중. 일부 궁덕들은 차라리 몇만원 선으로 가격을 올려버리거나 인원수를 더 제한하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결국 문화재청은 위와 같은 여러 문제들을 방지하고자 2013년 하반기 야간개장부터는 관람지도요원을 증원하고, 입장인원을 일 최대 1,500명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동시에 당초 5일이었던 야간개방기간을 7일 연장하여 12일간 개방하고, 2014년부터는 봄(4월)과 가을(10월) 두 차례 개방에서 겨울(1월)과 여름(7월)으로 확대하여 2계절 총 10일이었던 야간개방기간이 4계절 총 48일로 크게 늘어날 예정이다.

한편 4만여명이 입장해 엄청난 혼잡데스월드이였던 2013년 상반기 야간개장에서 한 고등학생이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놨다가 인파에 밀려 경회루 호수 속으로 카메라가 빠지자 밀친 사람에게 보상을 요구한 사건이 있었다. 이 고등학생은 SLR클럽에 보상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가 경복궁에는 삼각대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공지 때문에 역관광 루트를 타기 시작했다. 거기다 보상 요구글에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카메라라고 했는데 과거 행적에서 중고 구매를 했다는 것이 들통나고, 결과적으로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보상금액을 제시했다는 것까지 들통나 완벽히 역관광당했다. 자세한 글은 여기 참조.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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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 97 한국 스테이지로 등장했다.


2002년 부터 수문장 교대식 재현 행사가 광화문에서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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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24.93 KB)]

2012년 9월 20일에 애플 지도에서 청화대로 강제개명당하는 수모를 겪었다.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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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왕자의 난 이후 경복궁이 재수가 옴붙었다며 창덕궁을 지은 태종이래 주로 창덕궁에서 생활했다. 경복궁은 주요 행사나 사신접대때나 가끔 활용
  • [2] 기록을 봐도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인다.
  • [3] 往十里, 갈 왕(往)를 써서 10리 더 가라는 뜻.
  • [4]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 [5] 전국시대의 각박한 건축에만 익숙했던 일본군 장군들이 경복궁을 보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고니시 휘하의 오오제키의 전기에(전기가 아니란 이야기도 있어 신뢰하긴 힘들다) 따르면'누대가 너무 화려해 눈물을 흘렸다'던가 종군승 제타쿠오타쿠의 조선 일기에서는'여기가 신선인지 인간이 사는 세계인지 구분이 안 간다'던가. 아마도 같은 천수각처럼 실용적 건축에 익숙한 그들에겐 컬쳐쇼크 였던 듯. 그렇게 감동을 받고는 불태워 버렸다면(...). 그러나 전쟁통에 제대로 통제가 안되서 불놀이를 벌이거나 약탈 중 사고 등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닌지라.
  • [6] 인조의 생부 정원대원군의 사저를 뺏어 지었다. 당시엔 경덕궁이었으나 영조떄 경희궁으로 명칭변경
  • [7] 인왕산 자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인조반정 이후 허물고 자재는 다른 궁이나 건물에 사용한다.
  • [8] 애초에 처음 창건된 경복궁은 390칸 정도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였으나 실용적 필요에 의해서 확장이 이루어졌다. 중종 대에 불이나서 일부 전각을 태운 바람에 명종대에 재건을 하고, 다시 태워먹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확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임진왜란 시기에 소실되면서 이후 국왕들도 아쉬워만 하면서 손도 못대던 것을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규모.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400칸이 넘는다. 이건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의 규모가 아무리 크게 봐도 5000칸 정도인 것에 비하면 1.5배 이상의 규모로 재건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확장공사를 겸한 것이다.
  • [9] 현재 관문각이 있던 자리는 빈 터로 남아 있는 상태이며, 을묘사건 당시까지 건재했으며, 설계자였던 사바틴이 관문각에서 사건의 전말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 [10] 우리나라나 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쇠말뚝 주장처럼 풍수지리적으로 기를 누르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일본에 풍수지리가 많이 퍼지지는 않았고, 애초에 인간의 간섭으로 지세를 바꾼다는 관점이 담긴 비보풍수 자체가 한국의 독특한 풍수문화로 꼽힌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혹자의 주장들과는 달리 일본에도 풍수지리 이론의 도입 자체는 있었고, 음양사들의 업무 중 하나이기도 했다.
  • [11] 광복 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문민정부 시절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치며 해체되었다.
  • [12]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 속한 장세동이 지휘한 그 부대이다.
  • [13] 지금의 경복궁은 면적의 일부가 잠식 당했으나 부지의 상당 부분은 보존된 편이다. 경복궁의 권역에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까지 포함되는, 정말 크고 아름다운 궁궐이었다. 하지만 권역의 2/3가 날아간 덕수궁이나 권역이 통째로 사라졌다가 10분의 1 정도만이 복원된 경희궁에 비하면 보존이 잘 된편이다.
  • [14] 경복궁은 항상 복원 공사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저 조감도보다는 훨씬 더 많이 복원되어있다.
  • [15] 자금성의 크기는 동서 760m, 남북 960m로, 넓이가 72만 제곱미터,경복궁은 동서 500m, 남북 700m로, 면적은 43만 2,703 제곱미터 이다.
  • [16] 정전인 태화전으로 가기 위해 다섯개의 문을 지나는 오문삼조인 자금성과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세개의 문을 지나는 삼문삼조인 경복궁의 차이 등이 대표적인 차이이다. 허나 근정전 반자천정의 용 발톱이 7개인 부분도 있는 등 격식을 거스르는 당돌함도 있다.
  • [17] 대한민국 미술 대전. 문화 예술 진흥원이 주관하는 종합 미술 전시-관람 행사로 1982년 이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로 불리기도 했다.
  • [18] 이때문에 용의 눈물, 왕과 비, 명성황후, 뿌리깊은 나무(마지막회에 한함) 등 실제 경복궁에서 촬영된 드라마에는 민속박물관 건물이 그대로 노출 되어서, 조선시대에 20세기 건축물이 목격되는 기괴한 풍경이 연출된다.
  • [19] 10월 22일 제외, 매주 화요일은 휴궁일
  • [20] 13년 가을부터 일일 입장객수 제한을 두었으며, 그에따라 입장객수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않고있다.
  • [21] 경복궁 홈페이지 공지에는 삼각대 반입 금지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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