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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last modified: 2015-04-05 10:44:47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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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역사
3. 건축
3.1. 전통 건축 중 최대의 크기
4. 기타


1. 개요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 정전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국보 제 224호.[1] 만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으로 등장할 만큼 유명한 건물이기도 하다. IMF 당시 해외 어느 일간지에서는 이 경희루가 물에 가라앉은 그림을 기사로 내면서 한국경제 침몰이라는 글귀를 달기도 했다. 현존하는 가장 부피가 큰 전통 건물이기도 하다.

경회루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하루 전날 인터넷을 통해 미리 예약을 해서 지정된 시간에 안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보통은 일주일 전부터 예약이 마감되므로 빨리 예약하는게 좋다.

2. 역사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이 당시의 경회루는 현재의 경회루보다는 크기가 더 작았으나 지금의 경회루보다 더 호화로웠다. 돌기둥마다 용의 형상을 세겼으며 3층 높이의 중층 지붕을 가진 전각이었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되었다. 이후 약 300년 뒤인 고종 4년(1867)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세워졌다. 이 때 경회루의 크기 자체는 더 커졌지만, 단층 지붕으로 바꿔 높이가 낮아지고, 누각을 지탱하는 용조각이 새겼졌던 돌기둥들이 무늬 없는 것들로 바뀌어 세워지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3.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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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의 단면도

경회루의 구조는 전형적인 대량식 구조지만, 1층의 기둥이 전부 돌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특기할만하다. 2층은 외부와 통해있는 외진과 내부의 공간인 내진, 그리고 가장 중심에 있는 중궁 부분으로 구분된다. 각 공간 사이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문을 전부 들어올려 한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외진과 내진 그리고 중궁은 바닥의 높이가 달라 단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자리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어 가장 안쪽으로 갈 수록 높은 지위의 사람의 공간임을 나타낸다. 외진과 내진에는 궁궐 건축 답게 천장을 개판으로 막고 있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은 네모낳고 안쪽 돌기둥은 둥근데 이는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圜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체 기둥은 총 48개로 바깥기둥이 24개 안쪽 기둥이 24개인데 이는 24개절과 24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회루 주위에는 네모난 인공 연못과 두개의 둥근모양의 섬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천원지방을 형상화 한 것이다.

3.1. 전통 건축 중 최대의 크기

근정전의 크기는 정면 30m 에 측면 21m, 높이 22.5m(기단 제외)지만,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34.4m, 측면 28.5m, 높이 21.5m로 현존하는 한국의 단일 목조 건축 중 부피가 가장 크다. (다만 가장 면적이 넒은 건물은 종묘 정전이다.) 칸 수 역시 근정전이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총 25칸인데 반해 경회루는 정면7칸에 측면 5칸 35칸이다. 다만 한 칸의 길이는 건물에 따라 다 다른 만큼 칸 수만 가지고는 건물의 크기를 확실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경회루 근처의 수성전은 정면 10칸에 측면 4칸으로, 무려 40칸이나 되지만 실제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다.

경회루는 이정도 크기가 조선말의 목재 여건상 지을 수 있는 최대의 건물이었다는 추측을 하게 해주는 건물인데, 소모되는 부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른 건물과 차별화된 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팔작지붕의 삼각형 수직벽면인 박공의 비율상 크기가 굉장히 크다. 근정전과 비교해봐도 두 건물의 크기 차이 이상으로 박공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박공의 크기를 늘려 그만큼 박공 아래에 있는 처마지붕의 길이를 줄일려고 했던 것이다. 비가 들이치는 박공은 작을수록 좋은데, 통상의 비율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처마에 쓸 긴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삼림자원이 고갈된 조선말에서는 충분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 쉽게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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