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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last modified: 2015-04-12 03:46:04 by Contributors


한국의 역사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1]
위치현재의 북한 지역과 만주 일대
인구69만 7000호
수도졸본성→국내성동성[2]국내성평양성[3]
정치체제군주정
국가원수大王(太王)
언어고구려어,숙신어,동호어 등
종족족,족,숙신(말갈)족,동호족,(韓)족,(漢)족 등
종교불교,도교,토착신앙 등
존속기간기원전 37년[4]~668년 음력 9월 21일 (705년)
성립 이전부여,한사군,고조선
멸망 이후발해, , 신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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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241.01 KB)]
고구려의 장식에 많이 등장하는 삼족오[6]

목차

1. 개요
2. 국호
3. 고구려의 역사
3.1. 기원
3.2. 건국
3.3. 성립과 발전
3.4. 전성기
3.5. 쇠퇴기
3.6. 중흥과 멸망
3.7. 발해소고구려 그리고 유민들
4. 사회
4.1. 종족
4.2. 인구
4.3. 언어
4.4. 교육
4.5. 경제
4.6. 정치제도
4.6.1. 초기
4.6.2. 후기
4.7. 군사제도
4.8. 형법
4.9. 신분제도
5. 문화
5.1. 미술
5.2. 음악
5.3. 문학
5.4. 건축
5.5. 과학
6. 인물
7. 국력
8. 강역
9. 석문
10. 사료
10.1. 한국
10.2. 일본
10.3. 중국
10.4. 기타
11. 연표
12. 고구려가 남긴 것들
13. 오늘날의 고구려
14. 동북공정
15. 고구려를 소재로 한 작품
16. 하위항목
17. 관련항목




1. 개요

주몽에 의해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기원후 668년에 멸망한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의 고대국가.

기원전에 부여에서 탈출한 일행이 부여 남쪽의 압록강 상류에 정착하여 세웠다. 서쪽에는 강력한 중국의 군현이 버티고 있는 고로쉽사리 뻗어나가지 못하고 크고작은 충돌만 반복하는 대신 동쪽으로 쭉쭉 뻗어나가 현재의 간도 일대와 함경도 일대를 일찍이 장악하고 나중에는 부여까지 복속한다. 4세기 초 미천왕대에 이르러서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현재의 북한 지역을 완전히 장악. 5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후연을 몰아내며 요동까지 장악한다. 또한 백제를 몰아내며 현재의 충청도 중원 일대까지 진출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몰아내며 신라를 반세기동안 속국화한다. 이러한 한반도 남부와의 교류는 훗날 한국사에 고구려가 포함되고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근거가 된다. 아무튼 이러한 고구려의 성장에 자극받은 물길족이 힘을 모아 고구려를 견제하나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에 의해 무너지고, 이는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를 건국하는 기반이 된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한 국가인 만큼 서쪽의 거란족도 통제했으며 중국 바로 옆에 있는 만큼 한나라-북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문화적으로는 중국의 발달된 문물이나 선진 제도를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반면 관직명은 후기로 가면 오히려 탈중국화한다는 사실이다.

2. 국호

한국어고구려(高句麗)[7]
중국어가오리(高麗)[8]
일본어코쿠리(高句麗)[9]
티베트[10]케우리(Ke'u-li)
페르시아[11]모크란(Mokraan)
터키어[12]뵈클리(Bökli)
그리스모클리(mokli)
산스크리트어

희한하게도 동아시아쪽 언어들은 발음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서역쪽 언어들은 '말갈'과 비슷하다. 모크란,뵈클리,모클리의 원음을 '맥구려'로 추정하는게 일반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로 보는게 통설이다. 당나라때 편찬된 <범어잡명>에 의하면 고구려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Mukuri라 하고, 한자로는 무구리(畝俱理)라 명시해놨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모크란,뵈클리,모클리는 고구려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초기의 공신인 마리를 인명이 아니라 부족명으로 보아 이러한 호칭과 통한다는 의견도 보인다. 한 편 막리지의 막리도 이러한 호칭과 같은 계통이고, 광개토왕비의 매구여라는 지명도 같은 계통이라고 한다.

티베트는 서역에 위치했지만 '고구려'와 발음이 비슷한데 이는 티베트인들이 고구려를 케우리라고 불렀다기 보다는 중국어 발음이 티베트에 전해저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의 중국어 발음은 현대 중국어 발음인 가우리가 아니다. 참고로 Baxter-Sagart가 재구성한 발음에 의하면 커카우(cə.kˤaw) 르에(rˤe)다. 이외에도 다른 재구성 방식도 있는데, 중국고대발음은 현대중국어발음과 많이 다르다.

초기에는 국명이 매우 여러가지로 나타나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으로 서사되었는데 주로 고구려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하지만 장수왕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왕망의 듣보잡 흑역사[13]라에서는 왕망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고구려가 무시한 것에 분노해서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불렀다고 하는건데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는 고구려현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麗(려) 자가 나라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리'라고 읽힌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를 고구리, 고려를 고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최초로 음차표기된[14] 단어인 高離(고리)의 離(리)는 음차표기 되었던 전시대 당시에는 rje(례)에 가까운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한서'에서는 '알렉산드리아'가 烏弋山離(아익산리)라고 적혀 있다. ria를 離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래서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단은 고려시대 후기, 조선시대에도 고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한자음은 중국 중고음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이 한자음은 수,당 무렵에 불렀던 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발해학회에서 발표했던 서길수 교수의 高句麗 소리값 연구. 이 연구에 따르면 高句의 소리값은 '고구'가 맞지만 麗의 소리값은 '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려'를 '리' 라고 발음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 까지 '리' 라고 발음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려' 라고 발음한다. 고구려는 한국 발음으로 고구려라고 부르자. '麗'는 대체로 중고음에서는 '려'에 가까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이다. 삼국시대에 무어라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16세기 조선의 훈몽자회에서는 고구려라 발음하고 있다.

발음이야 당연히 현재에 재구하기 힘들지만, 그냥 한자 공식표기는 몇몇 금석문에 남아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원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글자가 떡하니 박혀있고, 요녕성 의현에서 발굴된 불상에는 대고구려라는 명칭이 적혀있다. 이 불상은 아직 시기나 국적 등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게 없는고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이나 망한 후에 대고려도 아니고 대고구려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도 않았을테니 고구려 시기에 쓰인 불상임은 확실해보이고 대고구려라는 민망한 표현을 주변국에서 써줬을리도 없으니 고구려 자국에서 만든 불상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좀더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3. 고구려의 역사

3.1. 기원


고구려의 중요한 제사처였던 국동대혈의 내부모습.#

일반적으로 요하 상류를 중심으로 그 동쪽의 송화강 유역에서 한반도 동부 삼림 일대에 퍼저있던 예인이 부여,옥저로 발전하고 그 서쪽의 맥인은 고구려로 발전한 것으로 파악되나 중국에서 고구려를 얕잡아 일컫는 뉘앙스에서 맥이라 칭한 흔적은 흔히 보이나 고구려인 스스로 맥인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맥이 단순히 북방민족에 대한 비칭이라는 설도 있으나 맥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인식한 기록도 숱하다. 맥족은 초기에는 중국의 북방에 퍼저살다가 점차 요하 유역에 정착한 것으로 파악된다.

좀더 훗날 현도군을 몰아낸 것이 고구려현의 주민들이라는 기록이 있고, 고죽국이라는 국가가 고구려의 기원이라고 설명하는 사서가 존재하는 등, 주몽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 이전의 고구려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많다.
그러나 고죽국-고구려설의 경우 일종의 수나라판 동북공정과도 연결되는데 고구려가 대릉하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고구려 이전에 대릉하 유역에 존재했던 고죽국을 끌어와서 고구려가 중국계 고죽국의 후손이니 수가 고구려를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고죽인들이 고구려를 건설했다면 고죽국은 고구려계 아닌가? 그리고 고구려현의 경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대에 보면 오이와 마리를 시켜 양맥과 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링크 현재는 추가적인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

3.2. 건국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북부여 출신의 주몽(=추모왕)이 졸본을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그의 건국설화는 동한 초엽의 왕충이 지은 《논형》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중국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동명성왕 참조.

3.3.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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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21.32 KB)]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장보병.
고대 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외사서에 나타나는 나라이며, 초기 도읍지는 졸본(광개토대왕릉비에는 忽本.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환런시)의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2대 인 유리왕 때 위나암성에 도읍을 옮겨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안시 퉁거우현)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 장수왕대까지 400여년을 도읍하였다. 다른 삼국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왕 계보에는 의문점이 많으며, 특히 100살도 넘게 산 태조왕의 치세는 여러모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나, 중국사서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기에 무작정 부정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다.[15]

초기의 고구려는 한 및 과 같은 중국 화북의 정권들과 상쟁하면서 성장하였는데, 그 중에는 명림답부와 같이 침략자를 물리친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비류수 전투 관구검의 침입에서 볼 수 있듯, 국토가 철저하게 짓밟히는 일도 벌어졌다. 낙랑·대방과 같은 중국의 군현들이 완전히 고구려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영가의 난 이후 중원이 아수라장이 된 4세기 중엽의 일이었다.

5호16국 시대가 오면서 세력을 급격히 키운 전연(선비족)은 고구려를 대거 침입하여 미천왕의 묘를 파서 시체를 가져가고, 태후와 왕후를 잡아가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이러면서 고구려는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킬 때까지 전연에게 쥐여잡히게 된다. 가까스로 전연이 멸망하자 숨통이 트인 고구려는, 낙랑·대방이 사라지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였던 백제와 격돌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마저도 순탄치 못했다. 선빵은 고구려가 먼저였으나 역관광. 371년에는 국왕인 고국원왕평양까지 쳐들어온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까지 한다(…).

3.4. 전성기


고구려의 전성기 서울 구의동에 세워졌던 보루의 투시도.#
하지만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대에 이르러 다시 국력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백제에 대해 공세로 전환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의 노력이 있었다. 고국양왕의 아들 광개토대왕대에는 급격한 팽창을 하는데, 백제의 아신왕을 굴복시키고, 후연을 관광보냈으며, 신라를 보호국으로 삼았으며, 남부지역에 쳐들어온 를 물리치는 등의 공업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은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져있다.

요서지방의 후연과는 적대적 관계였는데, 광개토대왕 시절 완벽히 발라버려 이후 후연은 몰락하고, 그 지역에 새롭게 생긴 북연의 경우 초기의 왕이 고구려의 망명귀족이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 함락시키고 그 왕인 개로왕을 죽여 일시적으로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북방에서는 유연과의 국경을 획정하고 북연의 잔당을 수습하는 등 남북조의 나라들도 무시하기 힘든 정도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양팔외교가 대표적.) 이후 장수왕의 손자[16] 문자명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이 시기에 마지막 수도가 될 평양으로 천도하여 한반도에 대한 진출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만주에서 물길이 발흥하여 고구려의 속국인 부여를 쓸어버리는등 위력을 과시하고 나제동맹 또한 꽤 견고해저서 고구려의 진출을 막아냈으나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지위를 상실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것 같다.

3.5. 쇠퇴기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정치적 고비를 맞게 된다. 신진귀족 세력을 이용하여 기성귀족들의 귀족합의체를 무너뜨리고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크게 실패하고 엄청난 역풍을 맞는다. 이로 인해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던 황금기는 끝이 나고 귀족들 간의 내전으로 얼룩지게 된다. 《주서》에는 막리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신들이 싸우는 가운데, 왕은 궁궐문을 닫고 칩거하는 사태가 묘사된다든지, 《일본서기》흠명기에는 고구려가 추군(麁群)과 세군(細群)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내전상태에 들어가기도 하며 《삼국사기》에는 안원왕때의 왕위계승 분쟁등이 기술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왕권이 크게 추락하였으며, 고구려의 정치수준은 귀족연립체제로 후퇴하게 된다.

또한 돌궐과 만주의 거란,속말말갈,실위등 여러 부족들을 영유권을 놓고 다투었다. 돌궐은 실위에 토둔을 설치했고 고구려는 실위가 돌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을 제공했다. 돌궐이 거란을 압박하자 거란이 고구려에 귀부하기도 했고, 돌궐은 속말말갈에 토둔을 설치해서 고구려를 괴롭혔다. 하지만 고구려는 속말말갈을 토벌하고 말갈의 대부분을 복속하여 만주에서 벌어진 돌궐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한다. 대신 한반도에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주도권을 잃어갔다.

3.6. 중흥과 멸망

고구려는 만주를 놓고 벌인 돌궐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영토가 동서 6000리[17]로 늘어나는등 평원왕-영양왕대에 이르러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런 고구려를 견제한 남북조의 통일왕조인 의 연이은 공세가 시작되었다. 전투원 100만명에 수송대 200만을 앞세운 수양제의 공격은 을지문덕을 비롯한 명장들의 활약에 힘입어 가까스로 방어에는 성공하게 되었으나, 그렇잖아도 쇠퇴해가는 고구려에 큰 상처를 남겼다.

수양제의 침입이 끝나고,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한 정권이 생겨나, 중국의 통일왕조와 화친을 꾀했던 영류왕을 죽이고 자신의 괴뢰인 보장왕을 앉혀 수를 뒤이어 일어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당 태종의 침입은 수양제의 침입에 비해 규모에 있어 작아졌으나, 성주들의 이반을 촉발하는 등의 고등전술을 구사하여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을 궤멸하였고, 고구려를 더욱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18] 안시성에서 겨우 방어하여 격퇴하였다. 여하간 이렇게 고구려의 열세는 수양제의 침입보다 더 두드러졌다. 또한 안시성 싸움 직전의 상황은 요동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수백년동안 쌓아올린 요하 방어선이 거의 와해된 상태였다. 결국 연개소문의 사후, 아들들의 권력상쟁이 이어지다가, 권력자 연남생이 투항하는 등 내분이 격화되어 내통자 '신성'이라는 승려에 의해 성문을 열고 보장왕 등이 당나라에 항복,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도달한 이적(李勣, 이세적)은 도서관인 장문고(藏文庫)를 보고 소국 주제에 책이 너무 많다면서 이 책들을 그대로 놔두면 반란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고 하고는 궁궐과 함께 대부분 불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건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각색된 이야기. 왕실 도서관이야 있었겠지만 장문고란 이름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이세적이 평양성을 함락시키면서 궁궐에 불을 질렀다고 나오는데, 딱히 역사서를 없애기 위해서 책만 소각한 것은 아니다.

3.7. 발해소고구려 그리고 유민들

고구려가 망하고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이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모산으로 도망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발해를 세웠다. 고구려 영역에서 고구려인들이 세운 덕분인지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밖에 제2돌궐제국을 세운 묵철가한의 사위가 고구려 유민 고문간임을 볼 때 고구려 인들이 돌궐에도 망명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편,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당은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검모잠이 한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결국 안승, 고연무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는 이들을 금마저에 살게하고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

신라 신문왕안승서라벌로 불러 경주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하자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이 안승의 서자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반굴의 아들 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보덕국인들은 남쪽 군현에 사민되었고 9서당중 2개 서당인 벽금서당(보덕국인(보덕국에 살던 고구려 유민)+말갈인), 적금서당(보덕국인)을 이루었다.

보덕국인과 별개로 신라에 정복된 고구려인, 말갈인들을 각기 황금서당과 흑금서당에 편재하기도 했다.

한편 삼국통일 후 고구려인들은 신라내에서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주었다. 안승은 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 대우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별개로 요동에선 별도의 고구려 부흥노력이 있었다.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낀 당은 보장왕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이 아니라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그런데 발각되어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고 고보원이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다.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학자에 따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고구려는 약 100년간 존속한 걸로 추정한다.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이 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발해 선왕시기 발해에게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를 건국했다. 아직까지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고 연구결과에 의하면 제의 제도가 고구려,발해의 것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9세기에는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저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가 건국되고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 무인집권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있었다. 고려=고구려를 생각하면(...)

4. 사회

4.1. 종족

주는 부여계통의 예맥이었다.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는게 일단은 통론. 흥미로운 점은 광개토왕비문에 예인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예 예인을 한반도 남부의 한인과 함께 이민족 취급한듯 하다. 이건 고구려만 그런게 아니라 백제,신라 바다건너 일본(....)까지 그런 흔적이 보인다.

고구려는 이민족을 복속할말갈,신라등에 대한 고구려의 복속지배 형태가 사료로 남아있다. 이러한 지배형태는 피정복자의 반발을 줄이고,복속지로부터 고구려에게 필요한 것들은 취하되 복속지에 대한 지배력을 투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력이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것을 막고 점진적으로 고구려에 흡수되도록 했을 것이다. 일예로 고구려에게 6세기 중반에 복속되어 7세기 중반까지 약 백여년간 지배받았던 속말말갈의 경우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우며 발해를 건국했다.

여러 종족이 교차하는 만주의 특성상 거란,선비,말갈 등 다양한 북방민족을 휘하에 복속했다. 특히 선비 같은 경우 초기 유리왕 대에 그 일부를 복속한 기록이 보이고 먼 훗날 5세기에도 선비계가 주류인 북연의 인구를 흡수했다. 또한 몽골의 유연족 역시 멸망후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한다. 거란의 경우 일부만 고구려에 복속하고 나머지는 중국이나 몽골에게 붙는 경향을 보이나 말갈의 경우 흑수말갈을 제외한 대부분이 고구려에 복속했다 여겨진다. 흑수말갈까지 복속했다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 시기 상당기간 동안 중원이 혼란했던지라 중원에서 상당한 인구의 한족이 고구려로 유입되기도 했다.

4.2. 인구

신,구당서 및 삼국사기에 수록. 1호당 4~5명 정도로 계산시 대략 350만 전후. 백제 인구와 같이 수록되어 있으나, 백제항목에서 보듯 사실 그리 신빙성이 높지 않다. 특히 만주지역의 역사적 인구추정치는 위의 추정인구대로라면 고구려때만 유달리 높은 편이다. 참고로 요동, 요서에 북만주 등 고구려가 장악 못한 만주지역까지 다 합처서 17세기까지 추정인구가 200만 내외. 만주지역의 경제구조가 고구려 멸망 후 크게 변화하지 않았는데(만주지역의 전통적인 경제구조는 목축과 삼림에서의 수렵을 중심으로 하며, 여기에 요동 및 쏭화강 유역의 농업이 곁들어진다. 물론 유목도 가능하다.) 이러한 인구 변화는 크게 이상한 일. 그런데 고구려의 영토는 만주만 있는게 아니다. 엄연히 그보다 농사가 잘되고 따뜻한 한반도 북부 일대도 포함하고 있다. 350만이라는 기록은 이러한 점도 고려해야 한다. 아무튼 고구려의 인구밀집지역은 만주중에서도 농사가 잘되는 요동과 송화강, 그리고 한반도의 낙랑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재미있는 점을 이걸 지도로 표기해보면 함경도 정도를 제외하고는 고구려 영토 전부 다 인구밀집지대가 되어버린다. 수-당 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요동과 평양인근의 쇠퇴가 나타나 발해의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였으며, 고구려-발해 시대의 경우에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온난하였고(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실시하는 4세기 말 부터는 추워진다.... 물론 발해 멸망 이후 만큼은 아님), 발해 멸망 이후부터 13~19세기에는 기후가 소빙기 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것이다. 고구려의 인구 관련 기록은 백제의 인구 관련 기록에 비해서 상당한 일관성을 보인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사서에서 당과의 전쟁에서 나타난 고구려의 총병력이 무려 26만 6천명이고, 당이 평양 권역에서 끌고간 인구가 20만명이나 되다보니 백제는 신뢰하지 못하지만 고구려는 신뢰하거나 오히려 이보다 많이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지등에 나타난 고구려 영토의 기반이 되는 지역의 인구를 합산하면 동부여지역을 제외하고도 3세기경 120만명정도로 추산된다 즉 고구려 인구의 하한선이 되는셈]

4.3. 언어

일단 자료가 너무 없어서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아있는 소수의 자료를 통해 추측해볼 때 한국어, 일본어 등을 비롯한 알타이 제어에 속해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고구려-옥저의 예맥계 언어와 읍루-숙신-물길어 계통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여러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어와 고구려어간 강한 친연성이 발견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신빙성있는 주장이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고구려의 후계국 발해는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했다는 사료는 없지만 일본서기에 고구려 사신이 가저온 외교문서를 일본인들이 읽지 못해서 버벅거렸다는 기록이 있다. 혹시?

고구려어는 거의 완전히 사라젔고 현재 전해지고 있는게 있더라도 흔적을 알수없는 실정이지만, 오늘날 한반도 중부와 북부의 많은 지명은 고구려어의 음차 혹은 한역이다.[19] 인천의 주부토로처럼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지명이 전해내려오는게 아니라 전통을 강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과거의 지명을 복원한 경우도 있다. 물론 당장 미추홀=인천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는판에 지명비정이 정확한지는 알수없지만

자세한 것은 고구려어 항목을 참조.

4.4. 교육

전국의 지방에 경당을 설치하여 평민층을 대상으로 경전과 기마, 궁술을 교육했고 현대의 국립대학쯤 되는 태학도 존재했다.

태학은 수도에만 있었겠지만 경당은 각 거리마다 존재할 정도로 수가 많았다고 전한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남녀노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심지어 개까지도(...) 책을 가까이 했다고 한다.역시 고대 때부터 물려받은 교육열이다(...)

4.5. 경제

초기에는 약탈경제였다고들 하는데 이는 초기의 활발한 팽창과 군사시위 때문에 오인한 것으로 약탈은 상대세력에게 원하는 교섭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위의 일종이었지 이걸로 생계를 꾸렸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엄연히 농본국가였다. 다만 유목민적 성격이 있었던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데, 고구려 휘하에는 많은 유목민 들이 있었고 고구려가 넓힌 영토에도 유목민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돼지 등이 중시되는 언급으로 보아 목축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 기후 여건상 밭농사가 주였으나, 요동에서 대방(황해도)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논농사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확보는 농업 이외에도 휘하 유목민들을 부려먹어 수렵, 유목 등을 통해 가축을 얻는 등도 있었다.

또한 요동지방에는 현대에도 알아주는 대규모 철광이 존재했다. 고구려의 철은 북만주의 실위에 수출되기도 했었다.

일본에 '토산물'로 낙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휘하 거란족에게서 거둔 것으로 보인다.[20] 참고로 그 낙타는 쌍봉낙타. 중앙아시아와 몽골, 중국 동북부 등에 분포해있었다. 혹이 큰 단봉낙타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분포해있던 종이다.

수도 평양의 경우 온달 설화에 의하면 상업도 당시치고는 꽤나 정교하게 발전했었다.

4.6. 정치제도

4.6.1. 초기

초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아직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일종의 부족 연명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 고구려의 왕들도 사실상 다른 부족 연맹들을 아루르는 일종의 연맹장의 성격을 강하게 띄었다.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던 5개의 부족은 소노(消奴)[21]·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등이었다. 이 다섯 부족의 부족장 간에 선출된 부족 연맹장이 곧 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위는 점차 선출이 아닌 세습제로 이어졌다.

초기는 소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소노부의 힘이 점차 미약해져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22] 또한,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여 왕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절노부는 곧 연나부로,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림답부 이후부터 왕비족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을 배출했던 소노부와 계루부, 왕비를 배출했던 절노부등은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4.6.2. 후기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인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며, 그것이 더욱 정비된 것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게 되어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 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 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하였다.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각 부 내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했다.

고구려에는 귀족 회의의 하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4.7. 군사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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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행렬도.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서 국왕 자신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국내성·평양·한성(漢城 :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고,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맡았다.

4.8. 형법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도 살인자를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굉장히 호전적이고 상무적인 일면이 있어서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다.

절도죄를 저지른 도둑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물게 하였다. 이는 일명 '1책 12법'으로 고조선대에 만들어졌다는 팔조법이나, 부여의 법에도 비슷한 법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다만, 고구려의 제도가 1책 12법인지는 명확하진 않다. 여러 기록들 중에서 <구당서>에서만 1책12법을 언급할 뿐 다른 기록들에서는 오히려 10배의 배상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북사, 수서, 신당서)그 외에 <주서>에서 10여배로 갚는다는 내용이 있다. 종합하자면 고구려는 1책 10법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한다)

남의 가축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제가회의를 통하여 처벌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

4.9. 신분제도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또한 각기 넓은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23]

일반 백성은 평민으로 대부분 자영 농민이었고, 토지 경작과 함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며, 토목공사에도 동원되었다.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포로·죄인·채무자·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신분 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다.

5. 문화

5.1. 미술

한국의 교육과정에서는 고구려의 미술은 강건하고 웅장한 기품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간건하고 웅장하기 뿐만한게 아니라 섬세하기도했다. 근래에 들어선 귀족적인 섬세함도 있다는 것도 추가하는 모양. 뭐 주관적인 거긴 하지만. 고구려의 미술로 남아있는 것은 고분벽화나 몇몇 공예품이 전부이다.

일본에는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호류지의 금당 벽화[24]가 있었는데 1948년에 보수 공사중 일어난 누전 화재사고로 불타버렸다. 고구려의 미술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프레스코 기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벽화 제작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또한 산수화의 발전에도 아주 크게 기여했다. 불상 등의 공예품은 북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유행했던 미록보살 반가사유상 양식도 출현한다.

5.2. 음악

고구려 음악의 흔적은 4~5세기의 재상 왕산악이 진나라에서 도입한 칠현금을 개조한 거문고의 연주를 위해 지은 100여곡이 유명하다.[25]

한나라 때에 중국인들이 음악가들을 고구려에 보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또한 '고취'라는 악기도 함께 가져가 고구려에 전했다고 한다.

당나라 때 고구려의 음악이 궁중음악으로 편입된 적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하고[26] 전하는 노래로 유리왕황조가 등이 있다. 원성, , 명주는 고려사 악지에 근원설화만 전하고 있는 고구려 시대의 노래들이다.

5.3. 문학

운문은 남아 있는게 황조가, 여수장우중문시, 인삼찬, 영고석 등의 소수의 시밖에 없다. 그 외에는 위에서 언급한 고려사 악지에 수록된 것들 정도. 인삼찬의 '인삼'은 그 인삼이 맞다. 인삼을 의인화하여 인삼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래가 그 내용.

人蔘讚(인삼찬)

三椏五葉(삼아오엽)
背陽向陰(배양향음)
欲來求我(욕래구아)
椴樹梢尋(가수상심)

세 가장귀에 다섯 모난 잎이
햇빛을 등지고 그늘을 향했네
와서 나를 찾고자 하거든
자작나무 숲으로 오시오

전설 혹은 설화는 동명성왕, 호동왕자, 산상왕, 미천왕, 온달 관련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인의 문학은 아니지만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회고시(高麗懷古詩)가 있다.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색이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워 하며 지은 시인 부벽루에도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5.4. 건축

고구려의 건축은 축성술, 분묘조영 위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남은게 다 무너진 성곽에 도굴당한 무덤밖에 없다. 지못미.[27]

뭐, 사실 남은게 성곽과 무덤밖에 없다고 해도 남아있는 것들로 파악하건데 고구려의 성곽과 무덤은 높은 수준에 속한다. 두 쪽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구려 성곽은 주로 산 위에 건축되었으나 평지성도 있었는데 평지성같은 경우는 굉장히 높게 쌓아 자체의 약점을 보완했다. 외형으로는 단순해 보이나, 실제로는 삼각형 모양으로 돌을 깎아 교차시키면서 쌓은 것으로 돌끼리 서로 맞물려 붕괴가 어렵도록 되어 있다. 고구려 성곽의 치나 옹성은 고구려 고유의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에 비해 먼저 출현하여 일반화되었을 뿐이다.

웅장한 규모에 人자형 동자주가 두드러지고, 여말선초에 푸른 청자 기와가 건축에서 쓰였다면 고구려에선 붉은 기와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온돌 또한 고구려 건축의 특징으로써 빼놓을 수 없다.

분묘조영에 있어서는 돌무지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발전했다.분묘로 가장 유명한 것은 장군총인데,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중 원형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어 규모가 가장 큰것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장군총보다 5배이상 큰 돌무지무덤도 존재한다. 보존상태는 안습이지만(...)[28]

5.5. 과학

천문학이 상당히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별자리를 발견한 바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원본 각석이 대동강물에 빠져 소실될 가운데 서울에 운좋게 남아있던 고구려 천문도 인본(4~6세기 추정)를 다시 그린 것이라고 한다.고대국가의 위엄 오오 오파츠

또한, 일본의 벽화 고분(기토라 고분)중에는 고구려시기 평양의 하늘을 그린 것으로 파악되는 벽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고구려의 단위로써 주로 건축에 사용된 고려자, 즉 고구려척은 한반도, 일본열도에서 통용되었다.

6. 인물

고구려/인물 항목 참조

7.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장수왕

8. 강역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영역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두만강을 중심으로 남만주와 함경도에 걸터있던 국가였으나 미천왕과 광개토왕을 걸처 요동과 서북한에 걸처있던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위 지도와 같은 영역이 완성되고 망할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굳이 변하는 점이라면 요서로 가끔 소풍을 갔다오고 동북쪽으로 말갈을 복속,남쪽으로는 백제,신라의 북진에 영토가 줄어든다는 점?

10.1. 한국

10.3. 중국

10.4. 기타


12. 고구려가 남긴 것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국민들은 당, 돌궐, 말갈, , 신라로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나 당은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그 지역의 유민들은 퉁구스계의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한다. 발해는 926년 거란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발해인들은 보통 세갈래로 갈라져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의하거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갔으며,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그냥 그 땅에 그대로 남아서 말갈의 후신인 여진에 동화되었다.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은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이는 고려로 이어진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사에 남긴 발자취와 비중은 꽤 크다.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700년간 통합된 고대국가로서 존속한 나라로 이후 이 지역에 할거, 등장한 갖가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요는 고려와의 분쟁에서 고려가 아닌 자신들이 고구려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고, , 후금, 으로 이어지는 여진, 만주족에게도 모델이었다.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의 중심축을 담당한 국가였으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이후의 고려, 그리고 영어 및 비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KOREA라는 국호에서 볼 수 있듯 이후 한반도 국가들에게 계승의식을 남겼다.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국가제사대상 가운데 하나였으며, 특히 민족주의 관학파의 주도 아래 중국과 맞선 고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모델로 집중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


13. 오늘날의 고구려

고구려의 국운이 쇠하자 매국노 연남생국내성 10만호를 긁어모아 자발적으로 당나라에 갖다바치고 평양성이 함락되자 평양성 권역의 지배층(정확히는 늙고 가난한 이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 20만을 당나라에 끌고 갔기 때문에 고구려의 모든것이 포맷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구려의 부흥국도 국내성-평양성 권역이 아닌 변방의 동모산에서 일어났고.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고구려 왕실만은 한국,중국,일본에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하는 요양 고씨. 한국에는 고주몽을 시조,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그것이다.

고구려 유민 가운데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약광(若光)[29]이 유민들과 함께 지금의 사이타마현 근처에 세운 코마(高麗)군이 유명하다.[30]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쿠니(武蔵国)에 신설된 코마군의 수장으로 부임했다. 당시의 코마군은 미개척된 들판이었다고 하며 각지에서 몰려 든 고려인(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개척하였다. 약광이 숨을 거두자 코마군민이 그 덕을 기려 코마신사(高麗神社, こまじんじゃ)를 세우고 영령을 코마명신(高麗明神, こまみょうじん)으로 모셨다. 이것이 코마신사가 창건된 경위이다.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때에 무사로 활용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멸문지화를 입을까봐 전쟁에 나서는것을 멈춘다. 이들은 고구려의 국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은 코마(高麗)씨를 칭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코마 후미야스와 같이 코마씨를 쓰는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코마씨의 일부는 코마신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고구려 왕실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코마씨중에도 자신의 조상을 망각한 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되고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다. 코마씨 외에도 무사시,무라카미등 고구려계통 성씨가 꽤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은 관동지방의 무사시국에 터를 잡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주장할때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의 중심지방에 대거 이주한게 원인이 아니냐는 근거가 제기되기도 한다.

14. 동북공정

1990년대 중후반 이후로 국내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로 그 전까지 특별히 나쁜 관계는 아니었던 한중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이다. 중국어 工程gōngchéng은 Project, 계획이란 뜻의 단어지만,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인의 경악은 공정이란 단어를 역사왜곡의 동의어(...)쯤으로 여겨지도록 만들었다.[31]

동북공정의 기원은 의외로 중국의 일본에 대한 방어적 외교에서 비롯되었다. 중일전쟁만주를 무력점령한 일본이 역사적인 정당화를 위해 만주는 중국중원왕조와 역사적으로 관계없는 지역이라는 학술연구를 시도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원한족왕조와 만주의 연결고리로서 등장한 것이 고구려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신생중국의 만주지배는 확고한 것이 되었지만, 이후 더불어 현재 영토 영역내의 모든 옛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하려는 역사 프로젝트가 만들어졌고, 결국 한국과의 역사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중국의 이러한 정치에 복속된 역사공정은 물론 거의 모든 중국주변국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고 있다.

동북공정에 대한 국내의 저항으로 고구려, 발해를 소재로 한 역사드라마가 한동안 잇따라 유행한 일이 있다.

그러나 중국 교과서에서 고구려는 해외사 파트인데 비해 발해가 중국사의 하부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굳이 동북공정의 위험성을 적용한다면 고구려가 아니라 발해가 위험하다![32]
이러나 저러나 한국입장에서는 개새끼인게 맞다

15. 고구려를 소재로 한 작품

17.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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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위 이미지는 최전성기 시절의 영토.
  • [2] 중국의 역사가 호삼성에 따르면 고구려가 태조대왕 때 요서 10성을 정벌하면서 잠시 수도를 요동성 인근에 옮긴 적도 있다. 요사에서 말하는 고구려가 둔 요동 지역의 평양, 고구려의 북평양은 여기 또는 오골성을 말하는 걸 수도 있다. 물론, 이 지역을 고구려의 장안성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장안성 역시 한반도 평양 일대에 있었으므로. 남평양은 황해도 재령시 인근으로 비정된다. 혹자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라 한강 북부의 남한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하는데 상식적으로 한강 북부 지역은 백제의 수도권인데 고구려가 이 지역에 쉽게 남평양을 뒀을 리가 만무하다.
  • [3] 북한에 의하면 당시 평양성 외성에 살던 인구수만 17~20만에 이른다고 한다. 거기에 평양성 외곽에 살고 있던 사람의 수를 이의 2~3배 정도로 환산하면 당시 평양성 일대에 살고 있던 인구는 50~60만에 달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경주 인구가 90만에 달한다는 기록도 이렇게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경주 일대의 인구까지 다 합쳐서.
  • [4] 중국 사서인 후한서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것이 맞다.
  • [5] 요동과 평양권역은 안동도호부를 거처 무주공산화(일설에는 발해가 점령했다고 한다만), 임진강 이북 ~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확보, 나머지 땅에서는 발해 건국.
  • [6] 삼족오는 백제, 신라, 가야 관련 유물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중국계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상나라)가 그 기원이고 이후 북방을 통해 고대 한국(한반도, 만주)을 거쳐 고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 [7] 고구려 후기와 그 이후에는 대부분 고려(高麗)라는 말이 쓰였지만 현대의 한국어로는 고구려라고만 불린다.
  • [8] 고구려의 경우도 그냥 가오리(高麗)라고 한다. 고구려로 쓸 때는 가오쥐리(高句麗)라고 읽는다.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서 나온 것.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한자독음은 고려봉자)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 발음은 현대 중국어 발음이다. 고대한자 발음은 현재 중국어발음과 차원이 다르므로(오히려 한국식 발음이 더 가깝다) 고구려를 가우리로 부르는 건 중국명이다.
  • [9] 高句麗(고구려)로 쓸 때만 코쿠리라고 읽으며 高麗(고려)라고 써놓을 때는 코라이라고 읽는다. 간혹 高麗(고려), 狛(박), 駒(구) 등으로 써놓고 코마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 [10] 고대 티베트어
  • [11] 11세기 페르시아어
  • [12] 돌궐어, 고대 터키어이다.
  • [13] 근데 듣보잡 맞다.
  • [14] 전한시대의 서적인 '논형'
  • [15] 대체적으로 태조왕의 초기치세가 늘려진것이며, 고구려에 모본왕부터 태조왕 사이에 수십년간의 권력공백이 있었다고 주류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모본왕의 사망후 혼란에 빠진 고구려를 수습하고 이전 왕가와의 혈통을 이은게 지금의 삼국사기 기록이라는 것
  • [16] 아들이 아니다. 아들인 조다는 장수왕이 죽기 이전에 이미 죽었다. 허나 요절은 아니다. 장수왕이 너무 오래 산 것 뿐... 왕위를 이어받지도 못하고 죽은 장수왕의 아들의 이름인 조다(助多)로부터 '쪼다'가 기원했다는 속설이 있으나, 아무 근거도 없는 설이다.
  • [17]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 실제로 6천리라면 현 외만주에서부터 난하까지의 수준이다.
  • [18] 사실 이러한 전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후로 고구려의 지배층의 결속이 불안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주필산 전투에서는 친연개소문파였던 고연수, 고혜진의 15만 대군과 반연개소문파였던 안시성주(후대에 양만춘이라고 나와있으나 출처 미상)는 당태종의 우려와 달리 어떠한 연합작전도 펼치지 않았다. 그 결과 15만 대군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심지어 고연수와 고혜진은 배신을 때려 아예 안시성을 우회하여 직접 평양을 공격하자고 하며 당군을 도울 정도였다(…;). 다행히 안시성주가 이기긴 했지만 하마터면 23년 앞서 나라 말아먹을 뻔 했다.
  • [19] 예: 어사매→횡천→횡성
  • [20] 왕건이 거란이 선물한 낙타를 만부교 밑에 매달아 굶어죽게 했던 사건은 유명하다.
  • [21] 소노의 경우에는 연노(涓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 [22] 또는 동명성왕이 아닌 태조왕 이후부터라고도 한다.
  • [23] 다만 귀족 휘하의 관리들은 왕이 거느리고 있는 관리들보다 급이 떨어져서 관직명이나 지위가 같아도 함께 서있거나 할때에는 같은 줄에 있지 못했다고 한다.
  • [24] 사실 벽화가 그려진 시기가 담징의 생몰연대와 일치하지 않고, 고구려의 불교 미술과는 거의 판이하게 다른 작풍을 지니고 있어 고구려의 작품이라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게다가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나라 지방에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말에 불과하다.
  • [25] 물론 지금까지 전해지는건 한 곡도 없지만(…). 어쨌든 이때 발명된 거문고는 조선시대까지 대히트를 치게 된다.
  • [26] 조동일,'한국문학통사1',지식산업사,2005,p230-231
  • [27] 특히 한반도의 무덤은 도굴 상태가 매우 심각해 출토품이 거의 없다. 심지어 요즘은 벽화도 뜯어서 판다고 한다.
  • [28] 고구려나 백제의 무덤은 텔레토비동산 흙을 무시무시하게 쌓아올린 신라의 무덤과는 달리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친절하게(...) 완성되어 있어 여기만 찾아내면 도굴하기가 쉬운 편이다. 예전 나라가 건재했을 때는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 등을 두면 되었지만 망하고 나면 그런거 없기 때문에 차례차례 도굴꾼들에게 관광당하게 되었다. 백제 무령왕릉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입구가 잘 숨겨지고 무덤이 아예 묻혀버리는 바람에 무사한 케이스.
  • [29] 일본명: 코마노코키시 쟛코(高麗王 若光, こまのこきし じゃっこう)
  • [30]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개명되어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론 없음.
  • [31] 사실 이 단어에 대한 이런 오해는 공정이란 한자어가 한국어에는 없는 단어라는 점과 함께 중국 정부가 서남공정, 남방공정 등의 많은 역사왜곡 프로젝트를 공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추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32] 발해의 건국세력은 요동 언저리로 이주당해서 잘 짜져있던 고구려의 유민들인데, 이들은 측천무후의 즉위에 전후한 정국의 불안정 덕에 동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해의 또다른(어쩌면 당시에 더 널리 쓰였을) 국명인 대진국의 振도 이 와중에 말좀 들으라는 의미로 당 조정에게 사여받은 이름. 때문에 중국측에서 다 제쳐놓고 발해만을 핀포인트로 따지고 들면 발해가 당시 중국의 속방이었다는 명제를 반박하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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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2 03: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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