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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last modified: 2015-09-04 21:43:33 by Contributors



국방일보에 나온 기사의 그림으로, 여성 탈북자가 탈북 후 남한에서 통감자를 보자 북한에서 먹던 통감자가 생각났다는 이야기다. 배고픔이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이야기.[1]

목차

1. 개요
2. 진행 과정
2.1. 식량난 도래
2.2. 에너지난&수송난
3. 파멸적인 결과
4. 영향

1. 개요


1995년에서 1998년까지 북한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이르는 말. 영어로는 Arduous March라고 하는 듯. 한마디로, 지금의 북한 막장형태를 만든 기간.

원래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는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일성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쫓겨 다니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유격전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던 대장정 삘나는 시기와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북한의 괴멸적인 경제난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현재도 김일성의 유격전을 1차 고난의 행군, 8월 종파 사건을 2차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북한이라는 국가조직의 모든 기본적인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북한이 막장국가가 된 도화선. 그래도 고난의 행군전에는 그럭저럭 먹고 살았고 나라도 정상적으로 잘 운영되었다.

사람의 하루 평균 권장 소비량은 600그램인데, 김일성시대, 즉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620그램 정도의 쌀을 배급하였다. 즉, 충분히 먹고 살았다. 그러나 북한은 80년대 후반 즈음부터 농사 작황이 좋지않아 양이 조금씩 줄기 시작하더니 고난의 행군 시기 들어서부터 그 배급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김정일시대와 현재 이어지는 김정은시대까지, 100그램이 조금 넘는 양을 그것도 아주 가끔 배급하고 있다. 국가 전반의 산업은 붕괴되었으며 배급제도로 운영되는 사회주의국가에서 배급을 중단하였다는건 배급에만 의존하며 살았던 인민들은 순식간에 다 굶어 죽게 생겼다는 말이었다.

근데 사실 소련에서도 배급제는 스탈린 초기 시기, 정확하게는 1929년부터 1935년까지와 2차 세계대전 시기에만 제한적으로 시행되었고 1947년 12월 들어서면서 배급제를 완전히 폐지시켰다. 물론 배급제 폐지 이후에도 간간히 상당수 물품들은 배급하기도 했지만 법적으로 공식화된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물건을 팔았냐면, 국가에서 각 가게별로 물건을 보급하고, 소비자들은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방식으로, 사실 유통과정 자체만 본다면 서방과는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TV나 자동차같은 사치품을 제외한 생필품은 국가에서 굉장히 싸게 공급했는데 중간에서 차액을 노리고 물건을 빼돌리는 경우가 은근히 많았고, 또한 급작스러운 수요가 발생할때를 대비되지않다보니(이럴 경우에는 암시장에서 웃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했다.) 물건공급이 후달리는 경우가 꽤나 빈번해서 어떤 가게에서 좋은 물품이 나왔다는 소문이 나오면 무조건 줄을 서는 경우가 많아서 다리가 아팠다나... 여하튼간에 북한은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폐지시킨 것은 아니었으니 영향이 클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북한의 인민들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은 더 시키고 학생들까지 노동과 농사일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당연히 배가 고파져 도저히 일을 하러 올 수 없는 사람이 늘게 되어 노동자들은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배급이 줄자 북한의 인민들은 장마당에서 식량을 구해다 먹게 되었고, 부족한 식량을 조금이라도 증산시키기 위해 농사에 동원되면서 기초적인 국가 시스템은 마비되었다. 철도는 움직이지 않았고 편지배달을 할 집배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북한에서 장경제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고, 탈북자를 급속도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 진행 과정

2.1. 식량난 도래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말 대대적인 집단농장화를 완수한 북한의 농업은 외견상 전쟁으로 인한 물자와 노동력의 부족을 해소해 가면서 착실히 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근저에는 사회주의 농업의 고질적 병폐인 부족의 경제국가로부터의 과도한 수탈이 만연해 있었다.

1960년대 쿠바위기와 중소분쟁, 베트남전쟁 등으로 연이어 위기를 느낀 북한은 국가경제 운용에 있어서 자력갱생을 원칙으로 내세웠고, 이는 척박한 북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중요한 화학비료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졌다. 아직은 에 불과하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경제위기가 1960년대 말 북한의 과도한 무력도발과 이어지는 갑산파 숙청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일성은 1970년대 초부터 적시적작, 적지적작을 통해 화학비료의 사용을 줄인다면서 다락밭 개간과 강냉이영양단지 농법, 밀식재배를 주축으로 하는 주체농법을 내세웠고 1975년 435만톤의 식량을 생산하면서 이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체농법은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영양단지 농법이란 사진처럼 거름이 많은 부식토에 미리 강냉이알을 심어 싹을 틔운 뒤 이를 밭에 옮겨심는 것으로, 말하자면 강냉이판 모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벼운 벼 모를 심는 모내기만 해도 엄청나게 노동집약적인 농법이라 논 하나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달라붙어야 할 정도인데, 그게 강냉이를 심은 모종에, 산비탈에 만든 다락밭이 작업장이라고 하면 어떨까? 더 심각한 건 심는 건 이양기를 마개조해서(...) 굴리면 된다 쳐도 모판 만드는 건 기계를 써도 인력이 많이 들어간다. 근데 그 모종이 강냉이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必要韓紙?

막대한 노동력이 주체농법에 투입되기 시작하자, 이런 주기적인 농촌지원전투 동원은 사회의 전체적인 생산능력마저 감퇴시켰다. 게다가 척박한 한반도 산악지대에서 을 많이 소모하는 옥수수를, 그것도 밀식으로 재배하면서 일시적인 식량 증산은 가능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력고갈을 피할 수 없었다. 잠깐, 비료를 덜 쓰는 농법이라며? 그게 천연비료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농업 생산량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식량생산량이 줄어드는 것은 남한도 마찬가지 현상이기는 한데, 남한의 경우 식량생산량의 감소의 직접적인 원인은 존나 맛없는 통일벼 재배의 포기와 대규모 도시화로 인한 농지 감소, 밀가루 등 저렴한 대체작물의 수입, 당분 및 육류 등의 섭취량 증가로 인한 주식작물 소비량 감소가 수반되었던 반면 북한은 그런 요소가 없이 식량생산이 줄어들었다는 게 가장 결정적인 문제였다.

일부 지방도시에서는 1980년대부터 배급이 밀리는 현상이 발생했고, 신의주나 청진 등 대도시들도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2] 1980년 371만톤(농촌진흥청 추산)까지 떨어진 식량생산량은 1991년 441만톤으로 회복되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일어나기 직전인 1993년에는 동아시아를 휩쓴 냉해로 인해 다시 388만톤으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등락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2013년 북한의 식량생산량 추정치는 약 480만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북한에서 필요한 식량소요량은 약 500만톤. 일반적인 국가에서 연간 30만톤 정도의 식량 부족분이라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되기는 한데, 사 올 돈이 없다는 게 문제.

이 쯤 되면 일찌감치 중국이나 베트남의 사례를 본받아 농업 부문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조금 자세히 짚어보자면 영농조직의 소규모화와 자율화, 정부 수매의 축소와 개별 처분권 강화 등이 골자가 될 것이다.

다만 소규모화와 자율화에서 무작정 개인농화하는 것은 자칫 개별농가의 영세화로 이어져 국내 농업의 전반적인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 일례로 폴란드는 막 공산화 되었을 시절에 집단농장을 만들어냈으나 1956년 호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이어서 벌어진 포즈난 항쟁이후 스탈린주의파가 물러나고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백지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개별 자영농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그 결과 폴란드 농업은 영세화를 면하기 힘들었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개별농으로 전환된 농민들이 결국 호스를 재결성, 자본주의 협동조합화 하였다. 중요한 것은 조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강제적 정부수매는 국방경제병진병신노선과 직결되는 문제다. 간단히 말하자면 '군량미 확보'. 그리고 농업집단화와 주체농법은 수령 스스로가 바득바득 우긴 결과이니 철회=수령의 오류 인정이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수령의 무오류성을 하나의 사상으로 확립해놓은 상태였고, 그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이 바로 김정일이었다.

북한에서 소련이나 중국에서처럼 후임 지도자가 전임 지도자의 정책을 바꾸거나, 혹은 베트남처럼 당 내의 개혁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시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는 즉시 치범 수용소 심지어 하부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할 수조차 없는 여건이었다.

결국 북한은 어영부영 하는 사이 1995년 갖은 자연재해를 겪고 농촌진흥청 추산 345만톤에 불과한 식량생산량을 기록하면서 파멸적인 경제난의 막을 올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위키러들은 "뭐야, 생각보다 심한 게 아니었네?"라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위에도 나왔듯 1993년에도 300만톤 대의 식량생산량을 기록한 바가 있지 않은가? 물론, 고난의 행군은 단순히 식량부족만으로 발생한 사태는 아니었다. 식량 문제는 시작에 불과하지 단순히 이것이 고난의 행군의 전모라면 외국으로 부터 식량수입을 하거나 혹은 식량지원을 받으면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는 것.

2.2. 에너지난&수송난


1960년대부터 자력갱생을 내세워 온 북한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전력 중심의 에너지 수급 정책을 고수했다. 수력자원과 석탄자원은 나름 넉넉했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중국을 통해 들여온 석유는 군용 차량이나 단거리를 수송하는 민간 차량, 각종 선박 등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북한의 높은 전철화율과 철도 중심의 수송체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장거리에 거쳐 계획적으로, 저렴한 수송이 가능한 철도가 교통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다. 북한은 특히 석유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부족한 재원을 주요 철도의 전철화에 집중했고, 그 결과 전체 철도의 80%를 전철화하는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철도 수송능력의 강화에 절실하게 필요한 복선화와 선형개량은 포기해야 했다. 참고로 김일성은 전철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철도 복선화 요구를 대놓고 씹어버린 바 있다. 사실 그 자체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름 일리있....기는 개뿔, 애초에 자력갱생 운운만 안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

그렇게 전철화를 이뤄내면서 수송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 참 좋았겠지만.... 문제는 전철화로 향상된 견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각종 제반 사항들이 제 때 개선되지 못하면서 북한의 전기철도는 그냥 하루하루 전기 먹는 기계로 전락해버렸다.

제반사항이라고 함은, 예를 들면 한꺼번에 많은 짐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무거운 중량화차와 이를 받아낼 중량궤도가 필요하다. 또한 열차 편성이 길어지면 그만큼 대피선이나 신호장 등도 확충되어야 단선에서도 무리없이 교행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사업들이 제대로 수행되는 일은 없었다. 철도전기화에 모든 힘을 쏟아낸 북한은 이어지는 후속사업들에선 거짓말처럼 파행을 거듭했다.

오죽하면 김일성이 대놓고 니들 전철화만 해놓으면 다냐? 다른 것도 제 때 해놔야 할 거 아냐!라며 짜증을 냈지만.... 위에서 보듯 철도가 제대로 짐을 실어나르지 못하는 판인데 제철소에서 어떻게 철광석을 받아서 강철을 생산하고 공장에서는 어떻게 강철을 받아서 궤도와 화차를 생산하고 철도국에서는 어떻게 궤도와 볼트와 자갈과 공구를 받아서 대피선을 설치한단 말인가? 보기만 해도 현기증 난다

이것이 철도 내부의 문제만으로 끝나면 참 다행일텐데, 문제는 발전소에서 석탄을 받아야 전기를 생산하고, 전기가 들어와야 석탄을 캔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들은 갱도식이기 때문에 조금만 발전기가 멈춰도 지하수가 차버려 못 쓰게 된다. 이렇게 멈춰버린 탄광들이 부지기수다.

수력 발전소가 있다고는 하지만, 하상계수가 큰 한반도에서 수력발전은 계절간에 발전량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화력이나 원자력발전은 필수다. 사실 수력발전 자체가 한반도, 중국, 인도, 동남아같은 몬순성 기후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다. 현재도 수력발전이 발달한 나라는 대부분이 영국, 노르웨이 등 1년 내내 강수량이 고른 해양성 기후를 띤 나라들이다.

게다가 그 수력발전소들의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의 설비로 돌리는 판이라(...) 풍발전소 발전기들은 해방 직후 7개의 도시바제 발전기들 중 5개나 소련측이 약탈해가서 2개의 발전기로 돌리다가 나중에 소련의 지원으로 다시 7개가 되었다.

이런 수송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로, 결국 김일성이 직접 "차도 좀 멀리 많이 굴려라!"라고 주문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북한은 1970년대부터 양원산간고속도로를 비롯해 각종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유류소비량도 1980년대 중반까지 큰 폭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후 북한 경제의 내부예비 고갈과 80년대의 삽질로 예쓸수있는 예산이 크게 줄고, 이로 인한 성장률 감소현상이 지속되면서 유류소비량의 성장은 둔화되었고, 여기에 크리티컬 히트를 날린 것이 1990년대 동구권의 체제전환이었다. 그동안 무상지원이나 현물교환으로 들어오던 각종 원자재나 기계부품 공급이 끊겼다. 소련 몰락 이후에 제코가 석자인 러시아에서는 달러를 요구했는데 북한엔 위조달러만 넘쳤다고 카더라...

참고로 공산권 국가들은 화폐가치로 무역을 하지 않고 노동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물물교환 형식의 거래를 주로 했다. 정치적인 배려로 공산권 큰형님인 소련이 많이 퍼주기도 했었다.

어찌되었든 다급해진 북한 정부는 1991년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라는 나름의 승부수를 띄웠지만.... 70~80년대에 시장경제에 적응할 기회를 발로 뻥뻥 차낸 끝에 다급하게 도입한 특구가 제대로 돌아갈 리는 만무했고 들어오는 달러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

사실 북한도 1984년 합영법과 합작법을 시행하고 1986년 관광총국을 만드는 등 이래저래 뭔가를 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것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전면적인 시장화 개혁·개방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돈 몇푼에 합영·합작기업의 뒤통수를 치는 등 제국주의 종간나새끼들에게 내래 인민의 통수를 보여주갔어! 뻘짓만 잔뜩 하다가 시간을 날려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1993년 북한의 화력발전량은 88억Kwh(추정)를 기록하며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100억Kwh선이 무너지는 참사를 맞이했으며, 현재까지도 좀체로 100억Kwh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전력이 부족해지자 군수·중공업부문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공급했지만, 그 결과 안 그래도 빈약했던 경공업부문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농민들과 근로자들의 생활고는 가중되었다.

여기에 국가교통의 근간을 이루는 철도가 전력부족으로 운행에 어려움을 겪고 이를 보완해야 할 도로교통 또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서 국가 수송체계 또한 전면적인 마비에 직면했다. 설령 쌀이 있다 해도 실어나를 수 없는 전근대적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일례로 1996년 청진철도국에서는 남포항에 쌀이 들어와 있는데 이걸 실어올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었다. 다른 조직도 아니고 철도국이 말이다!

에너지난과 수송난이 고난의 행군에 미친 영향은 식량난의 피해 분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UN에서 2002년에 자강도, 강원도를 제외한 북한 전역에서 실시한 어린이 발육부진 현황 조사를 보면, 식량생산이 적고 공업 비중이 높은 함남·북 및 량강도 같은 동북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평안남·북도가 뒤를 이었으며, 곡창지대인 황해남·북도는 지방 중에서는 가장 피해가 적었다. 물론 가장 피해가 적은 건 평양남포

1920년대 소련 대기근이나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대기근이 주로 농촌 지역에 피해가 집중되었던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시장화가 주로 함경북도 및 량강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반정부 움직임 또한 나름 나타나는 것은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과 함께 이 시기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파멸적인 결과


황장엽의 회고록을 근거로 300만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 외무성은 22만 사망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황장엽은 고난의 행군 첫 해에 100만 명이 죽어나갔고, 이 후에 추가로 100만명이 더 죽어나갔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300만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소한으로는 150만, 많게는 350만은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함흥시에서 입수된 내부 문서는 360만 사망설을 적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UN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직접 인구조사를 실시한 결과 예상보다 총 인구 숫자가 많았다. 이 조사결과로 추정한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자는 약 30~40만 명. 그래도 많은 숫자임은 확실하다. 당장 이 당시 인구17만명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무려 200명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심각했다. 처음으로 급격한 식량감소를 겪은 1994년부터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 종결'을 선언한 2000년까지 초과사망은 33만6천명이다.

더 심각한 것은, 대약진운동은 몇가지 병크로 인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수습 또한 비교적 단기간에 성공한 반면, 고난의 행군은 무려 만 5년에 걸쳐 이런 엄청난 기근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워낙 구멍이 크고 광범위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답이 없는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것. 반세기동안 내부 자원을 있는대로 쥐어짜내고 갉아먹은 끝에 발생한 기근이니 단기간 내에 수습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그 마오쩌뚱마저도 권위는 유지했으나 실권을 크게 상실하고 뒷방 늙은이 직전까지 전락할 정도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 겪으면서도, 오직 외부에만 책임을 돌리고 사실상 정권 핵심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북한의 정치체계가 정상적인 수준의 평가 기능은 커녕, 최소한의 판단 능력조차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지나친 영양결핍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정도다. 성인에 진입한 90~00년대 출생자들의 키가 머리 하나 크기 감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14년 현재 10~20대의 평균 신장은 150cm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발육부진 세대라고 부른다. 출생자들의 저신장으로 인하여 이들의 군 복무 시기부터 대폭 하향된 신검 신장 기준이 확인이 되면서 이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당시의 북한 관련 통계를 보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인데 UN 추산 1인당 GNI가 1994년 약 400$ 수준에서 1995년에는 200달러로 급감했고 이후 2012년까지 600달러를 회복하지 못했다. 사실 1990년부터 GNP 하락이 시작됐다는 것을 보면 이 시기 북한 경제는 말 그대로 좆망.

2000년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기에 이후에도 15만 명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수치상으로는 대략 90년대 초반 수준으로 경제상황은 상당히 나아졌고 시장도 크게 활성화 되었다.

하지만 시장화의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진 데다가 사회복지와 배급 체계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으로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세한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의 사정은 굶어죽을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고난의 행군 이후 인구손실 추정.

4. 영향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탈북을 감행하였고 이 중 일부는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도 소수 주민이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넘어왔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인 문제가 주류였다. 경제적 문제로 생존을 위해 북한에서 도망친 탈북자의 존재가 대규모로 확인되기 시작한 시기는 고난의 행군 시기이다.

타이밍이 좋게도 김일성이 죽고 바로 시작된 재앙이라서 탈북자들이나 북한에선 나이 든 사람들은 "김정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가 꽤 탄탄하게 자리 잡혀 배부르게 먹었고 적어도 굶어죽지 않았던 80년대를 겪다가 이런 대기근을 겪으니 더더욱 잊을 수가 없을 듯.

사실 김정일에게 실드를 쳐주기도 힘든 이유는 실드를 왜쳐주냐 김정일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일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아예 아버지를 대신해서 직접 북한을 통치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김정일을 그리도 비난하던 황장엽은 적어도 김일성이 집권을 하던 시절에는 죽어라 굶주리진 않았다며 비난을 하지 않았다. 결국 황장엽 역시 탈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김일성이 살아있었다 해도 북한은 이미 1990년부터 지속적인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기록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1993년에 라선항을 특구로 지정하는 등 부분적인 개방정책을 펴기는 했다. 경제-외교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하지 않아서 문제지...

더불어 고난의 행군을 쿠바같은 북한과 동맹이던 나라라든지 해외에서도 잘알고 쟤들은 왜 저러냐? 어이없어 한다.쿠바를 여행한 한국 여행자가 쿠바 전직 외교관(은퇴하여 게스트하우스 차리고 그럭저럭 잘 살아간다고)인 집주인과 만나 이야기한 경험을 봐도 이 사람이 외교관 시절인 90년대 북한에 가서 지옥을 눈으로 봤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쿠바는 정말 북한에 견주면 천국이지,저렇게 굶어죽는 사람 여긴 없잖아 이렇게 느끼고 와서 쿠바에 대하여 외국이 뭐라고 비난하면 코웃음치면 북한같은 나라를 보라구 쯧쯧 이렇게 반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종북주의자들은 고난의 행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서방이 북한을 음해하기 위해 지어낸 소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설령 고난의 행군 자체를 인정하더라도 "이게 다 남조선과 미국 때문이다!"로 일관하며 정신승리를 한다. 당연히 이들이 하는 소리는 그냥 개소리다. 자력갱생하는 주체적인 나라라면서? 타국의 경제제재가 무슨 상관? 위대한 수령동무 김정일은 그 당시에도 정작 인민들에게는 자신이 줴기밥(주먹밥)과 소금국으로 연명한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혼자 해진미는 죄다 쳐 먹어대서 지금도 두고 두고 까인다. 주먹밥 안에 캐비어랑 푸아그라를 넣어서 먹었다고 하면 그나마 그럴듯 해진다.

조선일보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에서 북한에 사는 여동생을 탈북시킨 언니가 북한으로 기어이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여동생에게 "김정일이 때문에 삼백만이 굶어 죽었는데 왜 돌아가니?"라고 뜯어말리는데도 여동생은 "우리 장군님은 잘못 없다. 그건 다 제 명에 죽은거다!"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언니가 "굶어 죽은게 어찌 제 명이니?"라고 해도 "제 명이다!"라고 고집을 부리고 끝내 북한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 여동생은 돌아가더라도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려가서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당국의 세뇌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 허나 지금의 북한의 괴멸적인 상황은 더 이상 이런 세뇌로도 눈과 귀를 막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혹은 한라산 줄기가 돼서 북한에서 놀고 먹으려고 그럴 수도. 한라산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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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거 말고도 한 탈북자는 질긴 고기라도 맛있다며 남한와서 고맙게 여기고 먹는다고 지인들에게 밝힌바 있는데 고난의 행군 시절, 정말로 썩은 고기라도 먹었던 기억이 있기에 질긴 고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든지 이 시절 지옥을 겪어본 탈북자 증언을 보면...
  • [2] 이런 식량공급의 부진이 청진시직할시에서 일반시로 격하된 이유 중 하나였다. 직할시 주민들의 식량공급 규정은 일반시보다 훨씬 급이 높은데, 당시 북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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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9-04 21: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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