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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진

last modified: 2015-02-08 16:48:32 by Contributors

Contents

1. 축구선수
1.1. 플레이 스타일
2. 사진기자


1. 축구선수


FC 서울 No.22
고명진 (高明桭 / Koh Myong-jin)
생년월일 1988년 1월 9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경기도 군포시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신체조건 185cm / 77kg
소속팀 FC 서울 (2003~ )
국가대표 2경기

2014 K리그 클래식 베스트 일레븐
FW
이동국
FW
산토스
MF
임상협
MF
고명진
MF
이승기
MF
한교원
DF
홍철
DF
윌킨슨
DF
김주영
DF
차두리
GK
권순태


한국의 축구선수. 조광래 감독이 안양, 서울 시절 야심차게 육성하던 어린 선수들 중 한명이다. 당시 서울은 85~88년생의 어린 유망주들을에게 구단내부에서 대체 교육을 제공하고 운동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병역면제를 위한 중학교 중퇴를 권하고 구단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해서 모여든 선수들이 이청용, 안상현, 송진형, 김동석, 고요한, 배해민 등으로 모두가 청대나 올대를 거쳤던 A급 유망주 들이었다.[1] 석관중에 재학중이던 고명진도 서울의 스카웃을 받아 중학교를 중퇴하고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2004년 K리그에 데뷔전을 치르며 기량을 인정받아 갔고 2006시즌 이장수 감독 아래서 19경기에 출장했고 기록하는 등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2007시즌. 귀네슈 감독의 조련 아래 이청용-기성용 쌍용이 비상하는 동안 그는 정체를 보이며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12경기 출전에 그쳤고 2008시즌에도 이청용, 기성용, 김치우, 김한윤, 이을용이 포진한 서울 미드필더 진에서 자리를 잃고 14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러다 2009년 이청용의 프리미어 리그 이적, 한태유의 부상, 김한윤의 노쇠화로 미드필더진에 공백에 생기자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고 고요한과 함께 고라인이라 불리며 23경기 2골 1도움을 기록한다.

그러나 2010시즌 극심한 슬럼프와 잔부상에 시달리며 오프시즌 광란의 영입을 선보인 팀에서 자리를 잃어 9경기 출장에 그친다. 역시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았던 2011시즌. 고명진은 시즌 초반 발목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 사이 서울은 하대성, 한태유를 부상으로 잃었고 제파로프와 몰리나의 엇박자까지 겹치며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황보관 감독은 성적부진으로 8경기만에 자진 사퇴하게 된다. 황보관 감독 사퇴후 수석코치였던 최용수가 감독 대행으로 취임하면서 서울도 고명진도 반전의 기회를 맞이한다. 고명진의 테크닉에 주목한 최감독은 꾸준한 기회를 부여하며 믿음을 보여줬고 고명진은 찾아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가 대표팀의 핵심인 기성용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테크닉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만년 유망주였던 고요한과 함께 나란히 터진 2011년. 23경기 2골 7도움. 악몽의 3월을 극복하고 3위로 뛰어오른 서울발 돌풍의 핵심이 되었다.

2012시즌부터는 최현태를 밀어내고 하대성과 짝을 이뤄 중앙 미드필더로 나오고 있다. 전체적으로 패싱력을 활용한 공격전개 능력은 괜찮지만 포백 보호나 수비력에선 아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4시즌을 앞두고 하대성이 이적해 주장직이 공석이 되자 김진규가 주장을 맡고 고명진은 부주장을 맡았다.

브라질 월드컵 중에 K리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글을 남겼다. 언제나 일반상식의 부족함이 지적되는 스포츠 선수의 글치곤 충분한 숙의와 차분함이 드러난다는 평이나, 여김없이 기자들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기사화하는 것은 물론 제목낚시까지 서슴치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2014 시즌 총 31경기 2골 1도움을 기록해 K리그 베스트 11 중앙 미드필더 부문에서 이승기와 함께 수상했다. 하지만 수원의 김은선이 이 상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면서 일부 네티즌들의 불만이 있었다. 이후 빗셀 고베와 이적 협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적이 확정되었다는 기사까지 나왔었다. 주전 수비수 김주영이 상하이 동야로 이적이 확정된 상황에서 대출혈이 예상되었으나 세부 조건이 안맞은 건지 마음을 바꾼건지 막판에 방향을 선회해 서울에 남았다.

1.1. 플레이 스타일

수준급 테크니션으로 측면 미드필더도 소화 가능하지만 선수 본인은 중앙을 더 선호한다. 옛 동료 기성용과 비슷한 스타일로 뛰어난 패싱력이 돋보인다. 수비형 미드필더나 처진 플레이 메이커로 볼배급과 경기를 조율을 담당하는 기성용과 달리 전진배치 되어야 빛을 보는 스타일이다. 짧은 스루패스가 많으며 적극적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빈공간으로 찔러주는 스루패스가 일품. 큰 키에도 발이 빨라 역습시 빈공간으로 치고 올라가는 속도가 상당하다.

하지만 잔부상이 많고 기복이 심해 11시즌 이전까진 커리어에 부침이 많았다. 피지컬이 나쁜건 아니지만 상대를 압도할 정도도 아니어서 2011시즌 6강 플레이오프 울산전에선 180cm이상의 떡대들로 이뤄진 울산 중원에 지워져 버리기도 했다. 볼커팅은 괜찮게하는 편이지만 수비스킬이 떨어져서 수비시 거친 플레이가 많은것도 흠. 그래서 하대성이나 오스마르같이 수비력을 갖춘 파트너와 짝을 이룰때가 많다.

중거리 슈팅이 좋은편이 아닌데 유독 그의 인생골이라고 불리는 골들중엔 중거리슛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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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들중 가장 성공한 건 당연히 이청용. 송진형은 호주 뉴캐슬 제츠, 프랑스 2부리그 투르FC를 거쳐 제주에서 활약중이고 고요한은 꽤 오랜시간 벤치를 달궈야 했지만 11시즌 최용수 감독의 선임을 기점으로 주전으로 올라섰다. 주전경쟁에서 밀린 안상현은 대구로 이적해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고있다. 역시 경쟁에서 밀린 김동석은 울산으로 이적했다 서울로 리턴했으나 후보 선수에 머무르고 있다. 배해민은 체코로 잠시 임대같다 온것을 제외하면(출장기록이 없어 여기서도 벤치신세였던것으로 보인다.) 계속 벤치만 달구다가 한수원, 용인시청을 거쳐 포천시민축구단에서 뛰고 있다.


2. 사진기자


1951년생.

서라벌예술대학(이후 중앙대학교로 통합됨) 사진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서울신문을 거쳐 한국일보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였다.

한국일보 재직 당시 6월 항쟁 현장을 찍은 "아! 나의 조국"은 그의 평생의 걸작으로 꼽히며 6월 항쟁 및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말할 때 항상 언급되는 사진이다.
"아… 그건, 정말… 정말 전율을 느꼈다. 셔터 누르는 순간, 내 평생의 특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기자구나, 내가 사진기자구나. 사진기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다만 이 사진을 당시 신문에 싣지 못했다. 서글펐다. 자극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사진에 대한 애정이 더욱 큰 것 같다. 내가 사진기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 사진이다."

이후 한국일보 사진부 부장을 거쳐 시스 사진영상국 국장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강원도 영월군에서 폐초등학교를 개조한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을 개관하여 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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