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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조선)

조선의 역대 국왕
25대 철종 이변 26대 고종 이형 27대 순종 이척

대한제국 역대 황제
칭제건원 초대 고종 이형 2대 순종 이척

(ɔ) 석지 채용신 from
묘호 고종(高宗)
시호 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
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연호 개국(開國)[1], 건양(建陽)[2], 광무(光武)[3]
명복(命福)[4] / 재황(載晃) / 형(𤌇)[5]
명부(明夫) / 성림(聖臨).
주연(珠淵)
출생지 조선 한성 정선방 흥선군 사저
사망지 식민지 조선 경성 덕수궁 함녕전
즉위식 1864년 1월 21일 (음력 1863년 12월 13일)
장례식 1919년 3월 3일
배우자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아버지 이하응(李昰應)
어머니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생몰기간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66세 150일)
재위
기간
전체 1864년 1월 21일 ~ 1907년 7월 20일 (43년 190일)
조선 국왕 1864년 1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 (33년 274일)
대한제국 황제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20일 (9년 283일)
대한제국 태황제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3년 42일)
식민지 조선 이태왕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8년 148일)

이렇게 보듯 재위기간이 영조(52년), 숙종(46년)를 제외하고 가장 긴 임금이다.(그 다음이 선조의 41년이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 15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는다. 아마 망국 + 독살(?)되지 않았다면 살아있는 기록이 되었을 인물(...). 참고로 같은 해 태어난 메이지 덴노의 재위기간은 45년 5개월이다. 죽기는 고종보다 7년 이른 1912년에 죽었다.

조선 왕조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연호는 광무.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참으로 길다. 역시 황제.[6] 약칭 고종태황제.

Contents

1. 사진
2. 개요
3. 생애
3.1. 친정 시작
3.2. 운요호 사건과 개항
3.3. 임오군란
3.4. 갑신정변
3.5.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3.6. 을미사변
3.7. 아관파천
3.8. 독립협회
3.9. 광무개혁, 대한제국 선포
3.10. 러일전쟁
3.11. 을사조약
3.12. 헤이그 밀사 사건, 퇴위
3.13. 사망
4. 평가 - 마지막 안간힘?
5. 수난과 시련의 왕
6. 개인사
6.1. 고종과 군밤떡밥
6.2. 미국인 황후 떡밥
7.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
8. 고종이 등장한 대중매체

1. 사진

근대의 왕답게 어진과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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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일가 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 상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아내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단 이 사진은 후대에 조작 및 합성되었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기사 참고[7])

Gojong.png
[PNG image (365.71 KB)]

정장 차림의 고종

98426992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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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룡포를 입은 고종과 순종. 컬러화된 사진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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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사망한 해의 고종

2. 개요

사실상 조선 최후의 군주이자 독립운동가. 물론 27대인 아들 순종이 있지만 그는 그냥 허수아비로 평생을 살았기에 사실상 고종이 최후의 군주라 할 수 있다. 외국인 황후를 맞이한 최초이자 마지막 조선의 왕, 물론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라프 지와 보스턴 선데이라는 외국 언론의 헛소리다.

'잘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거나, 조선 멸망 후 안습한 왕족들의 삶 등으로 인한 동정표도 많이 받으나, 그의 근대화 노력이라 알려진 것이 실상은 솔직히 말해서 민씨 일가의 부패와 동아시아 왕조들의 고질적인 두루뭉술하고 무능한 행정, 서양문화와 기술에 대한 불이해등 병크로 점철 되어 있다. 물론 그의 재위 시기가 18세기 후기~19세기 초였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망국 상황이라서 문제지. 그리고 1907년 고종은 일본의 압박으로 강제 퇴위를 하게 되고,조선의 군대는 해산된다.

3. 생애

3.1. 친정 시작

어린시절에 그는, 아버지 대원군의 의지와 생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즉위 10년이 지나 22세의 성인이 되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옹호하는 신하들을 몰아내어 자기 주도적으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였다. 대원군 시기의 고종 시대의 치세와 대원군의 실각 과정은 흥선 대원군 항목 참조.[9]

고종은 즉위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대원군파, 중도의 안동 김씨들, 흥인군 이최응, 김병학을 비롯한 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었고, 대원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민승호와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을 등용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 사창제, 서원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는 복구하였으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켜주되 힘은 돌려주지 않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당백전 만큼은 아니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호전(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튼 이 무렵의 정치를 보면 기본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전통시대 군주'로서 평타 이상은 되는게 이 시기.

3.2. 운요호 사건과 개항

그러던 중 1875년 운요호 사건이 터진다. 측량을 구실로 접근한 운요호는 조선군이 위협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영종도 수비대가 일본 수병 36명(전원 전장식 단발총 무장)의 상륙에 전혀 저항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영종도는 1868년에는 무장한 선원 200명의 공격을 격퇴해냈던 전과가 있다. 초지진도 운요호 한 척이 초토화했다는데, 그보다 겨우 4년 전에는 미 해군 포함 2척과 슬루프함 2척의 함포사격을 하루종일 받으면서도 미군 상륙 개시 전까지 계속 응사하던 포대였다[10]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1874년 1월부, 즉 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일대의 군영에 돌릴 예정이던 예산들이 모조리 박살났던것. 청전 폐지로 갑자기 격심한 디플레이션을 야기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강화도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를 혁파하여 가뜩이나 재정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운요호 사건 시점에서 경기도 서해안의 주요 수군영은 몇 달째 군수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부득한 조치들이었다. 국가 1년 예산의 15배도 넘어가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66년 11월에 당백전을 찍어낸 대원군의 화폐 정책 때문에 당시 조선의 화폐유통은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이후 2년 만에 말도 안되는 악화[11]인 당백전이 폐지되었는데 인플레이션[12]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백전이 폐지되자 조정의 재정난이 극도로 심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 대원군이 주력한 것이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의 동전 청전 유통을 강화 하는 것이었다[13].

그런데 이 청전도 악화이다[14] 이 청전은 삽시간에 상평통보 유통량의 40%를 점유하였고, 조선내에서는 화폐에 대한 불신풍조가 다시 일어났다. 당백전으로 불안했던 경제사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된 것도 당연한 수순. 이렇게 당백전의 발행과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위기를 그나마 넘어가기 위해서 도입된 청전이 한순간에 조선을 다시 휘청이게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4~5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화폐부실 문제로 1874년 청전이 폐지되자 다시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포함해서 역작용으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다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강수세가 폐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15].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 등골빼먹는 수준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여력을 악화시켰다는 것과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과정에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과 폐해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고종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폐지하는 것이 어떻게냐는 비판조차 말이 안되는 것이 화폐개혁을 시간을 두고 진행한 경우는 거의 100% 그레샴의 법칙이 왜 무서운지 알게된다. 단적으로 당백전이 발행되자 말자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씨가 말랐고, 당백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애초에 관북 이상 지방과 영남 지방은 청전 같은 악화는 쓰지도 았았기 때문에 부작용은 더더욱 집중되었다. 그 부작용은 안그래도 허약한 조선 조정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청전을 폐지해서 군사력을 더 떨어뜨렸느냐라는 것은 억지비판이 된다.[16]

바로 중국이 무너지고 일본이 개항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군비를 삭감한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애초에 조선 경제가 초토화되는 사태에서 당장 쓸 일도 없는 군대를 줄이지 않는 것 말곤 그다지 방법이 없긴 했다. 조선 조정의 인식이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는 우리나라에 서양놈들이 와서 뭐하겠어 하는 지극히 나이브한 인식이었던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이 문제의 근본적인 것을 깔려면 애초에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한 것을 따져야 한다.

각설하고, 운요호의 무력에 조선은 놀라긴 했지만 이최응과 박규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고종은 문호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문을 열고 관을 설치하여 통상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러 유림과 대원군의 결사반대조차 옳지 않다고 씹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여기 까지는 좀 아쉬워도 그럭저럭 봐줄만 한데....

3.3. 임오군란

그러던 중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의 부패로 인해서 가뜩이나 별기군 창설 이후에 푸대접받고 있던 구식 군인들이 13개월이나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해서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받을 수 있었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수많은 구식 군인들은 특별한 소속 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부업으로 겨우 먹고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그들에게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는데 문제는 급료로 지불된 쌀이 겨와 모래가 섞인 썩은 쌀들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고지기들은 겁도 없기 군인들에게 꺼지라고 큰소리를 쳐댔고 분노한 군인들은 고지기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다면서 나라에서 월급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란 정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근데 민씨 일가의 수장인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왕의 명령을 씹고 주모자들을 감금한다.(...)

이에 구식군인들 사이에서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폭발한 군인들은 선혜청 제조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하고 있던 고관대작들을 닥치는대로 죽였고 일본군 교관들과 민간인도 살해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은 허겁지겁 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대원군을 보고 환호했다. 대궐에 몰려든 군인들은 민중전을 내어 줄 것을 대원군에게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중전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란 말을 하여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별기군을 해체하고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모든 통상조약의 파기를 선언한다.

그런데 이홍장의 지시로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쳐 대원군을 자신들의 진지로 초청하는 체 하며 그를 납치하여 청으로 끌고 가는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홍계훈의 기지로 목숨을 건졌던 민비가 청나라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청이 나름 친청적인 면모를 보인 대원군을 납치해간 이유는 대원군의 쇄국 재개가 일본을 자극하여 동북아의 균형을 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 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정여창의 눈에 들어 출세한 23세의 젊디젊은 원세개는 북양군벌의 철수 이후 조선에 잔류한 청군을 지휘하며 조선에서 총독이라도 되는양 행세하게 된다.

3.4. 갑신정변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이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1884년의 갑신정변이다.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넘긴[17] 그들은 민씨일파, 고종과 명성왕후를 확보하여 경우궁으로 옮기고 전영, 후영의 장수들과 고종의 내관들을 비롯하여 자신들의 집권에 방해되는 이들과 그들이 부르기엔 수구당, 실질적으로 온건 개화파에 해당하는 이들을 입궐시켜 닥치는대로 베어죽였다[18].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김옥균 등에게 애원했지만 흥분한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을 선언했지만 눈치 빠른 명성왕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신정왕후께서 넓은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넓어 방어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원세개가 지휘하는 1500명의 청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군이 몰려들면서 급진 개화파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급진 개화파는 고종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이 죽어도 대비가 계신 창덕궁에서 죽을 것을 고집하여 결국 고종을 놔두고 자기들만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일본으로 도주하는 처지가 된다. 이중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 홍영식은 남아 전영과 후영의 병사들에게 합세하려는 고종을 칼로 막아서려다가 흥분한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는다. 결국 이들의 반정으로 인해 개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고 급진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오히려 공고해지고 말았다. 한편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한성 조약을 강요하며 배상을 받아냈고 청에겐 무력시위를 하여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3.5.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조선은 청이 주도권을 잡고 유럽, 미국, 일본의 세력이 기웃거리는 묘한 공백 상태에 빠진다. 원세개가 총독에 준하는 권력자가 되어 조선에 군림하긴 했지만 그의 행보는 다른 열강을 의식했는지 의외로 소극적이었고 별 의미없는 10년이 훌떡 지나간다. 그 10년간 고종은 5영을 3영으로 개편했다가 다시 4영으로 개편하는 군제 개혁에 착수했는데 기존 정변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던 군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급히 행한 것이었고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내무부를 설치하여 궁내사무와 군국사무를 겸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친위세력인 여흥 민씨들을 기용했다. 육영공원을 비롯한 학교, 제중원 등의 근대식 병원, 전신, 전기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종의 개혁들은 어디까지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대혼란 이후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자신의 왕권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두루뭉술했다.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정권 유지 기반인 재정 확보에 매달리게 했고 내무부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고종의 비자금 확보에 더 주력했다.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들여온 일부 무기와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편 계속된 교세 확장에 고무되고 기존에 금지된 천주교, 개신교의 합법화에 자극받은 동학이 대대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게 된다. 1892년 교주 최시형의 허락 아래에 공주에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려 충청 감사 조병식을 통해 동학 합법화의 뜻을 전달했다. 조병식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감영에서 와서 따지면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학 단속을 완화했다. 이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지만 충청도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893년 동학대표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최제우를 신원하고 동학을 합법화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 이하 조정은 매우 긴장했고 고종은 이단을 탄압하는 것이 열성조의 법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유림들도 앞을 다투어 동학을 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조정은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보은에 전국의 모든 교인들을 집합시켰고 보국안민, 척왜양창의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만명의 교인이 보은에 집결했다. 경악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려보내 동학교도들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한편 조정은 동학교도들이 서울로 진공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와 평양의 병력을 수원과 용인에 급파하고 서울의 군사들을 대기시키자는 논의에 고종은 외국 군대를 동원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조정은 고종의 주장에 크게 반대했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차피 원세개가 지휘하는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청군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한편 어윤중은 동학교인들을 타일러서 해산시키는데 성공했다. 사실 해산이 신속했던 것은 동학 지도부가 전봉준을 비롯한 과격파에 스스로가 놀랐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로 이동하여 또 집회를 가졌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마침내 봉기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조정은 황토재에서 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홍계훈과 장위영 병력을 급파하지만 장성 전투에서 또 패전보를 듣고 전라 감영까지 함락당하자 마침내 민영준을 보내 원세개와 접촉하여 청군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원세개는 이에 간단한 일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이홍장도 파병을 결정하여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한다. 그런데 농민군은 홍계훈의 독일제 쿠르프 야포 포격에 잇달아 패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군의 등장에 일본군이 톈진 조약을 빌미로 덩달아 인천에 나타나면서 조선도 청도 농민군도 당황한다. 농민군은 이러다가 나라가 외세의 전쟁터가 되겠다고 전주 화약을 맺고 물러났고 조선 정부는 청과 일본에 모두 철수를 요구한다. 청나라는 이에 곧바로 응했지만 일본은 "우리가 알기론 동비들이 소탕되지 않았다."란 억지를 부리며 철수를 거부한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군이 혹시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저러는가 싶어서 동시에 철수하잔 제안을 했으나 일본은 이도 거부한다. 이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미국, 영국이 중재에 나섰으나 일본은 거부했고 역으로 청나라에게 같이 동학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잔 제안을 한다. 청나라는 "동학란은 이미 다 끝났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일인데 왜 니들이 더 난리냐?"라고 거부했고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퍼부어 청나라 군함들을 침몰시키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독립선언을 강요한 다음에 고종을 위협하여 청나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모든 청군은 조선을 떠나라는 명령서를 받아낸다. 일본은 대원군을 포섭하여 고종에게서 앗은 전권을 위임한다. 대원군은 민씨들을 숙청면서 내정 개혁에 착수하려 했지만 문제는 대원군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별 힘이 없었다. 실세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박정양을 비롯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는 개화파들이었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갑오개혁이 실시된다. 이 시기에 드디어 노비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도량형의 통일, 화폐개혁, 조세의 금납화, 재정 일원화가 실시되었다. 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과거제 폐지, 연좌제 폐지도 실시되었으며 지방관의 사법권도 박탈했다.

한편 자신이 일본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군은 전봉준[19], 이홍장 등과 접촉하면서 힘을 합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달란 로비를 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평양 전투를 비롯해서 일본군에게 개박살나고 동학농민군도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어쨌거나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요동을 토해내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할 생각을 가지고 인아거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는 외교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3.6. 을미사변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은 김홍직 내각을 통해 조선과 동맹을 체결했고 20개조 개혁안을 통해 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왕후의 정사 개입도 금지했다. 이 와중에 청군, 동학군과 내통한 것이 걸린 대원군은 완전히 실각한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내세웠고 고종으로 하여금 범 14조를 고묘하게 했다. 이 시기 고종의 호칭은 대군주로 왕비가 왕후로 세자가 태자로 바뀐다. 한편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 대사 베베르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 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 3세,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러시아 제국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베베르도 고종 부부의 주장에 부응하면서 본국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준용 역모 사건이 터진다.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박준양, 이태용 등과 합세하여 김홍집 내각을 없애고 고종과 순종, 명성왕후를 죽이고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한 것이다. 이를 박영효와 서광범이 밝혀내어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궁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20] 역모를 꾀했다고 하는데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효는 허겁지겁 일본 공사관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명성왕후, 유길준, 이노우에의 모함으로 자신이 실각했다고 주장한다. 박영효에 의해 실각한 김홍집이 복귀했고 박정양, 이완용, 이운용, 이범진, 민영환 등의 정동구락부 출신의 친미파, 친러파들이 득세한다. 박영효 중심의 친일 내각이 완전히 실각한 것이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훈련받던 훈련대도 해산해버린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를 부임시켰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름이나 그와 같이 지내며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엔 대원군도 동석하여 대충 명분 비슷한 것을 갖추었고 홍계훈과 이경직을 죽이고 명성왕후를 시해한다. 이 와중에 낭인들은 고종 앞에서 칼을 겨누고 순종의 머리채를 끌어잡는 등 행패를 부렸다.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입궐하는 척하며 입궐하여 친미파, 친러파를 내쫓고 친일파 이재면, 조희연, 유길준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각국 공사들의 추궁에 훈련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워낙 증인이 많아서 곧 거짓말인게 드러난다.

새로운 내각의 핵심은 유길준이었다. 그의 주도 하에 을미개혁이 실시되고 유명한 단발령이 실시되어 고종과 순종이 같이 머리카락을 자른다. 연금상태의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의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일본의 독살을 우려하여 아예 그들이 만들어온 음식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 와중에 명성왕후가 단순히 어디 피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단 정황이 포착되면서 근왕파와 민심이 매우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재순, 이도철 등의 근왕파들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미, 친러파,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 합세하여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지만 일부 대대장의 밀고로 군부대신 어윤중에 의해 진압당한다. 정동구락부 인물들은 각국 공관에 대피한다.[21] 한편 고종은 유림들에게 밀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의병 궐기를 촉구했고 고종 33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수령들을 참수하고 여러 고을을 점거했다.

3.7. 아관파천

을미의병으로 인해서 한양에 주둔한 군세 대부분이 각 지방으로 내려가 감시가 소홀해지자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를 타고 순종과 함께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베베르는 인천항에 정박시켜놓은 러시아 수병 117명을 동원해 즉각 공사관에 배치함으로 공사관을 지켰는데 단순히 117명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고종을 보호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한 제스처였다. 고종은 즉각 친일 대신들을 죽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왜놈 세상이 끝났다고 흥분한 군중이 김홍집, 병하, 어윤중 등을 노상에서 참혹하게 살해했고 유길준 등은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 세력은 이렇게 조선에서 완전히 일소되고 만다.

3.8. 독립협회

아관파천 이후에도 고종은 한동안 러시아 공사관과 기존의 궁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각된 단체가 독립협회이다. 원래는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단체였으나, 이후 독립신문 발간 등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개창자중 대표적인 인물인 필립 제이슨,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박영효 계열 등의 영향으로 친미친일적 급진개화 단체의 성격이 강해졌다.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이후 개혁방안을 두고 국협회와 대립하는 와중에도 나름의 역할을 하였으나, 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보인 과욕으로 인하여 이후 정세에서 배제당한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중추원, 광무개혁 항목 참고.[22]

3.9. 광무개혁, 대한제국 선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적으로 근대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자주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관파천이 시작된지 1년뒤인 1897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또한 고종은 환궁직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선포하였다.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고친 직후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광무개혁의 추친방향은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옛 조선의 제도를 근본으로 하며 새로운 제도를 그것에 맞춘다는 뜻이다. 우선 대한제국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인사권, 외교권 모두를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여 전제 군주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고[23] 황제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내장원을 설치하여 황실의 재정을 담당케 하였다.

또한 지방행정의 경비를 줄이고자 갑오개혁때 설치하였던 지방의 23부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황제의 복장을 프러시아의 군복을 착용케하였고,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인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직접 군권을 장악하고 서울 및 지방에 군사수를 대폭 증강시키며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제국의 군사력을 증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외교면에서도 자주적인 외교를 추진하였다. 청나라와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수정하였고 간도에 간도관리사를 파견하고, 연해주에도 '해삼위 통상사무'(해삼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명한다)를 설치하였다. 경제, 사회면에서도 정부의 조세 수입을 늘리고자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소유 문서인 지계를 발급하였으며 화폐를 은본위에서 금본위로 바꾸려 시도 하였지만 제정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고종은 이 개혁을 통하여 조선을 근대적인 국가로 전환하려 시도하였지만 결국 일제의 러일전쟁의 승리와 한일 의정서체결의 따라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면서 광무개혁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24]. 게다가 근대화에 대한 이해 부족과 고종이 지나치게 정권 유지에만 집착을 한 통에 그나마의 어설픈 개혁조차도 그다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진 못했다. 게다가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로 조선과 거의 넘사벽의 경제력을 구축하면서 수십만의 정예군을 거느린 반면에 조선은 재정 부족으로 전성기에도 3만명 이상의 근대식 군대를 보유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숙련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미지수다. 무기부터가 마구잡이로 사들인 거라서...

3.10. 러일전쟁

당시 조선은 삼국간섭 이후로 꾸준히 신경쓰던 인아거일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막으려 했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러시아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일본간의 갈등은 첨예해졌고 결국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진다. 일본은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만주의 러시아 군대를 공격했고 조선을 강제로 동맹국이라 쓰고 빵셔틀이라 읽는다으로 끌어들였다. 일본군은 십수년치의 국가예산를 소모했으며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러시아 군대보다도 많은 희생자를 내며 신승한다. 사실상 일본의 가용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상황에서 러시아는 100만명 이상의 병력을 더 동원하여 한판 벌일 수 있었는데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러시아 내부가 뒤숭숭해지고 러시아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 편이라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 아래에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일본의 전략적인 승리로 끝을 맺는다. 단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푼의 배상금도 주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후의 대일 견제세력인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조선은 그야말로 일본 앞에 차려진 한끼의 밥상이 되고 만다. 여담으로 루즈벨트는 포츠머스 조약 중재 댓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3.11. 을사조약


러일전쟁의 종전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의 위협적인 국서를 가지고 고종을 알현한다. 국서의 내용인즉 순순히 외교권을 넘긴다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정말로. 메이지의 뜻이라기보단 일본을 움직이던 수뇌부들의 뜻이었겠지만 고종은 이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니 죽는 한이 있어도 응할 수 없다고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물러난 이후 열린 어전회의에선 어차피 일본애들이 내가 거부한다고 그냥 물러날 놈들이 아니니 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이때 어차피 조약은 체결될 것이니 이왕 체결할 김에 우리에게 한치라도 더 유리하게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 옳다는 의을 내놓은 이가 있으니 이가 바로 학부대신 이완용이다. 그리고 고종은 그럼 경이 잘 처리해보라고 자신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어 물러나버리고 8대신을 이토 히로부미와 면담하게 한다. 그런데 이완용은 거의 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갖다바치는 결과를 낳으니... 자세한 것은 을사조약 항목 참조.

이후 조선은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은 물론이고 거의 전국이 발칵 뒤집혀서 대혼란에 빠진다. 곳곳에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자결자들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나라가 망했다고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평민, 유림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의병이 일어나니 이가 바로 을사의병이다. 하지만 이는 을사조약을 되돌리진 못했다.

3.12. 헤이그 밀사 사건, 퇴위


을사조약의 체결은 단순히 외교권 강탈의 수준이 아니라 고종이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구했던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이 냉담한 반응을 되돌려 보내며 각국의 대사관을 철수시켜버렸다. 이쯤 되면 고종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고종의 발악을 막기 위하여 고종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차례로 조선의 권리들을 박탈해나갔다. 고종은 최후의 발악으로 이준과 이상설 그리고 이위종을 특사로써 모스크바의 이범진을 거쳐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문전박대당하였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하고 말았는데, 이는 이준이 할복자살했다는 야사를 낳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앞에 나아가 "멋진 일을 하셨더군요. 근데 앞으로는 더 공공연하게 하시지 그러십니까?라며 조롱했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앞을 다투어 고종이 일본 황제 폐하께 대죄해야 한다며 퇴위로 사죄하라고 고종을 압박했고, 고종은 단식까지 불사하며 강경하게 버티었다.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삼아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박영효는 고종의 부름을 무시하였고, 이완용과 송병준은 전화선까지 끊고는 고종을 사실상 감금하였다. 이에 고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얼마 후에 일본에서 새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는 문서가 오자, 이완용은 아예 내시 두명을 데려와서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 날치기로 황위를 교체해버렸다. 그렇게 한국사 최후의 군주인 순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고종은 이후에 비밀리에 의병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일본의 병합정책에 대하여 저항을 하였지만, 퇴위당한 이상 그에게는 사실상 아무 실권이 없었다. 결국 그는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3.13. 사망

망국의 군주로 물러난 이후 평소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목이 마르다며 차를 마시곤 사망하였다.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여 그의 인산일로 하여금 3.1운동이 전개되게한, 3.1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여러 노력끝에 마지막에 죽음으로써 민족이 뭉치게 된격.

그리고, 유난히 독살설이 많은 조선 임금들[25] 중의 화려한 대미(?)를 장식한다. 항상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26]를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가 목이 마르다고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사망하였기 때문에 식혜에 독이 있었다는 소문이 쫙 퍼져 결국 3.1 운동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 황족인 이방자 여사 역시 회고록을 통해 독살설을 지지했다. 해외에 나가 망명 정부를 차려 독립 운동을 하려했던[27][28] 고종의 뜻을 알아챈 일본에서 직접 누군가에게 지시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애초에 고종은 강제병합 직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벌인 기록도 존재한다. 망명정부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고종독살설의 증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서 고종은 사망 당일까지 건강상태가 상당히 양호하였다. 때문에 독살이 아니라도 적어도 뇌일혈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낮다.
  • 고종 사망후 염습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3일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의 비소성분으로 사망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29]. 고종 사망은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만엔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을 올린 것으로 보이는 시녀들이 이후 의문사 하였다.
  • 이 시기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

정확한 사인을 알 수는 없지만 살해당했다면 보통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속한 어떤 매국노와 1급 친일파인 이기용[30]가 배후일 거라고 지목되고 있었다. 그외에도 역시 1급 친일파로 일제에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으며 이왕직의 총관이었던 한창수와 한상학을 후보로 거론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2010년, 일본이 일부러 고종을 독살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이방자의 결혼이 본래 1919년 1월25일에 예정된 상태므로,불과 4일 후에 결혼식이 예정된 상황에서, '내선일체'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할 좋은 기회였던 일본이 일부러 신랑의 아버지인 고종을 제거해 물의를 일으킬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종 망명설을 부정하거나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고종의 사망 때문에 실제로 영친왕이방자의 결혼은 1년 뒤로 미루어졌으며, 그 사이에 3.1운동이 발생하여 반일정서가 고조됨과 동시에 공화정 수립으로 민심이 이동했으므로, 일본은 큰 호기를 놓친 셈이다.



그러다 최근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약을 탔다는 증거가 처음으로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기자의 설레발 혹은 제목 낚시. 기사를 잘 읽어보면 "데라우치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요. 님 혹시 들은 내용없음?" 라고 구라토미가 질문한 것 뿐인데, 이를 독살의 증거라고 확대 해석한 것. 이 질문은 당시에도 독살설이 있었다는 증거이지 독살 자체의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고종의 유해가 남아있으므로 나폴레옹 처럼 현대 과학 기술로 검사해보면 독살당한 것이 사실인지 규명해 볼 수 있겠으나 황제의 능을 발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홍릉(洪陵)[31]. 명성황후와 합장되어 있다. 고종의 능은 전통적인 조선식 왕릉과는 다른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민 것이라고. 본래 홍릉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처음에는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묻혔었는데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고 당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원래 홍릉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 고종의 후궁 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인데 오늘날에도 '구홍릉'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으며 이 근처에는 수목원이 있다.

뒷날 아들 순종이 죽은 후에도 홍릉 근처에 능을 써서 이 능역을 합쳐 '홍유릉'이라고 부르며 홍유릉 뒤편에는 영친왕이방자 여사나 의친왕, 덕혜옹주 등 조선 마지막 왕실 일원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홍유릉 일대는 대한제국 황족들의 가족묘인 셈.

4. 평가 - 마지막 안간힘?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을 호평하여 할만큼 했다는 주장과 답도 없는 암군이라는 주장이 극명하게 갈린다. 까는 쪽의 요지는 민씨 일파의 부패, 그의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부른 일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도 무너뜨려버린 일 등을 꼽는다. 그리고 양무호 구입을 비롯해서 기분으로 밀덕질[32] 하다가 재정 파탄내버리고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 세종대왕이 하던 것처럼 토론해보고 사는게 그리 어려웠나... 다만 이건 당시 대한제국 지도부가 근대전과 그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근대화된 군사시스템은 전통적인 교육밖을 받고 자란 대한제국의 엘리트들의 세계관으로는 이해하는 것이 쉬울리가 없다. 세종 시대와 비교하는것 자체가 무리다. 조선보다 일찍 군을 근대화한 청나라조차도 전통시대 마인드를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청일전쟁때 깃발을 휘날리며 진군하다가 그걸 표적삼은 일본군 포병의 집중포격을 받은 일이 있다.

광무개혁등의 개혁도 효과가 없다곤 못했지만 성과를 따지면 변변찮고 식민지화를 막아낼 근본적 개혁과는 안드로메다 급 차이가 있었으니...

커피자동차로 대변되는 자기 취미를 가졌다는 것도 훌륭한건 아니다. 게다가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제국 선포이후 그 정도는 심해진다.[33]장사하자 먹고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막장 대한제국의 하늘 그런데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수 있듯이 돈을 모으는데는 나쁜 의미로 능숙했지만 돈을 제대로 쓸줄은 몰랐다. 게다가 왕실 유지를 위해 걷는 내탕금도 과다해서 여러 개혁 이후에도 국가 세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더구나 개혁핑계로 모은 내탕금 확보는 백성들에게 대한 가혹한 수취로 이루어져 백성들 삶을 더욱 고달파졌다.

물론 반박도 있다. 독립협회는 뚜렷한 권력기반도 없으면서 아예 고종을 입헌군주로 격하시킬 정도의 위세를 자랑하며 고종과 유림을 매우 경계하게 했고 결국엔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민중까지도 등을 돌려버릴만큼 과격한 행보를 일삼았으니 일방적으로 고종이 잘못했다고 하기도 어렵다. 자세한 것은 독립협회, 중추원 항목 등을 참조. 동학란도 이미 조선 내부에 청군이 주둔한 상태였기에 청군을 동원한단 생각이 꽤 쉽게 나온 것이었고 결국 신식무기를 갖춘 관군에게 동학군의 진격이 저지되었지만 만약 실패했을 경우 도성으로 수십만 반군이 몰려드는 처지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실책이 되었고 톈진 조약으로 일본군이 꼽사리 낄 것이란 고려도 못한 것이니 까일만은 하지만 정신나간 판단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상당한 자금지원을 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인영, 종식, 환직, , 신돌석 등은 모조리 고종의 밀지나 자금지원 중 하나, 혹은 둘다를 받고 활동했다. 이는 고종의 사망전후까지 이어져서 을미의병부터 1920년대까지의 국내외 대일본투쟁에는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무렵은 아직 전근대라면 전근대인 시기였다.

또한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외국에 힘없이 내준 점도 비난받는 부분이긴 하나 당시 조선은 근대화 개혁이 표류하면서 스스로는 개발할 기술도 능력도 부족했던 점(...)과 대신 이권을 한 나라에게 몰아 주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에게 흩뿌려서 줘서 최대한 많은 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걸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당초 러시아, 청, 일본을 제외한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에서 얻는 이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수준이라 청나라, 러시아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열강들은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는 걸 쉽게 인정한다. 게다가 이권을 내주면서 얻은 자금이라도 제대로 쓴 거냐면 위에서 말했듯 그것도 아니였다. 애초에 뭘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나는지 감이라도 잡았어야 그게 가능하지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자금은 고종 본인이 앞장서면서 한 매관매직으로 인해 번 돈이였던 것은 매우 큰 문제였다. 매관매직으로 돈을 모으니 당연히 관리들의 기강이 무너지는 건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민생의 파탄을 불러 와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 어떻게 보면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후에 조선에 미친 제일 확실한 영향으론 왕비인 중전 민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시 국상일에 맞춰서 3.1 운동을 일으킬 기회나 주었다는 것 정도. 실제로 33인이라는 인물중에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거나 고종을 지지하였던 오세창, 이상설, 한용운과 같은 부류 외에도, 독립협회 문제나 동학관련으로 고종에 불만이 많았던 손병희, 윤치호, 안창호와 같은 부류가 존재했다. 이들이 고종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고종의 영향력 자체는 존재했기 때문에 3월 1일이 된 것이다[34]. 이후 김구 등은 임시정부에서도 왕정 복고는 주장하지 않았어도 구 황실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20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고 러시아 거류 한인들에게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다는 내용의 일본 기밀문서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 신운용은 다른 방계 사료로 그런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 안중근 의거를 병탄의 기회로 노리고 있던 통감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일제 외무성이 고종 배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 고종과 황실이 안중근의 의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에서 성립될 수 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했다.[35]

그 외 업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려준 것 정도가 꼽히기도 하지만, 김구 선생의 명성황후 시해관련 일본인 살해건은 백범일지의 기록과 달리 실제 불투명한 점이 많아 고종이 그를 살려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궁전내에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서 살려줬다는데, 그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서 살고 있었다.(…)[36]

그외에 중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학설도 존재[37]하는데, 만일 실제로 임시정부에 고종이라는 구심점(+자금줄)이 존재하였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그 수준을 달리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고종이 확실하게 고평가를 받을만한 점은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뒤로는 일본 엿먹일 궁리를 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면전에서 그 점을 비꼬기도 했다. 애초에 일본이 뭐 자기네 힘 과시하려고 고종 끌어내린 게 아니다. 그리고 당시 고종을 비판했던 수많은 국내의 지식인들과 명사들 중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제에 굴복해서 변절의 길을 걸었다.[38] 고종 역시 일제에 타협하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형태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39].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의 이전 군주들은 이런 형태로 다루어진 사례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고종이 이런 길을 걸었다면 일제의 조선병합은 한결 수월하였을 것이다.[40] 고종의 막장 행보가 아니었다면 개화파들이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41][42] 게다가 위태한 상황을 타개해 보겠다고 나름 나서던 엘리트 지식인층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다가 나중에 일방적으로 탄압해 버리는 왕에게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냐며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고종 입장에서 보면 개화파 측도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 때 뒤통수를 쳐 댄 놈들인 건 마찬가지라 도찐개찐이다. 게다가 현대 시각으로 봐도 급진 개화파의 개혁 방안은 취지는 좋을 지 모르나 방법론에서는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일본: 개화파 여러분의 뜻처럼 다 우리에게 맡기면 자주 정부도 필요없겠죠? 그래서 합병해 드렸습니다.

그나마 동정론 및 정상참작을 펴보자면 고종이 권력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영향도 없지는 않다. 대원군은 고종이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려 하지도 않아 민씨가와 힘을 합쳐 몰아내야 했고 친정을 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쿠테타 시도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고 했고 자신을 복권시킬 세력으론 노선이 완전히 다른 급진개화파, 청나라, 일본, 동학농민군, 임오군란 폭도들이든 가리지 않고 손을 잡으려고 할 정도로 위협적이고 맹목적인 세력이였던 만큼 고종으로써는 자기 측근들 빼고는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여겼을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는 했다. 거기에 김옥균 류의 신임했던 급진개화파들이 일본군과 함께 칼들고 몰려와서 온건개화파 다 쳐죽이질 않나 을미사변 이후 억지로 명성왕후 폐서인 전교를 내리고 선교사들이 싸온 도시락으로 먹으면서 벌벌 떨다가 러시아 공사관 가서야 겨우 복수극하지 않나... 물론 그것이 고종의 실정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망국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애초에 고종은 전제군주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전세계가 대부분 전제군주국인 상황이거나 막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할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전제군주 했다고 깐다면 한국사 군주들은 죄다 독재자로 다 까야 한다.

일단 고종이 이렇게 욕을 먹는 이유는 그가 망국의 군주임에도 왕좌와 목숨을 걸고 죽기 아님 살기로 저항하려는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못한 점이 크다. 을사조약 때는 죽어도 못한다고 하다가도 발을 빼버려 후대에 을사육적 소릴 듣기도 했고 여러 변란이 있을 때는 겁에 질린 것+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저항해봐야 뭐 소용없다는 심리가 되서 제대로 된 저항을 거의 하지 못했고 그의 저항은 주로 헤이그 특사, 의병 궐기 권유같은 꼼수나 아관파천, 이권 배분같은 외교적인 것이라서 총 들고 통쾌하게 일본군 때려잡는 거 좋아하는 한국인들 입장에선 겁쟁이, 비겁자로 보일 소지가 다분하다. 게다가 막판에 일본이 허수아비 황제를 세우는 것을 막기 위해 퇴위되지 않기 위해서 단식투쟁까지 하며 버틴 것은 오히려 권력에 환장한 인간이란 오명만 써서(...).

고종의 능력치나 정치력으로 말할 것같으면 전통적 조선의 군주로써는 호포제, 사창제 유지, 유림 제지 등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고 독립협회 개발살내는 때의 꼼수는 혀를 내두를 만하지만 청나라가 무너지고 일본이 개항되고 서양개항선이 몰려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선 뭐... 서양인하면 치를 떤 메이지완 달리 나름 근대화에 관심은 보였지만 기초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전무한 상황에서 잘되면 그게 이상한거고... 소위 개화파란 인사들은 답도 없이 해외의존적이었으니 뭐...

종합적으로 보면 좋게 표현하자면 위기인 상황에서도 임기웅변이 뛰어난 인물이고 나쁘게 보면 꼼수밖에 못 쓰는 인물로 볼 수 있겠다(...). 50년만 일찍 왕이 되었으면 괜찮은 평가를 받았겠지만 전형적으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인물.

황태자순종 외의 아들로 의친왕 이강과 영친왕, 그리고 일찍 죽은 완화군(완친왕)이 있다. 딸로는 덕혜옹주가 있는데 조선 최후의 왕녀이며 이후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에게 시집갔다.

5. 수난과 시련의 왕

역대 조선의 27명의 임금들 중 가장 수난과 시련을 많이 겪게 된 임금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더군더나 서구열강의 동양 정복이 진행되어가고 있고 일본이 서구의 문호개방을 통해서 무장화와 침략화로 진행되는 시기에 왕이 되었던만큼 급변하는 세계사의 소용돌이가 진행되던 시기에 왕좌에 올랐고 이미 그가 왕이 된 후의 세계는 점차 문호개방과 열강들의 침략화가 진행되어가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1866년에 일어났던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일본의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습격사건을 거쳐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일본군경복궁 난입사건,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 1896년 아관파천을 거치게 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을 개국하여 황제로서 체면을 세우는 듯하였으나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이그 사건까지 겪게 되더니 결국에는 친일매국노들에 의해서 자신도 왕좌에서 억지로 물러나야만 했었다.

이미 물러난 후에는 1910년 경술국치라는 치욕과 굴욕을 맛보면서 살아있는동안 태자였던 순종과 함께 망국을 지켜보게 되었던 태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1919년에 파란만장한 수난과 시련을 안으며 그렇게 죽었다.

6. 개인사


보통의 조선 사람들이 기피하였던 사진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초기의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시간도 조금의 불평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43][44]

머리는 명석했던지,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반면에 뒤에 자주 서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버리하게 생겼다고 좀 까고 있다.)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롱하기도 했다.[45] 실제로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개인적일 뿐,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기에는 그의 역량도, 뒤를 받쳐줄 만한 힘도 너무 부족했다.[46] 그리고 그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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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여자가 고종이 총애한 귀비 엄씨.조선시대 미의 기준인가 고종의 취향인가[47] 저 귀비 엄씨가 훗날 진명여자고등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의 창립자다. 왼쪽의 제복을 입고 있는 소년은 귀비 엄씨 소생 왕자인 영친왕.

동갑[48] 일본의 메이지 덴노는 1867년에 즉위한것보다 4년 빠른 1863년에 즉위했다. 물론 각국의 상황이 달랐지만, 비슷한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이 통치한 두 나라의 모습이 극명하게 달라진 사실만으로도 고종의 평가는 하향되는 감이 있다. 1904 대한민국에서는 그걸로 역능욕을 먹였지만

그러나, 이 시기 양국의 차이는 국력과 시대적 상황의 차이이지 당시 국왕의 역량 차이 정도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고, 개인적 역량과 환경 대처 능력만 따지면 오히려 메이지 덴노 쪽에 문제가 더 있었다.

메이지 덴노는 처음에는 허수아비로 활동한 인물[49]황태자 시절에 워낙 방탕했기 때문에 오죽하면 강성이었던 메이 덴노를 독살 시키고 메이지 덴노를 올렸다는 이야기[50]까지 돌 정도였다. 더구나 메이지는 일본식 유교에 심취한 골수 건주의자였으며,이건 고종도 그랬지만 고종은 그래도 외국인이라도 좋아했지 부친 메이 덴노와 함께 대표적인 쇄국파였고 사진 찍기를 싫어해서 어진 역시 그림으로 그린 것만 남아있을 정도로 현대 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메이지 헌법 제정및 황실전범의 제정에서 모르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질문해서 이해하면서 군주기관설에 충실하게 헌법을 운용하는 능숙한 군주로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조선 고종으로 등장했다면 정치체제가 전혀 다른 조선에서는 별로 다를게 없거나 더 처참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고종은 잔머리는 좋았다. 주위 정세가 시궁창이라 그렇지(...).

다른 시각으로 보면 조선의 국왕과 일본의 덴노는 입장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요컨대 조선의 국왕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며 현실적인 정치를 해나가야하는 것이고 일본의 덴노의 경우에는 현실을 무시하고 전통을 따라도 좋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전통을 강조해야할 필요가 있는 상징적인 장식이다. 그건 그 시절에도 그러하여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 역시 덴노를 허수아비라고 말한 전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매천야록에서 보이는 것 처럼 을미사변 이후 5일만에 엄귀비를 불러들였다는 것을 보면 글쎄...[51][52][53]딱히 고종이 명성황후 민씨와의 관계에서 후계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명성황후가 보통 상황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외적에 의해 참살당한 상황에서 일주일도 안되어 애첩을 도로 들인 것을 보면 역량이 좋다고 보기도 힘들 듯 하다. 아무리 엄귀비가 명성황후를 닮았다고 하지만...

그 외에도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써댄 것을 보면 글쎄...솔직히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 있으니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을사조약을 체결할때라든가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할때라든가 강하게 나서야 할 시점에 초반부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저항하다가도 사태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면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종이 유일하게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건 퇴위당할 때 정도다.

결정적으로 메이지 천황과 고종을 단순 비교 하기가 어려운 것이 천황제는 거의 천년 단위로 묻혀져있던 유물이 도쿠가와 막부 몰락 이후로 허수아비로서 사용되기 위해 발굴된 것에 가깝다면 고종은 명백하게 그 지배력이 확연했던 왕조의 군주였다. 메이지가 유신에 한몫을 한 것은 맞지만 고종과 같은 유일무이한 군주로서의 위치라고는 하기 힘들다. 메이지가 신체재의 장식이라면 고종은 구체재의 기둥이었고 왕이라는 호칭이 비슷했을 뿐이다. 조선과 일본의 구시대의 마지막 지배자를 비교한다면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그나마 비슷하다.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고종은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고종 7년에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운 예술가이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운 자신감도 있었던 모양.

커피와 함께 냉면, 군밤등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군밤은 후술할 떡밥과도 관련 될 정도로 매우 즐겼다고 한다.

한국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6.1. 고종과 군밤떡밥

특이하게도 고종은 군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밤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공짜로 군밤을 주지않은 것' 물론 이 군밤장수는 신하들의 반대로 사형은 면했다.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野談)이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바로 아래 문단 참조.#[54] 사실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에 아들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어서 나온 카더라일지도 모른다.아니면 부전자전이든지 현재로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호해서 사건의 진실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고종에게 군밤 관련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니게 될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빵 사건??

  • 위에서 나온 군밤이야기에서 일부 진실부분이 있다면 실제로 고종이 즉위 초기부터 최소 즉위 중반기까지는 을 좋아했던건 사실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왕 시절 기록보다 유독 고종시절의 기록에 밤에 대한 진상기록이 많았기 때문이다.[55] 다만 나중엔 커피로 갈아탔다 이 진상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56]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준걸 보면 꽤 인자한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생각해 보면 저런 군밤장수 사형 요구 루머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인데, 고작 밤 따위로 죄를 족족 주었으면 민심이 엄청나게 흉흉해 졌을 것이고 고종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완친왕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는걸 보면 완친왕의 이야기가 고종의 이야기로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것일지도.

  • 경술국치 이후에는 순종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57]을 손수 구워다가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군밤을 좋아했던건 어느정도 사실인듯 싶다. 레알 군밤왕

6.2. 미국인 황후 떡밥


1903년 미국 보스턴 선데이의 오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독한 나날을 보내던 고종이 선교차 조선에 온 미국 오하이오의 장로교회 목사 피터 브라운의 딸 에밀리 브라운에게 호감을 갖고, 자주 궁궐에 부르게 되고, 고종 황제가 조선 왕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국인 황후를 맞이했다는 헛소리다. 그리고 이 에밀리 브라운이 위에서 고종이 총애했던 엄 귀비라는 이야기다.
물론 반발이 극심했다. 이 기사가 보도된지 몇일도 안되어 영문잡지 코리안리뷰 11월호 기사에는 "거짓말이 참말보다 생생하게 행사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미국 몇 신문이 한 미국아가씨가 한국황후가 되었다는 가십기사를 싫어 한국에 사는 미국인들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찌 이 광대놀음 같은 일이 벌어질수 있단 말인가" 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 공사관에서는 "한국황제는 외국아가씨와 결혼한 사실이 없다. 더욱이 에밀리 브라운양의 놀라운 결혼을 뒷받침해줄 근거는 찾아 볼수도 없다. 또한 한국황실로 부터 간호사, 시녀, 여교사, 가정교사, 여의사 같은 미국인 여성을 고용하겠다는 초빙요구도 받은 적이 없다." 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해프닝은 마무리됬다. 하지만 보스턴 선데이의 보도 뿐만 아니라 미국 언론에서는 조선 왕족이 미국인과 혼인하였다는 등의 거짓 기사들이 넘쳐났다.

7.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

조선이 근대화되는 시점의 군주였고 재위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왕 중 한 명. 그런데 정작 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나 부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사극들이 많아서 고종 본인은 주역에서 한발짝 벗어난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자신의 치세가 사극에서 자주 다뤄지나 정작 본인이 사극의 주역이 된 적은 없다는 점에서는 사극 속 취급은 어쩐지 중종과 비슷하다.

고종은 즉위 전에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긴 했으나 아주 잠깐동안 봉해졌다가 바로 즉위하였고, 따라서 특별한 벼슬이나 군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즉위 전 어린시절의 고종이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대부분 아명인 이명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주로 아버지와 부인 등쌀에 기를 못 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마냥 무능하다기보다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극 속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운이 없었다)'는 식의 평가에 맞춰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 명성황후가 대표적인 예.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왕인데 이런 소설들에서도 아들 순종처럼 30%는 훌륭한 군주로 나머지 70%는 개찌질이 왕고집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아버지인 이하응과 함께 아명인 이명복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격적인 군왕의 모습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어린시절 이름이 명복이었으니 나름 이름고증엔 충실

야스히코 요시카즈왕도의 개에서는 위안스카이의 위협에 벌벌 떨면서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인물로 나온다.[58]

어떤 인터넷 언론에 한 변호사가 올린 판례에서 부부의 가명을 이명복민자영으로 쓴 사례도 있다... 대놓고 노린듯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름대로 머리도 좋았고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노회한 면모도 보였으며, 개화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깔 부분은 제대로 깐다. 가령 전제적인 황제권 강화에만 집착하는 면모도 묘사하고 있고 민씨 일족의 전횡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우유부단하고 황제에서 퇴위되기 직전 말고는 전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권 말미에는 망국 이후의 고종의 후일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고종에 대한 총평을 볼 수 있다.

8. 고종이 등장한 대중매체

영화
드라마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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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선 왕조가 성립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은 1894년(개국 503년)과 1895년(개국 504년)뿐이었다.
  • [2] 1896년(건양 1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
  • [3] 1897년(광무 1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
  • [4] 아명. 어릴 때 이름.
  • [5] 흔히 희(熙)라고 알지만 다른 글씨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조.
  • [6] 참고로 리그베다 위키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한 글자가 빠져 있었다(...).
  • [7] 딱 봐도 의친왕과 영친왕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주변과 어우러지지 못한다. 더불어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
  • [8] 이전 왕들의 영정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문양과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 [9] 흔히 명성황후나 그일족과 힘을 함쳤다는, 야사에서 기인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민씨 세력은 강성하지 못했다. 애초에 외척세력이 미친듯이 득세하던 세도정치를 엎고 등정한 흥선대원군이 과거의 전철을 밟으며 제대로 된 지지기반이 있는 왕비를 뽑았을 리가 없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생각과는 달리 명성황후 민씨 본인이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명성황후는 가까운 가족과 친지가 없던 고아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흥 민씨가 척족세력으로 고종 때 득세를 했을까? 여흥 민씨는 고종 뿐 아니라 흥선대원군, 그 아버지 남연군에게는 처가이면서 외가이자 사돈이었다. 심지어 고종 뒤의 순종까지도 부인이 여흥 민씨였다. 단순히 명성황후 때문에 민씨 세력이 득세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 [10] 그런데 미군이 이토록 포격을 오래 한 것은 제네럴 셔먼호 사건의 영향이 좀 있었다. 제네럴 셔먼호는 무장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측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조선군의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여 일단 화력 제압을 시도해서 오래 포격한 것이다. 게다가 조선의 화망도 매우 정교하고 밀집되어 있어서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미군 베테랑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워낙 잘 은폐된 포대의 위치 때문에 미군은 조선군 대포의 위치를 처음에는 가늠도 못했다. 결국 초지진 포격전은 미군도 조선군 합쳐 2명의 사상자가 전부였고 본격전 전투는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에서 터진다. 자세한 것은 신미양요 항목 참조.
  • [11] 명목가치는 이름 그대로 상평통보의 100배. 실질가치는 6배 정도.
  • [12] 당백전이 발행되고 조선의 물가는 엄청나게 폭등했다. 단적으로 쌀값은 당백전 유통 6개월만에 6배로 폭동한다.
  • [13] 애초에 청전 유통이 합법화 된 것도 1867년의 일로 이것도 대원군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통되던 당백전을 회수하는 과정도 당백전을 청전으로 바꿔준 다음에, 당백전을 다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 [14] 청전은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밖에 없는 악화였다. 애초에 왜 관리들이 청나라 동전을 밀수 했겠는가.
  • [15] 이후 고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왕실 재정에 집착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자신이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초기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 [16] 어쨌거나 그 뒤로 고종은 새로 화폐 발행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 주조를 주장하자 김옥균의 차관 도입에도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이 뒤통수 치는 바람에 차관 도입은 실패하고 당오전은 당오전대로 막장으로 굴러가서 효과는 못 봤다.(...)
  • [17] 서양 선교사 겸 외교관,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의 도움으로 죽진 않았다.
  • [18] 이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에 고종의 인재풀이 더 줄어들었다. 광무개혁을 보면 고종은 인재난에 시달리는데, 갑신정변 또한 이런 배경중 하나이다.
  • [19] 이 과정에서 대원군에게는 고종 밀서 위조 의혹이 있다. 동학세력은 고종의 밀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원군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 뻥이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동학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종은 경복궁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밀서를 보낼 상황이 아니었고 동학 내에서도 일본에게 왕이 위협받고 있는데 2차 봉기를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고 본다면 이 모든 의문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 [20] 훈련대는 일본군이 훈련하는 부대고 시위대는 미군이 훈련하는 부대다. 일본을 경계하던 고종이 이걸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 [21] 여담으로 일본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우라 고로를 풀어준다. 왜냐고? 서양이 조선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못할게 어디있냐?란 논리로(...)
  • [22] 워낙에 모순적인 부분도 많고 흔히 교과서 등에서는 쉽게 언급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이다.
  • [23] 이미 조선은 전제군주정이었으니 이걸 반동이라 부르기도, 당시에 러시아, 프랑스, 프러이센,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전제군주정이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이었으니 고종이 크게 뒤떨어졌다고 보기도 뭣하다. 이 시기에는 왕정이 아닌 나라가 더 드물었다. 차이가 있다면 프로이센 등은 외견적 입헌군주정을 택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딱 황국협회가 주장했던 내용이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입헌군주정 실시해봐야 딱히 답도 없었고...
  • [24] 사실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단 중단된다. 어차피 러시아가 이길 것이니까, 승전국인 러시아와 황제 대 황제로 협상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황제 대 황제로 협상 한다고 '승전국' 러시아가 대등하게 대우해서 협상에 임할 거라 생각했으면 망상수준이다. 러시아가 무슨 소국의 국익을 자기 국익보다 우선시할 착한 나라도 아니고...
  • [25] 조선왕 독살설 참고.
  • [26] 또는 방사능홍차라는 설도 있다.
  • [27] 실제로 신한혁명당은 망명정부 계획을 수립하고 고종을 모시고 해외로 나가려 했다. 그 외에 고종의 측근들인 이회영, 이시영 들은 이미 망명하여 고종과 연락하면서 망명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는 자료 또한 꽤나 많이 발견된다.
  • [28] 이미 고종 망명 시도 이전에도 이상설, 전협 등에 의해서 의친왕 망명 시도가 있었으나, 이것 역시 실패한다.
  • [29] 비소중독의 경우는 세포단위부터 사망하기 때문에 부패가 이른 편이다.
  • [30] 일제시대 자작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던 인물로 고종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친조카인 영선군은 정적이었던 것 등, 고종은 일가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 [31]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능호도 홍릉으로 한자까지 똑같다.
  • [32]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위해서는 무기의 규격과 탄약의 종류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독일제 쪼금,프랑스제 쪼금, 러시아제 쪼금, 일본제 쪼금 이런형식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대한제국군이 해산될때까지 병사들이 서로 사용하는 총이 달라 탄약 보급과 무기수선에 어려움을 격었다.
  • [33] 매천야록에 따르면 관찰사의 경우 10만~20만냥, 일등 수령이면 최소 5만냥 선의 벼슬의 구체적인 값까지 제시되어 있다.
  • [34] 실제로 고종의 장례는 3월 3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장래를 치루는 당일이 아니었던 이유는 장례를 치르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라는 이유였다. 여담으로 3월 2일이 제외된 것은 일요일이어서. 농담같지만 기독교 인사들의 반대이유였다.
  • [35] 여기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와 관련하여 자신의 배후로 지목한 대한의군 총대장 김두성(金斗星)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태진은 김두성을 고종 황제 자신으로 지목했지만 신운용은 이를 반박하고 김두성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출처: 신운용 「한국의 안중근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남북문화예술연구》제11호, 2012)
  • [36] 앞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과 궁을 오갔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연성은 존재한다. 오히려 문제는 의외로 많이 문제점이 제기되는 백범일지 자체의 신뢰도 문제이지만.
  • [37] 결론은 화려한 독살로 끝나서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지만
  • [38] 고종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거의가 개화파를 잇는 인사들이었고, 이들에게 일본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면서 근대화의 교사라는 양면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 [39] 이 경우는 물론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 평가는 최악이 된다. 삼국지유선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동시에 반대세력이 과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단적으로 베트남국이 이런 식이 되었다.
  • [40] 순종은 비교적 온순한 식민지 군주였지만, 일제에 의해서 옹립되었다는 근원적 문제에 더해서 김홍륙 독다사건으로 바보가 되었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어서 큰 의미 부여는 안되었다. 단적으로 고종이 죽은 이후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군주정(유교적인 전제군주정이든 근대적인 입헌군주정이든)이라는 정치체제를 주장한 단체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 [41] 한일병합 이전 개화파의 주장은 단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에게 전권을 다오로 요약된다. 친청, 친러, 친일, 친미는 정권 획득을 위한 연줄만들기 과정이었고, 자기들끼리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화속 영웅이나 전생체험 먼치킨이라도 나온다면 모를까 이들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관료제를 유지하고 백성들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신화적 업적이다. 당시 중추원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과욕이나 광무개혁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족한 현실 인식 등을 보면 고종의 레벨을 어디까지 올려야 이들을 재교육시키고 설득시켜서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세뇌 내지 최면술이라도 사용해야 되나?
  • [42] 특히 급진개화파들의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은 위정척사를 외친 유생들보다도 더 이상주의적이라 일본이 하는 제안은 속내도 의심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었다. 일본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거야.
  • [43]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 [44]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단다….
  • [4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내용이 나온다.
  • [46]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이라든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역량, 당시 사대부들의 태도 등을 고려해봤을 때 그 어떤 왕일지라도 조선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망하지 않았다 해도 태국처럼 막후에서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 [47] 매천야록에는 귀비 엄씨는 명성황후와 용모가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응?
  • [48] 1852년으로 고종이 양력 9월 8일(음력 7월 25일), 메이지가 11월 3일로 2개월 빠르다.
  • [49] 처음부터 츠마 거대 번들에게 휘둘렸다. 당시 유신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양대번에서 독점했으니 두 국왕은 결국 이들을 상대한 격이다.
  • [50]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들었던 이유중 하나로까지 등장한다. 일본 내에서는 메이지 덴노 대역설까지 돌고 있다.
  • [51] 다만 매천야록이 야사라는 점은 감안하고 보자.
  • [52] 그리고 그 당시 왕비와 함께 고위급 상궁들이 죽어 내명부를 조율할 여인이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세자빈 민씨가 있긴 했으나 을미사변의 충격과 시어머니 민씨의 갈굼으로 인해 세력이 없다시피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의 투기로 다른 후궁도 없던 상황이었다.
  • [53] 또한 끄때까지만 해도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인되지도 않은 시점인데다가 박시백 화백등은 고종이 임오군란 때처럼 조금만 기다리면 어디서 명성황후가 나 살아있다! 하고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 [54]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고종이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당시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이쪽도 기록의 왜곡이 어느정도 진행되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리가 없다. 단, 고종실록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게, 고종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일본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이전에 고종실록을 조선왕조 실록으로 이어놨었는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 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 [55] 정확히는 황율(黃栗).
  • [56] 대부분 경상도 관찰사
  • [57]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
  • [58] 이 만화 자체는 제국주의 비판 만화다. 오해하지 말자. 오히려 명성황후가 여기선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이는 날카로운 인물로 나온다.
  • [59] 궁에서 벗어나서 망명을 하려다 암살당하는 장면으로 매우 잠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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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2-02 18: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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