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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수

last modified: 2015-04-04 01:41:05 by Contributors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고종수 (高宗秀 / Ko Jong-Soo)
생년월일 1978년 10월 30일[1]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남도 여수시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왼쪽 윙어, 윙 포워드
주발 왼발
프로데뷔 1996년
은퇴 2009년
등번호 22 (수원), 10 (대전)
8, 14, 22[2] (국가대표)
소속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2004)
교토 퍼플 상가 (2003, 임대)
전남 드래곤즈 (2005~2006)
대전 시티즌 (2007~2008)
스태프 수원 삼성 블루윙즈 U-18 코치 (2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트레이너 (2011~20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2013~ )
국가대표 38경기 6골
별명 앙팡테리블[3], 고길동[4]

1998년 K리그 MVP
김주성 (부산 대우 로얄즈) 고종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안정환 (부산 대우 로얄즈)

1998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김현석
FW
샤샤
MF
고종수
MF
유상철
MF
백승철
MF
안정환
MF
정수
DF
안익수
DF
시엘
DF
이임생
GK
김병지
199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시엘
DF
홍기
GK
이운재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천재들 중 하나.[5]
수원 삼성 블루윙즈 레전드이자, 프랜차이즈 스타.

Contents

1. 선수시절
1.1. 화려한 데뷔, 그리고 리즈 시절
1.2. 시련과 재기 그리고 은퇴
2. 은퇴 이후
3. 대내외적인 평가
4. 기타
5. 수상경력


1. 선수시절

1.1. 화려한 데뷔, 그리고 리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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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시절의 모습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의 모습

호고등학교 재학 당시 그를 눈여겨보던 김호 감독은 새롭게 창단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초대 감독을 맡아 수원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결국 1995년 호고등학교-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입단하며 김호 감독과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다. 참고로 원래 전남 드래곤즈가 고종수에 눈독을 들여 그가 다니던 금호고에 지원이 많았었는데, 고종수는 물론이거니와 제 2의 고종수로 알려졌던 창현까지 수원 삼성으로 빼앗기자, 금호고에 대한 전남의 지원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자로 잰 듯한 패스와 크로스, 중거리 슛, 센스있는 플레이로 단숨에 수원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팀을 이끌었다. 항상 골을 넣고 하는 기쁨의 블링 세리머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997년에 노르웨이전을 통해 국가대표로 데뷔하였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 전의 참패 속에서도 고종수의 플레이는 빛났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는 "한국의 14번 선수(고종수)는 마치 브라질 선수처럼 플레이한다."고 평했을 정도로 시망 수준의 국가대표팀에서 이동국과 더불어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줘서 절망 속에서 팬들은 대한민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특히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조별리그 탈락 후 K리그 보기 운동[6]이 펼쳐졌는데 당시 이동국, 안정환과 함께 젊고 수려한 이미지를 보이며 K리그에서 소녀팬들을 몰고 다녔다. 특히 고종수는 소속팀인 수원의 적극적인 스타 마케팅 덕분에 언론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될 수 있었다. "축구선수=그냥 잘뛰는 애들"이라는 공식이 만연해 있던 그 시절 개구장이 같은 외모의 국가대표 선수가 팬 사인회를 열고 인터뷰도 잘하니 이를 안 띄워줄 수 있나. 축구 선수를 넘어 스타급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인기 덕분에[7] 현역 축구선수가 연예활동을 병행하는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왔는데, 이는 고종수 본인 스스로가 운동선수로서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팬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1998년 가수 홍경민의 2집 타이틀곡 '내게 남은 사랑을 위해'의 뮤직비디오에 주연으로 전격 캐스팅 된다. 가수 조성모를 필두로 엄청난 붐이 일기 시작한 드라마 타이즈 뮤직비디오에 이례적으로 인기 축구스타가 주연으로 캐스팅 된 것이 엄청난 화제가 되며, 무명이었던 가수 홍경민의 인지도도 함께 올라가게 된다.[8] 이에 질세라 그 다음해인 1999년에 안정환이 록그룹 야다의 데뷔곡 '이미 슬픈 사랑'의 뮤직비디오에 주연으로 출연한다. 하지만 고종수의 뮤직비디오 캐스팅은 축구선수로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게, 안정환의 경우 수려한 외모 덕분에 주연이긴 해도 뮤직비디오에서 가공된 캐릭터로 일반적인 배우의 조건 하에 캐스팅 된 것이지만, 고종수의 경우 단순히 주연 캐스팅을 넘어서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인 고종수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뮤직비디오 각본까지도 만들어 지는 등 사실상 축구선수 고종수를 위한 뮤직비디오였다고 봐도 된다. 그만큼 고종수가 당시에 축구선수로서 정말 잘 나갔다.


뮤직비디오 외에도 당시 인기 시트콤이었던 MBC 남자셋 여자셋"떳다! 고종수" 에피소드에서는 실제 고종수 선수 본인역으로 출연해서, 희진에게 홀딱 반해 신동엽을 똥줄타게 만드는 스토리로도 출연한 적이 있다. 친구인 소지섭이 이를 알고 "쟤(우희진) 남자친구 있다"며 포기하라고 만류하자 고종수가 하는 대사는 "야, 괜찮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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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성기는 21세기로 바뀌고서도 계속됐다.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에서 열린 한일올스타 vs 세계올스타 친선경기에서 세계올스타 골키퍼로 나온 라베르트를 꼼짝못하게한 프리킥골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런 활약속에 세계적인 게임회사 일렉트로닉 아츠의 축구 게임 피파 2001 국내 정발판의 표지모델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9] 특히 피파 2001의 경우 고종수 효과도 효과겠지만, 유저들이 고대하던 K리그가 탑재되기 시작하고 FIFA 시리즈 사상 최초로 한글화된 게임으로 국내에서는 상당히 의미가 깊은 명작으로 불리며, 당시 국내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순위 2위에 등극하는 등 상당히 인기도 좋았다. 거기에 2002 한일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거스 히딩크로 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며 "히딩크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받기도 하는 등 축구선수로서의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로 쭉 뻗을 것으로 예상되었다.관련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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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교수 "아인슈타인처럼만 해라"

1.2. 시련과 재기 그리고 은퇴

하지만 2002 한일월드컵을 약 6개월 정도 앞둔 2001년 8월 25일 전남과 K리그 경기에 후반 교체 투입됐다가 7분 만에 십자 인대 파열 부상을 입는다.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축구를 하면 안 된다"는 통보까지 받을 정도로 선수 생명을 위협받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래도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9개월 이상을 재활에 매달렸으나, 결국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 오르지 못하고 월드컵 4강을 달성하는 모습을 TV로 봐야만 했다[10]. 게다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징병신체검사에서도 최종 5급 판정[11]을 받아 병역의 부담은 덜게 되었지만, 그만큼 축구선수로서 신체적 결점이 있다는 것을 공식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축구 선수들의 경우 월드컵,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에서 매우 우수한 성과를 달성해서 특별히 병역면제되는 케이스가 아니면, 현역으로 복무하여 상무나 경찰 축구단에서 선수로 활동하는게 좋다. 장기적으로 경력 관리 및 연봉 협상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니까.


본인도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며 피크를 찍으려던 찰나에 발생한 치명적인 부상은 그에게 내적으로 엄청난 상실감과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선수 생활에 있어서도 상당히 무기력 해지는 등 앞으로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친다.

2002 시즌 후 FA로 풀리게 되었는데, 이 때 고종수는 FA상태로 J리그 진출을 계획하였으나 이미 치명적인 부상의 이력 때문에 구단과의 협상에 있어서 불리해 진 상태인데다, 당시 K리그 규정상 해외리그 진출에 대한 이적료 규정의 미비로 인해 수원과 이적 문제로 분쟁을 겪게된다. 결국 교토 퍼플 상가로의 무상 임대 형식으로 해외진출을 하는 것에 합의, J리그로 진출하게 되는데 당시 교토의 감독이던 핌 베어벡 감독은 고종수를 중앙 공격수로 쓰려고 하였고 고종수는 이에 반발, 결국 6개월만에 팀에서 방출당했고 6개월 동안은 소속문제로 분쟁을 겪으며 무적선수로 지내다가 임대기간이 만료된 후 2004시즌을 앞두고 수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수원으로 돌아온 후 김호 감독의 사임, 차범근과의 갈등, 팀내 부적응 등의 문제로 훈련에 불참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서 수원에서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수비수를 필요로 하던 전남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필요로 하던 수원이 벌인 병국김남일 트레이드 때 덤으로 끼어서 이적하게 된다.

전남에서는 고향팀으로 돌아온 만큼 재활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전남에서도 재활에 실패, 1년간 무적 선수로 지내게 된다. 당시 박주영이 뜨고 있던 시기였는데,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박주영에 대해 다루면서 그가 잘 성장하기 위해서 반면교사로 삼아할 예인 다른 쪽 길로 빠지고 자만하고 게을러서 실패한 천재 선배(...)의 한 예로 그의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 그리고 2014년 현재는 박주영이 고종수의 포지션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전남 드래곤즈의 팀 훈련 시간에 늦어서 황선홍 코치(現 포항 스틸러스 감독)에게 딱밤과 야단을 맞고, 훈련 중에도 몸상태가 제 정상이 아니라 제대로 성과가 나오지가 않자 답답해진 황선홍 코치(現 감독)가 다시 "국가대표가 그것도 못해?"라고 야단치자 그의 대답이 압권. "예전의 국가대표인데요."(...)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할 수가 없다.


2006년 무적신분으로 지내다 2007년 대전 시티즌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전성기 때의 호리호리한 몸을 기억하던 팬들 앞에서 보여준 술배로 의심되는 90kg까지 불어난 것으로 이야기되던 그의 몸매는 충격과 공포였다. 그러나 반년동안 몸 만들기에 주력하였으며 특히 2007년 7월 스승 김호 감독과 재회하게 된 이후 2007년 후반기부터 K리그에 출장하기 시작, 이 해 후반기에 보여준 대전의 역전극에 큰 역할을 맡아서 6강 플레이오프 기적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2008년에는 주장 완장을 받으며 큰 기대를 받았으나 막장 프런트진과 연봉 문제, 또다시 입은 부상과 재활치료 등으로 갈등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고, 2008시즌이 끝난 후 대전 프런트진은 고종수를 연봉협상 우선계약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에 고종수는 김호 감독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그저 대전 시티즌이 까여야 한다. 고종수는 2007년 입단 당시 백지계약서를 내밀며 1년 계약에 연봉 2400을 받았고, 고종수는 외부 유출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는데 고종수가 한참 부활하던 2007시즌 도중에 저걸 외부에 공개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리그 다른 팀의 오퍼가 있었음에도, 자신을 받아준 팀인데다, 은사가 있다는 이유로 고종수는 2008년 계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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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은퇴의 원인

물론 결코 이 때 쥐가 난 탓에 은퇴한 게 아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저 타이밍이 절묘했을 뿐...

해당 움짤은 온라인 상에서 좆레머니(...)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자신처럼 모난 성격을 가진 선수들을 보듬어 주고 싶다는 듯. 현재 B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A급 자격증을 준비 중. 2011년 K리그에 첫 참가하는 고향팀 광주 FC에서 코치로 영입하려 했으나 바닥에서부터 배워나가겠다며 고사하는 등 큰 시련을 겪고 난 후라 그런지 선수시절과 다르게 상당히 신중한 처신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5일 수원 블루윙즈의 U-18 유소년팀인 수원 매탄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선수 시절의 방황을 털어내고 바닥부터 공부해가며 성장해 나가는 지도자가 될 듯. 그리고 2011년 6월, 수원의 팀 쇄신 분위기에 갑작스럽게 1군 코치[12]로 승격되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ACL 4강전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 알 사드에서 니앙이 두번째 골을 넣었을때 알 사드 감독의 눈앞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항의를 했고, 알 사드 케이타의 홈팬 관중 폭행으로 인한 집단 몸싸움 때에는 수원 선수에게 달려들던 알 사드 선수들에게 닥돌해서 선빵을 날리고, 알 사드의 한 선수는 고종수 트레이너에게 밀려서 광고판과 고종수 사이에 낀 상태로 신나게 눌리며 얻어맞았다. 결국 이 경기에서 퇴장+다음경기 출장정지를 당했으나 팬들은 찬양하는 분위기.

2012년 2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도자가 된 뒤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욱해도 한 번 더 참고 넘어가려고 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하지만 알 사드 사건에서 보듯이 그의 욱하는 성격이 사실 많이 가라앉지는 못한 듯... 근데 그 상황에 누가 참을 수 있을까

2014년 6월 3일 우리동네 예체능에 출연, 프리킥 대결에서 131km/h를 기록하며 아직도 왼발이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현역 시절 회자되었고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리니지 루머에 대해 해명하면서 같이 출연한 강호동에게 "출연료를 고기로 받으면 좋겠어요?"라고 이야기하며 예능감 폭발.

3. 대내외적인 평가


한때 K리그에서 '아크 앞 정면'의 '고종수 존'이 있을 정도로 고종수의 왼발 프리킥은 국내 최고 수준이었으며링크, 경기를 읽는 시야가 좋아서 중앙에서 투톱 공격수들에게 공을 배달해 주는 능력이 좋았다. 지금도 '아크 앞 정면'을 '고종수 존'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한때 고-데-로 트리오는 모든 팀이 무서워할 정도였으니... 은퇴한 지 2년이 지난 2011년에도, 고종수와 같이 왼발을 매우 잘 쓰는 염기훈과 코치 대 선수로 프리킥 대결을 했는데 고종수가 10번 차서 5번을 넣어 5:2로 이겼을 정도다. 흠좀무

하지만 그에겐 늘 그라운드의 악동,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고, 자유분방한 발언과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기 일쑤였다. 선수 시절 그는 외부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인터뷰할 때도 솔직하게 다 말하던 성향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행동이 후회된다며 조금만 성질을 죽였으면 선수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자조섞인 심경도 털어놓을 정도다.

그리고 스무살이 되기도 전인 어린 나이부터 너무 빠르게 스타가 되었고, 축구선수임에도 이례적으로 방송 출연을 많이 하며 연예인들과 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최근 인터뷰에서도 그때 방송 출연을 많이 했던 이유로 프로선수로서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고 싶어서였다는데, 2001년 부상으로 인해 갑작스레 몰락하는 모습에서 축구선수로서 기본기와 내실을 다지는데 소홀히하고 인기에 물들여져 겉멋과 외적인 부분에만 치중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가 몰락할 때에는 잘 나갈 때 친한척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그를 잡아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방황의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후문도 있다. 관련뉴스]

2001년 십자인대 파열 부상에 관해 부상 당일에 조깅을 하면서 신체 컨디션이 너무 좋아 오버하다 부상을 당했다고 본인이 직접 회고했을 정도로, 선수로서 자기 관리와 컨트롤에 소홀했다. 화려한 수식어가 많아서 그렇지 냉정하게 되짚어보면 한 시즌 온전히, 아니 시즌의 반 이상 꾸준히 활약한 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잦았다. 선수 몸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겨울에 체력훈련에 소흘하고, 시즌 개막 후에 초반에는 반짝하다가 더운 여름에 체력 떨어질때쯤 부상 발병, 부상 나아서 이제 좀 뛰어볼까 하니까 시즌 말미라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20대 초반에는 신체 능력이 절정이라 그나마 빨리 되었는데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신체능력이 하락하자 자연스럽게 몰락해버렸다. 즉, 클래스는 있으나 게으른 스타 플레이어가 몰락하는 전형적인 길을 걸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손꼽히는 레알 마드리드 C.F. 소속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경우 고종수를 가볍게 능가하는 재능과 인기를 가졌으며 오랜 세월 정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성실하게 체력단련에 임하고 기본기 훈련을 빼먹지 않는 덕분에, 엄청난 출장시간과 운동량, 우리 나이로 30이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치명적 부상은 한번도 당하지 않은채 롱런하고 있다. 고종수는 이런면에서 많이 부족했다.

사실 그의 잦은 TV 출연이나 자유분방한 인터뷰 자체가 커리어를 망쳤다고는 볼 수 없다. 은퇴한지 한참 지난 시점임에도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안정환과 마찬가지로 역시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또한 상기한 호날두를 비롯해 해외의 유명 축구선수들은 CF나 여타 TV프로에 출연하는 일이 흔하다. 미디어에서 특정 스포츠가 등장, 대두될 때는 본래 그 곳에서 마스코트 역할을 했던 선수가 존재했고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외유를 한 경우가 많다. 고종수의 문제점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깥으로 새어버렸다는 점이다.

4. 기타

오랫동안 고종수를 따라다닌 악성루머로 리니지설이 있다. 리니지에 빠져 훈련을 게을리하고 연봉도 아덴으로 달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는 부상으로 쉴 때 동료 선수가 한번 해보라고 권해서 몇번한게 다였는데 기자들의 왜곡을 거쳐 오랫동안 그의 이미지를 좀 먹었다. 본인은 연봉을 아덴으로 받으면 나는 뭘 먹고 살겠냐며 굉장히 억울해했다.

1997년 과학소년이란 잡지에 '2002 월드컵을 노리는 복제인간'이란 만화가 실린적이 있었는데[13] 고종수를 모티브로 한 고정수란 인물이 등장한다.[14] 작중에서 묘사는 그야말로 2010년대의 리오넬 메시 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급의 실력을 갖춘 선수. 2002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우승시킨다.

5. 수상경력

  • 1997년 아디다스컵 어시스트왕 수상
  • 1998년 스포츠서울 최고의 인기선수상 수상
  • 1998년 K-리그 MVP 수상
  • 1998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1999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2000년 아디다스 컵 득점왕 수상
  • 2000년 험멜-스투 인기상 수상
  • 2001년 AFC 선정 '2월의 골'
  • 2001년 AFC 선정 '3월의 선수'
  • 2007년 윈저어워즈 올해의 재기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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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건 호적상 또는 축구상 나이라는 말도 있다. 77년이라는 말도 있고 76년이라는 말도 있다.77년생인 이영표가 후배인줄 알고 말놨다가 포크를 맞을뻔했던 사건을 감안하거나 금호고를 나온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76년이 맞긴 한 듯하다. 2014년 5월 28일자 따봉월드컵에서 밝히기로는 76년생 조우종에게 형 대접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이 출연했던 김남일의 이야기로는 고종수가 79년생인걸로 알고 있다고... 무슨 도미니카 공화국이 따로없다 하여간 진실은 저 너머에...
  • [2] 8번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당시 달았던 번호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때 14번을 단 이후 국가대표팀에서의 번호는 14번으로 계속 갔으나 히딩크 부임후 당시 소속팀 수원에서의 번호와 같은 22번을 달았다. 사실상 22번이 고종수를 상징하는 번호가 됐다.
  • [3] Enfant terribles. 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를 뜻한다. 그라운드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대담하고 탁월한 축구 실력을 선보이는 그의 모습에 착안한 별명.
  • [4] 같은 고씨에다 불같은 성질이 비슷해서 지어진 별명이다.
  • [5] 차범근은 고종수를 가리켜 '나에겐 없었던 것-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 [6] 16강 진출 실패한 것이 K리그의 약화 때문이며 2002 월드컵의 성공을 위해서는 K리그를 많이 봐야 한다며 언론이 K리그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던 트로이카(고종수, 이동국, 안정환)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K리그 분위기 쇄신에 앞장섰다. 이때까지만해도 야빠언론이니 해축빠니 하면서 팬들이 언론에 각을 세우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7] 당시 고종수의 인기는 가히 H.O.T급이었으며, 팬레터가 20000개씩 날아왔다고 한다.
  • [8] 참고로 1998년 당시 MBC 드라마 해바라기에서 삭발투혼으로 열연하며 각광받던 신예 탤런트 김정은이 고종수의 오랜 여자친구 조강지처 역으로 나온다.
  • [9] 당시에 피파 99부터 국내 정발판이 배급되며 국내 축구선수를 표지모델로 기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단계였고, 고종수 이전에 표지모델로 오른 선수들로 피파99의 안정환과 피파 2000의 김병지가 있는데, 그야말로 이들 역시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라고 할 수 있다.
  • [10] 여담으로 만약 이 당시 뛰었다고 해도 2002년 월드컵 팀의 스타일상 아마 팀에서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팀 전술상 플레이메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는 없었고 (실제로 이 덕분에 윤정환 같은 경우는 본선에서 단 한 게임도 뛰지 못했다) 고종수가 딱히 피지컬과 활동량과 수비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였기 때문. 3-4-3의 왼쪽 윙포워드 자리에서 설기현과 경쟁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마 주로 조커로 기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 [11] 제2국민역으로 편입되어 병역의 의무는 없기에 사실상 면제다.
  • [12] 역할은 코치지만 아직 자격이 안돼 신분은 트레이너이다.
  • [13] 독일이 복제기술로 히틀러를 부활시킨 다음 펠레, 마라도나, 베켄바우어, 크루이프 등의 유전자를 섞어 베를린이란 이름의 공격수와 보탄이란 이름의 수비수를 만들어 월드컵 제패를 노린다는 내용이다. 이 사실을 한국 어린이 신문기자가 밝혀내어 베를린과 보탄은 체포되고 복제인간 연구소는 폭파된다. 개연성 같은건 없으니 묻지말자.
  • [14] 물론 선배인 고정운의 설정도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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