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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카

last modified: 2015-04-11 21:33:46 by Contributors

팔어: गोर्खा(Gorkhā)
영어 : Gurk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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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구르카?
2. 구르카 용병의 역사
2.1. 전투종족, 영국군의 용병이 되다
2.2. 영국군이 되어 벌인 전투
2.3.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르카 무쌍
2.4. 포클랜드 전쟁의 구르카
2.5. 카길 전쟁
2.6.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7. 구르카병과 30명의 탈레반구르바바와 30인의 탈레반 도적들
3. 선발 과정
4. 그 외
5. 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1. 구르카?

구를까?
네팔의 고산지대에 살고있는 전투민족.

대영제국이 싱할라족이나 시크교도 라지푸트 다음으로 가는 전투민족으로 꼽았으며 이들과 달리 영국군의 용병에 긍정적이었었던 구르카족들을 지금까지 용병으로 잘 사용하고있다.

고산지대에서 살기 때문에 심폐량이 높으며, 신체능력도 뛰어나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수한 용병으로 유명한데 네팔의 3대 수입원으로 마약, 관광[1], 구르카족 용병을 꼽을 정도.

2. 구르카 용병의 역사

구르카 용병의 전통은 옛날 영국군이 구르카족이 사는 지방을 침공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복하러 갔다가 큰 피해를 입자, 정복을 포기하고 그곳 출신자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시작한 것.

원래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세포이 같은 부대)[2]를 창설해 유지해 왔으나, 인도 및 홍콩,아프리카등 자국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현지인 부대도 대부분 해체했다. 그러나 오직 구르카족 부대만은 해체하지 않은 채 지금도 1개 여단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 이는 약 3천 명 정도로, 영국군 전투병의 1/9 규모에 해당한다. 구르카 부대 창설 이래의 전사자도 만여 명에 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군의 일부로 정글등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활약했다.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나라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심지어 포클랜드 전쟁때 일부 아르헨티나 부대는 구르카 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항복하거나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또한 영국군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최근에도 여전히 중요한 전투부대중 하나로, 이라크에도 파병중이다. 화유지군으로도 파견되어 있다.

더불어 영국군뿐만 아니라 인도군도 일부 고용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에서 이들이 실제로 파키스탄군과 대적한 것도 이름을 날렸다.

이들의 활약을 간단히 말하면...걸어다니는 사망 플래그.

2.1. 전투종족, 영국군의 용병이 되다

이들은 1767년 네팔전역을 정복하고, 나라 건륭제의 원정군도 격파해버려 주위에 '오로지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종족이 있다'라고 소문이 퍼지게 된다.[3]
사실이 아니다 건륭제의 조카 복강안이 정벌 네팔은 항복했었다
복강안 검색추천

이후 1814년. 인도와 그 근처를 야금야금 천천히 먹던 영국이 다음으로 목표로 삼은 곳이 네팔이었다. 인도를 야금야금 먹게 하던 동인도 주식회사가 네팔에서 노리던 것은 재배지였다. 싸늘한 날씨와 여러 곳이 차 재배에 적합하기에 차 농장을 대규모로 만들 곳도 확보하고 더 많은 땅먹기로 갈 셈이었다. 당연히 네팔에선 분노했고 1814년 11월 1일,구르카 전쟁,또는 네팔-영국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곳에 온 영국군은 여기에 엄청나게 강한 현지인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었으나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비웃으며 쳐들어갔다. 그리고 영국군들은 상당한 피해를 겪으면서 발이 묶였다. 구르카들도 손실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단발총인 머스킷 소총 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기에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구르카들의 화살 공격이 더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근접전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쿠크리를 휘두르는 이들 앞에 총검을 든 영국 보병들은 엄청 학살당했기에 절대로 이들과 가까이서 싸우지 않고 멀리서 총이나 대포를 쏘며 물량전으로 맞서야 했다. 하지만 당시 물량전도 벅찼는데 산지에 무거운 대포나 포탄을 나르는 것도 고역이었고 영국과 차원이 다른 쌀쌀한 산지 날씨에 영국군들이 기후적으로도 적응하지 못해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춥고 산소 부족해서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겁고 커다란 대포 끌고 다니니 이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이렇게 피해는 크고 도무지 진전도 없고 그렇다고 물러서자면 대영제국이라고 뽐내던 영국으로선 굴욕이니 영국군 수뇌부들은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별 거 없는 야만인쯤이야 히며 쉽게 생각하던 구르카군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그런데 당시 네팔 전선에 참전한 영국군 장군이던 에드워드 샌더슨은 "적군은 붙잡힌 영국군 포로를 후대하는가 하면 꽤나 신사적인 군대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불모지같은 산을 차지하느라 더 피해를 입느니 직접 싸워보니 엄청나게 강한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게 어떨까요?"라는 의견을 인도 대사인 윌리엄 프레서에게 보냈다. 사실 히말라야 산쪽에는 막대한 자원이나 풍요로운 땅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굳이 전투를 계속해서 그 지역을 빼앗을 필요도 없었고 고전을 겪는 상황이라 이 의견에 대하여 영국은 상당히 우수한 전투종족이라고 판단해 구르카의 정권을 인정하고 영국군은 주둔하지 않고 돈과 생필품을 제공한다는 조건을 내밀면서 교섭을 시도했다.

척박한 산지에 살던 이들 구르카는 무척 흥미를 느끼며 진지하게 교섭에 들어갔고 결국 교섭이 성립되어 1815년부터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영국군이 구르카 용병을 고용하는 전통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편 네팔은 시킴을 비롯한 일부 영토를 영국에게 넘겨주고 영국은 네팔 왕가를 인정하며 독립국으로서 인정한 채로 전쟁을 끝냈다. 네팔로선 영국을 일단 물리쳤으며 영국은 일부 작은 땅이라도 받고 공식적으로 이겼지만 우리가 선심 썼다고 뻥치며 서로 좋게 마무리한 셈.

2.2. 영국군이 되어 벌인 전투

이들이 맹활약한 전투로 알아주는 게 세포이 인도용병대들의 반란을 진압한 전투와 그리고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1차 전쟁(1839~1842)에서 호되게 털린 영국은 당시 영국군 및 인도계들로 이뤄진 영국군이 전멸(딱 1명만 살아 돌아옴)당한 것을 교훈삼아 산악전의 고수인 구르카병을 2차 전쟁이 벌어진 1878년에 대거 파병했다. 그리고 카불 점령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20만이 넘는 구르카병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이들은 목숨 아끼지 않고 먼저 진격하며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물론 4만에 이르는 구르카병이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 피해도 컸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이 대거 파병나갔지만 영국은 1차대전 피해도 엄청났던 터에 여기에 총력을 다할 수 없어서 지원도 흐지부지된 상태였고 몇 달안가 전쟁은 대충 끝났던 탓에 구르카군은 2차 전쟁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3.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르카 무쌍


Hi there Japanese? 사실 이건 아프리카 전선의 사진이다. 웃으니까 더 무섭다 칼날은 왜 만지작거리는데

하지만 구르카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역시 2차 세계 대전이다. 1차 대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별다른 사진 자료나 취재 기록이 없었던 거랑 다르게 2차 대전에서는 상당한 자료와 취재가 이뤄졌기 때문. 아프리카에선 독일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선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독일 병사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기습해 병사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실제로 이들의 전과를 의심하는 영국군 장교 앞에 적군에게서 따온(?) 귀를 한바구니 보여주기도 했다.[4] 일본군은 정글전에 능해서 영국군 지휘관들이 정글에서 싸우기를 꺼려 했는데, 그러자 구르카족은 이 정글에서 일본군을 쿠크리 칼로 사냥하고 다녔다. 일본군의 막장전설중 하나를 차지하는 임팔 전투에서는 구르카 대대의 디마푸르라는 중사가 일본군 참호로 뛰어들어 무려 24명의 일본군을 베어 죽여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았다.

월간 지오 한글판에서 1997년에 이들에 관하여 취재한 적이 있는데, 2차대전 당시 이들은 쿠크리 하나로 일본군들을 대적한 기록이 나와있으며 일본도를 단숨에 동강내고 쿠크리 하나로 일본군 15명을 베어죽인 구르카병 이야기도 나온 바 있다. 이 사람은 당시 취재에서도 나와 인터뷰했는데 수수한 옷차림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고 있었다. 당사자는 매우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도 전설의 용병으로 알아준다고 인터뷰했다.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영국에게 두둑한 연금을 받으며 매우 부유층이었다.

코만도스 2의 인도차이나전선 관련 미션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등장한다.

2.4. 포클랜드 전쟁의 구르카

이후, 1982년 포클랜드. 포트 스탠리를 지키는 아르헨티나 수비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는 영국군이 계속 민사심리전을 펼쳤고 SAS 부대가 기습을 담당할 예정이었는데 아르헨티나군이 구르카들이 온다고 하자 서로들 달아나거나 손 들고 기어나와서 이들은 무혈입성했다.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항복하면서 제발 구르카에게 우릴 넘기지 말아달라고 울며 사정까지 했었다고 한다.(...) 이걸 전해들은 구르카병들은 "우린 저항하지 않은 자, 포로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다!" 라고 하며 불쾌해했다.그런데 목 안 친다고는 안했다. 겁나는 놈들...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 모두 비켜라

2.5. 카길 전쟁

1999년 파키스탄인도카슈미르에서 벌인 국지전인 카길 전쟁에서 인도군 소속 구르카병들도 참전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의하면 역시 백병전에서 이들은 무서운 활약을 했기에 파키스탄군들이 절대로 이들과 가까이서 싸우지 말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한다.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구르카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던 파키스탄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부랴부랴 물량전으로 반격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구르카들이 종전 뒤 풀려나서 인도군 훈장을 받고 후한 보상을 받은 것도 나왔다. 파키스탄군도 용병인 그들을 꽤 우대해줬는데 박대했다가 나중에 구르카병들과 전투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보복을 받을 걸 두려워해서였다고.

참고로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족들도 만만치 않게 전투민족이고 파키스탄의 주 인종인 펀자브인들도 ㅎㄷㄷ한 민족이다. 아프가니스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도 히말라야 못지않게 척박한 산지 힌두쿠시를 중심으로 온갖 외세 공격을 자기 힘으로 막아내던 전투민족이다. 그런 이들이 상당수인 파키스탄군도 구르카에게 무척 고전했다는 뜻. 하긴 위에 나온 대로 이미 120년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들이 파슈툰족이 다수인 카불을 함락할 때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2.6.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 비슈누 쉬레스타 참조.
    현실판 아저씨라고 보면 된다. 기차 안에서 강도들의 강간과 약탈을 참지 못하고 구르카 용병이 40대 1로 강도들을 학살 및 상해를 가해 어린 소녀를 비롯한 승객들을 지켜낸 실화.

한글번역실제기사

2.7. 구르카병과 30명의 탈레반구르바바와 30인의 탈레반 도적들

구르카 연대 소속, 네팔 비마 출신의 딥프라사드 푼 하사(31세)는 2010년 9월 17일, 아프간 헬만드 주(탈레반 세력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위험지역) 라힘 칼라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서다가, 전방의 어둠 속에서 뭔가 땅파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소같은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워서 주의깊게 살펴보자, 탈레반 두 명이 IED를 초소 정문 앞에 매설하고 있더군요."

안타깝게도 그의 소대는 순찰을 나간 시점이었다. 그는 즉시 무전기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삼각대에 거치돼있던 GPMG 1문을 떼어들고, 개인화기인 SA80, 유탄발사기 한 정과 수류탄 다수, 무전기 두 대를 가지고 지붕으로 올라간 후 사격을 개시했다. 탈레반들도 RPG를 발사하고 사격을 가해왔으나, 푼 하사는 15분 이상 그 위치를 사수하면서 400여발의 탄환과 수발의 수류탄 등등 손에 잡히는 무기를 몽땅 사용해 최소 세 명 이상의 탈레반을 죽이고 다수를 부상 입혔다. "놈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좀 겁이 났습니다. 바로 코앞이라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사격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어요." 구르카의 모토는 '겁쟁이가 될 바에야 죽는 게 낫다'이다.

어느 순간 푼 하사는 덩치가 커다란 탈레반 전사 한명이 벽까지 완전히 접근했고 그가 사격하는 것을 발견했다. 지붕 위에서 사격하고 있던지라 무거운 GPMG로는 사격 각이 잘 나오지 않았고, 푼 하사는 또 다른 놈이 접근해서 벽을 타고 오르려는것까지 발견했다. 푼 하사는 "SA80을 들고 발사하려 했지만, 작동하지 않았습니다."SA-80: 나는 창인데 왜 발사를 하려그래라고 회상한다. "작동 불량인지 탄창이 비어 있어서인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SA80을 던져버리고 샌드백이라도 들고 휘두르려했는데 샌드백을 잘 묶어놓지 않아서 모래가 줄줄 흘러버렸죠. 그래서 경비 초소로 뛰어들었는데, 마침 기관총 삼각대의 일부인 쇠막대가 눈에 띄었어요. 그걸 놈에게 휘둘렀죠." 워해머?

푼 하사는 "마추 탈라이(Marchu Talai)!아구창 깔라이!" 라고 소리지르며 탈리반에게 달려들었다. 그 말은 네팔 말로 "지금 네놈을 죽이러 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았으니 된거죠. 가족들도 매우 좋아합디다. 내 아버지도 인도군 구르카 소속이셨거든요."
여기에 맞는말을 못넣겠다..
홀로 30여명의 탈리반들을 물리친 공훈으로, 푼 하사는 2011년 3월 25일, 용훈십자훈장(Conspicuous Gallantry Cross)을 받았다. 이 훈장은 93년 제정된 이래 50명도 받지 못한 훈장이다.[5]#

3. 선발 과정

구르카의 급여나 연금은 영국군의 몇 분의 일 수준에 불과하지만, 영국은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이고 네팔은 최빈국이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수입이다. 2012년 6월 기준으로 월 1500유로, 우리 돈으로 약 200만 원 정도인데, 네팔의 연간 국민소득이 3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것[6]에 비하면 연 2400만 원이 얼마나 고액인지 알 수 있다. 구르카로 복무하고 전역한 사람은 부유층으로 살 수 있어, 매년 2~300명을 선발하는 구르카병 지원경쟁률은 엄청나게 높아 50 대 1을 상회한다.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양한 전형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회 엘리트인 대학생들이 몇 년씩 구르카 준비에만 매달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으며, 카트만두에는 구르카 준비를 위한 사설 학원만도 이십여 개가 성업 중이다. 그야말로 네팔판 한국무원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08년도 기준 경쟁률이 700:1을 넘는다. 2015년 2월 기준으로 영국군 가운데 구르카 출신은 장교가 110명, 사병이 2,610명 수준이었다.출처

특히 최근에는 사교육을 많이 하는 도시민의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 해 40명 선의 합격자를 배출한다는 유명 사설학원의 수강료는 한화 월 3만 원으로 부유층이거나 구르카 출신의 아버지가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이다. 이런 학원은 전직 구르카 출신이 운영하며 영국군의 선발전형에 맞춘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한다. 반면 지방민이나 저소득층은 밭일이나 평소 운동 등으로 체력을 단련할 수밖에 없고, 영어나 수학도 이들에게는 큰 장애물인데 네팔은 아직 학교조차 없는 지방이 많기 때문이다.

선발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구르카 출신 모병관이 가을에 고향을 돌면서 지역 예선을 실시한다. 여기서는 키와 가슴둘레 등 신체조건과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치르며 약 2~3배 수를 선발한다.[7] 예선통과자들은 포카라에 위치한 모병소에 입소하여 보름간 최종 경선을 진행한다. 이때 입소자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모병소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 수능 등굣길 분위기이다. 다양한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로서 다양한 과목을 수행하는 중에 하나라도 미달되면 그 즉시 탈락이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도코 레이스'인데, 25kg의 돌을 채운 전통바구니(도코)를 끈으로 머리에 매고 네팔의 가파른 산길 6km를 달리는 것. 삼십분대를 달성해야, 즉 10분 기준 2KM를 달려야 합격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며 중간에 쉬거나 48분을 넘기면 바로 탈락.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한국군이 급속 행군시 완전군장으로 10km를 1시간10분~1시간30분안에 달리는 것이 목표니 10분 기준 1km가 좀 넘는다.


최종 선발된 인원은 영국 여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다음해 1월 영국 본토로 가서 8개월 동안 정규군 훈련을 받는다.

한편 영국군 외에 싱가포르경찰 및 인도군도 구르카를 선발한다. 싱가포르경찰은 영국군 선발에서 차순위자들을 데려가고[8], 인도군은 별도의 선발 시험을 실시한다. 이쪽은 급여가 덜해서 경쟁률도 낮다. 그렇긴 해도 인도군 소속 구르카들도 보통 네팔인 노동자보단 당연히 많이 받는다.[9] 영국군 출신처럼 부유층은 되기 어려워도 장기복무하면 중산층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군 선발에 최종 불합격하면 다시 인도군 및 싱가포르 경찰 선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영국군 구르카보단 경쟁률이 낮다 뿐이지 여기도 경쟁 자체는 치열하다.

그밖에도 공식부대는 아니지만 말레이시아 로얄 레인저 특수부대(Royal Ranger Regiment)에도 구르카병 일부가 보안군으로 복무하며 아프가니스탄주둔 미해군 부대 보안군으로서 구르카병이 일부 복무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네팔 군대로 이름을 올리지만 무장 및 복무관련 비용은 각 나라들이 지급하고 있다.

4. 그 외

이들을 상징하는 칼로 쿠크리를 꼽는다. 부대 문양도 쿠크리 두 개의 검날을 교차한 것.

저개발국 출신의 용병인지라 영국 정규군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봉급을 지급받는 실정.[10]. 퇴역용병들의 연금도 2005년이 돼서야 95파운드(약 20만원)에서 450파운드(90만원)로 인상되었다. 게다가 퇴역 용병들의 영국 정착이 무지하게 까다로웠다. 이런 차별 대우에 여러 인권단체가 항의한 결과 2009년 5월 29일 영국 의회에서 네팔 구르카족 용병의 영국 정착을 조건 없이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늦게나마 그들의 노고가 보상받았으니 다행이다.

여담인데 1979년 마운트배든 백작(영국 왕족이던 그는 IRA 저항군의 폭탄 테러 공격에 죽었다) 장례식 당시 정복 차림의 구르카병 20명이 장례식에 참가했는데 용병이면서도 근위병들과 한자리에 있었기에 눈길을 끌었다.

여담이지만, 싱가포르 경찰에도 구르카병들이 있는데, 경찰임에도 쿠크리를 차고 다닌다.

구르카들은 일부가 독일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군도 북아프리카 산악에 거주하던 모로코 출신 유목민 구미에(goumier)를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이들도 근접전에선 엄청나게 강해서 나치군들은 이들과 근접전으로 싸우느니 하루종일 포탄 세례를 받는게 낫다고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구르카와 이들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라며 연합군들이 궁금해했지만 이들은 일절 싸울 일이 없었기에 이 농담에 대한 진실은 가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이 구르카병처럼 용병부대로 삼을 계획을 하던 나라가 바로 몽골군이었다고 한다. 해외 주둔 미군 모습을 다룬 저서 <제국의 최전선>에 따르면 몽골에 파견된 미군 장교들은 몽골 군인들을 구르카처럼 미군에 복무하는 외인부대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고 저술하고 있다.

5. 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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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kha.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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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115
속도:4
원거리공격16
공성공격12
근접공격6
인구수:1
가격은 식량70 금50

인도의 척후병 역할, 아쉽게도 쿠크리는 보여주지 않고 그냥 개머리판으로 후려치는 근접 공격을 한다.대신 세포이가 길다란 칼을 쓴다

설정 상 구르카는 북부 인도 라지푸트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네팔인 집단이라고.

척후병인데 사정거리가 짧다고 안쓰는 사람이 많으나, 단련=>명예=>용맹 업그레이드를 할때마다 사정거리 1씩 늘어나 결국엔 척후병보다 사거리가 길어진다. 또한 비전투시 체력이 천천히 회복되는 특성도 있으며, 아시아 지도들 중 일부에서는 포로로 구출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인도가 아니면 업그레이드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샤브다르 구르카는 일반 구르카의 2배 스펙에 주변 구르카들 버프 오라가 있다.
mansabdarg.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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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주로 히말라야 등반에 관련된 관광 사업.
  • [2] 1857년 세포이들이 인도인임을 고려하지 않은 영국의 뻘짓 탓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구르카들은 가차없이 세포이들과 싸웠다. 덕분에 이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영국에서 알아주게 된다. 자세한 것은 세포이 참조.
  • [3] 그러나 청나라의 실패는 이미 막장화된 청국군 자체에 책임이 크며, 어쨌거나 중앙에서 내려보낸 본대는 라싸 부근에서 네팔군을 격파하고 티베트를 지켜낸다는 전쟁의 목표를 달성했다. 애초에 이 지역이 병력의 대규모 운용이 불가능한만큼 인민 웨이브도 펼치지 못했음을 생각해보면 건륭제의 '십전무공을 가장한 열 번의 삽질' 치고는 성과가 괜찮은 편이다.
  • [4] 이외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장교가 야습을 준비하는 용병 곁을 지나가며 혹시 쓸만한 손목시계가 있거든 하나 루팅구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날 아침에 그 장교 막사 입구에 손목시계가 원래 주인 손목째로(!!!) 공손하게 놓여 있더라는 얘기가 구르카병 얘기로 돌아다니는데, 이 쪽은 목차 4번에도 나오는 구미에(모로코 출신 용병들) 용병에 대한 이야기다. (구르카나 라지푸트 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들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에 대한 일화들이 '타임 라이프 2차 세계대전사'에 일부 실려 있다)
  • [5] 원래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라는 두드러진 용맹을 보이는 경우에 수여하는 훈장이 있었으나, 사실상 장교에게만 부여하던 것이라서 이를 대체해 계급 구분 없이 수여하도록 용훈십자훈장이 제정되었다.
  • [6] 네팔 항목을 봐도 대졸자 월급이 20만원 수준도 안되는 곳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거다.
  • [7] 이 때 마을 아가씨들이 구경 나와 최종 합격할 것 같은 장정을 마음 속으로 점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8] 2차 전형은 전적으로 영국군이 관리한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위탁선발인 셈.
  • [9] 월급이 25-30 만원이 되니 대졸이 20만원 정도 월급을 받으니 그래도 큰돈이다. 거기에 위에 나오듯이 카길전쟁같은 실전 나가서 활약하면 당연히 추가 수당을 준다.
  • [10] 하지만 네팔 쪽에서 보면 그래도 큰 돈이긴 하다. 2차대전 당시 받은 돈으로 네팔로 돌아와서 제법 풍요롭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2차대전 당시 구르카들이 받는 월급은 네팔 직장인 평균 70배나 되었다고 하니 경쟁률이 몇백대 일이 될 수 밖에. 지금은 네팔 물가도 많이 올라서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무시 못할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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