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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합작

last modified: 2015-04-03 10:30:33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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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Unknown)]

단란한 한 때 1945년 8월, 중일전쟁 종료 직후 천하반분을 위해 중경에서 만난 두 사람. 이 때 쌍십협정(雙十協定)이 체결되어 평화가 오는 듯 했으나, 둘 다 추스르는 시간을 벌기 위한 기만술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선빵은 전력이 유리했던 장개석이 날렸으나...

목차

1. 개요
2. 제1차 국공합작
3. 제2차 국공합작
4. 인터넷에서의 국공합작(…)

1. 개요

중화민국 당시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협조체제를 구축하여 하나의 적을 토벌하자는 일본을 공격한다 취지에 이뤄진 협정. 제1차 국공합작과 제2차 국공합작이 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2. 제1차 국공합작

손문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가 원세개 치하에서 기존의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의회주의에 투항함으로써 성립한 국민당은 1913년 2월에 치러진 제1회 국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원세개에게 탄압을 받아 권력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였다. 원세개가 죽자 손문은 서남 군벌과의 연합으로 1917년 9월 제1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권력 투쟁에 밀려 상해로 밀려나게 되었고, 1920년 복건 군벌 진형명과 연합하여 제2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한편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에 자극받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중국 공산당을 결성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피억압 민족의 민족해방 운동의 결합 가능성을 제기하며 공산주의자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동맹을 강조한 레닌의 '식민지 민족 문제에 관한 테제'의 영향으로 소자본가 계급과의 연합전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국민당과 합작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소련 및 코민테른의 개입이 필요했다.

손문은 제정 러시아와 중국 간의 불평등 협정의 폐기를 뜻하는 '카라한 선언'에 대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식의 개혁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공산당이 '당내 합작' 형식의 연합전선을 받아들이고, 진형명의 배반으로 근거지를 상실함에 따라, 공산당원의 입당을 허용하고, 선전을 강화하는 '개진(改進)'을 단행했다.

손문의 개진은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는데, 소련 역시 실용적인 관점에서 외몽골, 동청철도 문제 등의 외교 현안에서 대해서 당시 북경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오패부보다는 손문이 그들에게 유화적임을 인지함으로써 손문에 대한 지원을 허용할 수 있었다.

양자 간의 접근은 마침내 '연소(聯蘇), 용공(容共), 부조공농(扶助工農)'으로 요약되는 (국민당) '개조(改造)'로써 결실을 맺었고, 공산당은 국공합작 체제 안에서 급격히 세력을 키워 대규모 농공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은 지주, 자본가, 군벌 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강력한 탄압을 받았고 북벌 과정에서 장개석쿠데타 및 무한 국민정부와의 마찰로 제1차 국공합작은 붕괴되고 말았다.

3. 제2차 국공합작

제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위협으로 중국이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인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만주사변을 비롯한 일본군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여전히 공산당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공산당은 거의 괴멸 상태에 몰려 중국 대륙을 반바퀴 도는 대장정을 해야했고, 공산당의 기적에 가까운 분발로 인해 이들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간신히 안전지대로 피신한 상태였다. 물론 국민당군이 다시 한번 추격을 시작했다면 공산당도 뿌리뽑히기 일보 직전인 상태...

1936년에 장개석은 공세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서안을 방문한다. 그런데 이때 국민당군의 파벌 중 한명인 장학량이 일본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장개석의 태도에 반감을 가져 그를 납치해 국공합작을 펼쳐 일본군과 싸울 것을 강요한다.[1] 이때 당시 장개석이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공합작을 발표하게 되는데, 물론 실제로 그럴 마음이 없었다 한들 대외적으로는 전국 각지의 구 군벌세력이 국민당의 각 파벌로서 흡수된다.[2] 공산당 역시 이때 '국민당군 제8로군'으로 8번째 지방군으로 흡수되는데, 이때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물론 대의명분과는 별개로 일본군을 쓰러뜨린 후의 상황에도 대비하여 서로를 타도할 방법에도 골몰한다... 이 사건을 서안 사건 이라 부른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양측은 국공내전에 돌입했고, 결국 국민당은 1948년에 대만으로 쫓겨나고 만다. 이 모든 것이 국공합작의 결과.

한편, 서안 사건 이후 장학량은 10년의 징역형을 받아 감금되었는데... 이후 국민당이 쫄딱 망하고 대만으로 도망칠 때 대만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게 다 장학량 때문이라 생각한 열받은 장개석에 의해 무려 42년 동안 자택연금 된다.[3] 장개석 사후 1993년에 처음으로 대만 출국이 허용되어 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다고 한다.

4. 인터넷에서의 국공합작(…)

어떤 이슈나 사건에 대해, 좌파성향 네티즌과 우파성향 네티즌이 한 목소리를 내거나 공동행동을 하는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 여성부의 병크에 대항하는 경우, 올림픽, 한일전, KIA 타이거즈LG 트윈스 격파


좌파와 우파를 대표하는 두 논객이 사이좋게 올림픽 선수들을 응원하는 훈훈한 광경.

사실 우리나라 같으면 민족 유일당 운동이나 좌우합작운동이 더 적합한 드립이겠지만, 단어가 길어서 그런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덜 유명해서 그런지 국공합작 드립이 더 많이 쓰인다. 비슷한 표현인 위 아 더 월드 항목도 같이 참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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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물론 장학량이 장개석과는 차원이 다른 애국주의자라서 이념을 초월한 국공합작을 요구한 건 아니고, 만주에서 사실상의 왕처럼 살았던 아버지의 고향을 일본으로부터 되찾고 싶었던 심정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시점에 공산당을 확실하게 짓밟아서 국공내전 및 중국 공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종전 후 진짜 만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 [2] 공식적으로 북벌 뒤 군벌들은 모두 국민당군의 각군으로 개편되어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 [3] 그나마 장학량은 영향력이 있어서 자택연금으로 그쳤다. 그와 함께 시안 사건을 주도한 양호성 장군은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할 때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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