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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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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國內城)

국내에 있는 성은 아닐까? 국외성도 있을까실제로 중국도 춘추시대만 해도 도읍의 국인과 그 바깥의 야인을 구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도시가 곧 국가. 고구려도 4세기 중후반 이전까지는 '고구려민'과 그 외의 '속민'을 구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춘추전국 이야기' 및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참조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기타

1. 개요

과거 고구려도읍지, 이 성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로 비정한다면 중국 지린성 지안(집안)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즉, 정확한건 아니다)

고구려의 2번째 수도로써 한때 도성 or 국내성 중 어느쪽이 고구려의 2번째 수도인가에 대해 말이 많았으나 현재는 평양-장안성과 마찬가지로 산성인 환도산성과 평지성인 국내성을 통틀어서 묶는 편, 즉, 당시 고구려는 평지성인 국내성이 뚫리면 근처의 환도산에 위치한 산성인 위나암성(삼국사기에 기록된 환도성의 당시 명칭)으로 도피하여 외세에 저항했다.

2. 역사

유리왕 22년(AD 3년) 수도를 졸본성(=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이후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펼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AD 427년까지 총 424년간 고구려의 도읍지였다.
고구려 역사상 수난을 가장 많이 당한 성으로써 동천왕위나라관구검이 쳐들어와 국내성과 환도성이 털리고 동천왕 자신은 북옥저로 대피했던 흑역사가 있었으며 이 때 관구검의 감상평이 물이 맑고 많은 것 빼고는 도읍이 들어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산골짜기란 수모까지 받았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고 왕모, 왕비가 납치당하는 치욕을 맛보기도...

427년 이후 남하정책 및 기존 귀족세력 제압을 위해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지게 되었지만 국내성은 고구려의 제2도시로써, 요동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 이유는 수도인 평양성이 고구려 전체 영토를 따져본다면 상당히 남쪽으로 치우쳐있기 때문에 만주와 요동을 컨트롤할 중심지가 따로 필요하기 때문. 그래서 평양성, 한성(現 황해도 재령 부근)과 함께 고구려의 3경이라고도 불렸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날 때 연남생이 연남건-연남산 형제들과 대치할 때 주둔했던 성이 국내성이었을 정도로 고구려가 멸망에 이를 때까지 그 위용을 잃진 않았으나 평양성과의 대립은 지속됐던 모양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곳은 몰락하여 잊혀져버렸다. 사실 앞서 관구검의 감상평에도 나오듯이 졸본성같은 산악지역이 아니라 평야지형이라고 하지만 거의 산골짜기 속 분지에 가까운데다가, 한국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이 부근에 있을 정도로[1] 날씨가 추운 지역이다. 덤으로 교통망을 따져봐도 요동-한반도 라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서-만주 라인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위치에 있어서 고구려가 수도로 삼지 않았다면 깡촌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3. 기타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통구성은 국내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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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바로 압록강 건너편에 있지는 않다. 건너편에 있는 도시는 만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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