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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

last modified: 2015-04-04 23:14:21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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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기록화

여요전쟁 중이던 1019년 2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귀주 대첩
날짜
1019년 2월
장소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군) 동쪽 근교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고려 거란
지휘관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소배압
야율팔가
해리†
고청명†
아과달†
작고†(모두 요사에서 발췌)
병력 불명(20만 이하)[1] 불명(10만 이하)[2]
피해 규모 불명 지휘관 4인 전사
천운군, 우피실군 궤멸
결과
고려군의 승리
기타
고려와 거란 화의 맺음. 여요전쟁 종결.


Contents

1. 소개
2. 흥화진 전투
3. 소배압의 진격
4. 귀주대첩
5. 전투 이후
6. 기타

1. 소개

1018년 12월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끌고오자, 이듬해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보병 기병 총 20만 8000명을 이끌고 북진, 흥화진 동쪽에서 도강하는 거란군을 수공과 매복 작전을 이용하여 크게 격파했다.

숫자만 봐서는. 20만으로 10만을 격파한게 무슨 큰 공이냐 오해할 수 있는데, 거란의 10만은 거의 대부분이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로 이루어진 최정예였고, 고려의 20만은 귀주대첩에 참가한 고려군의 총인수가 아니라, 여요전쟁에 동원되어있던 총병력의 합계로, 징집된 농민병 등도 모두 합산되어 나온 숫자다. 결국 실질적 전력으로는 압도적 열세인 전투였다. 그래서 승리 후 "대첩"이 붙은 것.

2. 흥화진 전투

귀주대첩을 두고 '수공으로 이긴 전투'라고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사실 이 전투는 귀주대첩이 아닌 흥화진 전투이다. 흥화진은 지금의 의주 근교고, 귀주 대첩이 벌어진 귀주는 바로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군 일대니 전혀 다른 곳이다. 그나마 흥화진 전투의 수공도 거란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강하는 거란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래서 수공 직후 강감찬은 1만 2천의 기병대로 대열이 흐트러진 거란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강감찬 위인전에서 다른 전투보다 이 수공 장면에 초점을 두다 보니 '강감찬=수공=귀주대첩'이라는 공식이 생겨 버린 셈. 살수대첩을지문덕 역시 마찬가지로 비슷한 오해(?)를 받고 있다.수공을 안 쓴 것은 아니지만 당시 토목기술로는 적들을 수장시킬 정도로 강력한 수공을 할 수 있는 대형 둑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현재의 토목기술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발목 높이의 물을 일순간 흘려보낸 것. 어지간한 사람은 이 정도의 급류에도 자빠지고 나뒹굴기 일쑤이기에 이 정도로도 적을 당황시키고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데에는 충분하다. 범람 등으로 인해 발목 깊이의 물이 지속적으로 쇄도한다면 실제로 매우 치명적이기도 하니 둑으로 일시적인 격류를 만든다고 얕볼 게 아니다. 쓰나미 항목 참조.

설령 둑을 쌓아 물을 막았다 해도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어렵다. 물이 빛도 아니고 둑을 터뜨린다고 해서 바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이밍 맞추기 쉽게 도하지점 인근에 둑을 설치했다가는 정찰병들에게 발각되기 쉽다. 도하하는 도중이 가장 취약할 때임은 건너는 사람들도 알기 때문에 매복이나 기타 함정을 확인하느라 도하 전에 인근을 샅샅이 정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둑이 그리 도하지점에서 그리 가까웠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둑이 크면 무너뜨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떠내려가 익사할 만큼 많은 양의 물을 들키지 않고 정확한 시점에 터뜨리기란 요즘 기술로도 불가능에 가깝다. 당하는 쪽이 알고 맞춰서 당해준다면 모를까. 정리하자면 수공은 거들 뿐 진짜 거란군을 제압한 것은 고려군이 맞다.

3. 소배압의 진격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냅다 개경을 향해 어택땅을 찍어버렸다. 이는 거란군의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소배압의 질풍같은 기동 때문에 개경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고려는 2차 여요전쟁 당시 개경이 홀라당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방어를 위한 작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시행된 청야전술로 인해 요군이 가는 곳은 집 한 채, 쌀 한 톨 없는 무인지경 뿐이었고,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이곳저곳에 짱박힌 별동대를 계속 보내 요군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계속 찔러대기 시작하였다.

자주(慈州) 내구산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 부대를 잡아 격파했고, 평양 근처 마탄에서는 조원도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혔고, 동북면의 병사 3천 3백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의 수비를 보충했다. 동북면(함경남도) 병사 1명이라면 타 도의 병사 5~6명에 맞먹을 정도로 최정예 병력이었다. 함경도 병사의 이러한 최정예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진다. 이는 동북면 쪽에 수렵을 하는 사냥꾼들이 많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당시 사냥꾼들은 최정예 병력의 자질을 가졌다.특히 김종현이 이끄는 1만 병력은 소배압을 맹추격하여 소배압의 주력을 끊임없이 견제/위협하였다.

이렇듯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소배압은 2차 여요전쟁 때처럼 수도 개경만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하였기에 결국 개경까지 도착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절대로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여몽전쟁 때의 몽골군에게도, 병자호란 때의 군에게도 이렇게 패배를 당하였다. 때문에 소배압이 그렇게 수많은 방해를 뿌리치고 수 백 km를 주파하여 전략적 목표인 개경까지 도착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이 또한 2차 침공 이후에 만든 요새) 외엔 마치 핵폭탄이라도 맞은듯 쌀 한 톨 집 한 채 없는 폐허, 그리고 계속하여 사방에서 찔러대는 고려군의 견제병력들 뿐이었다.(...) 아~ 소배압 선수, 본진을 못뚫고 마네요

한 달 남짓 개경 근교에서 아무 것도 못 하고 지속적으로 출혈을 강요받으며 보급난에 시달리던 소배압은 결국 개전 이듬해인 1019년 2월,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2차 여수전쟁을지문덕살수대첩 때 우중문에게 라도 한 수 선물했지만 이번엔 그런 것도 없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군을 곱게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려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그리고 소배압이 요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귀주(龜州)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4. 귀주대첩

강감찬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려군을 전략적 길목인 귀주로 집결시켰다. 그러나 김종현의 1만 병력은 이 때 무슨 이유인지 아직 도착하지 못 했다. 이들이 빠진 채 결전을 시작해야 했던 총사령관 강감찬은 매우 초조했겠지만, 이 변수도 결국 승리의 여신이 고려군에게 선사한 미소가 되었다.

그동안 전력에 그토록 타격을 입었음에도 명색이 요나라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인 소배압의 통솔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남진과 퇴군을 거듭한 군사임에도 손실도 거의 없었고, 마지막 회전을 예상이라도 한 듯, 거란군 10만은 포진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 20만을 보자마자 주저없이 그대로 전투에 돌입, 운명의 마지막 대회전(會戰)이 벌어지게 된다. 귀주성 앞쪽으로는 두 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그 뒤쪽으로 구릉지대가 있는데 휘하 장군들은 이 구릉을 끼고 포진하여 고려군이 하천 두 개를 건넌 뒤에 공격하도록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감 야율팔가가 이에 반대하였고 소배압도 이에 따르면서 거란군은 개천 하나를 등 뒤에 두고 싸우기를 선택했다. 이른바 배수진이다.

양측 병사들이 끊임없이 피를 쏟은 대혈투는 며칠 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거란군이 두 달 가까이 굶주리고 지치고 다쳤음에도, 드넓은 대륙에서 불패의 신화를 써내려갔던 거란의 최정예다운 위엄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교과서위인전에서는 간략히 기술하느라 무기력한 군대처럼 그려지지만...

양측의 혈투가 절정에 달할 때 쯤,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김종현의 1만 병력이 10만 거란군 등 뒤에 별안간 나타난다. 주인공은 항상 늦게 나타나는 법이지 전 늦은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길을 좀 헤매는 바람에 늦었다는 설도 있는데, 여하튼 이렇게 장대하고 정교한 전략을 총지휘한 강감찬이 이런 타이밍까지 의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절묘한 출현은 통신수단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쉽지 않고, 또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에 가급적 해서도 안 된다.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자칫 대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

김종현의 1만 병력이 후방에 나타나자 전방의 고려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거란군을 상대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워털루 전투프로이센 그리고 김종현은 30만이 뒤엉켜 싸우는 전장으로 주저없이 돌격해 들어간다. 쌍방간 주력이 격돌하는 대회전에서는 조그마한 변수도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데 1만쯤 되면 작은 변수도 아니다. 더군다나 김종현 부대는 거란군의 추격이 목적이었으므로 기병 위주의 편제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쯤 되면 판타지라도 반지의 제왕로한군 같은 건 맛깔나게 싸대기 날릴 스케일. 더해서 거란군도 김종현 부대의 등장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어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꼈다. 아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니 용기가 스스로 배나 더해졌다. -고려사

거기에 그 순간 풍향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동시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적벽대전?당시 계절상으로는 북풍이 부는 것이 정상인데 간혹 일시적으로 계절풍이 아닌 역풍이 부는 경우가 있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강감찬이 예측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당시 장수들의 필수 요건 중 하나가 기상 관측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72세)를 생각하면 오랜 경험과 치밀한 사전 정보수집으로 이 현상을 어느 정도 예측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러한 기상이변까지 나타나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간 반면 거란군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여버렸다.

거란군의 전위는 천운군과 우피실군이 맡았고 우피실군은 황제군 5위의 하나로 6만 병력을 보유한 정예군이다. 그런데 이 우피실군이 고려군의 돌격에 무너졌다. 배수진을 쳐둔 상태라 진형을 재정비할 수 없었고 이내 무너져서 퇴각하는데 이 때 민첨의 별동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반령벌판으로 몰아넣었다. 추격부대는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므로 도망치기에는 최악인 곳으로 내몰린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은 거대한 포위섬멸전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포위섬멸전이 그러하듯, 거란군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10만 거란 병력 중 살아 돌아간 것은 수천 기에 불과했다. 소배압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지만 최고위급 부대 지휘관이 4명이나 죽었을 정도. 요사에 기록된 이 때 전사한 지휘관은 천운군 상온 해리, 발해상온 고청명, 요련상온 아과달, 객상사 작고이다.

이 때 전사한 대장 중에 '발해상온'이라는 직함을 가졌던 '고청명'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직함에서 보듯 발해인 출신 부대의 대장이었다. 발해인 부대도 상당수가 이 전쟁에 참전했다. 완안아골타가 요나라를 공격할때 천조제는 발해인 부대를 보내 아골타를 막으려 했으며 금나라 역시 송나라를 공격할 때 수만명에 달하는 발해인 부대를 운용한 사례가 있다. 발해인이 그래도 고려에 동족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부분. 심지어 고려군에도 발해 유민 출신의 병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거란군 소속 발해인 병사고려군 소속 발해인 병사 간의 접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의미에서는 족전이었던 셈. 참고로 고청명이 전사한 후, 그 가족들은 거란에서 국가유공자로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어찌나 크게 이겼는지 <고려사>에서는 이날 죽은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으며 포로와 전리품은 산더미였는데, 우리가 거란과 맞짱 뜬 이후 거란이 이렇게 쳐발린 적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조차 '다하(茶河)와 타하(蛇河)의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캐발렸다'고 솔직하게 자백(?)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전쟁사의 주요 전투로 올리기에도 손색이 없는 대승 중의 대승이라 할 수 있다. 이 때까지 수많은 야전/회전에서 승승장구하던 거란군을 크게 발라버린 이 싸움이 '살수 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 대첩'이다.

5. 전투 이후

이 전투 이후 거란은 두 번 다시는 고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지 못했다. 거란 성종은 머리 끝까지 열받아서 소배압의 머릿가죽을 벗겨버리겠다며 날뛰었지만 차마 친인척을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던지 진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훗날 덕종 때인 1033년 거란군이 정주까지 쳐들어오는 등 소규모 전투가 몇 번 있었지만, 이 또한 고려군이 금방 격퇴하면서 상황 종료. 덕종 항목과 여요전쟁 항목 참조.

그리고 이렇듯 초기의 기선제압, 청야전술, 수도방위와 지속적인 견제, 마지막 회전으로의 유도와 포위섬멸로 이어지는, 정교하고 치밀하게 진행된 3차 여요전쟁 전체의 전략/전술을 총지휘한 사람은 강감찬이었다.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을 맞이하였다. 이 때 현종이 직접 나아가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일곱 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지. 그리고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과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한 마디로 국가를 구원한 '영웅'이 된 것.

이후 고려는 개경 주위에 외성을 쌓고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구축하는등 방어에 신경쓰게 되며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멸함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굳건하게 함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의 여파로 고려는 이후 120여년간의 전성기를 얻어낼수 있었던 것이다.

6. 기타

귀주라는 곳이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200여년후 귀주성 전투 또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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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냥 귀주 대첩 때 20만이 참전했다고 적어놓은 서적도 있는데, 고려사를 보면 고려군의 이 당시 병력은 불명확하다. 20만 8천은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고려가 동원한 총 병력 수를 의미한다.
  • [2] 소배압은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고려군의 산발적 타격으로 병력이 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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