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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필하력

last modified: 2013-11-30 01:01:18 by Contributors

契苾何力
(? ~ 677)

당나라의 장수. 글필갈의 아들.

9세에 고아가 되었고 대사리발(大俟利發)이라 불렀고 글필의 추장으로 있다가 632년에 부락의 6천여 가구를 인솔해 사주에서 당나라에게 귀순했으며, 감주, 양주 사이에 옮겨지고 좌령군 장군에 임명되었다. 635년에 이대량, 설만철, 설만균과 함께 토욕혼을 적수천에서 공격해서 설만균, 설만천이 먼저 나아갔다가 포위되자 글필하력이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구원해서 토욕혼을 격파했다.

토욕혼의 왕인 모용복윤이 돌률천에 있어서 글필하력은 그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설만균이 패배한 것으로 인해 경계해 가지 않으려고 했다가 글필하력이 공격할 것을 주장해 정예 기병 1천여 명을 이끌고 공격하자 수천 명을 죽이고 낙타, 말, 소, 양 20여만을 획득하고 처자를 사로잡았다.

토욕혼을 토벌한 후에 설만균이 글필하력보다 이름 아래에 나온 것을 부끄러워 해서 글필하력을 배척하고 헐뜯으면서 자기 공로를 칭찬하자 글필하력은 분해서 그를 죽이려다가 장수들이 말려 이를 중지했으며, 당태종이 이 소식을 듣고 글필하력을 책망하자 글필하력은 이 상황을 갖춰서 말하자 당태종이 화를 내 설만균을 해임시키고 글필하력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글필하력은 설만균을 해임하면 여러 호족들이 알지 못해서 호족을 중시하고 한족을 경시한다고 생각하면서 돌아가면서 무고해 경쟁할 것이며, 호인들에게 장수들이 설만균 같다고 하면 장차 한족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 해서 당태종은 훌륭하다고 여겨 중지시켰다.

640년에 총산도부대총관이 되었고 고창국을 공격해 평정했으며, 642년에는 양주에 있다가 당태종의 명으로 부모를 만나고 그 부락 사람들을 위로했다가 설연타가 강성하면서 글필 부락이 설연타에게 귀부하고자 했다. 글필하력은 글필부락의 무리에게 붙잡혀 진주비가가한에게 끌려갔고 당태종이 최돈례를 보내 설득하면서 신흥공주를 설이남의 처로 삼도록 하면서 글필하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며, 글필하력은 당나라에 돌아올 수 있게 되고 우교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643년에 진주비가가한이 조카 돌리를 시켜 폐물, 말, 소, 낙타, 양 등을 바치고 당태종이 공주와의 혼인을 허락하자 글필하력은 이를 반대하면서 진주비가가한을 영주까지 오게 했는데, 진주비가가한이 여러 부에서 징발하고 당나라에게 3차례 재물을 보내고 사막을 건너다가 재물을 모두 쓰게 되자 영주에 도착하기 전에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645년에 고구려 정벌에 종군해 전군총관에 임명되었고 오골성에서 군사 1만을 파견해 백암성을 구원하자 글필하력은 기병 800명을 이끌고 이들을 공격했으며, 몸을 던져 그들의 진지에 들어갔다가 고돌발에게 창으로 허리를 맞았고 설만비가 단기로 구출해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글필하력은 분해서 상처를 묶고 싸우면서 이를 따르는 기병들도 분발해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수십 리를 추격해 1천여 명을 죽였으며, 어두워지자 추격을 그만두었다.

글필하력은 심한 상처를 입어 당태종이 스스로 약을 발라줬는데, 당태종이 포로로 붙잡은 고돌발을 죽이려 하자 이를 만류했다. 결국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면서 고구려에서 철수했으며, 646년에 설연타를 공격할 때 양주와 흉노의 군사를 거느렸다.

651년에 서돌궐의 사발라가한이 처월, 처밀, 고소, 가라록, 비실 5부 등을 이끌어 정주를 노략질하고 금령성, 포류현 등을 공격해 함락하고 수천 명을 잡아갔는데, 글필하력은 궁월도행군총관이 되어 다른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징발했다. 652년 1월 5일에 양건방과 함께 처월의 주야고주를 뇌산에서 격파해 거수 60명을 붙잡고 1만여 명을 죽였으며, 가축 7만을 얻었고 처밀부의 시건사근, 합지하 등을 붙잡고 돌아가 좌효위대장군이 되고 성국공에 봉해졌다.

660년에 고구려 원정에 참가해 패강도행군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으며, 661년에는 요동도행군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연남생이 파견되어 압록수를 지켰고 글필하력은 물이 얼어서 합쳐지자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나아가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해 3만 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항복시켰지만 조서에 따라 회군했다.

662년에 철륵의 9개의 성에서 봉기하자 글필하력은 안무대사에 임명되었고 정예기병 500명을 뽑아 9개의 부락으로 들어가 이들을 회유하고 엽호, 설, 특륵 등 200여 명을 넘겨받았으며, 그들의 죄를 헤아려 목을 베면서 9개의 부락을 안정시켰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666년에 연남생이 동생들에게 쫓겨나 아들을 보내 투항할 것을 청하자 6월 7일에 글필하력은 요동도행군대총관, 안무대사에 임명되어 연남생을 구원하면서 이세적을 보좌해 함께 고구려로 갔다.

이세적이 신성을 함락하자 글필하력은 남아서 신성을 지켰으며, 고구려 군대의 15만이 요수에 머물면서 말갈 수만을 끌어들여 남소성에 근거하자 글필하력이 이들을 공격해 1만명을 죽이고 그 기세를 타서 8개의 성을 함락했다. 이세적과 합류해 욕이, 대행 등을 함락하고 나아가서 부여를 함락했으며, 7개월 동안 공격한 끝에 그 왕을 사로잡았고 진군대장군, 행좌위장군이 되면서 봉국을 양으로 옮겼다.

토번토욕혼을 없애고 세력이 커져 선주, 곽주, 하주, 방주 등에 가까워지자 676년에 양주도행군원수에 임명된 이륜 휘하에서 토번을 공격하게 되었지만 이륜이 가지 않았고 677년에 사망했다. 보국대장군, 병주대도독에 추증되고 소릉에 배장되었으며, 시호를 의(毅)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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