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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종

금의 역대 황제
4대 해릉양왕 완안적고내 5대 세종 완안오록 6대 장종 완안마달갈

묘호 세종(世宗)
시호 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聖明仁孝皇帝)
연호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여진어 왕기얀(Wanggiyan)
중국어 완안(完顔)
여진어 오록(烏祿)
중국어 옹(雍)
생몰기간 1123년 3월 29일 ~ 1189년 1월 20일
재위기간 1161년 10월 27일 ~ 1189년 1월 20일

Contents

1. 소개
2. 개요

1. 소개

금(金) 제국의 5대 황제. 묘호는 세종. 시호는 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光天興運文德武功聖明仁孝皇帝). 휘는 여진식은 완안오록(完顏烏祿). 중국식은 완안옹(完顔雍).

최고의 먼치킨 황제.
세종이란 묘호가 붙는 왕들은 모두 먼치킨 잠깐 그럼 이사람은..?

2. 개요

아버지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예종 와리타(訛里朶), 어머니는 추와지(雛訛只)의 딸 정의황후(貞懿皇后, 중국성은 이씨)며[1][2] 황후는 여진 오림답부(烏林荅部)의 수장인 석토흑(石土黒)의 딸 오림답씨(烏林荅氏, 명덕황후(明德皇后)). 원래 왕이었던 해릉왕은 금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폭정이 말로 못할 지경이었다.[3] 거기에 무리하게 남송에 대한 침입을 계속하였다. 잘 됐으면 몰라도 번번히 실패하였는데 또다시 남송 침입을 해릉왕이 계획하다가 남정 중에 자신의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이 시기 동경 요양부에 있었던 황족 완안옹은 해릉왕에 반항하는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에 입성하였다.[4]

원래 해릉왕은 세종을 미워했고 미녀였던 세종의 아내 오림답씨를 빼았았던 적이 있다.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갔다가 결국 자살로 자신의 의지를 보여줬고 세종은 자신의 보물을 해릉왕에게 뇌물로 바치며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다가 반란군에 의해 옹립되어 해릉왕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세종은 오림답씨를 황후로 추존했지만 계속 그리워했고 평생 후궁들 중에서 황후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

이후 그는 1163년 남송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본격적으로 내치에 집중했다. 우선 1164년부터 여진 문자로 경사(經史)를 번역하는가 하면, 영토와 국방력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에도 힘을 쏟아서 금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여진 문자가 대단히 널리 퍼져 단순히 만주지역 뿐만 아니라 화북전역으로 이 글이 퍼져 수많은 책들이 여진 문자로 번역되었고, 한족들도 여진 문자를 먼저 배우게 되었다. 해릉왕 말기의 금의 인구는 1900만에 불과했는데, 1170년에 이르면 화북의 인구가 2000만을 넘고 대금제국의 전체 인구수가 3000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세종 말기, 장종 초기에 이르면 무려 5000만명에 가까운 수치까지 상승한다.

또한 옛 수도 회령부를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의 하얼빈)로 고쳐 금의 오경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성씨를 한역(漢譯)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 요양에는 백탑(白塔)을 건설하였으며, 재정도 탄탄해져 1177년에는 하북 산동의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1187년 한인 복장의 착용을 금지하였다.

금세종은 무엇보다 단순한 국방력 수준이 아니라 문화, 경제등 나라의 근간이 되는 부분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화북 지방의 모든 문화재 중 70%가 이 시기 금나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황하의 치수 사업도 성공적으로 끝나 화북 지역의 농작물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여 정강의 변으로 황폐화 된 화북 지역의 경제가 복구되었다. 얼마나 태평성대였던지 이를 일컫어 사람들이 소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고 부를 정도였다. 재위 기간동안의 연호는 대정(大定)이었다.

세종의 일화와 언행을 보면 과연 성군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조세를 면해주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의 고통이 가중되면 안된다고 항상 말했다.

  • 황실의 공노비와 귀족들의 사노비들을 해방시켜 평민으로 환원 시켰다. 불교가 융성했던 요나라 시절부터 사찰에는 '이세호'라는 노비들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이세호들을 해방시켜 평민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상서성에서 황실 종친을 자사로 추천했지만 세종은 황족의 나이가 너무 어려 관리가 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황제의 호위를 맡았던 무인이 지방관으로 천거되었을때도 직무에 맞지 않는 이가 민생을 살피기에 무리가 있다고 말하며 반대하였다. 이렇게 인재 등용에 있어 공정함과 백성을 생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세웠다. 무능력한 측근들이 요직에 앉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능력이 있으면 하급 관리라 하더라도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였다.
  • 개인적으로 대단히 검소한 황제였기에 송사 금열전에는 평소 자신의 식사 자리에도 4,5가지 반찬만 올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신들이 황제는 평민과 다르니 반찬의 수를 늘리라고 청했지만 세종은 "천자도 같은 사람이니 낭비를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며 대신들의 청을 듣지 않았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양 50마리도 넘게 먹을 수 있으나 그것이 백성의 피와 땀이라고 생각하면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태자의 생일과 정월, 추석을 제외하고는 술을 아예 마시지 않았다.
  • 식사 도중에 자신의 딸이 알현을 하러 왔지만 평소에 세종은 꼭 먹을만큼의 음식만 준비해서 먹었기에 공주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었다.
  • 음식뿐 아니라 궁전의 화려한 장식도 제한하여 궁전을 금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을 동원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도 금지하였다. 궁중의 시종들을 함부로 늘리지 못하게 하였다.
  • 자신의 옷을 제후와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옷이 입은지 3년이나 되었지만 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황실에서는 황제가 옷을 한번만 입고 그것을 버리도록 되어 잇었는데 세종은 옷을 세탁하여 계속 입었다.
  • 불교와 도교등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드는것을 경계하였다.
  • 길거리에 술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것을 보고 마차로 태워 집으로 보내주었으며 평소 먹던 음식 맛이 고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수라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물어보니 모친이 위독해서 모친 생각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친의 병이 다 나을때까지 휴가를 주어 요양을 할 수 있게 하였다.
  • 원비(元妃) 이씨가 세종보다 먼저 죽어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에 장례식 때문에 통행 금지가 내려져 길거리가 썰렁한 것을 보고 장례식이 백성의 셍계에 누를 끼치면 안되니 통행 금지를 풀고 백성들이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 할 수 있도록 명하였다.
  • 해릉왕의 폭정을 자신이 직접 보아왔기 때문에 황족들과 신하들에게 사치를 하지말고 검소하게 살 것을 누차 강조하였다. 덕분에 세종 시기에 금나라의 재정은 매우 좋아졌다.

다만 재위 마지막 해인 1189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양대전선이 펼쳐지면서 나라에 먹구름이 일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남송 최고의 명군인 송효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재위에 앉아서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으르렁 대는 두 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같은 시대의 두 명의 황제가 다스린 것이다.

그가 사망하자 그의 적손 완안경이 뒤를 이어 금장종이 되었다. 원래 세종의 황태자이자 장남이었던 완안윤공은 1185년에 사망했는데 장종에 의해 현종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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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세종의 부모는 모두 세종이 황제가 되자 추존된 것이다.
  • [2] 세종의 어머니는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위해 세종은 오늘날의 랴오닝성에 광우사(广佑寺)라는 절을 지었다. 이 절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 [3] 해릉양왕항목 참조. 특히 여자관계가 막장이었다.
  • [4] 금사에 의하면, 해릉왕을 죽인 부장이 새로운 황제가 중도대흥부에 입성하였다고 하자 해릉왕은 웃으면서 "옹이 황제가 되다니! 그 녀석을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데!" 라고 말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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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17 03: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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