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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last modified: 2015-03-31 02:28:43 by Contributors

騎兵, Cavalry.


19세기까지만 해도 기병대가 대열을 파고들어 덮치면 포병이고 보병이고 으앙 죽음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고대 ~ 중세
2.1.1. 중기병
2.1.2. 경기병
2.1.3. 중기병 VS 경기병
2.2. 근대
2.2.1. 울란
2.2.2. 후사르
2.2.3. 샤쇠르
2.2.4. 쿼러시어
2.2.5. 드라군
2.2.6. 총기병
2.3. 세계대전
2.4. 현대
2.4.1. 공중 기병대
2.4.2. 기갑 기병대
3. 각종 매체에서의 기병
3.1. 드라마, 영화
3.2. 게임

1. 개요

말타고 싸우는 육군의 전투병과.[1]

기병은 크게 2가지 장점을 가지는데 하나는 충격력이고 다른 하나는 기동력이다. 충격력은 기병이 가진 질량과 속도에서 오는 것으로, 말과 기수의 무게를 합치면 적어도 반톤이 넘어가고 이런 덩치가 최소 50~60km/h의 속도로 달려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무기가 된다. 수십, 수백기의 기병 돌격 앞에서 대열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리 손에 긴 창이나 심지어 착검한 소총을 들었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19세기까지의 회전에서 대열이 무너지면 그 부대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렇게 비주얼적으로 압도적이고 드라마틱하다는 점에서 대중매체에서는 주로 이러한 충격력에 치중해서 기병을 조명한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로한 기마대의 돌격 장면이 대표적인 예.

그러나 실제로는 훈련이 잘 된 보병에게는 이런 충격력은 극복할 수 있는 위험이었다. 기병돌격에 대비해 잘 준비된 전열이라면 이번에는 기병이 가진 속도와 무게가 되려 그 자신을 공격하는 약점이 된다. 말은 뾰족한 것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장창이나 총검으로 만든 에 정면으로 들이닥칠 수도 없는데다, 쉽게 방향을 바꾸거나 멈춰 서서 엄폐하거나 할 수 없기 때문에 화살이나 총알 세례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제 전술적인 입장에서 바라볼때 기병의 가장 큰 장점은 기동력이었다. 기동력은 무엇보다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주는 방편이었다. 일단 단순히 말에 올라탄 것만으로도 전투 현장에서 보병보다 넓은 시야가 보장된다. 또한 적과 아군에 대한 각종 보고와 명령을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다리로 걷는 보병이나 온갖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이동해야 하는 포병 등과 달리 기병의 탁월한 기동력은 지휘관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각에 전투를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전술적인 자유도를 보장해주었다. 쉽게 말해서 보병은 기병이 싸움을 걸면 뛰어봐야 벼룩이니 맞설 수밖에 없지만, 기병은 불리하다 싶으면 그냥 도망가면 된다.

이렇게 기병은 기본적으로 기동력을 이용해 충격력을 휘두르는,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맡는 병과로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20세기가 되어 소총기관총이 발달하고, 보다 빠르고 신뢰성이 높은 차량이 등장하자, 기병의 충격력은 거의 그 의미를 잃었다. 그러나 차량 사용이 어려운 곳에서는 기병의 기동력은 아직도 장점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소수가 살아남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 역사

2.1. 고대 ~ 중세

고대은 품종 개량이 되지 않아 크기부터가 작은데다가 마구(馬具)가 발달하지 않아 일부 기마민족을 제외하고는 기병이 잘 쓰이지 않았고, 대부분 전차를 운용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기병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정찰 임무에 투입되거나 투창을 던지는 플랫폼, 그리고 정작 싸움은 말에서 내려서 하는 기동 보병으로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형태는 후대의 용기병 또는 기계화보병과 유사하다. 일본도 중세기에 이런 식으로 기병을 운용하였다.


이후 말의 품종 개량과 마구 발달을 통해 덩치 큰 전사(戰士)를 태우고도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군마가 탄생하면서 전차는 도태되고 중기병(重騎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널리 퍼진 '정설'로는 등자와 안장의 개량이 있기 전까지는 중기병이 존재하지 않았고, 기병은 단지 정찰과 원거리 발사무기의 플랫폼으로만 쓰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밀한 문헌 검토와 숙련된 무술가, 승마가들의 수많은 실험 결과를 통한 현대의 연구 자료는 이와는 사뭇 다른 사실을 말해준다. 즉, 안장이 덜 발달하고 등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도 충격력으로 적 진형을 무너뜨리는 중기병은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험 결과 안장이나 등자 없이도 충분히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낙마하지 않고 창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음이 밝혀졌다. 실제로 고대 문헌을 검토해보면 그동안 이름만 기병일뿐, 실상은 말탄 보병만 있었다고 간주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기병들도 창을 쥐고 적 보병을 향해 돌격하여 진형을 무너뜨리는 기록이 수도 없이 나온다.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우스 시절에는 페르시아 중기병과 그리스 기병이 서로의 창이 부숴질 정도로 맹렬하게 돌격한 사례도 있다. 물론 안장과 등자가 있으면 더더욱 안정적으로 돌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등자 없는 돌격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Philip Sidnell의 저서 Warhorse를 읽기 바란다.

2.1.1. 중기병

최초의 기병은 기본적으로 경기병이었으나, 말의 품종 개량과 마구의 개량으로 보다 무거운 무게를 지탱할수 있게 되면서 중기병이 탄생 했다. 중기병의 정확한 의미를 정의하기는 힘드나 기본적으로 육중한 중갑을 걸친 기병대라고 정의 한다면 그 기원은 고대 중동에서 등장한 카타프락토이(cataphract, 중장기병)를 원류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타프락토이가 언제 발생된지는 정확한 기원은 알수없으나 학자들이 추측하기론 기원전 10~7세기경의 아시리아기병이 화려한 장식이 마갑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카타프락토이로 발전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후대와 같이 금속제마갑, 갑주등으로 말과 기수을 갑주로 감싼 중장기병은 기원전 5~6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때 지금의 이란 고원에서 궁병에 대항하기 위해 처음 등장하였고 한다. 이 시기 철제흉갑, 투구, 그리고 말 전면만 가리기는 하지만 철제마갑을 씌운기병이 처음 등장하였다. 물론 활과 단창,철퇴와 장검으로 무장한 이들은 전술적인면에서 돌격과 돌파보다는 기병인 만큼 기동성을 이용한 기습, 측면과 후방교란, 그리고 이들이 걸친 "금속제갑주이기에 방호력도 괜찮은 무장"을 이용해 궁기병, 궁병과의 대적을 담당하였다. 쉽게 말해 처음 중기병은 돌파와 돌격을 이용한 적진을 휩쓸기 위해 등장한것이 아니라 기병대간의 전투에서 경무장한 기병대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등장했다고 봄이 옳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이

돌격과 충격을 이용한 기병의 전술이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개발(기원전 4세기경)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의해 기병의 돌격전술은 아시아고원에게까지 알려졌다. 여기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나 기본적으로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이는 장창을 이용한 돌격과 돌파보다는 중무장한 기병의 튼튼한 갑주를 이용한 근접전에서의 우위를 중점으로 이용했다. 파르티아, 박트리아의 유목민들은 철제비늘갑주와 마갑을 씌운 그들의 기병에 장창을 도입해 돌격과 충격전술을 접목시켯고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중기병이 탄생하게 되었다. "마갑과 갑주로 무장한 기병"은 고원을 거쳐 서로는 유럽으로 동으로는 동아시아로 퍼져나갔고 장창으로 무장한 충격전술 역시 이후 고원을 거쳐 각지로 퍼져나가게 된다.


고구려 벽화에 남아있는 개마무사

단 마갑이 동아시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유목민들을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받아들인 건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삼국시대까지도 개마무사의 수가 없거나 극히 적었으며 본격적으로 개마무사가 대량으로 운영된것은 오호십육국시대에 들어서 이다. 동아시아 유목민중 중장기병이 본격적으로 운용한건 기원후 2~4세기경의 선비족으로 최소한 동아시아 지역이 중장기병을 운영하는건 중앙아시아나 오리엔트지역보다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장기병이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다는 기록이나 유물은 없다. 기록에 240년경 동천왕이 위나라군과 싸울때 5천의 철기병을 동원했다고 나오나 철기병=중장기병인지는 명확치 않다. 고구려의 경우 300년대 중반으로 보이는 황해도 안악 3호고분에 개마무사가 나타나는것으로 보아 그 쯤에 중장기병이 운영된 걸로 추정된다. 단 동천왕 시기 철기병이 존재하는것으로 보아 중기병은 그 이전부터 운용되었다고 봄이 옳다. 백제나 신라, 가야역시 4세기 부터 중장기병을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전시대의 대표적인 중기병으로는 마케도니아의 헤타이로이나 중앙아시아 등지의 "캐터프랙트(cataphract)" 등이 있었으나 이 시기 중기병은 아직 안장의 발달이 미흡하고 등자도 없어 후대의 본격적인 중기병과는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 기병대의 전술은 돌격전술의 핵심인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를 아직 사용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이시기 기병의 돌격 전술은 창을 옆구리에 끼는 카우치드 랜스가 아니라 양손으로 창을 움켜쥐고 내지르는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카우치드 랜스에 비해 안정감이 떨어지고 기병의 밀집대형이 장애를 가져와 돌격과 돌파의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나 육중한 갑주와 말의 돌격력을 조합한 이들 초기 중기병의 돌격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못되며 전투의 결정적인 국면에 비수가 될수 있다. 알렉산더 휘하 중기병들의 활약과 그 이후 지중해 지역에서 기병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결코 이들 고전시대 중기병을 무시할만한한 존재는 아니다. 흔히 궁기병을 이용해 로마군을 유린했다고 알려진 카르헤 전투에서도 이들 중기병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승리를 가져다 주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 고전시대 중기병은 충격력의 중핵으로 떠오르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구세계 전역에서 여러 중기병 집단이 활약하게 된다.



중세 유럽에서는 군마가 더 개량되었고, 안장도 개량됨에 따라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병전술이 등장 했고, 이를 활용한 닥돌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자 그에 따른 대열의 변화, 전술의 변화가 따라오면서 기병의 충격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서 등장한 랜스는 '중세 기사'를 떠올릴 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창을 한 손으로 길게 잡고 손잡이를 겨드랑이에 끼워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최초의 카우치드 랜스 사용자는 불확실하다. 린 화이트에 의하면 이미 10C 이전부터 비잔티움 제국이슬람의 기병은 이 방식을 알고 있었으며 10C 중엽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이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고 걸맞은 전술과 대형을 발전시켰다. 서구의 경우 9C부터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한데 당시 남아있는 그림, 태피스트리 등에서 기병들은 여전히 이전의 두손으로 창을 잡는 방식을 따랐음이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카우치드 랜스가 도입된 이후 이 전술의 효과를 극대화 하여 사용한 측은 서구쪽이었다. 당시 비잔티움과 중동은 여전히 중기병대를 결정적인 측면에 타격을 주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운용하였으나 서구는 이들 중기병을 전투 내내 말이 쓰러질 정도로 굴려먹었다. 13세기 영국 수도사 베이컨에 의하면 여러차례의 재돌격으로 말이 쓰러져 바꿔 타야 했다고 한다. 여튼 이러한 창술에 맞춰서 중세 후반 이후 창의 형태도 한 손으로 잡고 겨드랑이에 끼기 쉽도록 변화했고, 기병용 갑옷의 오른쪽 가슴 부위에는 이 창을 걸 수 있는 돌기도 있었다.

이 시기 중요한 전술적인 변화는 카우치드 랜스의 도입으로 기병의 돌격력이 극대화 되어 이전과 같은 종심대열애서 횡대대열로 기병의 대열이 바뀜을 볼 수 있다. 이전 시기 중장기병의 대열은 마름모나 삼각꼴의 깊은 종심대열이 주를 이루었다.(꼭 횡대 대열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종심 대열은 중갑 기병대의 육중한 무게와 안정성을 극대화 시킬수 있는 대열로 창에 의한 쇼크효과 보다 무게에 의한 쇼크 효과에 중점을 둔 대열이다. 그러나 카우치드 랜스의 도입 이후 이러한 종심 대열은 횡대대열로 변화 하게 된다. 창에 의한 쇼크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선 얆으면서도 긴 횡대 대열이 효율적이었고 랜스차지로 적의 대열을 허물기 위해 이전의 종심대열에서 횡대 대열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기병의 전술적 변화 덕분에 서구의 기병들은 막강한 돌격력과 돌파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 "노르만인"들의 기병대 돌격에 대해 당시 비잔티움은 "바빌론의 성벽마저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놀라움을 표했다고한다. 이들의 돌격의 충격력은 현대의 탱크에 비견되며 보두앵 4세는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580명의 기사[2]들을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 2만 6천명의 살라딘 군대를 개발살내버리기도 했다.


랜스를 든 기사.

동아시아에서 중기병이 활약하게 된 것은 대체로 남북조시대 무렵이다. 이후 거란, 여진족 등이 철광을 확보하면서 중기병을 육성, 북송을 발라버리면서 만주, 연해주,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한때를 호령했고, 몽골족 역시 여진의 을 정복한 이후 경기병 중심 체제에서 중/경기병을 혼용하는 방식으로 전술을 변경하면서 더욱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게 된다.

다만 동아시아에서는 중기병이 단순히 병과의 하나였을 뿐이며, 서양의 기사와 같은 압도적인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유럽권에서는 기사 중심의 봉건사회가 형성되어 기사가 군사-귀족의 지배계급이 되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 매우 이른 시기인 춘추전국시대부터 강력한 국가권력이 형성되어 법가로 대변되는 농업 기반의 군사사회인 제민정책이 시행되어 전통이 오랜 기간 이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민정책을 통해 형성된 균질적인 중농사회는 오랜 훈련과 고가의 전투장비가 필요하므로 군사귀족과 그 사병집단에서 출현하기 쉬운 중장기병의 운용보다는 평시에 농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 전투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보병의 대량 운용이 더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강력한 쇠뇌의 발달을 가져왔는데 삼국시대에 연노가 개발되면서 노의 연사속도에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진 점도 있지만, 활이나 근접무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달되는 데 용이하고 대량으로 통일된 병종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치체제가 흔들려 농업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유민이 대량 발생해 국가의 통제력이 약해진 시점에서는 군제가 군사귀족 중심의 정예부대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보병 중심 군제라고 알려진 송나라에서도 군마의 수급이 어려웠을지언정 충분한 수의 중기병을 확보하려 했으므로 단순히 '동양에선 중기병 별로'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

Mongol_Heavy_Carval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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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중기병.

한국도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중기병이 널리 쓰였다. 시대가 지나면서 고려에 이르면 마갑은 사라지지만 대부분 철갑을 입으며 전력의 큰 중핵이 되었다.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농경국가임에도 기병 비중이 은근히 높은 편인데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북계의 주진군 총병력이 4만 633명인데 그 중 기병이 약 54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경기병도 포함한 수치지만 전체 병력 중에 8분의 1이 기병이라는 소리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기병으로 윤관이 창설한 별무반의 신기군을 들 수 있으며,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상대로 싸운 인간흉기 이성계 사병 2천명도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초기에 기병을 창을 다루는 기창 40%, 활을 다루는 기사 60%로 구성했으나 세조대 궁기병 비중을 대폭 늘리면서 창기병은 사실상 없어지고 임진왜란에 접어들면 궁기병들만 남게 된다. 조선의 기병은 탄금대 전투와 해정창 전투에서 여러가지 요인으로 일본군에게 패배했으나,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중에 기병이 길주 장평 전투와 백탑교 전투에서 활약해 승리를 돕기도 했다. 이후 편곤이 도입되어 활과 더불어 조선 기병의 주력 무기로 자리잡으면서 서양과 비슷한 방향으로 기병 활동 성격이 변하게 된다.참조

아무튼 이러한 중장 기병은 냉병기 시대의 전차라 할 수 있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화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점차 힘을 잃어 간다. 그러나 총기가 아직 화승총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만 해도 중기병은 더 강화된 갑옷과 개량된 전술로 활약했으며, 이러한 중장 창기병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폴란드 윙드 후사르로 당시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몇 배의 파이크 보병 방진을 돌파해 버리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다만 윙드 후사르가 격파한 파이크 방진은 서구권의 정예 파이크 방진에 비해 안습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키르홀름에서 격파한 스웨덴의 파이크 방진의 경우, 칼 9세가 군제 개혁하려고 데려온 나사우 백작 요한에게 "옷도 무기도 형편없고 얘네 파이크 쓸 줄도 모름. 솔직히 양민보다 나을거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이러한 폴란드 후사르의 예는 예외적인 것으로, 16세기부터 서서히 기병의 주무장이 권총으로 바뀌게 된다. 왜 기병의 무장이 총으로 바뀌게 되었는가는 의견이 분분하나 기본적으로 "기병간의 전투에서 창기병이 총기병에게 밀리게 됨에 따라서"라고 보고 있다. 총기병은 창기병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는데 공격 거리에서 우위를 점함과 동시에 창기병에 비해 이들 총기병의 살상력이 더 뛰어났다. 창기병에 비해 충격효과는 더 적을지는 몰라도 이들 총기병의 지속적인 총기사격은 창기병의 살상력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또한 총기병의 밀집대열은 창기병의 얆은 횡대 대열에 비해 내구성이 뛰어나 창기병을 돌격을 버틸수 있게 해주었다. 창기병의 쇼크효과인가 총기병의 킬링효과인가 둘중 어느쪽이 비교우위에 있는가는 이후 기병대가 어찌 변화하였는가를 보면 여실히 드러나는데 총기병의 등장이후 창기병은 도태되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유명한 창기병인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마저 때에 따라선 총을 들고 카라콜전술을 구사함은 창기병의 쇼크효과보다 총기병의 킬링효과가 더 뛰어난 효율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술적 우위를 통해 총기병은 창기병과의 대결에서 종종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결정적으로 1587년 쿠트라 전투(Battle of Coutras)에서의 프랑스 국왕군의 창기병이 위그노군의 총기병에게 패배함으로써 서구에서 창기병은 그 모습을 빠르게 감추게 된다. 이에 따라 창기병은 쇠퇴했으며 기병은 돌격전술을 버리고 카라콜 전술로 주 전술이 변화한다. 카라콜 전술은 수많은 변형이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종심대열을 취한 총기병대가 한열이나 한오씩 나와 사격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장전하는 형식이다. 출격->사격->복귀->장전의 로테이션을 돌면서 끊임없이 적에게 사격을 퍼붓는 방식.

이후의 기병 전술은 카라콜을 위시한 그의 변형전술인 신교도 카라콜, 스네일(snail), 리마콘(limacon)등이 그 주를 이루었으나 30년전쟁에서 스웨덴스타프 2세 아돌프스는 흔히들 말하는 "하카펠 기병"을 육성함으로써 기병의 의의를 닥돌로 돌려 놓았다. 그는 자국의 사정상 기병을 여러 병종으로 확보하기가 곤란하여 돌격형 기병과 권총 사격형 기병을 한데 묶어 총 한방 쏘고 그대로 돌격해 버리는 헤카펠 기병을 육성하고 동시에 보병 방진을 흩어 놓기 위해 포병과 연결하는 전술이 개발하여 단 한차례 패배를 제외하곤 상승장군으로 남게되었다. 일단 고도로 숙련된 보병이 아닌 다음에야 포병이 포를 쏘면 흩어졌다가 기병이 달려들면 방진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또한 반대로 포병의 화력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기병을 동원하여 보병 방진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17~19세기의 기병은 이전시대 카라콜과 같은 사격의 킬링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 아닌 여러개의 총기를 휴대하여 몇차례 사격 이후 그대로 돌격하는 돌격기병의 면모를 띄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총기 휴대량도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기병이 세분화되면서 중기병이 돌격에 집중하게 된 측면이 크다. 기병대의 다른 역할은 다른 기병대에 맡기게 되고, 중기병의 의미는 돌격에 치중함에 따라 휴대하는 총기를 줄이는데 나폴레옹 시절이 되면 한두정 정도의 총기만 휴대하든가 아예 휴대하지 않기도 했다.

갑옷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했다. 이전의 전신 판금 갑옷과는 달리, 르네상스 시기부터 기병의 갑옷은 원거리에서 머스킷, 근거리에서 권총의 탄환을 방어할 정도로 강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대신 그렇게 만들면 꽤 두꺼워지는데, 전신에 두르기에는 너무 무겁고 말도 쉽게 지치기 때문에 맞아도 덜 치명적인 부위의 갑옷을 없애는 대신 남는 부분을 두껍게 하는 식으로 최대한 총탄을 막아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19세기 쯤 되면 가슴 등의 몸통만 방어하는 흉갑 정도만 남아버렸고, 그나마도 안 입는 기병이 많았다. 대신 이 흉갑의 두께는 중세 플레이트 아머에 비하면 엄청나게 두껍고, 전면에서 날아온 동시대의 총탄을 꽤 잘 막아준다.

2.1.2. 경기병


중세 전장에서 경기병이 자주 맡은 역할은 정찰 및 적진 교란과 전투 종반에 후퇴하는 적의 추격이었다. 적이 진형을 구성하고 있을 때 경기병이 먼저 나가서 전반적으로 찔러보고 약점을 찾는 식이거나 중기병의 돌파 시에 함께 나아가 적진에 사격을 가해 중기병의 돌파를 쉽게 해주는 식이다. 실제로 금나라의 기병 편제는 항상 중기병과 경기병이 한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 경우 중기병의 돌파가 쉬워질 뿐 아니라 적도 중기병으로 맞대응할 경우 충돌 전에 먼저 적의 숫자와 기세를 꺾어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강조의 고려군이 요 임금 성종의 군세에 무너진 원인 중 하나가 요나라의 경기병들이 먼저 고려군의 여기저기를 찔러 약점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경기병들은 빠른 기동성을 갖췄기 때문에 중기병이나 보병대로는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반대로 말해서 근접전을 벌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전투의 종반에서 적의 전력을 가장 확실하게 줄일 수 있는 추격 섬멸에 있어서 경기병만큼 좋은 병과도 없었다.

고대의 전장에서 기병이 처음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을 사용하는 경기병이었다. 빠른 기동력을 갖춘 경기병들이 다수 모이면 보병은 그저 과녁일 뿐이고 중기병조차도 대응이 힘들었다.

거리를 둔 채 근접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적 병력을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전법이었다. 장거리 무기를 갖추지 않으면 이들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없었으며 경무장 덕에 기동력이 극대화되었던 탓에 추격이 힘들었다. 약점은 근접전으로 일단 붙으면 얄짤없이 발리기 때문에 적과의 거리 유지가 관건이었다. 마상사격이 어려웠던 탓도 있어서 자연히 많은 훈련과 좋은 말을 필요로 하였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육성이 매우 어려웠다.

이 경기병들의 주력 전술을 스웜(swarm) 전술이라고 한다. 다른 병과들처럼 대오를 맞춰 적과 교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여러 뭉텅이로 쪼개어 적을 에워싼 뒤 벌레떼(swarm)처럼 우르르 달려들어 공격하다가 우르르 빠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합성궁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갑옷과 방패를 갖추고 대오를 정비한 군대를 화살을 쏴서 죽이려면 수십 발을 소나기처럼 쏟아부어야 겨우 몇 명 죽고 다치는 정도이기 때문에, 이 같은 스웜 전술을 통해 적을 포위하고 전력을 갉아먹으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적들이 손실을 견디지 못해 전투의지를 상실하거나, 대오가 무너지거나 할 때 중기병을 필두로 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과정이 교과서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카르헤 전투다. 반대로 이 스웜 전술에 당하면서도 전투력을 온존하고 있다가 역습, 경기병들에게 근접전을 강요하여 승리한 사례도 많은데 십자군 전쟁중 십자군이 룸 술탄국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도릴라이온 전투가 대표적 사례다.

경기병은 서로는 우크라이나스텝 지대로부터 동으로는 만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목민들의 주력 병종이었다. 유목민들에게는 목축과 수렵이 생계수단이었기에 고대부터 자연스럽게 경기병이 육성되었고, 양 다리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양손을 이용해 활을 쏘았다고 한다.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스스로를 '활의 백성'이라 자처했으며 중국의 문헌에도 이들을 '장성 이북 궁술의 나라'라고 일컫는 표현들이 보인다.

동양학자 폴 J. 스미스의 책 《천부(天府)에 과세를 해서》[3]에 따르면, 12세기 초반 북송금나라와 연합해 요나라를 타도한 직후의 일이었다. 금나라의 17기로 구성된 강화사절단이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북쪽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개념없는 북송의 군사지휘관이 전공을 세우기 위해 2,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이들을 습격했다. 무장하고 있던 17기는 곧바로 중앙에 7기, 좌우 날개에 5기씩 세 부대로 분열했다. 숙달된 전투 대형이었다. 이 작은 세 부대는 말 위에서 활을 쏘며 적을 교란시켰다. 2,000명의 보병은 완전히 농락당했고 결국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17기 중에 단 1기도 잃지 않았다. 북송의 기록에 남아 있는 실화다.

하지만 경기병으로 가장 유명한 군대라면 역시 몽골 제국의 군대일 것이다. 몽골 경기병은 2종류의 합성궁과 3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는데, 활의 사용은 단순한 엄호, 견제를 넘어서 적의 대열을 와해시키고 실질적인 타격을 주는 정도에 이르렀다. 중기병도 다수 존재했으나 역시 동시대의 기병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경장이었다. 방패는 칸의 친위대인 케식과 선봉 돌격대만 사용했으며 가죽에 철판을 덧댄 유엽갑이라는 철갑이 있었으나 운용은 제한적이었다. 몽골 중기병의 형태는 윗부분 "중기병" 항목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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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경기병.러시아인 보병은 지못미

꼭 유목민 출신이 아니더라도 유목민들로부터 기원했거나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나라들, 예컨대 유럽의 헝가리중동의 여러 이란계, 튀르크계 제국들도 경기병을 이용했다. 특히 기병이 발달한 몇몇 국가에서는 경기병=궁기병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중기병들도 활을 기본 무장으로 사용했다. 다른 중기병들과 마찬가지로 돌격을 하기에 앞서 활을 쏴 적진을 약화시키는 것인데, 사산 왕조맘루크 중기병들이 이 전술로 유명했다. 조선 역시 유목민이 아니면서 궁기병을 중요하게 운용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일본의 초기 사무라이들 또한 마상 궁술을 중시 여겼다. 애초에 사무라이의 어원 자체가 지방 정청의 관할 하에 있는 '활과 화살의 남자들' 이다. 초기 사무라이를 연구하는 학자인 월리엄 파라스는 초기 사무라이에 대해 아예 대놓고 "중동과 대초원 지대에서 우세했던 아시아형 기마사수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다[4]. 또한 카우치드 랜스가 발달하기 전 일부 서유럽 기사들도 마상궁술을 사용하곤 했다.

경기병의 몰락 역시 화기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투사무기의 발달로 중기병의 충격력과 돌격력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것과 달리 기동력을 밑천으로 하는 경기병의 비교우위는 한정된 조건에서나마 경쟁력을 가지기 때문에 현대까지도 일부 살아남은 병과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현대에 운용되고 있는 기병은 전원 경기병이다.

2.1.3. 중기병 VS 경기병

서양이든 동양이든, 근현대의 역사가들은 경기병을 중기병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중기병의 장갑을 겁장이들의 자기위안급으로 폄하하기까지 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봉건기사의 중갑을 '리더쉽의 결여'의 산물로 평하며 유럽 중기병의 갑옷이 기동성과 화력을 떨어뜨리고 실질적으로 기습을 불가능하게 만든 반면, 몽골의 경기병은 기동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전술을 펼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존 키건은 날붙이를 부딪히는 것을 고집했던 중기병의 전법을 육탄전을 고무하던 게르만족 특유의 군사문화와 결부짓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바투의 서방원정에서 증명된다고 믿어져 왔다. 바투의 몽골군의 주력은 경장 궁기병이며, 이들이 왈슈타트에서 동유럽 최강의 튜튼기사단을 바르고, 슐레지엔 공 하인리히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폴란드 연합군 역시 격파했다는 인식이 현대까지도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몽골군은 징집병이었기 때문에 오직 전사로서 훈련받은 유럽의 기사나 이집트의 맘루크보다 딱히 질적으로 우위에 있던 군대도 아니었다. 게다가 유럽이나 이집트의 경우, 몽골군은 근거지에서 직선거리로 60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이렇게 먼 거리에 이르는 군사행동을 취하는 것은 경기병이 아니라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몽골군도 돌격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동시대의 중기병에 비하면 경장에 가까웠다. 카르피니는 당시의 몽골군을 가죽과 철판을 입은 군대에 비유했다. 첨언하자면 카르피니가 한 말은 "그때의 몽골군은 거지꼴을 하고 왔는데 이젠 우리한테서 빼앗은 장비들로 잘 무장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레그니차의 전투는 유럽식 중기병과 중앙아시아 경기병의 충돌로 서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오히려 서양 쪽에서 많은 의의를 두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프로이센이 리그니츠의 전장 위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바람에 숱하게 강의주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로 전장에서의 기동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례로 차용되며 당시 유럽식의 충격기병이 경장비의 기병을 상대하는데 겪었던 어려움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에도 언급이 있다.

하지만 몽골군 역시 다수의 중기병을 운용했다. 그들의 전력의 20~40%는 항시 중기병이었다[5]. 그리고 이들은 비록 유목민 징집병이긴 했지만 유목민의 특성상 사냥[6]과 약탈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자체가 전투훈련의 연속이었다. 또한, 리그니츠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의 참전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사안이며, 튜튼기사단 참전의 주요 출처인 얀 듀고츠 연대기에서 전투에 참가, 전사했다고 기록된 기사단장 포포 본 오스테른의 사망연대가 리그니츠 전투 10여년 후고, 당시 기사단장도 아니었으며, 리그니츠 전투 직후 프로이센에 대한 튜튼기사단의 대규모 공세를 미뤄보면 리그니츠 전투에 튜튼기사단이 참전했더라도 주전력의 참가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바투가 직접 지휘한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사조강을 배경으로 몽골군의 기동을 제한시키고 백병전을 강요, 오히려 몽골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바투가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서 전황을 안정시키고 수부타이군이 뒤늦게 도하에 성공해서 헝가리군의 배후를 습격해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40년 후 헝가리군은 이때보다 더더욱 중무장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몽골계 노가이칸의 침공 당시 성공적으로 결전을 강요, 격파한 바 있다. 즉 중세 기사의 갑옷이 기동을 심각하게 제한하지는 않았다.

이는 아랍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집트맘루크 중기병과의 전투에서 몽골기병은 여러가지 이유로 맘루크 기병과의 근접전을 강요받았고, 그 근접전에서 몽골기병은 크게 패한다. 다만 맘루크가 근접전만 했던 것은 아니다. 맘루크는 마술, 창술, 궁술, 검술에 모두 통달해야 했으며 4 과목에 대한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인잘루트에서는 몽골군이 돌격해오자 맘루크들도 활을 쏘며 응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맘루크들은 근접전 잘한 것이 아니라 근접전 잘했던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이슬람 경기병은 번번히 유럽의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나중에는 동급의 중기병이 이에 대항하여 유사한 형태로 돌격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이러한 중기병 무시 풍조는 17-19세기에 걸쳐 유럽에 팽배했던 중세 무시 사고와 그 맥을 같이 하며, 19세기 중기병인 퀴레시어 등이 전장에서 사실상 경기병보다도 못한 활약을 보이면서 그 이전 시대 중무장 중기병에 대한 폄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기병과 중기병중 어느 쪽이 언제나 우세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으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그 효력이 다른 병종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동전, 기습전, 척후 및 정찰, 원거리 궁시전등 기동력을 요하는 여러 상항에서 경기병이 효과적인 반면 돌격전을 위시한 근접 백병전에서 중기병은 무시못할 위력을 갖고 있었다. 이미 벌어진 싸움에서 전황을 결정짓는 능력면에서는 중기병이 좀더 우세했다면 경기병은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우세한 전황을 만들어가는 능력에서 우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2.2. 근대

18-19세기에 이르자 머스킷을 사용하는 전열보병이 전장의 주력이 되었고, 잘 정비된 전열을 향해 뛰어드는 것은 이제 자살행위가 되었다. 거기에 기술의 발달로 포병이 더욱 강화되면서 적 진형에 대한 충격 능력마저 뒤쳐지게 된다. 따라서 기병은 다시 고대 세계처럼 보조군으로서의 능력을 더 절실하게 요구받았고, 이에 따라 보병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도맡게 되어 수많은 병과가 파생된다.

이 시기가 되면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는 주로 말의 중량에 좌우 되고 승마자의 장비는 별 상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워털루 전투에서 괴멸당한 영국군의 '스코츠 그레이'나 '호스가드'는 투구만 착용했지만 말이 대형마였기 때문에 중기병으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 주요 기병의 병과는 다음과 같다. 각 병과의 자세한 설명은 개별 항목을 참고.

2.2.1. 울란

Uhlan(정확한 폴란드 발음은 우완)
근대 창기병. 울란(우완)은 폴란드 등지에서 부른 이름이며, 영어로는 랜서라고 했다.

나폴레옹 근위대 소속 폴란드 울란

2.2.2. 후사르

Hussar
대표적인 경기병/검기병.
유명한 폴란드 윙드 후사르도 사실 경기병에서 출발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중세 기사급의 중기병이 되어버린 케이스이다. 후사르의 원조는 헝가리 등지의 동유럽계 경기병이었다. 19세기 전쟁 등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세이버를 휘두르는 털모자 쓴 기병이 대부분 후사르.

나폴레옹 전쟁시기 프로이센 후사르 제2연대

2.2.3. 샤쇠르

Chasseur
프랑스의 엽기병(獵騎兵). 엽기적인 기병이 아니다.
이들은 후사르와 장비 면에서는 비슷했지만, 사냥꾼이라는 의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임무가 패주하는 적의 추격이었다고 한다. 기병뿐 아니라 추격임무를 맡는 경보병도 샤쇠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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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하는 근위 샤쇠르

2.2.4. 쿼러시어

Cuirassier
흉갑기병. 총탄에 대한 약간의 방호력을 가진 두꺼운 흉갑을 입는 돌격용 병과. 대표적인 중기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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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하는 나폴레옹 기병 소속 쿼러시어

2.2.5. 드라군

Dragoon
용기병. 기병총 드라군을 다루는 병사. 어원은 다뤘던 총 이름.
본래는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전장에서는 말에서 내려 하마전투를 실시하는 승마보병으로서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었으나, 이후 18세기에 들어와서부터는 후술하는 총기병과 비슷하게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전투도 행하게 되면서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전쟁기의 영국군 드라군

2.2.6. 총기병

Carabinier(프랑스어)/Carabineer/Carbineer(영어)

카빈을 다루는 병종으로, 이쪽은 드라군과는 달리 처음부터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전투를 염두에 두었던 부대이다. 따라서 적의 탄환을 막을 충분한 갑옷과 총을 다루는 것의 편의를 위해 대형마를 운용 했다. 따라서 중기병으로 분류. 총기병은 19세기까지 남은 대표적인 기병 병종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퀴레시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흉갑기병이 된다.

이들 역시 드라군과 마찬가지로 치안 유지에 곧잘 투입되었고, 이 때문에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살아남았다. 더 이상 말타고 다니지는 않지만... 실례로 현재 이탈리아군 소속 국가 헌병대라비니에리(Carabinieri)는 1814년에 창설된 사보이 왕가 소속 총기병 연대가 1861년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이탈리아군에 편입된 것이 기원이다.

2.3. 세계대전

19세기 후반 미국 남북전쟁을 참관한 유럽 기병 장교들은 "미국 기병은 총만 쏘네?" 하며 비웃었다. 미군, 특히 북군의 총이 발달한 것도 있지만 급히 군의 규모를 늘리다 보니 마상 검술을 비롯한 수준 높은 승마술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남군의 기병 사령관이었던 존 싱글톤 모스비의 부대는 세계 최초로 기병도를 장비하지 않은 기병대로 유명하며 젭 스튜어트와 함께 남군 최고의 기병사령관으로 꼽히는 나탄 베드포드 포레스트의 기병대는 말은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하마상태에서 치뤘다. 하지만 리볼버레버액션식 라이플을 비롯한 연발총의 발달로 기병이 칼 휘두를 일은 거의 사라졌고, 마상에서 연발총 쏘는 게 효율도 좋았다.

제1차 세계대전쯤 되면 흉갑기병의 갑옷도 무연화약으로 강화된 총기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고, 철조망, 야포, 참호, 기관총에 의해 전선이 고착되면서 말까지 타고 있어서 눈에 잘 띄고 피탄 면적도 높은 기병이 섵불리 돌격한다면 죄다 개죽음 당하기에 기병의 역할은 정찰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다. 또한 비행기의 탄생으로 정찰 임무마저 빼앗기면서 더욱 시궁창행.

그러나 오히려 기술이 더 발달한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폴란드 창기병대와 러시아코사크 기병이 크게 알려져 있다.[7] 폴란드 창기병대는 창 들고 전차에 꼬라박은 뒤 전차가 나무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나, 이건 사실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 실제 폴란드 기병대는 독일군 보병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전차부대와 충돌, 끝까지 저항하다가 몰살당한 사례이며 이 장면을 찍어다 프로파간다용으로 쓴 게 퍼진 것이다. 사실 이 시대의 폴란드 창기병은 말이 창기병이지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고, 전원 개인 화기로 무장한 말로 이동하는 정예 보병에 가까웠다. 연대 규모로 가면 대전차포와 대공포, 부속 기갑중대까지 붙은 세계대전 기준으로는 매우 현대화된 부대였으나 '창기병'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기병창과 기병도 역시 지급하고 훈련도 했으며, 실제로 창기병 돌격으로 독일군 보병중대를 격파한 적도 있다고 한다.독일군을 무찌르는 기병대의 위엄

독소전쟁 개전 이후 동부전선에선 추축군에 포섭된 코사크족 기병이 활약했지만, 소련군 역시 코사크족을 징집하여 추격전이나 게릴라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소련군은 여기에 1개 기병군단과 1개 전차군단을 조합한 기병-기계화 집단을 창설해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지형에 투입하거나 일반적인 전차부대보다 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게 하여 추격과 포위 기동에 활약하게 했다.

독일군은 일반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차량화와 기계화 비율은 대단히 낮은편으로 전쟁 기간동안 엄청난 숫자의 말을 징발했다.[8]그리고 저주로 수송부대나 포병대, 지원장비 등을 견인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후방의 빨치산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량과 더불어 일부 부대는 기병으로 구성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2차대전 당시 자력으로 전군의 기계화를 이뤄낸 군대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미군이다. 그리고 랜드리스를 통해 소련군 또한 전쟁 중후반부 부터는 군의 기계화에 성공하는데 이런 개쩌는 물량을 상대로 겁도 없인 덤빈 히틀러가 미친놈이다.

1차 대전과 달리 전선이 고착되지 않고 기동전 위주가 된 덕분에 기병이 반짝 활약은 할 수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기병이 활약할 여지는 전무(全無).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 되면 독일이나 영국, 미국의 '기병대'는 많은 경우 말로만 기병이고, 차량화부대나 기갑 또는 기계화 보병이 되어있었다.

2.4. 현대

현대전에서는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 되면서, 의장대 정도를 제외하면 을 이용하는 부대는 거의 없으며, 과거에 기병이 맡았던 역할은 전차장갑차, 그리고 헬리콥터들이 계승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기갑 부대나 헬기 강습 부대 등은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 타던게 말에서 장갑판 두른 자동차나 헬리콥터가 되었을 뿐이지. 좀 더 세밀하게 나누자면 중기병의 "충격력" 개념은 전차가 계승했고, 경기병과 총기병의"속도와 범용성" 개념은 헬기장갑차가 계승한 격이다. 뭐, 따지고 보면 장갑차는 기병처럼 기동하는 역할이 아니라 보병을 수송하는 개념이므로,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병의 기동성을 가진다고 봐도 되겠다. 하지만 IFV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I!F!V!

많은 기갑 부대, 헬기 강습 부대들이 부대 마크에 편자를 넣고, '기병(Cavalry)'이라거나 '드라군(Dragoon)' 등을 부대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예로는 미국 육군의 제1기병사단이나 제2기갑기병연대 등이 있다. 2차 대전중의 독일 기갑부대는 복장과 마크에서 프로이센 창기병을 계승하고 있었다.

보통 유럽 군대에게 있어서는 기병대는 과거 군대의 전통을 상징하기에 부대의 역사가 몇백년 되어 기갑으로 변환한 병과들도 후사르, 창기병, 샤쇠르, 러시어, 드라군 등의 명칭을 이어받고 있다.

반면 이런 전통이 빈약한[9] 편에 속하는 미국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모든 기병 병과가 단 하나로 통일되었고, 지금의 수색대 단대호는 본래, 그리고 현재 미국 기병의 단대호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UH-1 휴이를 주력으로 공중강습전을 벌이는 공중 기병대(Air Cavalry), 기갑차량을 편제받아 위력정찰 역할을 하는 기갑 기병대(Armored Cavalry)로 개편된다. 이후 공중 기병대는 공수부대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대신 카이오와 정찰헬기 등을 사용해 기갑 기병대의 눈 역할을 맡고 있으며, 기갑기병은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한국전쟁에서도 대한민국 국군 기갑 연대 휘하에 기병대가 2개 중대 정도의 규모로 있었다. 개전 초기 전역부터 지연전역 때까지 전장에서 계속 싸웠다. 물론 북한군 탱크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미친 전술은 당연히 아니었고,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교전시 말에서 내려서 보병 전투를 진행하는 드라군처럼 운용하였다. 지연전 전개 기간 동안에는 기병대 대장 장철부 소령이 적에게 포위되어 전사[10]하는 등 사실상 괴멸되었지만, 북한군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감행포위망을 뚫고 이기는 등 상당한 활약도 했다. 그러나 50년 8월을 전후한 무렵에는 말이 거의 전멸한 상태에서 추가 수급이 불가능해 보병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말들은 훗날 경찰 및 헌병에 흡수, 기마경찰대와 기마헌병대가 되었다가 역시 195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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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군대인 로디지아군의 경우도 대게릴라전용으로 기병을 운용했었다. 지형상 차량을 원활히 운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유용했을 뿐만 아니라, 말이 원래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흑인 게릴라들은 말의 존재를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심리적 압박감도 상당했었다고. 로디지아군 항목의 동영상을 보다보면 드라군 마냥 총들고 말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런 이유다. 물론 로디지아 자체가 사라지고 나서는 반짝 부활했던 이 기병들도 뿔뿔이 흩어졌겠지만...

그러나 일부 산악지역, 사막 등 차량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진짜 기병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다. 정말 험난한 곳은 말로도 못 가니까 걸어가야만 하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산악 지역같은 험한 곳은 말은 힘들긴 해도 그럭저럭 갈 수 있더라도 장갑차로는 택도 없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 굳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동만 말을 타고 하는 드라군식의 운용으로도 이런 지형에서는 쓸모가 있다. 그냥 걷는 것보다는 빠르기에 험지에서도 기동성을 어느정도 발휘할 수 있으며, 사람 대신 기관총이나 견인포 같은 무거운 공용 화기를 운반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기에(헬리콥터도 가능하겠지만 한계가 있다)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한 예로 사막과 산악이 대부분인 중국의 서북부 지역에는 기병대가 현존하고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지형 특성상 차량화부대의 유지, 보수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로 발달한 듯. 대한민국 국군도 1970년대에 동부전선 산악지대에서 박격포나 중기관총을 나르는 데 제주도 조랑말을 사용하는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있으나 말먹이 조달이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였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기병이 활약했다. 원래 이땅에 살던 북부동맹이나 탈레반 등은 기계화된 기동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특성상 기병을 사용했는데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부동맹에게 지원나간 미군 특수부대가 폭격 유도를 해주면 북부동맹이 기병 돌격(!)을 실시했다고.[* 몇몇 전투에선 미군 특수부대도 같이 기병 돌격했다고 한다(...) 이후에 미군도 현지의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노새를 이용한 물자 수송을 하기도 했다.

2.4.1. 공중 기병대




실전에서 이러고 다니지는 않는다

Air Cavalry

냉전과 그에 수반된 베트남 전쟁 당시, 보병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지형들을 통과하여 전장을 자신들이 먼저 고른다는 개념으로 미 제1 기병사단에 11 공중강습연대가 붙으면서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하늘을 뒤덮은 휴이의 파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 과거 기병대의 전통에 따라 애마를 안락사 시키듯이 헬기를 보내는 시츄에이션을 보이기도...

2.4.2. 기갑 기병대




역시 실전에서 이러고 다니지는 않는다

Armored Cavalry

베트남 전쟁의 종결 이후, 공중강습사단이었던 미 1 기병사단이 삼중임무수행능력(TRICAP, 기갑/항공/강습 3개 임무의 동시수행)을 요구받으면서, 공중강습과 더불어 편제에 전차와 기병전투차를 편제받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현대적인 기갑 기병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3. 각종 매체에서의 기병

3.1. 드라마, 영화

한국이든 외국이든 영화, 사극 등에서 기병전이 제대로 묘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개는 그냥 말탄 기병들이 보병들의 옆을 얌전히 지나가거나, 기병과 보병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질, 질을 신사적으로 주고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높은 말 위에서 짧은 칼을 대충 휘두르는데 희한하게 방어구를 잘 갖춘 보병들이 무조건 쓰러진다. 기병이 낙마하는 경우는 드물다

밀덕이나 역덕은 이런 묘사에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크다. 일단 말은 매우 비싸며, 말을 탈 줄 아는 전문 배우를 구하기 힘들고, 훈련된 말이라 해도 결국 동물인 만큼 촬영에 여러 애로사항이 꽃피는데다, 기병의 돌격씬/충격력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말들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사람 머리 높이에서 떨어지는 낙마 장면은 전문 스턴트맨을 써야 할 정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위험하다. 심지어 뒤따라 오는 말에 밟혀 버리면(…) 이하 생략. 진짜로 짓밟으면서 찍을 수는 없지 않은가? 칼싸움과 달리 살아있는 생물인 말을 이용한 전투는 사실적인 리인액트가 무척 어렵고 위험이 따르게 된다. 소수 고증덕후 밀덕, 역덕들의 만족감을 위해 배우들이 끔살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칸나이 전투를 다룬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한니발군의 기병을 묘사하기 위해 고용된 리인액터들은 카우치드 랜스(옆구리에 기병창을 끼우고 돌격하는 방식)를 사용해야 했다. 고증을 따르자면 창을 양손으로 쥐고 돌격하거나 창을 역수로 잡고 밑으로 내려 찍는 방법(오버핸드)을 써야겠지만, 이는 고삐를 다룰 손이 없으며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탓에 낙마 사고의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사극 한편에 수십 수백 억의 예산을 쏟아 붓는 고증캐덕후 BBC마저도 기병전의 묘사를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정도로 기병씬의 연출은 어렵다. 하물며 국산 사극의 저질 기병씬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 것이니 너무 욕만 하지는 말자.

기병전을 그나마 볼 수 있는 영상 매체는 현재로서는 블록버스터 영화 정도이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첫 돌격, 그리고 뒤이어지는 백병전을 살짝살짝 다뤄주는 정도다. 상술했듯 안전 문제가 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기병 돌격 장면은 바로 영화 반지의 제왕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의 로한 기마대 돌격장면이다. 배우들의 연기력, 막대한 물량, CG와 실사가 조화된 소설적인 연출, 웅장한 BGM(#Riders of Rohan, The Battle of the Pelennor Fields) 등이 아름답게 어울려, 영화 속 전투장면 베스트를 논할때 항상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랭크되는 희대의 명장면이다. 기병이 보병과 접촉하기 전에 3~4회의 화살세례(근대에는 포병사격)를 온몸으로 뒤집어 써야 한다는 현실적이고도 처절한 요소도 잘 묘사되었다.
다만 기병 돌격장면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는 비판도 약간 있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오크들이 변변한 대기병진형도 형성하지 못 했다 하나[11],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토록 두터운 진형을 짜고 있는 보병들을 상대로 기병들이 일직선으로 닥돌하면 충격력이 금방 없어져 정지해 버리고(새벽의 저주의 버스 돌파 장면을 생각해 보자) 그러면 보병들에게 둘러싸여 학살 당할 뿐이다. 제대로 묘사하면, 실제 기병돌격처럼 여러 웨이브로 나누어[12] 보병의 전열이 무너질 때까지 돌격을 반복하는 것이다.[13] 하지만 이러면 일반인이 보기에 다소 맥 빠져 보일 수도 있으니 영화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연출을 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기병전 묘사도 매우 훌륭하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성으로 안전하게 들어올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이벨린의 발리앙(올랜도 블룸)이 이끄는 소수의 유럽 기병대가 압도적 다수의 아랍 기병대를 상대로 진형을 바꾸어 가며 돌격하는 장면이 참으로 장렬하기까지 하다. 말과 말,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부술 기세로 온몸으로 격렬하게 정면충돌하는 타격감(…)은 보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 정도.

<브레이브 하트>도 역사왜곡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러 볼거리가 충실하게 채워진 훌륭한 작품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장창을 기습적으로 빼든 스코틀랜드 보병방진이, 코앞까지 돌진한 잉글랜드 기병을 제압하는 스털링 전투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잉글랜드 기병이 출진하여, 충분한 충격력을 얻을 때까지 속도를 서서히 올리는 장면은 묵음처리가 되는데, 시청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연출도 훌륭하다. 아마 실제로도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저 때 아무 소리도 안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병전 묘사의 TOP는 역시 1970년 영화 <워털루>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CG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진짜 코사크 기병 2000여 기까지 동원된(!!!) 14,000 여 실제 기병 말이 동원된 압도적인 순수 물량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평원을 뒤덮을 기세로 몰려든 기병들이 보병들의 수많은 방진들 사이로 말려드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압권. 배우 하나가 낙마하면 그 사람은 100% 끔살 확정일 정도로 대단히 위험한 장면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찍을 생각을 했는지. 또 포탄이 터질 때마다, 보병들의 일제사격이 있을 때마다 기병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는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연기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해당 항목 참조.

3.2. 게임

대다수의 전략 게임에서는 기병을 그저 힘세고 강한 빠르고 강한 보병수준으로 구현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를 비롯한 고전 RTS 게임에서도 이런 경향이 강한데, 게임 엔진상 기병의 충격력을 묘사하는 게 어렵고, 게임의 기본 디자인 자체가 전쟁을 정확하게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토탈워 시리즈마운트 앤 블레이드처럼 꽤나 훌륭하게 구현해 놓은 게임도 있다. 이런 게임에서는 멈춘 기병은 보병의 좋은 먹잇감이 되며[14], 돌격을 수차례 반복하여 적을 약화시키거나 적을 패퇴시킨 후 전과확대 단계에서 추격하는 임무를 맡는다. 상당히 현실적이다.

온라인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직종이다. 그도 그럴것이, 뭔가를 타면서 공격까지 가능해진다면 파티 플레이때 다른 파티원에 비해 이동속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만큼 팀웍에 장애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냥 속도에 따른 성장 및 아이템 파밍 면에서도 밸런스 붕괴가 되기 쉽다.

리그 오브 레전드헤카림의 경우 정통 기병의 기동력은 물론 충격력까지 가장 잘 구현한 몇 안되는 사례다. 파멸의 돌격(e)은 이동 속도가 최대치로 증가할수록 가할 수 있는 피해량도 최대로 늘어난다. 이동속도가 많이 추가될 수록 공격력도 늘어나는 패시브는 덤. 이 충격력을 구현한 스킬의 위력을 극대화한 전략이 바로 유성 헤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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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똑같이 말을 탄다고 해도, 수송을 위해 말을 사용하는 포병이나 수송 병과 등은 기병이 아니다.
  • [2] 예루살렘 왕국군 500명과 성당 기사단 80명.
  • [3] 하버드대학 출판국, 1992년
  • [4]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역 <사무라이의 나라> p100 에서 재인용
  • [5] 다만 13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비교적 경장이었고 오직 충격기병으로만 운용되지도 않았다. 이들도 활을 휴대면서 다른 경기병들처럼 사격을 가했다. 카르피니에 의하면 모든 몽골군은 활과 화살을 갖추어야 했고, 조공의 기록에도 '방패를 차고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말에서 내려 화살을 쏘는 병사'들이 등장한다.
  • [6]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는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대규모 사냥을 실시했다.
  • [7] 전간기에는 신생 폴란드공화국의 창기병대와 소련 적군 코사크 기병간의 기병 대 기병 전투도 벌어진 적이 있다.
  • [8] 1939년 개전 당시에 59만 마리, 1945년 1월에는 120만 마리에 이를 돌보는 마부병만 수만명이었다. 중간에 죽거나 다친 말까지 포함하면 유럽 전역에서 최대 700만마리의 말을 징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독일군은 고질적인 석유 부족으로 최일선의 전차부대를 제외하면 말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 [9] 실제로 미국은 독립전쟁기에 드라군밖에 보유할 수 없었고, 폴란드에서 온 의용병단으로 풀라스키의 군단이라는 창기병대를 하나 보유하게 된다.
  • [10] 완전히 포위되어 포로로 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권총 자살하였다.
  • [11] 엄밀히 따지자면 대기병 방진 비스무레한 것을 구축하긴 했다. 문제는 창이 장창이 아니고 너무 짧았기 때문에 대기병 방진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 뿐. 동서를 막론하고 보병이 기병을 상대할 때에는 장창이 필수였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장창은 보병용 대전차 화기 쯤 될 것이다. 차라리 두개의 탑에 나왔던 우르크 하이들의 파이크가 있었고 로한 기병대에게 주인공 보정이 없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 [12] 1파가 첫 충격 + 1파는 복귀 + 1파와 교대한 2파가 (보병들이 충격에서 회복할 틈을 최소화하며) 곧바로 다시 충격 + 3파 + 4파 + ... + 그 사이 본진에서 전열을 정비한 1파가 다시 충격. 그 사이에 별도의 좌익/우익이 적의 측방과 후방을 쑤시는 건 필수옵션이다.
  • [13] 보병으로서는 기병의 이런 움직임을 제어할 길이 없다. 그저 묵묵히 버티면서 적의 실수나 아군의 증원 등 외적인 요소를 기대해야 할 뿐이다. 즉 기병 지휘관이 항상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 기병의 절대우위였다. 보병이 기병을 상대로 몰살시킨 몇몇 전설적인 전투가 500년, 1000년 넘게 회자되는 것은, 그게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나머지 거의 대부분의 보병vs기병전은 기병의 압승이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 [14] 수가 적고 덩치가 큰게 주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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