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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last modified: 2015-03-08 21:29:15 by Contributors

Contents

1.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관계를 뜻하는 말
2. 춤,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 유흥장 등지에서 흥을 돋구는 여성
2.1. 창작물 속의 기생
3. 기숙사 학생의 준말

1.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관계를 뜻하는 말

寄生.
어떤 생물이 다른 종류의 생물체 속이나 표면에 살고 있으면서, 그 생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생활하면서 다소나마 그 생물에게 해(害)를 끼치는 경우를 기생이라 한다.

기생 하면 흔히 기생충, 그 중에서도 선충류 등을 우선 생각하지만 사실 기생계의 본좌는 절지동물 중에서도 곤충이다. 파리목이나 목류 곤충 가운데 기생곤충이 특히 많으며 한 곤충학자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 즉 4단 기생충을 발견한 바 있다고. 기생충의내부의기생충의내부의기생충의내부의기생충

물론 곤충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기생 식물도 존재한다. 겨우살이가 대표적이고 라플레시아속 식물도 기생 식물의 대표자이다. 가장 큰 기생 식물로 오스트레일리아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데 다른 식물들이 전부 말라가는 크리스마스에(알다시피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스마스는 한여름이다) 혼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지역에 기생 뿌리를 박는데 케이블에까지 손대는 바람에 통신 장애를 일으키는 식물이기도 하다. 민폐식물류 甲

반대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생물에게 득(得)을 주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면 공생이라고 한다. 특정생물들의 소화기관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이에 해당된다.

2. 춤,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 유흥장 등지에서 흥을 돋구는 여성



(3.1운동 당시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관기, 민기, 약방기생(원래는 의녀), 상방기생 등 예기의 총칭. 기녀라고도 한다.

한반도에서의 유래는 백제시대 때로 올라간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 생각된다.

기생을 생각하면 단순히 몸만 파는 창녀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크나큰 오산이다. 기생은 당시 연예인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 '선비문학'을 제외한 예능은 전부 천한 것으로 치부받던 시대에 생겨난 오해로 볼 수 있다(일례로 사군자, 풍경화를 제외한 민속화를 ''을 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기생의 주된 고객층은 류층이었기 때문에 춤, 노래, 시조, 화예 등 수많은 예를 겸해야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 했을 정도이다[1]. 물론 매춘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싸구려로 몸만 파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일 뿐이다.

기생청의 주업무는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 시, 서화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평양에는 기생학교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음곡 외에 예의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하였다.

당시 기생의 신분은 천민이지만 많은 예능으로 많은 이에게 대우받는 미묘한 위치였다. 하지만 천민은 천민인지라 양반가와 정분이 나 자식이 낳는다면 그 자식은 '서얼'이 되며, 아비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사실상 '천민'의 신분을 가지게 된다.

청망청의 유래 역시 기생에서 유래하는데 연산군 집권시 '기생양성소'가 궁궐내로 들어가면서 기생은 '운평'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운평 중에서 예능이 밝고 색기가 뛰어나면 그 운평을 흥청이라고 불렀다. 왕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천과 '흥청'이라는 직급이 된다. 그렇지 않은 흥청은 지과흥청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흥청의 뜻은 '맑음을 일으킨다'라는 뜻으로 '마음의 맑음을 유지한다'라는 명목하에 연산군은 말 그대로 흥청망청(....) 놀았다. 망청은 후렴구로 흥청의 흥(興)자와 반대되는 의미의 망(亡)자를 써서 연산군을 비웃는 의미다. 다만 운평들이 반드시 기생에게서 뽑은 것만은 아니고 기생 출신의 첩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얼굴이 예쁘고 춤을 찰 추는 민간인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데려갔고 나중에는 연산이 명한 2천명이란 수를 채우기 어려워 얼굴이 추해도 춤과 노래만 되면 죄다 끌고갔다(....).

이후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중종은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다. 원래 의녀는 부인의 진료를 위해 뽑힌 일종의 의료직이었으나, 연산군 대에 의녀도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기생과 겸업하게 되었다. 1510년 중종은 크고 작고 간에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절목을 만들도록 하여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뿌린 악습을 거둬내려고 한 중종의 노력이자, 기생에 대한 민중의 민심을 다잡기 위함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의녀의 연회 참여는 이어져서 열국 약방기생이 의녀의 별칭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관기는 관청에 소속된 기생을, 민기는 민간 기생집에 소속된 기생을 의미한다.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는데 일패는 주로 상류층과의 교분이 깊고 풍부한 교양을 자랑했으며 춤, 노래 등 예능을 중심으로 하고 매춘을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패는 일패와 같이 예능을 하기도 하지만 '은근짜'라고 하여 은밀히 몸을 팔기도 하였다. 삼패는 기생 중 가장 하급으로, '더벅머리'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매춘을 전문으로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기생은 조선시대 서민이 건드릴 정도는 아니라서 보통 백성도 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삼패라도 만날 수 있었다. 보통 서민들에게 매춘을 하던 여인들은 병이라고 따로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은근한 신경전도 있었는지 조선말, 강점기초에 서양에서 양산이 들어오자 패에 관계없이 모두 붉은색 양산만을 사용해 서로의 패가 구분이 가지 않는다며 일패는 진홍색, 이패는 연홍색, 삼패는 그 외의 색을 쓰기로 정하기도 했다. 좁다란 골목길에 양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하나는 진홍색 하나는 연홍색 다른 하나는 다른 색이니 오호라 일패, 이패, 삼패로구나

기생의 경우엔 '화초머리 올리기'라고 하여 일종의 성인식이 있었다. 교육을 받은 기생이 '첫 손님'을 받은 뒤 화초머리라는 가채(가발)[2]를 머리에 얹는 것. 이는 일반 민가의 혼인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첫 손님의 자격 또한 상당히 중요했다. 상당히 명망 있고 직위도 높은 인물이어야 했으며, 비용도 많이 필요했다고 한다.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보급되었을 때 유교적 사상이 제대로 박혀있는 국내에서는(소위 남녀칠세 부동석) 간호사를 구하기 힘들어 결국 어느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기생'을 간호사로 뽑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기생청은 총독부의 일본 유녀 권번 벤치마킹에 의해 이라는 일종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이 권번은 기생들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도 했는데, 일제시대엔 공식 교육기관 중에선 전통 예술을 계승하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었어서 의의가 꽤 크다. 한 예로 일제 시대를 전후한 국악인들 중 상당수가 권번 출신 기생이었거나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출신이다. 당시 기생들의 항일 의식이 투철해서 3.1 운동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평양 기생 학교의 경우 강점기 초엔 4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 기생들과 진주 기생들은 아예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평양 기생들은 "우리는 일본의 창녀가 아니다! 조선 기생들은 나라를 사랑한다!"며 가두시위에 참여했고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라! 왜병들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매우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녀를 데려와 경성의 신마치(현재의 서울 중구 쌍림동), 혼마치(현재의 서울 명동)에 공창 지역을 설치하여 기생 제도는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진다. 부산의 경우 미도리마치(완월동)에 일본에서 건너온 유녀들이 유곽을 형성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흥가의 첫 시작이 된다. 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해방 후 그때까지 존재했던 기생들은 능인으로 전환하거나 대도시의 요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물론 기생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생업을 찾아간 여성들도 적지 않다.

기생 중 유명한 기생으로는 황진이, 논개, 춘향(춘향의 경우 많은 이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냥 중인의 신분인 것도 있고 기생인 것도 있다), 이매창 (이춘풍전), 홍낭이 존재한다. 참고로 어우동은 기생이 아니다.

유명한 평양기생의 경우, 1950년 6.25가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남아있었다. 당시 백선엽이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 기생들이 아직 잘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가봤는데 그때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켰는데 흥분한 기생들이 자기들이 술을 다 먹고 공산당 욕을 막 하더란다. 자기들이 즐기고 싶어서 기생집 운영을 강제로 시키고는 인민들의 눈이 두려워 검은 옷만 입게 하질 않나 음식이고 술이고 비싼 것을 잔뜩 먹고는 돈은 한푼도 내질 않나 하고 기생들이 공산당 욕을 쏟아내어 평양 점령 기념으로 회포를 푸려던 술자리는 기생들의 하소연 자리로 변해버렸다 한다.
남한 기생도 남아나질 못했는데 북한 기생들이 평양 폭격과 전쟁 이후엔 어찌 되었을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담으로 음식이 별맛없었다고 한다

넷 우익들이 자주 써먹는 떡밥중 하나. 기생을 꼭 창녀라고 부르며 위의 기생청을 보고 조선 정부도 창녀를 관리했었다면서 일본군 위안부를 정당화 하는데 쓴다. 어디 게이샤도 창녀라고 해보시지

2.1. 창작물 속의 기생

한국의 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근대 이전의 한국에서는 여성으로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신분이고, 다양한 인물과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배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황진이 등 유명 기생들은 사극의 단골 소재이자 주요 배역이다.

3. 기숙사 학생의 준말

정식 용어는 기숙생 일부 학교에서는 사생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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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이러한 일 자체는 창녀 중에서도 '고급 접대부'라 불릴만한 계층에서는 전 세계 각지에서 있던 유형이며, 모든 기생들이 그러한 예능을 갖추고 있었다거나, 그러한 예능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번역 자체는 창녀를 뜻하는 'prostitute'로 한다...고 하는데 그건 몸파는게 주업이고 예능은 대충 그 수단일 뿐인 사람이고, 풍류를 읊는 고급기생은 courtesan이라는 준연예인의 번역어가 따로 있다.
  • [2] 가채 중에서도 기생하면 흔히 생각하는 그 가채를 말한다.
  • [3] 오늘날까지 아직 기생이 남아있었을 경우를 가정하고 만든 대체역사물(...)이다. 후반에 빙의가 나와서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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