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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하라 가즈히로


이런 미남 시절도 있었다(...)


호쾌한 풀스윙!

이름 키요하라 카즈히로 (清原 和博)
생년월일 1967년 8월 18일
국적 일본
출신지 오사카부 키시와다 시
포지션 1루수, 3루수[1],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1986~1996)
요미우리 자이언츠(1997~2005)
오릭스 버팔로즈 (2006~2008)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Contents

1. 소개
2. 프로데뷔 전
3. 선수생활
3.1.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3.3.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4. 플레이 스타일
4.1. 엔터테이너? 익살스런 반쵸?
4.2. 겁쟁이 기요하라?
4.3. 향후 계획
5. 기타

1. 소개

1986년 세이부 라이온즈에 고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하여 프로생활을 시작하여,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거쳐,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2008년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거구이면서 호탕한 성격, 그리고 고교 시절부터 주목받던 선수여서 많은 팬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별명이 특히 많은데 가장 유명한 별명은 야구계의 반쵸[2]무관의 제왕(...). 한국의 심정수에 버금가는 기록.[3]

2. 프로데뷔 전


친우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와타 마스미와 함께.[4]

오사카 최고의 야구 명문교인 PL학원에서 1학년부터 4번을 쳤을정도로 힘이 좋은 타자였었다. 그가 기록한 고시엔 통산 13홈런은 지금도 회자되는 대기록. 덧붙여 고교 통산 83홈런의 그야말로 일본 최고의 거포라 불릴만한 기록이였다.

오사카 출생인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대부터 골수 쿄진팬으로 유명했었으며 야구를 시작한 것이 쿄진에 대한 동경 때문일 정도. 쿄진의 최전성기인 V9[5]이후, 주니치 드래곤즈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밀려 2년 연속 우승을 놓치던 장면이 어린 기요하라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한신팬 어머니는 교진팬이었다고 한다. 한신 팬과 교진 팬의 결혼이나 교제는 상상도 못할 정도라는 일본 야구팬들에겐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 그래서인지 기요하라는 어린시절 교진이 이긴날에는 교진의 유니폼을 입고 잤고 한신이 이긴날에는 한신의 유니폼을 입고 잤다고 한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할때도 한신이 이긴날에는 한신모자, 교진이 이긴날에는 교진모자를 쓰고 등교하기도 했다고. 나이를 먹으며 오 사다하루의 활약과 V9로 대표되는 교진의 최전성기를 보면서 교진팬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교 졸업 후 그토록 열망하던 요미우리에서 드래프트 1위로 지명받지 못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에 지명되어 버렸다. 거기다 85년에 요미우리 드래프트 1위 지명은 그와 오사카 PL학원의 동기이자 평생 친우였던 와다 마스미. 운명의 장난도 이 이상이 없었다.

정확한 정황은 기요하라는 고교시절 인터뷰내내 교진에 입단하겠다는 뜻을 밝혀왔고 구와타는 고교시절 내내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대외적으로 말을 해 왔다. 고로 구와타를 지명해도 대학에 가버리면 1라운드 지명을 날려버리는 셈. 또한 당시 교진의 감독 오 사다하루는 여러 인터뷰에서 구와타는 대학에 간다니 힘들고 기요하라를 지명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 그리하여 구와타는 와세다 대학 입학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대학 야구부에서 구와타 입단 환영행사를 준비 할 정도였다.

교진의 스카우트 역시 구와타가 아닌 기요하라의 부모님에게 접촉하여 지명의사를 피력했다. 그리고 드래프트 당일 7개구단이 기요하라를 1순위에 지명했으나 교진은 기습적으로 와타를 지명하여 단독으로 교섭권을 따냈다.

당시 여러 설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교진이 구와타와 물밑교섭을 통해 대학에 간다는 말을 흘려 아무도 지명 못하게 막은 후 단독 기습지명으로 교섭권을 획득했다는 설과 구와타는 정말 대학에 가려고 했으나 지명후 계약금에 흔들려 입단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구와타의 성격이나 훗날 기요하라와의 화해 등을 보아서는 첫번째 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이고 후자가 신빙성이 높은 편.

어쨌든 7개 구단에서 기요하라를 지명하였고, 일본프로야구 1차 지명은 모든구단이 자유롭게 지명후 선수가 겹칠 경우 제비뽑기를 하는 룰에 따라 기요하라는 복수의 구단에서 제비뽑기를 했고 세이부가 1차 교섭권을 갖게 되었다. 세이부와의 교섭에 안 나가려 하는걸, 모친의 거의 폭언에 가까운 설득(...)을 받고 프로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여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6]

고교시절 "KK콤비"라고 불린 키요하라와 쿠와타의 인기는 이미 고시엔 스타급을 넘어서서 당시 일본프로야구 최고스타였던 오치아이를 넘어선 수준으로 일본 스포츠신문에 오치아이가 그둘의 인기를 질투하는 인터뷰가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

3. 선수생활

3.1.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1994년 일본 시리즈[7] 1차전에서 쿠와타와의 승부.

세이부에서의 활약은 가히 후덜덜한 수준. 첫 선발 출장일에 홈런을 때려내며 혜성같은 데뷔를 함과 동시에 그 해 31홈런으로 고졸신인의 루키 시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활약으로 신인왕을 획득하며[8], 그 해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팀의 주포로서 활약하며 1980년대 세이부의 황금기를 견인했으며, 당시 최연소 100홈런, 200홈런 달성(21세 9개월, 24세 10개월), 최연소 1억엔 연봉 도달(1990년, 23세), 여기에 전설적인 아키야마 코지-기요하라 가즈히로-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AKD포의 주역이 되는 등 시작부터 화려함의 연속이였다.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쿠와타와의 동료로서의 재회.

이후 1996년. 기요하라는 FA자격을 얻어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사실 그간의 행적을 보면 그가 FA로 쿄진을 선택할게 너무 뻔한 상황이였기에, FA경합을 벌렸던 한신 타이거즈의 당시 감독 요시다 요시오세로줄무늬를 가로줄무늬로 바꿔서라도 그를 데려오겠다 라는 말까지 해서 구계를 훈훈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교진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기요하라에게 어서 내 품으로 날아들어오게라는 말을 했다. 물론 웃돈을 얹어준다고 할 지라도, 기요하라가 한신을 지명할 리는 없었다(...). 참고로 기요하라가 쓴 자서전에서 보면, '가고 싶었던 구단은 1위가 쿄진, 2위가 한신이였으나, FA를 얻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붙은 시점부터는 원래 꿈을 이룰 생각으로 이미 세이부 시절부터 FA에서 쿄진이 자신을 원한다면 다 던지고 갈 생각이였다' 라고 적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쿄진 입단 후 자신의 등장 테마곡으로 쓴 가부치 츠요시의 とんぼ(잠자리)역시, 도쿄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좌절을 나타내고 싶어서 썼다고 한다.

이 과정은 기요하라의 자서전을 드라마화한 KINSMA란 프로그램에서는 한신에서 10년간 30억엔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배팅했고 고향팀이란 사실에 한신입단을 준비했으나 어머니의 너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왜 고민하냐는 조언에 교진행을 결심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결국 요미우리 입단후 와타와 같은 팀이 되었고, 고교 시절의 KK콤비가 같은 팀으로 뭉쳤다는 사실은 일본 전역을 들썩이게 하였다. 입단후 3번째 경기. 부상으로 재활 중이던 구와타의 복귀전이 성사되었고 그 경기에서 구와타의 활약과 기요하라의 결승홈런으로 둘이서 10여년만에 승리를 합작하게 되었다. 그 경기 시청률은 25퍼센트가 넘었고 히어로 인터뷰 최고 순간시청률이 40퍼센트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사실 정점을 지난 건지, 요미우리 입단 후는 들쭉날쭉한 타격을 보였다. 게다가 돈지랄로 최고의 선수만 사오는 쿄진 특성 때문에 타격이 약간만 부진해도 다른 쟁쟁한 강타자들[9]에 밀려 그의 프라이드인 4번에서 내려가는 일이 많았다. 결국 요미우리에서의 순탄치 않았던 8년 간 팬들에게 이렇다 할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한 채 2003년부터는 급격히 타격 페이스가 저하됐다. 그리고 세이부 시절부터 문제였던 습관성 어깨 탈구 등으로 맨날 실려나가다 보니 2005년 시즌 종료 후 결국 전력외 통고를 받게 된다. 그가 홈런을 치고 난 후, 호리우치 츠네오 감독의 하이파이브를 거절하여, 구단 수뇌부의 눈에 거슬리게 만든 것도 한 몫했다. 물론 호리우치 자체도 쿄진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 수뇌부에게 같이 찍힌 건 당연했다.

그래도 특유의 호쾌한 인상 + 명문 자이언츠의 스타라는 점 때문에 인기만큼은 절정이었다. 기복이 있었다지만 커리어 최다 타점도 이 시기에 기록. 그와 구단의 트러블은 '신사' 이미지를 강조했던 구단 수뇌부와 '번장'으로 대표되는 그의 캐릭터 사이의 충돌로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또한 타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요하라 군단"이라 불리는 파벌을 조직해 코치들 마저도 쩔쩔 매게 만들어서 순혈을 강조하는 요미우리 구단 이미지에 타격을 준것도 그를 내보내게 한 이유중 하나. 항목 참조

3.3.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교진에서의 계약이 만료가 된 2005시즌, 당시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이자 기요하라의 고향 선배인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2루수로 꼽히는 오기 아키라 감독이 오사카로 돌아와라! 너의 마지막 영광의 길은 내가 만들어주마라고 말하며 그에게 정식으로 오퍼를 넣었다.[10] 그리고 2006년 그의 선수생활 마지막 3년을 보낼 오릭스에 정착하게 된다. 팀 전력이 딱히 좋지 않았던 오릭스였지만 고향 팀에 온 대우를 나름 극진히 한 덕에 쿄진 시절보다 많은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또한 피츠버그에서 방출당한 와타가 오사카로 와서 기요하라의 베팅볼을 던져준 일화도 있다.

그리고 2008년 10월 1일, 수많은 팬들 앞에서 풍운의 남자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그가 평소에 좋아했고, 자신의 테마곡으로까지 썼었던 나가부치 츠요시[11]의 '톤보(とんぼ, 잠자리)'[12]를 라이브로 들으며 현역에서 공식 은퇴했다.

그의 마지막 은퇴경기에는 20여년전 드래프트 사건의 3인이 다시모여 감동을 더했다. 상대팀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은 오 사다하루. 그리고 친우를 보러온 와타가 관중석에 잡혔다.

오 사다하루는 기요하라에게 꽃다발을 건내며 "다음 생애에는 꼭 같은 팀에서 홈런레이스를 펼처보자" 라고 기요하라에게 말했다고. 20여년전 드래프트 사건의 3인은 이해 모두 유니폼을 벗었다. 현재는 아구평론가이자, 스포츠 해설가(게스트)로 활동 중. 선수시절에 얻은 무릎통증으로, 장시간 앉아서 해설하는 데는 무리가 온다고 한다. 후일 코치로서 요미우리에 복귀할 가능성도 점쳐지고는 있으나 아직은 가능성 단계.

팬들은 기요하라와 구와타의 은퇴나 요미우리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상황을 굉장히 아쉽게 생각하며 일본 프로야구의 마지막 대스타인 이 두 명이 요미우리에서의 아름다운 은퇴가 아닌 팀과의 트러블로 팀을 떠난 점을 현재도 굉장히 아쉽게 생각한다. 후일 마츠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등의 스타들이 탄생하지만 일본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대스타였던 기요하라나 구와타에 비한다면 인기가 떨어지는 편.

4. 플레이 스타일

통산성적은 다음과 같다.

통산 2338시합 출장, 타율 .272, 2122안타, 1530타점, 525홈런(역대 5위), 1955삼진(역대 1위), 몸에 맞는 볼 196개(역대 1위)

통산성적을 보면 타이틀도 미친 듯이 땄을 것 같지만, 실제로 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을 단 한 번도 획득해 본 적이 없는 속칭 무관의 제왕이다.[13] 리그 우승 10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 등 여러 번 우승을 경험했음에도 시즌 MVP는 물론 일본시리즈 MVP도 뽑혀본 적이 없다. 안습. 다만 신인왕, 최우수 출루율, 골든글러브(5회) 등은 수상했었다.[14]

그래도 홈런만큼은 꾸준히 기록한 덕택에 25+홈런 시즌을 13번 기록했고, 대차게 말아먹었던 요미우리 시절 통산 500홈런도 힘들지 않을까 평가했지만 결국 500홈런을 돌파, NPB 통산홈런 5위에 올라있다. 기요하라 위에는 안드로메다 급 먼치킨 급 적을 내신 어르신들이 계신데, 투신타병 투고타저에 교타를 중요시하는 현대 일본프로야구에서 기요하라의 저 어마어마한 통산 홈런 기록을 뛰어넘는 선수가 나오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치다. 2012 시즌까지 현역 1위였던 카네모토 토모아키(은퇴)의 통산홈런이 476홈런인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기록임에 틀림없다.

통산 삼진 1위, 몸에 맞는 볼 1위라는 아이러니한 기록이 있다. 통산 삼진 1위야 당연히 그의 호쾌한 타격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됐다고 할 수 있는데, 시즌 삼진 1위를 무려 세 번(1986, 1997, 2001)이나 했고, 시즌 100삼진 이상도 9번 기록했다. 이런 삼진 생산능력(?)에도 불구, 무시무시한 타격을 보여줬던 이유는 세이부 시절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몸에 맞는 볼이 많은 점에 대해, 그의 타격 스승이었던 이 마사히로[15]는 코치 자신이 도박 혐의로 입건되는 바람에 루키 시절 기요하라에게 피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한 척이 있다. 도이는 코치 복귀 후 마쓰이 가즈오 등에겐 이를 철저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도 전설의 강타자 중의 하나였던 도이였던지라 그래도 "루키 시절의 기요하라에게는 1군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부터 가르쳤다." 고 술회했을 정도.

4.1. 엔터테이너? 익살스런 반쵸?


  • 선수 시절 초~중기에는 특유의 덧니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방송 출연 등을 고려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어느새 임플란트로 바뀌었다. 본인 왈, "부상 재활치료하느라 시간도 좀 있고 해서 그냥 싹 갈아버렸죠."

  • 요미우리 시절 오다 코헤이(小田幸平)라는 포수를 선수생활 내내 괴롭힌걸로 유명했다. 예능프로에서 기요하라가 오다의 팔에 암바를 걸고 오다가 괴로워하는걸 신 동물의 왕국의 약육강식으로 묘사하며 출연진들이 대폭소하는 장면도 있었다. 거기에 무려 치명적인 똥침을 두 번씩이나 놨다. 그 중 한번은 시즌 종료 후 선수단 납회식 때 TV로 생중계되는 와중에 놓은 것. 제대로 똥침 맞았는지 오다 코헤이는 정말로 고통스러워했다는... 2006년 기요하라가 요미우리를 떠난 해에 똑같이 요미우리를 떠나면서 찢어지기 성공. 나름 미트질 괜찮은 포수인데 기요하라의 이지메 때문에 연습에 집중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 물론 야구에 만약이란 없다. 그리고 오다는 미트질이 좋다곤해도 공격은 완전 자동 아웃수준이니...

4.2. 겁쟁이 기요하라?

기요하라가 반쵸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후배선수들이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의외로 기싸움은 몇 번 있었어도 몸싸움을 벌인적은 거의 없었다. 생각 외로 허당일 가능성도 있다.

1989년 시즌 중반에는 기요하라 자신의 타석 때 빈볼 위협을 당해 자신이 벤치클리어링을 시도했는데 투수와 아이-투-아이를 하기도 전에 배트를 먼저 마운드 쪽으로 내 던진 적이 있었다. 빡친 기요하라는 투수에게 니킥을 작렬시키긴 했지만 이걸 보고 열받은 롯데 선수들이 집단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도망다니는 쳐지가 됐다. 결국 롯데 선수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다구리를 치는데 성공. 그래서 그 때 까지 진행됐던 연속출장 기록을 이 벤치 클리어링으로 마감하고 덤으로 출장정지 크리를 먹기도.[16]

요미우리 시절 한신과 벤치클리어링 때 호시노 센이치 감독한테 뒷덜미 잡혀 끌려나오고나서 약간 쫀 듯한 표정과.[17] 당시 히로시마 카프 소속이던 투수 톰 데이비에게 빈볼을 맞고선 평소완 달리 얌전히 나가다가 톰 데이비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면서 터벅터벅 오는데도 별 반응 없었다는 점... 그 이후에 승부에서 기요하라에게 삼진을 얻어낸 톰 데이비가 F자로 시작하는 욕설을 했는데도 무반응인 걸 봤을 때 기요하라가 의외로 자기보다 드세보이는 사람한테는 역시 약한 것 같다. 뭐 이건 인간의 본능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기요하라가 한신전에서 데드볼을 맞고 세번이나 맞았다며 손가락 세게를 펼쳐보인데 대해 한신의 투수였던 야부 케이이치는 기자가 그걸 물어보자 연봉 3억을 받고 있다는 의미겠지 하면서 쿨하게 비웃어주기도 했다. 야부 역시 기요하라에게 데드볼을 많이 기록한 바 있는데 저렇게 자신있게 비꼰 것은 시비를 걸어와도 자신있다는 의미인 듯...

하지만 어린시절의 증언이나 정황등을 보았을때 어린 시절 골목대장은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진팬으로 오사카에서 살아간다는것은 거의 이지메를 각오하고 살아간다는 소리인데 이런 역경을 모두 이겨내고 항상 무리의 중심에 서있던것을 보면 반쵸 이미지에 걸맞은 인물임은 확실하다. 또한 당시 주장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PL학원 시절 구와타의 요미우리 지명이 야구부에 전해졌을때 야구부원들이 왜 구와타냐고 격분하면서 교실을 조용히 나가버린 구와타를 손봐준다며 찾으며 돌아다닌 사실이나 지명소식이후 격분한 기요하라를 야구부 연습장에서 2시간동안 마음을 풀수있게 야구부 3학년 전원이 나서서 배팅볼을 던져준 일화등을 보면 무리에서 대장으로 군림하는 성격임에는 분명하다.

4.3. 향후 계획

기요하라도 언젠간 지도자가 될수도 있겠는데, 워낙 자기가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만약에 지도자를 한다고 쳐도 바로 감독이 되지 않는이상 본인의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NPB 감독들도 그런 기요하라를 밑에 코치로 두기 껄끄러워 할 듯.

본인이 변하던가 하지 않는 이상 NPB에서 지도자가 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요미우리 시절에도 팀내에 파벌을 만들어서 기요하라 군단이라는 소리까지 나왔으니까. 요미우리 시절 코치에게 모토키와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키라고 대놓고 얘기했고 오다 코헤이를 괴롭힌 일화는 유명하고, 공공연하게 편가르기를 했을 정도였다. 은퇴 후에도 일본 대표팀을 방문했을 때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자리를 피해줘야 했을 정도였다. 존경은 받지만 지도자감으로서는 분명 실격감이다. 본인 자신부터 야구계 선배를 존중해야 하는데 감독이 자리를 비키게 만들고 코치한테 자리 비키라고 하는데 과연 자신이 지도자가 된다면 선수들이 겉으로 따른다 해도 마음으로 따르진 않을 듯 하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까지 어떤 팀에서든지 팀의 구심점으로써 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점을 보면 카리스마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그가 이기적인 선수였다면 세이부의 황금시대도 없었을 것이며 안좋은 상황에서도 교진에서의 2회 일본시리즈 우승이나 오릭스에서의 후배들의 태도 등을 본다면 저런 나쁜 일화 속에서도 카리스마 하나는 확실하다 평가된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과거 그를 아끼던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고. 약물복용과 문신(야쿠자와의 관련), 불륜 등 스캔들이 터져나오더니 급기야 2014년 9월 22일 패션모델인 아키 부인과의 이혼을 공식 발표했다. 팬들은 KK콤비의 구와타나 AK콤비의 아키야마도 건실하게 살고 있는데 왜 기요하라만 인생을 망치고 있냐고 안타까운 분노를 표하고 있다.

5. 기타

젊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아이돌이 나카모리 아키나라고 한다.

2011년 일본 캠프에 왔던 LG 트윈스정의윤을 보고 "정말로 정의윤이 후보란 말인가?" 하며 놀랐다고 한다. 때문에 야갤에서 정의윤은 '기요하라의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정의윤이 활약을 하면 기요하라도 덩달아 칭찬을 받고 부진하면 같이 욕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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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센트럴리그 팀 홈 경기에서는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가 1루를, 키요하라가 3루를 보기도 했다.
  • [2] 대장, 캡짱, 대빵, 두목 등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듯.
  • [3] 심정수는 그나마 은퇴 전 해인 2007년, 3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했음.
  • [4] 이들은 'KK 콤비'로 불리며 고교야구를 제패하고 프로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야쿠르트빠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서 오마쥬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 [5] 1965~1973 9년 연속 리그 재패.
  • [6]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 1987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 맞붙었을 때 시리즈 최종전 마지막 아웃 카운트에서 울고 말았다. 아무래도 과거 요미우리에게 당했던 심적인 아픔이 컸을 터. 88년 올스타전에서 구와타를 상대로 홈런기록 및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쿠와다를 상대로 홈런 두 방을 연달아 때려내기도...
  • [7] 이 해 메이저리그가 선수노조 파업으로 인해 월드 시리즈를 포함한 포스트시즌 일정이 전면 취소되는 바람에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관심이 쏠렸다. 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에 세이부 라이온즈의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등장하고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었을 정도.
  • [8] 이는 1953년 작성된 고졸신인 시즌 최다 홈런기록 이던 토요다 야스미츠의 27홈런을 경신한 것이기도 하다. 토요다는 기요하라의 팀 대선배이다.
  • [9] 키요하라가 교진에 있었던 90년대에는 히로사와 카츠미(전 야쿠르트 4번), 이시이 히로오(전 킨테츠 4번), 에토 아키라(전 히로시마 4번), 도밍고 마르티네스(전 세이부 4번) 등이 요미우리로 이적했으며대부분은 먹튀로 전락했지만, 2000년대에는 로베르토 페타지니, 터피 로즈, 쿠보 히로키 등이 요미우리로 이적한데다 마쓰이 히데키, 타카하시 요시노부 등 요미우리 순혈 강타자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 [10] 하지만 오기 감독은 2005년 시즌 직후 폐암으로 별세했다.
  • [11] 'RUN'으로 유명한 일본의 가수. 기요하라와는 절친한 사이로, 은퇴사실도 그에게 가장 먼저 밝혔다고 한다.
  • [12] 여담이지만 한국 가수 홍수철의 '보고싶다 친구야'라는 곡이 이 노래를 그대로 표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 [13] 시즌 최고 홈런이 1992년의 37홈런인데 이해 리그 홈런왕은 팀 동료인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41홈런)였으며 1995년 다이에 호크스쿠보 히로키가 28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했을 때에는 25홈런밖에 못쳤고(...) 1996년에는 31홈런을 쳤는데 당시 오릭스 블루웨이브 소속이었던 로이 닐(2001년 두산 베어스에서도 뛰었으나 두산에서는 17경기 .193 1홈런 3타점만 기록하고 폭행사건에 휘말려 퇴출)이 32홈런을 쳐서 딱 1개차로 밀렸다...
  • [14] 그 외에도 올스타전 MVP 통산 7회 수상으로 일본프로야구 1위 기록이다. 다만 일본프로야구는 올스타전을 시즌당 1경기만 하는게 아니라 2, 3경기를 한다.
  • [15] 이쪽도 기요하라처럼 고졸 신인 1년차때부터 4번타자로 뛰었다.
  • [16] 이 당시 롯데의 히라누마 투수에게 사구를 맞았는데 히라누마는 기요하라보다도 한참이나 선배였다. 이런 선배한테 배트를 직격으로 던졌다. 우리나라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배트를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완전히 찍혀서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도 못 했을 것이다. 그 배트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히라누마가 기요하라에게 달려들었고 기요하라가 무릎차기를 날린후 마구 도망가는 몸개그를 벌였다. 이게 일본의 쇼프로에서도 개그소재로 쓰일 정도.
  • [17] 물론 호시노도 성질머리론 야구계 최강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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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4-11-24 15:3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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