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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

last modified: 2015-03-28 21:20:46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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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野 武.

1947년 1월 18일 생으로 코미디언영화 감독이다. 통칭 비트 다케시로 불린다.
일본 연예계의 대부이자 최대 거물 그리고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와 함께 일본 게닌 '빅 3' 에 속한다.

Contents

1. 상세
2. 감독 작품
3. 다케시 영화의 특성
4. 기타
5. 한국계 발언 소동
6. 어록

1. 상세

1947년 도쿄도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장난끼 넘치고 유머감각이 가득했으며 스포츠 면에서도 꽤나 우수했다.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가 심히 막장이라 야쿠자가 눈 앞에서 죽는 모습도 봤다고 한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이 오히려 영화를 만들 때 도움이 됐다고한다. 덕분에 야쿠자 영화를 너무 사실적으로 찍어서 서양 쪽 사람들은 그를 야쿠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의 팬들이 일본에 와서 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일이 비일비재하며 아예 야쿠자로 대우해주는 사람도 있다고...자국인 일본에서도 현역 야쿠자가 나름대로 옥의 티를 지적하고 싶었는지 기타노 타케시에게 전화를 걸어서 "시체를 바다에 버릴 때, 배를 가른 뒤에 버려야지"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공부를 좀 했는지 메이지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전공투[1]라는 학생운동조직에 연루되어 대학을 중퇴했다. 일본위키에 의하면, 수학에 조예가 깊어서 길을 잘못가지 않았으면 수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생활고 때문에 다방보이, 클럽보이같은 밑바닥 막장일을 비롯해서 양지에서 백화점 점원 등 별의별 3D일을 하다가 1972년, 스트립쇼 극장 ‘프랑스좌’의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하던 중 만난 비트 기요시와 의기투합하여 "투비트"라는 이름의 만담 콤비를 결성, 게닌(개그맨)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오오타 프로덕션과 계약하고 1975년부터 TV에 출연하기 시작한다.

투비트는 1979년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젊은 게닌들과 함께 <The Manzai>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The Manzai>는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던 코미디언인 더 드리프터즈의 대표방송 <8시다! 전원집합>을 시청률로 이기고 일본에서 만자이 열풍을 일으킨 프로그램이다. <The Manzai>에 출연하여 스타덤에 이른 게닌으로는 친구와 몰래 뒷담화를 하는 컨셉으로 각종 은어들을 사용하여 사회 풍자적인 요소가 섞인 만담을 하였던 투비트, 노동자 작업복을 입고 사장에게 항의하는 컨셉으로 사회 픙자요소가 짙은 만담을 하였던 '신스케 X 류스케', 한신 타이거스 타자들의 동작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여 주목을 끈 아카시야 산마[2] 등이 있다.

1981년, <The Manzai>가 종영된 이후 비트 기요시가 연예계에서 은퇴를 선언하여 투비트는 해체되었고 핀게닌으로 활동하게된 비트 다케시는 프로그램 중간에 갑작스럽게 같이 출연한 남자 연예인에게는 뒷통수를 때리면서 비속어를 구사하고 여자 연예인 앞에서 야릇한 행동들과 속어들을 하는가 하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본의 높으신 분들에게도 가차없는 독설을 내뱉어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게 하는 등 그야말로 파격적인 코미디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는다. 이 때 비트 다케시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여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본 방송국의 골든 타임 시간대 예능 프로그램 대부분을 비트 다케시가 진행하게 된다. 이 당시의 유행어 코마네치는 지금도 간간히 쓰이는 일본에선 전설 아닌 레전드급 유행어. 이 외에도 성진국 예능의 위엄 등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걸 보면 비트 다케시가 출연한 방송 아니면 더 드리프터즈의 콩트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한편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비트 다케시는 1983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에서 악랄한 군인 하라 겐조 역을 맡으며 영화 배우로도 데뷔하였다. 동시에 당시 자신의 소속사였던 오오타 프로덕션에 반발을 품고 자신을 따르는 후배 게닌들을 이끌고 소속사를 탈퇴, 케시 군단이라는 별도의 회사를 설립한다.

그렇게 잘나가던 비트 다케시는 1986년 11월,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으로 큰 위기를 겪는다. 사건의 발단은 평소 비트 다케시를 좋게 보지 않았던 야쿠자 세력이 황색언론으로 유명한 잡지 프라이데이에다 '막 결혼한 비트 다케시가 사실은 21세의 전문학교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라는 제보를 보낸 것으로 시직된다. 제보를 받은 프라이데이는 비트 다케시를 스토킹하거나 불륜녀로 제보된 여성을 폭행하는 등 막무가내로 취재를 벌였고 결국 비트 다케시 소유의 별장에서 비트 다케시와 불륜녀가 같이 있는 장면을 포착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단단히 화가 난 비트 다케시와 다케시 군단 소속 게닌 10명은 잡지사를 점거, 소화기를 사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편집부원과 편집장을 폭행한다.#

이후 비트 다케시는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기물파손과 주거침입을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1987년 6월 10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는다. 기타노 다케시는 2011년에 들어, 이 사건으로 인해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쿠자를 찾아가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3][4]

재판 이후 프라이데이 잡지사가 워낙 황색언론으로 유명한 잡지였고 비트 다케시의 인기도 높았기 때문에 비트 다케시는 1987년 8월부터 방송에 컴백할 수 있었다. 이 일로 비트 다케시는 1989년 그 남자 흉폭하다를 감독하면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비트 다케시의 감독 데뷔는 쉽지 않았다. 코미디언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는 "뭐빠지게 웃긴 놈", "골때리게 웃긴 놈" 등 수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위의 사건으로 여론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갑자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몇 년 동안 대중들의 분노어린 평가와 숱한 조롱을 받았고, 기타노 타케시는 SBS의 인터뷰에서 대중들에게 각인된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까지 수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그 남자 흉폭하다》로 감독으로 데뷔한 후에 《3-4×10월(月)》,《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 등 여러 영화감독을 맡게되고 그간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당히 바꾸며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소나티네》로 유럽 등 해외에서까지 인정받게 되지만 1994년,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얼굴 일부가 마비되어 표정을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되어 건강은 물론 유부남인 비트 타케시가 술에 만취한채로 불륜녀집에서 나오다가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5] 재혼한 아내와 이혼 직전까지 가는 등 크나큰 위기를 겪는다. 다행히 《키즈 리턴》으로 다시 한번 감독으로 화려하게 재기하게 된다.[6]

이후 1997년, 《하나비》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참고로 하나비는 일본 문화가 개방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한 첫 번째 일본 영화였다.[7] 1999년에는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郎の夏)》으로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였다. 장님 검객을 주연으로 한 《자토이치》 또한 헤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일본의 거장 감독으로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영화 감독으로서 그의 작풍은, 어떤 사조를 따르지 않는 독특한 연출 기법로 이뤄져 있으며, 강렬한 폭력과 무뚝뚝한 유머의 결합이 돋보인다. 같은 일본 감독으로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유머와 진지함을 동시에 가진 일본의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가차없는 딴지와 독설을 날리는 코미디언으로도 일본 내에서도 열심히 활약 중. 코미디언으로 방송에 출연할 때는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으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출연한다.[8] 배우로서도 비트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타케시가 연출과 주연을 겸한 작품에서는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온다.(감독으로서는 물론 키타노 타케시 명의) 2004년작인 케시즈는 이런 코메디언인 타케시와 감독인 타케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영화가 난해하고 그의 다양한 모습을 전부 자세히 알고 있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독 만세는 감독으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한 영화. 좀 더 코미디에 가깝다.

화가로도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며, 개인전도 몇 번 가졌다고 한다. 2008년 영화 킬레스와 거북이[9]는 화가로써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때 일단 기-승-전-결의 4개의 그림을 그린 후[10] 그 그림들을 바탕으로 영화 내용을 만든다고 한다.

2010년에는 부산 국제영화제를 통해 오랜만에 돌아온 야쿠자 영화인 아웃레이지가 소개되었다.

2. 감독 작품

굵은 글씨는 출연한 작품

3. 다케시 영화의 특성

타케시 영화의 교집합적 특징이라면, 1) 롱테이크 2) 폭력성 3) 희극성 4) 심리적 상징성 5) 히사이시 조 6) 자기반영 7) 비슷한 배우 등이다.

롱테이크 장면이 많다. 대사없이, 카메라 시점 변화 없이 하나의 테이크를 그대로 쭈욱 보여주는 것이다. 때때로는 몇분 이상 가기도 한다. 처음 보면 감정적으로 매우 메말라 있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단순한 관조와 다른 그 시선을 느끼는게 타케시 영화의 매력.

폭력성이 상당하다. 고어적 연출같은 것은 전혀 없지만 맥락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공격적 연출로 인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야쿠자 소재의 영화들일 경우 대부분 폭력성을 전반에 깔고 있으며 여과없는 강렬한 공격성 자체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폭력성과 대비되는 코미디, 개그, 웃음이 많다. 코미디 소재의 영화가 아니라 야쿠자 영화들에서 특히 더 그렇다. 정말 심각한 분위기에서 냉혈한 야쿠자들의 격렬한 폭력성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동일인물들의 아이같은, 유치한 행동들을 통해 실소를 유발시키는데. 이러한 아이러니가 그의 영화의 매력 중 하나.

인물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단서나 아이템들을 영화 내에서 반복해서 늘어놓기도 하며, 주요 소재들은 영화를 뛰어넘어서 반복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자주 사용되는 것이 그가 직접그린 그림.

그의 영화들의 배경음악은 대부분 히사이시 조가 도맡아서 작업하였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소나티네, 하나비, 키즈리턴, 브라더, 돌스, 기쿠지로의 여름까지 총 7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자기투영적인 모습이 많다. 코미디언, 야쿠자(캐릭터), 감독, 배우 등 정체성이 여러가지인데다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이 어느 영화나 대부분 비슷. 심지어는 자신이 감독이 아니고 출연만 한 영화에서도 캐릭터는 비슷하다. 실제 성격까지는 몰라도 비트 다케시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고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낯선 모습까지 전부 통합하기 위함인지 언젠가부터는 영화를 통해서 자기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케시즈, 독 만세, 킬레스와 거북이가 이에 해당.

마치 주성치 영화에 그의 사단이 있는 것처럼, 기타노 영화 속에서도 항상 비슷한 얼굴들이 출연한다. 원래 케시 군단이라 불리우는 코미디언 후배집단을 거느리고 있어서 이들이 영화에 자주 나오는데다 정극 배우 중에서도 자신의 영화에 자주 기용하는 배우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테라지마 스스무와 오오스기 렌. 사실 이들은 워낙 다작을 하는 배우이다보니 다케시 영화에도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테라지마 스스무는 다케시 영화 대부분에 나왔다.

4. 기타

  • 《위험한 일본학》이라는 책이 번역되면서 국내에서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자신이 중의원 후보 연설을 한다면?'이라는 주제의 글에서 '한국과 중국의 일본 교과서 같은 문제 제기들을 일본으로부터 돈을 목적으로 뻔뻔하게 시비를 거는 나라'[11]라는 부분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 2001년에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배틀로얄 1편에 담임 교사로 출연. 본명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꽤나 포스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예전부터 후카사쿠 감독과 친분이 있는 듯하다.

  • 비트 타케시의 도전장은 기타노 다케시의 흑역사 중 하나.

  • 하나비라는 작품 직후에 했던 인터뷰에서 가족이라는 정의에 대해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충공깽스러운 발언을 했던 것이 은근히 유명하다.

  • 촬영장이 하드하기로 유명하다. 카세 료가 밝히길 리허설 한 번, 슛 한 번에 촬영이 완료되며 이 때 실수하면 해당 장면이 그대로 날아가버린다고...

5. 한국계 발언 소동

일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자 : 다케시는 재일(한국인)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데 사실인가요?
다케시 : 응. 어머니 쪽 집안이…
라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한때 한국계라는 소리가 돌았다.

하지만 이후 다케시의 어머니가 다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바보는 착각하고 있어요"라며 자신은 순수한 일본인이라고 주장.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가 한국계였던걸 외할머니가 한국계였던 걸로 착각한 것으로, 기타노 다케시는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인지라 한국 쪽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기타노 다케시도 이후에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어머니한테 굉장히 혼났어요"라며 정정.

6. 어록

나는 칼싸움 장면에서 칼끼리 부딪히는 걸 싫어한다. 그럴 시간이 어디있나? 단숨에 베어야지.

"어렸을 때는 모델이 되고 싶었어요."
"무슨 모델이요?"
"프라모델."

키노 : 당신은 일본에서 성공했다
기타노 : 성공이 뭐냐. 애인은 도망갔고 마누라는 차갑다. 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키노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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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60년대 일본 학생 운동의 대명사. 당시 전공투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학생운동집단의 집결체로 알려져 인기가 좋았다.
  • [2] 산마는 이후 <The Manzai>의 2대 사회자를 맡기도 하였다.
  • [3] http://tokyoadvance.blogspot.com/2009/09/blog-post_2672.html
  • [4]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11454
  • [5] http://www.ddanzi.com/news/48420.html
  • [6] 참고로 퇴원 직후 기자회견을 했는데 일그러진 얼굴로 토크쇼를 하듯 진행했다! #
  • [7] 일본 문화 개방 초기에는 극장에 개봉 가능한 일본 영화는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영화로 제한되어 있었다.
  • [8] 일본 대도시를 가면, 대형 광고판에 그가 광고 모델로 출연한 광고가 상당히 많다.
  • [9] 음악은 극장판 공의 경계로 오덕계에서 유명한 카지우라 유키가 맡았다.
  • [10] 일종의 스토리보드라고 생각하면 될듯.
  • [11] 글의 마지막으로 당선되자마자 실행하고 싶은 최대의 공약은 일본을 해산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마치는 거 보면, 이미 정상적인 내용이라고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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