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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징

金慶徵
1589~1637

한국사 사상 최강의 소인배이자 천하의 개쌍놈.

Contents

1. 소개
2. 병자호란 때의 대활약
3. 평가
4. 기타

1. 소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여물의 손자이자 인조반정의 주역인 김류의 아들로, 부친과 함께 반정에 참가해서 2등 정사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부친의 배경을 바탕으로 계속 출세 가도를 달려 공조 참판에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한성부판윤까지 되었다.[1]

그러나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평소부터 여러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한 번은 어느 무관이 자신에게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갔다고 마구 곤장을 때려 죽게 했을 정도.

2. 병자호란 때의 대활약

병자호란이 시작되자 강화도 수비를 맡은 강도검찰사가 되었지만,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띵가띵가 놀았다. 김포와 통진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피난민들을 구제한다는 이유로 배로 실어 왔으나, 정작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않아 모든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 심지어 강화도로 건널 때 세자빈조차 배에 태우지 않았다. 세자빈이 원망에 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마지못해 세자빈만 태웠다. 때문에 강화도로 건너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심지어 강화도의 해안선인 갑곶과 연미정 이북 사이에 보초 하나 세워두지 않고, 청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바다가 있는데, 청군이 어떻게 건너오겠느냐?"면서...그러나 , 송화강, 압록강, 단강 같은 큰 강은 물론이고 동해 끼고 해적질도 하고[2] 바다를 낀 섬 지역인 대만하이난도 합병 먹어버리고 아편전쟁, 청일전쟁때 함대 끌고 남중국해, 서해 바다에서 영국, 일본 해군과 해전도 치뤘던 만주은, 물에 대한 금기로 말미암아 해전이 약했던 여몽전쟁 당시 몽골의 원나라[3]가 아니었다.[4][5]

보다 못한 대신 김상용[6]이 "네 나이가 몇인데 어찌 이리도 철없이 구느냐? 네 아비인 김류도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가 있는데, 걱정이 되지도 않느냐?"라고 꾸짖자 화가 잔뜩나서 군사 업무를 처리하는 도장을 땅에 내팽개치고는 "내가 알게 뭐냐! 어떻게 되건 난 모른다!"라고 씩씩거렸다고 한다. 병신인증

그러던 와중에 민가를 헐어 만든 뗏목을 타고 군이 기습해와 강화도가 함락되자, 병사들을 동원해 막을 생각은 안고 겁에 질려 자기 혼자 살겠다고 배를 타고 충청도로 튀었다. 유수 장신과 함께 강화도 함락의 가장 큰 원인. 김상용이 강화도 함락에 책임이 전혀 없음에도 스스로 자폭하는 최후를 맞았다는 점을 기억하면[7] 이 인간의 찌질함은 정말 답이 안 나온다. 그런데 이것만이 다가 아니다.

얼마나 한심했는지, 청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마저 내팽개치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갔다. 그의 아들인 김진표(1614~1671)는 더욱 가관인데, 자신에게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되는 여인들에게 자살하라고 협박해서 죽게 만들었다. 오랑캐인 청군에게 사로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죽는게 낫다고...

그의 어처구니없는 무능과 태만으로 인해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이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인조와 조정의 대표 인사들은 항전할 의사를 잃었고, 결국 청군에 항복하고 만다.

사실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 왕실 가족만이라도 대피시켰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건데...실제로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간신히 대피해서 충청도로 피난가는데 성공했고 충청도의 병력과 영, 호남의 근왕군도 올라오고 있었는데다 명나라도 사실 이 당시 산둥 반도에서 강화도 방어를 도울 수병을 보내려고 했었기 때문에[8] 조금이라도 버티며 시간을 벌였다면 어느 정도 승산은 있었던 것을 이 사람들이 말아먹은 것이다.

3. 평가

인조는 반정공신의 아들이라 웬만해서는 용서해 주고자 강계로 귀양보내면서 덮으려고 했지만, 김경징이 보여준 추태를 기억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탄핵을 받았고 애비인 김류마저도 죽어 마땅할 짓을 저질렀다고 인정[9]하면서 1637년 9월 21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약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대단히 명예롭게 죽여준 특혜를 내려준 셈이다. 그럼에도 찌질이답게 애비인 김류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끝까지 비굴한 꼴이나[10] 보였다. 이러니 아무리해도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명예롭게 아들이 죽겠다면 그래도 위안이라도 받았을텐데 끝까지 이런 한심한 짓이나 하니 오죽 열받은 아버지 김류는 아들한테 싸닥션을 날리면서 "죽은 어미와 아낼 생각해서라도 네놈 역시 알아서 죽어야했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김류도 비난을 많이 받던 인물이다. 그나마 눈치껏 처신을 잘해서 78살 천수를 누리며 잘 살다가 갔지만...자세한 건 김류 참조. 아들인 김진표 역시 못난놈인데 살아남아서 조부 김류 덕에 공조참의까지 하고 57세까지 살았다.

끝까지 추태를 부리다 죽었으나, 그나마도 함께 강화도 방위를 맡았으며 김경징과 장신(1595~1637) 등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달아난 상황에서 열세인 병력으로 끝까지 항전했던 충청수사 강진흔이 참수형을 당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큰 특혜를 입은 셈이다. 참고로 장신도 참수형을 받을 뻔했으나 그 동안의 공로를 감안하여 알아서 죽으라고 명을 받고 자결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35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9월 21일(병술) 2번째기사를 찾아보면 어떻게 김경징을 처벌했는지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그가 죽던 날에 작성한 기록에서 "김경징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지하고 미친 놈(광동, 狂童)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라고 썼다. 당시에도 김경징이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만하다.

사신은 논한다. 아아, 강도는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이다. 정묘년 이후로 시설하여 보장(保障)으로 삼았다. 그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사변이 있을 때에 임금이 머무를 곳으로 삼았으니, 묘당이 참으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맡겨 방어할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인데, 김경징은 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 글을 배우지 않아 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므로 길에 나가면 거리의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데, 김류(金瑬)는 사랑에 가리워 그 나쁜점을 몰랐으나 사람들은 집안 망칠 자식이라 하였다. 이 때에 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이민구는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이다. 평생에 시와 술로 자부하고 본디 실용(實用)의 재주가 없었다.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홍명일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아들이다. 데면데면하고 느려서 일할 줄 몰랐다. 세 사람이 명을 받고 나갈 때에 세 집의 짐이 10리에 잇달고 그 집 사람의 행색이 매우 화사하므로 서울에서 피란하는 자가 모두 분하여 욕하였다. 강도에 이르러서는 적병이 날아서 건널 형세가 아니라 하여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을 일삼으므로 피란한 사자(士子)들이 분통 터져 두어 줄의 글을 지어 검찰사의 막하에 보냈다. 그 글에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마실 때가 아니다.” 하였으나, 이민구 등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다. 어느 날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나고, 이민구와 홍명일도 뒤따르고,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金震標)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 윤방(尹昉)은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성안에 있다가 미처 피해 나가지 못하고 열성(列聖)의 신주를 묻었는데, 청나라 군사에게 도굴되어 조종(祖宗)의 신주가 드디어 다 더럽혀졌다. 아,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인가.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류는 부귀 때문에 이미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 하였다.

4. 기타

  •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고전소설 강도몽유록에선 병자호란 당시 죽어나간 부녀자들이 원혼으로 나와 밤길에 한 정자에서 모여 한탄하면서 당시 조선 위정자들을 적나라하게 깔때 김경징, 김류는 천하의 개쌍놈, 이런 이들을 오냐오냐 봐준 인조까지도 찌질이로 미치도록 깐다.

  • 여담으로 민담에는 김경징이 '육갑병신(六甲兵神)'이라는 신장(神將 : 신들의 장군)을 부리는 술법을 알아 업무에 태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청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신장을 불렀는데, 신장이 오지 않았다. 강화도가 거의 함락될 쯤에 신장이 나타났는데. 김경징이 "뭐하다 늦었냐!"...며 항의하자 이 신장 曰, "홍타지가 불러서 그쪽에서 싸우느라 늦었다."...라고 했다.(...) 결국 김경징은 패배했고, 이후에 육갑병신은 욕설로 쓰이게 되었다. 민담에서도 이리 돌려 깔 정도라면 설명이 더 必要韓紙?
    정강의 변곽경의 일화에서 따온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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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이괄의 난에서도 나오지만 그 시절 한성부판윤은 심심하면 갈아치워지는 그저그런 한직이었다.
  • [2] 삼국지 읍루전에까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큰 사건으로는 고려시대인 1018년에 울릉도를 탈탈 털어서 우산국에게 멸망크리를 먹여버렸고, 그 이듬해에는 도이(島夷)가 고려일본에 침입한 바 있는데 이것도 얘네들로 강력히 추정된다.
  • [3] 내륙 중의 내륙이고, 외몽골의 홉스골 호수, 부랴트의 바이칼 호수나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정도를 빼면 큰 물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다. 홉스골은 큰 호수는 아니지만 몽골공화국 영내에서는 가장 큰 물로 배도 다니며 시라무렌 강은 내몽골 자치구 내의 유일한 큰 물이다. 물에 몸을 씻는 것을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여겨 금기시하고, 칭기즈칸 때 제정된 법에 물에 설물을 싸면 너 사형.(...) 게다가 물에서 나는 물고기나 새우 등의 수산물은 먹지 않을 정도로 물에 대한 금기가 강했다.
  • [4] 그러나 해전에 약한 것은 고비사막에서 놀던 몽골부족 시절 이야기이고 남송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원나라를 세운 뒤로는 바다 사정에 밝은 광둥, 푸젠, 저장성 출신의 중국 한족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몽골도 해전에 몹시 능해졌다. 범문호, 유복형 등 옛 남송의 수군 항장들과 한족 출신 선박 기술자들의 가세를 바탕으로 원나라 시기 배를 타고 베트남이나 일본을 쳐들어가거나 여몽전쟁 종전후 고려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삼별초 세력들의 거점지인 제주도와 진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일본 침공하다가 해상기후를 고려하지 않은 바람에(...) 태풍에 박살이 난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
  • [5] 그런데 금나라청나라등을 세운 만주, 여진족들이 실질적으로 해전에 강했는지는 의문이다.내륙국인 몽골과 달리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동해와 서해등 해안선을 맞대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해적질도 여러번 하는 등 해상 경험이 약하진 않았으나 조직적인 해전력은 몽골의 원나라보다 더 형편이 없었고 대만도 정성공의 난을 일으키던 정성공이 죽고 정씨 세력의 내분을 틈타 겨우 합병했다. 게다가 청나라 해군의 실제 지휘권도 만주족이 아닌 한족 출신들이 잡고 있었다. 그러니깐 요점은 말하자면 청군이 수전의 스페셜리스트는 결코 못 되도, 초기의 몽골군 같이 전형적인 물을 두려워 하는 생 초짜 유목민들은 아니었으며, 더더욱 얄랑한 강물 하나 믿고 강화도에 박혀 있을 만큼 안이하게 대응 할 수 있는 바보들은 아니었다는 거다.
  • [6] 1561~1637/주전파의 대표인물이었던 김상헌(1570~1652)의 형이다.
  • [7] 성문에 화약을 뿌려놓고 불을 던지려고 하는데 손자가 같이 죽겠다고 하여 이를 말렸지만 손자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함께 자폭했다고 한다. 더불어 이 때 김상용과 같이 마지막을 다한 또다른 인물이 김익겸(1614~1637)으로 김만중의 아버지로서 김만중이 태어나는 것도 못보고 먼저 갔다.
  • [8] 첫 시도는 풍랑때문에 중단됐다고 한다. 다시 보내려 했을때는 이미 강화도가 함락당한 후(...).
  • [9] 사실은 김류도 자식인만큼 되도록이면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에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고 왕족마저 버린 행위로 대역죄라는 주장도 나와 자칫하면 자신과 손자 김진표마저도 목이 날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뜻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 [10] 그 당시 양반들은 가죽으로 만든 갓신을 신고 다녔는데 김류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김경징은 아버지의 다리를 부여잡고 짚신에 얼굴을 부벼대며 목숨구걸을 했는데 어찌나 비볐던지 짚신 앞이 다 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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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2 0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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