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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last modified: 2015-03-21 01:02:33 by Contributors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
- 오경필 중사(공동경비구역 JSA송강호 분)

Q: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A: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2]
 
인생의 길목길목에 서 있는 가수가 김광석이다.
- 박학기, 라디오 스타에서

인생을 돌아볼 때 김광석이 있다면
당신은 아주 운이 좋은 셈이다.

김광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는 그가 있어서 80년대를 버텨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찬욱

현대에 이르러 음악과 예술의 공백을 다시 메워준 천재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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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가객 김광석
2. 발자취
2.1. 학창시절부터 데뷔 전까지
2.2. 활동 초기~노찾사
2.3. 솔로 활동
3. 성격
4. 죽음
5. 그를 떠나보내고
6. 가창력
7.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
7.1. 노래
7.2. 도서
7.3. 뮤지컬
7.3.1. 그날들
7.3.2. 바람이 불어오는 곳
7.3.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
7.4. 남긴 것
8. 그가 부른 곡들
8.1. 1집 너에게
8.2. 2집 사랑했지만
8.3. 3집 나의 노래
8.4. 4집 일어나
8.5. 다시 부르기 1
8.6. 다시 부르기 2
8.7. 기타
9. 관련항목

1. 가객 김광석


국내에서 가객,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이름이 어울렸던 몇 안 되는 예술가.
또한 김광석의 시대에 살았던 이들에게는 광석이형으로 남는, 말이 필요없는 한국의 전설적인 가수이다.

대표곡으로는 <이등병의 편지>[4], <사랑했지만>, <서른 즈음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일어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있다.

2. 발자취

2.1. 학창시절부터 데뷔 전까지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며 1979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5]

1982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1학년 때 대학 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2.2. 활동 초기~노찾사

1984년 그는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때 함께 한 이들과 의기투합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한다. 1985년 1월 군에 입대했으나 큰 형님이 이전에 군에서 사고사했기 때문에 6개월을 복무한 후 7월 제대하게 된다.

1987년 10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찾사의 첫 정기 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 가수로 떠오르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1987년 여름,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없이 녹음한 것을 산울림김창완의 권유로 음반을 내자고 하여 1988년 7인조 그룹 동물원의 1집을 내 놓는다.

별 생각없이 낸 음반이었는데[6][7] '거리에서'와 '변해가네'가 빅히트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거리에서'와 '변해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같은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밝은 이미지를 구축,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 되었다. 이후 동물원의 일원으로 많은 공연에 참여했다.

2.3. 솔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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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안치환, 가운데가 김광석, 오른쪽은 노찾사, 해오라기에서 활동한 배훈)

자신의 음악을 찾고 싶었던 그는 동물원과 결별[8] 89년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에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는 결혼에 성공한다.

1991년에 발표한 2집은 그를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는데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았다. 92년 <나의 노래>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3집을 발매했다.

1992년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 프로의 DJ가 되어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때 외설 문제로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연세대학교 광마마광수 교수가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징계를 먹었다. 진행자 김광석은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받았다. 이 사건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1993년 7월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한 달 간의 장기 공연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열었다. 그 후 '다시 부르기' 1집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대중 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그는 <나의 노래>가 실린 3집과 94년에 발표된 <일어나>가 실린 4집의 연이은 성공으로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9]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흐름을 하나의 앨범으로 계보를 정리한 '다시 부르기 2집'을 발표하면서 히트를 터트렸다. 또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다.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11월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은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들어 항상 만원을 이뤘던 흥행 보증 수표였다. 이는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법정스님으로부터 '원음'[10]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3. 성격

외모를 보면 알겠지만 성격도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김광석 평전 참조). 한마디로 대인배. 특히 후배들을 많이 아껴서 돈이 궁한 후배가 있으면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무대에 서기가 힘든 후배들을 위해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닭튀김 같은 먹을거리를 사서 후배들이 있는 대기실에서 곧잘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그래서 김광석이 오는 날에는 대기실에서는 닭튀김(치킨) 냄새가 퍼진 날이 많았다고 한다. 갓 가수가 된 후배들을 위해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고 한다.

성격 까칠하고 주위 가수들과 자주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이은미도 방송에서 종종 김광석 이야기가 나오면 그리움과 슬픔에 눈물을 참았으며 가수 윤종신도 신인 시절에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친절히 말을 걸었던 김광석을 회고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윤도현은 무명 시절이 길었는데 힘들었던 무명 시절 김광석은 윤도현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많은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윤도현은 김광석이 죽은 이후 매해 그의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답을 하고 있다. 폐쇄적인 성격의 이소라도 김광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송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라이브 공연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 즉, 그가 죽은 후에도 김광석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선, 후배 가수는 아무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인간성이 증명되는 셈. 김광석의 후배 가수들이 김광석이 눈을 감은 후 그에게 보낸 메시지가 있으니 한 번 보는 것도 좋다. 링크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와 마주해서 좋은 인간성에 감동을 받았다는 팬의 이야기도 여럿 눈에 띈다. 한 팬은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캔커피를 하나 사서 김광석에게 주었다고 한다. 김광석은 "보답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네요"라는 대답을 하면서 즉석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또 한 팬은 춘천으로 입대를 하는 길이었는데 김광석을 춘천가는 길에 만났다고 한다. 김광석은 "입대하세요?"라고 물어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주었다고.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앞에서 '고리'라는 카페를 했었는데 김광석이 워낙 후배 가수들과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공짜로 대접하는 바람에 얼마 영업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4. 죽음


“한동안, 뭔가 모르게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을때에요. 뭐, 정말 '그만 살까?' 이런 생각도 하고 그럴때, 어차피 그래도 살아가는 거 좀 재밌거리 찾고 살아봐야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하면서 만든 노랩니다. '일어나' 불러 드리면서 물러가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 사망 1년전, 슈퍼 콘서트에서[11]

통산 6장의 개인 앨범을 내고 김광석은 1996년 1월 6일 타계했다. 만 31세 350일. 그 전날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잠들었던 김광석은 새벽 4시 30분께 마포구 교동의 원음빌딩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전기줄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의 죽음에 관련해서 '정신적 불안 때문이다', '돈 때문이다', '여자 때문이다', '타살이다' 등의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어디까지나 갑작스런 그의 죽음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더욱이 그 해 1월에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발라드 가수 서지원에 이어 김광석의 죽음과 '서태지의 아이들'의 돌연 은퇴 선언 등이 줄을 잇자 조직폭력과의 연관설까지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의 사망은 명확히 밝혀진 점 없이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다만 김광석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김광석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꿈에 나와 "억울하다, 내가 왜 자살을 하냐"라는 꿈을 공통적으로 꾸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로 그의 사망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은 상황.
무엇보다 생전 그의 말버릇이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것 처럼 김광석은 남자답고 적극적인 성격이었고[12] 당시 잘 나갔던 가수였던 김광석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다거나 하는, 굳이 자살할 이유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단,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 시기 김광석이 정신적인 고뇌가 깊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13] 또한 우울증이 있어서 자살했다고 하는데, 그의 지인들 중 어느 누구도 우울증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죽기 직전에도 왕성한 활동을 계획했던 것을 보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이에 프리랜서 기자 이상호는 자신의 취재결과를 토대로 김광석의 타살설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사망 이틀 후 의문점이라는 글이 나우누리에 올라오긴 했는데 그 글에 따르면 몇 가지 정황상 이상한 점이 있긴 하다. 현재 그 글은 삭제되어 찾을 수 없지만 이상호 기자의 주장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또한 이상호 기자의 주장에 따르면 거짓말 탐지기에 증언 한 사람들 이야기가 거짓으로 판명난게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이는 김광석 사후 아내 쪽과 김광석 친가의 분쟁을 보면서 뭔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심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나의 노래' 가사를 곱씹어보면 그의 죽음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또다른 대표곡인 '일어나'를 들으면 그 노래의 가사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떠난 그의 마지막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김광석은 생전 불교도였던 터라 화장을 했는데 주로 고명한 스님들에게 나오는 사리가 9과나 나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활짝 웃는 영정사진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모티브가 되기도했다

"작품을 처음 생각하게 된 동기는 그 김광석씨라고 가수가 자살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정 사진이 굉장히 제가 봤을 때 느낌이 있었어요. 영정 사진인데 이렇게 활짝 웃고 있더라구요. 거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받아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게 됐는데 죽어가는 사람의 일상에서의 밝은 부분이 있을 거 같아요. 물론 고통도 있지만. 그런 밝음에 초점을 두고 시나리오 작업을 했습니다."
-허진호 감독, Q채널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 <8월의 크리스마스> 편 인터뷰 중에서

5. 그를 떠나보내고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 명의 동료 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그의 음악선배 백창우는 김광석의 미발표곡 '부치지 않은 편지 1, 2'를 담은 추모 음반 '가객'을 1주기 기념으로 발표했다.

소시민적 감성과 유려한 노랫말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곡은 여전히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추모 음반이나 추모 콘서트의 인기는 웬만한 뮤지션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의 사후에 저작권 문제로 법적 분쟁이 이어졌다. 1996년 김광석이 사망하자 부인[14]과 아버지[15] 사이에 소송이 있었으나 법원이 중재에 나서 지적재산권을 나누어 행사하는 것으로 합의[16]하였고 이때 아버지는 자신이 사망하면 권리를 손녀(김광석의 딸)에게 상속하기로 명시하였다. 2005년 김광석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이번에는 어머니와 형이 신나라뮤직이 합의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부인과 딸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8년 대법원에서 패소하였고 판결 내용에 따라 저작권이 김광석의 딸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조정합의로 최종 종결되었다.##

2009년 독일의 언더그라운드 힙합그룹인 Die Orsons가 김광석을 추모하는 <Kim Kwang Seok>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다. 킴 크방 제옥이 노래는 유튜브에 공개되었는데 가사는 죽은 김광석을 찬양하면서 추모하는 내용이었다. 보러가기

이 노래 덕분에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김광석이라는 가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실제로 유튜브에서도 유럽에서 가장 많이 김광석의 영상을 클릭한 나라는 독일이다. 2010년에는 일본에도 김광석의 영상이 인터넷으로 소개되었는데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넘어서서 넷상에서 좋은 호응을 얻었다. 지금도 종종 유튜브에서 김광석 영상을 찾아보면 "한국의 커트 코베인"이라든지 "한국의 밥 딜런" 같은 외국인들이 남긴 리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광석은 우리나라에서도 매해 가장 많은 추모 콘서트가 열리는 가수 중 한 명이며 그가 출근하듯이 공연했던 대학로 쪽에 김광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성시경, 박효신, 타이거 JK, 김범수, 리쌍, 장기하 등 수많은 가수들이 아직까지 존경하는 가수이기도 하다. 가창력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면에서도 기억될 만한 사람인 데다가 그의 자살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기는 하나 어쨌든 공식적으로 음악적 고뇌 때문에 목숨을 버린 몇 안되는 가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수들 뿐이 아니라 국내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뽑힌 적도 있다. 가요를 전혀 듣지 않고 클래식 음악만 듣고 살았다던 소설가 윤대녕도 김광석의 노래를 듣자마자 빠져들어 그의 팬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 정이현도 김광석을 추모하는 글귀를 쓴 적이 있고 김경욱은 출판한 책에서 김광석에 관한 기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시인들도 종종 김광석을 추모하는 시를 쓰고는 했으며 유명한 여성 소설가인 신경숙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로 김광석이란 가수를 알게 되었다가 라디오에서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김광석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문학가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김광석의 노래에 가사를 써준 시인도 있는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사를 쓴 류근[17]이라는 시인이다. 정작 본인은 곡과 김광석의 유명세와 달리 조용히 지내다가 2010년 등단 후 첫 시집을 내면서 이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기도 했다. 정작 첫 시집엔 그 곡 가사는 없다.

6. 가창력

타계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감정 전달, 가사 전달 부분에서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본좌로 대접받는다.

김광석은 음반 녹음은 물론[18] 라이브를 할 때에도 놀랄 만큼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19] 김광석의 라이브를 듣고 가사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단어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지도 (예를 들면 바하의 선율이라든지, 양심의 금문자라든지). 김광석은 무척 편하게 노래하는 것 같은데도 그가 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부르는 가수가 얼마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김광석의 바이브레이션은 바이브레이션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기교를 위해서 목소리를 떠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울음을 참듯이 목소리가 떨리기 때문이다. 김광석의 그 창법은 따라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완벽한 모창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론.하지만 히든 싱어 김광석 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틀렸다(...) '서른 즈음에'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20] 같은 노래들을 김광석보다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전세계를 뒤져봐도 없으리란 말은 그저 농담으로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김광석의 가창력의 느낌이 궁금하다면 이리로 들어가 보자.
김광석 라이브 김광석 라이브 유튭

김광석은 1987년 노찾사 정기 공연에서 '녹두꽃'이란 곡으로 무대 데뷔했다. 이때의 영상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김광석 데뷔 무대 영상 목소리가 조금 앳되기는 해도 창법 부분에서는 이미 기반이 잡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단 음질이 좋지 않아 가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무척이나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지만 놀랍게도 술과 담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죽기 전날까지 거의 변하지 않는 가창력과 울림을 보여준 것을 생각하면 경악스럽기도 하다. 당연하지. 그래봤자 세상을 떠날 때 만 31세밖에 안되었다. 2014년 현재 81~82년생 가수와 또래 나이. 휘성, 박효신, 플라이투더스카이, 케이윌, 거미, 화요비 등. 목소리의 변화를 논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 물론 시대와 환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김광석이 가창력이 좋은 가수라는 점에서는 누구나 인정하나 가창력이 좋은 가수를 들라고 하면 김광석이 꼽히는 경우는 드문데, 이는 스타일의 문제이다. 김광석은 프로로 데뷔하기 이전에 오늘날의 연습생 시스템, 혹은 과거의 미8군 무대와 같이 혹독하게 트레이닝받은 적이 없었고[21] 주로 해왔던 음악 역시 포크 기타 반주에 따라오는 곡들이어서 커버하는 범위가 넓지 못하다[22]. 아주 정확한 발음과 호소력이 좋은 음색, 그리고 뛰어난 표현력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음정, 리듬감, 기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러나 기계적인 가창력에서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점으로 김광석의 위대함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가수가 표현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본다면 그가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는 가히 표현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음악, 나아가 대중예술이라는 범주는 대중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김광석은 그것에 있어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역에 다다른 예술가이다.

7.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

7.1. 노래

그의 음색과 그의 전반적인 음악색은 삶에 지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민중가수로 김광석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김광석의 음반을 혹평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그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기 그지없던 시절, 김광석이 처음 내놓은 음반은 (발라드, 댄스 가수 등이 내놓은 음악과는 색채가 전혀 다르긴 했으나) 사랑 노래 위주였고[23] 대부분 이 때문에 '변절자', '대중성만 추구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 그는 민주화 운동 시기의 음악을 리메이크해 음반에 수록했으며, 3, 4집에서는 리메이크를 넘어선 자작 명곡들을 본격적으로 쏟아내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히 해나간다. 당시 김광석의 곡들은 주제의 분화 또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김광석이 (하필) 이 시기에 비운의 가수로 세상을 떠나간 것 또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광석의 모든 노래는 기타 하나로 연주할 수 있는 포크송이라 세월이나 세대를 타지 않는다(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지). 말 그대로 10대부터 80대 노인까지 동감하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김광석 노래의 힘은 그의 이름을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11년 6월 즈음부터 SK 텔레콤에서 아이유와 듀엣으로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내용의 CF가 제작, 방영되고 있다. 링크 당연히 CG로 재현된 것.

김광석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서는 이 광고를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실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기보다는 싱어송라이터의 본좌인 김광석의 이미지에 편승해서 아이유를 그만큼 띄어줄려는 수작으로 보는 시선이 더 크다. 물론 아이유의 팬들로서는 기분 나쁠 수 밖에 없는 평가겠지만, 이런 류의 합성 CF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잡음처럼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2013년 김광석의 노래들을 기초로 한 뮤지컬 <그날들>이 대학로에서 초연되었다.

2013년 지산월드락페스티벌갠세이락페스티벌에서 미국의 유명 밴드 Weezer가 김광석이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된 '먼지가 되어'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한국 팬들에게 제대로 된 팬서비스였다는 후문보러가기

히든 싱어 시즌 2 12회는 김광석 편으로 꾸며졌다.
이미 고인이 된 가수였던 데다가, 당시 음반도 전부 아날로그 방식이었던지라 불가능할 듯 했으나, 제작진은 김광석의 음성을 디지털로 변환하는데 성공했다.

2014년 3월에 김광석 오마쥬 '나의 노래' vol 1,2,3가 발매되었다. 인디씬 아티스트들이 곡들을 재해석한 앨범이다. ###



2014년 5월에 아이유 다시부르기리메이크 앨범에 '꽃'이 수록되었다.

7.2. 도서

사진작가 임종진은 김광석 팬으로 유명한데, 2008년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사진을 포함한 김광석 화보집을 출간한 바 있다. 팬이라면 한 번 사서 읽을 만한 책.#
최근 김광석의 메모,편지등을 모아 만든 에세이가 출간됐다.

7.3. 뮤지컬

2013년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무려 3개의 김광석 쥬크박스 뮤지컬[24]이 초연되었다.

7.3.1. 그날들

(2013.4.4~6.30 대학로 뮤지컬센터 대극장)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 등으로 유명한 장유정 연출가의 작품. 장유정 연출이 최초로 발표하는 대극장용 작품이기도 하다. 장유정 연출 본인이 극본을 썼고 나는 가수다에 출연으로 유명한 장소영 음악감독이 참여했다. 유준상, 지창욱, 종혁, 정화, 태을 등이 출연했다.#

의도적으로 기존의 김광석 곡들을 완전히 뮤지컬 풍으로 편곡하고 매쉬업[25]했다. 실제로 이 뮤지컬을 직접 보면 김광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혼자 남은 밤'은 김광석 본인은 방에 앉아서 기타치면서 부르던 편한 노래인데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절대 김광석같이 편하게 기타치면서 부르는 게 아니고 부모님한테 '보내주긴 한다는데 슬슬 불안하다'라고 편지를 보내고서 부르는 노래이다.

한국 창작뮤지컬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장유정 연출답지 않게 스토리라인이 다소 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디셈버'보다는 훨씬 평이 좋다. 특정 인물이 돌아다니면서 전개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추억을 오남용한 '디셈버'와 달리 '그날들'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벌어지는 장대한 사건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에게 유린당한 20년전 '그녀' 관련 비화와 달리 하나의 단순 가출로 결론난 현재 시나리오가 흠이라면 흠.

작품집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장유정 연출은 이미 이 작품 이전에 김광석의 음악으로 만든 쥬크박스 뮤지컬을 준비한 적이 있다. 여러 번 재공연되고 있는 형제는 용감했다가 바로 그 작품. 그러나 공연 준비 단계에서 새 노래들을 작곡해서 넣는 것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7.3.2. 바람이 불어오는 곳

(2013.3.15 ~ 5.19 대학로 아트센터 K 네모극장)

소극장 뮤지컬로 김광석의 유족들과 팬클럽이 후원하는 작품. 최근 유행인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박창근 최승렬 박정권 등이 출연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가장 앞선다. 특히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김광석 노래들의 감성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7.3.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

(2013.12.19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 장진이 연출을 맡은 작품. 세 개의 뮤지컬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박건형, 김준수 등이 출연했다. # 가장 혹평을 받았다. 장진 특유의 연극적인 정서가 뮤지컬에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다수. 여주인공 이름은 또 화이[26] 무엇보다 스토리라인이 조잡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만나는 가수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김광석의 노래들은 삶의 진정성을 노래하는 것들인데, 이런 노래들을 싣고 흘러가기에는 줄거리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그런 주제에 또 김광석의 이름에는 지나치게 의존했다. 공연 초기에는 2막 시작과 함께 김광석이 홀로그램으로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로(...). 이 장면은 삭제되었지만 전반적으로 김광석의 노래를 적재적소에 써먹지 못한 경우가 반, 적재적소에 써먹었지만 줄거리와 인물이 감당을 하지 못한 경우가 반이라고 할 정도로 소화능력이 떨어졌다. 이 작품이 혹평을 받고 영화 하이힐마저 실패하며 장진 감독의 입지가 아주 위태로워졌다.

7.4. 남긴 것

유재하, 김현식 등과 함께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노래해줬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비운의 천재'로 평가받는 가수 중 하나이다. 물론 그의 예술적 재능이 우선된 이야기지만, 인품마저 겸비했으니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그를 본받는 가수들이 계속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만큼 존경받을 만한 가수이고 인물이었다.

김광석은 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로 포크 음악은 메이저로 치고 올라오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성과를 단지 포크라는 장르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그는 늘 소극장 무대를 고집하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길 원했고 결국엔 1000회라는 기록적인 공연 횟수를 달성했다. 또한 소박한 포크 음악에 애착이 깊었다. 김광석의 바이오그래피는 주류에서 밀려난 모던 포크를 살려내기 위한 혼신이 담긴 노력의 연속이었다. 끝까지 라이브와 콘서트를 고집했으며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가수 이적은 "콘서트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겐 가수의 원형처럼 남아 있다"라고 회고하기도.

2000년대 이후로 인터넷에서 본명이 아닌 익명으로 활동하는 시기에 이르고,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쿨하지 못하다는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김광석만은 까는 사람이 없다. 처음에는 그의 음악적 전달력에, 그리고 그 이후에 알게 된 그의 인품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공연 중간중간 남긴 이야기 또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사색을 담고 있어 호평. 그의 사후 발표된 추모 음반에는 아예 이 이야기 네 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중 '이야기 하나'에서 루저의 설움을 너무나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 얼마 전에 후배를 하나 만났는데 올해 갓 서른이에요.
"형." / "왜?" / "답답해." / "뭐가?" / "재미없어." / "아 글쎄 뭐가?" / "답답해."/ "너만할 때 다 그래." / 그 친구 키가 180이에요. / "형이 언제 나만해 봤어?" / "...그래 나 64다. 숏다리에 휜다리다. 왜?"

또한 그는 모터사이클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수록이 되어있다.

(...) 마흔 살 되면 오토바이 하나 사고 싶어요. 돈도 모아놨어요.
그 얘기를 했더니 주변에서 상당히 걱정을 하시대요?
"...다리가 닿겠니?"(...)
그거 타고 세계일주 하고 싶어요. 괜찮겠죠?

일부분만 잘라내서 이렇지 '이야기 하나'의 진지한 부분은 한 번쯤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내용이다. 이 부분은 EBS지식채널e로 제작되기도 했으니 한 번쯤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박찬욱2000년에 감독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등병의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가 OST로 삽입되었으며 영화의 히트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간혹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들이 가사에서 반복되는 '그대 잘 가라'를 제목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2007년에,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은 김광석의 출생지이기 때문에 김광석 벽화, 김광석 거리, 김광석 좌상를 비롯하여 김광석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관심이 있으면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8. 그가 부른 곡들

8.1. 1집 너에게

1. 너에게
2. 내 꿈
3. 그대 웃음소리
4. 슬픈 우연
5. 안녕 친구여
6.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줘
7. 기다려줘
8. 창
9. 그건 너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때문이야
10.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8.2. 2집 사랑했지만

1. 사랑했지만#
2. 꽃
3. 사랑이라는 이유로
4. 마음의 이야기
5. 나 하나뿐임을
6. 슬픈 노래
7. 그날들
8. 추억
9. 마음속의 풍경
10. 다시 아침

8.3. 3집 나의 노래

1. 자장가
2. 나의 노래#
3.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4. 나른한 오후
5. 외사랑
6. 나무
7.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8. 그대가 기억하는 내 모습
9. 행복의 문
10. 자장가

8.4. 4집 일어나

1. 일어나#
2. 바람이 불어오는 곳#
3.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4. 회귀
5.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6. 서른 즈음에#
7. 혼자 남은밤
8. 끊어진 길
9. 맑고 향기롭게
10. 자유롭게

8.5. 다시 부르기 1

1. 이등병의 편지#
2. 사랑이라는 이유로
3. 사랑했지만
4. 그날들
5. 너에게
6. 슬픈 노래
7. 거리에서
8. 말하지 못한 내 사랑
9. 그루터기
10. 기다려줘
11.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12. 그대 웃음소리
13. 광야에서

8.6. 다시 부르기 2

1. 바람과 나#
2. 그녀가 처음 울던 날#
3.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4. 잊혀지는 것#
5. 불행아#
6.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7. 내 사람이여#
8. 변해가네#
9. 새장 속의 친구#
10. 나의 노래#
11.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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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보통 김광석이라고 하면 가수 김광석을 의미하는 것이며 해당 문서에 링크되는 항목 또한 가수 김광석과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 [2] 네이버 지식인 답변에서 나온 명언.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자 김광석이라는 남자와 그의 음악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
  • [3] 중구 대봉동 태생으로 5살때까지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갔다고 한다.
  • [4]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삽입.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을 울리고 있다. 군대하면 생각나는 노래다. 이 곡이 김광석 개인에게도 의미가 큰데 그는 군에서 사고사한 형으로 인해 이등병으로 전역했다.
  • [5] 유튜브에 무슨 모금행사에 안치환과 함께 나와 노래 부르는 영상들이 있는데 안치환이 '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를 때 김광석은 바이올린을 주섬주섬 꺼내들고 연주한다. #
  • [6] 김광석曰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거다." 이 말이 반은 진담이었다고...
  • [7] 김창완은 이들의 음반을 작업하면서 '가수 이름을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라고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했다. 이화여대생들에게만 팔아도 어느 정도는 팔 것이라는 생각에, 즉 미약한 팬층이라도 확실히 확보하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만큼 그들 자신 또한 성공에 대한 기대가 미약했다.
  • [8] 동물원은 기본적으로 프로보다는 아마추어 지향의 밴드였고 가수는 부업 내지는 취미 생활이었다. 그러다보니 쉽고 편하고 듣기 좋은 곡을 지향하는 바가 컸고 김광석의 개성이 너무 돌출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김광석 본인이 우정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완전히 프로로 가기 위해 나왔다.
  • [9] 아래쪽에도 나오나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바로 3집 이후이다.
  • [10] 둥근 소리라는 뜻. 예전부터 김광석 팬클럽 네임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김광석 팬페이지 이름이다.
  • [11] 김광석은 그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에 대해선 생전 그가 남긴 언동을 통해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12] 생전 김광석이 자신의 곡들 중 가장 좋아했던 노래가 <일어나>와 <나무>였다고 한다. 반면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인 <사랑했지만>의 가사도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하면 계속 고백해서 이루면 되지 뭣하러 포기하고 돌아서느냐'며 내용을 탐탁지 않아했다고
  • [13] 절친한 친구였던 박학기는 그가 사망한 날 자신에게 '내년에 같이 멋진 공연 해 보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자살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고...
  • [14] 김광석의 딸이 상속하였음을 주장.
  • [15] 자신이 김광석을 대리하여 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계약할 당시 김광석으로부터 권리를 양수하였다고 주장.
  • [16] 아버지는 기존 4개 음반에 관한 권리를 갖고 부인은 라이브 음반에 관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상호 인정.
  • [17] KBS 역사저널 그날에 나오는 류근 시인이 바로 이사람이다. 14년 2월 9일 E16편에서 본인이 작사한걸 밝혔다
  • [18] 얼마나 정확하게 발음하는지 궁금하다면 김광석이 녹음한 "광야에서"의 가사에서 '흙이여'는 흔히 '흐기여'로 잘못 발음되는데, 김광석은 '흘기여'로 아주 정확히 발음한다. 언어 영역 듣기 평가 수준(...)
  • [19] 다만 '사랑했지만'을 부를 때는 후렴구에서 발음이 살짝 뭉개지는데, 부정확한 발음이라기보다는 감정을 많이 실어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20] 영화 클래식 OST에 사용되면서 영화에 너무나도 잘 매치되는 이 곡은 꽤나 주목받기도 했다.
  • [21] 이런 시스템의 경우 개성이 거세당하지만 기본기가 확고히 갖춰지고 개중에 천재들이 개성까지 잘 덧붙이면서 아주 뛰어난 가수가 나올 수 있다.
  • [22] 이 점이 김광석 이전의 포크 세대와 김광석 당시의 포크 세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 [23] 사실 사랑 노래 일색은 아니었는데 1집 앨범에서 유명해진 노래들이 대부분 사랑 노래('너에게', '기다려줘' 등)라서 이런 이미지가 생겼다.
  • [24]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미 발표된 곡들을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형식. 흔히 한 가수가 발표한 노래를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맘마미아!'(아바) 외에도 '올슉업'(엘비스 프레슬리), '위 윌 락 유'(퀸), '락 오브 에이지즈'(70년대 록 음악) 등이 있다.
  • [25] 두 곡 이상의 노래를 섞는 것.
  • [26] 사실 유화이라는 이름은 장진이 제일 많이 써먹던 여주인공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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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1 01: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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