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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

last modified: 2015-03-22 02:34:08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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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사건 이후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김대중.

Contents

1. 개요
2. 과정
3. 후폭풍
4. 창작물에서

1. 개요

유신 정권 시절에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 김대중해외에서 납치했던 사건.

일본에서 납치된 김대중이 닷새 후 동교동 자택 앞에서 발견된 황당한 사건. 과정을 보면 한 편의 블랙 코미디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인 양일동과 국회의원 김경인과 함께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 기무라(木村) 의원과의 약속장소로 출타하던 김대중이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 5명에게 납치당했다. 범행 현장에는 배낭, 휴지, 노끈, 취제 등의 유류품이 남아있었다.

2. 과정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한다.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가 손발을 다시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kg짜리 돌을 매달고 등에 판자를 대고 몸과 함께 묶었다.[1][2]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으며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 나갔고, 배와 비행기[3][4]가 서로 쫓고 쫓기를 30분 이상 계속하였다.

이러한 과정 끝에 김대중은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구급차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이 들었다. 잠이 깼을 때는 2층 양옥에 있었다. 다시 어두워지자 차에 태워진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저녁 10시 30분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5]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버린다. 이때문에 일본에선 주권 침해에 대한 비난여론이 대두, 한일 정기각료회의 연기나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이 취소 되는 등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된다. 결국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간의 절충 끝에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 방일 등에 합의, 사건 발생 86일 만에 끝났다.[6] 결국 주권침해, 중정의 관련설, 범인 출두 등은 사건의 진상과 함께 영원히 미궁속으로... 이런건 알면 다친다. 알 필요가 없다.

11월 2일 김종필이 일본을 진사 방문하여 "이번 김대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서 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박정희의 친서를 일본 수상에게 전달한다.

3. 후폭풍

사족을 달자면,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일본에 몰리게 된 한국의 수세 분위기는 이듬해 8월 15일 조총련재일교포 문세광(일본명 난조 세코)이 광복절 기념식장 에서 육영수를 암살하면서 역전되며 오히려 한국이 일본에 책임을 묻는 상황으로 전환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차피 한일관계가 경직되기는 피차 매한가지(...)

한편으로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 은폐하려는 의혹이 일었다. 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나 아무런 성과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 내사중지했으며, 다시 1년 후인 1975년 7월 21일 내사종결했고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자료를 보면 엄청난 범위를 수사를 한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찾은 증거는 전무.[7]

한편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을 살해할 의도는 전혀 없고 단순한 납치일 뿐이며 아니 겁만 줄거면서 왜 굳이 배를 태우셨어요?, 비행기의 실체도 부인했다. 하지만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인 조시환씨는 1994년 민주당 당사에서 양심선언을 하면서 비행기가 분명히 있었다고 했다. 또한 이후락의 인터뷰와 달리 호텔에서 발견된 유류품들은 당초 김대중을 호텔방에서 살해, 사체를 토막내고 피를 욕실 배수구로 흘러 보낸 뒤, 토막난 사체를 배낭에 담아 바닷 속에 버리려는 목적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용금호에서 범인들이 한 행동과 말들을 종합해 보면 김대중을 수장시킬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1974년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을 만났을 때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며 중정의 소행이라고 말했고,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중정부장에서 해임했다. 김종필은 1980년 3월 12일 아사히신문 논설주간에게 이후락이 납치계획을 세우고 미국 CIA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후락은 1980년 전 국회의원 이영근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락은 그 후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해 관계가 없다고 말을 바꾼다.

현재는 이 사건의 당사자인 박정희, 김대중, 이후락이 모두 사망하여 납치를 지시한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총리께서는 살아계신데도... 재일교포야쿠자인 동성회(조직)가 가담했다.

2014년 1월21일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미국 갔다 와서 CIA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개했다. 대략 다 항목에 있는 내용이지만서도.기사 보기

여담이지만, 전 주한미국 대사 부친인 김기완 공사가 여기에 관여했다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기에 성김 역시 미국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거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주한미국 대사는 다른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이러니 하게도 현 버락 후세인 오바마행정부에서 한인2세 최고위직 인사들-연방공공보건서비스부대를 대장을 겸해 지휘하는 차관보로 하워드 고가 있어 최소 2명임.-이 박정희와 악연을 가져 미국 국적으로 취득한 부친으로 인해 자신도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된 점이다.

특히 의 부친 김기완은 임택근의 매제로 즉, 에게는 외숙부가 되며, 손지창. 임재범은 외사촌과 고종사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임택근이 5.16 군사정변당시 박정희와 거리 인터뷰하는 사진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찌보면, 권력에 들어갈 입장임에도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 치부를 잘 들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4. 창작물에서


  • 납치 - 알려지지 않은 김대중 사건 - 카조노 에이스케

  • KT(영화) - 일본감독의 작품이라 그런지 일본자위대 장교 위주로 진행된다. 실제로 자위대 장교가 흥신소를 차려 중앙정보부를 도와 김대중의 거처확인을 해줬다고 한다.관련뉴스참고로 이 작품의 주연은 김갑수[8]. 음악은 호테이 토모야스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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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때 이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바다에 후카(상어)가 많던데" "솜이불을 씌어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 [2] 김대중은 뒷날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에 자신의 옆에 예수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소매를 붙잡고 기도를 했다고 말했다.기사
  • [3] 훗날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 비행기가 미국 CIA의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본인이 헬기의 로터 소리라고도 했는데 뭐 비행기나 헬기나.
  • [4] 당시 CIA 서울지부장이던 도널드 그레그가 감청 요원으로부터 김대중이 납치되었는 말을 듣고 직접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참고로 CIA도 따로 움직였는데 납치된 김대중의 소재를 24시간 안에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김대중이 납치된 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볼 것이기에 그 안에 찾아내라는 것. 결국 CIA가 김대중의 소재를 찾아냈고 관련 정보를 소지한 요원이 직접 청와대로 찾아가자 박정희는 앞에선 아이돈노를 외친 다음 뒤로는 풀어주란 명령을 했다고 하는 루머가 있었으며, 거의 맞는 내용으로 보인다. 참조 : #
  • [5] 지문을 남긴 것도 병맛이지만 더 병맛스러운 건 이 작자들이 호텔 주차료를 안 내서 호텔 직원이 "빠가도모!!!"하며 이를 갈고 차남바를 적었는데 나중에 이걸 조사해보니 한국 총영사관 소속 차량이었댄다. ㅎㄷㄷ.
  • [6] 이 과정에서 막대한 정치자금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1976년 3월 25일 미국무성 전 한국부장 도널드 래너드는 박정희가 대한항공 사장 조중훈과 국제흥업 사주 오사노를 통해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에게 3억 엔을 뇌물로 바쳐 사건에 대한 인멸공작에 성공했다며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의 비밀청문회에서 밝혔다.
  • [7]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당시 마포경찰서장 이흥세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 수사는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 [8] 김대중이 아니라, 납치사건의 주모자 김차운(실존인물인 김동운 1등 서기관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영화줄거리소갯글)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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