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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last modified: 2015-03-26 20:25:07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소설가 활동
2.3. 친일 행적
2.4. 광복 이후
2.5. 말년
3. 사후
4. 기타
4.1. 디스 소설의 대가?

1. 개요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金東文仁)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소설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호는 금동(琴童) 또는 춘사(春士)이다. 평양 출생.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히지만, 중일전쟁 이후 변절하여 각종 친일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친일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등을 썼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0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이자 기독교 장로였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기독교 계통인 승덕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기독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해 9월 다시 일본 도쿄술학교인 가와바타화숙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 되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문학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그")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1]

1919년 2월,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풀려났다.

2.2. 소설가 활동

1920년대부터 가세가 몰락하면서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광염소나타 발표. 또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돕는 젊은이들을 다룬 가상역사물 장편소설 '은 그들'을 연재했다.[2]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1938년 쯤에는 후백제이었던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견훤>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재출간도 이루어지지 않아 구하기 어려운 소설이 되어버렸다.

2.3. 친일 행적


1939년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중일전쟁이 한창일때, '황군위문'을 조직해 일본군 위문 가겠다고 자발적나서 중국전선으로 위문 갔을때 모습.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이후 변절하였다.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학수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겨 자랑스러웠다고 글을 썼다.(...) 이쯤 되면 예전에 붉은 산을 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같은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이후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그외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학병권유를 연재하면서 선동했다.

이 밖에 김동인은 친일소설이나 산문등을 여러편을 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그는 세월이 오고가는지도, 세상이 바뀌는지도 모르고 일제가 패망했다는것 조차 모른채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을 거절했다.

2.4. 광복 이후

8월 17일 임화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돼 있었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現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이래 반탁운동에도 적극활동하여 '반공투사 애국자'로 둔갑했는데, 여기서 박헌영여운형, 김규식신탁통치안에 찬성이나 신중론을 주장했던 세력들을 '매국노'라고 대차게 깠다.(...) 같은 해 11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를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연재.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일제강점기 저질렀던 수 많은 친일활동 행적에 대해 반성하기는 커녕 변명하는등 논조를 썻다. 그 주요내용은 "일제말기의 친일행위는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행위'"라고 자기 스스로 미화를 한 것이다.(...)

이 사람이 '백담비'에 관한 이야기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백담비는 자신의 하얀 털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흙탕물은 길을 돌아가는 수가 있더라도 피하지만 일단 한 번 더럽혀지면 자포자기하여 흙탕물에서 이리저리 뒹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김동인의 삶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2.5. 말년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났으나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북한인민군에게 심문을 받았다. 1951년 1월 하십리 자택에서 사망, 동네 이웃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묻어주었다.

3. 사후

1955년 '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3] 1956년 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이후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이후 사상계사가 망한 후 중단되었다가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김동인의 친일 논란에 가장 정색하고 반론하고 있다.

그밖에 제헌국회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의 이종사촌관계가 된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포함돼있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산하기구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 김동인의 친일행적을 인정하고 수록되었을때, 그의 아들이 이의제기를 걸었다. 이의제기를 건 근거가 '1942년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었던 것'을 제기한것인데,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위를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1944년 1월16~28일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을 10회 연재했고, 20일 ‘일장기 물결-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징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매일신보는 유일한 우리글 일간지로, 게재 횟수가 11회에 이르는 점 등을 비춰보면 김씨가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친일 행적을 마지못해 한 문인들이[4] 솔까말 문인 중에 친일 안 한 사람 찾기가 어렵다. 있긴 해도 이 인간은 중일전쟁 이후부터 친일행적이 너무 뚜렷해 도저히 옹호해줄 가치가 없다.(...)

소설로는 〈배따라기〉, 〈감자〉, 〈화사〉, 〈은 산〉,〈현궁의 봄〉,〈광염소나타〉가 있다.

4. 기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의외로 SF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K 박사의 연구는 먹어도 사람은 못 먹는 이것을 가공해 이런 식품을 만드는 내용(...). 유명한 작품들과는 다르게 유머가 살아있는 글이다.


4.1. 디스 소설의 대가?

인성이 아주 개차반이기로 악명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인 "발가락이 닮았다"의 경우에는 염상섭을 모델로 그를 디스한 소설이라고 악명이 자자했다. 염상섭이 발끈하자 김동인은 염상섭을 모델로 한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사과하긴 했지만 소설의 내용은 실화라는 뉘앙스를 은근히 풍겼다.[5][6]

그나마 발가락이 닮았다의 경우는 상대가 거물 문학가이기도 한지라 김동인이 조금 수그려서 넘어가긴 했으나 가장 치졸한 경우는 1939년부터 연재한 "김연실전"이다. 김연실전은 기생출신의 어머니를 둔 김연실이라는 주인공이 어머니의 '나쁜 피'가 끓은 나머지 어린애일때부터 일본어 개인교사와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어른이 돼서도 수많은 남성들과 육체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자유연애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파멸한다는 내용이었다. 하도 표현 수위가 너무 높아서 당시 사람들은 김동인이 야설쓰나요?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김연실전이 타깃으로 한 여성이 당대 저명한 여성 소설가 김명순이었다는 점이었다.[7] 김명순은 실로 어마어마한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8] 김동인은 이런 김명순에 대한 악성루머를 마치 사실인양 그대로 소설화 했다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김동인은 김연실전의 모델이 김명순이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나 염상섭에게 수그릴때와 마찬가지로 사실인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결국 김명순은 이런 오만 악성 루머와 디스에 시달리다가 일본으로 도망쳐서 결국 미쳐서 죽고 말았으니 김동인의 개차반 디스질의 최악의 피해자라 할만 할듯.[9]

친일파 동지 이광수와도 사이가 나뻤는데 이광수가 소설 <단종애사>를 쓰면서 수양대군을 까자 그에 반론하듯이 대수양이란 소설을 쓰면서 수양대군 찬양을 하며 정반대 생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광수는 내가 쓰면 반대로 생각하길 좋아하나? 라며 비꼬았다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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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녀"는 이광수의 작품이다.
  • [2] 그는 스스로 역사물을 고증성에 따라 역사소설, 역사담, ?, 야담 등으로 분류했다. 그의 소설에서 "운현궁의 봄"은 역사소설에 속하고, 젊은 그들은 "역사담"에 속한다고 한다.
  • [3] 사실 이건 좀 놀라운 일이다. 사상계는 당시에 진보적 매체였으니.. 황석영의 말에 따르면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가 김동인과 마찬가지로 서북 지역 출신이어서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것이라고.
  • [4]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같은 경우가 병상에 시달리고 먹고 살 문제로 억지로 친일행위를 해야했다. 20대 시절 총독부에서 일하던 적이 있지만, 알고 지내던 문학평론가 이갑기로부터 "드디어, 네놈도 개가 다 되었구나?라는 욕설을 듣고 당장 일자리를 때려친 사람이다. 그도 친일행적이 있지만 적어도 2차대전 와중에 가난과 질병 속에 시달리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해야했고 그 자신도 지인들에게 친일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말을 하던 걸 생각해야 한다. 그외에도 채만식같은 경우는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하는 의미로 '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역시 가난에 찌들어 폐결핵으로 사망. 평생 소원이 원고지를 넉넉하게 가져보는 것이었다고. 또한 현진건의 경우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대가로 가난에 쪄들면서까지도 문학가로서의 지조를 지키기도 했다. 서해 최학송(최서해)도 말년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맡았지만, 워낙 가난한 최서해였기에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의 문인들마저 욕하지 않았을 정도. 아니면 황순원처럼 친일글을 쓰니, 차라리 글을 발표하지 말자며 지내면서도 문학가로서 다른 지조를 지키던 이(그래도 황순원은 집안이 잘 살았기에 왜인들에게 알랑방귀 뀌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거꾸로 당시 부유층들 상당수가 별별 친일 활동을 하던 게 더 많다.(이를테면 화신백화점 소유주이던 친일파는 비행기를 몇 대나 사서 헌납하기도 했다.)들도 있지만 김동인은.....친일활동을 변명하고 나아가 미화하는 추태를 저질렀으니.
  • [5] 물론 이 사건에는 염상섭의 책임도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염상섭이 먼저 김억의 실화를 바탕으로 디스 소설을 쓰자 시인인 김억이 친구인 김동인을 찾아와서 친구야 난 시인이라 소설 못쓰잖니. 나대신 염상섭 새퀴좀 디스해주라라고 징징대면서 쓴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가 당시에 소문이 나 버린 것은 바로 그 김억이 술자리에서 실언을 해버려서였다고...
  • [6] 한편으로 이 소설 제목 자체가 염상섭의 작품 세계나 작가관까지 디스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 경향이 있는 소설'로 평가되는데, 김동인은 그 소설이 에밀 졸라 등의 서구 작가들의 자연주의 소설에 비하면 영 떨어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구 작가들 자연주의 소설이랑 비교하니 발가락 정도는 닮았던데? 라고 비꼬기 위한 의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것.
  • [7] 김명순의 아명이자 필명이 탄실(彈實)이었고, 어머니가 기생출신 소실이었다. 노골적으로 노린 설정이다.
  • [8]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며칠후에 그 남자와 연애를 했니 깊은 사이니 소문이 부풀려졌다고 할정도다.
  • [9] 사실 김동인은 평소에도 여자에겐 영혼이 없다라면서 극단적인 여성비하를 서슴치 않던 인물이었다. 그런 김동인이었으니 연애대장이니 뭐니 하면서 오만 악성 루머에 시달리던 김명순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법 하다.
  • [10] 사실 이광수도 단종애사를 통해서 단종편을 들고 수양 대군을 까다가, 다시 세조대왕을 쓰면서 세조를 편들고 노산군을 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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