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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

last modified: 2015-04-03 01:24:54 by Contributors


이름 김면(金沔)
지해(志海)
송암(松菴)
생몰 1541년 ~ 1593년
본관 고령
생지 고령
칭호 영남 3대 의병장, 임진왜란 3대 의병장[1][2]

Contents

1. 본문
2. 직위/사후 추증
3. 당시 조선군 병력 통계: 김면 생존 시기
4. 임진왜란
4.1. 의병도대장 김면(金沔)과 후기 의병 조직
4.2. 전투
4.3. 전투 목록
4.3.1. 척현 전투
4.3.2. 지례전투
4.3.3. 무계 전투
5. 인물들과의 관계
5.1. 스승과 동문
5.1.1. 남명 조식과 김면
5.1.2. 퇴계 이황과 김면
5.1.3. 곽재우
5.1.4. 김시민
5.1.5. 김성일
5.2. 제자와 부하들
5.2.1. 곽준
5.2.2.
5.2.3. 종도
5.2.4. 대로
5.2.5. 예원
5.2.6. 경남
5.2.7. 정번
5.2.8. 중룡
5.3. 기타
5.3.1. 배설
6. 유적과 유물
6.1. 송암실기
6.2. 간찰(편지)
6.3. 유적 성역화
6.4. 관련 문서
6.5. 관련 항목


1. 본문

김면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보통 송암 김면이나 김면장군으로 불린다. 본관은 고령이고 평생을 고령에서 보냈다. 성리학자이며 의병도대장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3] 의병의 관군화로 경상도의 의병을 총괄하는 위치까지 올라간다.[4] 금산과 개령으로 진주하여 선산의 왜군을 공격하려던 중 갑자기 병사했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

""다만, 나라있는 줄 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 " 只知有國 不知有身(지지유국 부지유신)"

1593년 3월 13일,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며 숨을 거뒀다.[5]

만석꾼이라고 불릴 정도의 많은 재산을 의병활동에 기울이는 바람에 남은 가족들은 문전걸식을 해야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면은 죽기 전까지 전장에 머물며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2. 직위/사후 추증

연도 월일 품계 내용
1592년(선조 25년; 壬辰年; 임진년) 6월 정4품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임명.
1592년(선조 25년; 壬辰年; 임진년) 9월 정3품 장악원정(掌樂院正)[6]에 임명.
1592년(선조 25년; 壬辰年; 임진년) 9월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
1592년(선조 25년; 壬辰年; 임진년) 11월 선조가 의병대장(義兵大將)의 칭호를 내리고 1도(道)의 군사를 통솔하게 함; 의병도대장[7]을 말함.
1593년(선조 26년; 癸巳年; 계사년) 1월 종2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
1593년(선조 26년; 癸巳年; 계사년) 3월 24일 정2품 사후 병조판서(국방장관)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
1607년(선조 40년) 정2품 선무원종(宣武原從)의 공으로 이조판서(내무장관) 추증.

3. 당시 조선군 병력 통계: 김면 생존 시기[8]


1593년(선조26년) 계사 /(명 만력(萬曆) 21년) 1월 11일(병인)까지 관군 vs 의병군 통계
관군 의병군
관군 순위 위치 이름/직위 병력 기타 의병군 순위 위치 이름/직위 병력 기타
1 울산군(蔚山郡)에 주차 본도 절도사 박진(朴晉)[9] 군사 25,000명 순위없음
2 경상우도 진주(晉州) 주차 본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 군사 15,000명 순위없음
2 창원부(昌原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김시민(金時敏) 군사 15,000명 순위없음
4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에 주차 본도 순찰사 한효순(韓孝純) 군사 10,000명 순위없음
4 전라도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수군 10,000명 순위없음
6 평양부 용강현(龍崗縣)에 주차 우방어사 응서(金應瑞) 군사 7,000명 사수 770명 순위없음
7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앞바다에 주차 본도 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수군(水軍) 5,000명 1 거창현(居昌縣)에 주차한 의병장 김면(金沔) 군사 5,000명
7 함경도 함흥부(咸興府)에 주차 본도 절도사 윤문(成允文) 군사 5,000명 순위없음
7 경성부(鏡城府)에 주차 평사(評事) 문부(鄭文孚) 군사 5,000명 순위없음
10 평안도 순안현(順安縣)에 주차 본도 절도사 이일(李鎰) 군사 4,400명 사수(射手) 1,280명 순위없음
11 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 전라도 절도사 (崔遠) 군사 4,000명 순위없음
11 연안부(廷安府)에 주차 본도 순찰사 이정암(李廷馣) 군사 4,000명 순위없음
11 수원부(水原府)에 주차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 군사 4,000명 순위없음
14 황해도 재령군(載寧郡)에 주차 우방어사 경로(金敬老) 군사 3,000명 2 경기도 창의사(倡義使)/의병장 천일(金千鎰) 군사 3,000명
14 여주(驪州)에 주차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 군사 3,000명 2 합천군(陜川郡)에 주차한 의병장 정인홍(鄭仁弘) 군사 3,000명
16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주차 본도 절도사 이옥(李沃) 군사 2,800명 순위없음
17 법흥사(法興寺)에 주차 본도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 군사 2,000명 사수 223명/포수(砲手) 50명 4 의령현(宜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군사 2,000명
17 양주(楊州)에 주차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 군사 2,000명 4 경기도 의병장(義兵將) 성전(禹性傳) 군사 2,000명
17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 주차 본도 순찰사 강신(姜紳) 군사 2,000명 순위없음
20 황해도 황주(黃州)에 주차 본도 좌방어사 시언(李時言) 군사 1,800명 순위없음
21 평양부 조방장 이사명(李思命) 군사 1,000명 사수 90명 6 창녕현(昌寧縣)에 주차 의병장 (成安義) 군사 1,000명
22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 군사 400명 8 양근군(楊根郡)에 주차 의병장 이일(李軼) 군사 600명
23 평양부 대동강 하류에 주차 수군장師將 김억추(金億秋) 군사 300명 사수 120명 9 평안도 의병장 이주(李柱) 군사 300명 사수 70명
23 안성군(安城郡)에 주차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 군사 300명 순위없음
23 평안도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 군사 300명 순위없음
26 안변부(安邊府)에 주차 별장(別將) 김우고(金友皐) 군사 100명 순위없음
26 함경도 조방장 김신원(金信元) 군사 100명 순위없음
기타 전라도 각처의 주둔군 조비군(措備軍) 10,000명 순위없음
기타 평택현(平澤縣) 등처 장관(將官)들 다수(각각 수백 명 군사 느림) 도합 3,000명 기타 평택현(平澤縣) 등처 의병들 다수(각각 수백 명 군사 거느림) 도합 5,000명

1593년 음력 1월 11일(병인), 조선왕조실록 선조 34권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의병장 김면의 군사는 5,000 명이었다.

4. 임진왜란

김면이 5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5월 11일, 그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28일만에 기병하였다.
연려실기술[10]에는 김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11]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문안 드리고자 하였으나 정인홍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하므로 면이 드디어 고령에서 군사를 모았다. 김면은 고령은 군세가 작다고 여겨 거창으로 달려갔는데 그때 거창의 선비와 백성이 이미 약간의 군사를 모아 가지고 있다가 합세하였다. 김면은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유중룡을 참모로 삼고 박성을 시켜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 4-5일 동안에 군사 2000명이 모였다.""

그는 임진왜란중 여러 달 동안 의갑(依甲)을 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1. 의병도대장 김면(金沔)과 후기 의병 조직

김면(金沔) 군의 후기 의병 조직[12]
직책 성명 거주지
의병도대장 김면 고령
의병좌장 곽재우 의령
의병우장 정인홍 합천
초유사(순찰사) 김성일 안동
초모유사 김응성, 정이례 고령, 고령
참모장서기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현풍, 거창, 고령
조군 종도, 김회 함안, 고령
전향 박성 현풍
왕래모획 이승 성주
선봉장 변혼, 김홍한 거창,
복병장 이형, 김선 함안
상도위장 김준민
하도위장 이광악 한성
중위부장 황응남, 민척 창원
중위장 서예원 김해
주의 권세춘 단성
사사 이죽
별장 정국상
위장 한응린, 이후경, 이도고
가장 권응성, 손인갑, 손승의 거창, 진주, 단성
성주 소모관 이홍우 고령
단성 소모관 권위
고령 가장 곽대성 해남
초계 가장 정언충, 진한언
초계 가수 현풍
소모관 한명윤, 박이명, 강절, 신수을, 문홍헌 , , 한성
외방장 전치원
군관 장응린 외 28명
의사 김영남 외 57명
친족의사 김회 외 7명

조선의 정부는 의병의 반란을 사전에 막기위해 의병을 관군화 시킨다. 그 계획의 중심에 김면이 있었다. 경상우병사로 임명된 김면은 경상우도의 관군과 의병을 총괄 지휘하게 된다.

4.2. 전투

김면은 처음에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중지하였다. 고령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김면은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면은 2,000여명의 대군을 모았다. 그는 명망있는 사족들에게 유사(有司)라는 직책을 맡겼다. 관군과도 협조하는 등 원만하게 의병을 운영했다.

그는 남명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을 이용하여 의명들을 모았다. 김면은 사족들이 상호간의 중첩적인 통혼을 하여 유대관계가 강하는 면도 직시하면서 서당이나 향교를 통한 교우관계 등을 바탕으로하여 백성들을 동원했다. 그는 의병을 지휘하여 거창·고령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전과를 거두었다. 또 관군과 연합하는 작전도 많이 벌였는데 적의 선봉을 지례에서 공격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면은 무계에서도 승전했으며, 후에는 성주·금산·개령 부근에서도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임란 다음년인 1593년에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김면은 왜군을 맞아 학연(學淵)·예천·문경 등지의 전투에서 연전 연승했다. 일본군은 김면을 몹시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진다. 왜군은 김면과 만나 싸우기를 꺼려했다. 왜군은 김면을 두려워하여 그 반대급부로 고령의 종친들의 상당수를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

"김면은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4.3. 전투 목록

4.3.1. 척현 전투

1592년 8월 16일, 임란초기 왜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김면, 정인홍이 싸운 전투이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암진 전투, 치 전투, 이치 전투에 이어 우척현에서 거창을 통과여 전라도로 진입하려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김면과 정인홍을 만나 크게 패한다. 이 전투를 끝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전라도 진입을 포기한다. 당시 김면측의 병력은 2,000명이었고 고바야카와측의 병력은 1,500명이었다. 당시 김면은 매복하여 고개를 넘어오는 적군을 상대로 3면에서 활을 쏴 격멸하였다고 한다.[13]

4.3.2. 지례전투

지례전투 일지
1592년 4월 25일 왜장의 우종대가 개령을 거쳐 김산에 침입하여, 김천역을 점령했고 같은 날 좌종대가 거창에 침입하여 합류했다.
5월 12일 여대로가 거창에 가서 현풍사람 곽준, 거창사람 문위와 함께 각읍에 기병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냈다.
곽준과 문위는 김면 휘하의 장수
6월 모일 김면 의병대장이 정인홍 의병대장과 성주성 공략을 계획하고 성을 포위 했다가 개령의 왜군이 내원하여 실패한 후 김면은 지례로 진을 옮겨 적의 거창침입을 막았다.
7월 19일 김면 의병대장이 초유사 김성일과 만나니 초유사는 김산, 지례의 적세가 창궐하여 거창을 침입할까 우려되므로 우두령을 지키도록 했다. 김면은 가장 손인갑으로 하여금 그 곳에 가게하니 정인홍이 이를 반대했다.
7월 20일 지례의 적이 또 우두령을 넘으려 하자 김면 군진이 두의곡역에서 적을 맞아 일전 끝에 군관 장응린을 잃었다.
7월 26일 김해부사 서예원이 의병을 거느리고 김면 휘하에 들어와 지례 지경에 매복해 적의 출현을 기다렸다.
7월 29일 김면 의병대장 휘하에 각 의병군 즉 중위장 황응남, 중위장 서예원, 지례현감 여대로, 의병장 권응성, 종사관 강절, 의병장 박이룡(김면 휘하 종사관)은 무풍에서 퇴각한 적이 지례향교 창고에 들자 이를 포위 했다.
8월 1일 지례전투가 벌어졌다. 김면 의병대장은 지례전에 대비해 두의목으로 진을 옮겼다.
8월 모일 김면 본진이 신창(거창군 운양면)에 주둔하고 지례 통로를 방어했다.
8월 25일 여대로, 권응성이 지례작전을 끝내고 김산으로 이전해 다시 화구를 준비 했다. 순찰사 김성일이 의병장 여대로와 부장 권응성의 선전을 조정에 보고했다.
9월 25일 김면 군(軍)과 김시민, 박이룡 양군이 합세해 개령에서 적과 싸워 10명을 참살하고 박이룡은 하로로 회군하였다.
10월 9일 김면 휘하의 전군이 성주성을 공격했는데 합천군수 배설[14]이 부상에서 개령의 적이 내원하는 것을 막으라는 김면의 명령을 어기고 막지 않아 크게 패했다.
12월 18일 인동인 장봉한이 왜군에 붙었던 승려 찬희(성주 금수면 적산사 주지), 상좌 수정을 잡아 대덕 두위곡에 있는 김면장군에게 끌고와서 이를 처형했다.
12월 19일 수일 전에 의병군 대장들이 개령 적진을 24일을 기해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바 의병대장 최경회(장수현감으로 상중에 창의했다. 논개 남편)가 성주성을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12월 20일 영동군수 최명윤, 의병 총대장 김면, 중위장 황응남, 개령현감 최기준, 김산군수 주몽룡, 황간 의병대장 박미룡 등이 회동하여 개령의 적진 공략을 24일로 확정하고 세부 작전을 수립했다.
12월 23일 호남 의병장 민여운이 김면 총대장을 찾아와 대구의 적이 대거 현풍으로 몰려왔다 하고 현풍인 곽율과 안음의 정유명도 와서 현풍 방어를 역설했다.
12월 24일 김면의 본진 병력이 2천명, 최경회와 민여운의 병력이 1천명으로 개령을 격파하려면 호남군은 거창 운현에서 지키고 김면은 무주와 거창의 경계인 수두를 경유하여 개령으로 진군하고, 삼산군과 김면 본진의 복병은 개령의 동산정에 올라 화열을 일으키고, 선장 김함, 정유금, 김몽령의 군진과 좌우 돌격장 등의 군병은 한꺼번에 개령 적진에 돌격하여 방화 또는 사살하고, 외곽의 모든 군사는 사면을 포위하여 한 놈도 남김없이 섬멸하기로 작전을 짜고 저녁에 맡은 세곳으로 행군했다. 김면 총대장은 이때 궁장(구성면 송중리)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한 위장의 심부름꾼이 와서 말하기를 호서와 상주병이 약속한 곳에 오지 않아 거사가 불가능하니 우선 호남병과 함께 개령의 적을 진 밖으로 유인함이 옳을 것이라 했다.
12월 25일 김면이 새벽에 상좌원(구성면)에 출진하니 민여운, 최경회 두 의병장이 와서 척후병의 보고라면서 왜군이 대거 김산으로부터 지례로 온다 하여 상좌원에서 이를 맞아 3전을 벌렸다. 전날 호남병이 웅치를 치고 개령으로 올 작전이었으나 적군이 웅치를 뛰쳐 나와 의병군을 먼저 포위하므로 서로 공방전이 벌어지고 쌍방간 10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또 이때 후원군 김충민 군진과 함양병 최운 남노(男奴)억복이 말탄 왜장을 사살했으며, 여대로와 권은성은 약속대로 상좌원에 출동하여 석현전에 참가했다.
1593년 1월 5일 순찰사 김성일이 거창에서 김면을 만나 개령의 적의 방어가 시급하다고 전했다.
1월 13일 개령의 적이 상주에 출몰하여 분탕질이 심하다는 보고가 있어 거창에 있는 김면의 군 가운데 50명을 그곳으로 보내어 일망타진토록 했다.
1월 24일 박이룡 의병장이 부상고개에서 적과 접전하던 중 왼쪽 다리 윗부분에 부상을 크게 입었으나 굴하지 않고 분전 끝에 10여급 참수의 전과를 올렸다.
2월 4일 성주의 적이 어디론가 도주하였으므로 지례에 들어 올것에 대비하여 김면이 지례로 나아갔다.
2월 8일 김면이 궁장에 하진하고 사람을 충청도에 보내 명군을 맞이 할 절차를 알아 오도록 했다.
2월 9일 김면은 하로(김천시 양천동)로 진을 옮겼다.
2월 12일 개령의 적군이 명군의 남하소식을 듣고 완전 철수했고 적군진에 갇혀 있던 개령 백성 3백여명은 살해되고 4백여명이 풀려났다. 이날 지례현감 여대로, 개령현감 최기준이 하로에 가서 김면 의병 총대장을 만나 개령의 수습책을 논의했다.
2월 16일 개령의 적의 낙오병을 추격하여 위장 황응남, 개령현감 최기준, 김산군수 주몽룡 등이 호남 의병과 협력하여 12명을 참수했다.
2월 18일 김면이 상도위장 김준민(거제부사)과 더불어 개령 적진을 시찰했다. 주위 8~9리에 목책과 담장으로 두르고 목책 안팎에 참호를 팠으며 판자문을 별도로 만들어 왜장의 거쳐를 따로했다.적진 동쪽 봉우리에 까마귀와 솔개가 어지럽게 모여 있는데 시체가 쌓여있었다. 적이 도망갈 때 부역한 남녀를 많이 죽인 것이다.동쪽 목책에 세사람의 목이 매달려 있었고 서쪽에도 한사람의 목이 달려 있었다.개령이 경상도에서 가장 적이 많았는데 그 수가 8만에 이르렀다함이 헛말이 아닌것 같다고 <김호문집>에 적고있다.
2월 23일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배설은 전에 성주성 공격시에도 개령의 적의 내원을 막으려 부상에 출전토록 했으나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 하고 의병 총대장 김면의 명을 불복한바 있었다.
3월 13일 김면 병사가 하로군진에서 병으로 순직했다. 그는 3월 초부터 병을 얻었으며 연일 군무를 강행하다 변을 당했다.

4.3.3. 무계 전투


5. 인물들과의 관계

5.1. 스승과 동문

5.1.1. 남명 조식과 김면

김면이 19세에 남명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은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3권에 있다. 다른 기록인 '남명선생년편'에는 1560년에 남명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는 서술되어 있다. 1560년에 남명은 60세였다. 그런데 남명이 덕산으로 이주한 것은 김면이 21세때 일이라고 한다.[15] 송암은 24세때는 율례지(律禮志) 2권을 지었다. 송암은 율례지를 남명에게 보여 수정을 구하였는데 남명이 이를 보고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송암연보는 전하고 있다. 김면은 28세때 재실을 짓고 남명에게 이름을 부탁했다. 이에 남명은 '송암(松庵)'이란 현판을 자필로 써 주었는데 김면은 이것을 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5.1.2. 퇴계 이황과 김면

1551년, 김면은 11살의 나이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배웠다. 1560년, 김면은 퇴계 이황이 있는 도산으로 찾아가 그의 정식제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20살 때의 일이다.

5.1.3. 곽재우

곽재우는 "영남을 보존할 분은 이 분 뿐이다" 며 그의 인품에 탄복하였다고 한다.[16] 김면이 죽은후 준관화된 의병을 곽재우가 이끌었다. 그리고 곽재우는 그 의병으로 정유재란을 맞는다.

5.1.4. 김시민

임진왜란 당시 김면은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우두령을 넘으려 한다는 정보를 습득한다. 의병장 김면은 진주목사 김시민과 함께 관병과 의병을 이끌고 산에 매복하여 왜병 1천500명을 급습하여 전투에서 승리한다.[17] 다른 문서에서는 김시민이 김면의 요청을 받아 병력 1,000여명을 이끌고 김면의 2,000여 병력과 합류하여 전라도 방향(랑암 ~ 금산)으로 내려오는 왜군을 맞아 승리했다고 전해진다.[18] 이 사건으로 김시민은 진주(목사대리)에서 진주목사로 승진한다.[19]

5.2. 제자와 부하들

5.2.1. 곽준

생몰 1550 ~ 1597
본관 현풍
양정
존재
시호 충렬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감찰사인 김성일의 천거를 받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라는 직책을 맡았다.[20] 존재실기라는 저서가 있다. 1957년, 정유재란 시기 곽준은 안음현감(安陰縣監)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체찰사 이원익은 당시 호남과 영남 사이의 요충지인 황석산성을 곽준에게 맡긴다. 세 고을의 군사를 모아 곽준에게 위임하였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맞서 싸우다가 석산성전투[21][22]에서 전사한다. 과거 김면의 부하였던 함양군수 조종도도 같은 날 황석산성에서 전사한다. 당시 안음 현감이었던 곽준은 식솔들이 계책을 청하자 죽음을 예감한 듯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겼다.[23]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운단 말인가.’"

5.2.2.

생몰 1554년(명종 9년) ~ 1631년(인조 9년)
본관 남평(南平,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출생지 거창(居昌)
순부(純夫)
모계(茅溪)
시호 충렬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김면이 병사하자 뒷일을 맡아 처리했다고 한다.[24] 임란후 동몽교관(童蒙敎官),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한다. 인조반정 뒤 공령현감이 된다.

5.2.3. 종도

이름 조종도(趙宗道)
생몰 1537년 ~ 1597년
본관 함안
백유(伯由)
대소헌(大笑軒)
시호 충의(忠毅)

1558년, 생원시에 합격한다. 이일로 안기도찰방이 된다. 1585년, 양지 현감이 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며[25]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생이다. 곽준과 함께 김면의 휘하로 들어가 우척현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곽준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맞서 싸우다가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사한다. 대소헌집(大笑軒集)이라는 저서가 있다.


5.2.4. 대로

생몰 1552년 ~ 1619년
본관 성주
위수 ·성우
감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26] 생존했을 당시 지례, 대구판관, 헌부지평, 합천군수 등의 관직에 있었다. 정자 응구의 아들로 남명 조식의 제자였다. 권응성과 함께 김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27] 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83년, 별시문과에 하여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임란 당시 공적으로 형조좌랑, 지평(持平) 등으로 올라선다. 1607년(선조 40년), 같은 지역에 거주하던 정인홍이 우의를 맺고자 하였으나 아래와 같은 시로 답하였다고 한다.[28] 참고로 김면과 정인홍은 김면이 살아있을 당시 사이가 안좋았다.

"“가야산 일찍 내린 서리에 닥나무는 말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듯한 더위 이 산중에도 이르네(倻山霜早 楮木盡枯 世間炎熱 亦到山林).”"

또한 여대로는 이이첨정인홍광해군을 옹립하고 변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광해군의 폐모를 반대하던 오장이 귀향가자 부채에 아래와 같은 시를 써주며 읊었다고 한다.

"“술병 차고 다리에서 옛 벗을 전송해도 타다 남은 풀 봄 오는 것 못 막네. 대장부 세상에 나뉜들 혀야 없으랴만 지사는 세상일 걱정해 몸을 돌보지 않았네. 복숭아꽃 오얏꽃은 훈풍에 생색을 내지만 소나무 대나무는 눈을 이고도 정신 새롭네. 큰 빛은 만고에 근원을 어둡게 못하는 법 머물러 바라보려네 구름 걷히고 옛빛 되살아 남을(佩酒橋頭送故人 燒餘殘草不禁春 丈夫在世誰無舌 志士傷時不爲身 桃李帶風生氣色 松篁擎雪更精神 大陽萬古元難晦 佇見雲收舊彩新).”"

5.2.5. 예원

이름 서예원(徐禮元)
생몰 1547? ~ 1593.6.29(선조26년)
본관 이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김면군의 중위장이었다.

1591년, 서예원은 김해부사로 발탁된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 초기에 김해부사로 있던 서예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죄로 삭탈관직 당한다.[29] 이후 김면에게 발탁되어 중위장으로 활동한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수성에 참여했다고 한다. 김시민이 죽자 당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순찰사인 김성일(金誠一)에게 발탁되어 진주목사로 천거된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왜군은 그의 수급을 김시민의 머리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하였다.[30] 서예원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해석으로 논란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 그를 재조명하자는 부류들도 있다.[31] 그를 김면의 정신적인 후계자 또는 직계부하급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32] 그를 재조명한 소설인 '주성 비가'라는 소설도 출판되었다.

5.2.6. 경남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5.2.7. 정번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5.2.8. 중룡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5.3. 기타

5.3.1. 배설

합천군수였으며 이순신원균의 부하인 인물이다. 일명 도망의 달인. 1952년 9월,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를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33]로 임명된 상태였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

참고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34]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 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35]로 승진한 뒤였다.

1597년 8월 28일, 경상우수사로 재직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명령을 무시하였다가 12척의 군선과 함께 살아남는다. 1597년 10월 25일, 아이러니 하게 배설이 대피시킨 12척의 군선은 이순신의 지휘로 들어가 명량 해전에서 조선을 구하게 된다. 1599년, 선산에서 권율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한다.

6. 유적과 유물

6.1. 송암실기

1772년(영조 48년), 한방윤(韓邦胤)이 도암서원에서 고령 김씨문중의 서책이 보관된 함을 발견한다.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김면의 시문과 일기, 문모계(文矛溪), 수서일기(手書日記)가 있었다. 한방윤은 이것을 채록한다. 이것을 최재억(崔載億)과 이회근(李悔根)이 제선생유집급문견신록(諸先生遺集及聞見新錄)에 수록하였다. 1774년(영조 50년), 현감 김수묵이 서문을 추가하여 1권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출간하지 못한다. 1785년(정조 9년), 김면의 후손이나 고령김씨들이 이것을 보충하여 정리하였다. 다른 정보로는 동 시기에 김상보(金尙普)의 발문과 현감 김중조의 서문이 추가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36]

6.2. 간찰(편지)

원문

連三日伏奉辱復 指揮之意 皆合事宜 益服爲國盡誠之義 無以爲謝 强賊未易爲滅 湖兵亦難爲倚 誠如令敎 區區妄料 已陣於前狀 今不復縷縷 湖南諸軍 皆爲盡往星州云 會同之期 恐未及來 而尙州亦許來援 深恐彼此日期相違不得擧事也 如果擧事 則敢不如令敎十分愼重耶 晉山炮手 亦如敎督送至仰 火藥乏絶 幷迎優下 皆在前狀所陣 伏惟令鑑 謹拜上答狀


壬辰臘月十九日 沔再拜

(음력(陰曆) 섣달을 달리 이르는 말. 곧 납향달(臘享-)

해석

사흘 동안 연이어 보내주신 답장은 분부하신 뜻이 모두 사의(事宜)에 합당하니,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의리에 더욱 감복하여 사례할 길이 없습니다. 강포한 왜적은 섬멸하기가 쉽지 않고 호남의 병사 또한 의지하기 어려움은 진실로 영감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구구한 저의 생각은 앞서 보낸 편지에 이미 전달했으니, 지금 다시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호남의 여러 군사들이 모두 성주(星州)로 간다하니, 회동할 기일에 미쳐 오지 못할까 염려스럽고, 상주(尙州) 또한 원조하러오기를 허락했으니, 피차간에 약속한 날짜가 어긋나서 거사를 도모하지 못할까 매우 두렵습니다.

만일 과연 거사를 도모한다면 감히 영감의 말씀처럼 십분 신중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진산(晉山)의 포수 또한 말씀하신대로 독책하여 보내주시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화약이 몹시 부족하니,아울러 넉넉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앞 편지에서 올린 말씀에 들어있으니,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삼가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임진년(1592, 선조) 12월 19일 면(沔) 올림(수취인 미상)[37]


6.3. 유적 성역화

김면장군 유적지의 일부인 도암서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 있다. 유적은 그외에도 신도비, 도암사당, 묘소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면장군 유적 성역화 조성사업 공사는 총 6천769㎡의 부지에 유적의 보수와 시설의 건립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09년 6월에 사업이 시작됐다. 공사는 약 2년의 기간이 걸렸으며 2011년 6 월에 완료가 됐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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