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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

Contents

1. 개요
2. 선수 생활
2.1. 체육교사가 꿈이었던 선수가 최대어가 되다
2.2. 삼성화재의 전설
3. 해설위원 시절
4. 감독 시절
4.1.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시절
5. 트리비아




이젠 말벌군단의 수장이 되었다. 그리고 팀컬러 때문인지 몰라도 이 분이 떠올린다는 얘기도 있다 카더라.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감독
김세진(金世鎭)
생년월일 1974년 1월 30일
출신지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학교 옥천고[1] - 한양대
포지션 라이트
신체사이즈 신장 197cm, 체중 83kg
소속팀 삼성화재 배구단/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1995~2006)
지도자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감독 (2013~현재)

V-리그 10주년 올스타
세터 센터 센터 라이트 수비형 레프트 공격형 레프트 리베로
남자부 최태웅 이선규 신영석 김세진 신진식 문성민 여오현
여자부 김사니 정대영 양효진 황연주 최광희 김연경 김해란

1. 개요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감독이자, 대한민국 배구의 한 시대를 풍미한 명 공격수. 1974년 1월 30일 충청북도 옥천군 출생.

장윤창의 뒤를 이은 국가대표 라이트였다. 전성기 시절 FIVB 월드리그에서 공격수 상을 받은 것으로 인해 별명은 예나 지금이나 월드스타. 다만 그렇다고 진짜 월드스타인 건 아니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국내급 선수인 건 변함없다.

삼성화재의 무적 전설을 이끌었던 선수이자, 국가대표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리고 곱상하고 잘 생긴 외모로 인해 인기도 많았던 선수였다.

2. 선수 생활

2.1. 체육교사가 꿈이었던 선수가 최대어가 되다

고향은 충청북도 옥천으로 어릴때는 완전 약골이라 몸이 약하기로 유명해서, 오죽하면 초등학교 시절 아침 조회때 운동장에서 쓰러지곤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부모님의 권유로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육상을 방과 후 활동으로 시작하고 이후 높이뛰기를 하다가 소질을 발견한 학교 배구 감독의 권유로 배구 선수로 전향하게 된다.

하지만 유년 시절에 배구계에서 김세진의 이름은 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 세터에 지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들어서면서 15개월 만에 키가 21cm나 성장해 오늘날 197cm의 장신이 되어 공격수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월등한 신장을 바탕으로 고교 무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라는 평가는 받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꿈은 선수로 명성을 날리기보다 그냥 대학교에 들어가서 체육학과를 무사히 졸업한 후 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고향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는 것이었고, 한양대학교로 스카우트되어 입학했을 적에도 그 생각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한양대학교 1학년 때 그를 스카우트한 한양대학교송만덕 감독이 왼손잡이가 될 것을 권유했고, 김세진이 이를 따르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재능을 알아본 송만덕 감독과 재구 코치[2]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왼손잡이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김세진은 왼손잡이라는 이점에[3] 키 2m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앞세워 대학 2학년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기 시작했고, 배구의 명가 한양대학교의 자존심을 잇는 선수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94년 월드리그에서 공격성공률 1위를 기록하면서 공격상을 받은 이후부터 그의 별명은 일약 월드스타가 되었고,[4] 이는 1995년 월드리그에서 대한민국을 사상 처음으로 6강 결선에 올려 놓은데서 절정에 달했다.

당연히 모든 실업 팀들이 군침을 흘리던 스타였는데, 애당초 그를 둘러싼 스카우트 전쟁은 이미 LG화재의 승리로 끝나서, 대학 동기인 홍익대학교 센터 구준회와 함께 LG화재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1995년 삼성화재가 배구 팀을 창단하면서 우수 선수를 주지 않으면 창단을 철회하겠다는 강짜를 부린 행동으로 인해 김세진의 진로는 LG화재에서 삼성화재로 극적으로 변신하게 되었고, 그렇게 김세진은 삼성화재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2.2. 삼성화재의 전설

삼성화재의 유니폼을 입은 첫 해에는 선수가 부족하다고 쓰고 꼼수라고 읽는다는 이유로 슈퍼리그에 불참하며 한 시즌을 공으로 날렸지만, 일단 참가한 이후부터는 최강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97 슈퍼리그 우승으로 시작된 삼성화재의 독재는 V-리그 원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중심에는 김세진이 있었다. 혼자 있어도 우승을 노려볼 수 있었을텐데, 여기에 신진식, 김상우, 최태웅[5], 지섭 등까지 가세한 삼성의 전력은 워낙 막강했다. 물론 삼성화재의 창단 후에도 스카우트를 싹쓸이하는 등, 전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이를 아주 폄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세진의 활약상은 한양대학교 시절의 명성에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만 포지션이 겹쳐서 잉여콩라인이 되 버린 장병철은 지못미(...)

V-리그 2005-06 시즌을 마치고 은퇴할 때까지 김세진은 삼성화재의 9연패를 이끌면서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3. 해설위원 시절

은퇴 후 2007년부터 KBS N 스포츠KBS 본사 배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역시절에도 달변가로 유명했던 김세진은 해설위원으로서도 그의 말솜씨가 빛을 발했다. 경기 상황 전달, 선수의 기술적·심리적 부분을 상세히 전달하며 호평을 받았다. 다만, 다이내믹한 걸 원하는 팬들에게는 김세진의 상대적으로 하이톤인 목소리에 차분한 전달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래도 은퇴 뒤 방송생활에 완벽히 적응하는 김세진의 모습은 명 해설가를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김세진 입장에서 운도 따랐던 것이, 처음 해설위원으로 데뷔할 때 마침 배구 중계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 유수호 캐스터가 KBS 본사에서 정년 퇴임을 한 직후라 프리랜서 자격으로 KBS N 스포츠에서 중계를 맡고 계셨을 때였다. KBS N 측에서는 아직 해설에 서툰 김세진을 배려하여 처음에는 거의 이 두 레전드하고만 중계하도록 배정해 줬다. 배구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방송계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이 두 캐스터와 중계를 계속하면서 언제 어떤 말을 하면 좋은지와 같은 중계의 노하우를 빠르게 터득할 수 있었고 그것이 명 해설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해설위원의 경험 때문인지 감독이 된 이후 승장 인터뷰 때 김세진 감독 자신이 경기 총평을 하며 인터뷰를 리딩한다 카더라. 더구나 리포터 없이 헤드셋 쓰고 인터뷰하면 완전 해설자 모드라 카더라. 그런데 여자부에도 이걸 따라하는 분이 나타난 것 같다? 응?

4. 감독 시절

4.1.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시절

그러던 2013년 4월 러시앤캐시가 2012-13 시즌 드림식스의 스폰서십을 해주면서 엄청난 광고홍보효과를 얻었다. 드림식스 인수전에서 우리카드에 밀린 후 러시앤캐시가 KOVO로부터 신생 팀을 창단하겠다면 지원해 주겠다는 입장을 듣자 이왕 내친 김에 배구 팀을 새로 창단하기로 했고, 창단 감독으로 김세진을 선임했다.[6] 다소 의외의 결정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김세진은 러시앤캐시의 감독 내정 이전에도 여러 팀들로부터 감독직을 추천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동기인 김상우LIG를 이끌 때 선수들과 마찰이 있었던 것[7]을 보면서, 팀 컬러를 만들기 쉬운 신생팀의 감독으로 가기를 원했다. 마침 기회가 생겨서 신생 팀 감독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부업체 이미지 때문에 고심했다고 한다.

김세진은 선수도 없고 코치도 없는 상황에서 이름뿐인 감독으로 한동안 지내다가, 현역 은퇴를 선언한 석진욱을 곧바로 수석코치로 영입했다.[8] 이후 신인 드래프트 및 각 구단 보호선수 외 전력보강선수 선발을 통해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시즌을 준비했다. 마침 러시앤캐시의 최윤 구단주가 경기대학교 11학번 3인방(이민규, 송명근, 송희채)을 영입하는데 통큰 결정을 하면서 시즌 준비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2013-2014 시즌 들어서 러시앤캐시를 뺀 나머지 6개 팀과의 대결에서 적어도 1번씩은 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거기에 목표 달성이 되면 내친 김에 시즌 10승까지 가겠다는 2차 목표도 세웠다. 신생 팀으로서는 다소 버거울지 모르는 목표일지도 모르고, 실제로 개막 이후 8연패를 당하며 위기설도 있었지만, 연패 기간 중 팀 단합 차원에서 번지점프를 뛰러 다녀오기도 하고 형님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다독이면서 팀을 이끌었다. 특히 1~2라운드 때 헤매던 외국인 선수 르파드 바로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며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해주기도 했다. 결국 2013년 12월 5일 2라운드 중 안산 홈 경기에서 LIG를 상대로 3-0 셧아웃 경기를 만들어 내며 창단 첫 승을 신고했다. 선수들이 홈경기 승리 때 댄스 세리머니를 한다든가 하는 독특힌 팀 컬러를 만드는데도 김세진 감독의 배려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작전시간 때 김세진 감독의 카리스마가 빛을 보는데, 플레이가 안 풀리는 상황에 선수들에게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왜 안 되는지, 어떻게 하면 상황 반전을 할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작전지시를 하며 베테랑 감독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예로, 2014년 2월 9일 친정 팀 삼성화재와의 대전 원정경기에서 3-0 셧아웃 승리를 잡아낸 경기에서, 3세트 삼성화재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던 22-22 동점인 가운데 경기를 매조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김세진 감독은 경기를 잡기 위해 타임아웃을 부르고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린 장면은 배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1:17 경 참조

김세진 감독 : 자, 지금부터 들어. (이번 세트) 마지막까지 서브 맞춰 넣지 마. 전략서브 넣지 마.[9] 에러 나도 내가 책임 져. 무조건 (강서브로) 패! 하나도 안 들어가도 상관없어. 무조건 패!

이 때문인지 유튜브 SPOTV 페이지에서는 아예 김세진 작전모음 클립이 따로 있기도 하다. 오오.

다만 홈 마지막 경기를 포함한 막판 몇몇 경기에서 1군을 선발로 내고 한 세트 직후 바로 1.5군급 선수들을 넣는 식으로 경기를 해서 조작하냐며 까였다. 물론 주전들의 체력 비축 및 다음 시즌 준비를 위해 몇몇 선수들을 실험하는거라 보면 될거 같지만, 기껏 직관하러 갔던 홈팬들한테는 그저... 하기사 2시즌 전의 악몽이 생각나는 행동이긴 했다. 그런데도 2승을 거둔 건 흠좀무. 그리고 팀의 제 3세터인 천재의 안습한 세팅을 승장 인터뷰 때 직접 언급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근데 이미 천재는 한국전력에서도 이미 춘삼 감독이 공격수로 전향시키려 할 만큼 세팅 능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닌 듯하다. 김천재가 원 포인트 서버로 기용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담으로 보통 감독들은 작전타임이 끝난 뒤 파이팅 구호로 팀 이름을 외치곤 하는데, 김세진 감독은 "앞으로"를 외친다. 패기있게 앞으로 진격하자는 의미에다가,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모기업 이름이 아프로파이낸셜그룹이라는 점도 포함하는 중의적인 표현인 듯.

2014-15 시즌에는 쿠바 국가대표 출신의 '시몬스터' 로버트랜디 시몬경기대학교 3인방이 팀 내 주력으로 자리잡으며 정규 시즌 2위를 기록, 플레이오프에서 한국전력을 제압하며 창단 2년 만에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은사가 이끄는 삼성화재를 3연승으로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레깅스 입고 위아래 춤추기 공약이 남아있다(...) 우승 보너스가 달라질거라는 김세진의 말에 모든 선수들이 나와서 혼자서 춤추는 부끄러움은 면했다. ## 한편, OK저축은행의 챔피언결정전 우승 이후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세진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우승과 스승 신치용 감독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왜 김세진 감독이 준비된 감독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5. 트리비아

  • OB 베어스 야구선수인 김형석의 소개로 전 체조 국가대표 선수였던 구나연과 열애, 1999년에 결혼했으나 2004년에 합의 이혼했다. 이후 홀로 지내다 현재는 前 흥국생명에서 선수 및 프런트 생활을 했던 8세 연하혜지와 사귀고 있는 중이다. 연애 사실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김세진 자신의 이혼 경험 때문인지 함구하다가, 몇몇 인터뷰에서 조심스럽게 상대를 밝힌 뒤에는 진혜지가 배구장에 자주 오는 장면이 중계카메라에 여러 번 잡히고 있다. 가끔은 김세진의 부모, 즉 예비 시부모와 나란히 앉아서 관람하는 경우도 있는걸로 보아 이미 집안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인 듯. 한번의 실패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결혼은 좀더 신중히 준비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고등학교에 진학할 당시 옥천공업고등학교에 가게 된 이야기가 재미있는데, 당시 충북 지역의 배구부가 있는 학교로 제천시 광산공업고등학교(현 제천산업과학고등학교)가 있으며, 충북이 아니라도 가까운 곳으로는 대전중앙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많은 선배들이 있고, 대학진학이 비교적 쉬운 광산공업고등학교를 가라고 권유했으나, 용의 꼬리가 될 바에는 닭의 머리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옥천공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선언한다. 당연히 학교나 집에서 난리가 난 것은 안 봐도 비디오. 그런데 그렇게 선언한 건 당시 중학교 선배들 중 많이 갈구거나 때리는 선배들이 광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그 선배들을 다시는 만나기 싫어서 옥천공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한 거라고.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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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재학 당시는 옥천공업고등학교였으나 이후 옥천고등학교에 통합.
  • [2] 신영철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 감독대행을 맡았던 그 사람 맞다.
  • [3] 사실 당시 한양대학교의 시스템을 볼 때, 김세진이 들어갈 자리가 라이트 외엔 딱히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양손을 다 쓸수 있던 김세진을 왼손으로 돌린 것으로 보인다. 김세진이 막 입학자 신분으로 대통령배에 뛰었을 당시에는 레프트는 강성형(89학번, 현대자동차)과 이병희(91학번, 고려증권 → 한국전력), 센터는 장홍석(89학번, LG화재)과 윤종옥(90학번, 대한항공) 등 선배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김세진은 자연적인 왼손잡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특이한 스타일이었다. 국대 후계자였던 장병철의 스파이크 궤적과 비교해보면 확연해지는데, 왼손잡이 선수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역회전볼도 없었고 크로스보다는 직선 공격을 주로하는 어떻게보면 손만 왼손으로 바꾼 오른손잡이 라이트의 그것과 유사했다. 그것이 오히려 김세진의 높이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이 때문에 나쁜 토스의 처리는 월드스타 공격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좋지 않았다. 나쁜 토스를 처리할때 흔히 말하는 홈런볼이 잦았던 편.
  • [4] 1994 월드리그 최우수 공격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당시는 최종 라운드에 오르지 못한 팀의 선수라도 조별 라운드에서 거둔 성적이 말소되지 않고 그 기록 그대로 대회가 끝날 때까지 적용됐다.
  • [5] 여기까지 6인제 구기종목인 배구 국대 주전 라이트, 레프트, 센터, 세터(...) 다만, 신영철의 위치를 그대로 물려받은 최태웅이나 장윤창의 자리를 이어받은 김세진과 달리 신진식박희상이라는 신영철과 조합이 더 좋은 올어라운드 플레이어가 있었던 관계로 확고한 주전이었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신영철 시대 이후 같은 팀의 최태웅이 국대 주전 세터가 되자 '삼성화재 전위=국대 전위' 공식이 완성되어 버린다.
  • [6] 이 당시 김세진은 '장난하나'라는 생각을 했다고한다(...) 자기는 코치경험도 없는데 감독제의가 왔으니..
  • [7] 김상우가 본인의 삼성화재 시절에 했던 새벽 훈련을 LIG에 도입하려다 선수들의 반발에 못 이겨 접었던 적이 있었다.
  • [8] 당시 석진욱은 무릎 때문에 계속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치용 감독이 계속 은퇴를 만류하여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신생 팀에 감독으로 갓 취임한 김세진은 코칭스탭으로 석진욱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신치용 감독에게 요청하여 석진욱을 코치로 영입할 수 있었다.
  • [9] 세트 후반부에 볼 수 있는 전략으로, 무리한 공격적인 서브 대신 상대의 리시브 라인을 흔드는 목적타 서브 내지는 서비스 성격의 안정적인 서브를 넣어 상대 공격을 받아낸 뒤 다음 공격을 노리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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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7 1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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