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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last modified: 2015-03-09 01:25:56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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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35.14 KB)]
이름 김완선(金完宣)
본명 김이선(金利宣)
출생 1969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
신체 162cm, 44kg, B형
학력 하와이 대학교 디지털아트학과
데뷔 1986년 1집 앨범 '오늘밤'
가족 이모 한백희
소속 폴라리스 엠넷
종교 개신교
페이스북

최불암도 무섭다 했던 그 눈의 소유자

몸짓으로 음표를 그려내는 대한민국가수.

Contents

1. 특징
2. 이력
2.1. 1985년~1989년: 충격적인 데뷔와 성장기
2.2. 1990년~1995년: 최전성기와 전격 은퇴
2.3. 1996년~2005년: 복귀와 시련기
2.4. 2006년~ : 유학과 활동 재개
3. 기타
4. 이모 한백희와의 인연

1. 특징


한국 최고의 여성 댄스 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표현해내는 춤 실력으로는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실력은 2011년 기준으로도 건재하다.[1] (영상보기)

가창력 부분은 데뷔 당시부터 여러 안 좋은 말이 있었지만 이후 꾸준히 노력을 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안 좋은 말을 들었다 해도 당대에 인정받은 다른 여가수들과 비교해 그렇다는 거지 가창력 지적 받는 90년대 후반 이후의 아이돌 여가수 수준인 건 아니다.[2] 그래도 1집 시절부터 종종 라이브로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립싱크 모드일 때는 화려하기 그지 없는 춤을 선보이는데 비해 라이브 때는 정적인 동작만 보여줬다. 그러다 최고 전성기인 5집에 이르면 립싱크 때만큼의 화려한 춤은 아니라도 춤과 자연스러운 라이브 노래를 동시에 선보일 정도에 이른다.

가창력과는 별개로 인정받았던 김완선의 장점은 살짝 중저음이 있는 음색. 김창훈이 프로듀서를 맡았던 2집 시절에도 타이틀로 내세웠던 곡들 이외의 노래들을 보면 김완선의 음색을 살리려한 노래들이 많았고, 이장희가 맡았던 3집의 경우에는 너무 음색 쪽을 살리려다 김완선의 댄스가수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 손무현은 5집에서 김완선의 음색과 댄스가수로서의 능력을 합칠 수 있는 곡들을 만들어냈고 결과는 대박으로 이어졌다.

댄스가수임에도 앨범은 록음악 관련 인물들과의 접점이 많다. 박광호, 김창훈, 박청귀, 손무현 같은 인물들은 전부 록음악을 기본으로 했던 사람들. 그래서인지 앨범들을 들어보면 잘 소화해 냈는가 하는 점은 살짝 논외로 치고 이런 곡을 김완선이 불렀나 싶을 정도로 록음악 성향이 강한 곡들이 곳곳에 있다. 뿐만 아니라 김완선의 히트곡들에서도 보통 댄스곡과는 달리 내지르는 듯한 창법으로 부른 부분들이 나오는 건 저런 앨범 관련 인물들 때문. 한데 1,2집 시절의 록음악 성향 곡들은 김완선의 가창력에 대한 평가를 깎아먹는데 일조한 면도 있다. 당시 곡들이 김완선이 가진 가창력 이상의 고음을 요구한 탓에 고음을 내기 위에 목을 쥐어짜다 음이 툭툭 갈라지는게 노래에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3] 그래도 4집 정도에 이르러선 록 성향 곡도 적당히 소화해냈다. 이런 록음악과의 접점을 보면 2011년의 신곡인 수퍼러브가 록 스타일인 것도 뜬금없는 건 아닌 셈이다. 월간 윤종신 2012년 3월호에 수록된 록 발라드곡 '널 사랑해 오늘따라'에서 보컬을 맡았는데 이 또한 호평을 받았다.

2. 이력

2.1. 1985년~1989년: 충격적인 데뷔와 성장기

인순이의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를 통해 1985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백댄서로 연예계에 발을 들인 후, 1986년 1집 '오늘밤'을 발표하며 단번에 인기 가수로 자리 잡았다. 데뷔 당시 나이는 겨우 만 17세.
'오늘밤'의 여러 무대를 편집한 영상

그녀의 춤과 퍼포먼스, 의상과 표정 연기 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였기에 한국의 마돈나라는 수식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완선 1집은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음악적인 완성도도 괜찮은 편이었으며, 이는 조용필의 백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박광호가 프로듀서를 하고 산울림의 멤버인 김창훈이 전곡의 작사 작곡을 맡았기 때문.

1년 후 낸 2집은 김창훈이 작사 작곡만이 아니라 프로듀서까지 맡아 만들어진 앨범으로 2년차 징크스 없이 <나홀로 뜰앞에서>와 <리듬 속의 그 춤을>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2집은 일단 김창훈이 프로듀싱을 맡아 만들어낸 2집이 나온 후, 2집의 곡 중 하나인 <충격>이 빠지고 신중현이 작곡한 <리듬 속의 그 춤을>이 들어간 다른 버전이 다시 발매되는 형태로 나왔다.
1987년 11월 둘째주 토토즐 오프닝 영상. 부탁해요

1988년 3집은 이장희가 프로듀싱한 음반으로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웠고, 이장희의 히트곡인 '그건 너'를 댄스풍으로 리메이크해 수록하면서 좀 느리고 엉성하지만 최초의 랩을 선보인 앨범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완선의 인기는 여전했어도 앨범 자체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이 무렵 김완선은 그냥 춤만 잘 추는 가수가 아닌 창력 있는 가수로 변신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말을 기회가 될 때마다 했는데, 이를 위해 전인권에게 거액을 주고 컬 트레이닝을 받은 일도 있다. 이게 원래는 보컬 트레이닝만이 아니라 4집 앨범 자체를 전인권과 작업할 계획이었던 건데, 전인권이 보컬 트레이닝 시킨다고 온갖 기행을 시킨 때문에 도중에 결별, 결국 보컬 트레이닝만 받은 상황이 되었다.

1989년 4집은 90년대 들어가면서 스타 작곡가가 된 광훈이 프로듀서를 맡는 한편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이름을 날린 기타 연주자 박청귀가 참여한 앨범으로, <기분 좋은 날>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4집 활동 시기에 김완선은 오디오 가수로 변신한다며 손무현, 윤상, 이승호, 변준민으로 구성된 실루엣이란 백밴드와 함께 방송 활동을 했고, 이 때문인지 4집의 경우 유독 다른 앨범들과 비교해 곡들에서 연주가 튀는 편.
한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성숙함과 섹시함을 앞세웠던 앞선 앨범들에서의 활동에 비해 나이대에 걸맞는 발랄함을 내세우는 변화 또한 있었다.
4집 당시의 영상. 핸드싱크 중인 윤상과 손무현의 모습도 보인다.

2.2. 1990년~1995년: 최전성기와 전격 은퇴

4집 때까지 김완선은 최고 인기 여가수 하면 언제나 빠지지 않았고 오빠부대의 대두 속에 여성 가수들의 영역이 좁아지는 와중에도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강렬한 한방으로 한 시기를 사로잡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1990년 5집에 이르러 마침내 김완선은 모든 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4집에서 실루엣의 멤버로 김완선과 인연이 닿은 손무현이 프로듀서와 작곡을 도맡아 만들어낸 5집은 앨범 녹음을 미국에서 해올 정도로 준비부터 기합에 차 있었으며, 김완선은 교통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MBC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 <여러분의 인기가요>에 얼굴에 거즈를 댄 채 출연해 라이브로 노래를 소화하는 열정을 보였고, 결국 김완선은 콩라인을 벗어나 가수 활동 사상 처음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다.
김완선에게 처음으로 1위의 영광을 준 노래인 <나만의 것>

1991년으로 넘어와 후속곡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활동이 이어졌고, 엄청난 인기로 김완선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다.
뒤이어 <가장무도회>까지 총 세 곡이 연달아 히트하며 김완선 5집은 1991년 내내 팔려나갔고, 덕택에 100만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린다. [4][5]이 시기 김완선은 1집 때부터의 이미지인 섹시함을 앞세운 무대를 보이는가 하면 발랄함으로 가득한 무대를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모습을 번갈아 보여줬으며, 여자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소녀팬들에게도 인기가 높을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인기를 얻었다.
결국에는 당시 연말 가수상 중 가장 권위 있다는 평가를 받던 MBC 10대 가수에 처음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6] 10대 가수 선정 당시 지지도를 보면 남성팬보다도 여성팬쪽의 지지도가 더 높았다는 사실은 이 시기 김완선의 폭넒은 인기를 보여주는 부분.

1992년 6집 역시 손무현이 프로듀서를 맡아 만들어져 5집 만큼은 아니지만 70만장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인기를 끌었으나, 11월 당시 김완선 자신이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었던 MBC <특종 TV 연예>에서의 특집 방송을 끝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은퇴 보도와 동시에 이미 홍콩 진출이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도 함께 흘러 나오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김완선 본인도 처음엔 은퇴는 너무 극단적이라 동의하지 않았는데 한백희가 김완선의 부모에게 빚이 있었고 이를 갚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기획 은퇴를 했으나 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고 후에 밝혔다.

은퇴 선언 후 한국에서 사리진 김완선은 93년말엔 홍콩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알란 탐(담영린)과 함께 듀엣곡도 냈고(노래듣기), 94년부터는 대만에서 진위엔쉬안(金元萱;김원훤)[7]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해 3장의 중국어 앨범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러 원조 한류가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꽤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2.3. 1996년~2005년: 복귀와 시련기

한국으로 컴백 선언 후 1996년 말에 7집을 발표, '탤런트'가 가요톱10에서 4위까지 올랐고 33만장 정도 팔려 이름값을 했지만 과거 김완선 음반에 비해서 망한 앨범이었다.[8] 앨범 자체도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과 함께한 덕에 이미지 이상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던 이전 앨범들에 비하면 평이한 수준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댄스 그룹을 만든다며 룡비무방이란 댄스 그룹을 만들어 내놓았지만, 이 역시 망했어요가 되고 만다.

가수로서 자신이 활동한 데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번도 정식으로 주지 않은 이모와 결국 1998년에 결별하지만 한백희는 이미 김완선의 이름으로 온갖 빚을 져놓고 있었고, 결국 김완선은 빚을 갚기 위해 밤무대 출연과 온갖 행사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야 했다.

2002년 내놓은 'S', 'Shall We Dance'와 리메이크 음반은 비교적 생소한 트랜스 테크노 장르였다. 이 음반이 10만장 정도 팔리며 생각보다 이름값을 해냈지만 빚문제는 여전한 상황이었으며, 결국 2003년 누드 사진집을 찍기에 이른다. 한데 누드 사진집을 찍고도 애초에 계약한 만큼의 돈을 받지도 못하고 사진집 문제로 트러블이 생긴 소속사와의 소송으로 고생만 했다[9].

2005년 말에 9집 앨범 'Return'을 발표한다. 자전적인 노래라 할 수 있는 발라드 'Seventeen'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우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가했지만, 일반 대중들이 김완선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너무 간격이 큰 음악이었고, 왜 갑자기 그런 내용의 가사를 노래하는지도 골수팬들 이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아[10] 진지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망했어요.

2011년 4월 컴백 후 출연한 김승우의 승승장구 녹화 중 9집의 'Seventeen'을 부르던 도중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서 지켜보는 방청객이나 MC들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17세는 실제로 김완선이 방송에 정식으로 데뷔한 나이이고, '작은 TV 속에 살면서 인형처럼 웃고 있는 너'로 시작하는 가사는 김완선의 삶 그 자체이다 보니... 노래 자체에 대한 감회도, 그리고 그 노래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2.4. 2006년~ : 유학과 활동 재개

2006년 이모 한백희의 사망 후 하와이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현지 대학에서 디지털아트를 전공하였다. 2007년성중앙이 하와이로 가서 취재했을 때는 새 앨범 준비 중에 사기를 당했으며 음악활동의 의지를 접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왔으며, 미술 쪽 진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근황만이 간간이 보도되었다.

2011년 3월 일렉트로닉 듀오 로맨틱 카우치의 Like A Virgin 티저 영상에 그녀가 출연했는데 세월의 흐름과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춤을 선보였다.
2011년 4월, 드디어 신곡 티저가 공개되었다. 노래 제목은 수퍼 러브 (Super Love).
4월 21일 뮤직비디오 풀 버전과 음원을 공개했다. 특이하게도 예전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댄스곡이 아닌 록 스타일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들고 나왔다. 확실히 특유의 포스와 일견 퇴폐적으로까지 보이는 분위기는 어린 아이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이 묻어나는 영역이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 건 댄스여왕답게 춤이 더 가미되었으면 하는 점 정도.

2011년 7월, 지산 락 페스티벌의 참가가 결정되자 락 매니아들 사이에서 김완선의 참가가 락 페스티벌에 어울리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다만 2AM정진운도 참가한다는 소식이 동시에 알려져 상대적으로 묻혔다.
2012년부터는 쇼, 예능 프로그램에 간간이 출연하면서 클럽, 페스티벌 등 공연 위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컴백 이후 MC로도 꽤 기용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맡은 프로그램이 오래 가지는 못하고 있다.
거주 중인 용인 아파트를 직접 인테리어했다고 하는데 화이트톤의 깔끔함이 호평을 받으면서 상당히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다.인테리어 잡지도 아닌 곳에서 기사 사진 촬영을 집을 배경으로 해 갈 정도
2014년 7월, 2년만에 디지털 싱글을 발표했다.

3. 기타

2집 처음 버전에 들어갔다가 후에 빠진 곡인 '충격'은 그야말로 충격인데, 아이유의 3단 고음 못지않은 고음이 등장한다.

신중현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박정희의 요구를 거부한 대가로 방송금지를 당하다가 정권이 바뀌고 겨우 해금이 됐지만 록의 시대는 이미 저물어서 음악을 할 수 없어 록의 대부가 나이트클럽에서도 쫓겨날 정도인 상황이었고, 이때 김완선이 와서 곡을 달라고 해서 신중현은 김완선의 무대를 보고 그 느낌을 가지고 <리듬 속의 그 춤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댄스로 한 가닥 하지만 의외로 드럼 실력이 수준급이다. 대만에서 가수생활을 했던 시절 한 번은 음악쇼프로그램에 나와 여자 치곤 나름대로 힘있게 드럼을 치는 동영상이 한 때 돌기도 했다.

김완선의 전성기인 1집-6집에 이르는 시기의 앨범들 중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는 앨범은 4집 뿐이었는데, 2011년 김완선의 컴백 때문인지 1집에서 6집까지 전부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3집 타이틀곡인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는 민망한 가사 때문에 본인이 제일 싫어하는 노래라는 말이 있다. 원조 자뻑

4집의 <기분 좋은 날>은 당시 토요일이 되면 빠지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곤 했었고 지금도 토요일이면 가끔가다 흘러나오는 노래. 토요일 주말의 기분을 업할 수 있는 노래다. 그래서인지 가수 디기리는 이 노래의 가사를 인용 '토요일 오후'라는 노래를 불렀고 김완선이 피쳐링했다. 그런데 네이버에서는 19금으로 나온다. 뭥미 것보다 요새 대세는 이잖아

김완선이 2011년 활동을 재개한 후 밴드와 함께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의외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4집 활동 시절에 이런 식으로 방송 출연한 적도 있다.[11]

외국의 여성 팝스타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무대를 한국에서도 보여준 거의 첫 가수라고 할 수 있는데 고로 자연히 게이 팬층으로부터도 뿌리깊은 지지를 받고 이 계보는 엄정화, 이효리 등으로 이어진다.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연마한 화려한 댄스 스킬을 시전하는 소녀 가수로 등장해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선 점 등에서는 보아를 위시한 현 케이팝 아이돌 시스템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1988년 초 일본 방송 출연 영상.[12]

4. 이모 한백희와의 인연

한백희가 스파르타식으로 춤을 가르치고 그걸 배웠는데, 지금의 연습생 개념의 선구라면 선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모가 살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서 7년간 고립되어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외진 축이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외진 곳이 도봉구 방학동이었다.

그녀와 한백희와의 질고 질긴 인연은 한백희의 작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옷도 그녀가 맞췄고 안무도 그녀가 짜주었고,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도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완선에게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2006년 세상을 떠났다.

무릎팍도사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완선은 데뷔 후 1998년 그녀의 이모와 결별하기까지 13년 동안 가수 활동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 번도 정식으로 받지 못했는데, 당시 이모부의 사업이 잘 안 풀려 그쪽으로 돈이 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돈을 주지 않았음에도 한백희가 따로 사치를 부리거나 한 일 없이 옷 2~3벌로 사계절을 버티고 병원비가 아까워서 아파도 병원에 잘 안가고 장신구 같은 건 전혀 사지도 않는 등의 구두쇠 생활을 했기 때문. 이에 김완선은 차라리 한백희가 자신을 위해서 돈을 사용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라 말했다.

이후 한백희는 건강이 악화 된 후에 응급실에 자주 갔는데 당시 비참한 상황에서 연락 할 수 있는 사람이 김완선 밖에 없어서 돈을 빌려달라고 자주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에 김완선은 할 수 없이 돈을 빌려주었지만 워낙 악연이었기에 왜 과거에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주지 않았냐는 말을 했고 한백희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그리고 김완선은 그게 자신이 이모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KBS2TV 승승장구 (2011 4월 26일) 에 나와서 이모 한백희에 대하여 한 얘기다.

"저의 모든거, 좋은거, 나쁜거까지 다.. 저의 부모님이기도 하고 선생님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어떤 무대는 안좋게 끝날때도 있는데 같이 속상해 하기도 하고, 어떤 일이 잘돼서 성사되면 같이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되풀이되고...그러다가 보니까 제가 남자를 만날수가 없었어요" "제발 좀 빨리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길 바랐는데 이제는 많이 없어진것 같고..." "이모 이제 원망이나 분노는 없으니까 편히 쉬세요.... 미안해 하지 말고"

현재 김완선의 매니저는 이모 한백희의 아들이 맡고 있다. 이 매니저는 KBS의 내 생애 마지막 오디션에 출연했었다.

승승장구에서 MC들의 "왜 남자가 없었나"라는 질문에 당시 이모의 엄청난 보호 때문에 남자를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다고 말했다. 앞으로 결혼계획에 대해선 지금 (2011년) 40대 나이에 결혼할 수는 없고 나중에 50~60대가 됐을 때나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팬들 중에서는 자신과 이모를 파국으로 내 몰았던 이모부라는 작자 때문[13]이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2009~2010년 즈음 리즈 시절의 레이디 가가와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화장 짙게 하면 거의 엇비슷해 보일 정도. 40대에 이 정도니 한창 때였던 10대 후반~20대 시절이 어땠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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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컴백 후 출연한 TV프로그램 승승장구에서 G.NA가 즉석에서 한 번 알려준 Black & White 안무를 거의 그대로 따라하면서 댄스여왕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때 지나가 허탈해하면서 말하길, "이거 하려고 1주일을 연습했는데.."
  • [2] 이건 기본적으로 1980년대H.O.T. 이후 아이돌 세대와의 가요계 분위기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댄스뮤직(혹은 비디오형 가수)이란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건 1980년대 후반 김완선, 박남정 시대부터이고 기본적인 가창력이 갖춰진 가수한테 비트가 비교적 빠른 곡에 맞춰서 댄스(율동)연습을 시키는 수준이었다. 김완선도 15살부터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나름 가창력이 갖춰진 상태였다. 이에 반해 2000년 이후 아이돌 세대는 비주얼과 춤이 되는 연예인 지망생을 뽑아서 노래 연습을 시키는 구조라 이전과는 정반대이다.
  • [3] 게다가 당시 한백희는 "너무 잘 하면 자꾸 듣고 싶어지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 음을 전반적으로 높게 잡아 녹음시켰으니 엎친 데 덮쳤다.
  • [4] 하지만 그렇게나 인기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에 신승훈이나 이승환 같은 더 괴수들이 더 앨범을 팔았던지라 그해 최고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결국에는 콩라인?
  • [5] 앨범판매량으로 여가수가 남가수 이기기는 몹시 힘드니까 그냥 탑으로 치는 게 맞을 듯.
  • [6]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김완선은 이전까지는 유독 MBC 10대 가수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6년 여자 신인상은 누가 같은 MBC 아니랄까봐 강변 가요제 대상곡이었던 <젊음의 노트>를 부른 유미리에게 돌아갔고, 10대 가수 선정이 거의 확실시됐던 1987년에는 조용필이 가요제 사퇴를 선언해 10대 가수 선정 없이 가요대제전 형식으로 치뤄졌다.
  • [7] 김완선이란 이름에서 완이 끝날 完이란 말을 떠올려 부정적이라는 현지인 충고로 바꾸었다.
  • [8] 사실 여기에 '탤런트'에 표절 논란도 있었기 때문에 일찍 내릴 수 밖에 없었다.
  • [9] 당시 소속사는 다음 앨범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김완선은 이것이 계약 파기 사유가 된다라는 이유로 소속사와는 별도로 누드 사진집 제의에 동의를 했다. 당시는 여배우들의 누드사진집이 폭주하던 시대였고, 김완선은 빚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계약금 5억원에 러닝 개런티 포함. 이에 소속사가 반발하여 주택은 물론이고 김완선의 저축통장까지 압류하였고, 누드사진집을 낸 곳은 이런 사정을 이용해서 누드사진집의 판매가 부진하다는 이유로 계약금 5억 중에서 2억 밖에 못 준다고 배째라가 되었다. 김완선은 밤무대를 뛰면서 2개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소속사와는 계약 해지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사진집 기획사에게는 승소했다.
  • [10] 결별 이후 몇몇 인터뷰를 통해 이모와 헤어진 이유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한백희가 살아있는 상태라 92년 은퇴의 실상 등 차마 완전히 털어놓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 [11] 김완선 뒤의 베이스(왼쪽)와 기타(오른쪽)가 윤상, 손무현
  • [12] 1988~89년에 일본 시장 진출도 모색했었는데 당시 일본 연예 관계자들이 아무로 나미에를 비롯한 일본 여자 솔로 댄스 가수 포맷의 영감을 얻었다는 것 역시 유명한 풍문이다.
  • [13] 고 한백희가 김완선의 수익을 가로챈 이유가 바로 상기됐던 남편의 사업빚. 김완선이 벌어오는 돈을 믿고 계속해서 일을 벌리고, 그 사업이 계속 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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