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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last modified: 2015-04-04 21:54:58 by Contributors

Contents

1. 독립운동가
1.1. 개요
1.2. 도박활동
1.3. 이분의 평가
2. 한국의 관료, 정치인
3. 한국의 만화가
4. 만화가 마늘오리의 본명
5. 축구 선수 김용환

1.1. 개요

자는 여현(汝見). 일제강점기때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모아서 전달했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던 의성 김씨 학봉종가[2]의 장손[3]으로, 조선시대의 의병장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며 역시 독립운동가로 의병활동을 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이기도 했다.

1896년 의병활동을 벌이던 의성 김씨 일족인 김희락(김흥락과는 사촌지간)이 패전하여 학봉종가로 쫓겨와서 숨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김희락을 잡아내고,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을 포박해서 마당에 꿇어 앉게 하고 집안의 물건을 가져가는 등의 일이 있었다. 김희락은 총살당했다. 김흥락은 안동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지역 유지였는데 이런 수모를 당하고는 가문과 전 제자들을 모두 총동원해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김흥락의 제자가 700여명이었는데,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만 60명이 나왔고[4], 의성 김씨 문중에서 훈장 받은 사람이 27명인데 이 중에서 학봉 직계에서만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잘못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린 것이다.

김용환은 어릴적에 이 모습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을 돕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1908년 이강년 의병 부대에 참가하였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는 등 안동 지역의 의병 활동의 중심이었다[5].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안동으로 돌아왔으며, 1921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6]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하였다. 다만 대다수의 부호들은 친일 또는 민족반역자들 이었기 때문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고, 결국 1922년, 일본 경찰들에 세번째로 체포된다.

결국 김용환은 자금조달을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데...

1.2. 도박활동


반도판 현실판 카이지

도박판을 이용해 돈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는데, 세간의 인식은 의성 김씨 집안의 도박꾼이자 파락호.[7] 경북 안동 출신의 저술가로 <양반동네 소동기>, <나의 양반문화 답사기> 등의 저자인 윤학준 교수는 '조선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주역인 김남수와 함께 이 사람을 꼽았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하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베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만약 베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베팅에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쓸어담고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현재 싯가로 200억원 상당의 재산과 전답을 도박으로 말아먹은 것도 바로 이 시기 벌어진 일.

그 꼬락서니를 보는 문중의 자손들은 "집안 말아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집과 전답을 되사주곤 했다.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동딸이 시집을 갈때 시댁에서 장롱을 마련하라고 준 돈 역시 도박으로 탕진, 결국 외동딸은 친정 어머니(아니다 친정 할머니께서 시집올 때 가져오신 오동나무 장롱이다. 아래 김용환 선생의 따님이 쓰신 시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보면 큰 어매가 쓰던 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안동 지방에서 큰 어매는 친 할머니를 지칭하는 용어이다)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게다가 시댁의 가세가 기울자 그 헌 장롱이 귀신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숴서는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고. 이 정도니 문중 사람들이 엄청 욕했지만 김용환은 "집안에 '학봉(가문의 조상 김성일)'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면 된 거 아니냐?"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말그대로 휘황찬란한 봉황이었단 게 함정 혹은 주작이라고 볼수도...

하지만 이렇게 벌은 돈들은 죄다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송금 되었으니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 케이스라 볼 수 있겠다. 함정은 그 정승이 명재상이었다는 것이지만.

윤학준 씨는 <양반 동네 소동기>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 그 전년 여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친한 친구인 K로부터 김용환 씨를 '독립 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지금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참봉 할배(김용환 씨를 말함)가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을 리가 없어. 참봉 할배의 기행, 난행은 특고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고, 사실은 독립 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보내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확증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그럴 듯한 흔적은 몇 개 있다고 했다.


이전 서술에서는 "일제의 눈을 속여 군자금으로 몽땅 보냈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제시된 부분이지만, 해당 주장의 근거로서는 부족한 면이 너무 많다. 일단 해당 문단이 근거가 없다고 활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료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저 이야기의 시점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990~1991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양반 동네 소동기>의 원전인 <나의 양반 문화 탐방기>의 출간이 1995년 3월인데, 이 책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된 <온돌야화>와, <역사에 얼룩진 한국-한국양반기행>을 하나로 합쳐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것으로 두 책의 출간은 1983년과 1993년이다. 집필 기간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늦어도 1992년에 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인데, '그 그 전년 여름'이라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1~2년 전인 1990~1991년 사이로 추정된다. 독립 유공자 추서는 1995년으로, 아무리 시간대를 좁혀 잡아도 4~5년의 시간차가 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추가적인 자료를 모아서 제출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낡은 정보가 개정증보판을 내면서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혼란을 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1.3. 이분의 평가


1946년, 임종을 할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 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막대한 재산,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주변사람들에게는 파락호라고 경멸받고, 심지어 하나뿐인 외동딸에게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제라 하겠다.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 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는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한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여담이지만, 그의 장인인 중업은 1914년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리고, 1919년 베르사유 회담에 보낼 청원서에 넣을 강원도, 경상북도 지역의 유지들의 서명을 받고 중국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그의 장모인 은 예안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56세의 나이에 고문을 당하다 실명했다. 처남을 비롯한 그의 처가 역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8].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2년 5월 6일자 방송분에서 이 내용을 다룬 바가 있다. EBS 역사채널 e에서도 다룬 바 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정치인, 기업인들만 줄줄이 나오고 그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 에잇 퉤 2013년 8월 확인결과 맨 위에 나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만세! 하지만 2014년 3월 확인결과 맨 위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이건 네이버 뿐만 아니라 다음도 마찬가지다. 에잇 퉤 반면 구글의 경우 검색결과 1위는 위키백과의 동음이의어 항목, 2위는 위키백과의 독립운동가 김용환 항목, 3위는 엔하위키 미러의 김용환 항목이 검색되었는데, 2014년 3월 확인 결과 1위와 3위는 같지만 2위는 위키백과의 정치인 김용환[9] 항목으로 나온다. 외산 검색엔진이 독립운동가 검색결과를 우대해 주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 한국의 관료, 정치인

정치인은 원칙적으로 작성제한 대상이나 동명이인이므로 기본적인 사항은 서술합니다.

金龍煥
1932년 2월 5일~

박정희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초헌적인 재벌 감싸기 조치인 8.3 사채 동결조치의 추진자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환을 젊고 유능한 관료로서 큰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제13대, 14대, 15대, 16대 국회의원(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통일국민당, 신민당, 자유민주연합, 국신당, 한나라당)을 지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으며, 제15대 대통령 선거 전 이루어진 DJP 연합이 탄생하는데도 막후에서 큰 축을 담당했던 인물.[10]

1998년 DJP 공동정권이 탄생한 후에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헌재 금융감독원장 같은 실력있는 관료를 모셔오는데 진력하였다. [11] 연대 초창기부터 정권 초기의 중요한 시기까지 김용환의 일처리를 지켜본 DJ는, 2009년 세상을 떠나기 전 완성된 자서전에서 김용환의 인재보는 안목에 찬사를 보냈다.

아이러니한건 DJP 공조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2001년 즈음부터 독자노선을 견지하며, 결과적으로 반DJ노선을 견지한 것도 그였던 것.[12] 충남 서천군보령시 선거구에서 홀로 당선되어, 이후 충청권 정가에서 캐스팅보더 역할을 한걸 보면 정계에서 "흐름을 읽는 안목"도 높이 평가받고 있었던 듯 하다. 당시 한나라당 총재이자 유력대선주자 1순위였던 회창은 YS, JP와 척을 지는 일을 감수하고, 2001년 충남권의 인물로 강창희와 더불어 김용환을 입당 시키기도 했다.# [13]

현재는 강창희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자문단 격인 "7인회" 멤버이자 새누리당 상임 고문으로 있다.

3. 한국의 만화가


해방 직후 1940~50년대에 주부란 캐릭터로 큰 인기를 끈 대한민국 초창기의 주요 만화가이자 한국 일러스트계의 거장.

만화도 만화지만 펜으로 그리는 삽화의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굉장하다. 코주부 김용환 선생의 작품들 오늘까지도 펜화 실력에 있어서는 대항할만한 작가가 없을 정도의 레전드급의 거장으로 손꼽히며, 그 외에 수채화나 만평, 극화체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본래 일본에 유학을 가서 그림을 공부한 후에 추리소설 등등 여러 소설의 펜화 삽화로 인기를 끌었으며, 해방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코주부 삼국지를 비롯해 코주부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 만평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주한 미군 간행물의 삽화를 맡게 되면서 점차 코주부 만화 작업을 접게 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생활하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6.25당시 그에게는 참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는데 한국의 만화가 18인에 나온 것에 의하면 처음에는 북한군에게 잡혀서 수감되었다가 직업이 뭐냐 묻는 북한군 장교에게 그림쟁이라고 간략하게 말하자 화가냐? 하던 그 장교는 그러면 춘화를 그려보라고 하기에 김용환은 주저없이 여인 알몸을 담은 춘화를 그렸는데 장교가 만족해하여 수감되긴 해도 먹을 것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그림 마음껏 그리라고 먹물이나 붓이나 종이같은 것을 넣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국군이 와서 자유가 되긴 했는데 빨갱이들에게 그림 그려주었다고 또 위기가 닥치기에 김용환은 살고자 춘화를 그린 게 그리도 문제란 말이오! 한국군에게 따져들었다. 그러자, 또 한국군 장교도 어디 춘화를 그려보라고 하여 또 그려줘 똑같이 별 일 없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극장 애니메이션 운아 홍길동의 감독인 동헌은 김용환의 제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일화를 소개하자면 젊었을 때의 신동헌이 자신이 직접 그린 펜화를 거리에서 내놓고 있었는데, 한 중년의 신사가 그것을 보고 누가 그렸내고 묻자, 신동헌은 '제가 그렸다'고 했고, 신사는 누구한테 배웠냐고 묻자, 딱히 누구한테 배운건 없고 '소년구락부'의 잡지에 있는 기타고지나 다른 화가의 그림을 보며 연습했다고 하자, 그 신사가 "아, 내가 바로 그 기타고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타고지(北宏二)'는 일본에 있었을때 김용환의 필명이다. 신동헌에게 그림을 업으로 삼을려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스케치를 하라라는 조언을 하면서, 그는 이 말을 평생 잊지 않고 있다.(한 인터뷰영상에서 지하철에서도 스케치를 하고 있다.) 신동헌 인터뷰

4. 만화가 마늘오리의 본명


자세한건 마늘오리 항목 참조.

5. 축구 선수 김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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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인간 쓰레기로 위장했고, 거기서 오는 주변의 비난을 묵묵하게 받아들이며, 임종때까지도 진실을 알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바친 인물.
  • [2]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김성일의 호를 당호로 삼았기 때문에 학봉종가라고 부른다.
  • [3] 완전 직계는 아니고, 집안에서 양자로 이어진 것이다. 김용환 역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집안인 김시인을 양자로 들여서 종통을 이었다.
  • [4]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이고,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만주 독립군 활동을 한 이승희, 김대락, 김원식 등이 뒤를 잇는다.
  • [5] 이 때 같이 활동한 인물이 역시 이쪽 집안인 김현동이다. 김현동 역시 대통령표창,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 [6] 안동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서로군정서와 연결된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원식과 김찬규.
  • [7] 양반가문을 직접적으로 몰락시킨, 또는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을 경멸조로 부르는 말.
  • [8] 안동 인근은 퇴계의 학맥이 통혼 등을 통해서 엮여 있었는데, 김용환의 장인이 예안의 의병장인 만도의 아들 이중업이고 이중업의 동서가 고성이씨 상룡이다. 김용환의 딸 김후웅 역시 청송 의병의 주역인 마평 서씨 서효원의 손자 며느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종가들이 친일로 기운 사례가 많은데 비해서 안동 인근은 신통할 정도로 인맥이 독립운동으로 기울었다. 흥락의 제자중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이가 60명이라는데, 안동과 주변 시군에서 독립운동으로 포창 및 훈장을 받은 이들을 통털으면 약 7,800여명이 나온다.
  • [9]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 본 항목에서 소개하는 정치인 김용환과 동명이인이다.
  • [10]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평소 김용환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안 새정치국민회의 관계자들이, 이를테면 다리를 놓아줄 사람으로서 김용환과의 소통 채널을 구축하는데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한다.
  • [11] 이헌재와는 재무부 관료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눈여겨 봐 두었다가 중대한 국면을 맡길 구원투수로 이 씨를 추천한 것.
  • [12] 5공 실세였던 화평망의 한국신당을 창당하면서 자민련과도 다른 길을 걷게 됐다.
  • [13] 이회창은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불과 35만 표 차이로 노무현 후보에게 석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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