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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last modified: 2015-03-03 15:39:52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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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金元鳳, 1898년 8월 13일 ∼ 1958년 11월?)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이다. 호는 약산(若山)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김약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Contents

1. 생애
1.1. 의열단 활동과 중국혁명 활동
1.2. 조선의용대 조직
1.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4. 해방 이후
1.5. 북한 정권 수립 참여, 실각과 최후
2. 평가
3. 가족

1. 생애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독립 운동에 뜻을 두어 중국으로 건너가 1918년 난징 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 흥무관학교에서 수학, 자퇴하였다.

1.1. 의열단 활동과 중국혁명 활동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국내의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투쟁을 하였다. 1926년에는 보다 더 조직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었고 국민당이 만든 광저우 포 군관학교에 입교했고, 이곳에서 얻은 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하고 국민당군 장교로 임관, 그와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

1927년 8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 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창봉기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2. 조선의용대 조직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한 뒤,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중국 난징외곽에 설치하고 혁명요원을 모집하고 양성하였으며 1938년 10월에는 훈련해온 청년들을 규합하고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한커우에서 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항일 군사 조직인 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당시 중국의 2차 국공합작에 의해 국민당 정부의 통일된 후원 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정부로부터 식비와 공작비 등을 후원받았다. 당시 의용대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했다.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홍보영상). 1940년 作.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젊은 대원들 사이에 "전선에서 떨어진 곳에서 편하게 훈련만 받고, 정보수집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있는 곳에 가서 싸우면서 항일운동을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1941년 사이에 박효삼이 일부 대원들을 데리고 이탈, 화북지역의 태항산으로 올라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활동하고, 이후 이들은 42년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간다. 조선의용대의 북상은 김원봉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계기가 되었고 김원봉도 화북지대의 활약에 비해 국민당의 소극성에 붙잡혀 있는 본대의 현실에 분개했다.[1] 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본대와 다르게 국민당 정부가 아닌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연합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한반도 내에서 몽양 여운형이 이끌던 건준위의 모체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한 화북 연안(옌안)의 조선독립동맹과 구별되며, 화북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던 조선독립독맹은 김두봉이 위원장으로 역임중이었다. 이들이 바로 후일 북한의 연안파이다.[2]


1.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분할이 일어난 1942년엔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이는 41년 중경임정이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포함시킨 조소앙균주의가 그의 뜻과 일치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하였다.[3] 그리고,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한국 광복군 1지대장 및 부사령관[4]에 임명되어 활동하는데...문제는 임정내 김구를 비롯한 보수파 세력들과 항상 마찰을 겪어 뜻대로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5][6]

김원봉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통합되는것을 원했지만, 임정내 보수파세력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연계할 수 없다.'면서 마찰이 심했었다.[7] 당시 지원해주던 중국 국민당 단체도 달랐다. 조선민족혁명당대립남의사지원을 받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CC단(CC파벌)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세한건 중국 국민당항목의 조선 독립운동 부분을 참조.

1.4. 해방 이후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합류했는데, 그 때부터 계속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47년 3월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단체에서 주도한 총파업에 연루되어 체포당했다.[8] 그리고 대표적인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빨갱이 두목'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뺨을 맞아 충격을 받는다.[9]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 경찰에 당하지도 않은 수모를 해방 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한테 당한 치욕적인 수모였다.김원봉은 이 사건으로 굉장히 크게 충격을 받아 풀려난뒤 3~4일간 술만 마시고 통곡했다고 한다.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김원봉은 붙잡혀 갈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 채워 장택상 앞으로 끌고갔다. 이어서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서는 사흘을 꼬박 울었다 한다. 그는 울면서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했다.

김원봉 체포에 대해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어 일단무죄로풀려났으나 친일파와 극우 세력의 백색테러 표적이 되어 지속적인 공격을 당했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고 구심점 역할이자 좌익세력을 대변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의 죽음에 분노하여 애도문을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10]

1948년 북연석회의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는데 그대로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된다.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커다란 이유는 노덕술에게 공개적으로 조롱을 받고 수 차례 고문을 받은 것. 또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권세를 득세하는 잘못된 사회 흐름에 매우 크게 실망한 것이 월북의 한 동기라는 말도 있다.[11] 그러나 정작 북한도 친일 인사들을 여럿 중용했고 종국에는 김일성 독재에 찬동하지 않으면 항일인사들도 가리지 않고 숙청했으니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강준만에 의하면 김원봉은 일제시대때의 경험을 통해 한곳에 2시간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제일 오래살아남았다고.

1.5. 북한 정권 수립 참여, 실각과 최후

1948년 9월,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은 국가 검열상과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남침에 반대하고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고, 납북인사 상당수를 보호하는 등 김일성의 정책과는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다가 1956년에 터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안파가 숙청된 후 1958년에 전면적으로 실각했다. 그리고 실각 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자살설, 총살설 등이 나오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실각 직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자세한 사망 시기,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실각 시기를 봐서는 정적을 솎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설에는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목으로 형무소로 끌려가 거기서 울분을 참지못해 청산가리를 입에 털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12]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 혐의를 받은 이유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이 남의사의 지원을 받던 단체이라는게 이유때문이었다.

2. 평가

무장독립투쟁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래야 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장투쟁활동 활약상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묻혀버렸고, 한국에서는 북한 정권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로 인식되어 독립운동 경력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감이 있다. 근래 한국에서는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리고 있다. 그러나 뭐가 어떻게 되었든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활동한 사람이기 때문에 독립유공 훈장은 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서 활동하긴 했으나 공산주의자 였는가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주장이 많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하고 있을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뒷날 MBC사장이 됨.)는 김원봉하고 오랜시간동안 얘기를 나눴다는데, 황용주에 의하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북한 정권에서 직책을 역임할때도 상당히 온건하고 중립적인 성향을 보여 한국전쟁때 납북된 정치인들(조소앙, 안재홍, 완구,엄항섭 등등)을 최대한 도와주었다고 알려져있고 한국전쟁 휴전 이후에도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주장해왔던 인물이기도 했다.(이러한 점 때문에 김일성 눈 밖에나 숙청당하는 커다란 계기로 작용되기도 한다.)

3. 가족

첫 부인 최씨는 평안도 출신 여성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63 으로 1931년에 결혼하였으나,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 등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이어,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64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1945년~)이고 둘째는 김철근(1947년~)이다.65 북에 최동선이 낳은 그의 두 아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남에서 가족들중 남동생들은 모두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봉철씨(1918 - 1986)는 당시 생존하였다.

남에 남은 유일한 남동생 봉철씨는 4. 19. 혁명 당시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는데, 이후 이를 이유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고한 옥살이를 하다 1986년 사망하였고 2010년 유족들의 노력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선고 받았다 (관련한겨례기사링크). 여동생 학봉(1932년~)씨는 여전히 밀양에 생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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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부분은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엄연히 말하자면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세력보다 조선의용대 세력이 훨씬 더 항일 무장투쟁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한국광복군은 엄연히 말하자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단체라기보다는 중국국민당의 직속 산하단체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임정내 보수세력들이 지지기반이 약해서 국민당 정부에게 지휘권을 맡긴것이기 때문...그리고, 광복군은 일본군과 교전한 경력이 전무했다. 오히려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세력이 무장투쟁에 훨씬 적극적이었고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을 벌이기도...(대표적인 전투가 항산 전투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에서는 홍사익이 지휘하고, 조선의용군에서는 김무정이 지휘했다.)
  • [2] 팔로군과 연합한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의 의리 때문에 해방 이후 국공내전까지 참전했고 그리고 대부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3]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정/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국비 의무교육 실시
  • [4] 당시 사령관은 지청천
  • [5] 김구의 세력인 독립운동가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 대들었다. 그는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었다.(...)
  • [6] 앞서 말했듯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소속의 부대원들 대부분이 옌안의 태항산으로 갔기 때문에 김원봉은 임정내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 [7] 사실,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이점은 정말 심각한 한계점이었다. 실제 한국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분열이 상상이상으로 심했었다.
  • [8] 당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이 노덕술을 불러서 '김원봉을 당장 체포하라!'고 지시 내린 것. 김원봉은 단지 민전에 있었던거 뿐이지 총파업에 관련된 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건 장택상과 김원봉은 둘 다 독립운동가 출신.(...)
  • [9] 체포 당할 당시에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있었을때 끌려갔다.
  • [10] 김원봉은 여운형과 잘 아는 사이였다. 여운형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었으며, 김원봉은 해방 후 여운형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 플래쉬로 돌아가는 사진 중에 오른쪽에서 두번째,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숙인 인물이 김원봉. 여운형이 자주 테러를 당하자 김원봉은 여운형의 신변 보호에 나서기도 했다.
  • [11] 이러한 사례는 우익계열 인사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글학자로 중도우파 성향인 이극로. 이극로도 역시 남북협상때 북에 남았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좌익'인사로 분류되어 흑역사가 된 인물이었다.
  • [12]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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