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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last modified: 2015-10-22 18:53:10 by Contributors

Contents

1.중앙정보부장
1.1. 개요
1.2. 생애
1.3. 10.26 사건
1.4. 사건을 일으킨 이유
1.4.1. 권력분쟁
1.4.2. 대외영향
1.4.3. 민주화
1.4.4. 우발적 살해
1.4.5. 감정적 요인
1.5. 엇갈리는 평가
1.6. 트리비아
1.7. 매체에서
2.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1. 중앙정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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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군인·정치가이다.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 출신으로 박정희의 고향 후배인 것이 이후의 진로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1]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의 주모자였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이다.

1.2. 생애

1943년 안동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1945년 일본 해군 과 연습생[2]에 선발되어 해군 항공소위 임관을 준비하던 중, 광복으로 인해 임관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 교사와 대륜중학교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1952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전역하였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과는 악연이 좀 있었다. 윤필용이 1.21사태김신조의 모가지 발언을 여과없이 보내는 바람에 윤필용이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장에서 경질되고 김재규가 후임 방첩부대장이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방첩부대를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자신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육군보안사령관이던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에 있는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중장은 삭제되어 있다. 한편 이 때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 대령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고, 10.26 사건 당시에도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자리에 있었고, 결국 박정희 암살에도 가담한다. 정말로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장군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키고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는 그저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다고 한다.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 비슷한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도 결국 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다가 5.16 쿠데타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감금 당했다가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종찬 장군 계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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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중장 김재규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박정희의 강권에 의해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를 살해하였고, 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형 집행 장면1 사형 집행 장면2 자세한 사항은 10.26 사건 항목 참조.

1.3. 10.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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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첫번째는 재판정의 최후진술[3]을 하던 도중 나온 말이고 두번째는 사형장으로 가기 직전 남긴 유언이다. 김재규의 진술 중 가장 유명한 문장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인맥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박정희와 고향 후배이며 육사 동기라는 2중의 인맥인 김재규는 그야말로 박정희의 둘도없는 심복. 하지만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와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을 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여 살해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 생각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호실 요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당시 경호계장이던 박상범이고, 그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의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된다(민간인 출신으로는 최초의 경호실장).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다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했으나 박상범은 기적적으로 총알이 치명적 부위를 피해간 덕에 다행히 죽음을 면했던 것.

어쨌든 거사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엉뚱하게도 중정이 아닌 육군본부였다. 만약 김재규가 거사후 중앙정보부로 향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도 중론이다. 암살장소인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부장인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 국무위원과 장성들을 깨끗하게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10.26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런 후에 사태 수습을 빌미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써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체포되면서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 ①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만 권력을 휘두를 뿐 대통령 사망 후에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특권을 휘두르는 군부의 협조가 절실하므로 이를 얻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거라는 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와 원만한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박정희 저격을 알리고도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박정희 살해범에게 협조하여 그의 정권장악을 도울 장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당시 군에 자기 인맥이라고 볼 장군을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 ② 김재규가 박정희를 순전히 우발적으로 저격했으므로 거사 후 사태장악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설. 사건 수사결과에 의하면 거사 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승용차에 동행하여 사건현장을 떠나 이동하던 중,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정보부와 육본 중 어디로 가는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어 육군본부로 가는게 좋겠다고 제의하였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기사에게 육군본부 행을 지시했다. 이 때 정승화는 안가 본관(연회장은 나동)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사건을 저지른 김재규와 차에 동승한 것이었는데 그땐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행동을 볼 때 이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으며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살인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내란 목적이라기에는 시해후 김재규의 움직임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내란을 목적하고 박정희를 죽인게 아니고 그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본 것. 이러한 해석을 막기 위해 신군부 측에서 대법원을 강하게 압박했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17일 쿠데타 당시 전차가 대법원 주차장에까지 밀고 들어갔으며 대법관 한 명을 하룻밤 동안 모셔(?)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물론 심지어 김재규의 변호인까지 심한 탄압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판결문이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버렸다.[4] 이러한 주장은 훗날 판결문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한홍구,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참조.

1.4. 사건을 일으킨 이유

위의 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야말로 박정희의 '동반자'였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언듯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특히 피격 직후 김재규가 자신의 근거지인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본으로 달려간 것을 볼 때 이 사건을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김재규의 범행 동기에 대한 추측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여러가지 주장들이 존재하며, 추측 중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매우 많다. 그만큼 김재규의 암살은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정치적 질투심이 뒤죽박죽 짬뽕 극대화되어서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암살이나 이후의 판단미스도 이해는 간다.

1.4.1. 권력분쟁

  • 권력다툼
김재규의 지위는 언듯 탄탄한 듯이 보였지만,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대두로 위협받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었기 때문에[5] 위기의식을 느끼고 박정희와 차지철을 제거하고 차지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자신이 정권을 잡으려는 음모였다는 설이다. 처음에 중앙정보부로 가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 정권 반대 세력 관리방식에 대한 대한 이견
김재규가 민주화를 열망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정권 반대 세력 관리방식을 놓고 박정희, 차지철과 상당한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재규가 민주화를 원했다는 것까지는 사실 김재규 본인의 말을 제외하고는 명확한 근거가 있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나름의 근거가 있다. 유신의 심장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지만 실제 부마항쟁 이후 김재규는 정권이 전복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경상도에서 이러한 항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통치전략이 더이상 먹혀들지 않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를 관리하는 방식에 있어 박정희와 차지철의 강경일변도 노선에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김영삼 체포 등의 야당 탄압, 민주화 요구 묵살 등에 대해서 김재규가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박정희와 차지철은 끝까지 강경일변도의 진압을 주장하였고,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1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200만 명 정도 못 죽일 것 머있겠냐"는 정신나간 소리를 했다고 김재규는 법정에서 진술했다. 정리하자면 김재규가 민주화를 원했다기보다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들에 대한 관리방식을 가지고 충돌이 일어나 이것이 암살까지 갔다는 의견이다. 자신들의 정권 반대 세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통제가 강한 국가의 권력층에서 늘 논쟁거리다. 이 논쟁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그러나 "이것이 암살까지 이어질 문제였는가?"라는 질문으로 왔을 때 확신하기 힘들다.

다만, 상기된 바와 같이 대중적 저항의 격화와 강경탄압, 그 탄압으로 인한 더 큰 규모의 저항이 반복되면서 당시의 박정희 정권이 독재정권의 전형적인 말기적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6] 추론의 영역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재규가 이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 문제를 포함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가능성은 있다.

  • 중앙정보부 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공작에서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역대 중정부장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한 중정부장의 막강한 권력도 시한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거대한 위치가 중정부장 개인의 일신에는 위험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등 권력을 휘두르던 중정부장들은 최종적으로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는 수순을 받았다. 특히 김형욱의 말로는 후임인 김재규가 보낸 중정요원들에게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였다. 김형욱의 죽음을 보고 김재규가 자신 역시 단지 박정희의 소모품일 뿐, 언젠가는 실각 당하거나 처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가지게 되어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느끼게 했다는 분석이다.

거기다 3선 개헌을 거쳐 신헌법 체계가 되자 박정희는 이론적으로 종신집권이 가능해졌고,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하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정권 내내 누군가가 '후계자'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조차도 극도로 싫어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였다.

1.4.2. 대외영향

  • 미국의 사주
당시 박정희와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의 관계가 좋지 못했으므로,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해서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 실제로 김재규는 재판 도중에 미국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했으나, 당시 미국 대사는 이를 부인했다. 어르신들 중에 이 설을 진지하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다. 특히 이 시기에 군문에 몸담았던 사람(간부), 군과 관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설을 정설로 여기고 있다. 여담으로 김진명의 소설 '1026'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견제하기 위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김진명 소설이 늘 그렇듯이, 애초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두려워할 만한 국가도 아니고, 미국이 완전한 악역 수준으로 한국을 견제하려 했다고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낮다. 이 경우는 박정희가 미국을 무시하고 핵을 개발하려고 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하여 박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이 주장도 당시 미국 상황을 보면 이런 초대형 사건을 계획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상황이였다. 불과 4년전에 쿠데타로 휘청거리던 남 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가 되어버렸고, 중동의 최대 친미정권인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있었고, 덤으로 이란-콘트라 사건의 배경 중 하나인 니카라과가 공산화되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CIA가 대단히 바쁠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암살은 뒷수습도 뒷수습이지만 암살로 인한 독재권력의 공백은 실제로도 그렇지만 쿠데타의 완벽한 배경이 되고 이런 혼란상황은 베트남 공화국의 재현과 한반도 공산화라는 엄청나게 위험한 선택이였다.

  • 미국의 묵인
미국의 영향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암살 묵인'과 '사후 추인'을 구두 승인했을 가능성이다. 김재규의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가정해보자면, "박정희는 암살되고, 새롭게 민주 정부가 구성된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기서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이 박정희 암살과 민주화를 일종의 "반역죄"로 보고 승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일종의 "혁명"으로 보고 승인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김재규의 암살로 만들어질 "새로운 민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다.

현실적으로 일국의 국가 지도자를 암살하는 것은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정치적 부담이 큰 일이다.뭐 대놓고 쳐들어가서 체포도 한 적 있지만. 그러나 김재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암살 사건을 저지른 다음,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민주화를 하고, 미국은 사후에 승인을 하는 형식이라면 정치적 부담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신변 문제 역시 미국의 압력에 따라 민주화 정부에서 단순살인죄에 대한 '사면' 조치 혹은 미국이나 제3국으로 '망명'하는 형식으로 해결되어 '신변 보장'을 받을 수 있다.

1.4.3. 민주화

  • 민주화에 대한 요구
김재규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염증을 느껴서 독재 종식을 위해서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설. 이전에 바로 부마항쟁이 일어나서 김재규가 사건의 진상을 파해치러 부산, 마산지역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이 정권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설이다. 이것은 김재규 본인의 주장이기도 하다.

실제 김재규는 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국민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김재규 자신도 유세현장에서 자신이 건의했던 내용을 말하면서 박정희를 믿었다고. 그러나 약속을 어기고 유신헌법이 선포되었고, 김재규는 부하들 앞에서 박정희가 다 망쳤다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유신이 선포된 이후, 당시 3군단 연대작전 오순춘 참모는 김재규가 실제 박정희를 연금하려 모의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3군단에 순시하러 왔을 때 박정희를 연금하여 하야 성명을 내도록 강제하려 준비했다는 것.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 정권체제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대화를 하면서 박정희를 환자에까지 비유를 하는 표현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청와대에 들어와서 박정희에게 조언해달라고 하면서 유신체제를 바꾸는 제3의 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또한 집안에서 '자유 민주', '대의' 등을 적은 붓글씨가 발견됐다는 점도 의외다.

  • 민주화+미국의 사주
민주화와 미국의 사주가 결합한 가설도 있다. 즉 일단 박정희를 죽이기만 하면, 그 다음은 미국이 어떻게든 알아서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추측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김재규를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책임을 져줄 것처럼 잘못된 싸인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가 싸인을 잘못 읽었거나. 이 이론은 암살 이전의 치밀한 계획 + 암살 이후의 우왕좌왕을 설명해주는 가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1979년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는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대부분의 대화내용은 한국의 인권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10.26의 주모자가 김재규라는 것을 몰랐기에 글라이스틴이 박정희 암살을 권유하거나 지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을 김재규가 암살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원래 외교적 수사라는게 그런 식이니까.

  • 장준하 밀약설
한편 장준하와의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밀약설 중에는 시인 김지하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사이에도 쿠데타에 대한 의논이 있엇으며, 성공할 경우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국회의원의 1/3 이상을 자기쪽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즉, 실제로 시행 가능성을 전제로 둔 밀약이었다는 것. 이 밀약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지하 본인이다. 밀약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지만 평소에 장준하와 김재규가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권씨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 사후 김재규가 여러 모로 유족들을 도와줬다고 하며,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며칠 전 김재규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다만 김재규의 행동이 장준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장호권의 진술 외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이다.

1.4.4. 우발적 살해

  • 분노에 의한 우발적 살해
전제는 3, 내용은 변형인 4와 거의 비슷하다. 박정희와의 자리에서 김재규가 부마항쟁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온건한 대응을 주장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의 말에 대해 비꼬는 투로 비난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한 소리를 할 당시 차지철이 이때 전차로 밀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만화 박정희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차지철이 부마항쟁에 대해 캄보디아폴포트처럼 싹 쓸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경력에서 비교도 안되게 우위에 있던 사람인데 보잘것없던 차지철이 자신을 무시하기에 순간적 분노에서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도 뒤이어 쏘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차지철은 특전사 창설 멤버로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바로 전역했지만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7] 실제 3군단장까지 했던 3성장군 출신이다. 흔히들 김재규를 4성장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워낙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보니 사실 김재규는 예비역 중장이다. 의외로 10.26 당시 동석자중 한 명이었던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육군 대장 출신이다. 당시 참석했던 인물의 병역 사항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대장 예편, 김계원도 대장 예편, 김재규는 중장 예편, 차지철은 중령 예편이다. 별들의 향연 그만큼 차지철과 계급차가 컸다.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는 저격 이후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아 박흥주의 신발을 빌려 신는 등 김재규의 대응이 무척 우왕좌왕했다는 점. 특히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로 향하지 않고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육군본부로 갔다는 사실은 도저히 저격이 계획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현재로서는 세 번째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과 연계되어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설.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거사 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살해라고 보기엔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1.4.5. 감정적 요인

  • 영웅적 죽음에 대한 동경
일설에는 김재규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즐겨보았다고 하며, 이러한 영화에 흔히 나오는 주제인 목숨을 바쳐서 의를 이루는 '영웅적 죽음'을 동경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조갑재 기자의 주장이다.

  • 조상과 자신의 동일시
김재규는 자신의 조상 가운데 한 명인 '김문기'를 사육신 명단에 집어넣는 것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도 했다. 이는 역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권력 남용(…)이지만 김재규가 하필이면 '사육신'에게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그의 행적을 보면 심상치 않은 요소로서 연관을 지어볼 수 있다.
세조쿠데타의 대선배(…)로서 군사정권에서 계유정난을 '구국의 결단'의 한가지 사례로 교육할 정도로 추앙되는 인물이었다. 그 반면 사육신은 세조에게 대항하다 목숨을 바친 충성스러운 신하의 대명사로서 오래전부터 이름이 높았다. 게다가 사육신의 거사 방법은 실행원이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으로 들어가 술자리에서 기습적으로 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김재규의 행동과 유사성이 상당히 높다.

  • 건강설
중앙일보김진 논설위원은 발기 부전(...)을 비롯한 건강 문제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링크
실제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고 10.26 당시엔 중정부장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때의 간 기능 장애로 극심한 발기부전을 앓게 되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생겼고(...), 이것이 10.26 같은 암살을 저지른 한가지 먼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저 당시 김재규의 정신적 혼란에 대한 먼 원인을 추측한 것일뿐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말자. 해당 칼럼에 대한 비판

다만 이것이 김재규의 개인적인 성향과 맞물려서 '건강이 안 좋아 죽음을 앞두고 있는 몸'이라고 스스로 자각하게 만들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거사'를 기획하게 만들었을 개연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1.5. 엇갈리는 평가

성향에 따라 평가가 극명히 엇갈린다. 군부계열 보수단체나 인사들 사이에선 일국의 대통령을 저격한 원수이자 국가반역자라는 악평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자신의 어머니를 저격했던 문세광과 함께 아버지를 저격했던 원수나 다름없는 입장이기도 하다.[8] 그러나 이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에 원수를 갚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셈이다.반대는 어쩌고

반면 독재와 강압 속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재야인사 및 민주운동가 단체들에선 그래도 원수 취급 받진않지만, 평가가 또 나뉘는 편이다. 그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열사 재규어 장군니뮤ㅠ. 반면 그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자이며, 민주화 외에 석연찮은 루머로 박정희를 살해해서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살해 동기로 제시된 상기의 가설 중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인한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김재규를 유신의 독재를 종식시킨 주체로 본다면 독재 타도에 한평생을 바친 그들 자신보다도 김재규의 기여가 더 큰 것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다만 김재규의 행동을 민주화 의거의 하나로 본다고 해도, 이미 독재정권에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저항 행동으로 나서는 당시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행동의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1.6. 트리비아

김재규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할 때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았다. 의전과장 박선호는 그가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 잠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이며,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는 사단장 시절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김재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최초로 명예면관(예편과 비슷)을 당한 장교이기도 하다. 광복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자기 부하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미군 장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칼로 위협하다 면관을 당한 적이 있다. 이후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는데 이 때의 제자중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다. 위에서 말한 박선호와 전 국회의장 이만섭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면관 1년 4개월만에 군에 복귀하였다. 건국 초기 군과 경찰은 서로 총질까지 하는 등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 사람이 세운 학교도 있다. 지금은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중경고등학교가 그 학교로, 원래는 서빙고동 지금의 한강중학교 위치가 학교 위치였다. 중경고등학교는 설립당시에는 군 간부 자녀 전용학교였던 걸로 유명했고, 덕분에 박정희 정권 당시 후덜덜한 빽을 지닌 자녀들의 총집합소(?) 비슷한 곳이 되었던 과거가 있다. 그 시절에 학교 스쿨버스가 청계고가차도(마이크로버스 이상은 통행금지이다.)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는 도시전설이 있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비슷한 스타일의 교복은 폭풍간지였다고. 그런데 10.26 사건 후 학교 부지가 몰수크리. 마침 중경고 근방에는 오산고가 있었고, 한강중 근처에는 용강중[9]이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 위치를 바꿔버린 것.[10] 그 와중에 교훈이며 교표며 싸그리 갈렸다가 1999년에 와서야 교훈은 원래대로 환원됐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서는 그래도 역대 원장들 중 한 명으로 기록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사단장을 지냈던 6사단의 역대 사단장 목록에는 삭제당한 상태이다(...)

어른들과 술자리를 할 때, 제 때 술을 따르지 않으면 간혹 "박정희가 왜 죽었는지 아냐? 차지철만 술 따라주고 김재규는 술 안 따라 줘서 죽은거다!"라고 고인드립 농담을 하기도 한다. 위의 분노설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뼈있는 농담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원로이자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대표인 함세웅 신부는 2012년 8월 인터뷰에서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과 역사가 김재규 부장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기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목록에 자신의 조상인 문기의 이름을 넣도록 하기 위해 학계에 압력을 가하는 등의 추태를 보인 적이 있다. 사육신 항목 참고.


1.7. 매체에서

  • 망의 문
    정한용 씨가 정주영 회장이 연상되는 거대 재벌총수로 나오는 드라마. 여기서는 실명 대신 정보부 부장이라는 호칭아래 백찬기씨가 열연했다. 사진상의 김재규와 상당히 비슷했고 원래 정치자금 문제로 박정희와 같이 회장님에게 충고하는 1회성 출연이었으나 의외로 인기를 끌어 고정 게스트화 되었다. 여기서 박정희로 나온 사람은 연극인 고 이진수씨. 박정희와 정보부 부장 두 명은 실제 인물과 꽤 비슷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다.

  • 다큐멘터리 극장 - 12.12편
    KBS에서 방영된 12.12 사건 세미 다큐 드라마. 여기서는 김재규라는 이름으로 초기부터 나온다. 역시 백찬기씨가 김재규를 맡았고, 드라마 진행상 10.26 이후 전두환에게 체포되면서 리타이어된다. 이 다큐 드라마에서 최규하는 김성겸, 전두환은 박용식으로 이후 정치드라마의 고정 배역의 시초가 된 작품.

  • 야망의 세월
    유인촌이 주연을 맡은 당시 건설회사 대표였던 이명박의 전기 드라마. 이휘향에게 정치공작을 지시하는 부장님으로 백찬기씨가 나왔다. 김재규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나 몇 번 출연후 작중에서 대사로 각하를 저격했다는 언급이 나와 그가 김재규임이 확정되었다.

  • 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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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형씨가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10.26 사건을 일으키기 전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고로시마스(죽여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고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그런데 이것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 박정희 저격 후 체포되고 난 다음으로 사형선고 받고는 더 이상 언급이 있다가 5.18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되실뻔 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덧붙이자면 전작인 제3공화국의 김재규는 김동현이 맡았다. 6사단장 시절로 나왔는데 비중은 실로 미미했다.

  • 코리아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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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배우로 유명했던 故 김흥기 씨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은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화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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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윤식씨가 열연했다. 김재규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수작이다. 다만 조롱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리얼리티는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어차피 비트는 게 목적인 영화인데요

  •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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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가 포스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김재규 역을 맡은 김형일씨가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평소 외모가 그냥 김재규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김형일씨가 체구가 크고 목소리도 매우 저음의 굵고 패기있고 젊은 목소리인데, 실제 김재규는 체구가 큰 편이 아니고[11] 목소리도 하이톤에 말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때문에 이점은 약간 괴리가 있다.

  • 효자동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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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수가 연기하였다. 작중 묘사되는 10.26은 김재규가 술에 취해 갈지자 걸음으로 나와 부하한테 총을 빌리고 쐈다는 뉘앙스로 보여준다.

  • 이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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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관련된 원문이 삭제되어 짤만 존재하는 상태. 여포동탁을 살해하는 장면이라는데 어딜 봐도 10.26 사건의 패러디. 이말년 시리즈 하차 이후 이말년 서유기를 연재하기 전 삼국지를 검토한 적이 있고 그 중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이말년 집 침대에 장식되어 있다 카더라.

2.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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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948년 12월 11일생.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사무국 국장'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을, 1994년에는 '민주개혁정치모임 상임운영위원'을 1999년에는 '제1대 부산민주공원 관장'을 맡았다. 이 분의 경력과 위 항목의 김재규를 비교하면 묘하게 깨알같다. 여담으로 부림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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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드라마 '제 5 공화국'에서도 이순자 역 배우의 대사를 통해 이를 말하며 당시 비슷한 처지였던 '노태우'를 경계하는 내용이 나온다.
  • [2] 단기에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 [3]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 [4] 80도306 판결 참조. 내란죄에 있어서 목적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미필적 인식, 즉 자신의 행위가 범죄발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만 되도 행위자가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인해 구성요건이 충족된다. 즉 김재규는 박정희 를 죽일 때 국헌문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은 없었으나, 대통령의 사망이 국헌문란을 가져올 것을 미필적이나마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국헌문란에 대한 목적의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소리다.
  • [5] 이를테면 부마민주항쟁의 원만치 못한 수습이 있다. 10.26 당시 진술에도 차지철이 그 문제를 가지고 김재규를 까고, 박정희도 이에 동의했다는 사실이 나온다.
  • [6]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무장항쟁이 발생하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리비아 혁명 비슷한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 [7] 박정희는 훗날 육사가 되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었고 김재규도 이곳 2기생이었다.
  • [8] 이는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가 유력후보인 정몽준의 지지, 제휴 요청을 거부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정몽준의 지지자 가운데는 10.26 사태 재판에서 김재규의 변론을 맡은 강신옥 변호사도 있었던 것.
  • [9] 당시에는 용산여중.
  • [10] 하필이면 한강중이 이전한 곳에도 근방에 남중인 오산중이 있다. 이것 때문에 현재 한강중 성비는 여학생이 훨씬 많다.
  • [11] 박정희차지철, 그리고 김재규 세 명은 모두 160cm 초중반의 단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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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22 18: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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