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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last modified: 2015-01-31 17:51:22 by Contributors

(ɔ) Yi Han-cheol (circa 1812- circa 1893) from


金正喜, 1786년 ~ 1856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예가·석학자·증학자·학자이다. 추사체라는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 정도로 많이 알려졌으나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 가장 유명한건 역시 추사고, 그 다음이 완당. 말년에는 노과를 즐겨 썼다. 확인된 것만 총 72개로 한국사에서 아호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꼽힌다. 이름이 많은 이유는 그림마다 매번 다른 별명을 썼기 때문이라고.

경주 김씨였다. 쉬운 말로 노론 벽파 쪽 명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주이인데 화순옹주는 자식이 없었고 김정희의 조부가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직접 피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국중국의 옛 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충청남도 예산 출신.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혹은 1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machine 유씨라서

갓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는데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쥐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도.

7세 때 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상대 당파 남인 영수) 채제공이 보고는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 영재. 그의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를 사사했다. 정조 때 집안 친척들이 제법 죽었지만, 그가 승하하고 순조가 오르자 정순대비에 의해 아버지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어머니를 결혼 직후인 열여섯(1800년)에 잃고, 스무살때 부인을 잃고, 계모도 잃고, 스승 박제가도 잃었다. 3년상 후 순조 9년(1809년) 시에 장원급제한다. 다음해에는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방강(翁方綱), (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했다. 이후 벼슬에 나오지 않으면서 <사구시론>과 같은 책을 썼다. (본격 성리학 관념론 비판서) 1816년에는 무학대사고려 태조 왕건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비를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으로 고증해냈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인영의 조카사위인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1827년).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1830년) 안동 김씨우명의 탄핵으로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간다. 아마도 김우명이 공주목 비인으로 있을 때 파직된 것의 복수로 여겨진다. 이 때 그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나름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순조가 죽던 해에 복귀시키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온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도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거 밖에 없구나"라는 식의 말을 했다. 안동 김씨 기세에 눌렸지 그다지 내키진 않았다는 이야기.

1835년(헌종 1년) 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본격 복귀. 성균관 사성이조판서에 이르렀다. 하지만 5년 후 뒤집어 지자 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이후 8년간 유배당하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저번에 보내온 음식들은 태반이 썩었다며 좋은 음식 좀 보내라고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유배 중간에 부친 김노경과 재혼한 부인도 죽었다(1842 11월). 부인이 병들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그가 그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부인이 죽은 뒤였다. 두 달 뒤 뒤늦게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매우 슬퍼하며 내생에 다시 부부가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는 애절한 시를 쓰기도 하였다. 유배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다.

안동김씨-풍양조씨 대립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역을 하던 영의정 돈인과도 친했는데, 헌종의 묘지 옮기는 문제로 1851년 같이 파직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간다. 본격 남북순례 예순일곱의 늙은 나이였는데, 유배 기간동안 고대 를 연구했다.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도끼나 돌살촉을 생활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고, 토성 유적과 갈라서 보기를 주장했다. 본격 고고학자 다만 2년만에 (1852년 겨울) 풀려난다. 이로서 도합 3+8+2=13년 유배.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가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이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전에 쓴 글로 알려져있다.

친한 사람이 많아서 제자로 태호(민영익의 아버지)-민규호 형제, 최초의 개화사상가로 알려진 역관출신의 오경석,시,서,화에 능한 소치 허련 등을 두어, 중인사대부 가리지 않고 키웠다. 최대 3천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어릴적 흥선 대원군이 찾아와서 난초를 직접 배웠다고. 또한 를 좋아했고 다산 정약용의 친구로도 알려진 초의선사와도 깊은 친교를 다지기도 했다. 세대로 보면 정약용은 추사나 초의선사의 한 세대 위 쯤 선배이긴 하다. 추사가 초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야이 차덕후야! 나좀 보러 오라고!내 지금 말을 몰고 가서 스님의 차밭을 다 날려 버리겠어!' '난 스님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으니 차만 보내달라'는 식으로 떼쓰는 글도 많다.


국보로 지정된 완당한도 등을 남겼다. 이 그림은 추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갖다준 것에 감명해 그려준 그림이라고 전한다.

2011년 11월, 추사학 연구자인 김규선 선문대 교양대학 교수는 학술지 '한민족문화연구' 제38집에 기고한 '새로 발굴된 추사 김정희 암행보고서'라는 책에서 추사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활동할 때 쓴 친필 보고서를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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