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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옥

last modified: 2015-01-08 12:38:39 by Contributors


(사진은 서울시장 당시)

金玄玉
1926년 10월 27일 ~ 1997년 1월 9일

Contents

1. 소개
2. 일생
2.1. 군인 시절까지
2.2. 관료, 정치인, 교육자

1. 소개

한국의 전 군인, 관료이다.
좀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들에게는 원조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

근현대 서울특별시 개발사를 놓고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흔히 서울특별시의 3대 관선 시장으로 박정희 통치기간의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을 꼽는다.[1]

2. 일생

2.1. 군인 시절까지

1926년 10월 27일 경상남도 진주군(현 진주시)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8.15 광복 후인 1947년 육군사관학교 3기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0년 육군 제3항만사령관을 역임하였고, 1961년 5.16 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이듬해인 1962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2.2. 관료, 정치인, 교육자

1962년 예편 후 바로 부산시장[2]에 임명, 4년간 근무하며 관료 커리어를 시작하는데, 이 때부터 김현옥이란 이름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국 현대사에 각인되게 된다.

1966년, 윤치영의 뒤를 이어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전임자 윤치영 시장은 서울의 인구증가에 대해 강력한 개발억제노선을 취하면서 심지어 "지방민들을 이사 못 오게 법령으로 막아서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평양직할시?? 이는 당시 실권자인 대통령 박정희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개발을 외치는데 그 밑에 서울시장이 개발 반대를 하고 있으니... 그리하여 윤치영은 경질되어 다른 자리로 가고 부산시장이던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그 명성(?)답게 취임 다음날부터 숫제 서울의 지도를 바꿔놓을 정도의 대사업을 시작한다.

이 당시 김현옥이 벌여놓은(?) 대공사는

  • 세종로, 명동 지하도 건설 : 북한의 포격에 대비한 방공호를 겸했다. 윤치영의 서울 성장억제책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특히 박정희는 포병 장교 출신이라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 세운상가 사업 : 종묘앞에서부터 중구 필동까지,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공습 폭격에 의한 화재 확산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뚫어 놓은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이를 소개공지라고 했는데 이 공터는 6.25 이후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거대한 무허가 판자 집창촌이 되어 있었다. 김현옥은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까지 모더니즘적 입체 공중도시를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 강변북로 건설 : 1966년 홍수로 인해 서울시내까지 한강물이 역류하여 하수도가 다 넘쳐서 소동이 벌어지자 제방사업 및 교통난 해소를 위한 강변도로 정비사업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영등포 인근 제방 안쪽에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택지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여의도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야 신난다 땅이 생긴다
  • 여의도 개발 : 여의도에 제방(윤중제)을 쌓고 밤섬을 폭파했다.
  • 고가도로 및 터널 건설 : 1960년대 후반의 서울은 밀려드는 상경 인구와 전차, 버스 등이 뒤엉켜 극도로 혼잡한 상태였다. 또한 일본 도쿄의 부야 역과 평양의 건설 등에 자극받아 서울에도 고가도로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 때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하였고,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또한 남산 1, 2호 터널과 삼청터널, 사직터널도 이 때 건설되었다. 아현, 서울역, 서소문 고가도로는 청계고가도로와 연결되어 서울을 관통할 예정이었으나 예산부족과 기술부족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산터널의 원안은 1, 2호 터널이 중간에 교차하고 그 안에 약 30~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시설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 시민아파트 건설사업 : 19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무허가 건물이 판을 치고 있었고 지번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으며 밀려드는 인구로 주거난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아파트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건설 과정에서 비리, 부실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김현옥 시대 최대의 병크인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났고, 김현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그러나 주거난과 도심재개발에 의한 병크는 이후로도 끊이지 않아서 결국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대형 쟁의로 폭발하게 된다. 다만 이것은 후임인 양택식 시장 대의 일.

대체 몇 개를 삽떠놓은거냐

그런데 건설의 화신이자 불도저 시장이란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지하철 사업은 계획만 세워놓고 실제 삽은 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도 공사를 많이 벌여놓다 보니 서울시 재정이 파탄 직전이어서였다.(...) 재정담당자가 공무원들 월급을 못 줄 위기에 처해 국무총리실에 지급보증을 걸어놓고 시금고를 맡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직원들 월급을 주고 다시 메꿔놓고를 반복했다고 하며, 이 부채는 여의도 개발 후 양택식 시장이 여의도 땅을 팔아서 겨우 숨통을 틔워놓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10억원을 끌어와 지하철 1호선을 삽뜰 수 있었다는 건 덤.[3]

시장직을 물러난 후인 1971년에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노승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의 여파로 경질된 오치성의 뒤를 이어 내무부 장관으로 복귀, 1973년까지 있었다. 이후 박정희가 피살된 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관료형 부정축재자로 몰리게 되어 중앙 정계에서는 축출된다.

1981년 5월 경남 양산군(현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5년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에 무소속으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169,652표로 민주자유당 문정수 후보, 민주당 노무현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사망 당시 직접적 원인이 기도폐색인데, 한 마디로 노인이 감기에 걸려 가래가 끓어 수면 중에 사망한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한 원로 관료는 "서울시장 시절엔 그렇게 불도저처럼 온 동네 길을 뻥뻥 뚫어놓더니 어찌 갈 때는 자기 목의 가래 하나도 못 뚫고 가시는가." 하며 씁쓸한 말을 남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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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윤치영은 강력한 서울시 개발억제책을 썼기 때문에 박통시절 재임했지만 대개 서울 3대 시장에서는 빼는 추세.
  • [2] 이듬해인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다.
  • [3] 양택식은 철도청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철도 관련 사업에는 자신이 있어서 여의도와 함께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구간 사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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