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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last modified: 2015-04-05 00:53:16 by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 말기의 정치인
1.1. 개요
1.2. 생애
1.2.1. 갑오개혁의 총책임자
1.2.2. 비장하고 숙연한 최후
1.3. 평가
2. 야구 선수

1. 조선 말기의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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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볼수 있는 흑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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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다면 이런 모양새.
기럭지가 길어진건 신경쓰지 말자

金弘集

일국의 총리로서 백성에게 죽는건 천명이야!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1.1. 개요

1842년(헌종 8) ~ 1896년( 1년, 고종 33년) 양력 2월 11일

개화기의 정치인. 초명은 굉집(宏集), 호는 도원 · 이정학재. 시호는 충헌(忠獻).
온건개화파이며 갑오경장(갑오개혁[1]) 추진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2]이기도 하다.

사위가 이항복의 후손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부통령 성재 이시영이다.

1.2. 생애

아버지가 개성 유수였다. 1867년 경과정 문과에 급제, 그리고 정7품직인 승정원사변가주서에 임명된다. 부모님의 상을 5년간 치른 후 종3품 권지승문원부정, 부사과, 훈련도감 종사관을 거쳐서 3년간 흥양[3] 현감이 된다. 그 후 내직으로 승진하여 호조, 경조, 병조, 예조의 참의를 돌아가면서 지내고 1879년 돈녕도정을 지냈다.

화도조약에서 일본이 요구한 인천 개항, 공사 주차, 해관 세칙 등의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한달간 도쿄에 머물면서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된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협상은 실패했으나 이때 그가 가져온 책이 청나라 황준헌의 조선책략이었다.[4] 개화를 통한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관료와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참판이 되고 곧 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통상을 전담하는 당상경리사[5]가 되었다. 한때 위정척사파의 반대에 사표를 썼으나 얼마 안가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이 되었다(위의 당상경리사랑 같은 직위.).

1882년 3월, 5월 사이에 의 부관으로 미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도 함께 갔다. 그 후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호조, 공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83년 규장각 제학을 거쳐 1884년 초에 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瓣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하여 대외 통상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갑신정변 뒷수습을 위해 의정을 겸하고 1885년 일본과 성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종1품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있다가 1887년 다시 좌의정이 되지만 사임하고 수원부 가 되어 거기서 일어난 민란으로 좀 고생했다.

1.2.1. 갑오개혁의 총책임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총리교섭통상사무가 되어 청과 일본을 중재하면서 민심수습과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강조하였다. 드디어 1894년 7월, 일제의 강요로 세워진 초정부적 내정개혁 기구인 국기무처의 총재관[6]이 된다. 이 당시 그의 활약은 놀라운데, 12월에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갑오개혁의 총 책임자가 되어서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ㅎㄷㄷ.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군국기무처가 활동한 기간이 7월 말부터 12월 초까지였는데 약 120일간 210건, 하루에 2건을 처리한 셈이다. 으악! 워커 홀릭

이어 박영효와의 연립 내각이 수립되자 범 14조를 발표하고 제2차 갑오개혁을 시작했다. 이 때 의정부는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 군제 개편 등을 하였지만 역시 돈이 딸려서(…) 개혁은 중단되고 박영효와 갈등, 급진과 수구파의 갈등이 심화되어서 결국 사임하였다.

그 뒤에 박영효가 역모 혐의로 망명하자 다시 와서 이번엔 친미, 친러파와 제휴하여 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7] 이 때 삼국간섭이 벌어져서 일본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러시아 제국이 대두하자 안그래도 일본 우위의 방식이 마음에 안들던 고종은 김홍집을 파면, 1895년 5월 17일에는 갑오개혁의 무효를 선언해버렸다. 개혁 내용이 마음에 안들었다기 보다는 일본이 마음에 안들었다는 느낌의 행동이지만...

그 후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갑오개혁을 날려버린 고종의 조치는 휴짓장보다 가치가 없어졌고, 김홍집도 바로 복귀했다. 이 때 참여한 인물이 친일성향이 강한 희연, 유길준 등으로, 조희연과 유길준이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까지 추진하니 민중들의 반발이 격해졌다. 이런 틈에 끼어 있던 김홍집은 갑오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란 욕을 다 먹게 되었다. 이 때 김홍집은 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유길준의 만류로 그만뒀다. 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 반외세에 이제 국모 암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욕까지 먹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김홍집의 운명도 대충 정해졌다.

1.2.2. 비장하고 숙연한 최후

운명의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이 발생했다. 고종은 공사관에 오자마자 을미사적(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에 덤으로 법부대신 [8]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처형을 명령한다.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은 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다. 지금 나섰다가는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는 일본군"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건 천명이야!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싶지는 않소!"라고 뿌리친 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일개 순사에게 붙잡혀[9] 병하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분노한 군중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구타당하다 끝내 숨졌다. 군중들은 이에 끝내지 않고 이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그 시체를 끌고가면서 그야말로 광화문-종로 거리를 피의 거리로 만들어버렸다[10].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연좌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그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한편 살아남은 유길준, 조희연, 장석주는 경술국치 때까지 살아남아 선 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나마 강직한 유길준은 남작 작위와 상금 일체를 거절했다[11]. 조희연은 죽을 때까지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다(반납해서 세습하진 않음), 장석주는 대대로 작위를 세습하였다.

1.3. 평가

김홍집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 한때 김홍집을 일본을 등에 업고 한 개혁에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친일파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12]. 허나 그를 이완용, 박영효와 동급의 친일파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고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김홍집을 친일파라 한다면 일제시대 조선인의 90%는 친일파일 것이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한때 친일파 역적으로 매도되기도 했으나,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재평가되었다. 현재 그는 일본을 모델로 하여 개화를 통한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 그는 주변국 가운데 러시아를 가장 위협적으로 생각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과 청나라의 힘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3]. 러시아가 가장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시각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기 전까지는 타당한 생각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14]. 때문에 그를 애국적 친일파, 또는 친일적 애국자라 부르기도 한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편안한 말년을 보낸 이들과 달리, 일본 군대의 보호를 거부하고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도 거리에 나선 그의 행동은 사욕을 위한 행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사리사욕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일생 동안 그가 사욕을 채우기 위해 친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김홍집에 비판적인 이들조차 김홍집이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친일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 세력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위정척사파, 청, 러시아, 미국 세력과 제휴하기도 하였다.

애초에 갑오개혁은 일제에 의한 타율적인 개혁이었으나 자주적인 측면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고[15], 그 책임자들에도 친러파, 친미파가 포함되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김홍집은 그 갑오개혁의 얼굴마담이자 중재자로 계속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과 연립 정권을 구축한 것은 일본이 김홍집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이 김홍집을 신뢰하고 있지 않음에도 그에게 공동으로 정권을 맡긴 것은 김홍집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명백한 친일파인 박영효에게 단독으로 정권을 맡길 경우 반발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일본은 김홍집을 얼굴마담으로 이용한 것이다.

줏대가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풍전등화의 정국에서 나라를 살려보기 위해 여러 세력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히려 한 가지 세력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친일, 위정척사, 친러, 친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등용한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영의정과 총리대신을 지낸 것, 그리고 여러차례 정권이 바뀌면서도 지속적으로 등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한말 대소신료 중에 정무 능력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탁월한 탓에 별명이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라고 불렸으며 일부 골수 위정척사파(최익현)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홍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지어는 갑신정변에서 살해당 한 홍영식을 거만하다고 까던 매천 황현마저도 "그의 죽음에 세인들은 모두 애석해하였다."라고 하였다.

시인이자 사학자로서 죽기 전까지 친일파 연구를 해 왔던 임종국씨는 김홍집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김홍집의 최후가 이렇게 숙연하거늘 어느 누가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겠는가?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게 천명이라고 갈파한 살신성인의 투철한 정치 책임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김홍집을 '한말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할 수도 있을거 같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출신의 구한말 개화기 연구자인 박은숙은 저서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에서 김옥균을 찬양하기 위한 반대급부로 김홍집을 까기도 했다[16].

2. 야구 선수

김홍집(야구)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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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에 을미개혁(단발령)이 추가되기도 한다.
  • [2] 이후 의정대신으로 개칭되었다.
  • [3]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
  • [4] 저 책의 내용을 압축하자면 조선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중국(중국과 친하고), 결일본(일본과 손을 잡고), 연미국(미국과 연대)을 해야하며 이 근거로 미국은 정의의 나라니까 조선을 이롭게 만들어줄거라고 말한다. 사실은 일본을 통해서 조선과 수교하려했던 미국과 조선의 수교를 중계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의 우위를 보이고 싶었던 것이 책의 목적이었다. 실제로 이 책을 계기로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고 이후 여러 국가가 청을 통해서 조선과 연결되니 청으로서는 대성공작이었다. (물론 이홍장과의 견해에는 어느정도는 거리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일본과 손을 잡으라는 대목이 그랬다.) 어쨌든 이 책의 내용을 본 위정척사파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악을 쓰며 만인소를 쓰는 등 대단히 불쾌해했다.
  • [5] 지금으로 말하자면 외교통상부 장관 계열.
  • [6] 양지아문(측량산업에 집중한 오늘날의 국토부)의 으뜸.
  • [7] 이 때 친러파로 유명한 이가 바로 이완용이다.
  • [8] 초명은 장석주이다.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하도 박식하여 '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9] 혹은 내무실에서 경무청 순사들한테 잡힌 후 참살당했다고 한다. 물론 그 후에 시체가 훼손된건 변하지 않는다.
  • [10] 조선 말 선교사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부인은 길거리에서 온 몸이 피에 물들고 눈빛이 무서운 사람들을 보았다고 하면서 알고보니 그들이 김홍집을 죽였다고 저서인 15Years Among Top-Knots(상투의 나라 조선, 조선 견문록이라고 출판되기도 했다.)에서 서술하고 있다.
  • [11] 본인은 남작작위는 거절했지만, 은사금으로 나온 상금은 받았다. 물론 유길준 일족은 작위를 받은 사람과 골수 친일파가 된 인물이 넘쳐난다.
  • [12] 이완용이랑 함께 일하고 박영효랑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희연, 장석주의 운명을 보자. 그런데 정작 당시 박영효는 김홍집을 친일파라고 깠다.
  • [13] 이 생각이 바로 김홍집이 처음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온 조선책략의 내용이다. 조선말기 개화파들의 특징이 자신들이 처음 배운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청나라에 가서 양무운동을 보고 온 사람들은 친청파가 되었고, 일본가서 메이지 유신 접한 사람은 친일파가 되었고, 미국에 보빙사로 간 사람들은 친미파가 되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이런 식이었는데, 김홍집은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친일, 조선책략으로 반러가 된 경우이다. 당시 개화파들의 진정한 한계는 여기에 있다.
  • [14] 이 생각은 이후 고종과 독립협회의 대립과정에서도 다시 재현된다. 고종은 일본을 배제하고 러시아를 포함하여 협정을 맺으려고 했고, 독립협회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을 포함하려고 했다. 모든 것을 아는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에 더 관심이 많았던 제정러시아가 한반도 본토를 1차 타겟으로 잡고 있던 일본보다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김홍집이 이걸 몰랐다고 해서 잘못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독립협회의 경우는 친미, 친일 세력이어서 자신들의 연줄인 미국과 일본을 옹호하려고 저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데 비해서 김홍집은 당시에 만일 살아서 정계에 있었다면 그냥 고종의 정부를 위해서 일했을 위인이다.
  • [15] 1차 갑오개혁 시행 시기는 청일전쟁 와중이라서 일본이건 청이건 조선에 세세한 부분까지 건드릴 여유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친일내각이 포함되는 것은 박영효가 들어온 다음부터
  • [16] 박은숙의 일방적인 김옥균 찬양에 대한 비판으로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48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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