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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last modified: 2015-03-19 11:48:36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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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옛 군현중 하나.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313년 이후의 낙랑군
4. 떡밥
5.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설에 대한 반론
6. 미디어에서의 등장


1. 개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1년간의 전쟁끝에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 중의 하나. 위치는 지금의 대동강 일대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원래는 한나라 출신과 고조선 출신이 구별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아예 낙랑군 출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초기 낙랑군의 상황은 일단 한서 지리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조선 지역의 관습법 혹은 자체적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관리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에는 한의 법률을 시행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인 죽간들이 발굴되면서 '시도는 했다'는 정도로 정리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함몰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고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한사군의 다른 군현은 임둔[1], 진번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고구려현의 반발로 후퇴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낙랑은 이 폐지된 군의 관할 구역 중 관리할 여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흡수하면서 한때 인구가 40만이 넘는 성대를 누렸다. 이 때 낙랑은 25개 현을 산하에 두고 함경남도 ~ 강원도 방향의 '영동 7현' 지역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방향의 옛 진번 지역에는 남부도위를 두었는데 이는 이민족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보인다. 다만 부도위가 설치된 지역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았다.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은 되도록이면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현지에 적응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형 동검 문화가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평양 정백동 고분군의 '부조예군', '부조장인' 등의 인장이 발견된 점 등으로 유추한 것이다. 또한 삼한의 군장으로 추정되는 염사치의 귀화 시도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나 초기 백제신라가 낙랑에게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것 등을 통해 보아 주변국과의 관계 또한 낙랑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보인다.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 삼한, 등의 사이에서 동방의 외교 창구가 되었고, 주변국에 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을 전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변국의 유력층에게는 낙랑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묘제로는 덧널무덤이 나타난다.

이러한 부를 기반으로 전한 - - 후한의 교체기 때인 25년 토인(土人,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32년 경 등장하여 37년 경 멸망하는 최씨낙랑국도 낙랑군과 같은 지역 혹은 낙랑군의 일부 지역이 독립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것이 맞다면 이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 혼란기에 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하여 독립 세력을 일소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광무제가 44년에 살수(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되어 있어 다소의 혼란은 있다. 어쨌건 이 때 부도위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광무제의 일관적인 정책이기도 했지만 동부도위 지역, 즉 영동의 7현이 버려졌다. 아마도 고구려와 같은 이민족의 성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세기 중반까지 낙랑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해진다. 부여의 111년 침공 기록이 있지만, 그것을 딱히 쇠퇴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수의 인구가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한 군현 공격이 두드러지는 등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요동의 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삼한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전하는 등 다시 재건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북방에 대한 견제는 어려워졌는지, 낙랑군은 황해도에 방군을 건설[2]하면서 중심축을 남쪽으로 돌린다.

3세기 중엽에는 위나라관구검이 공손씨의 관할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위나라와 싸웠다가 대차게 깨졌고, 낙랑 · 대방군이 삼한 8국의 영유권을 주장한 데 대해 마한 세력이 반발하여 군현을 공격했으나 역관광을 타 마한 또한 쇠미해졌다(원문에서는 아예 '멸망했다'고 되어 있다). 백제도 여기에 얽힌 것 같긴 한데, 포로를 잡았다가 돌려주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어서 마한이 움직이는 통에 숟가락 얹은 정도라는 것이 중론. 하여튼 낙랑군은 이 때 주변국에 제대로 힘을 썼고, 고이왕도 혼인 관계를 맺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중국과 교통이 재개된 것도 무색하게,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반에는 가 멸망하고 서진이 세워진 뒤 팔왕의 난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본국과의 연결고리는 사실상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끝내 미천왕이 이를 수복했다. 백제의 분서왕이 낙랑을 공격했다가 암살당하는 등 과거 삼한 지역 또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미천왕 대인 313년 낙랑이 병합되었고,[3] [4] 314년에는 대방군 또한 고구려의 산하에 들어갔다.

물론 낙랑군이 군사적으로 무너졌다고 해서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2 ~ 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문화의 침투를 동반한 것이었고, 광개토대왕 대 남부 7성의 건립이나 평양 지역 9개 사찰의 건립 등 정지 작업을 기반으로 장수왕 때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한편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 복원을 시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나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이글루스 블로거 '야스페르츠'의 글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3. 313년 이후의 낙랑군

낙랑군이 313년에 미천왕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낙랑군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존재했다. 물론 이 낙랑군은 평양에 있던 그 낙랑군과는 다르다.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멸망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에게로 갔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새로 뒀다.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 그후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고 이때쯤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대에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가 세운 기존의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요서 낙랑군에 대한 기록들을 기존의 낙랑군에 대한 기록인 듯이 왜곡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하기도 한다.

4. 떡밥

단재 신채호는 낙랑군이 한반도에는 없었고 사실은 요동군을 갈라서 낙랑군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으며, 인보는 이러한 한사군 요령설을 기반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낙랑 공략을 요동/요서 공격으로 변화시키면서 요서경략설을 심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 이후의 주장에서는 대릉하나 난하 부근이라 하니 요동이 아니라 요서로 미는 듯. 아니 난하요수설을 또 따라가면 거기가 요동이 되기는 한다. 왜 이 모양이 되냐면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요동'은 고구려 줘야 하니까... 이렇듯 내적으로도 자체 모순이 심각하다. 이것이 요즘도 저질 떡밥(특히 환빠들의 주요 떡밥 중 하나)으로 계속 살포되고 있는데, 평양에서 대거 중국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미 폐기된 가설이다.

대표적으로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 신사비, 영광 3년명 동종(銅鍾)[5], 낙랑군 봉니[6] 등이 있다.

이 폐기된 학설을 가지고 김진명은 소설 고구려까지 써서 베스트셀러랍시고 밀고 있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낙랑군은 거의 조선 총독부 수준. 나중에는 고구려가 낙랑군 + 중국인을 조선총독부 + 일본인 몰아내듯 죄다 몰아낸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 실제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연구서 '낙랑군의 역사'에서는 아예 낙랑인이라는 혼합 공동체가 고유의 문화를 영위했다고 주장한다. 고대, 중세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오랜기간 지내다보니 섞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 비슷한 사례로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을 들 수 있는데, 서양에서 온 십자군들은 고작 백여년 만에 이슬람 문화가 혼합된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다만 북한에서는 한사군 요서설이 예나 지금이나 정설이다. '감히 평양에 중국의 식민 정권이 들어섰다는 역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이유 때문인 것 같지만,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벽돌무덤 등은 '한의 상인들이 교역하다가 세운 것 같다'는 가설로 땜질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고고학계에서 가장 늦게서야 바뀌는 풍토가 묘제라는 사실로 반박 가능. 이해가 안 된다면 한국에서 '뼈를 묻겠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고조선의 수도를 다시 평양으로 비정하게 된 이후부터는 평양의 고조선은 멸망했으나 한사군은 평양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즉 한사군 시기의 평양은 공백 상태... 뭐 대충 '고조선인들이 저항해서 못 들어오고 이름만 있었다가 고구려가 빨리 커서 다 먹었다'고 때우는 듯하다.

다만 낙랑군 외에 고구려에 병합 된 최씨낙랑국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얼른 통일되어서 파 봐야 답이 나올듯.

5.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설에 대한 반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아래의 글이 그 반론 중 하나인데 무엇을 믿을 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중국의 정사 문구, 저명한 중국 사가들의 주석, 평양 방면의 왕광묘에서 출토된 낙랑태수 인장, 낙랑군 인구 조사 목간, 2000여 기가 넘는 낙랑고분 등으로 보아,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설치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심히 문제가 있다. 고분에서 나온 이배(耳杯), 칠기(漆器) 등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또 낙랑군 목간은 이동이 가능한 것이므로, 평양 방면에서 낙랑군 목간이 발굴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낙랑군이 전한 때부터 서북한에 설치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6. 미디어에서의 등장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는 삼국지 7에서부터 등장했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논란이 많았던 무렵 출시된 삼국지 10에서 게등위가 위의 저질떡밥과 관련해 태클을 먹였고, 위치를 상당히 왼쪽으로 옮긴 후 동답이라는 지역으로 개조했다. 이 덕분에 일본판의 데이터와 한국판 데이터가 어긋나는 일이 발생했다. 별 문제는 아니지만…. 사실 태클걸거면 7탄부터 다 먹여야 했는데 이미 출시된 걸 어쩔 도리는 없고 포기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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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임둔의 위치 때문에 좀 골치 아파지기는 경향은 있다.
  • [2] 남부도위가 위치하던 지역이다.
  • [3] 서구 학계에서는 이 313년을 한국사의 시작이라 보고 있다. 이 사람들 기준이 참 깐깐한게 옥스포드 영국사 보면 웬 청동기 시절 부족연합국가 같은 나라까지 다 조명해놓고 있으면서도 로마제국의 영향은 인정하고, 나라다운 나라가 출연한건 그 이후라는 식으로 기술해놓았다. 중국사 연구만 하더라도 풍부한 고대사료가 있지만, "유물, 유적 나오기 전엔 못믿겠다." 하는식이다. 이런 특성의 호오를 표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보다 설득력있게 접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 [4] 우리 일반인들, 유학생들이 쓸 수 있는 방법을 2가지 들자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 대표사례인 "자학적 식민사관", "창씨개명으로 대표되는 민족문화말살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자국 홍보를 많이 하는고로(마이클 크라이튼 소설 <떠오르는 태양>에 이 부분이 잘 묘사되어있다), 많은 서구인들이 '경제대국' 일본의 역사를 통해서 동양사를 접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학 중이신 분들이라면 미심쩍은 자료는 "출처"를 확인하여 나름 반박자료를 만드실 것을 권해드린다.
  •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永光 3年銘 銅鍾'으로 검색하면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악기 종(鐘, 오른 쪽이 아이 동 童)이 아니라 술잔 종(鍾, 오른쪽이 무거울 중 重)을 쓴다. 기원전 41년의 유물로 효문제의 군국묘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효문제묘동종', '효문묘동종'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기원전 40년 군국묘 제사는 중단되었다. 한편 SBS에서는 해상도 차이가 나는 사진이나 다른 방향에서 찍은 사진 같은 것을 모아놓고 '사진마다 모양이 다르니 날조다!' 운운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관련 석박사의 의견은 듣지 않고 골동품 상인에게 검증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퍽이나. 기타 부정론은 여기 참고.
  • [6] 죽간 혹은 목간을 묶고 봉할 때 썼던 흙에 도장이 찍혀 굳은 것으로, 현재 약 200여 개 가량이 발굴되었다. 일부 조작된 유물이 있으나 많은 수는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환빠들은 일부 조작품을 근거로 전부 날조품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면 전례 없이 최초에 등장한 봉니는 왜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외에 봉니가 '편지'에 쓰이는 것이라며 낙랑군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낙랑군에 보내지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봉니는 단순한 문서 보관용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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