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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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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17일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Contents

1. 소개
2. 명칭 문제
3. 배경
4. 지옥도
4.1. 난징 안전지대
5. 그 후
6. 이것을 기억하려는 움직임
7. 학계의 해석
7.1. 총 희생자수
8. 일본에서
8.1. 대학살파
8.2. 부정파
8.3. 중간파
9. 유언비어
10. 중국과의 마찰
10.1. 관련 영화
10.2. 그외 매체
10.3. 참고문헌
10.4. 참고


중국어: 南京大屠殺(난징 대도살)
일본어: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혹은 난징 사건(南京事件)[1]
영어: Nanking Massacre (혹은 The Rape of Nanking)
베트남어: Thảm sát Nam Kinh
태국어: การสังหารหมู่นานกิง
필리핀어: Masaker sa Nanking
인도네시아어: Pembantaian Nanking
말레이어: Pembunuhan Beramai-ramai Nanking
독일어: Massaker von Nanking
러시아어: Нанкинская резня
벵골어: নানচিনের গণহত্যা

1. 소개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쟁범죄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중국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대학살 사건.

일본군은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에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적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2]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약 9만명정도가 학자의 의견이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 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당연히 난징 한곳에서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2. 명칭 문제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 영어로는 Nanking Massacre. 일본에서는 '학살'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난징 사건"으로 불러왔다. 물론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근래에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가는 경향도 보이고있다. 야마가와출판사의 상세일본사(詳説日本史)와 도쿄서적에서는 여전히 난징 사건(南京事件)이라고 부르지만, 데이코쿠서원은 난징 대학살, 기요미즈서원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가와출판사에서는 의 상세세계사(詳説世界史)와 일본문화출판에서는 난징학살사건이라고 부르는 등이다. 또한, 2006년의 중일수뇌회담의 결과로 진행된 '일중역사공통연구'의 논문의 일어판에서도 '난징학살사건'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역사왜곡 세력만 득시글대진 않는다. 문제는 채택이 되어야 말이지.

3. 배경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난징점령 입성을 다룬 일본 아사히 신문 뉴스. 우와앗!!!

1937년 일본은 국민당 군 주력 80만명을 붕괴시키고 베이핑, 톈진, 상하이를 점령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일본군의 개전 목표는 중국 화북을 확보한다는 것이었고 2차 상하이 사변 이후로 화북 전역을 장악한 후였다. 이에 일본군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고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을 통해 장제스에게 화북과 내몽골을 사실상 할양할 것을 요구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왕징웨이 등은 이미 일본군이 난징 코앞까지 전진한 상태에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장제스는 타이후 호수 양안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 조약을 거부했다. 이에 일본군은 건방진 중국의 콧대를 꺾기 위해선 수도를 난징을 점령할 필요가 있다고 난징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상하이에서 난징에 이르는 가도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학살을 저지르며 전진했다.

1937년 10월 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당 수뇌 멤버들은 난징을 전략,전력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유일하게 탕셩즈 한 사람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해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11월 15일 수도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는 우한으로 옮겨 철퇴하고 장제스와 탕셩즈와 십여만 병사들만이 남았다. 12월 7일 난징 외곽 방어선을 격파한 일본군은 난징을 삼면에서 포위하고 12월 10일 정오까지 항복할 것을 요구했지만 탕셩즈는 성문을 닫고 배와 다리를 모두 파괴한 다음에 거부했다. 이날 장제스도 난징을 빠져나갔다. 12월 10일 오후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에 맞서 매우 치열하게 싸웠지만 성벽이 폭파되고 일본군이 시내로 난입하자 사태가 불리해진 것을 깨달은 탕셩즈는 총퇴각령을 내린 다음에[3] 난징을 빠져나가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달아났단 소식을 들은 중국군은 동요하여 와해되었고 일본군은 삽시간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에 미처 달아나지 못한 난징 시민들과 중국 패잔병들은 강을 건너 달아나려 했지만 탕셩즈가 퇴로를 끊어놓아 달아날 길이 요원했고 일본군이 강 건너를 장악한 후였다. 결국 양쯔강은 피로 물들었고 중국군은 대부분 총을 버리고 항복했고 난징은 일본군 손에 완전히 떨어졌다.

그리고 난징에는 아직 50~60만에 달하는 패잔병들과 시민들이 남아있었다.

4. 지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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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마경(人外魔境). 헬게이트. 이 어떤 말로도 난징의 참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국민당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4] 이들 중 과연 몇이나 패잔병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전투의지를 상실한 패잔병을 학살하는 것도 크나큰 전쟁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만적이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서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인 포로나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연습이나 목베기 시합에 사용된 것. 여기서 일본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가 10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다시말해 100인 참수 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다. 이런 천하의 개쌍놈들. 더 기가 막힌 건,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무슨 스포츠 시합 중계하듯 이 베기 시합을 대서특필했다는 것. 심지어 이를 통해 진검으로 베는 기술을 연마한 잡것들도 있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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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실제 기사↔ 100인 베기 초기록(엄청난 기록), 무카이 106 노다 105, 양소위 거기에 연장전. 벤 놈이나 기사로 쓴 놈이나 보통 미친 놈들이 아니다.전범재판때 벤 놈 뿐만아니라 이거 기사화 시킨 새끼도 미군이 기관총으로 날려버렸어야 하는데[6]

당연한 이야기지만 적 전투원과 싸우다 목을 벤 것이 아니면 100% 전쟁 범죄니 두 장교 모두 당연히 전후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는데, 사형이 확정되기 직전까지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웃기게도 당시 기사를 펼치며 자랑하던 이들이었지만 이 기사가 증거가 되어 자신들을 사형시키게 되자 왜곡이라고 발버둥쳤다고 한다.

이외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田中軍吉)라는 범죄자도 있었다. 역시 전후 붙잡혔고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문에 실릴 때는 아주 자랑스럽게 큰소리 치던 이 인간도 자기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왜곡이라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무카이, 노다와 같은 날 총살당했다.[7]

여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아니, 더 심한 꼴을 당했다. 전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위안부들도 상당수가 저런 식의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반항의 기미가 보인다거나,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성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죽음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특별히 이유가 없이도 학살당했다고 한다.

전후재판에 따르면 약 2,000명의 여성이 강간당했다.[8] 현재는 8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숫자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산채로 창자를 꺼내거나 유방을 도려내거나 벽에 못박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으로 외마경이자 쇼크 사이트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 이것도 모자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딸을,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게 했다고도 한다.

관련 증언에 따르면, 아무 집이나 찾아가 어머니를 강간한 다음 울부짖는 딸과 함께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 그 안에 수류탄을 던진다음 우물문을 막았다는 천하의 개쌍놈 소리가 나올 정도의 악행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여자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들도 닥치는대로 강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이 중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에도 일본군들이 민가에 들이닥쳐 소년을 집단강간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게다가 '''일본 육군의 교범 자체가 민간인은 죽이고 그 지역은 모두 초토화하고 물자는 약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고 집단강간을 대놓고 방조하기도 했다. 교범에다가 저런 소리를 한 학살에 참가한 제6사단장 다니 히사오는 물론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장교들도 태연히 떠들고 다니던 것이 당시 일본육군 내의 분위기였으니, 중국에 대한 멸시감+누적된 전쟁피로+교범에도 쓰여있는 학살과 약탈의 공인 및 전근대적인 군복무로 인한 사병들의 억압된 불만이 한꺼번에 결합하면서 폭발한 것이 남경학살이다.

4.1. 난징 안전지대

당시 독일 나치스 당원이자 지멘스의 사원이었던 욘 라베(John Rabe)가 주도해 난징에 남아있던 외국인 선교사, 기업가, 외교관들과 같이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한 것이다. 이는 난징 전투에 앞서 있었던 상하이 전투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만든 '상하이 안전구'를 본딴 것으로, 난징 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해 약 2~30만 명의 중국인들을 일본군의 만행에서 보호하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

자세한 것은 욘 라베 항목 참조.

5. 그 후

이런 광란의 6주간이 지나고, 1938년 봄에야 대학살은 종결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생체실험같은 일들은 있었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모택동은 호기롭게 우린 승전국이니 배상같은 것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에선 중국에 배상금으로 최소 500억 달러는 줘야 할 것이라고 벌벌 떨고 있어서 일본 대표들이 당황했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당시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던 일본과 친해지기 위해 이러한 선택을 한 중국과 같은 사례가 있는 반면, 일본의 등골을 뽑아먹어 멋대로 사용한 국가도 있는데 다름아닌 대한민국박정희. 한일기본조약 참고. 배상금을 땡처리해버린 결과 국가에 충격을 몰고 온 중국과는 달리 한국은 배상금 처리조차 비밀에 부쳤고, 받아먹은 배상금을 받는 창구조차 꽁꽁 숨겨놔서 실제로 배상을 받은 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 일개 개인의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중국이라는 나라보다도 수준 떨어지는 최악의 한 수로 평가되며 그 결과 한일관계마저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6. 이것을 기억하려는 움직임

당연히 중국에서 영화화가 많이 되었는데 웬만한 걸작도 일반인이 보기 힘들 정도의 묘사가 있으니 주의하자.[9]

뉴트 깅그리치의 대체역사물 진주만[10]에서 난징학살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역시 욘 라베가 잠시 나온다.

중국계 미국인 2세인 아이리스 장《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11](원제: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1997)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적나라하게 까발렸다.[12] 이 책은 서구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말빨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대사를 생방송으로 캐박살내며 미국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한국어/영문 할 것 없이 위키백과 항목의 상당수와 리그베다 위키의 바로 이 항목의 많은 부분도 이 책을 인용한 것.

그러나 그 후 아이리스 장은 일본 극우의 표적이 되었으며 상당한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다. 2004년 11월 9일 자살했는데, 일본 극우들은 "아이리스 장의 유서에는 일본 우익에 관한 기술은 없다"면서, 장이 자살한 건 자신들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며 우기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장이 거짓말을 꾸며낸 데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고까지 우기고들 있다. 그 근거는 "유서 내용에 일본 우익이란 내용이 한 단어도 언급되지 않았다"라는 거. 천하의 개쌍놈들

하지만 아이리스 장은 일본의 이런 왜곡 등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였던, 대단히 용감한 여성이다. 선진국이 묻어두려 했던 치부에 다가가려 하는 건, 보통 의지와 강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여성이 단순히 우익들의 협박을 못 이겨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건, 어떻게 보면 고인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그녀는 이후 후속타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각종 막장 사례와 잔학한 실태 때문에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우익들의 협박으로 자살했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실제로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일본 우익에 대한 쓸데없는 공포심만 자극한다는 말도 있다. 어찌되었건 그녀의 명복을 빌자.

2010년 중국 난징에서 난징대학살 73주년을 맞이하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통곡의 벽'이라는 대규모 추모식을 열었다. 홀로코스트만큼 중국인들에게 매우 가슴아픈 사건이기 때문에 바이두 백과의 "南京大屠杀"(난징대학살) 문서에 들어가면 페이지 전체가 흑백으로 되어있고 중국친일파중국어를 할 줄 아는 넷우익들의 반달을 우려해 일반 회원이 편집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7. 학계의 해석

7.1. 총 희생자수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수가 얼마냐는 것에는 학자에 따라 여러의견이 있다. 일본학자들은 중국정부보단 낮게 주장한다. 근데 이게 오히려 유럽권 학자들보단 높을 경우가 많다. 예로 Tomio Hora 는 일본인인데 20만명을 주장한다. 근데 Jean-Louis Margolin는 프랑스 사람인데 5-9만명을 주장한다. 오히려 일본인 학자가 11-15만명은 많게 주장하는 것이다.

난징대학살 희생자수
주장 총합 시민 희생자수 군인 희생자수 군인 희생자의 기준 희생자 공간범위 희생자 시간범위 출처
중국정부 30만 난징시

#[13]

Tomio Hora 200,000 80,000 - 100,000 100,000-120,000 모두 난징시와 그 주변도시 1937년 12월 초부터 1938년1월말까지 #[14]
Tokushi Kasahara 160,000-170,000 80,000-90,000 80,000 포로들, 저항하지 않은 군인들 난징시, 난징 시 변두리, 난징을 둘러 싼 여섯 도시 1937년 12월 1일부터 1938년 3월 사이 #[15]
Yutaka Yoshida 최소 10만이상(30만까지 가능) 시민 희생자수 군인 희생자수 포로들, 저항하지 않은 군인들 1937년 12월 1일부터 1938년 3월 사이 1937년 12월 1일부터 1938년 3월 사이 #[16]
Jean-Louis Margolin 50,000-90,000 30,000 30,000-60,000 포로들, 저항하지 않은 군인들 난징시, 난징시 변두리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 까지 #[17]

8. 일본에서

일본에서 난징 대학살을 대하는 자세는 3가지로 나뉜다. 대규모 학살을 인정하는 대학살파(大虐殺派), 학살을 아예 부정하는 부정파(不定派) 혹은 환상파(まぼろし派), 그리고 이 중간에 있는, 학살은 있었으나 사상자의 규모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는 중간파(中間派)가 있다.

이제까지의 일본 여론에서는 대학살파가 주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간파와 부정파가 그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말이 있다.[18]

8.1. 대학살파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소수의 시민들이 만든 비정부단체라고 무시만 할 것은 아닌 게, 이 단체가 발촉한 지 얼마 안 되어 난징대학살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다.

모토미야 히로시의《나라가 불탄다》의 경우는 이 사건을 넣었더니만, 항의를 받아 작가가 실의에 빠져 연재를 빨리 끝내버렸다. 이 만화가 일본의 순수한 범아시아주의와 일본중심의 대동아 공영권의 대립과 좌절을 그려서 한국인들에게는 고까운 장면이 많음에도 이런 곤욕을 치른다.[19]

그나마 테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그 실태에 대해 꽤나 자세히 언급된다. 하지만 만화 자체가 실제 역사보단 픽션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구성이라 작중 나오는 '히틀러 유대인 음모론'처럼 학살 부분도 테즈카가 각색한 픽션으로 알고 있는 일본 독자가 많다.

하지만 난징 대학살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과거의 사례[20]를 들어 일본의 잘못을 희석시키려는 부류도 있다는데 이런 사람들 은 실제로는 부정파에 가깝다. 실제로 그대로 증거되면 논점일탈을 발동한다

8.2. 부정파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인간들.

당시 난징의 참상을 찍은 일본 기자들의 사진중 상당수가 검열로 전쟁 후에야 나오게 된다(흔히 접하는 사진의 원판들 옆에는 빨간 도장으로 검열이 찍혀 있다). 기자 하나는 관련 기사 및 소설을 쓰다가 고등계에 끌려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1]

전범 재판에서도 중요 증거로 인정받았고, 일본의 역사학자들조차도 이 사건을 실제 사건으로 인정을 하고 있지만, 우익세력은 아직도 이걸 부정하고 있다. 아예 부정하는 견공자제분들은 학살 자체가 없었다는게 기본 입장이다.[22] 사망자는 대부분 전쟁에 휘말려 죽은 민간인, 탈출하다가 배가 전복된 군인들이라는 것.

이 난징대학살 부정파論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現 아세아 대학 교수가 있다. 이 사람은 대표적인 극우파로 대표 저작이 <난징 사건 증거사진을 검증한다.>이다. 이 책의 내용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사진에 나와있는 것들을 분석하고 '이래서 날조' 이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는 '중국인이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다닌 것.' 혹은 '장제스의 국민정부의 날조극' 이라고 쓴 것. 물론 그게 근거가 될 턱이 없었고, 결국 이 작자는 난징대학살 생존자한테 제대로 걸려서 법정소송에 끌려가 패소당했다.#

이런 데도 일본 넷우익, 극우파들은 지금도 '학살은 없었다'고 하고 있다(정계에서는 이시하라 신타로가 대표적인 인물)*

이들의 주장을 들면 다음과 같다.

  •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

    • 반론: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의 경우는 그 범위상의 문제이고 가장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적십자 사및 안전지대의 자료를 보면 학살 자체가 없기 보다는 숫자의 차이에 불과하다. 몇만이라도 학살당하거나 강간당하는 것과 인구문제는 무관한 문제이다. 사실 이 기준이라는게 '학살의 지역이 난징 시내인가? 난징을 포함한 주변 지역인가?'로 달라진다. 일반적인 일본의 시각으로 나오는 도시의 규모를 보면 사망자 수십만은 어렵다[23]는게 이런 논지이다. 실제로 난징 학살은 덴노가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터. 일반적으로 이런 시각을 가진 쪽은 난징 시내에서의 학살만 규정한다. 중국정부의 입장은 그 주변지역도 같이 보는 셈.[24] 말도 안되는 과장이 아니면 어차피 주변에서 벌어진 학살이라면 포함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몇십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 것. 더불어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날의 남경시의 범위와 그 당시의 남경직할시의 범위는 10배가 넘어갈 정도로 차이가 난다.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559.28평방킬로미터지만, 오늘날의 남경시는 6582.31평방킬로미터다. 둘 중 어디의 기준을 적용할지에 따라 그만큼 수치도 달리 나올 수 있다. 참고로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양쯔강 유역을 포함하지 않으나 오늘날의 남경시는 우리의 한강처럼 양쯔강 일대를 포함한다. 비슷하게 흔히 600만으로 통칭되는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 역시 수용소에서 가스학살로 죽은 사람들만 세어서는 나오지 않지만 어디 홀로코스트도 없었다고 해보시지? 정작 일본의 극우와 넷우익들은 오늘도 히틀러와 나치를 열심히 까면서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덮어보려 발악하고 있다(...)

  •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참수가 금지되었다는 점, 그래서 남아 있는 잔혹 사진은 모두 중국 내전 때 벌인 사진이라는 것.
    • 반론: 두 번째로 제시하는 참수 및 효수의 문제도 몇몇 잔혹사진은 일본인 기자들이 찍어서 본국에서 검열당한 도장도 있는 문제다. 당시 난징에서 벌어진 효수 장면을 중국인들이 했다면 굳이 일본에서 검열할 이유가 있었을까? 예를 들어 한국은 갑오개혁 이후로 참수가 금지되었고, 남한과 북한 모두 고문이 헌법에서 금지되었다. 부정파의 논지라면 한국전때 쌍방이 벌인 그 많은 학살도 다 거짓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 미국과 중국이 제시하는 사진은 대부분 조작이거나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복식 등이 다르다는 점.
    • 반론: 세 번째는 전형적인 말장난인데 일부 사진은 충칭 폭격이나 상해 사변 사진을 난징 학살로 몰아붙인 것도 분명히 있다. 약간의 연출을 가미한 사진도 있지만 일본에서 검열삭제된 사진의 문제는 설명하지 않는다. 복식의 문제도[25] 문제지만 심지어 참수장면이나 대검찌르기 장면의 자세가 어설프다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는 이유[26]중국인이 일본군 복장을 노획해서 죽인 사진이다라는건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27]

  • 여러 증언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전혀 그런 사건이 없었다는 점.
    • 반론: 당장 위의《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부터 읽어보자.

  • 한도 가즈토시[28]의 의견: 당시 부대의 상황이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난징 진입때 남쪽으로 진입했던 부대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
    • 반론: 그러나 참전증언자로서는 자신이 겪은 일만 본다면 얼마든지 다른 주장이 가능하다. 오히려 참전 증언자로서 학살을 증언하는 사람도 대단히 많고 중립적인 입장인(심지어 욘 라베처럼 동맹국 소속의 나치당원도 있다.) 외국인들이 본 일본군의 학살 증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극우세력들은 외국인 안전구역내에서 참살된 민간인만 피학살자 수에 넣는다. 심지어는 중국군이 민간인 복장으로 도망가다 죽었고, 민간인들은 그 옷을 주워입다가 중국군에게 참살되었다.는 논리로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피학살 시체 대부분은 중국인이 죽이고 죄를 일본에 덮어 씌웠다.는 날조를 하는 주장을 펼친다.

일본 2ch넷우익들은 난징대학살은 선인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이를 중국 웹에 퍼트려 한국과 중국을 상대로 이간질을 시도하기도 했다.[29] 그런데 이것이 "개구라"로 드러나자 2ch 넷 우익들이 의식했는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말을 바꿔버렸다.[30]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혼란 상태에 빠진 난징 시민들이 한간(漢奸, 중국에서 매국노로 지칭) 색출 사냥 과정에서 일본군이 난징성에 입성해 치안유지 등에 힘을 기울였다.'는 식으로 기술해 학살만행을 전면 부정 하는 등 오히려 미화하고 있어서 문제.# 문서내용이 쓰레기 수준으로 낮다. 사실 일본어 위키피디아 자체가 이 사건에 대해 적은 게 아니라도 일본에 불리한 내용은 적당히 미화하거나 왜곡한 게 많다. 따라서 위키피디아에 있는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를 읽고 싶으면 일본어 외에 다른 나라 언어 버전으로 읽도록 하자.

일본 아마존 회원들은 난징 대학살을 다룬 난징의 강간을 날조라며 부정하고 모욕하고 있다. 일본 아마존 평가.

물론, 일본의 교과서 검정에서 부정파의 의견은 당연히 무시당하고 있다. 과거사를 미화하려고 혈안이 된 일본의 보수 우익들도 난징대학살은 워낙 팩트가 명확해서 무시할래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일부 개념없는 와패니즈들 중에서도 난징 대학살은 일본을 국제적으로 망신주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것이라고 주장하는 답이 없는 부류가 존재한다. 물론 이런 부류의 종자들은 당연히 한국에도 존재한다.

8.3. 중간파

일본 극우의 "그런 사건 없었다, 중상모략이다."라는 주장과 별개로, 지금에 와서는 "중국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았고, 중국 정부의 선전 활동으로 내용이 과장되어 있다."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긴 있다. 30만은 오버고 실제로는 5~8만 정도가 아닌가? 라는 내용들이다. 일본어 위키백과 가보면 그 후폭풍이 매우 심각하다.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토론란은 더욱 가관이다!![31] 이들 일본 극우 부정파들의 활동은 점점 넓혀가서 유튜브까지 진출했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일본의 보수언론인 산케이신문도 2015년 2월 16일자 기사에서,[32] 30만 명 설은 학술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학살 사실보다는, 중국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고 언급한다. 학살사실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난징군사법정과 도쿄재판에서의 보고서와 판결문 내용 등에서 희생자 수효가 제각각이라는 점을 내세워 '30만 명 설'은 왜곡된 주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난징학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중국의 기록을 100% 신뢰하는 쪽으로 난징뿐 아니라 주변 도시 지역에서의 학살범위를 포함하는 학파[33] 실제의 인구조사및 남경 안전지대의 인구수와 증언을 분석해서 8만에서 10만 정도로 보는 파가 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점은 피학살자의 수에는 관계 없이 일본이 벌인 학살이라서 일본의 100% 잘못이고 양측의 공동조사및 일본의 사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피학살자의 숫자가 중국이 제시하는 수보다 적다고 일빠로 몰지 말자.)

난징 사건 자체도 비극이지만[34] 더 비극은 학살 피해자의 후손들은 아직도 중국 정부에 의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듯.[35]

9. 유언비어

한국에선 난징대학살에 대한 다음같은 유언비어들이 퍼졌다.
  • 난징대학살의 만행 사진을 조선인에 대한 만행으로 퍼트리는 세력이 많다. 예로 시체들이 옆쪽으로 쌓아두고 걸어가는 일본인이나 참수 장면을 그렇게 소개한다. 그 외에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벌인 민간인이나 포로학살을 조선인 학살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 웬 일본군 장교들이 수쳔명을 구한 성자 라는 유언비어도 퍼졌다. 이누즈카 고레시게 와 히구치 기이치로 라는 사람들이 그들인데 위키게시판에서 이 문제가 논의돼서 확인작업을 거친 결과 영어판이나 다른나라 언어로도 난징 대학살 관련 언급이 없었다. 날조이자 반달이라고 결론이 났다. # 여담이지만, 이들이 사람들을 살리려고 한 적은 있다. 중국인이 아니라 유태인들이지만.

10. 중국과의 마찰

중일관계에서 항상 언급되며 일본을 당황하게하며 일본이 그리도 애쓰는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절대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문제이다.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이 문제와 센카쿠 열도 분쟁을 들먹이며 결사반대하기 때문인데, 이스라엘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에 별로 반대하지 않은 거와 대조적.[36]론 중동 지역에서 고립된 이스라엘 입장상 유럽의 강대국인 독일을, 게다가 일단 명목상으로는 사과를 하고 책임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자극하기 어려웠던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전후 독일의 태도 자체가 일본과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데에 크게 기인하고 있다고 보인다. 독일은 최소한 사회적 차원에서 진실규명을 방해하려는 움직임은 없었으므로.[37]

일단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죄하고 반성한다는 입장이긴 하다. 다만 이러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와는 다르게 부정파측에 있는 정치가들이 다수 있으며, 진실규명에 있어서 태도가 미적지근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과 겹쳐서 그다지 진정성이 안느껴진다는 것이 문제. 간단히 말해 학살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묻고 싶은 과거의 기억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 관련 일본측 사료들을 모두 모은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측이 원 사료의 사진촬영이나 복사를 거부하는 통에 연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꼈다고 한다. 문제는 일본의 우익들은 "필사"했다는 점을 핑계로 삼아서 자료집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까댈게 뻔하다는 것. 왜냐하면 현대 역사학에서는 유일자료가 아닌 한 필사된 자료의 신빙성은 상당히 낮게 본다. 필사과정에서 필사자의 주관적 관점이 개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게 맞다면 일본측이 지금도 원본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2012년 2월 20일 난징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나고야 시장이란 놈이 "난징 대학살은 없었던 일이다."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그것도 대충 뱉은 말도 아니라 난징시 시장을 초대한 자리에서 망언을 해서 중일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http://www.bbc.co.uk/news/world-asia-17125934 일본 정부 측에서는 이에 대해 남경 대학살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라는 종래의 의견을 확고히 했다.#

심지어 친일국가라고 일본에서 좋아한다는 대만조차도 난징 대학살 사건을 부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대만을 지배하는 중화민국 정부가 대학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고 (당시 난징은 중화민국의 수도였다), 악질적인 일빠같이 매수당한 이들이나 동참하는 수준. 아무리 현실의 적역사적인 적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해도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38]


10.1. 관련 영화

  • 흑태양 시리즈 - 국내에서는 1편이 "마루타"라는 명칭으로 개봉되었다. 본 시리즈의 4편(1995년작)이 남경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 황시 - 2008년작.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의 합작이다. 어거스트 러쉬에 등장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주인공 '조지 호그'로, 주윤발이 조력자 '잭'으로 등장한다. 영국인 종군기자인 조지는 중국에 들어와 일본이 벌인 난징대학살을 보고 충격받고 경악하며 이것을 세상에 고발하고자 하나, 일본군에게 덜미를 잡혀 참수되려는 순간 잭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일본군들을 몰살시키고, 정말 중국인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면 60명의 고아가 모인 '황시' 로 가 보라는 조언을 던지며, 조지는 황시 고아들을 돌보던 여자 리 피어슨과 함께 고아들을 전쟁의 참혹함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한다. 영화 크레딧에 실화의 주인공인 중국인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그 영국인 종군기자는 자신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었다고.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은 초반에만 등장하는, 사건의 발단부 같은 역할이고 황시로 가게 된 후부터는 고아들과의 일상과, 전쟁으로 인한 아이들 강제 징집 등의, 중국과의 마찰 등을 다룬다.
  • 욘 라베 - 2009년작. 독일인 플로리안 갈렌베르거 감독 작품이고, 독일/프랑스/중국 합작 영화이다. 위의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한 욘 라베에 대한 작품이다.
  • 난징! 난징! (南京! 南京!) - 2009년작. 영어 제목은 City of Life and Death(삶과 죽음의 도시). 중화인민공화국의 루 추안 감독이 만들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93% 스코어를 받았다. 다른 난징 영화와 달리 서구에서도 평가가 좋은편.
  • 금릉십삼채 (金陵十三釵) - 2011년작. 진링의 13소녀라는 뜻이며[39], 영어 제목은 The Flowers Of War. 배트맨으로 유명한 미국 영화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았다.[40] 중화인민공화국의 감독 장예모가 감독을 맡았다. 영상미는 뛰어나나,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는 별로 없는 중화 애국주의 프로파간다 영화. 남경 외국인 구역으로 간신히 탈출한 중국군 부상병과 기생들이 크리스찬 베일의 보호로 여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 점령군 장교는 자신들의 승전 기념 연회에 초빙할 여학교 합창단원을 모집하게 되고[41] 결국 기생들이 여학생들을 대신해서 여학생으로 분장해서[42] 점령군에게 간다는 무슨 일이 났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스토리. 2년전에 나온 루 추안 감독의 난징! 난징!의 비해 서구 평론가의 평가는 좋지 않다. 일본군이야 당연히 답이 없는 악마집단이였지만 중국군경우엔 애국심을 너무 강조한다. 심지어 단체로 자폭공격하는 장면에선 '당시 중국인들은 애국심이 있어서 당연히 그렇게 했다'는게 직접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본격 카미카제 특공 정당화 옛날 우리나라 반공영화같다. 2009년작 난징! 난징!에 비하면 매우 단순하고 프로파간다색채가 강하다. 그나마 장예모의 전작에서 보여주는 미적인 아름다움이나 웅장한 화면구성은 꽤 볼만하다. 문제는 그런 미적인 아름다움을 즐길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점.

10.2. 그외 매체

모토미야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는 난징 대학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우익의 항의를 받아 연재중단되었다.

그린호넷의 파트너인 케이토는 그린 호넷: 오리진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일본군에 입대했지만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보고 빡쳐서 자신의 부대와 부대장을 살해한뒤 일본군의 군수공장등을 사보타지하다가 부상입은걸 그린 호넷이 도와줘서 미국으로 피신했다는 설정이다. 케이토는 원래 일본인으로 설정되었지만 40년대에는 한국인이나 필리핀 인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난징대학살 등으로 일본인의 이미지가 안좋아져서 그렇게 되었다.

10.3. 참고문헌

  • 아이리스 장, 난징대학살
  • Jean-Louis Margolin, e réévaluation du massacre de Nankin[43]

10.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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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밑에서도 서술하겠지만, 이 위키백과 문서는 상당히 치우친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느 쪽인지 설명히 필요한가?
  • [2] 출처 링크1, 출처 링크2
  • [3] 문제는 통신선이 마비되어 퇴각명령이 일선부대들에게 전달되지도 못했다.
  • [4] 이때 사람들의 몸에는 미리 석유를 뿌려놓았다고 한다. 물론 총알이 닿는 즉시 발화.
  • [5] 그래서 나중에 난징사령부에서 근무했던 다키히토가 "자네들 이 전쟁 끝나면 살고 싶거든. 이 아시아를 뜨게나... 만약 이곳 동아시아에 있다면 말도 못할 정도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지 모르겠네만...라고 탄식했다.
  • [6] 여담이지만,사진에서 저 두 쓰레기들이 들고 폼잡고 있는 칼은 94식 전도이다.
  • [7] 원래는 총살형을 할땐 권총 5발을 쏘는게 원칙이지만 이놈들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나마 이걸로 희생자들의 한을 달랠 순 없지만, M2 중기관총으로 갈겨버렸다. 말그대로 벌집이 되버렸다. 그리고 이 인간들은 위대한 50구경탄(12.7X99mm)에 고기 조각이 되었다고 한다.
  • [8] 참고로 8세 이상부터 당했다고 한다.
  • [9] 한국에서 난징 학살 기록 사진은 대부분 중국 영화 화면을 가져온 게 많다.
  • [10] 일본 항공대가 진주만에서 3차 공격으로 진주만을 박살내고 이어 내습한 항모 전단과 싸운다는 내용, 현재 2부까지 나왔다.
  • [11] 이후 2006년에 내용이 더 보강되어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현재 절판)이라는 책이 나왔다. 만약 읽고 싶다면 읽기 전에 마음을 한번 진정시키고 읽자.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가 천사로 생각될 정도로 일본군의 막장행각이 나온다.2014년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이 다시 재판되어 나왔다
  • [12] 다만 지나치게 까발림과 감정적인 쪽으로 흐른 면이 없지는 않으며 전문 학자가 아니다 보니 교차검증에서 여러 약점이 드러나 우익들이 이를 근거로 난징대학살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발단이 되기도 했으며 난징대학살을 긍정하는 일본 학자들도 이 점을 지적했다. 이후 아이리스 장의 후속작들은 성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였는데
  • [13] Reiji Yoshida and Jun Hongo (December 13, 2007). http://www.japantimes.co.jp/news/2007/12/13/national/history/nanjing-massacre-certitude-toll-will-elude/#.VKoEyvQow-k The Japan Times. Retrieved December 6, 2014.<br />
  • [14] Takashi Yoshida, The Making of the "Rape of Nanking"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60~64
  • [15] Daqing Yang, "A Sino-Japanese Controversy: The Nanjing Atrocity As History," Sino-Japanese Studies, November 1990, 18, 22-24.; "永久保存版 - 三派合同 大アンケート," Shokun!, February 2001, 197.; Tokushi Kasahara, "Massacres Outside Nanking City," in The Nanking Atrocity, 1937-38: Complicating the Picture, ed. Bob Tadashi Wakabayashi (New York: Berghahn Books, 2008), 59.
  • [16] Masahiro Yamamoto, Nanking: Anatomy of an Atrocity (Westport, Connecticut: Praeger, 2000), 115, 147-148, 157.; "永久保存版 - 三派合同 大アンケート," Shokun!, February 2001, 202.
  • [17] Jean-Louis Margolin (February 2006). http://chinaperspectives.revues.org/571 . China Perspectives. Retrieved December 6, 2014.
  • [18] http://sankei.jp.msn.com/life/news/120701/edc12070118000000-n1.htm
  • [19] 그러나 실제로 아시아의 대단결을 주장했던 안중근 의사처럼, 당시의 아시아 지식인에게 일본 등의 선진화된 국가가 주도해 단결된 아시아가 서구 열강에 맞선다는 순수한 범아시아주의는 분명 이상적인 청사진이었다. ...일본이 미친 침략자의 마각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래서 무작정 비판하기도 힘들다. 이 만화에는 일본군이 마구 침략자의 본성을 드러내어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실적인 묘사와, 일본인이 부당하게 배외(排外) 감정의 대상이 되는 것 같은 편향된 묘사가 혼재하는 등, 일본인에게 욕먹지 않으면서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 한 작가의 고심이 역력히 배어있으므로 일부만 보고 무턱대고 비판하지 않기를 권한다.
  • [20]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항하던 도시나 국가를 아예 지워버리던 경우가 많긴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국제법이 존재했었고, 포로 및 민간인 처우에 관한 내용이 이미 구비된 뒤였다.
  • [21] 집행유예로 석방은 되었다.
  • [22] 이들이 제시하는 숫자는 미군 진주 때 죽은 일본 민간인보다 적다고 한다.
  • [23] 히로카네 겐지의 만화 "정치 9단"의 주인공의 시각이 이렇다.
  • [24] 굳이 예를 든다면 서울에서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 벌어졌는데 그 범위를 종로구까지 하는지, 양천구까지 하는지의 문제이다. 아니면 아예 광명시부평구 쪽에서 학살당한 인원도 넣는지의 문제.
  • [25] 아예 말도 안되는 복식이 아니라 칼라가 이상하다는 식의.
  • [26] 오히려 어설플 수밖에 없는 게 맞다. 일본군의 진검술인 군도의 조법은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만 가르쳤고, 모든 장교부사관이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진검술이 전군에 배포된 것은 1942년이다. 즉 난징대학살 때는 모든 군인이 진검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설픈 자세는 오히려 신빙성을 크게 강화시켜주는 근거가 된다.
  • [27] 다만 인정할 것은 흑태양 731의 사진이나 진짜 군벌 사진을 실제 사진으로 소개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20년전 꽤 유명한 작두처형 사진이 그런 좋은 예인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혐한에게 까인다는 건 잊어서는 안될 일.
  • [28] 다만 이분이 난징 대학살 자체는 인정하며 국가 차원에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하자
  • [29] 2ch 넷우익들이 퍼뜨린 '조선인 학살자 명단'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부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군, 경찰 부분에 있는 이름들 그대로 퍼온것들. 참고로 조선인 징병제 실시한건 태평양 전쟁 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전세가 불리해질 무렵인 1943년부터다. 지원병제는 1938년.
  • [30] 난징대학살을 한국인이 했다는 루머가 중국웹에서 크게 퍼져서 난징대학살 재난동포기념관 주청산 관장이 직접 한국인은 없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 [31] 사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일본 극우들의 활동이 너무 심하다.
  • [32] 산케이신문에서 연재중인 역사전쟁9부. http://www.sankei.com/politics/news/150216/plt1502160004-n1.html
  • [33] 그럼에도 30만은 과장이고 최대 20만, 최소 10만 정도로 본다.
  • [34] 그런데 전후 민간단체에 의해 수습된 가매장된 시체만 하더라도 11만이 넘는다. 양쯔강에 던져버린 상당수의 시체 등은 제외하고도. 양쯔강에 던져버린 시체들까지 합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 [35] 중국정부는 일본과 수교할때, "우리는 전쟁의 승자다. 승리했는데 뭐하러 무슨 보상금을 받냐?"는 마오쩌둥의 호기로운 한마디에 배상을 포기했다. 대신 한국(남조선)과 거래하는 일본기업은 중국에 못 들어온다는 조건을 명시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중국이 워낙 거대한 국가라 한국 내에서도 이미 경제 개발 당시부터 중국 시장 개척 및 진출을 나름 기대했음을 고려하면 명백한 실수. 여담이지만 그때문에 미쓰비시와 합작사를 세우려던 정주영회장은 독자적으로 자동차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으니 전화 위복.
  • [36] 그러나 폴란드,네덜란드,체코,덴마크,노르웨이,루마니아,불가리아등 제2차 세계대전때 독일에게 전쟁 피해를 입었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와 관련해 독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정에 반대하고 있다. 당장에 이들 나라들을 제외하더라도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4 독일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거나 전쟁을 경험한 국가들이기도 하고.
  • [37] 물론 나미비아와 탄자니아 등 과거 독일령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학살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와 같은 시기에 벌어졌던 집시족 학살에 대해선 사과하려 하지 않는 등 철저하게 제1,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다른 학살에 대해서도 무작정 부인하거나 진실규명을 방해하려 한 적은 없다는 점이 일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사실 그것보다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유럽권에서는 식민 지배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관대하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저지른 잔혹행위에 관해서는 독일 정부도 딱히 진실규명을 방해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죄할 생각은 더더욱 없을 것이고.
  • [38] 이 점은 한국인 일본문화 애호가들조차 일본 제국 시대의 만행에 대해서는 이를 가는 것과 같은 격이다.
  • [39]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12명의 소녀와 1명의 소년이며, 고전소설인 홍루몽의 등장 인물들인 금릉십이채에서 이름을 따왔다.
  • [40] 예고편 스틸사진때문에 베일이 성직자로 나온다거나, 건 카타를 쓴다거나 욘 라베를 모델로 한 성직자라고 알려졌는데. 페이크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성직자 행세를 하게 된 시체화장해주는 사람.
  • [41] 물론 일본군이 이 여자들을 데리고 단지 노래만 부르고 여흥만 즐긴후 온건하게 보내줄거라고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조차도 믿지 않는다.
  • [42] 이 과정에서 어른의 사정으로 1명이 모자라게 되자, 이전에 있던 신부의 양자인 소년이 여장을 하고 가담한다.
  • [43] http://perspectiveschinoises.revues.org/927
  • [44]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하함과 동시에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발언을 했다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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