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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last modified: 2015-07-10 19:26:01 by Contributors

南北戰爭

Contents

1. 미국의 내전
1.1. 개요
1.2. 원인과 배경
1.2.1. 서막
1.2.2. 미주리 협정(1820)
1.2.3. "위대한 양보" 협정의 실패 남/북부 간 갈등의 심화
1.2.4. 남부의 탈퇴와 전쟁의 개막
1.3. 전쟁
1.3.1. 아메리카 연합국(CSA)의 탄생
1.3.2. 초기 - 남부의 우세
1.3.3. 북부의 반격과 전쟁의 종결
1.4. 결과와 의의
1.5.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2. 도스 시대의 게임
3. 한국전쟁의 다른 이름

1. 미국의 내전


구분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수도 워싱턴 DC 리치몬드[2]
인구(1860) 22,100,000[3] 9,103,332[4]
인구(1864) 28,800,000[5] 5,600,000[6]
군 연인원 2,100,000 1,064,000
철도연장(1860) 21,800마일 8,800마일
철도연장(1864) 29,100마일 -
공업생산력(1860) 90% 10%
공업생산력(1864) 98% -
수출(1860) 30% 70%
수출(1864) 98% -

어쩐지 80년 후에 시비를 거는 일본미국의 국력차와 비슷하다

1.1. 개요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4월 9일까지 미국에서 벌어진 내전.(남부에 대한 군정이 해제된 1877년까지로 잡는 시각도 있다.)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아메리카 영미권의 최후의 전쟁.[7]

영어로는 American Civil War 또는 그냥 The Civil War.[8][9] 남부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연방간 전쟁 War between the States.

1.2. 원인과 배경

신사들의 클럽이 있는데, 아주 공정한 클럽이야.
우리 모두 그 신사 클럽에 가입했다고 가정해보자고.
시간이 흐른 후 몇몇 회원이 우리들의 사생활이나
가정생활을 간섭하기 시작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지.
그때 우리들 가운데 누구든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지?
거부해야지!
우린 거부한거야.
저들은 우리보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하고 있어.
- 조지 피켓(남군의 장군), 영화 <게티스버그> 中

대표적인 이미지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와 노예제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간의 대립이 낳은 전쟁인데, 그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심지어는 명칭 자체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원인으로 주목되던 것들 중 의외로 경제적인 측면은 1950년대 이후로는 제외되었다. 1860~61년 사이에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논의되었던 3가지 타협안은 모두 도망노예법, 개인 자유법, 준주에서의 노예제와 이미 존재하는 노예 주에서의 노예제 개입 문제를 다루고 일부에서 중요시되는 관세와 같은 경제적인 문제는 전혀 다루질 않았다.

애초에 면화생산에 있어서의 노예의 노동 가치는 생각보다 높지 못했다. 실제로 남부는 면화 농업이 본격화되기 이전, 담배 농사를 짓던 시기에 노예제의 비효율적인 측면 때문에 노예제도를 자진폐업하려는 분위기[10]마저도 있었다.

물론 경제적 문제가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첫번째는 북부의 경제적 발달과 서부개척으로 남부에서 노동력이 유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면화농장마저도 점점 서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가 중심이 되었던 면화 농업은 다시 미시시피앨라배마 주로 주도권이 이동했고, 이후에는 루이지애나가 급부상했다.[11] 이런 전개과정 때문에 노예제 하의 남부에서도 서쪽으로의 노예제 확장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면화 경작지의 확대를 위해서는 노예제도 역시 그를 따라서 확장되어줘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붙잡아놓고 노동을 시킬 수 있는 만능의 노동력은 남부에 국한해서는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실제로 남부의 대다수 수출품들은 면화 외에도 상당수가 노예노동을 통해서 생산되고 있었다.

두번째는 노예 자체의 가격이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를 제외하면 노예무역이 끝장난 시기였다.[12]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뭐냐면, 외부에서의 노예공급이 거의 대부분 끊겼다.는 것이다. 이런 공급의 급격한 감소와 면화산업의 발달[13]이 더해지면서, 시장원리에 따라서 노예의 가격이 꾸준히 치솟고 있었다.[14] 이후 시기로 가면 갈수록 노예의 생산력보다 노예 자체의 가치가 좀 더 부각되고 있다. 1850년대 무렵 노예들의 가치는 당시 기준으로 약 2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건 남부가 소유한 총자본의 약 1/4이며 연방예산 기준으로는 10배정도였다. 면화작물의 가치도 이것의 1/10 정도 밖에는 안되었다. 이처럼 노예는 값비싼 재산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그 재산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직전 남부에서는 플렌테이션 농업은 백인들 중에서도 5% 미만의 대부호들이나 하는 것이었고, 적어도 80%를 차지하는 대다수 백인들은 노예를 부린 적이 없는 중소자영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노예제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부류였다. 결국 이 남북전쟁 발발에는 경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치적, 가치관적 문제였다.

이런 도덕적 논란은 당시 미 합중국이 브라질과 스페인령의 카리브 섬들을 제외하면 백인 문명권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원인이 되었다. 초기에는 노예노동의 필요성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것이 외부의 시선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의 존재를 통해서 자신들의 인종적,[15] 문화적 우월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나중에 가면 도덕적인 부분까지 나가고 있었다. 이런 장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당시를 다룬 소설들이다. 허클베리의 핀의 작중에서 허클베리 핀은 친구 흑인노예가 도망나온 것을 보고 갈등하는데, 왜냐하면 도망나온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라는 것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범생도 아니고 랑아인 허클베리 핀이 결국 내가 지옥에 가겠다라고 굳은 결심을 해야, 친구인 도망노예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 남부의 썩은 도덕관이었다.

그야말로 노예노동으로 뭘 하기 이전에,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시기 남부 백인사회의 모습이었다. 이 시기의 남부는 그야말로 유럽 귀족 사회를 모방하는 형태가 강해지고 있었다. 대부호들은 자신들과 노예를 통해서 유럽식 귀족과 평민을 구현했고, 이런 상류층의 문화를 흉내내는 것으로 그보다 하류층으로 전파된다.

이처럼 남북전쟁의 배경은 그야말로 복합적인 것이었다. (위에 난잡하게 언급된 내용들도 남북전쟁의 원인으로 꼽히는 모든 배경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링컨을 까는 매체들에 의해 오로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건 너무 낡은 떡밥이다. 인류의 평등을 위한 성전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론 노예제의 폐지에 기여하였고,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정도로 해석하면 그럴듯할 것이다.

1.2.1. 서막

독립 이후, 미국은 공업이 발달하고 외국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던 북부[16]영국식 전통이 강하고 농업을 중심으로 하던 남부간의 정치적인 주도권 다툼에 휩싸이게 된다. 노예제는 남부의 경제적인 기반 중 하나였으며, 노예인구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남부의 정치적 입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남부는 독립 당시부터 헌법제정 시 인구수 비례에 흑인 노예를 넣을 것을 주장하였고, 타협 끝에 양측은 흑인 인구의 3/5 을 친다는 협정을 맺고 [17], 향후 20년 동안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또한, 북부가 연방정부의 권리를 중시하고 고관세 정책을 지지하던 반면 남부는 주정부의 권리를 중시하고 저관세 정책을 옹호하였으나, 대체로 미국의 관세는 북부의 주장에 따라 상승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는 지속되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임기 동안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연방법 집행거부 사태(Nullification Crisis)가 터지기도 했다. 이 때 잭슨은 1833년 5월 1일에 '관세는 그저 구실일 뿐이며, 연방해체와 남부 연방이 진짜 목적이다. 다음 구실은 아마도 흑인이나 노예제가 될 것이다.'고 기록했는데 그의 생각은 딱 들어맞았다.

1.2.2. 미주리 협정(1820)

이런 양측의 갈등을 중재한 것이 남북전쟁을 적어도 50년 이상 늦췄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헨리 클레이(Henry Clay) 상원의원이었다. 클레이는 1819년 매사추세츠 주의 분할(자유주로서의 메인주의 독립), 1820년 '주리 협정'을 통해 위도 36도 30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노예주로, 북쪽은 자유주로 결정하면서 양측간 비율을 1:1로 맞춰 갈등을 수습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이후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등의 새로운 주가 편입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2.3. "위대한 양보" 협정의 실패 남/북부 간 갈등의 심화

새로운 주는 남측에 위치했으나 노예제가 금지된 자유주였고 이들의 미국연방 가입으로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로 연방 붕괴의 조짐까지 보인다. 이때 백가쟁명으로 각종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는데#, 헨리 클레이는 30년 만에 소위 (위대한) 대타협(Great Compromise, 1850)을 제안한다.

클레이의 안은 다음과 같다.
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워싱턴 D.C.의 노예주는 유지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36도 30분 이북 텍사스의 영역을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을 지불한다.
5) 도망노예단속법을 강화한다.

그러나 5항에서 다시 갈등이 발생한다. 강화된 도망노예단속법으로 소위 노예사냥꾼들이 등장하면서 추노, 자유주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다시 북부주들은 체포당한 노예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줘 시간을 끌수 있게하는 주법을 만들어 반항한다. 거기다 작가 해리엇 스토우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로 노예제의 비도덕성을 꼬집었고,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남북전쟁을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측의 갈등은 스티븐 더글러스가 자스-네브라스카 법을 제안하게 되며 다시 불거진다. 주리 협정에 따라 준주에서 주로 승격될 캔자스는 자유주로 편입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인민주권의 논리에 따라 각 주의 주민들이 노예제 존폐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게 하자는 내용을 이 법안에 넣었다. 각 주의 주민들이 인민주권에 따라 스스로 투표를 하여 노예제의 존폐여부를 결정하게 해서 골치아픈 노예제 문제에서 손을 뗀다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 때문에 더글러스는 북부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북부는 이제 아예 노예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고 또 만약 투표로 캔자스가 노예제가 될 경우 대타협의 36도 30분 이북에 노예주가 떡하니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1850의 협정이 무효화되고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이 통과되면서 또다른 갈등이 시작된다.

바로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하여 바로 옆 주였던 미주리에 사는 노예 주인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북부의 노예 해방운동가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들 모두 무장을 한채 왔고 심지어 대포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양쪽 모두 개표 조작과 협박이 끊이질 않았고,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까지 합세해 부정선거를 한 끝에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캔자스 땅의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또 문제가 터지는데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유주의 마을 로렌스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한 복수로 급진 해방론자였던 존 브라운과 그 아들들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농부 5명의 손을 자르고 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일이 일어났고 사실상 캔자스는 피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라 칭하는 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이 때 미주리 협정을 파기하는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이었다. 이 판례의 당사자였던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은 흑인 노예로 버지니아 주 출신이었다. 본래 그를 소유하고 있던 피터 블로(Peter Blow) 가문은 후에 앨라바마 주로 이주했으나 농사에 실패해서 다시 미주리 주로 이주했고 스콧은 그곳에서 미군에서 복무중이던 의사 존 에머슨(John Emerson)에게 팔렸다. 에머슨은 군 복무중이었으므로 자주 거주지를 바꿨고, 자유주였던 일리노이, 위스콘신 준주(현재의 미네소타 주)에서 장기간 거주했기 때문에 자유를 달라는 청원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에머슨이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로, 그 다음에는 루이지애나 주로 전출되었고, 이 때 스콧은 결혼했다.

에머슨도 아이린 샌드포드(Irene Sanford)와 결혼했는데 에머슨이 1843년에 사망하면서 아내였던 아이린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스콧과 그 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처음에 스콧은 자신에게 자유를 주면 300달러(현 시가로 7,000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1846년, 지역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세인트루이스 순회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7년에 진행된 재판에서는 스콧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왔으나 전문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재심이 결정되었다. 1850년, 미주리 주 법원에서는 스콧과 그 부인이 자유 주인 일리노이 주와 위스콘신 준주에서 오랫동안 거주중인 때 불법적으로 노예 상태에 있었으므로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판시하였으며, 일레네는 이에 불복하고 상소하여 미주리 주 대법원에서는 1852년 한 번 자유면 언제나 자유(once free always free)가 아니라고 하여 하급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28년간의 판례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미주리 주의 법에 따라 에머슨 농장의 권리는 아이린의 남자형제였던 존 J.A. 샌드포드(John F. A. Sanford)에게 있었고, 샌드포드는 뉴욕시민이었다. 따라서 스콧의 변호사들은 관할권이 다르다는 근거로(Diversity jurisdiction, 민사소송의 당사자가 서로 다른 주의 주민이거나 미국 시민이 아닌 경우, 연방 법원에서 이를 재판할 수 있게 한 개념)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하여 스콧은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지방법원에서 패소하자 다시 상소를 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갔으며 이것이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사건.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시민이 아니므로 고소할 권리조차 없으며, 비록 북부주가 자유주라고 하나 이것은 개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권리이므로 무효이며 미주리 협정 자체가 무효라고 7-2로 스콧의 패소를 판결했다.[18]

스콧과 부인은 판결에 따라 아이린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한편 아이린 샌드포드는 1850년에 칼빈 C. 차피(Calvin C. Chaffee)와 재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이 차피는 노예 폐지론자였지만 정작 자신의 새 부인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에, 어찌할 틈도 없이 노예소유주와 결혼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차피는 스콧 가족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자고 부인을 설득했고, 스콧 가족은 피터 블로 가족에게 돌아갔다. 피터 블로 가족은 미주리 주로 이주한 상태였고 노예제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해방시켜 주어 스콧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짐꾼으로 일을 하다가 1858년에 사망했다.

이는 미주리 협정을 무효화시키는 판결이었고, 북부와 남부의 노예 폐지론자와 존속론자 간의 갈등을 가속화시켜 전쟁 직전까지 상황을 악화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남북의 대립이 악화되면서 이전까지는 비교적 이성적이고, 타협을 시도하려고 했던 정치인들마저 분열되는 상황에 이른다. 대표적인 사건이 1856년, 상원의회에서 일어난 찰스 섬너 의원의 구타 사건으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 하원 의원 프레스톤 브룩스가 상원으로 난입하여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 의원인 섬너가 자신의 친척인 앤드류 버틀러 상원의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지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하였고,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은 둘러싼 채 서로 희희낙낙거리며 구경했으며, 브룩스와 함께 입장한 동료 하원의원들은 권총으로 다른 의원들을 위협하는 등 의회마저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섬너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이르렀고, 이후 약 3년동안 공직을 수행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19] 섬너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를 벌하자고 주장하는 급진 공화당의 핵심 인물이 된다.

1.2.4. 남부의 탈퇴와 전쟁의 개막

이 시기 주요 양당이었던 미국 민주당과 미국 휘그당에서도 남부계와 북부계의 분열이 극심했으나, 민주당은 스티븐 더글러스가 어정쩡하고 어중간하게나마 중도 노선을 취할 수 있었지만 휘그당은 에이브러햄 링컨 등이 탈당하여 신생 공화당에 입당하는 등 당 자체가 와해 위기로 몰리기에 이르렀다. 56년 선거에서는 민주당, 휘그당, 공화당의 3파전이 벌어졌다. 그 뒤인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휘그당은 완전히 몰락하고, 스티븐 더글러스가 끝까지 어정쩡한 위치에서 어물적대자 폭발한 남부계 민주당이 존 C. 브레킨리지(John C. Breckinridge)를 따로 후보로 내놓는 등 대분열이 일어나 공화당의 에이브러험 링컨이 북부지역의 표만 가지고 39.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링컨은 노예제 폐지를 공약하진 않았지만 새로 연방에 추가되는 주들이 노예제를 인정하는 것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남부는 영향력 쇠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의석수도 북부 공화당에게 뺏긴 상황에서 민주당은 분열되고 대통령직까지 공화당에 넘어가게 되자 불안을 느낀 남부 주들에서는 연방 탈퇴론이 득세하여 1860년 12월 전부터 툭하면 연방탈퇴한다고 징징대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결국엔 가장 먼저 연방을 탈퇴하였고 뒤이어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 2월 4일, 제퍼슨 데이비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2월 8일, 기존의 미 헌법에서 본을 딴 헌법을 제정하여 대신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를 수도로 (후에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이전.) 아메리카 남부맹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20]을 건립한다.

이에 "갈라진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며 강력한 연방 유지파임을 천명했던 링컨은 취임식에서 남부에 대해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보냈고, 여기에 반발한 남부는 자국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국내의 연방군 요새와 병기창 등을 차례로 무력점령한다.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항 인근에 있는 섬터 요새의 연방군이 철수를 거부하자 남군은 요새를 공격하였고 이를 계기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21]

이 때 섬터 요새에서의 에피소드 하나. 섬터 요새는 남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워낙 요새가 튼튼해서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요새도 크게 파손당하자 연방군 지휘관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새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요새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군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는 것을 남군에게 허락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깃대에서 성조기를 회수하며 연방군 포대가 예포를 발사했는데, 폭발 사고가 나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등 연방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 이 때문에 남북전쟁의 최초 사망자는 교전이 아닌 폭발 사고로 인한 것이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요새와의 교전에서 남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1.3. 전쟁

1.3.1. 아메리카 연합국(CSA)의 탄생

전쟁이 시작되자 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가 남부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곧 신생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노예제 허용주들이 남부로 간것은 아닌데 버지니아의 서부(웨스트 버지니아),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연방에 잔류했다.

  • 버지니아 주의 서부와 동부는 차이가 극심했다. 서부는 산업이 발달하고 대농장과 노예가 별로 없었던 반면, 동부는 남부 주에 노예를 판매해서 수익을 얻었다. 주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동부 쪽이었는데, 전쟁이 시작되자 서부쪽에서 연방에 잔류하고 따로 주를 만들자는 분리 움직임이 일어나 1862년 12월 31일자로, 링컨 대통령이 웨스트 버지니아 주 창설에 서명하게 되었다. 완전히 공인된 것은 전쟁 후.[22]

  • 메릴랜드 주에서는 남부를 지지하는 이들이 연방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다리를 불태우자, 남부 정부에서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링컨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군을 파견하여 메릴랜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를 장악하고 분리주의자들을 모두 재판없이 구금시켰다. 구금된 이들은 나중에 석방되었다.

  • 켄터키 주는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표방하다가, 남부군의 침입을 받자 바로 연방측으로 가담했다.

  • 미주리 주에서도 분리 움직임이 있었으나 연방군에게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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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이 북부, 붉은 색이 남부, 연보라 색은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인데, 이를 경계 주 (Border States)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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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정확한 지도. 정확히는 1863년 웨스트 버지니아가 분리되고 1864년 네바다주가 승격된 최종 국면의 지도다.

1.3.2. 초기 - 남부의 우세

사실 남부와 북부가 분열수순으로 가긴했지만 전쟁에 대한 준비는 어느 쪽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북부는 1만 6천명의 육군과 7천 6백명, 42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해군이 있긴 했으나 무기는 미국 독립전쟁 때 쓰던 구식조차 더러 섞여있었다. 다만 북부는 정부조직이 이미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에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의사결정이 신속하고 유연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인구의 측면에서도 남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가 있었고 공업의 발전으로 전쟁물자 생산 역시 용이했으며, 잘 갖춰진 철도망 덕분에 병력이나 물자 수송에서도 우위에 있었다. 거기다가 도망 노예들이 북부군에서 복무를 시작하자, 안 그래도 우위였던 수적인 우세가 더 강화되었다. 매사추세츠주에서 편성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가 대표적인 흑인 부대였다.[23]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54연대의 선전으로 이후 흑인들의 모병이 적극적으로 시작되었고 18만명의 흑인들이 입대하여 복무하였다. 54연대는 미군 최초의 유색인종 부사관이자 역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 명예 훈장을 받은 월리엄 H. 카니 상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24]

반면 남부는 근본적으로 주의 발언권과 자주성에 의거해 탈퇴한 주들이 모여 결성된 만큼 각주들의 발언권이 상당히 강력했으며 이로 인해 새로 구성된 정부조직은 중앙집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남부의 제퍼슨 데이비스는 이를 조정하고 남부 정부의 지침을 확정하느라 고생 좀 해야했다. 더욱이 남부는 인구면에서 북부에 밀리고 농업위주의 사회였던 탓에 전쟁물자 생산도 어려웠다.[25]
그러나 남부에는 몇가지 이점이 있었다. 북부의 장교단에는 교육자나 정치가, 사업가 등이 비교적 많았던 반면,[26] 남부는 북부에 비해 대농장 등이 발달되어 귀족사회에 가까운 면이 있었고, 이들은 미국 초기 장교단의 산실과도 같았다. 따라서 각 사관학교 출신들이[27] 고향을 지킨다는 이유로 돌아갔을 때 남부가 비교적 더 많은 장교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미 육군 사관학교 등이 위치한 버지니아가 가담한 덕분에 많은 사관 생도들을 확보하였으며 "침략자 북군을 물리쳐서 자기 주와 관습(노예제)을 지켜야 한다"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훨씬 높았다. 또, 당시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낙후된 국가로 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도가 부족했으므로 고향을 방어하는 입장에서 지형지물을 이해하는 수준도 높았다.

그리하여 전쟁 초반 남군은 우수한 장교단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열의로 모인 병사들, 나중에는 명장 로버트 E. 리 장군 등이 포함되는[28] 우수한 지휘관들의 기여[29] 등이 모여 승승장구하였다. 전사자 통계를 분석해 보면 남군 1명이 사망할때 북군은 3명이 죽었다.

하지만 인구 수는 그보다 많은 4배 차이인데다 공업 생산력, 철도 정비 등 사실상 여러가지 면을 고려했을 때 남부쪽에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일단 자유민 인구수부터 4:1로 북부가 많았고, 총기생산량은 북부가 97%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철도망도 북부가 더 잘 정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30]에 전쟁수행능력 면에서는 북부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거기다가 남부 정부의 외교적인 오판[31][32]과 북부의 외교전술로 인해[33]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 인정을 받는데 실패했다.

전쟁 시작 당시의 북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 장군[34]은 남부를 경제적으로 말려버리기 위해 소위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을 입안했는데, 남부의 전 해상을 봉쇄한 후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동/서로 쪼개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론적으로 매우 타당한 계획이지만 남부를 포위하기 위해 장기간의 봉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이 많이 든다는 문제로 보다 빠르게 전쟁을 끝내기 위한 육상결전 작전들이 입안되었고, 그 방어용 화력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을 도외시한 공세작전들이 입안된 끝에 전쟁을 초기단계에 해결할 희망이 불런 전투에서의 패배로 막혀버리고 점점 더 지지부진하게 끄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계획은 나중에 스콧의 뒤를 이은 조지 B. 매클레런 (George B. McClellan)[35]이 실행에 옮겼으며, 이로 인하여 남부의 수출/수입량의 95%가 막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는 상당히 승전보를 울렸다. 전쟁 초기 남부군은 버지니아를 침공한 북부군을 격퇴하다 못해(북부 입장에서는) 남단에 있는 워싱턴 D.C까지 위협했으며, 북부는 《크리텐든-존슨 결의안》(노예제를 포기할테니 연방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으로 남부를 달래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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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리어 다음해 1862년 남부는 북부의 초기 마지막 공세인 버지니아 남동부(리치먼드 근교)에서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36]에 승리한 뒤, 토맥 강을 넘어 북부의 메릴랜드를 침공했으며,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까지 북부를 계속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런 남부의 움직임은 결정적인 연방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미치지 못했으며[37], 첫 대형 회전인 앤티덤 전투(9월 17일)에서 남부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남부의 공세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게 되었다.[38] 링컨은 이에 맞추어 예 해방 선언(9월 22일)을 선포했다.

1.3.3. 북부의 반격과 전쟁의 종결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관심도 많았던 동부 전역에 비해 남북전쟁의 서부전역은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863년 7월 4일(립 기념일이기도 하다.),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지막 남부 요새였던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함락된 빅스버그 포위전은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남부의 동/서가 단절되어 텍사스아칸소 주에서 남부의 다른 지역에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다음날(7월 5일)은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후에 11월 게티스버그 연설이 있었던 자리기도 하다.) 전쟁은 이를 분기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 북부의 전략 다른 그림
빅스버그가 함락된 후 그랜트 장군은 북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서부 전역에는 그 후임으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이 임명되었다. 그랜트와 셔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만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셔먼은 총력전의 개념을 시행에 옮겼다. 1864년에 수행된 애틀란타 전역에서 셔먼이 승리를 거둔 후, 그 개념으로 실시한 게 유명한 바다로의 진군(March to the Sea)이다. 애틀란타에서 출발해 서배너(Savannah)까지 진군하며 가는 길마다 쑥대밭을 만들었다.

한편 동부전역에서는 그랜트 장군의 지휘 아래 북군의 대병력이 리의 북버지니아 군을 다방면에서 공격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큰 손실을 계속해서 겪었지만 그랜트는 공세를 멈추지 않고 리를 압박해 남군의 퇴각을 강요했고, 셔먼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를 거쳐 버지니아 쪽으로 진격해 리를 남북에서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1865년 4월 1일에는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었으며, 리는 전술적으로나 병참 상황으로나 계속해서 싸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같은 해 4월 9일, 애포머톡스(Appomattox)에서 리가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1.4. 결과와 의의

미국 내에서만 벌어진 전쟁이라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상 최초의 현대전이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때나 경험하게 되는 현대전의 모습들이 비행기와 전차의 존재만 빼고 대부분 여기서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총기 기술과 정밀도의 발전으로 보병 전술이 이전과는 달라짐과 동시에 최초로 저격수라는 병과가 탄생해 전장에 투입되고 수동식 기관총이 실전에 투입되었다.[39][40]

물론 그 결과는 막대한 사상자의 발생이었으나, 철도의 존재로 기계화된 보급 수송수단을 가진 관계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물자와 병력을 전투에 투입 가능했다. 그런가 하면 국가의 모든 능력을 전쟁에 동원한다는 '총력전'개념이 처음으로 서기도 했고,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목표로 삼아 전략적으로 공격하는 행동 양상도 이때 생겨났다. 이 '바다로의 진군'을 수행한 셔먼 장군을 최초의 현대전을 지휘한 장군으로 평가하는 문서는 유럽에서도 종종 나올 정도. 심지어는 최초의 철갑선 끼리의 포격에, 잠수함(!)까지 등장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자국민이 사망한 전쟁[41]이었으나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대외적인 '간판'을 세울 수 있었고, 이전과 달리 정치적, 군사적으로 강력한 통합을 이루게 됨으로써 이후 미국이 제국주의 열강 국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명목이었던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졌으며 흑인의 지위가 마침내 백인과 동등해지고 공직에 진출하는 등 장밋빛 전망이 펼쳐졌으나, 흑인 지위 상승과 함께 남부의 '옛 반란군'을 박살내려던 전쟁장관 스탠턴 등의 공화당 급진파가 몰락하고 공화당이 보수화되면서 대통령 선거 부정을 덮기 위해 민주당과 타협한 끝에 결국 흑인의 지위가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42]

그러나 정치적 타협과는 별도로 전후 미국 민주당은 내전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받아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모아서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으며[43], 남부 지역 전체가 군부의 지배를 받는 등[44] 그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독립 이후 (특정 지역이) 군부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이 때가 유일하며, 이 조치는 편법을 써서 대통령이 된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공약으로 해제된다. 항목 참조.

여담이지만 남북전쟁 이후에도 남부기는 반항과 저항의 상징(...)으로[45]는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데, 현재에는 남부기를 들고 다닐 경우 거의 십중 팔구 인종차별 주의자 + 꼴통으로 찍히지만 한편으로는 병신같지만 멋있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 중에는 오키나와의 중심지 '슈리 성'에서 대공식별용 성조기가 없자 해병들 중 한 명이 휴대하고 다니던 남부기를 게양해 당시 미군 지휘부가 황당해한 에피소드[46]가 있으며, 심지어 6.25 때도 남부기를 달고 다니는 미군 전차부대를 본 한국군 포병대가 '헐 어디 군임? 저거 적군임 아군임?'하고 발포를 할까 말까 헤매다가 마침 미군 고문관이 말려서 아군인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베트남전때는 남부 출신 백인 미군들이 남부기를 달고 다니다가 흑인, 북부출신 미군들과 패싸움이 터지는 일도 잦았다.[47][48]

대외적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 능력이 약해지는 원인이 되어 조선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 이후 5년이나 지나서야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일본에는 쿠로후네 사건이후 미국의 영향이 적어져 메이지 유신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남북전쟁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에 서술된 부분까지 파악하게 되면 "참 뜬금없는 전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몰라도 근현대사 시험 치는 데는 지장없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신미양요에서의 미군의 일시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로 남북전쟁 이후 원정을 벌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꼽히고 있다. 당시 조선의 강화도 수비군은 궤멸됐으며[49], 그 상태로 한성이 함락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5.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추축국의 승리와 연합군의 패전'이라는 떡밥과 함께 미국 대체역사소설 떡밥의 양대산맥이다[50]. 주요 작품으로는 타임라인-191 시리즈 등. 워싱턴 D.C.를 쳤으면 남부가 쉽사리 이겼을 거라는 가정이나 게티스버그 전투(최초창기 대체역사소설 중 하나인 년을 선포하라), 앤티덤 전투(타임라인-191) 등의 결말이 바뀌는 게 주요 소재.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그리고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TV드라마 과 북은 이들 사건이 배경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51] 이 드라마만 봐도 남북 전쟁의 배경이나 전개 양상을 잘 알 수 있다.

1989년 개봉된 영광의 깃발은 최초의 흑인 부대인 매사추세츠 54 연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앤티텀 전투 일부와 게티스버그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와그너 요새 공략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미국 영토 안에서 미국 국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행된 대규모 장기전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역사 인식에 아주 커다랗게 남아 있다. 특히 연방의 수호 vs 각 주의 자주성이라는 '선과 선의 대결'에 가까운 인상 때문에 양편 모두 매력적인 면모가 필요한 미국산 서브컬쳐 계열에 많이 투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블 코믹스의 시빌워도 있고, 트랜스포머에서도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기나긴 대결을 Civil War라고 칭한다. 스타워즈의 클론전쟁 또한 은하 공화국과 분리독립하려는 자들의 대결인데, 여기서는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전술 개념마저 실제의 남북전쟁 수준으로 퇴화되어 드로이드 군단은 일단 밀집 대형을 형성해서 회전을 시도한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테란 연합의 경우 아예 깃발을 남북전쟁 당시의 남부기로 쓰고 있다.

2. 도스 시대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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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영상

인포그램(INFOGRAME)에서 만든 1989년 작 전략(?)게임. 기본적으론 전략이지만 전투에 들어가면 유닛을 조종해서 실시간으로 싸우게되고 특정조건을 만족하면 액션게임같은 스테이지를 플레이할 수 있다. 원제는 North & South. 예전 XT 게임으로 이름을 날렸고, 초기에는 1,2번 디스크를 따로 넣어 플레이했지만[52] 이후 통합버젼이 나왔으며, 나중에 VGA를 지원하는 풀칼라 386버젼도 나왔다(…).

오프닝에서 시프트키를 누르면 배속이 걸리면서 빨라진다. 286 등 느린 컴퓨터에서는 스킵 불가능한 오프닝을 빨리 넘기기 위해 쓸모 있는 기능이었다. 물론 지금은 크게 의미 없음.

또한, 이 게임은 막장제조 게임의 대열에 낀 게임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게임 하나 하려고 컴퓨터를 산 사람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을 정도.[53] 당시엔 그정도로 재밌는 게임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래픽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재미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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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턴 방식의 전략모드에서 미국의 지도를 보며 북군 부대와 남군 부대를 이동시키면서 지역을 점거하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작은 규모의 실시간 전투로 전환된다. 각 부대는 기본 대포 1문, 기병(말타고 칼 휘두르는 그 기병이다) 3명, 보병 6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번에 대포 부대, 기병 부대, 보병부대를 하나씩 조작할 수 있다. 조작하는 부대가 아닌 부대들도 계속 움직이기에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는 기병대를 놔두고 대포를 조작하다가는 기병대가 강물 속으로 전부 빠져서 전투를 망치기도 한다.

유닛에는 가위바위보처럼 어느 정도 상성이 있는데, 대포는 사거리 조정이 힘들고 이동속도가 느리지만 제대로만 맞춘다면 어떤 부대든 한방에 박살낼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고, 기병부대는 이동속도가 빠르지만 대신 일단 움직이면 정지나 후진이 불가능하고(후진 키로 일시적으로 멈출 수만 있다) 무기가 칼이라서 접근하는 동안 보병의 탄막에 당하기 쉽다. 보병은 소총으로 탄막을 만들어 기병을 견제하기 좋지만 밀집대형으로 뭉쳐다니고 이동속도도 느려서 대포의 포탄에 몰살당할 위험이 있다. 즉 기병 > 대포 > 보병 > 기병의 상성을 갖는다고 보면 된다. 물론 컨트롤을 잘 하는 사람은 대포로 기병을 잡고 기병으로 보병을 몰살시키곤 한다.

전략모드에서는 동시에 최고 3개의 부대(즉 대포3문, 기병9명, 보병18명)를 합쳐서 이동할 수 있다. 시나리오는 기본적으로 남북전쟁 발발시점인 1861년부터 1년씩 단계별로 선택, 총 4단계가 선택가능하다. 각 년도별로 남,북군의 입장이 다른게 특징(물론 갈수록 북군이 유리하고 남부가 불리하다). 승리조건은 기차역(요새) 5개를 모두 점거하거나 지도상의 적 부대를 전멸시키는것.

부대의 보급은 연결된 기차역을 두개 점거하면 기차가 이동하면서 돈을 버는데, 이 돈이 5개가 모이면 부대하나를 추가배치 가능하다.(배치가능지역이 없으면 돈주머니가 계속 쌓인다.) 상륙부대 기능을 켜놓으면 노스 캐롤라이나 주(바다 쪽의 주)를 점령하면 배가 지나가면서 응원 부대를 하나씩 내려준다.(프랑스측 지원군이라는 소리가 있다) 그래서 남군은 여기를 무조건 지켜야한다.

전략적인 이동을 하는 와중에도 미니게임이 있는데, 바로 차역을 포함한 주로 돌입하면 건물 점령작전이 벌어지며 아케이드 액션 게임으로 바뀐다. 칼을 던지고 격투를 하는 등 살벌한 플레이가 벌어진다. 기지 점령의 경우 제한시간 안에 기지의 깃발을 바꿔다느냐 못다느냐로 승패가 갈린다. 공격자는 조종 가능한 병사 한 명이며 기본적으로 죽지않는 무적이고 주먹질로 방어자 측 병사를 하늘높이 날려버릴수 있으며 맞추면 즉사시키는 단도(4번 사용가능)를 가지고 있다. 방어자는 조정이 불가능한 대신[54] 병사를 한명씩 보내 방해하는 방식이다. 덤으로 기찻길에 적 부대가 있을 경우, 기차가 지나가면 기차 강탈 게임이 벌어진다. 기지 점령과 비슷하지만 일단 공격자가 기차 차량을 지나 기관차에 올라타야 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요소가 숨겨져 있다.


이외에도 아기자기한 부분까지 조정이 가능한데, 폭풍우를 설정해 놓으면 폭풍우를 만난 부대는 이동이 불가능해진다. '인디언'과 멕시코인 기능을 켜면 특정 주에 2턴 이상을 주둔할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아메리카 원주민(캔사스, 네브라스카)과 멕시코인(텍사스)의 습격이 있으며 걸리면 한 부대씩 전멸한다(…). 특히 잠자고 있다가 '쿠카라차' 음악에 맞추어 일어나 폭탄 테러를 날리는 멕시칸은 매우 충격과 공포를 준다.

2인 동시 플레이와 1인 플레이가 둘 다 가능하다. 그런데 게임은 남군이 유리하다. 게임 진입 이후에는 입력키 재조정[55][56] 이 안되서 남군이 조작하기 편한 것도 있긴 하지만, 시스템적으로도 남군이 확실히 유리하다. 핵심적인 사항이 4개 있다.

1.시나리오 자체가 남군이 유리하다 - 남군이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인 1862년은 남군이 거의 두배의 병력인데 북군이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인 1864년은 북군이 약간 유리한 정도.

2.야만족(?)의 습격에 북군이 훨씬 취약하다 - 인디안이 습격하면 먼저 북쪽부터 치기 때문에 범위 안에 같이 있으면 북군이 먼저 죽는다. 문제는 습격지역이 철도역인데다가 양쪽이 싸우는 핵심지역이라 그냥 빠질 수도 없다. 반면에 멕시칸의 경우는 여기 남군이 있다는 건 이미 게임에 엄청 밀린 상황이라 병력을 안놔도 된다. 단, 이 부분은 다른 버전에서 먼저 북쪽부터 공격하는 게 아니라 랜덤하게 바껴서 그나마 나아졌다.

3.철도역의 보유 가능 숫자는 북군이 3개로 남군의 2개보다는 낫지만, 철도선 끊어먹기가 남군이 훨씬 쉽다.

4.해로 보급지역은 남군이 바보짓만 안하면 무조건 먹는다.

...제작진이 남군빠가 아닌가 심히 의심되는 부분이다. 심지어는 국가 명칭에서도 이런 부분이 나오는데, 남군에 대한 명칭은 연합-Confederate인데 반해 북군에 대한 명칭은 양키-Yankee(...)다. [57]

엔딩이 상당히 암울하다. 이긴 쪽은 완전 거지꼴이 돼서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군한다. 진 쪽은 시체가 잔뜩 널려있는 곳에서 부상병 하나가 꿈틀대다가 죽는데, 구석에선 생존자 3명이 도와줄 생각은 안하고 카드놀이만 하고 있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승자나 패자나 현시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패미컴아미가로도 나왔다. iOS, 즉 아이폰용과 안드로이드 용으로도 리메이크 되었다. 오오 #. 또한 PC(Windows/Mac)으로도 리메이크 되었다.http://www.wholovegames.com/strategy/the-bluecoats-north-vs-south-2.html#.Uq73I9IW2sc

3. 한국전쟁의 다른 이름

간혹 한국전쟁을 이렇게 제멋대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식 표기도, 일반적 표기도 아니라 흔하게 볼 수는 없다. 그냥 상황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표현으로 봐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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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각 진영이 입은 군복의 색상을 따와서 'Blue and Gray War'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일이 있다.
  • [2] 1861년 5월 29일까지는 앨러배마의 몽고메리였다.
  • [3] 노예는 약 40만 명이었다. 노예주 중 일부가 북부 연방에 참여했기 때문. 본문 참조.
  • [4] 이중 노예가 3,521,110명에 달했다.
  • [5] 노예해방으로 전원 자유인.
  • [6] 노예는 1,900,000명.
  • [7] 시코 혁명, 쿠바 혁명
  • [8] 후자는 미국에서 주로 쓴다. 영국에서는 찰스 1세와 의회가 싸웠던 내전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 [9] 한국에서 "6.25"하면 한국전쟁을 말하듯, 미국에서는 "Civil War(내전)"하면 이 전쟁을 얘기한다. The를 종종 생략할 정도.
  • [10]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예가 임금노동자보다 비쌌다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노예들이 거주할 집은 노예들을 시켜서 근처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짓게 하면 그만이고 농업이 기반인 동네라 먹을거리도 풍족했다. 그리고 백인 노동자들도 플랜테이션에서 부릴려면 임금뿐만 아니라 숙식제공은 기본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노예는 임금을 받으면서 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없다는 점이었다.
  • [11] 이 5개 주가 당시 미국 면화 생산량의 3/4 이상을 차지했다.
  • [12] 단적으로 미국의 노예수입은 1808년에 공식적으로 불법이 되었다. 하지만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한 불법 수입이 등장하였고, 이건 당시의 주 사이의 거래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급격한 가격상승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이후에 노예생산(쉬운 말로 '출산') 단계로 접어들어서야 노예가격의 폭등이 조금은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노예가격은 꾸준히 상승세였다.
  • [13] 면화생산은 본격화된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10년마다 2배씩 증가하였다.
  • [14] 담배농업이 무너졌다가 면화농업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1800년에서 1850년의 50년 사이에 노예의 가격은 약 50달러에서 800-1000달러까지 상승했다.
  • [15] 이 시기 남부에서는 수많은 인종학자들이 흑인열등론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들의 기준에서 흑인은 인류에서 가장 저급한 부류로, 퇴화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은 구제할 방법도 없다라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 이집트 문명은 백인이 건설했다는 식의 유사역사학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 [16] 실제로 이때 이탈리아아일랜드같은 유럽의 여러국가에서 이민자들이 뉴욕과 같은 북부주와 같은 지역으로 이민러시를 이룬다.
  • [17] 흑인 한 명의 3/5 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전체 인구의 3/5 이었다. 하지만 둘 다 이상하기론...
  • [18] 이 판결은 존 마셜 대법관이 마버리 vs 매디슨 사건에서 최초의 위헌법률심판을 내린 이후 대법원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의회의 권한을 무시한다는 문제가 불거져서 무려 50년 동안 위헌 법률심판이 벌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엄청났다. 연방 대법원의 판결 중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도 손꼽힌다.
  • [19] 브룩스는 이후 섬너의 동료 앤슨 벌링게임의 도발에 넘어가 결투를 신청했다가 갑자기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결투를 거부하여 망신도 당하고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나고 곧 죽는다.
  • [20] 혹은 아메리카 연합국, 미연맹국, 남부연맹, 남부동맹, 남부맹방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
  • [21] 섬터 요새는 이미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에 갓 대통령이 된 링컨은 섬터 요새에 식량을 공급하겠다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통보하였다.
  • [22] 버지니아는 전쟁 기간 남부의 중심지이자 서부 지역이 북부에 떨어지고 남은 지역이었으니 그야말로 알짜배기 노예주였던 셈이다. 이런 연고로 버지니아는 1960년대까지 인종차별이 극심했고, 현재까지도 보수적인 기풍이 강하다. 그런데 왠걸,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의 광공업은 점차 쇠락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가 깡촌, 버지니아가 상대적인 도시지역이 되어버리면서 상황이 뒤바뀌어버렸다. 그런데 마침 공화당도 보수정당으로, 민주당도 진보정당으로 자리를 맞바꾸면서 지지정당은 유지되었다.
  • [23] 이들을 다룬 영화로 1989년에 개봉한 영광(Glory, 국내개봉명은 영광의 깃발)이 있다.
  • [24] 의회 명예 훈장은 전쟁이 끝나고 50년이 지난 1900년에 수여되었다. 상사는 국기를 들고 돌격하였으며 적의 진지에서 저항하다 퇴각 과정에서 4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다른 병사들을 무사히 퇴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 [25] 한 예로 미국의 남부지역 주들 상당수가 면화재배 및 가공업이 사장되면서 거의 빈곤 주들로 전락해갔다. 게다가 대채산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으니 농업이 사장되는 즉시 이들 주는 극빈 주로 몰락한 것이다. 그러다가 생긴 반전이 바로 미국 자동차 기업의 '빅3'와 성장세인 일본과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들의 미국내 생산공장 설립이었다. 고등교육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기본기술교육및 훈련을 받으면 곧바로 생산라인에 투입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남부 주에 대채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
  • [26] 중간에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는 메클레런은 철도 기술자 출신이었고 제 20메인연대를 이끌었던 조슈아 챔벌레인은 대학교수였다.
  • [27] 로버트 E. 리, 스톤월 잭슨, 그리고 제임스 롱스트리트 등의 장군들은 모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이다.
  • [28] 의외지만 리는 초창기에는 패전을 경험했고 한동안 참모장 격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리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데이비스 대통령과 손발이 잘 맞는다는 면에서 발탁된 반도전역부터이다. 하지만 그 전에도 보우리가드, 스톤월 잭슨, 롱스트리트 같은 직업군인 출신의 장교들은 대체로 북부보다 우수했다.
  • [29] 반면 서부로 가면 북군이랑 별로 다를 것이 없어서 주지사, 주교 등 사회적 명망가들이 얼굴마담이나 사람 앞에 나서서 카리스마 적은 역할을 발휘한 경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군사적 지식없이 지휘관이 되는 일이 남군이나 북군이나 비일비재하고 그나마 북군쪽이 전체적으로 좀 더 자질이 우수한 편이었다. 워낙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이 대규모 군대를 갖지 않던 상태에서 급하게 군대를 끌어모으면서 생긴 일.
  • [30] 북부는 전쟁 기간 중에 새로 4000km이상의 철도를 증설했지만, 남부는 고작 600km에 그쳤다. 거기다 북부는 전시 계엄령의 일환으로 철도를 국유화했지만 남부는 민간에 방치하여 효율에서도 떨어졌다. 안 그래도 남군의 보급은 북부에 비해 떨어지는데, 보급에 중요한 철도마저 부실했으니 이후 남군의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 [31] 당시 남부에서 수출하는 목화는 전세계 생산량의 75%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를 빗대 킹 코튼(King Cotton)이라고 불렀으며, 남부의 외교술은 이 목화를 중심으로 했다. 문제는 전쟁 발발 직전인 1861년에 남부에서는 목화를 많이 수입하는 영국의 개입을 노리고 목화를 수출하지 않았는데,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북부의 해상봉쇄로 인해 수출이 불가능해져서 남부의 경제력을 크게 깎아먹은데다가, 수출을 할 수 없으니 목화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영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해버렸다. 영국은 남부의 목화를 수입하지 못하자 이집트와 인도에서 생산량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해 일시적인 목화 부족사태를 넘겼다. 프랑스는 멕시코 원정을 하다가 실패한 탓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상황. 여담으로 독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이집트는 전쟁 덕분에 목화가격 폭등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남북전쟁이 종전되고 남부의 목화가 수출시장에 쏟아져나오자 가격폭락에 직격탄을 맞아 경제위기에 빠져 후일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 [32] 당시 영국은 자국에서 소비하는 식량의 상당량을 북부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만약 영국이 남부 편을 들면 당장 먹을 것이 없어질 판이었다.
  • [33] 앤티텀 전투에서 남군의 북진을 저지하자마자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해 이 전쟁을 부당한 노예제에 맞서는 성전으로 만들어 영국, 프랑스가 끼어들 명분을 없애버렸다.
  • [34]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도 참전한 노장으로 당시에 이미 74세(...)였다. 이 사람도 버지니아주 출신이지만 연방에 남았다.
  • [35] 자칭 나폴레옹(...)이었는데 능력은 있는 편이었지만 막상 전선에 나서면 리에게 끌려다니는게 일상이어서 결국 조지프 후커로 교체되었다. 매클레런은 이 일에 앙심을 품었는지 1864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패배하자 곧바로 유럽으로 떠나 버렸다.(...)
  • [36] 정확히는 포토맥 강 사이의 삼각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 [37] 사실은 일부러 안 공격한 것에 가깝다. 만약 정치적 상징이 있는 워싱턴 D.C를 초장부터 노렸다면 북부가 필라델피아로 천도했을 가능성이 높고(실제로 고려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부의 존속 가능성도 높아졌을 것이다.
  • [38] 다르게 보면 북군의 첫 승리이다.
  • [39] 이미 미니에 탄이 사용되고 있어서 총기의 명중율이 높아진데다, 전쟁 말기의 북군 일부에선 스펜서 연사 소총(Spencer repeating rifle)과 같은 연사화기까지 사용했기에 나폴레옹 시대때와 같이 개활지에서 대오를 갖춰 일제사격을 노리는 전투는 상대측에게 사격 연습 타겟을 제공해주는 것이니, 큰 손실을 입을수 밖에...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참호전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 [40] 남북전쟁을 참관했었던 유럽 군인들은 하나같이 "역시, 촌놈들은 전쟁을 무식하게 하는구만ㅋ."라고 했었다. 하지만 50년후에 유럽에도 똑같이 재림하게 된다.
  • [41] 당시 인구 약 3000만 명 중에 60만 명 이상이 죽었다. 남성 전투원만으로 전체인구의 2%가 죽었으니;;
  • [42] 뒤늦게 남부에서도 전쟁 말기에는 '독립을 위해서라면, 영국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예 해방도 가능하다'란 주장을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 [43] 물론 후보를 낼 수는 있었다. 근데 누가 뽑아주나... 북부가 인구빨로 밀어붙이면 당할 수가 없었다. 예외가 뮤엘 틸던인데 이 사람도 결국 당선엔 실패. 19세기 후반에도 뉴욕주의 지지를 얻은 그로버 클리블랜드만이 당선될 수 있었다. 남부 출신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끝난지 50년 가까이 지난 때, 버지니아 출신 우드로 윌슨이 공화당의 분열 끝에 당선되면서 이루어졌다.
  • [44] 연방 공직 임명시 남부인은 무조건 배제에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을시 참정권 등의 시민권 행사 불가는 덤
  • [45] 남부의 국기가 아니라 군기였다. 붉은 바탕에 청색 X자가 그려지고 X자 안에 흰색으로 남부 가담 주 숫자만큼의 별이 있다. 남부의 국기는 성조기와 유사한 디자인이어서 그런지 막상 남군 스스로도 별로 사용하지 않아 전후에는 잊혀졌다.
  • [46] 사단장이 새 국기를 보내줘서 이틀만에 성조기로 교체했다.
  • [47] 이 때문인지 게임에서도 심심찮게 나온다. 국민장기 스타크래프트의 테란 연방도 남부기 사용(…).
  • [48] 미국 남부 주 흑인들과 인권운동가들이 남부 주청사에 계양된 남부기를 영구폐기를 강력히 주장해 성공한 일도 있지만 이에 반해 계속 계양되야 할 것을 주장하는 세력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다.
  • [49] 사실 신미양요는 적군이 극소수의 피해만을 입은 상태에서 지휘관이 전사하고 군기까지 빼앗긴 치욕적인 패배다. 이때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는 136년만에 겨우 돌아왔다.
  • [50] 또 다른 떡밥은 미국 독립전쟁 정도가 될 수 있지만, 이건 너무 민감하다 싶었는지 생각보다 자주 쓰이지 않는다.
  • [51] 1980년대 중반에 한국 KBS에서 방영되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 [52] 5.25" 2D(360KByte) 2장으로 구성. 허큘리스,CGA그래픽의 경우 1번 디스크만 있어도 되지만, EGA 그래픽을 사용할 경우 2번 디스크가 필요하다.
  • [53] 참고로 그 당시는 286 컴퓨터 한 대가 한화로 백만원대를 호가했다. 당시 기준 물가는 신라면 한 봉지의 가격이 대략 200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흠좀무.
  • [54] 공격키를 연타하면 공격자를 때려서 제압하는 확률이 높아지거나 단도를 날리기도 한다
  • [55] IBM-PC판의 조작키 설정은 게임 실행 후 게임 설정화면 진입 전에 설정해야 하며 설정 화면에서 화면 중앙에 있는 사진사 발 밑에 있는 가방을 클릭하면 게임 시작이다. 사진사에게 X침을 놓을 수도 있다.
  • [56] 기본 키 설정이 남군은 화살표키로 조작하는데 반해 북군은 w,a,s,z키를 방향키로 쓴다. 당장 봐도 남군이 움직이기 편하다.(…)
  • [57] 참고로 남군에 대해서도 같은 수준의 명칭인 딕시-Dixie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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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7-10 19: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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