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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교

Nestorianism

그리스도교의 종파 중 하나로 비칼케돈 교파이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나오고 심하게 탄압받았지만 현대까지 이 종교는 존재한다. 지금은 소수의 일부만 남겨진 상태. 중국에서는 '경교'라고 불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초대 공의회 중 1차 니케아 공의회,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만을 인정한다.

Contents

1. 고대
1.1. 네스토리우스의 마리아론
1.2. 에페소 공의회
2. 중세
2.1.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2.2. 당나라로 전파
2.3. 몽골 제국에서의 관계
2.4. 탄압과 쇠퇴
3. 근세
4. 현대
4.1. 특징
5. 신라 떡밥

1. 고대

1.1. 네스토리우스의 마리아론

당시 크리스트교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서 5대 교구가 나뉘어 있던 시기로서, 5대 교구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로마 교구는 서로마가 점차 몰락해감에 따라 권위가 약해지고 있었고, 위세가 강한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직을 놓고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크 파벌의 경쟁이 치열한 상태였다.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직에 안티옥 출신의 수도원장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취임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크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리아에 대해서 전자는 하느님의 어머니란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설을 주장했고 반대로 네스토리우스가 속한 후자측에서는 단순히 인간 예수를 낳은 안트로포토코스(Anthropotokos) 혹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란 뜻의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설을 주장했다.

이런 그의 사고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그의 학문적 배경, 안티옥 학파에서 등장한 것이었고, 신성(神性)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와 인간 예수 간의 두 위격이 느슨하게 연합된 것이었고, 때문에 하느님에게는 어머니가 없으며 단지 예수의 인성을 낳은 어머니였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용어 자체가 네스토리우스 눈에는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시키는 용어처럼 보였고, 그는 당시 안티옥 학파(사람의 어머니)와 알렉산드리아 학파(하느님의 어머니) 간의 대립에서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를 도출했다고 생각해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니케아 공회때에 안티옥 파벌과 알렉산드리아 파벌은 힘을 합쳐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하지만 이후 자신들의 단어 사용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가자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옥 파벌은 서로간의 간극이 너무나 큼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로마와의 항쟁을 하던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자 이제 내부의 적들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으며 최초의 항쟁은 아리우스 파벌과의 항쟁인 니케아 공회의였다. 아리우스 파벌을 제거한 이후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논쟁 즉 기독론을 논하기 시작하며 내부의 적들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수많은 항쟁중 큰 항쟁은 네스토리우스 파벌을 제거하는 에베소 공회의를 들 수 있으며 이후 에베소 공회의의 승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인 칼케돈(Chalcedon) 공회의를 들수 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에베소 공회의의 각 파벌을 정리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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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 : 하나의 인간존재(one prosopon) 속에 두가지 본질(인성,신성, two nature)를 가진 두개의 위격(two united hypostasis, two united qnome)이 서로 연합(union, united)하여 하나로서 작용함.
키릴 : 하나의 인간존재(one prosopon) 속에 두가지본질이 어우러져서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의 본질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새로운 성격, two nature mixed into one new mixed nature, miaphysis)로 만들어진 하나의 위격(one hypostasis)
칼케돈 회의 : 하나의 인간존재(one prosopon) 속에 두가지 본질(인성,신성 two nature)가 결합하여 하나의 위격을 형성함(one conjunct hypostasis, one conjuct qnoma)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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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존재 내에 두개의 본질 즉, 신격과 인격이 존재하며, 이 두개의 본질은 각기 다른 두개의 격을 이루고 있으나, 두개의 격은 서로 연합하여 함께 작동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은 하나의 존재 안에 두개의 격이 서로 연합한것이 그리스도다로 규정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키릴로스의 사상은 하나의 존재내에 두개의 본질(신격/인격)이 서로 혼합된 새로운 하나의 격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당시 용어의 혼돈으로 이 혼합(mixture)를 키릴루스 본인은 연합(union)이라는 단어를 네스토리우스와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이러한 키릴로스의 독특한 두 본질의 혼합의 상태를 미아피지스(miaphysis)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새로운 본성인 미아피지스(miaphysis)는 기존의 신성에 비해 인성이 뒤섞인 하등한 신성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었고, 삼위일체론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이후에 열린 칼케돈 회의에서 키릴로스가 정죄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배경에는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옥 파벌의 사상의 근원이 놓여있다.

알렉산드리아 파벌은 그리스 철학인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사상을 근거로 하여 신의 정신인 로고스(요한복음 처음에 나오는 말씀)이 인간의 세상에 들어와 완벽한 대속물으로 죽임을 당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는 신학을 위주로 하였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안티옥 파벌은 유대주의에 근거를 하여 신학을 주장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부당한 사탄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음까지도 감내하는 복종의 아름다움을 보였으며, 죄없는 예수가 사탄에 의해 죽음으로써 이전까지 사탄이 내세웠던 주장의 근거인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는 사탄의 주장이 허망한 것임을 예수는 증명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따라 모든 인간은 예수를 본받아 하느님께 다가감으로써 사탄의 주장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복종의 구원론을 가르쳐 준 존재가 예수라는 안티옥 신학의 대결이었다.

이에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가 두개의 격이 서로 연합되어 있지 않고 서로 분리 되어있다고 주장한다는 식으로 매도하며 안티옥 파벌이 종교회의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 파벌을 포섭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고 콘스탄티노플 대 주교직을 자신의 부하로 임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안티옥 파벌이 도착하여 이러한 키릴로스의 위법한 대응을 고발하며 키릴로스는 황제에 의해 유배당하게 된다.

네스토리우스의 발언은 단지 성모 마리아 문제가 아니라, 그 전까지도 계속해서 논쟁되어 왔던 그리스도론 문제로 이어졌다.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신학적 중심지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시리아티옥로, 이 두 학파 간의 입장은 이전 아리우스파 논쟁과 삼위일체론을 통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성(聖) 키릴로스[1]는, 요한 복음서에 있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라는 말을 인용하며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바로 '사람이 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것으로 설명된다. 즉,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와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분리되는 것이 아닌 총체적인 하나의 인격으로써 설명되어야 하며[2], 따라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공존하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합당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옥 학파의 입장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는데, 안티옥 학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역사적 존재로서의 실체를 강조했다. 이 입장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와 그가 이끄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큰 반발을 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 비유적 의미를 고려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그들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 즉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내세웠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양성(인성과 신성)을 강조하며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반면 키릴로스는 예수 안에 두 본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마리아론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론이다. 인간이자 동정녀인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명제를 예수 입장에서 풀면, 예수는 하느님이면서 사람(마리아의 아들)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이러한 명제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훼손할 여지가 있으며, 마리아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를 막고자 동정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낳았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의도 자체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도 결코 이단이 아니다. 그러나 논쟁이 계속되면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두개의 격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연합하여 함께 작용한다라고 주장하였으나,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키려 한다고 주장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서로 다른 격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연합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하지만 이후 열린 칼케돈 회의에서는 이러한 키릴로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칼케돈 회의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격이며 두개의 다른 본질(이 하나의 격로 결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칼케돈 회의의 주장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과는 약간 다르지만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3]

1.2. 에페소 공의회

그런데 당시 서방교회(로마)에서는 키릴로스를 옹호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3차 공의회를 431년 에페소에서 개최했다. 평생 수도자로 살았던 네스토리우스에 비해 정치적으로 좀 더 노련했던 키릴로스가 이 공의회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교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의 동의표를 얻어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임을 재확인하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양성론으로서 이단임을 천명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추방형을 받았다.

공의회 이후 정통파 교회는 패자에 대한 양보로 그리스도론에서 2가지 본성의 결합이라는 부분을 추가하여 이들을 포용하려고 하였다. 평신도들은 대부분 이 통합에 순종하였으나, 신학자들은 다수가 반발하여 정통파 교회를 떠났다. 거기다 이런 양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알렉산드리아 학파 또한 자신들의 의견을 더욱 밀고 나가 또 다른 이단인 단성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2. 중세

네스토리우스의 파벌은 이후 페르시아인도에 전파, 심지어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가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1.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정통파 신학을 거부한 네스토리우스 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제국 안에서는 거의 절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로마 제국 바깥으로 동방 선교를 계속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는 파르티아에서 대성공을 거두나 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파르티아를 대신한 사산 왕조에서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박해를 시작, 446년 카르카에서 10명의 주교와 15만 3천명의 교인들이 학살되었고 이는 지금도 그곳의 교인들에게 9월 25일은 기념일화 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더욱 외곽으로 확대된다.

이 박해를 피해서 5세기경 중앙 유목민 사회에 전파되고,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상할 무렵 중요 도시에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특히 학교와 수도원이 결합된 제도로서 흩어져 있던 네스토리우스 신자들에게 어려운 환경에도 생존할 수 잇는 지식과 신앙심을 부여하고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고 한다.

2.2. 당나라로 전파

당시 국제상인인 그드인의 개종에 따라서 7세기 초반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네스토리우스교가 전파되었다. 머리는 불교처럼 밀지만 수염은 기르는 방식의 현지화에 성공했다고 전한다. 곽자의 등의 유력무장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8세기를 전후로 이슬람이 부흥하고 실크로드가 절단되면서 외부에서의 유입이 끊겨 점차 쇠퇴하였고, 삼무일종의 법난에 휘말려 된서리를 맞은 후 황소의 난에서 다시한번 대거 학살당하며 소멸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중앙아시아 일대에서는 국제상인인 그드인의 도움으로 큰 세력을 펼치면서, 10세기 이후 중국 본토에서 경교는 멸하지만 중국 외곽에는 큰 영향을 펄치고 이는 중국에서 나온 경교인들의 영향도 있었다.

2.3. 몽골 제국에서의 관계

한편으로 소그드의 상인들은 유목민들에게도 전파, 수령의 결정에 따라서 집단적 개종을 하여, 레이트나이만, 구트 같은 유목집단이 대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서구에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가져오게도 하였다.

그 중 세력이 큰 것이 레이트로서 13세기까지 그 세력이 남아있었다. 칭기즈 칸은 그 지배자 옹칸에게 혼인 요청이 거부된 후 전쟁을 벌이나 처음에는 패배하고 이후 다시 승리하여 세 딸을 자신과 큰아들과, 막내아들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중 막내아들 툴루이의 부인은 소르칵타니 베키라는 이름을 가졌고,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에게 네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 몽케와 둘째 쿠빌라이 칸은 4대, 5대 대칸이 되었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1252년 사망하지만, 그녀의 명성은 그치지 않고, 마침내 몽골인에게는 일종의 '성녀'로서 숭배와 제사의 대상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이렇게 몽골 제국은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면을 보는데 사실 몽골인들은 모든 종교에 다 관대했다.

중동의 상황을 보면 중동의 지배자 일 한국의 창시자는 소르칵티나 베키의 셋째 훌라구로서 그는 케레이트 옹칸의 손녀 도쿠즈 카툰를 첫째 아내로 삼아 그리스도교에 관대한 면을 보였다. 그의 후계자 아바카는 비잔티움의 황녀를 부인으로 맞아 들이기까지 했다.

2.4. 탄압과 쇠퇴

하지만 아바카 사후 그의 동생 테구테르는 어머니의 영향에도 불구, 이슬람을 신봉하고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고[4], 이후 중동에서 네스토리우스교는 탄압의 나날을 겪게 된다. 특히 서구 교황과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중동의 지배자인 몽골인들에게 그리스도교가 멀어지게 되자 (또 이슬람에 가까워지자) 이슬람 교인들의 극단성이 폭발하게 되고 이는 대학살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1297년 이르빌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좋은 예로, 이는 시내의 쿠르드족 무슬림교회를 파괴하자 그곳에 주둔하던 몽골계 병사가 무슬림을 활로 쏴죽인 것이 발단으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포위하고 이르빌의 대주교와 사제들은 붙잡아 살해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총주교 야발라하가 1317년에 죽은 후 네스토리우스교는 최후의 보호막마저 잃어버리고 14세기 말까지 끝없는 쇠망과 추락의 연속의 역사를 겪고, 14세기 말 티무르의 서아시아 침공과 무차별적 주민 학살로 거의 끝장나게 된다.

즉, 네스토리우스교가 몰락한 근본적 원인은 지배층의 이슬람으로의 경도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서 보호장치가 사라져 버린 것이라 볼 수가 있다. 16세기 중반이 되면 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3. 근세

티무르의 침공 이후, 14세기 말 티무르의 공격으로 힘들어진 신도들은 현재 이란, 이라크, 터키 3개국 국경인 하카라 신지로 피했는데, 이들의 대다수는 쿠르드족으로 주변이 온통 무슬림인 적대적인 환경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네스토리우스 교단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과제는 생존이었고, 교단에서는 결속력을 유지하고 구심점인 총주교의 대통을 보존하려는 의도로서 총주교를 선출에서 특정가문에서 세습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총주교는 혼인이 불허된 자리였기 때문에 숙질계승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계승을 둘러싼 암투를 야기했고 그 결과 교단은 분열의 운명에 처했다.

16세기 초 교단은 총주교 계승문제로 인하여 둘로 분열되어, 한쪽은 자파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서 로마 교황청의 우위를 인정하고 교황으로부터 총주교 임명장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교황청과 연맹을 추진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교단의 독립성을 고수하는 구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전반과 중반, 구파의 총주교들은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가톨릭 교의를 받아들이고 그들 역시 교황의 임명장을 받게 되자 이번엔 신파가 다시 반가톨릭으로 선회했다. 이렇게 해서 구파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인 칼데아 가톨릭이 되었고 신파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로 이어지고 있다.

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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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권 장악을 둘러싼 치열한 내분으로 교단 지도층이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는 동안 교도들의 상황도 날로 악화되어 갔다. 특히 1843년 쿠르드족과 충돌이 벌어지면서 대학살극으로 10만으로 추정되던 전체 신도 중 2만이 사망했던 것이 가장 악영향을 미쳤다.

신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쿠르드족과 오스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4만의 신도들이 이라크 북부 모술평원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은 독립국 건설의 희망을 가지고 오스만 제국과 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33년 영국의 신탁통치가 끝난 후 독립한 이라크 역시 그들을 인정하지 않자, 일부 무장 신도가 시리아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거부당하고 귀환 도중 이라크 정부군, 쿠르드족, 베두인들의 공격으로 거의 몰살당하고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뒤 신파계통의 총대주교 마르[5] 시몬 23세1940년시카고로 이주한 뒤 망명 총대주교좌(See in exile)를 설치하여 '아시리아 동방교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라크 영내에 남아있던 교도들은 '칼데아 가톨릭 교회'[6]라는 이름으로 바그다드에 근거를 둔 구파 총주교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라크 영내에 있으면서 신파계통의 전례형식을 고집했던 교도들은 1968년에 다시 고 동방교회(Ancient Church of East)로 분리되었다. 통계상으로는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40만 명, 칼데아 가톨릭 교회가 150만명으로 칼데아 가톨릭 교회가 많은 편. 다만 중동 지역의 종교탄압[7]으로 현지에서는 극소수이며, 어쩌면 미국에서 믿는 사람들(거의 다 중동 지역 이주민들)이 더 많다는 통계도 존재한다.

1976년부터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딩카 4세가 새 총대주교로[8] 착좌한 이후 공식적으로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설을 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 네스토리우스가 신성과 인성을 아주 엄격하게 분리하려 했나에 대해서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브리태니커에서 나온 네스토리우스에 관한 서술이나 아시리아 교회의 대신학자였던 '대(大) 바바이' 역시 그리스도는 두 본성을 가지며 이는 한 인격 안에 섞이지 않고 존재한다 라고 진술한 바 있다.

4.1. 특징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위의 근세사 단락에서 언급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십자고상으로 포함한 성상이나 이콘을 쓰지 않고 십자가 도안만을 사용한다. 다만 십자가 자체가 이콘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는게 개신교와의 차이점이다.(참조1, 참조2) 또한 예전에 쓰는 기도문오리엔탈 정교회동방정교회등 다른 동방교회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반면 칼데아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관계로 성상, 십자고상, 이콘을 모두 인정한다.

5. 신라 떡밥

초기 경교 유물로 '추정되는' 신라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1967년 경주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성모상과 비슷한 보살상이 발견되었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숭실대기독교박물관에 소장중인 이 '유물'(동십자가 문양, 성모상)은 학술적 발굴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단 발견자가 우연히도 개신교 목사 김모 씨다. 그가 경주불국사에서 땅 위에 드러난 십자가성모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1967년 당시에 이미 학계와 타종교계로부터 헛소리라는 욕을 들어먹었으며, 그 여파로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이 한동안 문을 닫기도 했다.

김 목사가 돌십자가를 발견(발굴이 아니다)한 장소도 처음에는 어느 곳의 암석 위였다가 나중엔 (신라 불교의 상징이자 심장인)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으로 바뀌기도 했다. 즉 우연히도 개신교 목사우연히도 경주에서 우연히도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1,500여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기독교의 유물을 우연히 발견했다는 기적의 결과가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인 것이다. 이 기적을 여러분은 믿쉼미까?!!

아울러 어쨌거나 신라시대 유물로 인정하여 네스토리우스교가 9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떡밥이 돌지만, 이것이 종교로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정말 기독교 계통 유물이라 해도 단순히 '외국의 장식품'으로서 생각해서 물건만 들여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북유럽에서도 불상이 발견된 전례가 있지만, 바이킹이 교역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추측할 뿐 불교북유럽에 도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바이킹 불자설 게다가 십자가 '문양'이 곧 기독교 유물이고, 아이를 안은 어머니 상이 곧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불교에서도 모자(母子) 불상이 있으며 대지모신, 풍요, 다산, 자애를 의미하는 모자상은 고대에 특정 종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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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축일은 6월 27일이다.
  • [2] 그러나 이 주장은 후에 단성론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 [3] 개신교, 특히 장로교등의 칼뱅계통에서 유독 성모 공경에 대해서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비슷하게 바라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한국 개신교에서는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거부한다. 다만 5세기 당시 네스토리우스 본인에게는 성모 마리아를 폄하할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 [4] 이는 현지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 [5] 아람어로 '주님' 혹은 '성인(聖人)'이란 뜻이다.
  • [6]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다
  • [7] 2003년이라크 전쟁이후 극심해졌다.
  • [8] 15세기 이후 처음으로 500년만에 세습이 아닌 선출로 착좌한 총대주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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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9 11: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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