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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last modified: 2015-04-10 21:06:28 by Contributors

< 199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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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빌 클린턴 피스메이커(평화이식자)[1] 1994 - 요한 바오로 2세

<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ɔ)

Photograph: JonathunderMedal: Erik Lindberg (1873-1966)

from
1992 -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1994 -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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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uth Africa The Good News (cc-by-2.0) from
1990년대 대통령 재임 시절 2008년의 모습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를 치러 왔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 1962년 11월, 노동자들의 파업을 유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중 발언.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일들을 끝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히 영면할 수 있다. 나 스스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의 시간 속에 잠들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 (The greatest glory in living lie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
- 1994년에 출판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면 남에게 나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때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나는 주춤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도중에 발을 잘못 내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커다란 언덕을 올라간 뒤에야 올라가야 할 언덕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감히 꾸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누구도 피부색, 배경 또는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나지 않는다. 미워하게끔 배운다. 미워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랑하는 것도 가르칠 수 있지 않은가.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레 사람 가슴에 다가온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대로 살 자유를 (사회에 의해) 빼앗겼을 때, 그는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다. (when a man is denied the right to live the life he believes in, he has no choice but to become an outlaw.)"

Nelson Rolihlahla Mandela (넬슨 롤리랄라[2] 만델라)

1918년 7월 18일~2013년 12월 5일(95세).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 만델라
3. 서거
4. 트리비아
5. 대중매체

1. 개요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 중 한명이자, 아프리카 대륙의 진정한 추장.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보통선거 실시 이후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백컬러드아시아계 가리지 않고 존경받는 인물이며, 아프리카 대륙의 수많은 흑인들은 그를 영웅시하고 높이 기리고 있다.

애칭이자 존칭으로 '마디바(Madiba-말 그대로 '어른')'라고 많이 불린다. '아버지'를 뜻하는 타타(Tata)로도 가끔 불리며, 혹은 '훌륭하다',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쿨루(Khulu)'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만델라는 영국령 남아프리카 식민지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말썽꾸러기 혹은 문제아)' 는 뜻의 롤리랄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았다. 넬슨(Nelson)은 초등학생 때 교사가 지어준 영국식 이름인데 이후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그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16세 때 성인식을 치른 뒤 얻은 이름 달리붕가(Dalibhunga)는 '새로운 권력자' 를 뜻했다.

학교에 가게 된 만델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내용들(백인 이야기만 있으며 흑인들은 노예강도로 나오는 얘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며, 운동도 잘한지는 몰긋고 좋아했는데 축구와 장거리 달리기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대신 그를 돌봐주던 후견인이자 족장이였던 종긴타바 달린드예보(Jongintaba Dalindyebo)에게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 후 흑인들을 위해 일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땐 막연히 후견인인 달린드예보가 추장으로서 재판을 집행[3]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부족을 위해 일하는 법 상담자가 되기 원했으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고 나서는 넓은 세계를 보고 감명 받으면서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을 꾸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그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으며 특히 강제 결혼을 시키려는 후견인을 피해 친구 올리버 탐보(만델라의 동료이며 남아공 정치인 겸 민주화 운동가)와 함께 도망가 위장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확한 내막은 만델라가 법대에서 주는 급식에 대해 불만 급식소는 다 똑같구만[4] 을 가지고 투쟁을 벌였다가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후견인 달린드예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여 투쟁을 중단하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했지만 만델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 결혼을 시키게 된 것. 강제 결혼에 만델라는 도망갔지만 끝내 사람을 보내 수소문한 달린드예보에 의해 그들의 행방도 알려지게 되었고 탐보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만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복귀 후엔 훗날 남아공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게 될 동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절친 올리버 탐보까지 재회, 합세하여 셋이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일으켜 나가게 된다.[5] 아프리카 민족회의(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6] 맞선 투쟁활동을 벌이게 된 만델라와 일행들 ANC는 처음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방법을 모색하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남아공 정권이 친영국파에서 반영국파인 국민당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영국보다 배로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백인 우월주의에 꽉찬 놈들이라 원래 있던 암묵적인 사회적인 차별까지 법으로 확실히 새기면서 아파르트헤이트시대를 정식적으로 열고, 컬러드의 투표권을 박탈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경찰을 보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책임자가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민족의 창(Unmkhonto we Sizwe)'이라고 한다. 줄인 이름은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진보계열의 백인들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사보타주와 테러를 행하다 결국 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무려 27년 동안 투옥되었다. 총 27년의 기간 중 로벤 섬 감옥[7]에서 18년을 생활하였고, 이후 일정 기간은 국제 여론에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에 의해 감옥이 아닌 간수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8]

그리고 드디어 1990년,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못이기고 남아공 정부는 결국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함과 동시에 그를 석방한다. 이후에 당시 남아공 정부와 국민당, 민주당, 인도계 정당, 컬러드계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서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만듬으로써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협상 후반기엔 극우정당인 보수당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이 협상에 반발하고 잉카타 자유당은 협상에 나섰다가 파기하다를 반복하고 ANC와 갈등을 벌여 한때 남아공에 내전으로 갈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반투스탄내 기득권층은 반투스탄 내 흑인들의 반발에 결국 굴복했고, 보수당은 자멸함에 따라 대다수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ANC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252/400 62.7%)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잉카타 자유당과의 분쟁도 진정되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2.1. 대통령 만델라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있던 모든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지들도 잘못한 걸 아는거지 그런데 왠걸?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혔지만 그들을 사면했다.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란 슬로건 아래 단 한 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이게 굉장히 먼치킨이라 툭 까놓고 말해 사람들은 학창시절 때 놀려댄 것만으로도 이를 갈다 나중에 복수하기도 하는데 이 아저씨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9] 또 경제적으로도 이 한 수 덕분에 남아공 백인들이 남게 되어 그들의 경제력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만델라가 서거하였을 때 백인들이 대거 떠나 남아공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훗날 만델라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또한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 선수권 일화도 유명한데 당시 전형적인 백인 스포츠[10]로 흑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정도로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럭비를 만델라는 흑백이 하나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대표팀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격려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열었다. 대회 직전에는 대표팀이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를 직접 가르쳐주는 행사까지 마련했다.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주장 등번호 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뉴질랜드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고 그 날은 남아공 전체의 축제일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백인 주장에게 전달한 것 역시 만델라였다.

다만 이처럼 흑백간의 갈등을 아우르고 남아공의 분열을 막은 성과를 낸 만델라였지만 그의 집권 시기에 남아공 경제 문제[11]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있다. 흑인 경제력 강화(BEE) 프로그램이라 해서 수탈당하던 흑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줌으로써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를 시행했는데 역차별 논란도 있었고 이 계획으로 일부 흑인들만 혜택을 입었으며,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왜곡된 경제가 아프리카 원주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백인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면도 있었으며 1980년대 경제 제재 당시부터 경제는 이미 어려워지고 있었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흑인에게도 부의 재분배와 공평한 사회진출의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1960년대부터 인종 차별이 약화되는 추세에서도 1990년대까지 흑백분리 정책을 유지한 이전 정부들의 바보 같은 짓이 화를 자초한 셈이라는 것이다.[12] 또 서구의 경제적 자원을 잃지 않은 것도 그의 공로 중 하나로 꼽힌다.

정치적인 수완으로 봤을때는 의회 구성문제로 당시 지리해져가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맺었으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반대한 극우 백인들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의 반발, 잉타카 자유당과의 또다른 분쟁으로 남아공이 거의 내전 상태까지 갈 뻔 했던 것을 진화시켜 남아공을 안정시켰다. 허나 후에 그의 후배들이 일으킨 부정부패나 추문이 일어나는걸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1999년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13] 존경받다 권력자가 된 후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수많은 사례에서 볼 때 단임으로 깔끔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훌륭한 업적이라면 업적.

국내에는 1995년과 2001년 두 번 방한했으며 첫 방한 시에는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두 번째 방한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김 대통령 서거 당시 만델라 재단에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 방한 당시 모 방송사에서 만델라 부부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를 틀어주었는데 그때는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방송국에 만델라 안티가 있다 여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 출마하자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함께 한 낡은 시계를 선물하였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 탄압을 받으며 20년간 사용한 낡은 가방을 선물하였다. 또한 만델라의 자서전을 번역한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 [14]

3. 서거

2009년 쯤부터 병세가 나타나다 2013년 12월 5일 요하네스버그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그 고난했던 행보를 생각해보면 장수한 셈. BBC/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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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

만델라가 타계한 후 전세계에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구글은 메인 페이지에 만델라를 추모하며 갑작스런 소식에 두들 그릴 시간이 없었던 만큼 그의 인생을 돌아보는 만델라 재단의 페이지로 링크를 걸어놨다. 한국어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7월 18일 넬슨 만델라 두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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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CEO 팀 쿡은 "위인. 자유와 인류 존엄성의 챔피언. 그는 세계 모든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평안히 쉬소서, 넬슨 만델라. 우리는 벌써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트윗을 올렸고 애플 홈페이지스티브 잡스의 사망 직후 스티브 잡스를 추모했던 것처럼 그의 사진, 이름, 출생년도 및 사망년도를 띄워 그를 추모하였다.

12월 10일 열린 추모식에는 미국흑인 대통령오바마 대통령, 반기문 UN 사무총장,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15] 등 세계 91개국 정상급 인사, 왕족들이 참석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표로 참석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사정상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남아공은 영웅이자 아버지를 잃었고, 세계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을 잃었다."며 애도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만델라의 투쟁은 당신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당신의 승리였다"면서 "만델라는 한 국가를 정의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역사의 거인"이라고 그의 삶을 평가했다.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프리, 락그룹 U2의 보컬 보노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도 참가했으며 추모식이 열린 요하네스 FNB 경기장[16]에는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만델라를 추모했다.

헌데 이 추도식에서 수화 통역을 담당하던 사람이 아무 의미 없는 손동작을 한 걸로 밝혀졌다. 정신분열을 앓고 있던 자신이 갑자기 어쩔 줄 몰라했다는 듯. AP 인터뷰, CNN, BBC, ITN 대체 이런 사람을 왜 수화통역사로 앉힌 거야!!! 남아공의 국가기간방송인 SABC에서 이를 알아챘는지 추도식을 중계하던 도중 자체 수화통역사를 급히 투하해 화면에 띄웠다. 직접 현장으로 간 게 아니지만 당사자와의 인터뷰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장례식은 12월 15일 국장으로 열렸다. Hamba Kahle, Madiba!!'(함바 칼레, 마디바!/잘 가요, 존경받는 어른!)'''

남아공 정부는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청사 앞에 만델라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동상을 건립한 후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동상의 귀 안에 작은 토끼(...)가 있던 것. 동상 제작진들의 말에 따르면 동상 제작 시간이 촉박해 어려움을 겪은데다 동상에 제작진의 서명을 남기지 못한 점에 불만을 가져서 이런 행위를 했다고. (아프리칸스어로 토끼는 '서두르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 장난을 해도 만델라 동상에 하냐'는 여론의 비난을 받고 토끼를 제거하기로 했다.

4. 트리비아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와 1996년 황혼 이혼을 해서 말이 많았는데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외도까지 했다는게 사유였다고. 민족회의 시절에도 위니가 남편과 달리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들에 대한 보복행위를 허락하고 특히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을 살인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폭력적 행위로 인해 평화적 해결책을 강구하던 만델라와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한다.[17] 더 정확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수정바람. 참고로 만델라는 총 3번 결혼했다. 위니는 2번째 아내였고 저 때 이혼하고 2년 뒤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1933-1986)의 아내였던 그라사 마셸 여사와 삼혼했다. 그때 연세가 무려 만으로 80세.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당일에 증손녀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개막식에 불참하였다. 그런데 만델라의 조카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만델라가 FIFA의 지속적인 경기장 참석 요청을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조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협박 수준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매일 주치의로부터 만델라의 컨디션을 보고받아야 했고 가족들은 혹여 의사가 경기장 참석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내릴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사실 FIFA는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엄청난 상징성을 팔아먹기 위해 바로 얼마 전 증손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91세 노인을 축구장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이다. 이후 폐막식에도 불참하리란 예상을 깨고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였다. FIFA의 더러운 속내와는 별개로 관중들은 비록 10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부부젤라를 불면서 만델라를 환영하였다.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등이 있다. 국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어번역해 1995년 처음 출판했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에이즈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당장 자신부터 전처 소생인 큰 아들을 에이즈로 잃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아들은 2005년도에 사망했다.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일부 보수파에게는 피델 카스트로와 친하고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지겹지도 않나

5. 대중매체


《굿바이 만델라》의 한 장면. 데니스 헤이스버트 분.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의 한 장면. 본인이 아니라 모건 프리먼 분.

당연히 할리우드에서 그의 생을 영화화한 적이 몇 번 있다. 대니 글러버는 만델라가 아직 옥고를 치르고 있던 1987년 HBO에서 제작한 TV 영화에서, 시드니 포이티어(영화 《2012》에서 미 대통령으로 출연)는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인 1997년, 데니스 헤이스버트는 2007년작 《굿바이 만델라》(원제 Goodbye Bafana)에서[18], 그리고 모건 프리먼은 2009년작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19]에서 각각 만델라로 열연했다. 모건 프리먼의 경우 만델라 본인이 자신을 연기한 최고의 배우라고 극찬한 적도 있었고, 만델라의 서거 이후 만델라를 추모하는 인파들이 만델라가 아닌 프리먼의 사진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만델라 사진 보여주면 모건 프리먼?이라고 하거나 모건 프리먼 사진을 보고 만델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2013년 영국에서도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에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 주연으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런던에서 만델라의 딸 등이 참석하여 시사회가 진행되던 도중 만델라의 부고가 전해졌다고 한다.

소설 《세계대전Z》에서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레데커 플랜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로 하고 레데커 플랜을 계획한 인종차별주의자폴 레데커를 불러와 도움을 요청한다.

본인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맬컴 엑스를 다룬 동명의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깜짝 출연. 흑인 어린이들에게 엑스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교사 역으로 등장한다.

흑인 패션모델인 나오미 캠벨이 친할아버지로 여기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만델라 역시 그녀를 친손녀처럼 생각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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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분란의 땅에 평화를 이식한 협약의 체결자들을 말한다. 93년, 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아라파트, 라빈 총리, 남아공 대통령 클레르크가 공동 선정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협약들이 같은 해에 체결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둘 다 다른 의미의 헬게이트를 불러왔지만 여하간 이 4명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며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역시 만델라밖에 없다.
  • [2] 코사어 발음은 /xoˈliːɬaɬa/이다. /ɬ/ 발음을 굳이 한글 표기로 옮기면 '홀리흘라흘라' 정도에 가깝다.
  • [3] 영국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긴 했지만 소도시에서는 추장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
  • [4] 사실 만델라의 이유도 정당한 것이 그가 다니는 포트헤어 대학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흑인을 받는 대학이었으나 급식이 너무 형편없었다.
  • [5] 물론, 투쟁 과정에서 인도 및 여러 유색인들을 대변하는 당들과도 같이 일한다. 또 공산당과도 손을 잡았는데 자서전에서 만델라는 공산당이랑 손 잡는건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 [6] 근데 이는 1948년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실시 된 정책이다. 정식적으로 초기에 대항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사회일 뿐, 아파르트헤이트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겹쳐서 애매하긴 하다. 어차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인종차별이지 않나?
  • [7] 폐쇄된 후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8] 영화 '굿바이 만델라'에서는 이 시기 만델라를 지켜보던 백인 간수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참고로 이 간수하고는 꽤 친하게 지내서 대통령 관저로 초대해올 정도였다고.
  • [9] 다만 이 때문에 당시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포기한다면서 항의를 받기도 했다.
  • [10] 반대로 흑인들은 축구에 열광했다.
  • [11] 다만 경제성장률 자체는 1980년대에 비해 상당히 상승하긴 했다.(1980년대 1%->90년대 중반 4%)
  • [12] 사실 이게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공에게 남긴 가장 큰 폐해라고 할 수도 있다.
  • [13] 음베키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그가 재임하던 시기 남아공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맹주로 급부상하였지만, 그 과실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고(이 시기에 남아공내에서 흑인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아무리 넓게 잡아봐도 전체 흑인의 20%가 채 안되는 수준이고, 나머지 흑인들은 여전히 실업과 저임금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공공서비스 질 향상이나 범죄문제 대처에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결국 불명예스럽게 중도 퇴진하게 된다. 또 재임 초기 만델라와 대립하면서까지 에이즈에 대해 이뭐병스러운 대응을 했다가, ANC내에서도 욕을 먹는 등 망신을 사기도 했다. 이후 과도기를 거친 뒤 대통령에 취임한 주마는 성추문 문제가 있었음에도 분배정책을 내세워 흑인들한테 인기를 얻어 집권했지만, 정작 집권 뒤에는 부정부패로 말썽을 일으키는데다가 공약도 지키지 않았고 더군다나 만델라가 잠깐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언플질을 시도하는 망발을 저질러 흑인들에게도 인기가 푹 떨어지게 된다.
  • [14]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 언론 및 외신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고도 한다.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징역살이, 해외 망명, 반대측의 극심한 저항, 노벨 평화상 수상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참고
  • [15] 일본 왕실 인사가 왕족이 아닌 주요 인사 추모식에 직접 참석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 [16] 구 사커시티 스타디움.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주경기장이었다.
  • [17] 이에서 비롯된 말이 명언/결혼 항목에 하나 있다. "결혼은 진짜 빡쎈거야. 결혼이 얼마나 빡쎈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남아공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는 27년 간 매일같이 당하는 고문과 매질도 참아냈고 40도가 넘는 남아공 사막에서의 강제노동도 견뎌냈어. 그 지옥 같은 27년 간을 참아내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부인하고 겨우 6개월 지내고 이혼했다고." - 크리스 록...당연히 웃자고 하는 소리. 6개월만에 이혼하지 않았고 고문과 매질을 매일 당하지도 않았다.
  • [18] 만델라가 약 30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할 때 그를 전담했던 백인 간수와의 우정이 주 이야기.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KBS2에서 방송했고, 만델라의 서거 직후 KBS1에서 다시 방송했다.
  • [19] 만델라의 취임 이듬해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선수권 우승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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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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