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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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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전투 목록
왜교성 전투
(1598년 9월 20일)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정유재란종료/이순신 전사

death_of_admiral_yi.jpg
[JPG image (15.34 KB)]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노량해전도.

此讎若除 死即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 이순신[1]

7년 전쟁의 끝
노량해전
이겨서 지켜내리라
내 칼의 마지막 울음
칼날 사이로 열리는 세상
불멸의 역사가 온다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예고, KBS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2]이자 최대의 해전이며,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전투.

Contents

1. 전투 이전
2. 전투의 전개
3.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4. 전투의 결과
5. 이순신은 자살했나?
6. 미디어

노량 해전
날짜
1598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장소
조선 노량 앞바다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왕국
명 제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진린
등자룡
이영남
조효열
무의공 이순신
송희립
김완
우치적
나대용
이언량†
이완
고득장†
방덕룡†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데라자와 마사시게
다카하시 무네마스
병력 조선군 전선 83척
명나라군 전선 63척
전선 500여 척
피해 규모 이순신 및 조선군 300명 사상
명군 500여 명 사상
전선 200여 척 침몰
100여 척 연합 수군에게 나포
150여 척 파손
사상자 1만 내외[3]
결과
조·명 연합 수군의 결정적 승리[4]
시마즈 요시히로고니시 유키나가도주 성공[5]
임진왜란 종전

1. 전투 이전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을 격파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이 합동으로 진격해서 한양을 공격한다는 수륙병진 전략을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수군은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가로막혔고, 육군은 직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가로막힌 탓이었다.

일본군은 더이상 전쟁을 진행할 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에 [6]을 쌓고 되려 수비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순신 또한 도원수 권율, 명 수군도독 진린, 육군제독 유정 등과 함께 수륙 합동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다. 목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7] 그러나 6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왜교성의 함락에는 실패했다. 나라 육군이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인 탓이었다.[8] 결국 이순신은 고금도로 물러나 고니시의 동태를 감시했다.

이런 가운데 1598년 8월 18일, 왜군의 총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결국 사망했다.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위임받은 고다이로(五大老)와 고부교(五奉行)들은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의 철수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장기간의 군사활동을 벌이면서 전쟁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던 다이묘들은 알음알음 집결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절대 일본군의 퇴각을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이순신은 기어코 일본군과 장수들을 죽여서 7년 전란의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이었고, 이순신 휘하 군졸 및 장군들은 임진왜란 당시 온갖 잔학한 짓을 저질렀던 일본군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2. 전투의 전개

이에 이순신은 계책을 써서 일본군을 유인하기로 결심했다. 1598년 11월 18일, 일단의 병력을 순천 왜교성 앞으로 보내 조선 수군이 다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절박해진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시마즈는 고성에 주둔한 다치바나와 남해에 주둔한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요시토모의 군대와 함께 300~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향했다.

<임진전란사>에서 정리한, 노량해전에 참가한 조선군 장수들은 다음과 같다.

조선 측

  • 삼도수군통제영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 전라좌도수영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임)
        • 흥양현감 고득장
        • 낙안군수 방덕룡
        • 조방장 우치적
        • 광양가장 나대용
        • 녹도만호 송여종
        • 발포만호 소계남
        • 사도가장 이언량
        • 회령포만호 민정봉
    • 경상우도수영
      •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立夫)이순신
        • 제포만호 주의수
        • 사량만호 김성옥
        • 안골포만호 우수
        • 영등포만호 정응두
        • 미조항첨사 김응함
        • 당포만호 안이명
        • 보성군수 조계종
        • 조라포만호 정공청
    • 전라우도수영
      •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안위
        • 해남현감 유형
        • 진도군수 선의문
        • 강진현감 송상보
        • 무안현감 남언상
        • 장흥부사 전봉
        • 가리포첨사 이영남
    • 충청수영
      • 충청도 수군절도사 권준은 참가하지 않았다
        • 당진포만호 조효열

창선도에서 출발한 500척의 전선에 수만명의 정예군사를 태운 일본 함대는 서서히 노량해협으로 접근하여 오고 있었다. 이때 이순신은 이미 노량 근처의 섬에 복병을 숨겨놓고 왜군 선단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노량 근처에 진입한 일본 선단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하여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노량 근처에 복병한 삼도수군 복병장의 함대가 기습을 가하자 노량해협을 안전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왜군들은 크게 당황하였으며 수 척의 왜선이 격침되자 그제서야 기습당했다는 것을 안 시마즈는 즉시 우세한 함선의 수를 이용, 조선수군 복병장의 함대를 포위하려 한다.[9]

그러나 이미 죽도 부근에 매복하여 있던 진린 함대가 이 때 도독기를 높이 올리고 북을 치며 진격의 명령을 내렸다. 원래 명군 전선인 사선, 호선들은 왜군의 전선인 세키부네에 비해서도 전투력 면에서 열세에 있었으나 진린과 등자룡이 탄 배는 판옥선으로 왜선들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고, 등자룡이 불량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일본 함대에 돌격해 들어가자 때에 맞추어 삼도수군 복병장의 함대도 그에 호응하여 왜선을 침몰시키기 시작했다. 삼도수군 복병장 함대의 역할은 왜군을 기습하는 임무 말고도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명 수군 및 진린을 호위하는 임무또한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함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공격하였다.

그리고 관음포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수군 본 함대가 공격을 시작하였다. 첨자찰진을 펼친 이순신의 함대는 왜 수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하였고, 어린진을 펼친 상태에 있던 왜 수군 함대는 졸지에 앞에서는 명 수군, 우측에서는 조선수군 복병장의 함대, 좌측에서는 이순신의 본함대에 의해 삼면 포위된 형태가 되어 버렸다.

이 때, 마침 부는 북서풍을 이용하여 명 수군과 복병장의 함대에서 불화살과 신기전, 불 붙은 짚섬으로 화공을 가하였으며 순식간에 왜군의 함대는 불타기 시작하였다. 이는 매복 기습 후 삼면 포위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가한다는 이순신의 전술에 일본군 함대가 완전히 말려든 것으로써 이 때는 이미 일본군의 승기는 사실상 꺾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첨자찰진을 펼친 이순신의 본함대는 경상우수사 이순신(동명이인)을 선봉장으로 하여 돌격하였다. 화공에 큰 피해를 입은 왜군 함대는 혼란에 빠졌고, 중앙을 돌파당하고 만다.

그러나 왜군 지휘관인 시마즈는 과연 사천 왜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명장다운 빠른 판단을 하여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군 함대를 공략하기로 한다. 큰 피해를 입은 왜군 선봉대는 전투불능에 빠진 상황이었으나, 선봉대 뒤에 있는 중위, 후위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은 상황이었다. 왜군 함대는 명군 함대를 향해 빠르게 돌진하였고[10], 이때 등자룡의 판옥선에 명나라 함대의 엉터리 포격술로 인해 불이 났고, 돌진하는 왜군에 의해 결국 등자룡이 전사하고 판옥선이 불타버리고 만다. 명군 파총 심리가 등자룡의 배를 구하러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왜 수군은 즉시 진린의 대장선으로 달려들었으나, 이순신의 함대가 근처에 와서 진린의 함대를 구하였고 조-명 연합수군은 일종의 포위진을 펼친 후 다가오는 왜군 함대에 포격을 하였다. 야간이었기에 평소의 화포 사정거리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때문에 근접전이 벌어졌으나[11],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에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던 왜 수군은 공황 상태에 빠져 사기가 낮아졌으리라 짐작된다.

명 수군을 공격하여 중앙을 돌파하여 활로를 뚫는다는 왜군의 계획이 이순신의 빠른 구원으로 인해 무산 된 상황에서, 노량에서 여수방향으로 흐르던 물이 방향을 바꾸어 여수에서 노량 방향으로 일기 시작하자 관음포 앞바다의 파도는 관음포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이 파도를 등에 업은 조명연합함대는 왜 수군을 관음포구 안으로 밀어 붙이면서 관음포 입구에 정렬하여 입구를 철저하게 봉쇄, 포위섬멸을 시작하고 왜군은 거센 저항을 시작한다.

3.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오전 8시경,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추격하다가 적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순신이 어디에 탄환을 맞았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엇갈린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가슴을 관통하여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적고 있고, 안방준의 은봉전서에는 '겨드랑이 아래(腋下)'에 맞았다고 적혀 있다. 각종 매체나 위인전 등에서 노량해전을 묘사할 때는 징비록의 기록을 따라 흔히 가슴에 탄환을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탄환에 맞은 이순신은
"戰方急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고 유언을 남겼고, 조명 연합수군은 이순신의 죽음을 모른 채 남은 적들을 소탕하며 정오까지 전투가 계속 되었고 왜 수군은 500여척 중 50여척의 전선이 살아 돌아갔다.

너무나도 유명한 유언이지만 그래서인지 뒷이야기도 많다. 이순신이 남긴 이 유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그런데 정작 징비록보다 약간 뒤에 초판이 간행된 행록에선 별 얘기가 없다가, 나중에 재간에 재간을 거듭하면서 어느 사이엔가 유언이 첨부되었다. 이에 몇몇 연구자는 해당 유언이 없었거나 다른 내용이었을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충무공과 교분이 있었던 이원익인조에게 해당 유언을 그대로 전하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려 있어, 정확히 같은 문구는 아니더라도 충무공께서 이런 유언을 남기신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유언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굉장히 많은데,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적에게'라는 표현은 일언반구도 없다. 애초에 적에게 총사령관의 죽음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다. 오히려 아군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수병들이 자기 장수가 죽었다는 걸 알면 사기가 극도로 떨어질 테니까.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표현한다. 여기서는 이순신이 "단 하나의 조선 수군도 동요해서는 아니 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한다. 다만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표현이 이순신 위인전에도 나온 적이 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이 전투 중에 알려지지 않았다곤 하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하여 분전하다가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인물들의 기록도 꽤 나온다. 이순신과 동승한 송희립도 부상을 입었고 유형은 탄환을 여섯 발이나 맞고도 끝까지 전투를 독려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역시 잔적을 소탕하다 전사했다.

이 노량 해전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당대 사료는 실록에 있는 이덕형의 보고인데 그것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지휘관이 전사한 탓에 확실한 장계가 없기 때문이다.[12] 그래도 그의 보고 덕분에 전투의 전개가 상당히 알려졌지만 정말 자세하게 보고한 충무공의 장계를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특히 장수급이 다수 전사한 건 임진왜란 해전 내 없었던 일인데 이것으로 그 날의 전투가 얼마나 혈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4. 전투의 결과

군선 100여척을 포획했고 200여척을 분멸하였으며 500여급을 참수했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셀수 없다
- 선조실록 권 106 선조 31년 11월 을사. 명나라 보고서

일본군선 200 여척을 격침하고 사상자가 수천명
- 선조실록 권 106 선조 31년 11월 무신. 좌의정 이덕형이 노량을 둘러보고 올린 보고서

300~500여척의 일본군 전선중 살아 돌아간 것은 50여 척. 나머지는 모두 격침 또는 전투불능 상태가 되거나 조명연합수군에 나포되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전사자가 많은데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순신을 비롯,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잔적 추격전 가운데 일본군의 총탄에 사망했다.

18세기 말에 작성된 호남의절록에 이순신의 동순참좌제공(함께 싸우거나 전사한 선비들)은 144명이고 동순제공(함께 전사한 선비들)이 58명인데 그중 21명, 약 38%가 노량에서 전사했다.
산케이 신문의 서울 특파원이고 부업이 반자이 특공대구로다 가쓰히로이미 전투 의지를 잃은 적을 기어코 추격하다 전사한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순신을 떠받드나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깽판쳐놓고 도망칠때는 곱게 도망치려고? 라고 비난한 바 있다. 사실 이것은 노량 해전에 관한 대부분의 혐한들의 평가이며 "평화롭게 후퇴하는 건데 왜 기어코 공격하냐? 괜히 공격하다가 죽었으니까 니 잘못이다." 식의 발언은 방사능 원숭이들의 혐한 소굴인2ch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그렇게 평화로운 주제에 선공하고 또 공격하냐? 하지만 만일 얌전히 보내줬다면 이들은 일본군의 위세에 눌려서 추격하지도 못했다는 개드립을 칠 것이 뻔하다. 즉, 처음부터 한국을 비방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혐한들의 입에서만 나오는 의미없고 추잡한 트집잡기일 뿐이다. 흔히 말하는 적반하장(賊反荷杖).

아무튼 이는 이순신과 당시 조선백성의 심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에 불과하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조선을 명나라로 들어갈 길을 안 빌려줬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침략한 쪽이 어디인데. 멍청한 헛소리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7년 동안 전란을 일으키고 수많은 조선인들을 무참히 살해한 침략자들을 섬멸하는 것만이 7년 전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물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도요토미 사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을 대신하여 에도에 막부를 개설하여 쇼군에 취임한 이후 조선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고 성의표시 차원에서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 일부를 송환했다. 다만 막부 정권의 특성상 이미 전쟁을 위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한 다이묘들에게 이 이상 전쟁책임을 강제할 수단이 없었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이묘들도 도요토미 정권의 해체 과정에서 정치적 행보를 달리한 상태였다. 이에야스 입장에선 최대한 할만큼 한 것. 더욱이 전범 재판 같은건 있지도 않은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장 전쟁이 끝난것이 아니였다. 정식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광해군 1년에 계해약조를 맺은 후에야 종전이 되었다. 그 사이 약 10여년 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휴전도 아니고 대치상태에 가까웠다. 철군약속도 명나라 장수들이 합의해준거지 조선이나 명의 공식입장이 아니였다. 결국 일본의 철군은 종전이후 철군이 아닌 전략적 후퇴에 가까웠고 이렇게 후퇴한 대규모 병력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를 상황이였다. 구로다 가쓰히로의 말대로 후퇴하는 적을 아름답게(?) 보내주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 하고 미래의 위험을 만드는 이적활동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은 후퇴하는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어 향후 전쟁의지를 꺾어야 했고 그래서 노량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전 전투와 다르게 일본군의 섬멸이 목표였고, 야간전이라 평소보다 근접전을 펼쳤기 때문에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당초의 목표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는 일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고니시는 노량 해전의 혼란을 틈타 부산으로 도망쳐서 일본으로 무사히 귀환한 것이다. 물론 이는 이순신의 책임이 아니라 뇌물을 받고 고니시의 퇴각을 용인해준 진린의 책임이 크지만... 그러나 고니시는 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의 내전에서 서군 측의 주요 다이묘로 참가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하니 고작 2년을 더 산 셈.

그리고 또 다른 주력 시마즈 요시히로는 정유재란때 1만의 군대를 출병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불과 2천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동원 병력이 적은 이유가 시마즈식의 동원체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나, 세키가하라 전투의 중요도를 생각해 볼 때 노량해전에서의 큰 피해로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있다.[13]

한편 일본 위키페디아에서는 난중잡록의 한 구절을 왜곡해석하여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자위하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 일본측 왜곡 해석
    아군과 명군 양군이 돌발하여 좌우에서 엄습하니 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을 마구 던져서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여 아군<일본넷티즌의 주어 삽입 망상 한문의 상식도 없는 무식 드립>의 형세가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觀音浦)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추격하며(어떻게 퇴각한측이 추격을해???ㅋ)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兩軍突發。左右掩擊。矢石交下。柴火亂投。許多倭船太半延爇。賊兵殊死血戰。勢不能支。乃退入觀音浦。日已明矣。舜臣親自援枹先登追殺。炮賊伏於船尾。向舜臣齊發。舜臣中丸不省人事


  • 정식 해석
    아군과 명군이 갑자기 튀어나와 좌우에서 덮쳐 화살과 돌을 던지고 횃불을 어지러이 던져 왜선 태반이 불탔다.
    <적군의 불리한 전세를 설명>

    그리고 문단이 바뀌어

    적병이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세가 지탱할 수 없자. 이에 관음포에 퇴각하였고. 그때가 날이 이미 밝았을 것이다.
    <일반문장이 나오고 그 결과 세가 불능지라면 즉 전문장과 뒤문장이 반대되기에 항상 보조사는 그러나가 된다. 만약 '하여' 라는 순응적 결과 즉 주어가 바뀌는 문장이 오게된다면 그 바뀐 주어가 나온다. >
    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올라 추격하며 죽였다.<일본넷티즌 망상대로라면 퇴각한측이 추격한다는 것이 어불성설.>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5. 이순신은 자살했나?

이순신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의 마지막 순간에 전사했다. 너무나 극적인 상황 때문에 일각에선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자살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 주장의 근거는 이순신이 일본군을 추격하면서 갑옷을 벗었고 이 때문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생각했고, 가족을 위해서는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게 낫다라고 생각한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왕조국가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 유능하고 명망 높은 장수가 왕의 질투와 두려움을 사서 토사구팽당하는 예는 적지 않으며, 선조는 전쟁중에도 이순신을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등 이순신을 증오하여 제거하려 했는데 전쟁이 끝났으니 더 심해질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런 추측은 자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조차도 선조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바로 이곳에서 이때에 죽은 것이 이순신 장군이 이후에 못볼 꼴을 당하지 않게 하였고, 이순신의 명예를 위해서 가장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순신 자살설은 조선 후기에도 상당히 심각하게 논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숙종때의 영의정 이여는 "충무공이 총탄에 맞기를 자처했다"라고 말하고 있고 숙종때의 신료인 이민서도 "당쟁으로 김덕령 장군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김덕령의 죽음을 논하면서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이순신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14] 또한 이후의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도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이이명은 "공이 아무리 앞에 다가올 화를 걱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벼히 여겼겠는가?"라며 자살설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사실 조선후기, 일제 강점기, 박정희 정부 연간에는 이순신 숭상및 업적 재정리가 있어도 아무도 자살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순신 자살설이 수면에 오른건 남천우 박사가 역사비평에서 간행한[15] 이순신 전기에서 다시 들고 나왔다. 문제는 남천우 박사가 자살설을 지지하는게 아니고 자살설이 있으나 강하게 부인하면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죽은게 아니라 부하들과 짜고 변복해 숨어 소실집이나 본가의 다른 방에 은거하다가 20년후에 진짜로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16] 꽤 많은 사람들을 낚았으나 근거가 전혀 없다.

남천우 박사는 이순신의 자서전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그 자서전이라는게 이분의 충무공 행록이다. 원래 숨어살면서 "나는..."이라고 쓴 자서전을 이분이 3인칭으로 바꾸었다는 이론이다. 물론 낚이지 말자.

KBS 역사프로그램에서 이순신 자살설 및 생존설을 주제로 다큐를 만들다가 문중의 항의로 내용을 바꾸어서 방영한 적이 있다.

6. 미디어

워낙 유명한 전투이고 임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의 전사를 다루기 때문에 상당히 많이 극화되었다.

김진규가 주연 및 감독 을 하다 대차게 말아먹은[17] 성웅 이순신에서는 벌건 대낮에[18] 전투를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상당히 개념찬 명장 진린이 나오는 것이나. 일본 측 장수로 고니시 유키나가[19]가 나오는 것도 개그.[20]

조선왕조 5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마지막회를 빛내는 전투로 유명하다.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하늘에 기도하는 이순신을 연기한 김무생의 연기는 전율할 정도. 김무생은 그해 연기대상 후보에 올랐다. 이순신의 최후도 적의 구원군[21]이 온다는 소식에 그것을 보러나가다 총에 맞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유언은 유언대로 하고 방패로 가렸을 뿐 아니라 지휘를 하는 것처럼 앉아서 서서히 사망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부하들도 마지막에야 장군이 사망한 것으로 알게된다. 진린은 이전부터 찌질이로 나오는데, 진린을 연기한 배우가 초반에 1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한 명나라 장수 조승훈을 연기한 배우와 같다. 다른 작과 달리 진린을 구하는 명장면이 여기에서는 나온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4회 ~ 5회 초반, 마지막회(104회)에서 나왔다.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치열한 전투신, 김명민의 연기는 꽤 인상적이다. 4회는 칼의 노래를 많이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설정으로 비난이 많았던 부분, 도자기 운운하는 왜군 일당,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동귀어진하는 이영남, 고질적인 파열탄 등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회(104회)는 4회와는 비슷한 부분이 일부 있으나 4회 방영 이후 설정 변경 등으로 인해 대사, 장면, BGM이 4회와는 다르게 나왔으며 새로 촬영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4회와는 달리 역사상의 전투 기록과 대부분 비슷하게 나왔으며 파열탄, 동귀어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의 시퀄 격으로 마지막으로 제작 예정인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 노량 해전이 될 예정이다. 가제는 노량 : 죽음의 바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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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순신이 노량 해전 직전에 배에서 하늘에 축원하며 했다는 말. 이것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 나오는 말이고, 이항복의 백사집에도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말이 나온다. 백사집에는 "오늘은 진실로 결사전을 벌일 터이니 원컨대 하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라고 기록되어 있다.
  • [2] 엄밀히 말하면 최후의 전투는 아니다. 노량해전 후 남해도에서 웅거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남해도 전투'가 진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정규전은 노량해전으로 종결됐기 때문에 마지막 전투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 [3] 명사 진린 열전.
  • [4] 당연하지만 전쟁을 끝낸 해전이므로 결정적 승리다.
  • [5] 이순신에 의해 대다수의 전선이 분멸되어 버렸기에 '철수'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제대로 '철수'한 병력이 있어야 철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시마즈가 동원한 병력 중 대략 10분의 9의 병력이 작살나 버렸다. 이건 시마즈 요시히로가 휘하 병력 대다수를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난 것으로 봐야 한다. 덤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도주했다.
  • [6] 대표적인 왜성으로 순천 왜교성, 부산 서생포 왜성, 울산 왜성등이 있다. 이중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울산 왜성을 둘러싸고 울산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 [7] 여기에는 아마도 고니시에 대한 이순신의 개인적인 원한도 들어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정이 가능하긴 하지만 애초에 순천 왜교성 자체가 일본군 주둔 왜성 중 가장 서쪽(혼자 전라도에 있다. 나머지는 모두 경상도)에 있었고 호남 재진출 기도시 교두보가 될 만한 곳이였기 때문에 가장 먼저 타겟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8] 명나라 육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유정은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공격하는 척만 하다가 중단해 버렸다. 거기다 진린이 조명연합수군의 공조를 깨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다가 위기에 빠지자 이를 구하다가 이순신의 휘하 장수와 병사만 희생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 [9] 군사력은 병력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란체스터의 법칙이 해전에서 가장 잘 적용되며, 물량을 이용하여 포위하는 것은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실제로 시마즈가 옳은 판단을 한 것이며 만약 이순신의 전술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이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 이다.
  • [10] 왜군 함선 세키부네의 방향전환능력이나 안정성은 판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이것이 전란 내내 큰 약점이 되었으나 본래 전방 기동성에 특화된 군선답게 전방 기동력은 뛰어났음이 확실하다.
  • [11] 수적 열세를 장거리에서의 포격섬멸로 극복하던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전술을 생각할 때 이는 큰 어려움이 되었을 것 이다. 실제로 노량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 전사자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음을 알 수 있다.
  • [12] 마찬가지로 명량 해전 역시 선조가 중국 장수에게 말하는 것에서 인용된 것밖에는 확실한 장계가 없다. 따라서 명량 해전과 노량 해전 사이에 있던 전투들이 축소되거나 기록에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것으로 진린에게 수급을 나눠준 것으로만 유명한 왜교성 전투가 있다.
  • [13] 시마즈 요시히로가 소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것은 시마즈 가문 내부적으로 내전에서 취할 입장을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한 탓이 크다는 의견도 있지만, 시마즈 가가 병력과 함선 대다수를 노량에서 상실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가문 내부의 문제와 관계없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 [14] 다만 이민서가 쓴 "갑옷을 벗고 싸웠다." 부분은 '열심히 싸운다'는 뜻의 관용적 표현임이 정설이다.
  • [15] 사실 이론이 너무나 허술하고 사료적 가치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진영문제로 상대적으로 듣보잡 마이너한 역사비평사에서 출간할수 있었다
  • [16] 사망한지 3일뒤에 묻혔고 20년뒤에 현재 위치에 이장한건 맞으니까 사실은 그때 안 죽고 이장할때 죽었다는 논제.
  • [17] 당시로서는 세트장 재활용이나 테마파크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노량 해전을 찍으면서 촬영에 사용된 소품을 다 태워먹었다.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사회 후 서운한 점을 지적한 이유로 소품을 또 만들어 다시 촬영했다
  • [18] 위 항목을 보면 알듯이 전투는 야간에 벌어졌다
  • [19] 영화에서는 박동룡이 열연했다. 어차피 이 작품에서 주요 왜장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유일하다.
  • [20] 고니시 유키나가가 노량해전에 참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엄연히 이 전투의 일본 측 주장은 시마즈 요시히로다. 고니시는 왜교에 대한 조선수군의 공세가 느슨해진 틈을 타 도주했다.
  • [21] 아마도 시마즈 군의 지원인 것 같다.
  • [22] 다만 노량이 실제로 제작될지는 첫번째 시리즈인 명량과, 두번째 시리즈인 한산의 흥행에 달려 있다. 일단 명량은 흥행에 대성공했으므로 이후는 한산의 흥행에 달린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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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6: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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