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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침공

last modified: 2015-09-26 22:52:16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독일측 배경
2.2. 영국측 배경
3. 전개
3.1. 덴마크 침공
3.2. 노르웨이 침공
3.2.1. 침공 초기
3.2.2. 초기 해전
3.2.3. 연합군 지상병력의 참전
3.2.4. 릴레함메르 전투
3.2.5. 나르빅 전투
4. 결과
5. 여담

1. 개요

1940년 4월 8일부터 6월까지 나치 독일노르웨이를 침공해서 점령하는 전투를 지칭한다. 동시에 진행된 덴마크 침공도 함께 포함된다.

2. 배경

2.1. 독일측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던 폴란드 침공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장기전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독일은 설마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때문에 참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예정에도 없던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해야 했는데 이는 장기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전략물자 비축량이 현저히 부족한 독일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의 해상봉쇄로 심각한 자원부족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다. 하물며 그때보다 훨씬 열악한 해군력을 지닌 1940년 시점에서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 전략자원을 해외에서 수입해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소련으로부터 전략자원을 수입할 수 있었으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은 두 가지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중립국인 스웨덴에서 산출되는 중요 전략자원인 의 안정적 수급이었다. 스웨덴 북부 키루나(Kiruna) 지방에서는 양질의 철광석이 대량으로 산출되고 있었는데, 이 철광석들은 육로로 노르웨이 북부에 있는 부동항나르빅(Narvik) 항구로 옮겨져서 독일로 수출되었다. 스웨덴 영내에도 키루나와 인접한 항구는 있었으나, 겨울이 되면 보드니아만이 얼어붙기 때문에 나르빅 항구를 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1939년 11월에 영국의 압력을 못이겨 국가상선단을 영국에 제공한 일이 있어, 독일로서는 노르웨이가 연합국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질 경우 철광석 수급이 완전히 끊길 우려가 있었다.

둘째는 영국과의 전쟁을 위한 노르웨이 항구의 확보였다. 이는 해군사령관 에리히 레더가 적극 주장한 것으로 영국-노르웨이에 걸쳐 가해지는 영국의 강력한 해상봉쇄선을 노르웨이 점령으로 뒤로 크게 밀어내고, 장악한 노르웨이 기지를 바탕으로 영국에 대한 적극적인 통상파괴전 및 해상작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알트마르크호 사건이 일어나면서 더더욱 부각되었다.

결국 3월 초, 아돌프 히틀러는 노르웨이와, 노르웨이 침공의 발판이 될 덴마크에 대한 침공계획을 승인하면서 독일의 스칸디나비아 침공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침공부대는 4월 8일에 출항하여 4월 9일 침공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2.2. 영국측 배경

문제는, 영국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데 있었다. 정확히는 전시 거국내각에 참여한 대독 강경파인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과 프랑스 수상 폴 레노(Paul Reynaud)가 이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해상투사능력이 부족한 프랑스의 폴 레노보다는 막강한 해군력을 지닌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사실 영국은 노르웨이를 우호적인 중립국으로만 묶어둬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겨울전쟁 발발 이후 독일과 소련이 공동으로 스칸디나비아를 침공할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미리 스칸디나비아에 군사거점을 선점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그러나 알트마르크호 사건은 독일만이 아니라 영국도 자극하였고, 영국군은 비상시 노르웨이 일대에서 수행하기로 한 월프레드 작전(Operation Wilfred)과 R4 계획(Plan R4)의 실행을 준비했다. 월프레드 작전은 나르빅 항구부터 시작해서 독일로 이어지는 노르웨이의 영해가 잔뜩 포함되는 노르웨이-독일 철광석 수송항로를 기뢰로 도배 해버리는 것이었고, R4 계획은 한술 더떠서 해병대를 투입해 노르웨이 본토를 침공하여 나르빅을 중심으로 한 노르웨이의 철광석 수출 항구와 연결철도를 모조리 파괴해버리는 것으로, 노르웨이가 계속 저항할 경우 트론해임(Trondheim)과 베르겐(Bergen)도 같이 점령하기로 계획되었다.

이러나저러나 노르웨이는 결국 침략받을 운명이었다.(…) 단, 영국의 침공 계획은 독일과 달리 노르웨이 전토 점령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독일로 철광석이 수출되는 기반시설 및 관련 지역에 국한시켰다는 점에서 조금은 낫다고 할 수 있…을려나?

영국군의 윌프레드 작전은 4월 5일에 발동되기로 하였으나 이것이 지연되어 최종적으로 4월 8일로 결정되었다. 이 지연때문에 노르웨이는 추축국이 될 뻔하다 연합국이 되었다.

3. 전개

3.1. 덴마크 침공

시간상으론 노르웨이 침공부대 출항 이후인 4월 9일 새벽 2시, 덴마크 주재 독일대사가 자고 있는 덴마크 외무장관을 깨우고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영국과 프랑스 나쁜 넘들이 덴마크에 쳐들어오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우리 독일이 이웃 우방국 덴마크를 지켜주기 위해 덴마크에 독일군을 급히 파병했으니 이를 허용해달라."는 것이었다.

외무장관은 당연히 그런 새빨간 거짓말에 속지 않고 독일의 전면침공 사실을 인지, 이를 상의하고자 시간을 번 다음 급히 왕궁으로 달려가 국왕과 면담했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Christian 10)는 독일의 통첩에 격분했으나, 현실적으로 덴마크군의 총병력은 15,000명도 안되었고 중장비도 거의 없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영국과 프랑스가 도우러 오기 매우 힘든 위치였다. 이런 현실적 문제로 인해 국왕과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독일의 요구조건을 수용했다.

독일군은 덴마크 정부가 요구를 수용하기도 전에 국경을 넘었고, 이 과정에서 덴마크군의 소규모 병력과 작은 교전도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덴마크군은 저항을 중지했고, 독일군은 덴마크 전역에 진주하게 된다. 다만 독일은 덴마크가 요구조건을 수용해준 것에 대한 대가로 덴마크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았다.[1][2]

3.2. 노르웨이 침공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그놈의 바다였다. 물론 독일 해군이 아무리 약체라 한들 노르웨이 해군보단 강력했지만, 만에 하나 가다가 영국 해군에게 걸리면 독일 해군과 이들이 수송하고 있는 독일 지상군은 그대로 북해 용왕궁으로 강제 관광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또 노르웨이의 영토가 남북으로 상당히 긴 편인데다 독일이 확보해야 할 핵심지역 다수가 북부에 있는 관계로 노르웨이 전역에 동시다발적인 침공을 개시해야 한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독일군은 노르웨이 침공에 총 5개 보병사단(69, 163, 181, 196, 214)과 3산악사단 예하 2개 연대, 그리고 해군의 대부분을 투입하였다. 지상군 투입을 위한 마땅한 상륙함이 없던 관계로 중순양함 이하 대부분의 함선이 차출되었는데, 어뢰정, 소해정 심지어는 훈련함까지 가리지 않고 긁어모아야 했다.

베저위붕 작전(Unternehmen Weserübung)이라 이름 붙여진 이 침공작전에서 독일 침공군은 총 6개 그룹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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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당일 독일군의 주요 목표도시들

  • 그룹 1 - 목표 나르빅
전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이우 및 구축함 10척
지상군으로 3산악사단 소속 병력 2,000여 명

  • 그룹 2 - 목표 트론해임
중순양함 어드미럴 히퍼 및 구축함 4척
지상군 1,700여 명.

  • 그룹 3 - 목표 베르겐
경순양함 쾰른, 쾨니히스베르크 및 표적함 브렘즈(Bremse), 수송함 카를 페터스(Karl Peters), 어뢰정 6척
지상군 1,900여 명

  • 그룹 4 - 목표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 및 아렌달(Arendal)
경순양함 칼스루헤 및 어뢰정 10척
지상군 1,100여 명

  • 그룹 5 - 목표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Oslo)
중순양함 블뤼허, 포켓전함 뤼초우, 경순양함 엠덴 및 어뢰정 3척, 소해정 8척
지상군 2,000여 명

  • 그룹 6 - 목표 에게르순(Egersund)
소해정 4척
지상군 150여 명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그룹 1·2·3으로 노르웨이 서부 피요로드 해안의 중요 핵심항구들이었다. 오슬로를 공격하는 그룹 5도 상당히 중요했으며 그룹 4와 6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다. 특히 그룹 1은 북단 나르빅을 공격해야 했기 때문에 도중에 영국 해군의 습격을 받을 우려도 높았고, 때문에 귀중한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이 할당되었다.

3.2.1. 침공 초기

침공함대가 출항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독일군 수송선 리우 데 자네이루가 망명 폴란드 정부의 지휘를 받는 폴란드군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그러나 해당 잠수함은 대규모 침공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통신능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격침 사실을 보고하지 못해 영국과 프랑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연합군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비교적 일찍 파악했는데, 항공정찰로 독일 함대의 대규모 움직임을 관측한 것이 4월 8일 오전이었다. 만약 이때 영국 함대가 독일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발했으면 독일군의 침공은 그대로 좌절이었겠지만, 영국은 독일측의 의도를 오판해 버린다. 독일 함대의 대규모 움직임을 해상봉쇄를 뚫고 북대서양으로 돌파하려는 시도거나 북해에 분산된 영국 함대를 타격하려는 의도로 오판하고 대규모 함대결전 준비에 나선 것이다.

영국군은 즉시 전 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고, 노르웨이 침공을 위해 군함에 탑승했던 해병대원들은 즉시 짐과 함께 항구에 내동댕이쳐졌다.(…) 영국 입장에선 노르웨이 침략 계획은 윌프레드 및 R4보다, 눈앞의 독일 해군을 격멸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러나 영국이 전력을 다해 북해를 샅샅히 수색했음에도 독일 함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독일군은 북해 돌파 따윈 안중에도 없이 노르웨이 연안에 붙어서 항해중이었기에 영국은 엉뚱한 곳만 계속 수색했던 것이다.

결국 4월 8일 아침을 기해 독일군은 영국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전격적으로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했다. 노르웨이군은 병력도 적고 기습까지 받아 곳곳에서 격파되었고, 북부지역에 배치된 노르웨이군 연안방어선 2척도 끝까지 싸웠지만 압도적인 격차를 못이기고 격침당했다. 결국 침공 24시간만에 수도 오슬로를 제외한 모든 독일군의 목표도시를 넘겨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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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침된 블뤼허. 그라프 쉬페 이후 두 번째 독일군의 주력함 손실이었다.

다만 오슬로에서는 빈약한 노르웨이 해군의 반격이 있었다. 먼저 기뢰부설함 2척이 독일군 구축함 2척을 공격하고 순양함 엠덴에게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며, 1문의 함포가 장착된 노르웨이군 소속 포경선 1척도 싸웠다. 이들 함선들은 분쇄될 때까지 저항했다. 그리고 수비군의 항전으로 해안포에 의해 중순양함 블뤼허가 격침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귀중한 중순양함 중 하나를 어이없이 구식 해안요새의 12인치 요새포와 육상설치용 구식 어뢰의 합동공격으로 날려먹은 것.(…) 덤으로 블뤼허에 탑승했던 상륙병력들도 인원과 장비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일시적으로 독일군의 오슬로 방면 침공함대가 퇴각했다. 그러나 이 참사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재진격을 개시해서 공수부대까지 투입한 끝에 예정한 것보다는 약간 늦게 오슬로에 상륙했고, 해당 지연시간을 이용해서 노르웨이 정부와 의회, 국왕 하콘 7세(Haakon 7)와 왕가는 오슬로를 무저항도시로 선포한 후, 정부의 금괴를 가지고 내륙으로 피난했다.

이 과정에서 노르웨이군은 몇 안되는 구식 글래디에이터 전투기들을 모조리 띄우며 어떻게든 침공을 저지하려 했으나, 독일 본토에서 출발한 독일군 전투기들이 덴마크에 착륙하여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는 방식으로 노르웨이에 출현하는 바람에 모조리 격추당하거나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그리고 전투기들을 뒤따른 독일군 수송기들이 비행장에 강행착륙하여 점령하였고 독일군 전투기들은 점령한 비행장을 거점으로 확보하고 작전반경을 넓혀 나갔다. 이 당시 오슬로 인근 포르네부(Fornebu) 비행장에선 의외로 거센 노르웨이군의 저항으로 인해 수송기들이 착륙에 실패하자 독일 공군의 ME-110 전투기 편대가 수송기보다 먼저 비행장에 강행착륙해 버렸다. 이에 당황한 노르웨이군이 공황 상태에 빠졌고 그 틈에 후속 수송기들이 착륙에 성공해 비행장을 점령했다.

4월 10일, 노르웨이 의회는 정부와 국왕 일가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항전을 부탁한 뒤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노르웨이군은 전차나 대전차 화기같은 중화기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시에만 소집되는 민병대가 주력인 상태였다. 거기에 숫자까지 모자라서 약 4개 사단의 규모에 불과했는데, 개전 첫주만에 3개 사단분의 병력을 상실하는 등 노르웨이의 저항은 빠르게 분쇄되어 갔다.

노르웨이 육군참모총장인 오토 루거 소장은 엽총이나 사격경기용 소총 같은 빈약한 무기를 들고 참여한 민간인 지원자까지 받아들여서 트론헤임 부근에 최후의 저항선을 만들었으나, 그들이 전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3.2.2. 초기 해전

노르웨이군을 제외하더라도 영국 해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과 독일군간의 해전은 매우 치열했다.

이미 나르빅 항구에 독일군이 침공하기 이틀 전인 4월 7일 밤에 영국 해군 항공정찰대가 스카게락크 해협에서 독일 함대를 발견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전함 로드니, 리펄스, 밸리언트와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으로 구성된 부대를 스카파 플로에서 출항시켰다. 그리고 같은 날 밤 10시에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 15척으로 구성된 제2순양함대가 로디스를 떠났다. 그리고 4월 8일 오전 4시 30분부터 30분간 영국 구축함 4척이 나르빅 근해에서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고, 순양전함 리나운과 순양함 버밍햄, 구축함 8척이 엄호중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착각으로 인해 대부분의 영국 함선이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는 동안, 기뢰 부설을 수행했던 영국군 구축함 중 1척인 글로웜(Glowworm)은 야간에 승무원 1명이 바다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홀로 함대에서 이탈해 승무원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 구축함은 4월 8일 오전 8시경에 웨스트 피요르드 서남방 약 150마일 정도 떨어진 해상에서 독일군 구축함 2척과 만나게 된다. 글로웜이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개시하자 독일군 구축함의 지원요청을 받은 어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인 히퍼가 교전지역으로 달려왔다. 히퍼의 8인치 주포사격이 작렬하자 함급의 차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글로웜은 마치 탈출하려는 듯이 연막을 피우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글로웜을 확실하게 격침시키기 위해서 히퍼가 급속전진하자 갑자기 글로웜은 연막에서 뛰쳐나와서 히퍼에게 돌진, 충각 공격을 가했으며 너비 40미터의 구멍을 뚫어놓는 타격을 가해서 히퍼를 1개월 이상의 수리가 필요한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글로웜은 이 공격을 끝으로 폭발해서 격침당했으며, 영국측 목격자가 전무하다시피 했으므로 글로웜의 이름과 함장인 제랄드 루프의 용맹함은 한참 뒤에나 알려지게 된다.

독일군의 나르빅 침공부대를 운송하고 돌아오던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웨스트 피욜드에서 5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영국군 순양전함 리나운과 만났다. 새벽인 상황인데다가 눈보라까지 휘말려서 시계상태가 좋지 않았고, 독일군은 2척의 전함을 투입한데다가 상대방이 순양전함이라서 독일군의 11인치 주포가 관통가능한 이점을 누렸다. 하지만 전투는 오히려 15인치 주포를 가진 리나운이 우세했으며, 포격이 작렬하는 가운데 그나이제나우의 주포탑이 15인치 포탄을 맞아서 작동불능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샤른호르스트가 연막을 치면서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북쪽 해상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해전이 종료되었다. 리나운은 추격하려고 했지만, 리나운도 11인치 주포탄 2발을 맞아서 속력이 20노트로 감소했기 때문에 추격을 단념했다.

노르웨이 서부의 베르겐에도 독일군이 공격한 후에 영국군의 함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해당 항구에 있는 독일군 순양함의 숫자가 2척인지라 리이튼 제독 휘하에 있는 7척의 구축함만으로는 공격이 힘들었으며, 트론헤임 방면의 독일군에 대해서는 정보 부족까지 겹쳤다. 그래서 베르겐과 트론헤임에 대한 공격은 일시 중지되었다.

4월 9일 오후에는 수상함끼리의 전투보다는 항공대나 잠수함의 공격이 많았다. 독일군 항공대는 영국 해군에게 공습을 가해서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순양함 2척에게 지근탄을 투하해서 피해를 입혔다. 한편 영국 해군도 항공모함 퓨리어스가 함재기로 공습을 가해서 독일 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에게 3발의 폭탄을 명중시켜서 격침시켰다. 그리고 스카케락크 해협 인근에 출몰한 영국군 잠수함이 독일 순양함 칼스루헤를 크리스티안산 근방에서 격침시켰으며, 오슬로 방면에서 귀항하던 포켓전함 리초우도 어뢰를 맞아서 키를 포함한 선체 후부가 날아가는 등 대파당했으나 침몰을 간신히 모면하고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종합하자면 이 때까지의 해전은 영국 해군이 그 동안 헛발질 한 것에 비하면 소득이 많았으며, 노르웨이 근방의 제해권을 서서히 장악하던 상태였다.

3.2.3. 연합군 지상병력의 참전

한편, 4월 9일이 되어서야 독일군 목표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임을 깨달은 영국은 노르웨이의 긴급 지원요청을 받고 '어이쿠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조금만 기다리세염' 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상병력을 노르웨이에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충돌이 심해서 4월의 첫째 주를 다 날려먹을 지경이었다.

  •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 - 나르빅에 전체 병력을 모두 보내서 확실하게 점령이나 파괴를 해야 한다.
  • 영국 육군 - 노르웨이군이 마지막으로 버티는 트론헤임으로 가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

결국, 절충안으로 나르빅과 트론헤임으로 군대를 나누어 보내기로 하고, 애드리언 커턴 소장의 제146여단과 헤롤드 모건 소장의 제148여단을 트론헤임 방면으로 보내고, 피어스.J.맥케이시 소장의 제24여단은 나르빅 방면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3.2.4. 릴레함메르 전투

트론헤임 방면으로 파견된 146여단과 148여단의 경우에는, 트론헤임이 독일군 손아귀에 이미 떨어졌기 때문에 그 근처에 있는 대체항구인 남소스와 안달스네스 항구로 상륙하기로 결정했고, 146여단은 트론헤임 북동쪽에 있는 남소스로, 148여단은 트론헤임 남서쪽에 있는 안달스네스로 향했다.

하지만 남소스와 안달스네스는 항구의 규모 자체가 너무 작은데다가, 피요로드 지형도 좁고 굴곡이 많아서 대형 수송선이 통과할 수 없는 등 상륙조건이 나빴다. 결국 양 여단 모두 바다 한가운데에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구축함이나 노르웨이 어선 등을 이용해서 물자와 인원, 장비를 옮겨실은 끝에야 상륙이 가능했다. 덕분에 애초부터 준비한 물자와 장비가 부실한데다가, 환적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170톤이나 되는 무기와 식량을 실은 수송선이 그대로 영국으로 돌아가버리는 등의 악재가 발생했고, 남소스에 상륙할 병력이 나르빅으로 향하는 배에 옮겨타는 등의 사건이 발생해서 전력손실이 상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간신히 상륙한 영국군의 모습도 개판오분전이었다. 일단 상륙시 지참한 식량과 장비, 물자는 고작 이틀치에 불과했고, 군수성에서 극한지용 장비라는 이름으로 긴급제작해서 나누어준 방한복은 그걸 입었을 경우에는 그냥 걸어가는 것 자체가 힘들 수준으로 투박하고 무거운 등 장비의 질이 좋지 않았다. 물론 전차와 같은 중장비를 보유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영국군은 노르웨이군이 애타게 필요로 하는 여분의 무기와 장비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총 탄약도 영국은 7.7mm, 노르웨이는 6.5mm로 구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용이 불가능했다. 덕분에 노르웨이군은 빈약한 무장과 장비를 제대로 개선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노련한 군인이라기보다 흡사 미들랜드 지방의 제철소 노동자들을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노르웨이군 대령 로셔 닐센

설상가상으로 영국군의 인원 자체도 질이 개판이었다. 평시에는 약간의 상비군으로만 유지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급속도로 확충하는 영국군의 특성상, 이 시점에서 영국군은 프랑스에 파병한 4개 사단분의 병력을 제외하면 막 기초훈련을 마친 신병과 동원소집된 예비군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영국의 노르웨이 원정군 병사들은 박격포기관총같은 각종 공용화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박격포와 기관총의 조준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군사지식에 깜깜했다. 덤으로 병력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따듯한 남부 잉글랜드 출신이라서 북극권의 혹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암담한 실정이었다. 그야말로 총체적난국.

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146여단과 148여단은 트론헤임을 포위하고, 독일군 주력이 오슬로 방면에서 북쪽으로 돌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즉각적인 독일군의 통렬한 반격에 직면하고 말았다. 4월 21일에 최초의 교전이 노르웨이 중부에 위치한 릴리함메르에서 영국군 148여단과 독일군이 전투를 벌임으로서 일어났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독일군의 과감한 돌격으로 릴레함메르가 독일군에게 함락당함과 동시에 148여단이 사실상 붕괴된 것이다. 여단장이 여단 지휘소까지 적군 기관총탄이 난무하는 위급상황에서 벗어나서 약 100km까지 후퇴한 후에 간신히 여단 병력을 수습한 결과, 원래 1천여명이었던 병력은 3백여명으로 급감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낙오병들은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눈 덮인 동쪽 산맥을 넘어서 스웨덴으로 도망친다던지, 험악한 서쪽산맥을 돌파해서 해변에 도달한 후, 노르웨이 어선을 집어타고 스코틀랜드로 도망가는 등 지리멸렬했다.

이런 사정은 146여단도 마찬가지였다. 트론헤임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 제181보병사단은 쿠르트 보이티슈 준장의 지휘하에 즉시 영격에 돌입해서 남소스와 트론헤임의 중간지역인 슈타인케르에서 4월 21일 오후부터 격전을 벌였다. 게다가 영국군이 좁고 험한 산길에 직면해서 그나마 가진 중화기를 제대로 운반하지 못하는 사이에, 독일군은 박격포 등을 완전분해한 다음에 사이드카에 싣고 전장까지 운반해서 재조립하는 창의성을 보였으므로 화력에서도 큰 열세를 맞이했다. 결국 20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146여단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4월 22일에는 트론헤임 해상에 대기중이던 독일 해군 구축함이 함포사격까지 날려내는데다가, 바다쪽으로부터 우회한 독일군이 남소스항을 점령하는 바람에 퇴로까지 끊어졌다. 그나마 완전전멸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당 여단에 속한 링컨셔 대대의 지휘관인 허버트 중령이, 어린 시절에 해당 전장 근처로 낚시하러 왔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는 슈타인케르읍 동쪽에 오래된 나무다리가 있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미 사람의 손길이 닫은 지 십수년이 지나서 시커멓게 썩어가는 다리를 통해서 수백명의 영국군이 오그나강을 건널 수 있었기 때문에 146여단은 간신히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146여단도 148여단처럼 지리멸렬했으므로 전투력은 바닥을 친 상태였다.

이렇게 트론헤임 방면에 투입한 146여단과 148여단이 붕괴된 사실을 영국 육군성이 알아차렸다. 게다가 4월 24일에는 독일군이 잔존한 영국군 패잔병을 박살내면서 안달스네스까지 점령하고자 급속진격하던 긴급사태였으므로 3800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원이 현역 정규군으로 구성된 제15여단을 버나드.T.파제트 소장의 지휘하에 안달스네스로 급파했다. 15여단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식민지에서 산악전의 경험까지 쌓았기 때문에 앞서 파견된 2개 여단에 비해서는 엄청난 정예였다.

그러나 15여단이 이전에 148여단이 진격한 길을 따라서 전진을 시작하자, 4월 25일부터 벌어진 전투는 15여단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돔바스 남방 60km지점의 크밤 마을 근처에서 독일 전차의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는데, 15여단이 소형 대전차포로 독일군 전차를 격퇴하자 Ju87 급강하폭격기의 공습을 받기 시작했고, 15여단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하는 사이에 다른 독일군이 우회기동을 해서 안달스네스 항구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후, 그 곳에 있던 영국군의 예비식량, 장비 등을 노획하거나 불태웠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의 다음 공습에서는 노르웨이와 영국간의 교신을 중계하는 기지로 사용 중이던 라디오 송신소가 날아가는 바람에 영국 본토에 지원요청을 하기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4월 28일에는 영국 정부도 트론헤임 방면 전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미 3개 여단이나 투입했지만 사상자만 1,559명이나 발생하면서 신나게 관광당하는 처지라 시간이 더 지나가면 전멸당할 위기에 놓인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철수로가 독일군 입장에서도 훤하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노르웨이는 주요 도시가 해안가에 위치해 있고, 도로가 잘 발달하지 않은데다가, 산간 마을간의 통로는 험악한 산길이나 좁은 협궤철도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니 제공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독일 공군에게 후퇴하는 영국군이 사격 표적처럼 신나게 공격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공격을 뚫고 160km의 진격로를 되돌아나온 148여단과 15여단의 잔존병력은 안달스네스 항구로 귀환했으며, 공습이 미약해지는 야간에 해상철수하는 상황이고, 영국군 패잔병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안달스네스 항구로 오는 상황이었으므로 철수작전은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재탈환한 남소스 항구의 경우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철수선박의 진입이 어려워서 5월 3일부터 철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배에 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서, 해상까지 추격해온 독일 공군의 공습에 선박 일부를 상실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노르웨이 남부~중부 전선은 4월 말이 되면 모조리 독일군 손에 떨어지고 만다.

3.2.5. 나르빅 전투

나르빅 지역은 애초부터 연합군이 상정한 중요목표지역이었으므로 개전 초기부터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공격이 진행되었다.

4월 10일, 제1차 나르빅 해전이 일어난다. 영국 해군은 워부턴 리(Warburton-Lee) 대령의 지휘하에 기함인 구축함 하디와 역시 구축함인 해복크, 헌터, 핫스퍼, 호스틸로 구성된 총계 구축함 5척이라는 빈약한 전력으로 교전에 임하여 나르빅 항에서 하역작업 중이던 독일군 침공함대를 급습한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구축함 2척, 탄약보급함 1척, 수송함 6척이 격침되고 구축함 4척이 중파, 영국군은 구축함 하디와 헌터 2척이 격침, 1척 대파의 손실을 입는다. 해전의 양상은 영국군의 기습이 먹혀들어가서 초반에 독일 기함인 빌렐름 헬드캄프가 명중탄을 맞고 사령관이 전사하는 등 나르빅 항구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기습 후 빠져나가다가 근처 피요로드를 지키던 다른 독일군의 함대를 만나서 손실을 입은 것이며, 후퇴하던 영국 함대가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탄약보급함을 포격해서 굉침시키기까지 했으므로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는 독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나 이건 약과에 불과했다.

4월 13일, 제2차 나르빅 해전이 일어난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워스파이트와 항공모함 퓨리어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군 함대가 다시 나르빅으로 몰려왔고, 독일군은 보유 구축함 8척과 U-보트 1척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이 전투에서 워스파이트는 퓨리어스의 함재기 원호하에 구축함 9척을 선두에 세워서 나르빅 항구가 있는 피요로드 최심부까지 진격했다. 원래 워스파이트는 해안포 진지를 박살내는 것이 주 임무였으나, 나르빅 주변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저항하는 독일 구축함을 상대로 해서 15인치 포탄을 날려서 일방적인 대타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 북부의 제해권은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해전으로 독일 해군은 보유 구축함의 절반 이상을 날려먹어(…) 더 이상의 해상작전이 곤란한 지경에 내몰렸으며 영국은 확보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추가 작전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추가작전이란 기존의 윌프레드, R4를 의미하는 것으로 노르웨이가 먼저 독일의 침공을 받은 이상 영국은 거리낌없이 나르빅을 파괴할 명분이 생겨버렸다. 4월 14일, 최초의 영국군이 나르빅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육상병력의 배치가 끝난 4월 16일부터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진격이 정체되었을 뿐 아니라, 24여단도 설원에서의 전투에는 문외한이었으므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트론헤임 방면의 파멸이 확실해지고, 윈스턴 처칠이 노발대발하기 시작한 4월 24일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시계가 5m도 안되는 눈보라에서는 진격하기는 커녕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진격은 정지상태였다. 게다가 이런 폭설은 노르웨이군에게도 대재앙이라서 해발 400m의 라파우겐 산을 항해 진격을 개시한 노르웨이군 제6사단은 3km 전진에 15시간을 소모했을 뿐 아니라, 독일군 방어진지까지 근접했을 때는 이미 손가락도 까딱하기 어려운 상태로 탈진했으므로 제대로 된 전투도 거의 없이 상당수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물론 날씨와는 관계없이 나르빅 주변의 수역은 영국 해군이 꽉 잡고 있었지만, 육상병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함포사격을 해야 하는데, 적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는 상황이라서 3시간의 함포사격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나마 맥케이시 소장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추가적인 함포사격이 중지되었다.

4월 27일에는 프랑스 원정군이 결성되었으며 여기에 망명 폴란드군까지 합세한 3국 연합군이 만들어졌다. 이들 병력을 합하면 25,000여명에 육박했으므로 다시 한번 나르빅을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적설량이 1.5m에 육박하는데다가, 약 4,600명인 독일군 산악부대의 저항에 직면한 나머지 전진속도는 하루에 500m 이하로 떨어졌으며, 설맹(雪盲) 환자까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부와 중부를 석권한 독일군이 북부로 빠르게 진격중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독일 공군의 행동반경이 영국 함대를 위협하고 있어 추가작전이 점점 더 어려워져 노르웨이 전역은 사실상 패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5월 10일에는 원정군 사령관이 클로드 오킨렉으로 교체되었다. 오킨렉은 약화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나르빅에 진군하여 5월 27일에는 나르빅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을 몰아냈다. 물론 독일 지상군은 나르빅 해전 패배로 해상보급이 끊긴 상태였던지라 결국 패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병력을 어느 정도 보전하고 있는데다가 나르빅 주변 산악지대를 장악한 상황이라서 설원에서의 산악전투는 산발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5월 10일,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면서 나르빅 전투는 잊혀져 버렸고, 해군 병력이 노르웨이에서 대부분 철수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나르빅을 영구적으로 확보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결국 나르빅을 간신히 점령했으나, 1940년 6월 6일에 원정군의 마지막 병력이 철수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루거장군을 비롯한 노르웨이군의 잔존병력은 1940년 6월 9일에 독일군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군에서는 항공모함 글로리어스와 순양함 2척, 구축함 16척이 파견되었는데, 연합군의 나르빅 점령을 무산시키기 위해 독일군이 전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순양함 히퍼, 구축함 4척을 6월 4일에 킬 군항에서 먼저 출격시켰다는 것이 연합군에게는 불운이었다. 이 함대는 6월 7일에 연합군의 철수작전을 알아채고는 영국선단을 발견하기 위해 수색을 실시했으며, 6월 8일에는 영국 선단을 발견해서 병원선 애틀란티스만 남겨놓고 나머지 수송선과 유조선, 호위 업무를 담당한 무장 트롤 어선들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 이후에 히퍼와 구축함 4척을 트론헤임 항구로 귀환시킨 후에도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계속 수색을 실시했는데, 여기에 영국 해군 항공모함 HMS 글로리어스(Glorious)가 걸려들었다. 글로리어스는 연료부족으로 인해 호위구축함 2척과 함께 미리 회항하고 있었는데, 오후 4시에 독일군이 글로리어스를 선제발견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도 글로리어스의 함재기는 독일군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독일 해군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이우는 오후 4시 30분경 27,000야드의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통한 협차를 달성했다. 명중탄이 초반에 발생한 글로리어스는 함재기를 발함하지도 못하고 신나게 두들겨 맞다가 오후 5시 20분경 승무원 퇴함명령이 떨어지고 퇴함완료된 후, 오후 5시 40분에 격침당했다. 이는 항공모함이 전함 주포에 의해 격침된 해전 사상 최초의 사례이다.

이 때 글로리어스와 관련한 아이러니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이 당시 글로리어스에는 영국 해군 항공대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영국 공군 46 허리케인 비행대도 있었다. 이 비행대는 제때 자력으로 영국 본토로 철수하지 못해 글로리어스에 착함을 강행해서 철수하려 했다. 착함 자체는 피해 없이 모두 성공했지만 하필 독일 해군에게 걸려 버린 것. 침몰 후 구조된 생존자 중 조종사는 단 2명에 불과했다. 반면 46비행대 소속 조종사 중 일부는 노르웨이 전역에서 항공기가 격추당해서 항모가 아닌 일반 수송선을 타고 철수해야 했는데 이들은 모두 영국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정말 어이없는 일인데 항공모함 글로리어스가 호위함을 제대로 대동하지 않고 빈약한 호위만 데리고 간 이유가 보통은 연료부족이라는 이유로 퉁쳐지지만 실제로는 글로리어스의 함장인 Guy D'Oyly-Hughes가 항공대 지휘관 J. B. Heath이 제기한 정당한 항의를 명령불복종으로 몰고 가서 군법재판에 회부했고, 군법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항공대 지휘관을 엿먹이려는 굳건한 의지가 보일 정도로 글로리어스를 빠르게 회항시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국 해군성이 이런 웃기는 짓을 승락했고, 나중에 항공모함이 침몰하자 벌어진 의회의 추궁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결국 졸렬한 함장과 영국 해군성의 합작이 항공모함 1척을 날려먹은 사유를 만들어낸 것이다.참고 양심에 찔렸는지 항공대 지휘관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호위구축함 2척도 격침당했는데, 이중 아카스타(Acasta)라는 호위구축함은 격침될 때까지 어뢰공격을 반복했고, 비록 자신은 격침당했지만 샤른호르스트에 어뢰를 명중시켜서 손상을 주었다.

4. 결과

노르웨이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유럽의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계속 독일군의 지배를 받았다.[3]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으로 원하던 철광석의 안정적 수급과 북방 해군작전 기지 확보라는 두 가지 목표가 모두 달성되었다. 이후 노르웨이는 대영국 해상작전의 기지이자 독소전쟁 발발 이후 북방항로의 최대위협으로서 연합국에게 두고두고 골치거리가 된다. 그리고 노르웨이 침공 전체를 따질 때 독일 육군은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쳐서 5,000여명 수준이 넘지 않는 상대적으로 근소한 피해만 입고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독일군이 승리한 것은 맞다.

구분연합국 해군독일군 해군
피해침몰손상침몰손상
전함---2
순양전함
포켓전함
---2
항공모함1---
순양함2633
구축함9810-
잠수함6-8-
기타 함선172224

그러나 이 전투로 인해 독일 해군은 사실상 궤멸했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물론 개전 당시 아예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빈약한 전력으로 용감하게 싸워서 영국군에게 많은 손실을 주었지만, 애초에 독일 해군의 전력이 빈약하고, 상대방인 영국 해군의 급수가 다르기 때문에 독일 해군의 피해는 똑같은 격침이더라도 실제적인 손상은 더 컸던 것이다. 덕분에 바다사자 작전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었으며, 통상항로파괴를 위해서 주력함을 내보낼 때도 호위함을 제대로 붙여주지 못해서 비스마르크 추격전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개전 초기에는 얼마 없던 U보트 손실까지 발생하는 통에 대서양 전투의 통상파괴작전에도 지장을 주었다. 그나마 건진 것이라면 당시 어뢰에 사용되는 최신기술인 자기신관이 실제로는 쓰레기였다는 것을 파악했다는 점이며, 카를 되니츠가 자기신관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충격신관만 사용하도록 해서 문제점을 일시 봉합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노르웨이에서 육지에서는 대참패일지라도 바다에서는 종종 따끔한 반격을 받았지만 독일 함대를 와해시킨 셈이니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노르웨이가 독일군 수중에 넘어갔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면 최종적으로는 연합국의 패배라고 평가된다.

이 때문에 영국은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 책임을 두고 정치적인 다툼이 발생했다. 이 다툼에서 윈스턴 처칠 등 강경파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을 맹공격하여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체임벌린이 실각하고 처칠이 전시내각의 수상이 되어 전쟁을 이끌게 되었다.

5. 여담

© Private photograph uploaded by David.wintzer 13:14, 14. Nov 2004 (CET) (cc-by-sa-3.0) from
노르웨이의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

노르웨이의 반유대주의 친독 정당인 민족 단일당[4]의 지도자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은 노르웨이 침공 당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를 선언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침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이 신정부를 5일만에 해산해버린다. 그러나 괴뢰정부 고위직에 노르웨이 사람이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1943년부터는 노르웨이 총리직을 맡게 된다. 크비슬링은 독일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노르웨이는 원래 사형제를 폐지했던 국가였으나 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해 망명정부 기간 동안 사형제를 부활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이름(정확히는 성)은 모국인 노르웨이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배신자, 반역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에 이르렀다.[5] 한국으로 보면 이완용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보면 될것이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에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추축국의 괴뢰국을 세울 경우 이 사람이 국가 원수로 등장한다. 능력치가 심히 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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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물론 독일군에 의한 불심검문이나 단속 등이 쏟아져나와 덴마크인들의 불만을 샀으나 독일의 내정불간섭 약속은 대전 말기까지 충실히 지켜졌다. 물론 물자를 많이 삥뜯어가긴 했다.(…)
  • [2] 물론 독일이 아주 개입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는데 크리스티안 10세는 압력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자국 내 유대인들의 스웨덴 망명을 열심히 도와주었다.(…) 다른 부분에서의 내정간섭에 대해서도 아니 님들이 우리나라 지켜주려 온거지 우리나라 지배하러 온건가여? 하면서 독일측을 데꿀멍시키기도 했고, 히틀러가 국왕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기나긴 전문을 보내자 님 ㄳ로 끝나는 초간략 답장으로 화답하여 히틀러의 혈압을 올려주기도 했다.
  • [3] 정확히는 노르웨이 최동단 핀란드 접경지역 일부가 소련군에 해방되었다. 소련도 노르웨이 영내 깊숙히 진격하진 않았지만, 런던의 노르웨이 망명정부가 상징적 의미로서 소련군이 해방시킨 지역에 관리를 보내어 주권을 행사했다.
  • [4] 세력이 심히 안습해서 고작 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 [5] 멀리 볼 것 없이 영어부터 매국노는 quisling이라고 한다.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등에도 수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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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9-26 22: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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