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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 히데오

last modified: 2015-03-24 19:07:17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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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른바 '토네이도 투구법'
© Sakuraikubuki (cc-by-sa-3.0) from
2011년 때. 후덕해졌다

이름 노모 히데오(野茂 英雄)
생년월일 1968년 8월 31일
국적 일본
출신지 오사카 미나토 구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1순위 (일본)
소속팀 긴테쓰 버팔로즈(1990~1994)
LA 다저스(1995~1998)
뉴욕 메츠(1998)
밀워키 브루어스 (1999)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2000)
보스턴 레드삭스 (2001)
LA 다저스 (2002~2004)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2005)
캔자스시티 로열스 (2008)
공식홈피 http://www.nomo-radiant.jp/
자세한 이야기는 김형준의 레전드 스토리 참조.#

1990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신인왕
사카이 츠토무
(오릭스 브레이브스)
노모 히데오
(긴테쓰 버팔로즈)
하세가와 시게토시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0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노모 히데오
(긴테쓰 버팔로즈)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0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랄프 브라이언트
(긴테쓰 버팔로즈)
노모 히데오
(긴테쓰 버팔로즈)
궈타이위안(곽태원)
세이부 라이온즈)

1995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신인왕
라울 몬데시
(LA 다저스)
노모 히데오
(LA 다저스)
토드 홀랜스워스
(LA 다저스)

"소시민은 항상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小市民はいつも挑戦者を笑う) [1]

Contents

1. 개요
2. 성장과 사회인 야구
3. NPB 시절(1989~1994)
4. MLB시절(1995~2008)
5. 동양 야구의 선구자 & 박찬호와의 관계
6. 연도별 성적
7. 그 외

1. 개요

박찬호, 구로다 히로키와 더불어 역대 최강의 아시아 선발투수


주무기는 토네이도 투구폼과 함께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낙차 큰 포크볼. 타자에게 등을 보일 정도로 몸을 비트는 투구폼으로, 많은 타자들에게 치기 어려운 투수로 여겨졌다. 덕택에 미국에서 "토네이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95년 선보였던 노모의 포크볼을 90년대를 대표하는 결정구로 꼽는 사람도 있다. 사실 데뷔 해의 압도적인 기록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포크볼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 뒤의 성적이 점차 하락세였던걸 감안하면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2. 성장과 사회인 야구

초·중학교 때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이 때에 이미 직구의 위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토네이도 투구폼(의 원형)을 썼었다고 한다. 약체지역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2학년 때 오사카 부 지역예선에서 퍼펙트 게임 달성. 3학년 때에는 학교를 16강에 진출시켰다. 고등학교 졸업 후 긴테쓰 버팔로즈에서 입단을 원했지만 사회인 야구팀인 신일본제철 사카이에서 활동한다.[2] 그리고 신일본제철 입단 첫 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포크볼을 익혔다.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일본대표로 출전하여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3][4] 배터리로 같이 활동했던 포수가 후루타 아츠야. 1989년에는 대륙간컵에 참가했는데, 구대성이 이 때 노모의 투구폼에 영향을 받고, 이 폼을 따라하게 되었다고.

3. NPB 시절(1989~1994)


1989년 긴테쓰 버팔로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한다. 이 당시에 세웠던 8구단 지명은 아직도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 사상 최고 기록이다. 이 때 노모를 지명하지 않은 구단은 넷. 세이부 라이온즈는 사이드암스로 투수인 시오자키 데츠야를, 주니치 드래곤즈는 강속구 투수 요다 츠요시를,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사사오카 신지를 일찌감치 지명하면서 노모를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돌았다.[5]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난 요미우리가 1차로 지명 안 하면 프로에 아예 안 가겠뜸'이라고 개드립을 친 오모리 츠요시를 지명. 그후 오모리의 행보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7]

프로 첫 데뷔인 1990년에 투수 트리플 크라운 및 최다탈삼진[8]을 달성하며 신인왕과 MVP, 사와무라상을 싹쓸이한 일본 야구계의 귀재. 이 해에 노모가 제패하지 못한 타이틀은 구원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삼진 능력이 아주 뛰어나 일본에서 4년 연속 탈삼진왕을 차지하였고, 다승왕 또한 데뷔 이후로부터 4년 연속으로 차지해서 일본 야구계의 최고 투수로 군림하였다.

1989년, 데뷔 첫 승을 NPB 한 경기 17탈삼진으로 당시 타이 기록을 달성하며 화려하게 데뷔.
1990년,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삼진을 기록(일본 신기록),
1991년에는 자신의 기록을 6경기로 재갱신했다.(...)
1993년에도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삼진을 기록한다.
1993년에는 또 일본 프로야구 최단기간 1000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운다.
4년 연속 최다승+최다탈삼진 기록은 NPB역사상 노모 히데오, 단 한 사람뿐이다.

단, 직구와 포크 두가지 레퍼토리로만 타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포크만 잘 골라내면 안타는 못 쳐도 걸어서 나갈 수는 있었다. 주자가 누상에 나가면 셋포지션에서 던지기 때문에 직구의 위력이 감소, 연타를 허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NPB시절 말기의 노모는 엄청난 혹사를 한데다 투구의 패턴이 상대팀에게 철저하게 분석되어서 굉장히 고전했고, 증가하는 투구수에 해를 거듭할수록 무리가 따랐다. 더불어 볼넷의 숫자도 갈수록 증가.

4년 연속 최다승 + 최다탈삼진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4년 연속 최다승 + 최다탈삼진 + 최다사사구이다. 노모의 괴랄함을 대변해주는 스탯.

그리고 노모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닝 이팅 능력에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완투 머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 해에 27선발 21완투[9], 두 번째 해에 29선발 22완투[10]로 2년간 완투율 약 71.7%라는 근대 야구에서나 나올법한 엽기적인 완투율을 보였다.
이 후 완투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1992년 29선발 17완투, 1993년 32선발 14완투, 1994년 17선발 6완투로 완투율 약 47.4%의 여전히 월등한 완투 능력을 보였다.[11]

NPB 5년 통산 성적은, 139시합 출전(134선발) 78승 46패 1세이브 80완투 13완봉 완투율 약 59.7%, 1051⅓이닝 / 1204탈삼진 / 588볼넷 / 방어율 3.15.

4. MLB시절(1995~2008)

사실 NPB시절 두 차례의 미일 올스타전 출전을 계기로 메이저리그에 대한 동경을 품어가고 있었다. 여기다 약켓로저 클레멘스가 한 "미국에 와라. 너라면 가능하다" 말은 더욱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게 했다.

1994 시즌에는 부상 후유증으로 잠시 부진하나, 이 시즌이 끝나고 LA 다저스의 오퍼를 받아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였고, 결국 다음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사실상 메이저리그로 건너간 동양인 선수 중에서 최초로 성공한 선수로 볼 수 있다. 메이저리그 첫 등판은 박찬호의 1994년보다 늦었으나, 1995년 내셔널 리그 신인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하였고 1996 시즌에는 '투수들의 무덤'으로 유명한 쿠어스 필드에서 노히트 노런까지 달성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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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17일, 9이닝 4볼넷 8탈삼진으로 노히트 노런 기록.

이 덕분에 야구 외의 대중 매체에도 상당히 알려지게 됐는데, 그 예로 영화 <라이어 라이어>에서 극중 짐 캐리가 아들에게 야구 글러브를 선물해주면서 아들이 '내가 노모를 할테니 아빠는 칸세코 해요'라고 대사를 한 적이 있고 유명 재즈 아티스트인 잭 셸던은 'There's No One Like Nomo' 라는 곡을 만들어 발표했을 정도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빼어난 탈삼진 능력을 앞세워서 초반 3년 간은 팀의 에이스 자리를 지켰으나, 1998 시즌부터 부진에 빠지기 시작해 결국 시즌 중에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됐고 이 때부터 한 시즌에 한 번씩 팀을 바꾸는 저니맨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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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3일 9이닝 3볼넷 11탈삼진으로 노히트 노런 기록.

그러다가 2001 시즌에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부활, 탈삼진왕 타이틀을 되찾았고, 생애 두 번째이자 MLB 역사상 4번째로 양대 리그에서 모두 노히트 노런을 성공한 투수가 되었다.
2001 시즌이 끝난 후 FA자격을 얻어 친정 팀인 LA 다저스로 돌아온 노모는 2년 연속 16승과 3점대 방어율을 찍으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부상이 재발하면서 2004 시즌에 극도로 부진, 이후로 사실상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접었다. 이 후에도 마이너리그와 도미니카 리그에서 절치부심하며 메이저리그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나이와 부상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3경기만에 4⅓이닝 9실점을 허용하고 방출당했다. 결국 MLB 통산 123승, 개인 통산 201승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123승이라는 이 기록은 동양인 투수 중에서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많은 승수였다. 게다가 저 승리는 모두 선발승으로 이뤄낸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은 2010년 10월 2일, 박찬호가 124승을 올리며 깨졌지만, 다르빗슈 유류현진 같은 후대의 동양인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들도 7~8년 이상 커리어를 쌓아야 박찬호와 노모의 기록에 도전할 수 있기에 적어도 2010년대 동안에는 깨질 가능성이 낮다.

MLB 12년 통산 성적은, 323시합 출전(318선발) 123승 109패(16완투 9완봉), 1976⅓이닝 / 1918탈삼진 / 908볼넷 / ERA 4.24.

5. 동양 야구의 선구자 & 박찬호와의 관계

사실상 일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길을 열어준 선수로서, 스즈키 이치로마쓰자카 다이스케같은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이 그 뒤를 따랐다.[13] 저 선수들 또한 모두 노모를 존경한다고 한다.

이러한 노모의 메이저 진출은 메이저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사실 더 이상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할 의지가 본인에게 없었던 점도 크다. 원래 노모를 지명할 당시의 긴테쓰 버팔로즈의 감독은 스즈키 이치로를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한 일본의 대표적인 명감독이자 덕장인 오기 아키라로 노모의 특유의 토네이도 투구폼이나 조정법 등에 대해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다. 이는 오기 감독의 선수들의 스타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 스타일에서 나온 것으로 노모는 그런 오기 감독을 매우 신뢰하며 따랐다고 한다.

그러다 오기 감독이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새로이 부임하게 된 감독은 긴테쓰 버팔로즈의 전설이자 현재까지 일본에서 마지막 300승 투수로 남아있는 스즈키 케이시인데, 상기에서도 언급했듯이 대투수인 스즈키 케이시는 본인의 투수로서의 철학을 노모에게 강요하여 투구폼 수정 등을 요구하였고 [14] 이를 통해 노모는 감독과의 불화로 점차 의욕을 잃게 된다.

결국 노모는 부상을 처음으로 200이닝을 소화하지 못한 1994시즌을 뒤로 하고 팀과의 교섭도 결렬, 자유계약신분이 아닌 임의탈퇴 신분상태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게 된다.[15]

후일 당시 팀동료였던 가네무라 요시아키(金村義明)[16]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노모의 심경을 적고 있는데 노모는 "저는 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감독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것 뿐입니다." 라고 밝혔다. 즉 노모의 진출은 단순한 도전정신으로 보기 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메이저리그는 일본프로야구 조차도 그야말로 넘볼 수 없는 벽이나 다름 없었는데, 때문에 노모의 진출에 대해 일본의 매스컴들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특히 노모와의 불화로 원인을 제공한 스즈키 케이시 감독은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인생 최대의 마스터베이션이라는 혹평을 내릴 정도였다. 그리고 스즈키 케이시는 다시는 감독직을 맡지 못하고 있다. 뭐, 2012년 현 시점에서 봤을 때 나이도 많으신 분이고 하지만 이후 노모의 눈부신 활약에 따라 일본에서 다시 한번 노모 열풍이 분 것은 당연지사.

국내에서는 박찬호와 라이벌로서 많이 취급을 받았는데, 일단 3년이나 같은 팀에서 한솥 밥을 먹은데다가 노모의 1차 하락세가 박찬호의 전성기와 묘하게 맞물려서 더욱 그렇게 여겨졌다. 하지만 박찬호나 노모 히데오나 동양인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라는 것을 최초로 보여준 것만으로도 두 선수는 각국 야구계의 레전드라고 추앙받을 수 있다.

통산 성적이나 커리어는 승을 제외한 방어율, WHIP, K/9, K/BB등 대다수의 주요지표에서 노모가 앞서며, 박찬호와 달리 2번의 탈삼진 1위로 리그 공식 타이틀을 쥐어본 선수이다.[17] 그러나 후발주자 박찬호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아니다. 통산 성적으로 볼 때 메이저리그에서 두 선수는 거의 동급으로 여겨진다.[18]

또한 두 사람은 동양인이라는 같은 특성 덕분에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좋은 동료로 서로를 대해줬다. 노모는 박찬호 결혼식에도 참석한데다가 박찬호가 124승을 거두었을 때 축하메세지(아래 참고)를 보내주었으며 박찬호도 '노모는 라이벌이 아니라 동료이자 자신이 넘기 위한 목표'였다는 말을 언급했을 정도. 무엇보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첫 승이 되는 기념구가 경기 종료 후 관중석으로 투척되자 그걸 관중석까지 쫓아올라가 기어이 그 공을 찾아다 박찬호에게 전해준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노모였다!

유일하게 문제라면 언론 기레기들. 2000년 이후로는 멸종하다시피 했지만 1990년대에 기자들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유독 국내 언론들만 노모를 폄하하는 기사를 많이 쓰거나 아예 절대악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에 박찬호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출시된 <메이저리그의 정복자 박찬호>라는 책.

이 책을 보면 노모 히데오를 아주 악랄한 이로 매도하면서 마구 깎아내렸는데, 결국 박찬호무단 판권 침해, 사진도용, 거짓 글 투성이, 노모 히데오의 명예훼손과 같은 여러 이유로 소송제기하면서 전량 회수되어 이젠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19]

거기에 이건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반 스포츠신문에서 조차 노모를 매도하는 우스개들이 자주 올라오곤 했었다. 이를 테면 박찬호가 인터뷰에서 노모를 칭하길 "노모는 못해, 노 모어(No More)이니까." 이딴 글이나 우스개[20]라고 올렸다.

이런 여파 때문인지 고행석 화백이 연재하던 만화 커브에서 도모 히데오라는 일본인 선수가 구영탄과 같은 구단(그런데 템파베이 레이스다!?) 선수로 나오는데 구영탄과 사이나쁘게 나온다. 다만 악랄하게 나오지 않고 독서를 즐기며 과묵하게 성실히 잘하는 타입이고 되려 다혈질 구영탄이 일본인이라고 무턱대고 싫어하는 것으로 나왔다.

다만 국내 언론에서 마구 깎아내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 자체를 왜곡하지는 못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인은 싫지만 노모는 존경한다는 의견을 다수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박찬호LA 다저스와 계약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박찬호가 계약했다는 걸 안 노모가 인터뷰에서 "LA에 한인식당이 많은데 박찬호에게 안내 좀 해달라고 해야겠다." 라고 하자, 그걸 안 박찬호는 "지가 뭔데 나한테 안내해달라 말라임?" 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유들유들하고 콕콕 대며 코코몽한테 발리기도 하지만 젊었을 때 박찬호는 본인 입으로도 그랬지만 이단옆차기 삑사리 내기도 했고 "좀 건방도 떨었고, 성격도 급한" 편이었다. 물론 건너가서는 잘 지냈으니 문제는 없었다.

소싯적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시절 그에게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찬호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고. 흠좀무. 그리고 박찬호는 오릭스 시절 자신의 체인지업을 일본인 투수에게 가르쳐 주는 대가로 그 포크볼을 배우려고 했다.

6. 연도별 성적

노모 히데오가 NPB에서 뛰었을 당시에는 NPB에서 홀드를 공식 기록으로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NPB에서 노모 히데오가 기록한 홀드 수는 0이다. 그리고 노모 히데오는 MLB에서 홀드와 세이브를 기록한 적이 없다.

NPB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0 긴테쓰 버팔로즈 29 27 21
(1위)
2 235
(1위)
18
(1위)
8 0 2.91
(1위)
167 115 287
(1위)
1.17
1991 31 29
(1위)
22
(1위)
4
(1위)
242⅓
(1위)
17
(1위)
11 1 3.05 183 134 287
(1위)
1.28
1992 30 29
(1위)
17
(1위)
5
(1위)
216⅔
(1위)
18
(1위)
8 0 2.66 150 118 228
(1위)
1.23
1993 32 32
(1위)
14 2 243⅓
(1위)
17
(1위)
12 0 3.70 201 156 276
(1위)
1.43
1994 17 17 6 0 114 8 7 0 3.63 96 88 126 1.60
통산 NPB 5시즌 139 134 80 13 1051⅓ 78 46 1 3.15 797 611 1204 1.32

MLB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1995 LA 다저스 28 28 4 3 191⅓ 13 6 2.54 124 85 236
(1위)
1.06 4.7 210만 달러
1996 33 33 3 2 228⅓ 16 11 3.19 130 93 234 1.16 4.6 60만 달러
1997 33 33 1 0 207⅓ 14 12 4.25 193 103 233 1.37 1.8 90만 달러
1998 12 12 2 0 67⅔ 2 7 5.05 57 38 73 1.40 0.2 280만 달러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1998 뉴욕 메츠 17 16 1 0 89⅔ 4 5 4.82 73 59 94 1.44 0.4 -
1998 '98 합계 29 28 3 0 157⅓ 6 11 4.92 130 97 167 1.42 0.4 -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1999 밀워키 브루어스 28 28 0 0 176⅓ 12 8 4.54 173 83 161 1.42 2.3 25만 달러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2000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32 31 1 0 190 8 12 4.74 191 93 181 1.47 2.6 100만 달러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2001 보스턴 레드삭스 33 33 2 2 198 13 10 4.50 171 101 220
(1위)
1.35 3.2 450만 달러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2002 LA 다저스 34 34 0 0 220⅓ 16 6 3.39 189 107 193 1.32 2.6 450만 달러
2003 33 33 2 2 218⅓ 16 13 3.09 175 105 177 1.25 3.5 775만 달러
2004 18 18 0 0 84 4 11 8.25 105 47 54 1.75 -2.4 900만 달러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2005 템파베이 레이스 19 19 0 0 100⅔ 5 8 7.24 127 55 59 1.77 -1.4 80만 달러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WAR 연봉
2008 캔자스시티 로열스 3 0 0 0 4⅓ 0 0 18.69 10 4 3 3.23 -0.4 -
통산 MLB 12시즌 323 318 16 9 1976⅓ 123 109 4.24 1768 977 1978 1.35 21.8 3420만 달러

7. 그 외

2010년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라갔다. 성적으로 봤을 때는 가능성이 낮지만, 성적만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닌 명전 특성상, '동양인 메이저리거의 선구자'로서 입성이 가능할 수 있을까 했지만 성적이 성적인지라 사실상 어려울 듯. 첫 해 5%를 받을지부터가 걱정이다.[21]

결국 2014년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첫해 투표에서 6표(1.1%)를 얻으며 광속 탈락했다. 일부 팬들은 노모도 이러는데 wkik:"박찬호"박사장님은 택도 없겠네 하는중...

다만 바로 그 직후 일본에서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추대. 이는 명예의 전당 입성자들중 역대 최연소다. 기자단 투표로 전당에 올랐는데, 이를 두고 노모는 '현역시절에 그렇게 사이가 안좋았던 기자들이 나를 뽑아주다니 놀랍다'라는 반응(…). 다만 일본의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고작 명예의 전당따위가 아니라 국민영예상[22]을 수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자격조차 미심쩍은 마쓰이 히데키까지 국민영예상을 받았는데 어째서 노모에게는 수여되지 않느냐'라고 평이 지배적.

노모야동이라는 개그가 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에는 노모자이크 영상 이겠지만, 노모 히데오가 등장하는 영상. 그래서 떡밥으로 자주 쓰이곤 한다. 그래서인지 불암콩콩코믹스에서 간혹 그가 등장할 때는 그의 주위가 모자이크 처리 된다.##

마구마구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카드 중 하나다. 그 이유는 특유의 투구폼 때문. 엄청나게 느린 인터벌로 상대도 짜증나고 본인도 짜증나는 마력을 보여준다. 물론 그 버퍼링 덕분에 상대방의 짜증 유발과 함께 타이밍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자신의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 기록을 깬 박찬호에게 축전을 보냈다. "124승은 통과점에 불과하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승리를 거두길 바란다"고.역시 대인배. 그리고 박찬호는 일본 행. 2008년 메이저리그 은퇴 후 오릭스 버팔로즈에 1군 투수 코치로 활동한 바 있는데, 2011 NPB에 진출한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게 될 뻔 했다. 이래저래 박찬호와 인연은 각별하면서도 묘한 듯.

바비 발렌타인 감독 경질 이후 차기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으나, 2010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임시 코치로 활동해 정식 코치활동은 접은 듯 것 같다. 다만, 예전부터 사회인 야구 등 아마야구에 관심이 많고 직접 지원활동도 했던지라 2011년에는 미일친선소년야구대회에 일본측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야구 외에도 사회인 야구 시절 딴 자격증도 꽤 된다고 한다.

세가타 산시로 광고 시리즈의 야구팀육성게임 '프로야구 팀을 만들자!' 광고편에서 세가타 산시로가 참선수련 하는 장소에 걸린 사진으로도 등장한 적이 있다. 은퇴한 뒤인 2008년에는 같은 시리즈의 후속작인 '프로야구 팀을 만들자! DS'의 광고모델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2013년 8월 10일 LA 다저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경기에서 시구를 맡았다. 그리고 다저스는 시구 버프를 받았는지 그날 경기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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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노모 히데오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한다.#
  • [2] 당시 포텐셜은 있으나 독특한 투구폼 때문에 외면당했다. 긴테쓰에서 투구폼을 교정하는 조건으로 입단을 제시했으나 거부.
  • [3] 올림픽 정식정목은 아니었기에 국가별 메달집계에는 정식적으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 [4] 당시 결승상대는 미국팀이었는데, 조막손 투수로 유명한 짐 애보트, 놀란 라이언에게 핵꿀밤을 맞았던 로빈 벤추라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 등이 뛰었다. 한편, 이 시절 이종범과도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 [5] 시오자키와 사사오카는 각각 소속팀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사사오카는 통산 100승-100세이브를 기록한 카프의 레전드로 선발로 오롯이 뛰었다면 200승 가까이 올렸을 거라는게 중론.
  • [6] 이 때 노모에 밀려서 꿩대신 닭으로 다른 팀들이 지명한 선수들 중에는 볼 것 같으면 다이요 웨일스(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의 1위 지명에 '대마신' 사사키 카즈히로가 있다. 그리고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2차 지명으로 1990년대 스왈로즈의 황금시대를 이끈 명포수 후루타 아츠야를 지명하게 된다. 노모 이후에 데뷔한 마츠자카 다이스케다르빗슈 유도 4개 구단의 복수 지명밖에 못 받았다. 뭐 본인들이 가고 싶은 팀을 은밀하게 밝혀둔 탓도 있었지만. 4순위 지명인 스즈키 이치로조강지처가 좋더라이와쿠마 히사시는 논외. 항상 그렇지만 1순위 지명이 훌륭한 선수가 되는 보증수표는 아니다.
  • [7] 여담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1989년 드래프트 당시 사회인 리그 최고의 타자로 꼽히던 사토 카즈히로를 뽑지만, 이쪽은 시대착오적인 펀치파마와 특이한 언행으로 주목받을 뿐 선수로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결국 데뷔 후 4년만에 은퇴하고 '펀치 사토'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예능인으로 활약중이다(...). 그나마 2군에서 포텐은 보여준 거인의 오모리와는 다른 의미로 전설. 당시 오릭스는 암흑기를 걷던 한신과는 달리 황금시대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팬들에게는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한신이나 롯데가 저런 선수를 뽑았다면...
  • [8] 단, 이 당시까지 일본프로야구의 트리플 크라운의 기준은, 다승, ERA, 승률이었다. 탈삼진이 아니었음을 유의하자. 다승, ERA, 탈삼진은 미국의 기준이다. 요새는 일본도 미국기준을 따라가는 듯 하기는 하지만.
  • [9] 게다가 완투로 기록되지 않은 한 경기는 10회 2아웃 상황에서 노 디시전으로 교체. 사실상 22완투.
  • [10] 역시 9회 노디시전 경기 2경기가 있음.
  • [11] 참고로 노모 이후 최고의 완투 머신이라 불린 마쓰자카가 가장 절정의 완투 능력을 보여주던 일본에서의 마지막 3년간의 완투율이 약 52.7%이다
  • [12] 2015년 3월 현재까지 쿠어스 필드에서 기록된 유일한 노히터이다.
  • [13] 엄밀히 따지면 노모가 최초의 진출자는 아니다. 무려 1960년대에 메이저리그를 밟아본 동양인 선수가 존재하는데, 난카이 호크스 출신의 무라카미 마사노리라는 선수로, 난카이 구단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야구유학을 보낸 1964년 후반기 갑자기 메이저리그에 승격되었고 1965년은 74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75를 기록하며 나름대로 준수한 릴리프투수로 활약했다. 이후 일본야구계로 복귀해서는 평범한 성적을 남겼다.
  • [14] "지금까지는 네 부모가 준 어깨로 던졌으니, 지금부터는 너의 어깨로 던져라"라는 개드립을 쳤다
  • [15] 엄밀히 말하면 편법으로 진출한 셈인데, 노모는 이러한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프로야구 사무국에 임의탈퇴를 통한 해외야구구단에 대한 원 소속구단의 선수보유권은 규정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어필, 큰 잡음 없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 [16] 재일교포 3세 출신으로 통산 127홈런을 기록한 3루수.
  • [17] 참고로 박찬호는 2000년 시즌 탈삼진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해 1위는 300삼진을 밥먹듯 하고 박찬호와의 차이도 크게 벌려놨던 랜디 혼슨랜디 존슨.
  • [18]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노모와 박찬호의 통산성적 유사성 점수(Similarity Score)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와 있다.
  • [19] 사실 이 책은 대량 회수되기도 했지만, 박찬호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98~1999년에 대형할인마트에서 싼 값에 살 수도 있었다.
  • [20] 오죽하면 딴지일보가 특집기사를 내면서 박찬호와 노모가 같이 사이좋게 서 있는 사진에 말풍선으로 이런 언론 보도를 비꼬는 기사를 내던 적까지 있다.
  • [21]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재키 로빈슨처럼 성적을 확실하게 거뒀으면 모를까,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노모보다 더 뛰어난 성적(173승 153패 ERA 3.54 탈삼진 2074개)를 찍고도 2년차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리고 2012년 투표에서는 아무리 봐도 성적이 우월했던 데이비드 웰스가 0.9%라는 충격적 투표율로 탈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베이스볼 리퍼런스 기준으로 박찬호를 능가하는 닮은꼴 선수 우디 윌리엄스의 득표수는 깔끔하게 0. 더구나 같이 후보에 올라있는 선수들이….
  • [22] 일본 정부에서 문화계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최고권위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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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4 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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