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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last modified: 2015-08-11 22:50:39 by Contributors

Contents

1. 고전용어
2. 역사용어
2.1. 정의
2.2. 한반도지역에서의 노비제의 역사
2.2.1. 고조선~통일신라
2.2.2. 고려
2.2.3. 조선
2.2.4. 현대
2.2.5. 노비의 유형
2.3. 트리비아
3. 철권 프로게이머

1. 고전용어

勞費

육체적인 노동과 금전적인 비용. 혹은 노잣돈을 달리 일컫는 말.

2. 역사용어

2.1. 정의

奴婢

중국한반도내 전근대사회의 최하층 신분인 예속민 계층을 구성하는 용어이다.

한반도의 전근대사회에서 신분제는 크게 귀족>양인>천민으로 나뉘었는데, 여기서 노비는 사내종인 노(奴)와 계집종인 비(婢)를 일컫는 말이다. 주례(周禮)에는 "노(奴) 가운데서 남자는 죄예(罪隸)로 들이고, 여자는 용인(舂人)이나 고인(槀人)으로 들인다" 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노(奴)는 남녀를 모두 뜻하는 단어였으나 후대에 남녀를 구분하게 된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죄예,용인, 고인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어 노동을 하는 일종의 공노비를 뜻한다.

2.2. 한반도지역에서의 노비제의 역사

2.2.1. 고조선~통일신라

한반도지역에서의 노비제의 역사는 다른 여러 나라들의 예속민의 역사처럼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의 범금8조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신교본 후한서(新交本 後漢書)의 삼한사회와 관련된 기록에서는 한인포로로서 잡힌 이들에대해서 머리를 깎아 밭에서 새를 쫓는 농업노동에 사역되고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후한서에서는 부여고구려의 노비제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는데 고조선의 범금8조가 물건을 훔친자를 노비로 삼았던것과 달리 사형자의 가족을 연좌제법적으로 노비화하는것만이 규정되어있다.

특히 부여고구려의 노비화에 관련된 이러한 규정은 고조선이 물건을 훔친자를 그 집의 노비로 삼는 사노비전통이었던것에 반해 이들을 사노비가 아닌 관노비로 취급하였다는 특징을 가진다.[1]

이외에도 부여고구려포로를 노비화하는것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는데 삼국지 위서에서 남아있는 노복(奴僕)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포로노비를 의미했던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 이들 기록에서 주로 노복과 같이 자주 언급되는 하호(下戶)는 실질적으로 노복과 유사하지만 구별되는 공납 예속민 계층으로 이들은 주로 점령에의해 복속된 마을들이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납을 바쳤던 존재로 자유민계층인 민과 완전 예속민이자 노비계층인 노복의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 계층에 가까웠다.[2]

2.2.2. 고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노비의 숫자가 이전에 비해 줄어드는데 이는 주로 전쟁에의해 발생하는 포로노비가 통일신라시기에는 급격하게 줄어든 전쟁횟수로 인해 급감하였기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기록으로 신라시대 촌락의 인구구성을 보여주는 문서들을 살펴보면 4개촌락 442명 중 노비는 25구에 불과하였다고 나오기도 한다.미야지마 히로시는 이 민정문서를 근거로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노비비율이 조선보다 낮을것이라 추측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 문서는 어디까지나 신라촌락에 관한 민정문서일뿐이며 신당서에서는 (고대기록들이 다 그렇듯 과장된 숫자겠지만)진골귀족이 약 3000여명의 노비를 거느렸다고 나오기도 한다. 남아있는 기록이 적기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수없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신라시기의 노비의 비율을 약 전체 인구구성에서 1할정도로 추정하고 있다.[3]

고려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노비와 사노비의 구분이 엄격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공노비는 주로 모반이나 반란에 가담한 귀족과 그 가족, 그리고 이들에게 속한 사노비,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 전쟁포로를 공노비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이에따라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공노비화 처벌이 왕권강화에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처벌이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고려시대에서의 사노비발생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의한 자발적 노비화가 주를 이루었다. 고려사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빚을 지고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빚을 매개로하여 노비로 만드는것을 금지하고있고, 자손이나 친척을 노비로 매매하는 행위또한 분명하게 죄로 규정하고 있었으며, 이에따라 고려시대의 사노비는 주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던 양인들이 스스로를 팔아서 노비가되는 케이스가 사노비의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고려시대는 원칙적으로는 법에서 양천교혼을 금지하고 있었고 이는 초기에는 잘 지켜졌으나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한 후반에 들어서는 이것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실제로 고려 초 농장개념이 발달하지 않았을때에는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던 양천교혼이 비교적 잘 지켜졌기때문에 음성적인 영역에서 매우 조금씩만 이루어졌지만, 고려 후반기인 12세기부터는 농장개념의 발달과 함께하는데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천자수모법에 따라 양인과 결혼한 비의 자식은 노비로 삼았기때문에 귀족들은 양인남자와 비의 결혼을 독려하여 사노비의 증가를 꾀하곤했다. 이 과정에서 점차 일천즉천의 원리가 보편화었는데 충렬왕때는 부모중 한쪽만 노비여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을 관습법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노비정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공노비와 사노비문제를 둘러싼 왕과 귀족간의 대립이었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왕과 귀족간의 권력균형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에 대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변해왔는데 고려를 창건한 태조왕건은 노비정책을 통한 왕권의 강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따라 집권 후 호족계층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1000여구의 사노비를 일부러 속환시켜 양민으로 전환시켜주기도 하였으며, 고려 후기 왕권이 약화되고 권문세족의 대토지점유의 심화에따라 농장규모가 증가하였을때는 이들에의해 사노비를 보다 쉽게 늘리기위한 정책들이 늘어났다.

다만 당시 고려의 노비제는 그 자체로 왕과 귀족들이 서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었으므로 이를 지키기위해 협력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를들어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 활리길사(闊里吉思, 기와르기스)는 당시 고려의 노비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노비제도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충렬왕과 대신들이 맹렬히 반대하여[4]개혁이 실패로 끝난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이후 활리길사가 물러난 후 충렬왕은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해방된 양민을 다시 노비로 돌렸으니 그야말로 병크중의 병크. 그나마 공민왕이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해방시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고 노비제의 폐단을 줄이려했으나 결국 이는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노비정책을 둘러싼 왕과 왕을 둘러싼 기득권층의 갈등 양상은 이후 조선사회에도 그대로 이어지게된다.[5]

2.2.3. 조선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공노비의 비중이 축소되고 양반계층에 예속되는 사노비의 비중이 크다는 특징을 가진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양민과 노비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가 왕권에 의해 부여되는 여러 의무에 있었는데, 주로 양민들은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웠으나 국가에대한 여러 의무가 부가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양반들에 의한 이중적 불법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하였다. 양민들은 상황에따라 경제적으로 빈곤이 심화되면 스스로를 노비화시키기도 하였으며, 역으로 이것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도망가 자유인이되는 경우도 잦았다. 다만 이것이 농민들이 자유롭게 양인과 노비의 신분을 선택하고 소득을 극대화하였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노비가 된다는것은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나 유력자의 소유물이 된다는것이며 도망친다고 해도 노비주의 추쇄를 걱정해야만 했다. 또한 투탁(投託 유력자에게 몸을 맡기는일)은 어디까지나 불법이였고 왕권이 강하였을때는 스스로 몸을 팔기도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했을때는 투탁과 자매(自賣)가 쉬웠고 양반층 스스로가 양민의 노비화를 꾸준하게 유도하였기때문에 노비인구는 왕권과 양반의 권력이동에 따라 그 숫자가 변화하였다.

실질적으로 조선시대에 노비는 납세의 의무를 지지않았기때문에[6] 실질적으로 국가의 입장에서는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증가시키는것이 이득이었다. 이에따라 과거 고려시대에는 공노비와 사노비에 대한 정책으로 표현되던 왕과 귀족계층의 갈등이 양인과 노비에 대한 정책을 통해 발현되었는데 주로 조선초기에는 중앙정부가 왕권을 강화하기위해 양천교혼의 폐단을 줄이고 양인을 늘리기위해 노비종부법을 시행하기도하였으나[7] 실질적으로 이는 납세와 군역을 피하기위한 양인계층의 자발적 예속화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사대부들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노비종부법은 노비종모법으로 후퇴하게 되고 성종조에 가서는 경국대전에 일천즉천이 명시화되면서 노비의 숫자가 갈수록 증가하게 된다.

또한 조선시기에는 납세와 군역을 피하기위한 양인계층의 자발적인 예속화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를 협호(挾戶)라고 한다. 협호란 국가의 역이 부과된 양인들이 역을 피하기위해 자발적으로 지역 유력자들에게 노비처럼 예속되서 호구조사를 피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각 군현의 유력자들 밑으로 스스로 예속되는대신 유력자들이 호구를 축소보고해서 역을 피하게해주면 유력자들밑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학자들은 단성호적과 숙종실록등을 바탕으로 17세기 조선시대 전인구의 30~40%정도를 노비로 추산하고 있다. 울산부, 단성등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의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하기도 하였는데 일찍히 성현(成俔 1439 ~ 1504)은 우리나라의 사람중 절반이 노비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다만 주로 노비의 분포는 서울과 남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당시 인구조사의 한계점이나 호적조사에서 노비의 기재 자체를 기피하던 사회적 분위기, 협호라는 독특한 계층의 존재로 인해 실질적으로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우며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서울 이남을 기준으로 전체인구 중 30~40%가량을 실질적인 노비계층이었을것으로 추정하고있으며, 이는 서울이북 지역을[8] 포함하면 더 떨어졌을거라고 추정하는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9]

조선초중기 늘어나는 노비의 수로 인해 국가재정이 악화되면서 16세기에는 종모법이 논의되거나 양란을 거치면서 병력을 충원하기위해 노비로 구성되서 공을 세우면 노에서 해방시켜주는 속오군이 창설되기도 하였다. 특히 현종은 국가의 세수증대를 위해 호구조사를 철저히하는 과정에서 과세대상의 적용을 엄격히하는 등 노비제도를 포함한 왕권에의한 토지 및 노동력의 장악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보다 큰 왕권강화 추구한 영, 정조시기에 완전히 고착화되는데, 영조는 기존에 계속 논란이되어왔던 종모법을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만들었으며, 동시에 정조는 노비의 신공을 줄이거나 폐지하는 방식에 도망 노비를 추적하는 추쇄관 혁파를 통해 공노비 자체가 자체붕괴하도록 부채질하였으며 이를 통해 노비제 전반의 자체붕괴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노비제도의 변화로인해 17세기부터 노비제는 무너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10] 영조-정조시기를 거치며 노비의 숫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비록 세도정치 기간동안 반노비정책은 크게 줄어들며 일시적으로 사노비가 증가하기도 하였으나 노비개혁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1801년 정순왕후에 의한 66000여명의 공노비 해방을 시작으로 1864년 궁노비 해방,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사가노비절목)을 거쳐 1894년 갑오개혁 중에 사노비의 폐지와 함께 조선시대의 노비제는 완전히 붕괴된다.

2.2.4. 현대

현대에는 당연히 사라졌지만, 머슴 제도의 잔재로 섬노예 등이 일부 지방에 불법적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2.2.5. 노비의 유형

한반도에서의 노비제의 역사는 이상과 같이 매우 길었던만큼 같은 노비들이라고 할지라도, 각각이 처한 처지에 따라 생활상은 많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노비제에 있어서 가장 큰 분류로는 소속의 주체에 따른 분류가 있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국가에 예속되어 있으면 공노비, 개인에게 예속되어 있으면 사노비라고 하는데, 먼저 공노비는 소속기관에 따라 내수사, 즉 왕실에 소속되어 일하는 궁노비는 내노비, 행정기관에 소속될 경우 시노비라고 불렀으며, 이들을 합쳐 내시노비라고 하였다.

또다른 분류로는 노비의 의무부담형태를 토대로, 관청등지에서 직접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선상노비와 일정량의 재물을 바치는 납공노비로 나누는 것이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경거노비들은 거의 대부분 선상노비였으나, 지방의 노비들은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라는 두가지 형태가 혼재되어있었다. 납공노비가 제공하는 의무의 부담은 양인에 비해 배이상 과중한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양인의 경우 정남(丁男)에게만 국역이 부담되었지만, 노비의 경우 노와 비에게 모두 의무가 주어졌다. 이들 납공노비가 납입하는 신공은 국가재정의 상당량을 차지하여, 성종때에는 면포 72만 4500여필, 정포 18만여 필에 달했다.

사노비의 경우 거주형태에 따라 주인과 함꼐 거주하는 솔거노비와 따로 나와 거주하는 외거노비로 구분하는것이 통례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과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는 공노비의 선상노비와 같이 주인에게 직접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가 주를 이루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극등지에서 보는 일반적인 노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것이 이 솔거노비라고 할수있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분리되어 거주하면서, 주로 신공을 납부하는 노비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외거노비는 솔거노비에 비해 주인에게 독립적이며, 좀더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는 특징을 가졌는데 이에 따라 외거노비들은 자유롭게 가정을 꾸민다든지 사유재산을 모은다든지 하는 일이 가능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외거노비들의 토지소유가 늘어나면서 외거노비가 노비를 들여서 토지를 관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노비의 신분은 주인에 자의에 따라 유동적인 측면이 있어서 언제든지 외거노비가 솔거노비로 전환될수도 있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이와같이 사노비의 유형분류가 많이 쓰여왔으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분류에 대해서 사노비를 공노비와같이 양역노비와 납공노비로 분류해야한다는 주장[11]이나 양역노비와 솔거노비도 구분되는 존재였다는 주장[12] 또한 있어 이와같은 노비의 유형분류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외 특이점은 노비제가 신분상 세습된 것이다. 이는 일본의 하인 즉 게닌[13] 과 유사한 처지지만 그 법적 보호의 주체가 국가-영주 라는 차이와 함께 모든 하인이 영주의 영토내에서 농사를 경작하거나 가식을 대행했다는 사항과 대비하여 조선노비 의 상당수가 1년의 납공을 상납하면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는 노비는 존재하였으나 70세가 된 관노비는 양인으로 삼게하였고(물론 이건 노비가 불쌍해서라기보다는 늙어서 노비의 가치가 떨어졌기때문이고 옛날에는 수명이 짧았으니 관노비가 70세가 되어 양인이 된 경우는 드물었을것이다.)[14] 노비신분이 자식에게 세습되진 않아 부모가 노비라도 자식은 노비는 아니였다. 반면에 고려와 조선은 노비의 신분이 세습되었는데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이를 비판하며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된 것일 뿐이다.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라고 하였다.[15]

고려와 조선은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었고 천자수모의 원리에 따라 자식의 소유권은 모계의 노비주에게 있었다. 노비주들은 노비를 늘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여성 노비를 양인 남성과 적극적으로 혼인시켰는데 이로 인해 양인의 수가 감소하고 노비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조선의 태종은 이를 바로잡고자 노비종부법을 도입하였으나 세종 때 이르러 노비종부법은 폐지되고 종친과 문무 관료의 자손에게만 예외규정으로 적용되게 된다. 시대에 따라 종부법의 범위는 조금씩 달라지며 양인과 천인의 숫자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양인 여성이 노비 남성과 결혼하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소멸하게 된다.

기술관원인 취재는 응시제한이 없어 노비도 시험을 볼수 있었다. 또한 관청에서 근무하는 말단 공무원인 이원은 다수가 노비출신이였고 이들은 조선의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다만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된 관원(官員)과는 다르게 월급을 받지 못하였고 대우 또한 큰 차이를 보였다.

2.3. 트리비아

  • 조선시대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중 한쪾이 천한 신분이면 자식도 천한 신분이다."라는 사상이 펴져있어서 사대부가 종을 건들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비로 취급했다. 이러한 폐혜를 막기위해 태종이 "양인과 천민 사이의 자식은 아비의 계급에 따른다."는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그의 아들 세종이 다시 일천즉천을 밀어 붙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사상으로 알려졌던 세종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아이러니.

  • 노비제도가 공식적인 국가제도로서 폐지된 것은 조선시대이나, 이것이 실질적으로 사회 전반에서 사라진 건 한국전쟁 이후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광복 이후 큰 사회적인 혼란 과정에서 기존의 신분을 알 수 없게 된데다, 좌우 이념 대립 과정에서 개개인의 신분보다는 이념 노선과 능력이 중시되면서 기존의 신분과 관련된 관습의 상당수가 부정되었는데, 이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16]

  • 일반적으로 노비로 인식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비와는 어느정도 구분되어서 이해해야 할 신분으로 머슴이 있다. 머슴은 대체적으로 노비와 달리 고용되어서 그 곳에서 거주하면서 '새경'이라는 형태로 임금을 받는 일종의 임노동자를 의미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선 노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머슴은 중종 대에 나온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도 언급되는 등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갑오개혁 이후에 노비들이 법적으로 머슴으로 전환되면서 오히려 머슴이 노비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상단에 위치한 노비적 존재가 알고 보면 머슴이었을 수도 있고, 이름만 머슴인 노비일 수도 있다. 이들도 한국전쟁 이후로는 사라져 갔지만, 애초에 일하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임노동자라는 개념은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식모를 포함해서 현대까지도 남아있긴 하다. 다만 현대의 이들을 머슴이라고 부를 수야 없는건 당연한 문제이고.

  • 참고로 갑오개혁 이후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대부분의 노비는 해방되었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일부 젊은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양반집에 그대로 매인 채로 으로 전환되어 과거 했던 일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주변 사람들도 이들에 대한 대우를 크게 달리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젊은 노비들은 신분제 폐지를 환영했지만 일부 나이든 노비들은 오히려 노비 제도가 없어짐으로써 양반집에서 그걸 명분삼아 자유롭게 해준다면서 그냥 내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노비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이들은 그전과 별 다를바없는 노동착취와 인권유린을 당하였는데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농촌에서는 흔하게 볼수있는 존재였다.머슴과 노예

  • 다른국가와 달리 조선 시대 노비 대부분은 침략이나 정복을 통해 획득된 이방인이 아니라, 조선 사회 내부에서 채무, 범죄 등 사건과 관련해서 생겨난 사람들이였다. 이에 따라 양민 ↔ 노비로의 신분이동이 비교적 쉬웠던 것. 도망가서 양민 행세를 하면 노비인지 양민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도망노비들은 죽음을 각오한데다가 각 수령의 고을들은 도망노비를 내어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노비주의 추쇄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망노비의 주인들은 도망노비의 가계 기록을 작성하여 그들의 후손이라도 노비로 삼으려 했으나,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

  • 미국이나 카리브해안 국가들에서는 남성노예가 여성에 비해 값이 높았으나 조선은 노의 가격이 비의 가격보다 낮았다.노비의 거래량 역시 여자노비가 남성노비에 비해 자주 거래되었는데 이것은 밖에서 농사일을 주로하는 남성노비의 경우 도주의 위험성이 높고 지주-소작의 농업경영이 주류를 이루면서 남성노비의 노동력이 가치가 낮아진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남성노비는 주로 단일대상이 거래가 많이 된 반면 여성노비는 어린자녀가 동반된 2~3인 형태의 거래가 많았다. 특히 20세 여성노비의 가치가 가장 높았는데 이는 자녀생산을 통해 노비를 증식시킬려는 의도로 보인다.

  • 함경도를 비롯한 서울 이북 지역은 노비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삼남지방에 비해 노비의 가격이 몇배이상 높았다. 때문에 남부지역의 도망노비나 갈곳없는 떠돌이들을 유혹해 함경도 등지에 파는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함경도의 노비가 적었던것은 세조때의 문신인 양성지의 상소문에서도 언급되는데 양성지는 상소문에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중국에 비하여 장수한 이유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이 경향 각지에 자리 잡고 있어 반란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대가세족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은 노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함길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모두 다 그 지방에 노비가 없기 때문이요, 노비가 없는 것은 대가세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대토지를 보유한 양반들은 소작보다는 주로 노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엇는데 그 방법에는 작개(作介)와 가작(家作)이 있엇다.여기서 가작이란 주인집 주변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그 생산된 농산물을 전부 주인이 가지는 방법을 말한다. 작개란 주인집에서 멀리 떨어진 토지를 경작하는 방법인데 사경(私耕)이라 불리는 질낮은 토지를 노비에게 주어 생활하게 하고 작개라는 불리는 질좋은 토지의 생산품은 주인이 가지는 방식을 말하였다. 작개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노비가 얻는 이익은 없었기 때문에 노비들은 작개보다는 사경에 힘을 쏟았고 주인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폭력으로 대응하였다. 수확량이 적거나 혹은 씨뿌리기,잡초제거등을 소홀히 하였을경우 곤장 최대 70대까지 치게 하였는데 당시의 곤장은 30대만 맞아도 죽을수 있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였다. 작개제는 17세기 이후 소농경영에 밀려 쇠퇴했으나 사경(私耕)은 새경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현재까지도 일부 농촌지역에서 쓰이고 있다.

  • 조선시대 자매노비 즉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양인집에 투탁한 경우는 그 속량의 대가로 금전이나 곡식을 납부하면 바로 양인신분으로 상승되었는데 아마도 이를 자개라고 지칭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 간혹 조선시대에 노비문서에 수개(壽介)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인간을 개에 빗대어 "수캐" 를 점잖게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수개란 말 그대로 "목숨을 의지하는 사람" 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종종 조선시대를 반인권적이고 전근대적인 미개한 시대로 깎아내리려는 국까들과 일부 극우파 인사들에게서 나오는 말이다. 문인들 중에서도 서정주의 〈자화상〉의 맨 앞과 맨 뒤 구절을 이렇게 연결해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가끔이지만 있다.

  • 조선시대 노비에 대한 국가의 처우방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방법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노비에 대해 검색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고 직접적이다. 예를 들어 이숙번이 강간하려 하자 15세 여노비가 이마를 칼로 찌르니 조정에서 무죄라고 판명하거나 주인의 권세를 믿고 조정내에서 양반을 구타한 사례까지 그 기사가 수천개에 달할 정도로 매우 풍부하다.

  • 노비를 소재로한 안드로이드 게임이 존재 한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hooncom.WANG

3. 철권 프로게이머


Nobi. 나카야마 다이치. Nobi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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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조선시대에는 물건을 훔친자를 무조건 노비로 삼았지만 부여-고구려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전쟁포로와 사형자의 가족정도만을 노비화하였고 절도죄에대해서는 1차적으로는 배상을 통해 해결하고 그것이 충족되지않았을때에 한정해서 노비로 삼았다.
  • [2] 참고문헌 : 조법종(Cho Bup-jong), "한국 고대사회 노비제의 특성", 한국사학보/15, 2003., 263-281, 고려사학회
  • [3] 참고문헌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양반』,미야지마 히로시 저, 노영구 옮김, 출판-(주)도서출판 강(1996.6.20) 96-97p
  • [4] 충렬왕이 직접 원나라 황제에게 노비제 개혁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려사절요/권이십이/충렬왕/경자 26년(1300) http://osmstar.com.ne.kr/goreosajelo/kframe1.htm
  • [5] 참고문헌 : 朴起賢, "高麗時代 奴婢에 관한 硏究", 2002., 학위논문(석사)--, 全州大學校
  • [6] 다만 공노비 중 토지를 소유한 일부는 어느 정도 납세의 의무를 지긴 했다.
  • [7] 당시 양천교혼에서는 양인 남성과 여성 노비의 결혼이 일반적이었다.
  • [8] 사실상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록을 참고하면 서울 이북 지역은 약 10~20%안팎이었을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 [9] 참고문헌 : 朝鮮 奴婢制와 美國 黑人奴隸制: 比較史的 考察, 李榮薰, 서울大學校經濟硏究所, 1998
  • [10] 현종-숙종조에는 경신대기근의 여파로 노비가 증가하였다
  • [11] 이영훈 '조선시대 솔거.외거노비 구분재고'
  • [12] 전형택, '조선후기 고문서에 나타난 앙역노비의 성격'
  • [13] 하인의 밑에 존재하던 계급 천민=비인 즉 인간이 아니다 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메이지 초기 까지도 전체인구에 약 2%를 차지하였다.
  • [14] 《당육전》 〈상서형부(尙書刑部)〉 편
  • [15]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전한~삼국시대의 노비 비율은 전 인구의 1% 내외였으며 그마저도 꾸준하게 해방되는 양상을 보인다. Encyclopedia of Antislavery and Abolition Peter P. Hinks, John R. McKivigan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7
  • [16] 최후의 노비는 1980년대 초반 경상도의 시골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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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8-11 22: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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