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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last modified: 2015-04-08 12:28:03 by Contributors


Niccolò Machiavelli(니콜로 마키아벨리)
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이득을 가져온다고 믿는 일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에 이끌려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 그러한 작업은 적어도 더 많은 활력, 신중함 및 판단력을 갖춘 자들에게 나의 이러한 의도를 더욱 잘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도로 인해 내가 칭찬은 받지 못할지언정,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사 논고 中

"다른 사람에게 그가 장악한 권한을 유산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선보다는 악에 기울기 십상이므로 그의 후계자는 그가 고귀한 목적에 따라 사용한 것을 자신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의 건국(과 개혁)에는 단지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로마사 논고 中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교묘히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야수 중에서도 여우와 사자의 본을 따야 한다. 그것은 사자는 올가미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가 없고, 여우는 늑대로부터 자기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가미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우일 필요가 있고 늑대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사자일 필요가 있다."
-군주론 中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요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민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 요새는 당신을 구원하지 못 할 것입니다."
-군주론 中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외교관, 정치학자, 저술가. 근현대 정치학의 아버지.

정치의 문제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던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의 현실세계로 가지고 내려옴으로써, 오늘날의 정치학을 탄생시킨 원류로 취급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플라톤칼 마르크스 사이 존재했던 가장 중요한 정치 철학자로 칭송받는다[1].[2]

저서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참고하여 작성한 공화정 논고인 《로마사론》, 《전술론》, 《피렌체사》 등의 역사서와 희곡 《만드라골라》 등이 있지만, 이 사람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저술은 바로 군주정에 대한 마키아벨리 자신의 정치론을 당시까지의 유럽 역사를 인용하여 증명한 《군주론》이다. 다만 이건 군주론이 가장 유명한 저서일 뿐이지, 실제 역사학계건 정치학계건 그의 저서 중 가장 중요한건 근대 공화주의 이론의 체계를 성립한 로마사 논고라고 평가한다. 그의 저술은 항상 과거 역사를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식이었다. 주로 로마의 역사를 인용했지만 오스만 제국이나 페르시아, 이집트 등도 써먹은 바 있다. 여담으로《만드라골라》는 호평과 인기를 모두 모았고 때문에 당시 넉넉지 못했던 마키아벨리의 가계에 상당한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Contents

1. 생애
2. 사상
3. 전술가로서
4. 트리비아


1. 생애

피렌체의 실제 통치권력이던 메디치家가 추방되고 난 후 29살에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뛰어난 외교 능력으로 다양한 실적을 올리며 당시의 명사들을 만날 기회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후 다시 메디치家가 복귀하면서 그는 반메디치 인물로 낙인찍히게 되고 결국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직후 메디치家 암살 모의에 휘말려 투옥되어서 날개꺾기 고문[3]을 여섯 번이나 당했다. 그나마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면서 버텼고 덕분에 가까스로 풀려나서 멀리 피렌체가 보이는 작은 농장에 은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피렌체를 위하여 공직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그는, 메디치家의 군주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군주론을 저술하여 바친다. 그러나 결국 공직에 복귀하는 일에는 실패했고, 루첼라이 가문에서 주최하는 지식인 모임인 오르티 오리첼라리에 참여하며 코시모 루첼라이, 차노비 부온델몬티, 필리포 스트로치 에지오 아우디토레 등 젊은 지식인들과 교제하였다.[4] 이후 피렌체에서 메디치가 쫓겨나고 다시 공화정에 복귀하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공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선거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한다. 가장 큰 이유는 知의 사람보다는 忠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라고 한다. 그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선 권력자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주의였지만 바로 그러한 점이 권력자의 호의를 사지 못했던 것. 희망이 무너진 그는 곧 수명을 다하고 만다.[5]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가 공직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열흘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의지가 수명에 영향을 끼치는가를 알 수 있는 일화.

2. 사상

역사를 이용하여 주장을 펴는 성향을 가지고 저술한 《군주론》은 최초로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 생각한 책이다. 이 때문에 당시의 가톨릭적인 사상에 반하는 이 책은 결국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버린 이후의 독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레퍼토리가 되고, 그 결과로 마키아벨리즘[6], 키아벨리스트라는 알 수 없는 단어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대표적 지식인인 버트런드 러셀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그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획득하고 싶으면 '냉철'해져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선이던 악이던 간에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즉, 정치라는 것은 하나로 분리시켜 본 것일 뿐 부도덕한 시점에서 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의 미덕은 권력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개념이다. 아주 뚜렷하고 명확하며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될 경우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든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효과적인 방법만이 정당하다는 것.

실제로 그의 저서에서도 사악하고 잔인한 방식을 사용한 정치가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또한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이는 존경받는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는 힘들고, 존경의 대상이 실수를 저지르면 큰 비난을 받고 지지도가 떨어지지만, 두려움의 대상이 가끔씩 선의를 베풀면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심리에 따른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도덕에 대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얻는 것은 선악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에 가깝다. 강한 힘(권력)을 통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선한 사람이 권력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것. 더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다면 착한 놈하고 나쁜 놈하고 싸우면 더 힘 센 놈이 이기는데, 이건 도덕과는 아무 상관 없는 문제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기까지 유럽인들은 승패와 선악이라는 개념을 분리해서 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서로 칼들고 싸우게 해서 이긴 놈이 옳다고 결정하는 신명재판. 당시의 도덕은 종교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승패 개념마저 이 도덕관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은 정의로운 자를 가호할 것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싸우면 정의로운 자가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이긴 자가 정의로운 자다 라는 재판 방식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 그에 비하면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착하냐 나쁘냐는 거하고 싸움에서 이기냐 지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니, 이기고 싶으면 싸움을 잘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긴놈이 착한놈'이라고 보는 중세적 도덕관이 오히려 부도덕할수도 있는 셈이다.

군주론을 메디치가에 바친 이유가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걸 실행해서 시민의 반발에 부딪쳐 좌초해라'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정작 메디치가는 군주론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복귀 후 군주론을 쓴 악한에 메디치가를 옹호한 자로 낙인찍혀 복귀하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그 유명한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요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민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 요새는 당신을 구원하지 못 할 겁니다

라는 말도 그가 공화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은덕을 베푸는 것보다 그들의 재산을 뺏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저술한 점에서는 자유주의적 경제관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만,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에 자유주의자라는 추론에는 조금 무리수가 있다. '권력자가 자신이 지배하는 대중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위험해진다'는 것은 그 권력의 형태가 군주로써의 권력이든, 공화정체하의 권력이든 마찬가지다. 군주정체 하에서 군주는 대중의 동의 없이 권력을 획득하지만 대중이 군주를 적대하시기 시작하면 그 권력 유지하기가 몹시 고단해질 것이고, 각종 물자와 인력, 군사력의 기반인 대중을 적으로 돌리면 아무리 튼튼한 요새를 가지고 있어 봤자 권력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절대군주라 하더라도 반란군이 들어닥치면 모가지 보존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재산을 뺏지 말아야 한다는 부분 역시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의한 사유재산권의 보장 요구'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비약이다. 경제 체제가 무엇이건 간에, 사유재산이 있는 사회라면 자기 재산 뺏기고 화 안 내는 사람 없다. 그리고 원래 사람이란 자기가 받은 것은 금방 잊어버려도 뺏긴 것은 오랫동안 못 잊는 특성이 있다는 점에서, 남의 재산을 함부로 뺏으면 당연히 재산 뺏긴 사람은 적이 될 테고, 다른 재산있는 사람들은 잠재적 적이 된다!

즉, 위의 두가지 주장은 공화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형태와는 무관하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의 적개심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인 셈. 대통령이 국민의 적의를 사면 탄핵당하겠지만, 왕 역시 백성들의 적의를 사면 모가지가 날아가는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 '인민을 위한 정치'와 '인민에 의한 정치'라는 개념을 확실히 구별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애초에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 공화주의 자체가 현대에 생각하는 민주적 공화주의와는 많이 다르다. 당시의 공화주의란 세습되는 왕 이외의 권력자들(십중팔구 귀족) 다수가 국가를 통치한다는 개념이고, 딱히 현대 민주주의같은 인민주권론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 이걸 현대적인 민주적 공화주의에 맞춰서 대중의 인권을 생각했으니 공화주의자! 라고 보는것은 좀 골룸하다. 애초에 피렌체 공화정 자체가 소수의 부유한(귀족)가문들에 의한 통치체제였고... 사실 이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는 군주제에 비해 공화주의라는 개념이 더 발전적이라고 여기졌던 것도 이니다.

그의 또 하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탈리아 통일에 굉장히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군주론》의 말미에서도 지금이 바로 기회니 메디치 가문이 나서라고 종용하며, 《로마사 논고》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교황청의 행태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그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일단 통일만 한다면 군주정도 용인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체자레 보르지아가 이탈리아 통일에 상당한 야심을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키아벨리가 체자레에게 우호적이었던 이유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이탈리아 통일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이유는... 당시 분열 상태였던 이탈리아의 소국들이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영토형 대국의 정치적, 군사적 압력에 심하게 휘둘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듯.

그가 정치가의 모델로 삼은 사람은 체자레 보르지아. 자신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자신도 외교관으로서 직접 이 사람을 만나 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이 인물의 철저히 냉철한 행동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그는 이후 군주론에서 특히 체자레 보르지아의 정치철학을 일종의 모범적 예시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그의 정치철학을 높게 평가했을 뿐이며, 절대 마키아벨리의 궁극적 모델이 체자레 보르지아라는 의미는 아니다.

반면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는 스스로 <반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학자들에게 두고두고 까임의 대상이 되는 것이 18세기 유럽의 군주국과 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차이도 이해하지 못했고, 윤리적인 잣대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데다가[7]이 인간이 왕위에 오른 후 유럽은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쑥대밭이 되고 만다. 억지스러운 주장 또한 많아 군주론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

여러 가지로 말이 많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명쾌한 문장력 하나만은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이견이 있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8] 마키아벨리 자신은 굉장히 고전문헌들을 탐독하였지만 고전들에서 볼 법한 만연체와 모호한 표현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저술을 하였다고 군주론에서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말들은 여기에 있다.

3. 전술가로서

군사, 전술에 있어서는 젬병이었다 마르크스도 돈은 어지간히 못 썼다고 하더라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군사정책이나 당대 전투에 대한 설명은 다분히 정치적-이념적인 것으로, 군사적인 측면의 이해는 상당히 부족했다. 1422년에 있었던 아르베도 전투에서 밀라노 기병대는 말에서 내려서 랜스를 파이크(꼬챙이처럼 생긴 긴창)처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할버드로 무장한 스위스군을 격파한 일이 있다. 스위스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검토해서 파이크를 도입함으로써 이후 전술 형태가 완전히 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전투 양상이나 이후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무시했으며 밀라노군이 승리한 이유는 갑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9] 마키아벨리는 로마군, 그 중에서도 시민군의 이상에 심취해서 전 병력의 2/3를 로마 군단방식의 소드 앤 버클러 병종으로 채울 것을 제시했고, 파이크병은 1/4 이하, 투사무기(활과 화승총 포함)를 다루는 병력은 1/9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는 화승총과 파이크가 대세가 되어가는 당대의 군사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이었다[10].
요약 : 파이크와 총의 사용으로 근접전투 → 원거리전투로 변하는 과도기 시점이었는데 마키아벨리는 이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군사 문제에 대해 여러 견해를 제시하기는 했으나 마키아벨리는 군사를 지휘한 적이 없었으며 실제로는 사열한 군대 앞에 나오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용병대장 조반니 메디치[11]가 그에게 병력을 주면서 지휘해보라고 기회를 주자 뻘뻘대며 물러나왔고, 조반니는 금새 병사들을 지휘한 일화가 있다.

마키아벨리가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 횡행한 용병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시민병제를 주장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마키아벨리의 시민병을 현대의 징병제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시민병제는 사실상 유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대의 전쟁은 이미 범위가 넓어지고 장기화된 상태였는데, 농민이건 상인이건 수십 킬로미터라도 떨어진 곳에서 장기간 복무해야 한다면 당연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속적으로 순환 복무를 시키는 것도 전근대적인 행정기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마우리츠 이후의 근대적인 군사훈련이 자리잡기 이전에는 시민군은 전쟁 경험 면에서 크게 부족했다. 게다가 이 당시 시민군이라는 것은 그리스나 로마에서처럼 자기 돈을 들여서 복무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시민병제의 경우 금전적 동기에 의해 배신할 수 있고, 배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굳이 고용주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싸울 동기까지는 없는 용병에 비해 자신이 국가 공동체에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자기 삶의 터전과 가족을 지키려고 하는 시민병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본 점에 대해서는 현대의 국민개병제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시민병은 대부분의 경우 용병에 비해 유지비가 저렴하다는 점에서, 같은 비용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장점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근대 이후 국민개병제에 의해 징병된 시민병들이 직업적 용병을 밀어내고 군사력의 주축을 차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살던 당시에는 시민병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 기반이 크게 모자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따져 본다면...

  • 시민병이 전장의 주인공이 된 것은 총의 보급 이후였다.
창이나 칼 등의 근접전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활과 같은 투사병기라고 하더라도 냉병기의 위력을 결정하는 것은 근력과 운동능력이고, 그 사용에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시민병이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거나, 전투 경험이 많은 직업적 군인을 상대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뭐, 마키아벨리 시대에도 화승총은 사용했지만 비싼 가격과 낮은 신뢰성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총으로 무장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후 총이 대중화되어 군대의 주된 개인무장이 되면서 소수의 용병보다 다수의 시민병이 더 뛰어난 전력을 갖추게 된 것. 일단 총은 최소한의 근력만 있으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고, 조작 방법도 냉병기에 비해 훨씬 간편하니까. 물론, 명사수가 되려면 검술이나 창술의 달인이 돼야 하는 것 이상의 고된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전쟁터에는 명사수 없어도 된다. 명사수가 백발백중으로 10명 맞추는 사이에 병사 100명은 백발십중으로도 100명 맞춘다.(...) 더구나, 적과 거리를 두고 싸울 수 있다는 특성상 조직력 유지도 훨씬 쉽다. 즉, 소수의 정예병력이 다수의 잡병들에 대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서 시민병의 할용도가 높아졌다는 것.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게, 마키아 벨리 본인이 총의 위력과 잠재력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채 무척 경시했다는 것이다.

  • 시민병을 부양하기 위한 생산력이 없었다.
일단, 시민중에서 병사를 모집하면 그 사람들은 노동력으로써의 생산성을 상실하게 된다, 더구나 병사들도 먹어야 하니 이들을 부양하기 위한 생산력이 더 필요하기까지 한 셈. 더구나 시민병은 용병보다 싸고, 그만큼 더 많이 모을 수 있으므로 부양비용이 급증할 수 밖에 없다. 월급은 안 줘도 밥은 먹여야지 결국, 시민병 제도는 사회의 생산력(특히 식량생산력)이 충분히 향상되기 전에는 실현이 불가능했던 셈. 더구나, 방어전도 아니고 장거리 원정이라도 나가려면 이 비용은 더욱 급증할 수 밖에 없다.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하앍댔던 고대 로마의 시민병 역시... 시민병의 형태로 운용된 것은 주로 방어전이 중심이던 초기였고, 후기에는 사실상 직업군인화되었음을 기억하자.

어쨌든 마키아벨리가 조직한 피렌체의 국민병은 지지부진하던 피사 원정을 점령으로 종결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군사행정가로서의 능력은 입증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채 국민병제도가 자리잡기도 전에 프랑스의 대군이 피렌체로 진격해왔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국민병 실험은 지속되지 못했다.

다만, 군사적 기술의 발전과 변화에 대한 실드칠 건더기도 없는 몰이해와는 별개로 용병에 대한 거부감 자체는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소규모 국가들이 난립한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정세에서 용병들은 단순히 고용된 병력이라기 보다는 용병대장이 군주 자리를 찬탈하거나, 소국의 군주가 직접 용병대장으로 나서는 일도 제법 자주 발생했을 정도로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이익을 추구하는 주체였던 것. 실제로, 피사 원정이 지지부진했던 것 역시 해당 지역의 정치적 구성단위였던 용병들이 피렌체의 지나친 성장을 꺼려서 의도적으로 불성실하게 임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 즉,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용병은 고용주의 요구에 충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고,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집단에게 군사력의 주축을 맞길 수 있느냐는 지적 자체는 충분히 의미있다. 뭐... 그래서 마땅한 대안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4. 트리비아


동성애자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성애 행위는 젊은 시절에 할 수 있는 일탈 아니겠느냐" 하는 식의 내용이 있어 그렇게 추정하는 것뿐이지. 외국 사이트를 뒤져봐도 마키아벨리가 동성애자라는 합당한 주장은 없다. 호모포비아가 아니라고해서 동성애자라는 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좋아하는 사상가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및 <마키아벨리 어록>을 출판한 바 있다. 그도 그럴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성향이 워낙 군국주의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당 항목 참조. 그런데 정작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가 죽고 못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여지없이 까버린다.(...)

어느 누구든 카이사르가 특히 역사가들에 의해 찬양을 받는 것을 보고 카이사르의 영광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역사가들이 카이사르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를 알고 싶은 독자라면 그들이 카틸리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된다. 악행을 저지르려고 의도한 자보다 실제 저지른 자가 더 비난을 받아야 하는만큼, 카이사르는 훨씬 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로마사 논고 中

그는 그의 조국 피렌체에 대한 애국심이 무척 강했는데, 수입의 네 배를 벌 수 있는 용병대장의 비서 역할을 피렌체를 떠나기 싫어서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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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비단 군주론 뿐만 아니라 《로마사 논고》, 《피렌체사》 등의 저서와 무엇보다 그 여파를 고려하면 결코 과언이 아니다
  • [2] 덕분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스트! 그 권력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 찬양 하는 아저씨 아냐!라고 하면 누군가가 나타나서 아니야, 그게 아니라 마키아벨리는 그저 정치를 학문적으로 다루었을 뿐이고 오히려 공화정을 지지했다고!라는 스테레오 타잎의 해프닝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 [3] 문화대혁명 문서에 서술된 '제트기 형벌'의 업그레이드 버전. 아니 시기를 생각하면 제트기 형벌이 이것의 열화 카피라고 봐도 될 듯 하다.
  • [4] 로마사 논고, 만드라골라, 전술론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던 때도 이때이다.
  • [5] 이탈리아 전쟁의 복판에 휘말렸던 피렌체의 공화정은 결국 얼마 못 버티고 1533년 알레산드로 디 메디치 아래 메디치가의 공국으로 변하게 된다.
  • [6] 일반적으로 마키아벨리즘은 이기적이며 교활하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는 관념 체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는 실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는 다르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부합하는 의미로서의 마키아벨리즘은 무엇보다 공익, 특히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의 도덕적 선악에 관계없이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공리주의자다.
  • [7] 마키아벨리는 정치와 윤리는 별개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 [8] 마키아벨리의 글에 호불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옳냐 그르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다. 기분 나쁘지만 다 맞는소리야..
  • [9] 승기의 원인을 무기의 변화가 아니라 방어구의 변화라고 잘못 짚은 것이다. 파이크의 사용으로 사거리가 길어져 맞을 일이 없어 이긴 것인데, 갑옷착용따위가 아니라고!!
  • [10] 다만, 마키아벨리가 검방보병을 선호한 것은 단순히 로마 군단병 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 딴에는 전술적인 활용도를 고민한 결과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파이크나 화승총에 비해 검과 방패는 다루기 편하고 활용도가 높으며 따라서 검방보병은 상황에 대한 적응성이 뛰어나고 백병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게 되는 것에 주목했다는 것. 결국 마키아벨리는 생각없이 검방보병을 군대의 주류로 만들자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파이크와 화승총의 보급으로 당대의 전장에서 피아가 뒤섞여 싸우는 백병전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 [11] 여걸로 유명한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아들이고, 조반니의 아들이 초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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