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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last modified: 2015-02-27 02:35:40 by Contributors

(ɔ) Tamura Shigeru (田村茂) from

太宰 治 (だざい おさむ)
(1909-1948)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인간실격



1909년 아오모리현의 카나기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츠시마 슈지(津島修治 (つしま しゅうじ))로, 아버지 츠시마 겐에몬은 마을의 대지주였고 중의원과 귀족원의 의원까지 지낸 지역의 유지였다. 다자이 오사무가 태어났을 당시가 츠시마 집안의 최전성기로 당시 츠시마 겐에몬은 아오모리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었으며 중의원과 귀족원 의원직도 돈으로 샀다고 한다. 당시 츠시마 겐에몬의 화려한 저택은 2012년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다자이 박물관으로 쓰인다.

다자이 오사무 본인의 말로는 츠시마 집안은 빈농으로 살다가 다자이의 증조부 때부터 가문이 흥했다고 한다. 이때 증조부가 가문을 일으키는 방법은 고리대금업이었다고. 츠시마라는 성 때문에 쓰시마에서 이주해 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1916년에 카나기 제1진죠소학교에 입학했고, 1923년에 아오모리현립 아오모리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7살 때부터 습작 소설을 쓰면서 작가를 지망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은 일본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풍미하던 시절로 다자이는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심취하면서 또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톨스토이의 작품에 반해 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시도했지만 부유한 자신의 집안 때문에 계급이 문제라고 절망한 나머지 1929년 12월 안정제의 일종인 카르모틴을 과다복용해 자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1930년 히로사키 고등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불문학과에 입학했는데 프랑스어는 하나도 모르고 단지 프랑스 문학을 동경해서 지원한 것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 대학 1학년의 커리큘럼은 지극히 수준이 높아 오늘날 대학 2~3년차 수준의 커리큘럼과 맞먹는 것이었다.[1] 불어를 하나도 모르는 20살이 졸지에 어려운 수준의 불어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잘 따라가면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다자이 말고 다른 학생들은 잘만 따라갔다. 수업내용을 따라가기도 힘들었고 본인도 공산주의 운동에 더 집중해서 수업에는 거의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본인의 이름을 츠시마 슈지에서 다자이 오사무로 바꾸었다.

대학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탓에 당연히 유급을 거듭해 수업일수 부족으로 제적처분을 받았다. 이때 "교수님들 이름을 한 명이라도 말할 수 있으면 제적시키지 않겠다"라는 농담 같은 제안을 들었는데 수업을 거의 나오지 않은 다자이는 이름을 한 명도 말하지 못해서 결국 제적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

이 무렵에 다자이는 친하게 지내던 카페 여종업원인 타나베 시메코란 여자와 가마쿠라의 코유루기곶에서 동반자살을 기도하지만 시메코만 죽고 다자이는 살아남았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소설 인간실격에서 묘사된다.

이후 소설가로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1933년에 단편소설 <열차>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대한 다자이의 존경심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1935년에는 소설 <역행>을 발표하며 그 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아쿠타가와상의 후보로 올랐다. 아쿠타가와를 존경하던 다자이라 상에 나름대로 욕심이 났다. 이때 심사위원인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심기를 고려해서 본래 다른 작품을 내려고 했다가 <역행>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는 오류이고, 아쿠타가와상의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은 <역행>이 맞으나 실제로는 <역행>과 함께 <도화의 꽃>이라는 작품도 후보로 올라 있었다. 그리고 다자이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사토 하루오는 <역행>보다는 <도화의 꽃> 쪽을 최종 후보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자이 또한 <도화의 꽃>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와바타 야스나리가 다자이의 <도화의 꽃>을 다자이의 실제 생활과 연관지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후보 작품으로 선정되는 것을 꺼려했고, <도화의 꽃>은 최종 후보 작품 명단에서 제외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해 아쿠타가와상은 이시카와 타츠조(石川 達三)의 <소우보(蒼氓)>란 작품이 수상하게 되었다(참고로, 최종선고 과정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심사회에 결석했다). 이 때문에 빡친 다자이는 "작은 새를 키우고, 무도회를 보러 다니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생활인가? 찔러버릴까, 라고도 생각했었다. 악당이라고도 생각했었다..."라고 문예통신이란 잡지에서 가와바타를 공격하기도 했다(가와바타 본인은 시크하게 "불안정한 사생활에 대한 지적마저도 듣기 불편한 소리로 들렸다면 나는 단호히 취소하겠다"며 받아쳤지만). 결국 다자이에 이어 가와바타 역시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이후 역시 자살하게 된다. 동경대 문학부엔 뭐라도 꼈었냐...

이런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자이 오사무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스승격인 존재이기도 했던 사토 하루오가 아쿠타가와상의 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다자이는 1회 수상의 좌절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1936년에도 제2회 아쿠타가와상의 수상을 노렸지만 1935년 10월에 발표한, 다자이의 회심의 역작 <다스 . 게마이네>는 후보에 오르지 못하고, 그해 아쿠타가와상도 해당 작품 없음으로 결론이 나버렸다. 그리고 1936년도 상반기를 대상으로 한 제3회 아쿠타가와 상의 대상 후보에 다자이의 <만년(晩年)>이 고려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다자이는 자존심을 접고 사토 하루오는 물론 가와바타에게까지 사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가와바타도 "나는 예선 후보 작품을 빠짐없이 읽었다. 의구심이 가는 작품은 두 번씩 읽었다. 다자이씨의 작품집 <만년>도 이전에 읽었다. 이번에 적당한 후보 작품이 없다면, 다자이씨의 특이한 재능이 수상을 해도 좋을 것이다"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비췄다. 하지만 제3회 아쿠타가와 상은 오다 타케오의 <성외(城外)>라는 작품에게 돌아가고, 다자이의 아쿠타가와 수상은 다시 무산되어버렸다. 이거 후의 어떤 작가가 생각나는데? 그리고 당연시하던 아쿠타가와상 수상에 거듭 좌절한 다자이가 사토 하루오와의 서간을 공개하며 자신이 떨어진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을 표출했고, 이에 분개한 사토 하루오도 소설 <아쿠타가와상>에서 다자이의 둔감함을 비난, 둘은 한동안 서먹한 사이가 된다. 그리고 3회 이후 아쿠타가와상 후보 선정의 기준이 '한 번 후보에 오른 작가의 작품은 다시 후보로 선정하지 않는다'로 확립되면서, 다자이의 아쿠타가와상 도전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38년, 친구의 소개로 야마나시현 미사카 고개에 있는 텐가차야를 방문해 3개월간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코후시 출신의 이시하라 미치코라는 여인[3]을 소개받아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결혼 후 아내의 고향인 코후시로 가서 정착한 다자이는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이곳에서 여러 뛰어난 단편소설들을 창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후에 일본의 국민소설로 교과서에도 나오게 된 달려라 메로스다. 전쟁 중에도 집필을 계속했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쓰가루(津軽)>가 있다.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 형식의 이 소설은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앞 문단에서도 언급된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사토 하루오는 '다른 모든 작품을 없앤다고 해도 <쓰가루> 하나만 있으면 그는 불멸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라고 평하였다. 여담이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이 <쓰가루>에서 일본의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 하나였던 시가 나오야(志賀 直哉)를 정면으로 까버렸다.

일본의 어느 50대 작가(시가 나오야)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그다지 좋지 않아"라고 그만 무심결에 답해버렸다. 최근 그 작가의 과거 작품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도쿄의 독서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신'이라는 묘한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도 나타나서, 그 작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 독서인의 취미의 고상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이상한 풍조마저 생겨났다. 정작 그야말로 응원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폐가 된다는 식으로 그 작가는 아주 곤혹스러워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전부터 그 작가의 기묘한 권세를 보고 쓰가루 사람의 어리석은 마음에서 "천한 놈이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라고 혼자 흥분하여 순순히 그 풍조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에 그 작가의 작품을 대부분 다시 읽어보고 '훌륭해!'하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취미의 고상함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야비한 점이 이 작가의 장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려진 세상도 구두쇠 소시민이 별 의미 없이 거드름을 피우며 상황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때때로 '양심적'으로 반성을 하지만 그런 부분은 특히 진부하고 그런 불쾌감을 주는 반성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쪽이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학적' 미숙함에서 벗어나려고 해서 오히려 그것에 빠져버린 것 같은 좀스러움이 느껴졌다. (다자이 오사무. 서재곤 譯.『쓰가루 · 석별 · 옛날 이야기』. 문학동네, 2011 : P.60~61)

물론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소설의 신(小説の神様)'이라는 별명은 이미 당대에 붙여진 별명이었기 때문에 '이 어느 50대 작가'가 시가 나오야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시가 나오야는 이 사건 이후 다자이 오사무를 계속해서 혹평했으며, 가쿠슈인을 나오는 등 상류층 출신이었던 시가 나오야는 다자이 오사무가 뒤에 출간한 <사양>에 나오는 몰락귀족 출신 딸의 말투가 산골마을 여중을 나온 여자의 말투와 같다면서 혹평했다. 물론 다자이도 가만 있지 않고 문예잡지 등을 통해 시가 나오야를 계속해서 디스했다. 그런데 나이도 훨씬 어린데다[4] 당시 문단에서 그야말로 신적 존재였던 시가 나오야를 거스른다는 것은 당시 문단에서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다자이 오사무의 패기를 보여주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신세계의 파탄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시가 나오야는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한 얼마 뒤 다자이 오사무의 죽음에 관한 글을 써서 '다자이의 몸과 마음이 그렇게 쇠약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대화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행동이 어른스럽지 못했음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일본문학계에서의 위상은 다자이 오사무쪽이 훨씬 높다. 국내에서도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시가 나오야는 일본문학에 대해 깊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듣보잡 수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가 나오야의 소설이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 될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다자이 오사무쪽이 더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1947년 몰락한 화족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사양(斜陽)이 인기를 얻으며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사양족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당시에는 매우 성공한 소설이지만 <달려라 메로스>, <인간실격>에 비해 국내에 잘 알려지진 않았다.

1948년에는 다자이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자전적 소설인 인간실격과 <앵두(桜桃)>를 집필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다자이는 다마가와 상수로에서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투신자살했다. 다자이의 자살이 워낙 충격적이라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는데 애인과의 문제로 인해 그랬다는 설,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다운증후군이라 근심이 많아서 그랬다는 설 등이 횡행했지만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었다. 일단 대부분 게이샤였던 야마자키 도미에의 과거에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생애에 무려 네 번이나 자살미수를 펼친 끝에 끝내 자살에 이르렀던 탓에 무겁고 우울한 소설을 쓴 작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한 작품들도 여러 편 썼다. <오토기조우시(お伽草紙)>[5]가 대표적인 그런 경향의 작품으로 이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싫어했던 미시마 유키오"그럼 다자이가 쓴 <오토기조우시>를 부정해봐라"라는 지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6]


단편과 장편을 모두 잘 쓰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고 <만원(滿願)> 같은 불과 원고지 몇 매밖에 되지 않는 초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여학생>은 1인칭 시점으로 화자가 여성이라서 남성인데도 여성의 심리를 어찌 그리 잘 아냐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특정 여성의 일기를 바탕으로 써서 그런 것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7]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여고생에 대해서는 소름끼칠 만큼 세세하게 묘사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당시에 모에를 아는 작가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사카구치 안고, 이시카와 준과 더불어서 상당히 퇴폐적인 작풍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한 정신상태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동시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절대자를 강렬하게 요구한 작가라는 연구도 있다. 그래서인지 성경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駈込み訴え>[8]에서는 가롯 유다의 갈등을 소재로 하기도 했다.

그의 말년 작품인 인간실격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의 국민소설로 불리며 교과서에까지 수록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9]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인 빙점에서도 여주인공인 요오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 '사양'을 예로 들며 간접적으로 그녀의 추궁을 피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쓰에: 요오꼬, 오늘 어딜 갔었지?
요오꼬: 엄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읽어보셨어요?
나쓰에: 어딜 갔었는지 묻고 있잖아, 지금?
요오꼬: 그 책을 봤는데, 비밀이 생겼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10] 래요. 그럼 저도 이젠 어른이 된 거에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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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엔 당시 일본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나 지금이나 고등학교-대학 이름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내용도 비슷할 거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당시 고등학교는 오늘날 대학 교양수준(1학년~2학년), 당시 대학은 입학하자마자 대학 전공 수업이 진행되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나온 히로사키 고등학교가 종전 후 히로사키 대학으로 바뀐 것이 그 예. 오늘날의 도쿄대학도 원래 종전 전 도쿄제국대학 시절의 교양학부가 분리된 것이라고 하니 당시 일반적인 고등학생, 대학생의 학습수준을 알 만하다. 괜히 고등학교의 '고등'이 아니다
  • [2] 제적심사가 아니라 졸업시험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이는 틀린 말이다. 정확히는 졸업 쯤 있었던 구두시문이다.
  • [3] 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고 한다.
  • [4] 시가 나오야는 1883년생,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생).
  • [5] 한국에는 흔히 '옛날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된다. 도서출판b에서 펴낸 다자이 오사무 전집 제7권에 실렸으며, 전쟁 중에 방공호 속에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혹부리 영감님'이니 '우라시마 타로' 같은 일본의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을 읽어 주면서 머릿속에서는 그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비틀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구성이다.
  • [6] 미시마 유키오도 처음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허구의 방황-다스 게마이네>를 읽고 그를 높이 평가했고 <사양>도 대단히 높게 평가했지만 후에 이 소설에 나오는 몰락 화족의 언행이 비현실적이라고 다자이까로 돌변했다. 예를 들어 <사양>의 주인공은 기품 있는 귀족가문 출신인데 사용하는 말은 귀족의 일본어가 아니다. 자신이 귀족 출신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언제나 사전 자료조사에 철저한 미시마가 보기엔 어떻게 보였을까? 이후 다자이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면전에서 "당신의 문학은 싫습니다"라고 까버렸다. 미시마가 이 발언을 할 때는 당시 젊은 문인들이 나름대로 원로 취급받던 다자이에게 단체로 인사를 갔을 때였는데, 이 말을 들은 다자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미시마를 바라보다가 "그래도 역시 좋아하니깐 여기 온 거겠지"라고 얼버무렸다.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자이를 까는 데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다자이가 자살한 것을 두고 "그런 개같은 성격이 문제라서 그 인간은 자살한 거다.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면 자살했을 리가 없다"라고 까지 거의 폭언 수준의 발언을 쏟아냈다. 그런데 당신도 자살했잖수? 그러나 문학 평론가들이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미시마의 다자이 디스에 대해 "미시마의 내면에는 다자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더 격렬하게 깐 거다"라는 평을 하고 있다. 문제의 기계체조나 냉수마찰은 미시마가 직접 내뱉은 발언이나 본인도 자살했으니 할 말이 있겠나?
  • [7] 후대의 연구에 의하면 다자이 오사무가 단골 세탁소에 방문했는데 세탁소 주인의 딸이 쓴 일기가 펼쳐져 있었고 이걸 우연히 본 다자이는 해당 일기를 잠시 빌려달라고 한 뒤 소설을 발표. 해당 일기 원본을 입수한 평론가에 의하면 소설과 일기 내용이 거의 90% 이상 일치한다고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다자이의 이런 도작 내지는 모작 의혹이 한두 번도 아니라는 것.
  • [8] 국내에는 <직소>, <유다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9] 1990년대에 장편 애니화하기도 했지만 시망했다. 이후 모리미 토미히코가 리메이크를 한 바 있다.
  • [10] 요오꼬가 예로 든 부분은 정확히는 "다른 동물에게는 절대로 없고 사람만이 가진 것. 그건 바로 비밀이란거에요."라는 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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