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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

last modified: 2015-03-19 22:38:52 by Contributors

장년기의 초상화 무장 버전 초상화

人は城、人は石垣、人は堀。情けは味方、仇は敵なり
(사람은 성이자 성벽이며, 해자이니라. 인정은 아군이요, 원한은 적이다.)[1]


다케다 가문의 문장. 나눠진 마름모.[2]

武田信玄
1521~1573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일본에서는 이 시대 인물 중 센고쿠 3대 호걸이라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장이다. 우에스기 겐신과의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며, 손자병법에서 따온 풍림화산의 깃발을 들고 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져 있다.

Contents

1. 이름에 대해
2. 가문 상속과 판도 확장
3. 교토를 노리다
4. 죽음
5. 인물됨과 일화
6. 평가
6.1. 금광개발
6.2. 외교정책 실패
6.3. 냉혹성
6.4. 내정
6.5. 나약한 단결력
6.6. 신격화
7. 창작물에서
8. 초상화
9. 심볼

1. 이름에 대해

아명은 다케다 타로(武田太郞). 성인이 되어 당시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의 이름을 받아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가 된다. 훗날 신겐이 불가에(형식적으로) 입문하면서 법명을 신겐으로 하게되어, 다케다 신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4]

이런 연고로 정식 이름은 상당히 복잡한데, 다케다 다이젠다이부 하루노부(武田大膳大夫晴信) 또는 다케다 뉴도 신겐(武田入道信玄). 뉴도는 출가하여 법명을 얻은 무사에게 붙이는 별칭이고, 다이젠다이부는 관직명.

2. 가문 상속과 판도 확장

본래 아버지 노부토라와의 가독승계문제로 다투던 끝에 손을 써서 무혈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은 뒤, 아버지를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노부토라의 사위이자 신겐의 매형이 되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로 보내버린 후[5] 젊은 나이에 카이(현재의 야마나시현)의 다이묘의 자리에 올랐다. 신겐 측에서 보는 자료들에는 노부토라의 학정이나 악행 등 가혹한 행동에 반항한 신겐의 행동이었다고 하는 얘기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과대평가되었을 뿐 시나노/카이의 호족들에게 끌려다닌 신겐이 옹립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카이의 내외부를 평정하고 북부의 시나노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 스와[6], 운노 등 유력한 지방 호족들을 격파하고 카이, 시나노에 걸쳐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후의 장애물이었던 북시나노의 호족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에게 원군을 요청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 최대 호적수를 만나게 된다.

이후 둘은 카와나카지마(川中島)란 지역을 두고 다섯 차례에 걸쳐 북시나노의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대부분 지리한 대치로 직접적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으나 네 번째 전투에서는 쌍방의 생사를 걸고 크게 맞부딪쳐 서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보통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네번째 전투(하치만바라(八幡原) 전투라고도 한다.)를 일컫는다.

후호조씨의 호조 우지야스에게 패해 쫓긴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막부에 청을 넣어 우에스기 켄신에게[7] 우에스기 일족을 계승하게 하고 간토 간레이(關東管領) 직을 물려준다.[8]

이후 켄신에게 맹공을 받은 호죠 우지야스는 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오랜 맹우 신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신겐은 북시나노로 북상해서 켄신의 뒤를 치려고 한다. 물론 이는 호죠와 대치하고 있던 켄신에게 중요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켄신은 시나노에서 신겐 측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카이즈 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에치고를 출발하고, 양군은 카와나카지마의 하치만바라에서 대치하게 된다.

전투의 상세 경위는 카와나카지마 전투 참조.

이 전투의 결과로 다케다 신겐은 엄청난 손실과 함께 유력한 중신들을 다수 잃었으나 결국 목표했던 카와나카지마의 패권을 장악했으므로 일단은 승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나노 북쪽은 결국 우에스기로부터 빼앗지 못하고 후대인 카츠요리대에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밀어주는 조건으로 얻게 된다.[9]

이후 이마가와의 상경이 오다 노부나가과의 오케하자마 전투로 인해 좌절되면서 약화된 이마가와에 손을 뻗친 신겐은 이때다 하고 스루가를 손에 넣는데, 이로 인해 본래 국동맹 관계였던 호죠와도 적대하게 되었고 물론 오랜 맹우가 궁지에 처하자마자 배반해 뒷통수를 친 행동은 말할 것도 없이 저열한 배신행위였으므로 많은 다이묘들에게 다케다 가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평판까지 얻게 되지만, 대신 그가 염원하던 바다에 면한 대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10]

이 때 후계자였던 다케다 요시노부가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된 뒤 얼마 안 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자살했다고도 하고 병사했다고도 한다. 이를 이마가와와의 전통적 동맹관계 단절과 연관시켜, 아내가 이마가와 가문 출신이었던 요시노부가 이끄는 친 이마가와 파와 이마가와 공격을 주장하는 반 이마가와 파의 파벌다툼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11]

3. 교토를 노리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축적해온 힘을 바탕으로 다이묘들의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는 상경에 도전하였는데, 교토로 가는 진로를 가로막고 있으며 빠르게 거대세력으로 성장해 중앙에서 힘을 키워온 오다 노부나가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지선에 봉착하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군의 잔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신겐의 세력이 막강했기에 비록 노부나가의 동원 가능 병력이 신겐의 2배는 넘는 규모였지만, 절묘하게 구성된 포위망 때문에 그에 대해 섣불리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신겐이 없더라도 사방에 적을 두고 싸우는 중이었던 판에, 신겐이 그 허를 찌르고 들어온다면 얄짤없이 망하는 상태. 문제는 다케다 가는 오다 가와 나름 우호적이었고 결혼동맹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런 행동은 뒤통수를 치는 배신행위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12]

다케다 신겐은 형식상 동맹을 유지하던 노부나가에게 우호적인 서찰을 보내가며 도쿠가와의 영지 미카와를 침공했다. 물론 반쯤 오다의 가신이나 마찬가지였던 도쿠가와를 친 것은 오다를 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으로, 사실상의 전쟁 발발이었다. 오다는 주력이 다 발이 묶여 있어서 몇 천 안되는 지원군밖에 보낼 수 없었고, 곧이어 미카타가하라 전투가 발발한다. 간략한 전개는 다음과 같다.[13]

  • 1570년 음력 6월 8일. 아네가와 전투 발발.
    노부나가-도쿠가와는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물리쳤다. 노부나가는 아사이 군을 맡아 고전했으나 이에야스는 아사쿠라를 무난히 격퇴하고 노부나가를 도왔다. 이는 노부나가의 가신 비슷한 분위기로 전국에 받아들여지던 이에야스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세력 구도상으로 보자면, 교토를 틀어잡고 전국을 손에 쥐고자 한 오다-도쿠가와 군과 그에 반발해 쇼군을 중심으로 오다에 반기를 든 세력의 연합이라 할 수 있다.

  • 1572년 음력 10월 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해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상경하기 위해 고후를 출발. 전군 3만중 3천을 아키야마 노부토모에게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에, 본군은 후호죠 가의 원군 2천이 가세한 2만 2천으로 휘하 가신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아호구즈레 고개로부터 도토미로 공격해 들어감.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5천 병력은 미카와(도쿠가와 영지) 공격. 현 시점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아사쿠라-아사이 동맹군, 아시카가 쇼군과 그 세력, 여기저기에서 지독하게 괴롭히는 잇코 종도에 포위당해 손발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신겐의 대군 강림.[14]

  • 1572년 음력 10월 13일.
    신겐이 이끄는 본대가 다다라이 성, 아마카타 성, 이치노야 성, 이이다 성, 가쿠와 성, 무사카 성 등 도쿠가와의 성을 하루만에 접수한다.

  • 다케다 신겐이 교토를 침공하기 위해선 미카와, 오와리를 경유해야 했고,[15] 따라서 도쿠가와 축이 다케다와의 일전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케다의 편에 붙는 것 뿐이었다. 규모상으로도 약 세 배 가까이 차이나는 다케다 신겐은 도쿠가와가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도쿠가와는 오다에 신의를 지켰다.

  • 1572년 음력 10월 14일. 히토코토자카 전투 발발.
    도토미에서 도쿠가와군과 신겐군의 전투 발발. 도쿠가와 군의 패주.

  • 1572년 음력 11월까지,
    신겐 휘하의 장수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도쿠가와군의 영지 카키모토 성, 이다이라 성 접수하고 신겐의 본대와 합류. 아키야마 노부토모군은 음력 11월까지 히가시 미노의 요충지인 이와무라 성을 함락시킴. 이때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이시야마 혼간지의 잇코 종도 등과 대립하고 있었기에 도쿠가와에게 겨우 3천의 원군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 1572년 음력 12월 19일. 도쿠가와군 영지 도토미의 요충지인 후타마타 성 함락.
    도쿠가와는 하마마쓰에서 농성을 생각하지만, 다케다군의 움직임을 보고 병사 1만 1천을 이끌고 출진.

  • 1572년 음력 12월 22일. 미카타가하라 전투 발발.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군과 다케다군의 회전이 발발. 애초에 숫자로도 전술적으로도 이길 가망이 없었는데도 이에야스는 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전을 명하고...결과는 도쿠가와 군 궤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지에 똥을 지리며 도주하고,[16] 신겐 군 압도적 승리로 피해 전무. 다케다군이 약 200인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도쿠가와 군은 2천의 사망자를 내고 오다 측 지원군은 사령관까지 사망. 이 전투로 사방을 적에게 포위당해 옴짝달싹 못하는 오다 군의 뒤통수를 신겐이 후려치는 것을 막을 자는 없어진 상태.

...여기까진 그야말로 오다-도쿠가와군의 사망 플래그였다.

4. 죽음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을 격파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겐 자신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상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오다-도쿠가와 연합의 붕괴가 눈 앞에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오다 노부나가의 운빨도 참으로 대단하다. 역시 건강이 보배. 이 때 노부나가는 한동안 잠을 못 이루다가[17] 신겐의 죽음을 듣고 3일 밤낮을 잠만 잤다고 한다. 그 정도로 노부나가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소리.[18]

사세구로는 다음의 시를 남기고 있다.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 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
"대부분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도다."

근데 이 사세구의 해석은 일본에서도 여러 가지로 갈리고 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13: 천도>에서는 저 사세구를 "뒤는 남은 자들에게 맡긴다. 꾸미지 않아도 빛나는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라고 풀이하고 있다.

워낙 중요한 타이밍의 미스테리한 죽음이었던 탓에 여러 소문과 전설, 학설이 분분한데, 여러 픽션으로 가장 일반에 잘 알려진 것이 "진군 중 노다 성에서 도쿠가와의 병사에게 저격당했다"라는 것이지만 당시의 조총은 그렇게 먼 거리에서의 저격이 불가능했다. 가장 신뢰성 높은 학설은 신겐이 애초에 결핵에 걸려 건강이 극히 나쁜 상황에서 출전을 강행했다가 도중에 숨졌다는 것인데, 이것도 완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너무나 아쉽게 급사한 신겐의 사인은 현재에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심지어는 근본주의 성격 때문에 자주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예수회를 범인으로 지목해, 그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인 노부나가에게 교세를 불리려는 목적으로 접근하여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한 독약을 이용해 밀정을 시켜 신겐을 독살했다는 음모론스런 주장까지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신겐의 숙적인 켄신도 우메보시를 먹다가 죽었다는 일반적인 설명과는 달리 노부나가에 의해 독살된거라고 한다. 이유인즉 예수회가 대부분 독실한 불교 신자들인 노부나가의 적들을 제거해주고 노부나가를 통해 기독교를 퍼뜨리려 했다는 설. 사실 신겐이나 겐신이나 죽은 타이밍이 매우 절묘해서 이 주장은 그럴듯 해보이지만 음모론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노부나가의 밀정이 일본 전국 시대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신겐과 켄신에게 독을 먹이는 게 가능했을까? (덤으로 예수회는 혼노지의 변에도 배후로 언급되곤 하는데, 물론 근거 없는 음모론.)

5. 인물됨과 일화

평소 손자병법에 심취하여 풍림화산의 기를 전장에 나설 때 항상 내걸었다. 정확히는『손자』「군쟁」편에 나오는 구절로 "기질여풍, 기서여림, 침략여화, 부동여산(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이다. '신속함이 바람과 같고, 고요함이 숲과 같고, 쳐들어감이 불과 같고, 움직이지 않음이 산과 같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악귀 미노 바바 노부후사, 코사카 마사노부등 네 명의 장수를 다케다 4명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장실을 '산(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 가신이 "주군께서는 왜 뒷간을 산이라고 부르십니까?"라고 묻자 신겐은 "산에는 항상 초목(草木)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어로 풀과 나무를 뜻하는 '초목(草木)'과 '악취(臭き)'는 둘 다 쿠사키(くさき)라고 발음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19]

카이의 병사들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 힘은 오다 군의 네 다섯배에 달한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에 맞물려 카이의 지형 자체가 방어하기에 대단히 유리한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신겐은 생전 영토확장과 공격전으로 일관하는데, "사람이 성이고 성벽이고 해자다"라며 카이 내에 방어용 성채를 쌓지 않았던 데에는 그러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그러나 그 구심점에 있었던 카리스마적인 다케다 신겐의 죽음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카츠요리의 외교/정치적 실책이 겹치면서 부하 호족 다이묘들이 차례차례 이탈해버리고, 신겐의 죽음으로 재빨리 주변 적들을 정리하고 힘을 키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신겐 사후 다케다 가는 멸망하게 되었다.


사타케 요시시게와 누가 미나모토노 신라 사부로 요시미츠[21]의 적류인지 키배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텐모쿠산 전투로 다케다가가 멸망하면서 오다가에 의해 다케다 일문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래도 가문이 단절되진 않았다. 차남 운노 노부치카 가계가 현재 가이 다케다가 종가로 인정받고 있다. 노부치카는 다케다가 멸망때 자살했지만 그의 아들인 겐료와 노부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후에 오쿠보 나카치카 사건에 연루되어 먼섬으로 유배된다. 이후 유배가 풀렸을 때 겐료는 사망하고 20대의 노부마사는 70대 할아버지가 된 상태였다. 이 노부마사는 결혼하여 아들 노부오키를 얻었으며 후에 다이쇼덴노때 노부치카 가계를 가이 다케다가 종가로 인정하였다. 그외에 7남 다케다 노부키요는 누나의 남편인 우에스기 카게가츠에게 도망쳐서 살아남아 요네자와 다케다가를 이루었다.[22]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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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시 현 코후 시에 있는 동상. 코후 역에서 내리면 볼 수 있다. 코후 시는 옛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 가면 다케다 가문의 흔적이 시 곳곳에 남아 있다. 센다이가 다테 마사무네를 마스코트로 활용하는 것처럼, 아예 이 지역에서는 다케다가의 슈퍼스타나 다름없는 신겐을 지역의 '마스코트'로 활용하는 듯. [23]

야마나시 현을 넘어서 일본의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전국시대 다이묘이고 각종 만화나 게임, 소설 등에서는 강력한 포스를 지닌 거물로 등장하지만 실상을 보면 결국 죽을 때까지 지방영주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이는 다케다가 영주가 지방 호족들간의 연합맹주 격에 불과했던 탓도 있다.

6.1. 금광개발

원래부터 가이지방에는 금광이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는 기술부족으로 금을 얻을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은 외국에서 선진기술을 배워온 기술자를 거금을 주고 고용하여 금광을 개발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얻은 부로 다케다 가문을 크게 발전시켰고 이것은 후세에 다케다 신겐을 뛰어난 내정가라고 보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케다가문이 금광을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광의 개발을 행한 기술자들의 권리보호나 거래등을 통하여 금을 얻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어쨌거나 일본내에서 처음으로 금화를 유통시킨 것은 이 다케다 신겐이며 신겐은 이 금을 무기로 사용하였다.

6.2. 외교정책 실패

한 편으로 신겐은 생애에 걸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으며 그 결과 신겐이 죽을 무렵에는 주변에 있는 다이묘들이 온통 적이라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모처럼 개발해놓은 광산에서 채굴한 금도 전쟁에 사용되어 다케다가의 재정상태는 악화되어가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카츠요리가 호죠를 배신하는 원인 중에 하나가 된다.

다케다가의 주변에는 이마가와, 호죠, 우에스기가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 이들은 서로 동맹을 맺거나 성을 뺏고 빼앗겼다. 그러나 호죠측이 우에스기를 높게 산 것에 비해서 다케다가를 깎아내린 기록이나 우에스기 켄신이 다케다 신겐을 몹시 혐오했다는 기록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케다 신겐은 생전에 깨트린 약속[24]이 많았고 따라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여겨졌다.

큰 배신(=삽질)만 해도 두가지인데, 첫째로 호죠/이마가와 세력과 삼국동맹을 맺어 놓고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비명에 죽자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이마가와를 공격했고, 그 결과 호죠까지도 다케다의 배신행각을 혐오해 적으로 돌변해서 순식간에 안정적이던 외교가 파탄나 주위가 전부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상황이 되었고, 둘째로 오다 노부나가의 첫째 아들에게 딸을 시집보내기로 하고 나서, 호죠와 우에스기라는 적이 있는 상황인데도 굳이 그 동맹인 도쿠가와를 공격하고 오다 노부나가 포위 음모를 꾸며 노부나가를 적으로 돌려 병가에서 가장 피하는 쌍방전쟁을 시작했고, 결국 노부나가에 의해 가문이 멸망하는 원인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즉, 굳이 악행이나 배신행위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행위가 독이 되는 상황에서 굳이 수차례나 근시안적인 배신행각을 벌여 파멸을 자초한 것.

이 때문에 외교에서의 신용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카츠요리 대에 우에스기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이 점을 지적받기도 했으며 또한 뒷날 카츠요리대에 오다군의 공격에 대해 호죠측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호죠 우지마사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 우에스기 켄신 사후의 가문 내 권력투쟁)[25]에서 다케다가문이 신의없게 행동했던 옛일을 끄집어내어 도와주질 않았다. 우에스기 가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카게카츠는 다케다 가와 화친했고 다케다 가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면서도 다케다 가를 적극적으로 돕거나 오다와 전면전쟁을 벌이는 데는 망설였고, 그 동안 카이에서는 다케다 사냥이 벌어져 다케다 가의 유신이나 피붙이들은 싹쓸이를 당하고 말았다.

6.3. 냉혹성

먼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인 노부토라를 내치고 다케다 가의 두령이 되었는데, 다케다가의 기록에서는 신겐이 아버지 노부토라를 추방한 원인을 노부토라의 학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러 기록들을 대조해서 살펴보면 그 근거가 부족하다.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노부토라 추방이 신겐의 독단이 아니라 가신단의 주도나 동의 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원인에 대해서는 노부토라의 학정, 노부토라가 장남인 신겐을 미워하고 차남을 편애했다는 점등이 추정되지만 노부토라는 신겐 측에서 남긴 기록만큼 문제가 있는 정치를 했던 것은 아니고 호전성면에 있어서는 신겐도 노부토라에 뒤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추방했다고는해도 신겐은 노부토라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마가와측에 은거료를 지불하고 노부토라의 신병을 맡겼다.[26] 어쨌거나 노부토라는 이마가와측의 보살핌을 받으며 측실까지 불러들였고 아이까지 얻었고, 이로 미루어 보아 꽤 괜찮은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신겐이 아주 친족을 죽여없앤 일부 다이묘보다는 그나마 괜찮은 인간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남인 요시노부를 자신의 암살을 꾀했다는 이유로 은폐시키고 죽게 만든 것도 유명한데, 이마가와의 몰락 이후 가문이 친이마가와와 반이마가와로 나뉘어지자, 이마가와의 뒤통수를 치려던 신겐이 친이마가와파의 필두[27]였던 요시노부를 숙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진상은 어쨌거나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라면 인간성이 의심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 듯.

여담이지만 신겐을 존경했다던 이에야스도 아버지 히로타다에게 버림받고, 유우키 히데야스라든가 마츠다이라 다다테루 같은 아들들과 비슷한 갈등을 겪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6.4. 내정

원래 카이지방은 전답이 작아서 부유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따라서 신겐은 금광개발을 하여 얻은 수익으로 치수사업을 벌여서 전답을 늘렸다. 그러나 사실 곡식의 산출량이 국력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치수사업자체는 다른 다이묘들도 모두 다 중히 여겼으니 이것을 신겐이 특히 혜안이 있어서 그랬다고 받아들이기는 힘들다.[28]

또한 칠공삼민이 기본이던 전국시대에 오공오민을[29] 유지했지만 이것은 선정을 베풀었다기보다는 잦은 전투로 전장에 끌려가는 등의 원인으로 인한 농민봉기를 막으려는 의도가 컸다고 봐야한다. 특히 금광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카이지방의 삶이 다른 곳보다 특히 더 부유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6.5. 나약한 단결력

다케다 가는 애초에 후다이[30] 가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일반적인 다이묘 가문과 다른 집단이어서 시나노나 카이의 호족 집단의 연합체적인 성격이 강했고, 신겐 대에 시나노로 급격히 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시스템이 정비되지 못한 채 남았다.

이에 따라서 다케다가문의 가신단은 다케다 가를 절대적인 주가로 모시고 대대로 절대복종하는 봉건주의적 집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케다 신겐이라는 절대적 카리스마를 지닌 수장을 가진 여러 가신 집단의 협력체제에 가까웠고, 신겐 역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눈치를 볼 때가 있었고 신겐이 죽자마자 가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신겐 개인의 통제 하에 있었던 다케다 가신단은 다케다 가를 배신하거나 이탈하며 산산이 와해된다.

아버지인 노부토라 추방의 건만 해도 가신단의 등살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그러나 이것은 신겐이나 다케다가문만의 문제점은 아니었고 급격한 세력확장을 한 다른 모든 다이묘가문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

6.6. 신격화

이마가와 가의 몰락 이후 이마가와의 영토를 나누어 병탄한 도쿠가와 가와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대게 되어 직접적인 적국으로 돌변하였다. 따라서 도쿠가와 가문과 충돌한 일이 많았으며, 도쿠가와 가의 세력이 미미했던 신겐 생전에는 대부분의 경우 다케다가가 승리를 거두었고 이에야스 본인도 목숨까지 잃을 뻔한 적이 있다.

이후 이에야스는 신겐의 군제와 병볍을 철저히 연구하거나 모방, 칭송하였으며 후세에 에도 막부가 성립되면서 이에야스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자 생전에 이에야스를 압박한 신겐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미 죽어서 막부에 위협이 되는 세력도 아닌 데다 다케다 가의 유신이 막부 근처의 지방에 봉토를 얻을 만큼[31] 막부에서 나름의 입지가 있었기도 한데다, 신인 이에야스를 이겼으니 신겐도 신이라는 식의 논리가 아니면 신격인 이에야스가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이후 에도 막부의 민간 무용담 등에서 신겐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막부의 묵인 하에 부풀려져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신겐의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현대의 NHK대하 드라마등에서도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2ch 등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올리기 위하여 전국 과대사천왕으로 신겐을 깎아내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겐이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의견은 신겐이 한참 인기 있던 에도시대부터 존재했다. 후에 메이지시대무렵 각종 봉건영주나 무사들의 무용담 등이 풍속화와 더불어 크게 유행하면서 과거의 장수들을 지나치게 미화하게 된 것이 그러한 문제의 원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7. 창작물에서

8. 초상화


흔히 신겐의 초상화로 알려진 "絹本著色武田信玄像"은 신겐을 대표하는 초상화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신겐이 아닌 노토의 다이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의 초상화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겐의 초상화가 맞으며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초상화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에 의하면 아사쿠라가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최고 화가로 명성을 떨친 세가와 토하쿠[32]에게 그리게 했다고 한다면 소세력에 속하는 노토의 다이묘를 그린 그림일 확률은 낮다는 것.

그림을 보면 좀 기묘한 느낌이 있다. 일반적으로 초상화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게 보통이나, 이 그림은 신겐이라고 알려진 인물 오른편에 매가 신겐을 바라보는듯한 것을 그려놓았다. 학자들은 이 초상화가 만약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의뢰로 그려진 것이라면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라고 본다. 신겐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있는 매는 아사쿠라 요시카게 본인을 상징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아사쿠라 가문은 무로마치 시대에 교토에 매를 공납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때문에 아사쿠라 가문은 매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겐의 옷자락에는 작은 주머니가 달려있는데, 이것은 가시노 혼간지를 의미하고, 신겐이 차고 있는 칼을 자세히보면 신겐 가문의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이 들어있다. 그 문장은 바로 당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의미한다는 것.

이렇게 본다면 신겐을 중심으로 아사쿠라-혼간지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 동맹은 바로 오다 노부나가를 포위하는 동맹이라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매우 그럴듯한 추측이기는 하나 신겐이라고 전해지는 다른 초상화들과 얼굴이 달라서 여전히 논란거리중에 있다. 신겐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전해지는데, 얼굴이 험악하게 생긴 것, 매우 단정한 것, 소년 시절의 것 등 제각기 너무 달라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9. 심볼

다케다 신겐의 심볼이라 하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풍림화산"으로 유명한 疾如風, 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의 글귀다. 손자 군쟁편의 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군사를 움직일 때는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이, 그 조용하기가 숲 같이, 거세게 번지는 것이 불 같이, 움직이지 않기를 산 같이 하라)는 말에서 딴 것.

두 번째 심볼은 스와 홋쇼의 투구(諏訪法性兜)인데, 이름은 신겐에 관한 에도 시대의 기록물인 고요군칸에서 왔다. 동방 프로젝트에도 나오는 스와 대사의 모리야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듯. 에도 시대의 군담에 등장하며 일반에도 신겐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진품 라이벌인 겐신이 두건을 쓴 승려 차림에 갑옷을 입은 특이한 이미지로 일반에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을 한 것은 후반생의 불과 몇 년 안되는 시간뿐인 것과 달리[33], 이쪽은 실존하는 증거물이 있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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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케다 신겐을 대표하는 명언이다. 제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신겐의 근거지였던 츠즈지가사키야카타가 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세사람들은 신겐이 대단히 인망이 있었고, 대하드라마에서도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바로 뒤에 요가이야마성이 있었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바로 숨을 수 있었다. 더구나 신겐은 생전에 아버지와 아들을 숙청한 전력이 있고 동맹국과의 약속을 자주 깨트렸기 때문에 인망도 별로 없었고, 외교적으로도 신용이 전혀 없었다.
  • [2] 문장의 유래는 다케다 가문의 가보인 '다테나시'라는 갑옷의 무늬다. 다테나시는 1100년대의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갑옷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버지인 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입었던 갑옷으로 알려져 있다.
  • [3] 이런 경우는 당시 무장들에게 흔한 경우였다. 나중에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보험같은 성격이 강했던 것이지, 정말로 한국이나 중국의 출가승처럼 불가에 귀의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한자식 음을 가진 무사의 이름은 이런 케이스. 우에스기 켄신, 구로다 조스이 등이 좋은 예다.
  • [4] 신겐이 형식적으로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케다 가문의 군기에서는 가신들이 설쳐대서 괴로워하던 신겐이 하도 일이 안풀려서 점을 쳤더니 머리를 깎으셈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신겐은 그래서 머리를 깎고 불가에 입문한뒤에 신겐이라는 법명을 얻은후에 잘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 [5] 이 사건 이후로 교양이 높기로 유명한 신겐도 더 이상 <논어>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효도를 워낙 강조하기 때문에...
  • [6] 특히 스와씨의 스와 요리시게는 신겐의 4남이자 후계자인 카츠요리를 낳은 코이히메(湖衣姬)의 아버지였다.
  • [7] 켄신은 여러 사정으로 평생 이름이 자주 바뀐 인물인데, 나가오 카게토라에서 이 당시 우에스기 성을 계승하고 곧이어 우에스기 마사토라로 이름을 바꾼다. 전투 당시의 이름은 우에스기 마사토라
  • [8] 간레이 직은 당시 막부의 권위 실추로 유명무실한 직함이었으나, 여전히 한 지방을 통솔하는 슈고 다이묘들 여럿을 통솔하는 권위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일개 슈고에 불과했던 다케다 신겐은 라이벌이 자기 위에 서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죽을 때까지 켄신을 나가오 성으로 불렀다고 한다.
  • [9] 그러나, 유력한 중신들의 죽음이 다케다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해석도 있다.
  • [10] 바다와 해운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특히 카이에는 소금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역봉쇄를 당해 괴로워했던 사건도 있었을 정도. 이 때 숙적 신겐에게 소금을 비싼 값에 실컷 팔아치워 이득을 챙긴공급해준 켄신의 이야기가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라는 고사로 자주 인용될 정도. 무사도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일화다.
  • [11] 이 때 요시노부의 스승이자 중신이던 오부 토라마사도 반역의혹을 받고 할복당했는데 이 오부의 동생이 바로 반역자인 형 때문에 성을 바꾼 다케다의 명신 야마가타 마사카게이다.
  • [12] 이 때 노부나가의 아들과 약혼했던 신겐의 딸 오마츠는 임을 못 잊어(...) 가문을 이탈해서 오다 가를 찾아가다가 길에서 병사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케다 가문의 배신을 다케다 가문의 씨말리기로 되돌려주고 있던 노부나가의 아들은 이를 불쌍하게 여겨서 몰래 시신을 정중히 묻어주고 명복을 빌었다고.
  • [13]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 전투인 아네가와 전투를 포함해 설명함.
  • [14] 단 이는 부풀린 자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겐의 총병력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만 5천 정도라고 평가된다. 반면 당시 오다의 병력은 사방에 적을 두어서 신겐을 막으러 갈 병력이 없는 게 문제였지, 그 규모는 최소한 4~6만 가량이었다.
  • [15] 미노를 거치는 길이 있긴 한데, 거기엔 오다 노부나가의 본성인 기후 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 [16]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똥을 지리고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며 앉아 있는 자신의 우거지상을 기념으로 그려 남긴다. 이 우거지상 그림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 [17] 이 무렵은 노부나가 일생일대의 위기상황이었다. 소위 '노부나가 포위망'에 갇혀서 아자이, 아사쿠라, 혼간지 등 숱한 다이묘들의 다굴집중공격을 받던 상황이었다.
  • [18] 아예 기나이(畿内)방면을 포기하고 기후(岐阜)로 회군할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였다.
  • [19] 무쌍 오로치 2에서 다케다 신겐이 손견과의 회화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 [20] 본래 스와 출신의 첩에게서 얻은 4번째 아들이고 적남 다케다 요시노부 외에 카츠요리 위로 자식이 둘 더 있었으나, 둘째는 장님이었고 셋째는 요절했기에 카츠요리가 적통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 [21] 다케다 가문이 대대로 받들어 모시는 가문의 시조로, 겐지 중에서는 세이와 겐지 파에 속한다.
  • [22] 과거 7남 노부키요를 종가로 기술되기도 했는데, 아니다.
  • [23] 대부분의 유명한 지방도시가 그 영주를 일종의 마스코트로써 활용한다.
  • [24] 스와, 이마가와, 오다, 도쿠가와, 호죠 등
  • [25] 여색을 멀리해 아들이 없었던 켄신의 두 양자인 카게카츠와 카게토라가 켄신이 후계자를 분명히 정하지 않고 급사하자 가문의 두령 자리를 두고 대립한 사건. 카게토라는 호죠 우지야스의 아들로 켄신의 양자가 된 인물이었다. 당시 다케다와 호조는 동맹관계였기에 다케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카게토라가 우세한 듯 했으나 재정이 궁했던 카츠요리는 카게카츠가 제시한 돈을 받고 참가하지 않았다. 결국 카케가츠가 승리하고 카게토라는 자결했다.
  • [26] 그러나 이마가와측에서 은거료를 독촉하는 문서가 남은 것을 보면 꼬박꼬박 지불했던 것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 [27] 요시노부의 아내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이다.
  • [28] 이 당시 신겐이 쌓은 신겐 둑이 아직도 고후 시에 남아있다.
  • [29] 칠공삼민은 농부가 농업 수확량의 삼할을 가지고 칠할은 세금으로 내는 걸 말한다. 오공오민은 반반.
  • [30] 한 가문을 대대로 섬기는 종신 가신단.
  • [31] 다케다 가 유신들에게는 주로 칸사이에서 칸토로 통하는 막부의 대문격 지방을 경비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상당한 신뢰의 증거인 셈.
  • [32] 일본 역사상에서 최고로 꼽히는 화가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그의 그림 두개가 일본 국보로 지정될 정도.
  • [33] 출가한 뒤 몇 년 안돼서 죽었다. 생의 대부분은 다른 이름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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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19 22: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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