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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

last modified: 2015-09-06 22:31:35 by Contributors


원래 애꾸눈이지만 두 눈이 멀쩡한 초상화. 이유는 아래 '생애'문단에 서술한다.


미야기 현 센다이에 있는 다테 마사무네 동상.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취미 및 성격
4. 전술가로서의 마사무네
5.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
6. 기타 사항
7. 창작물에서의 다테 마사무네


1. 개요

伊達政宗. 일본 전국시대~도쿠가와 막부 때의 무장. 1567~1636.

오슈 후지와라의 후예로 다테 가 17대 당주였으며, 헤이안 아명은 본텐마루(梵天丸).[1] 통칭 토지로[2]라 불렸다. 유골을 통해 분석한 결과 신장 160cm, 혈액형은 B형이었다고 한다.

'마사무네'라는 이름은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가 다테 가 중흥의 선조라고 불렸던 9대 당주 다이젠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이 때문에 간혹 9대와 구별하기 위해 '다테 토지로 마사무네'로 부르기도 하지만, 17대인 토지로 마사무네가 워낙 대중적으로 보나 여러 면에서나 지명도가 높다 보니 특별한 언급 없이 다테 마사무네라고 하면 대개 17대를 말한다.

2. 생애

어려서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한쪽 눈을 잃었다. 그 몰골이 추하다고 하여 친모와 동생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살해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덕분에 하나뿐인 눈은 다테 마사무네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는데, 이에 대한 컴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반드시 두 눈을 모두 멀쩡하게 그리도록 지시했다고 한다[3]. 외눈박이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초상화나 목상 등에선 양쪽 눈이 모두 멀쩡한[4] 것은 사실 이 때문으로, 애꾸눈으로 그려진 초상화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ɔ) 土佐光貞 from

애꾸눈으로 그려진 몇 안 되는 초상화 중 하나. 또한 마츠시마에 있는 즈이간지(서암사) 경내에는 목제로 된 마사무네 상(像)이 있는데, 이 목상도 애꾸눈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사무네의 생전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이 즈이간지의 목상은 마사무네의 17번째 기일을 앞두고 정실 메고히메의 명으로 만들어졌는데, 남편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메고히메의 뜻이 반영되어 애꾸눈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물론 일가 모두에게서 미움을 산 것은 아니었다. 친부인 다테 테루무네는 다테 마사무네의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에[5] 미워하기는커녕 그를 보호하고 교육하는데 힘써 스승으로 코사이 소이츠를 붙이고 카타쿠라 코쥬로를 심복으로 붙여 줬으며, 아예 일찌감치 가문까지 물려준다.

가문을 물려받은 다음 해, 회견을 마친 니혼마츠 요시츠구가 아버지인 데루무네를 납치하여 인질로 내세웠으나 마사무네는 이를 무시하고 아버지와 요시츠구를 철포대로 일제 사격하여 죽인다. 일설에는 데루무네가 자기는 상관하지 말고 함께 사살하라고 소리 쳤다고도 하지만, 아무래도 사실 여부 판별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 시기 즈음에 얻은 별명이 바로 그 유명한 독안룡이다. [6]

결국 상술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오슈 지방의 패권을 건 일대 전쟁에 벌어지는데,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어린 다테 마사무네가 승리하며 오슈 지방을 통일하기 이른다.[7] 오슈지방은 예로부터 군마의 산출지였기 때문에 매우 부유했고 유력 다이묘 중에서 다테 마사무네는 젊은 편이었기 때문에 일본 통일은 어렵더라도 대대적인 세력 확장은 충분히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도 남겨져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마사무네가 아니라 테루무네의 이야기라는 설도 있으며 드라마 천지인에서는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 말을 하면서 마사무네를 놀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10년 전엔 호죠 가, 우에스기 가, 오다 가 등이 건재했기 때문에 설령 10년 전에 태어났더라도 다테 가가 일본 통일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테 마사무네의 허세력을 보여주는 대목.

이후 테루무네의 시절부터 동맹 관계였던 호죠 가 측은 도요토미에 대한 철저 항전의 방침을 세우지만, 호죠 가와 다테 가의 전력을 합치더라도 도요토미 세력에 대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터라 미래는 매우 암울했다. 이에 호죠 가에 대한 의리와 다테 가의 존속 사이에서 장시간 고민하던 마사무네는 도요토미의 계속된 재촉에 굴복하여 결국 호죠를 버리고 도요토미 밑으로 들어간다. 그 직후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단이 늦은 것에 압력을 넣었으나 언변에 능했던 마사무네는 히데요시가 다도에 흥미가 있었다는 점을 이용하여[8] 자신 역시 다도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어필하여 무사히 빠져나왔으며, 이후 히데요시는 다테 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오슈 지방의 다이묘로 군림하는 것을 허락했다. 반면 다테 측의 원군을 기다리던 호죠는 도요토미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투항하는데, 이 호죠 가를 두고 히데요시는 영지 대부분을 몰수하나 그래도 1만석을 허락하여 다이묘의 이름만은 지킬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상술한 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모친에게 독살당할 뻔 했다는 일화도 있으나 이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니 호사가들이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란 의견도 있다.[9] 그럼에도 사극에서는 마사무네의 삐뚤어진 가족 관계가 클라이막스를 맞이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모친의 독살 시도설은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일어난 농민 반란인 잇키의 배후에 마사무네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니혼마츠 사건 당시 순사했던 한 부하의 아들이 자신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마사무네가 카사이 오오사키 잇키 선동을 했다는 상소문과 그 증거인 마사무네의 편지를 올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히데요시는 문책을 위해 마사무네를 수도로 호출한다. 이에 마사무네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화려하게 죽자'는 의미로 수의인 하얀 옷을 입고, 금박을 칠한 십자가를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10] 사실 이것은 마사무네가 정말로 죽을 생각이 있었다기보다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청문회장에서 마사무네는 자신은 편지를 쓸 때 바늘로 미세하게 구멍을 뚫어 그것을 '자신만의 숨겨진 사인'으로 삼는다고 주장했는데 증거로 올라온 편지를 살펴 보니 정말로 바늘 구멍이 있었고, 이를 본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백을 믿고, 전봉[11]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그쳤다고 한다. 물론 정말로 히데요시가 마사무네의 결백을 믿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실상 마사무네가 잇키 사건에 관여한 것은 거의 확실했으나, 간신히 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들려는 시점에서 마사무네 같은 거물 다이묘를 함부로 제거하자니 너무 꺼림칙하고, 다른 다이묘들에게도 자신의 관록과 너그러움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매우 너그러운 처분을 내렸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그 뒤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조선을 치러 갔다. 당시 히데요시는 1,500명 정도를 준비하라고 일러뒀지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적극성을 어필하기 위해 그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을 동원하고, 도요토미 측의 식량 원조까지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 때 출정하는 다테 가의 장비가 너무 훌륭해서 일본어로 멋쟁이를 뜻하는 '다테모노'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정작 전장에 나갔을 때는 병량이 부족하고 전선은 계속 고착되는 통에 별 의욕도 없이 대충 싸웠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였던 강항이 쓴 간양록에서는 '음흉하고 흉폭한 왜장으로 형과 아들을 죽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친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것이 잘못 전해진 듯 하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기존까지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던 양자 히데츠구와 그 파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문제는 마사무네 역시 히데츠구 쪽과 상당한 교우 관계를 가졌다는 것인데, 본격적인 숙청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빼면서 마사무네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편에 서는 대가로 100만석을 약속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뒤 약속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지막에는 아예 약속을 백지화 시켰다.[12] 본인은 이 일을 못내 아쉬워 했고, 결국 평생 개간 사업에 열중한 끝에 말년에는 100만석 영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13] 인간 승리라고 해야 할지 안습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건 에도 막부 설립 이후로 마사무네의 야망은 종지부를 찍게 되고, 막부의 유력한 다이묘로 남게 된다.

이에야스 사후에는 막부의 원로로 대접받았으며, 히데타다는 죽게 되자 임종의 자리에 아들 이에미츠와 마사무네를 불러 놓고 이에미츠에게 마사무네를 자신(아버지)처럼 여기라고 당부했을 정도. 이에미츠가 "나는 나면서부터 쇼군이다"라고 선언하고 절대적인 쇼군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 것도 마사무네의 조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에미츠가 모든 다이묘는 이제 자신의 가신이라고 선언하자, 맨 먼저 이에미츠에게 "이에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이 마사무네에게 토벌을 명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다만 이제까지 해 온 짓이 있었기 때문인지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아이즈번의 와카마츠성(츠루가성이라고도 불린다)을 마사무네를 감시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개축하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이라고 해야 될듯.

1636년에 74세로 사망했다. 지세이는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속세의 어둠을 비추고 가네"

"曇りなき 心の月を 先だてて 浮世の闇を 照してぞ行く"

서장자인 히데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친해서 다테 종가를 잇지 못하고 대신 이요 우와지마 번주가 된다.[14] 다테 종가는 차남인 타다무네가 잇는다.

3. 취미 및 성격

어려서부터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서양인 첩들을 좋아했다고 한다.[15] 이후엔 직접 서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에스파냐인들의 도움으로 유럽의 갤리온을 본따 "산 후안 바우티스타"라는 함명을 가진 서양식 배를 만든 뒤 로마 교황청으로 사절단을 보내 무역 허가서까지 얻어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령을 내린 탓에 이 무역 허가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덤으로, 이 때 유럽에 보낸 사절단을 이끌던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교황 바오로 5세 및 여러 귀족과 왕을 알현했을 뿐만 아니라, 루벤스를 만나 멋진 초상도 남겼다. 자세한 것은 하세쿠라 쓰네나가 항목 참조.

트레이드마크는 초생달 모양의 장식이 붙은 투구로 이곳저곳에서 곧잘 오마쥬 등으로 사용된다. 센다이 시에 위치한 미야기 스타디움 역시 이런 마사무네의 투구 장식을 본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다만, 미야기 스타디움은 미적 측면만 지나치게 우선한 나머지 일본에서도 스포츠 관전하기 어려운 구장이 되어 버렸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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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투구 말고도 멋을 잘 부렸는지, 당시엔 멋쟁이 남자를 두고 '다테男'이라 부르는 게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테가 진짜 멋져서 그리 부른 것이 아니라 막부 등으로 행차할 때마다 길목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돈을 뿌려대며 환심을 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겉치레나 허세를 뜻하는 伊達(다테)의 어원이 됐다는 설도 있다. 마사무네는 평생 상대를 기겁하게 하는 허풍과 과격한 언동 및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계략 및 뒷공작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외에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깨는 취미였던 요리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병사들이 먹을 전투식량을 개발하다가 취미로 변했다는 모양(...) "요리란 모름지기 제철 재료를 자연스레 꺼내서 주인이 직접 조리하여 대접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센다이 근처의 몇몇 요리학교는 다테 가의 비전 요리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정도. 정월의 오세치 요리에서 빠지지 않는 '다테마키'[17] 역시 다테 마사무네란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란 설이 있는데, 이는 유독 다테 마사무네가 '다테마키'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요리에는 조예가 깊었지만 음주습관은 매우 나빴던 모양으로(술에 약했다고 한다), 숙취 때문에 쇼군과의 약속을 어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끔살이다.

프라이드가 쓸데없을 정도로 높았던 걸로도 유명하다. 현재 기준으로 수억 엔에 달하는 다기를 감상하다가 떨어뜨릴 뻔 해서 허겁지겁 잡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까짓 다기 때문에 놀랐다는 사실이 괘씸해져 다기를 그대로 박살냈다는 일화[18] 나 전장에서 좀 오버 액션으로 총알을 피했는데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총알 날아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너무 거만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작당하여 도이 토시카츠와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특히나 마사무네를 싫어하는 무장 4명을 마사무네와 함께 초대하여 같은 자리에서 저녁밥을 먹게 했다. 하지만 큰 싸움이 벌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그날 밤은 의외로 조용히 넘어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도쿠가와와 도요토미가 사실을 알아 보니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자리란 걸 눈치 챈 마사무네가 요리사를 시켜 그들의 국을 전부 매우 뜨겁게 끓여 놨고 그걸 마신 4명은 혀를 데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겉보기와 달리 자신의 군사들은 유달리 아꼈다고 한다. 동맹사자로 보낸 병사가 타국에서 기습받아 불구가 되어 돌아오자 그 적국을 초토화 시켰고 병사 몇 명이 포로로 되었을 때도 그 상대국을 쳤다고 한다. 또 카타쿠라 카게츠나를 비롯해서 심복들이 죽어나가자 '내 생명을 가져가는 것 같다.'며 한탄했다고 메이겐슈에 기록되어 있다.

도쿠가와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고 막부의 원로가 되고 나서도 묘한 포지션을 유지했으며, 얕볼 수 없는 노련한 책략가로 경계받았다. 스페인 국왕에게 보고된 여러 군인과 예수회 성직자들의 편지에는 대개 마사무네가 이에야스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던가, 언젠가 천하를 쥘 사람이라는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일화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른쪽 눈은 어쨌느냐?"라고 묻자, "나무에서 떨어져서 오른눈이 튀어 나왔는데, 너무 맛있어 보이기에 그만 먹어 버렸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2대 쇼군 히데타다를 센다이 저택으로 초대해 요리를 대접했는데, 계략가였던 마사무네가 쇼군을 암살하는 게 아닐까 걱정한 중신이 "마사무네 님이 먼저 (독이 들었는지)맛을 보시오"라고 하자, 버럭 화를 내며 "(막부의 기반이 약했던)10년 전이라도 정정당당하게 반란을 일으켜서 싸웠으면 모를까, 비겁하게 독살하진 않았을 거다." 내가 반란을 일으켰으면 일으켰지 독살을 왜 하냐는 이 엽기적인 대답에 히데타다는 껄껄 웃으면서 마사무네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타다의 사자들이 센다이로 와서 "이번 정월엔 쇼군께서 이러이러한 선물을 받고 싶어하신다."라고 넌지시 귀뜸을 하자 "천하의 쇼군께서 어린아이처럼 구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윗사람에게 올리는 진상품은 아랫사람이 고르는 법인데 이 마사무네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거요?"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3대 쇼군 이에미츠가 매사냥을 너무 좋아해 사냥하다 해가 지면 아무 데서나 노숙하기도 해서 호위에 문제가 생기자, 슬그머니 이에미츠에게 "매사냥은 위험합니다. 저도(매사냥을 좋아하던) 이에야스 공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습니다."라고 해서 등골이 서늘해진 이에미츠는 다시는 매사냥을 하지 않았단 일화가 있다. 이 경우 단순히 이에미츠가 마사무네를 히데타다의 유언으로 아버지처럼 모셨기 때문에 따랐을 개연성도 있지만, 마사무네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취급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쇼군 앞에서 칼을 차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받았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특히 이에야스보다 후대의 인물인 만큼 그의 사후에 쇼군이 바뀌는 것을 직접 보아 왔고 측근으로서 역대 장군들을 쭉 섬겼기 때문에 에도 막부 초기의 중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장수로서보다는 행정가나 정치가로서 더 유능하고, 유명해진 인물이다.

4. 전술가로서의 마사무네

애꾸눈인 탓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지만, 정작 전쟁 쪽으로는 썩 뛰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하후돈? 둘 다 애꾸인 것에다 전쟁 쪽으로는 별로라는 공통점이...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동군이었던 다테 군은 서군에 속하는 우에스기 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일전만에 패배하였고, 결국 마사무네는 도망가는 기병들 틈에 섞여 우에스기 군의 칼세례를 몇 차례나 받아야 했다. 이 때, 마사무네에게 쫓던 우에스기 가의 호걸 오카노 사나이는[19] 후에 자신이 추격했던 인물이 마사무네란 사실을 알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입었던 갑옷이 꽤나 명품이었다는 모양.

덕분에 마사무네는 요네자와에 전봉된 우에스기 가문에게 내내 짓궂은 놀림을 받았다. 우에스기 가문의 지략가로 명망이 있던 나오에 카네츠구가 마사무네를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일개 가로와 다이묘의 신분 차이상 나오에가 멈춰서 인사를 올려야 했음에도 무시하고 지나가자 화가 난 마사무네가 나오에를 불러 세워 따졌다. 그러자 나오에는 쿨하게 "아이쿠, 마사무네 공인지 몰라 뵈었습니다. 얼굴을 뵌 적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마사무네의 얼굴을 모를 리 없던 나오에가 이리 대답한 것은 넌 맨날 져 가지고 도망치는 뒷모습만 봐서 얼굴은 몰랐네요 ㅋ라는 조롱이었고, 마사무네는 얼굴을 몰랐다고 사과하는 상대에게 따질 수도 없어서 얼굴만 붉힌 채 자리를 떴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사카 여름의 진'에선 전초전부터 양측 주력 부대가 갑작스럽게 조우하는 예상 외의 일이 발생했는데,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런 무의미한 전투로[20] 병력상의 피해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부대를 다급히 후퇴시켰다. 만약 이때 다테 마사무네가 마음 먹고 추격전을 벌였다면 유키무라 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겠지만, 마사무네는 유키무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공격을 포기하고 전황을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또한 당시 유키무라는 아군의 사기도 올릴 겸 다테 진영을 향해 "관동 무사 중엔 한 사람도 사내가 없느냐!"며 마구 조롱했을 정도.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무사에게 겁쟁이라는 말 만큼 지독한 욕설도 없다. 하지만 마사무네로서는 내심 유키무라가 이에야스를 잡아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테니 단순히 유키무라가 무서워서 덤비지 못했다고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나마 내세울 만한 부분이 있다면 말 위에서 화승총을 쏘는 기마 철포대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이다. 얼핏 생각하면 기병의 돌진력에 화승총의 화력이 더해지니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부대가 탄생할 것 같지만, 당시 화승총은 이동하면서 사격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보다 기동력이 우수해진 화승총 부대에 불과했다. 또한 그 특징상 실제 운용도 선두에서 자리를 잡은 기마 철포대가 사격으로 적진을 교란하는 사이 뒤따라오는 보병이 타격을 입히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이 기마 철포대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웠다가 사나다 유키무라가 이끄는 창병의 측면 공격에 된통 당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도묘지 전투. 당시 사나다 유키무라는 조총으로는 누은 적을 명중시키기 어렵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바닥에 붙은 채 창으로 말을 찌르는 전술을 사용했다. 물론 상대가 일반적인 기마대였다면 바닥에 누워 있어 봤자 기마대 특유의 돌진력에 처참히 짓밟힐 뿐이었겠지만,[21] 상대가 기마 철포대였던 탓에 이 전술이 유효할 수 있었다.

애당초 기마대는 기동력과 돌진력을 바탕으로 한 타격전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인 만큼 전장의 상황을 살피며 가장 적당한 투입 시기를 택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일 텐데, 생각없이 기마 철포대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부터가 마사무네의 삽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 물론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상대의 전술에 유연하게 대처한 유키무라의 군재가 보다 뛰어났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창병이니 기마대를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기마대가 창병에게 일방적으로 약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게임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 기마병 전술 중에는 말을 타고 전장까지 신속하게 이동한 후, 말에서 내려 싸우는 방식도 존재했다.용기병? 더욱이 보통은 타병종과 함께 전장으로 투입되기 때문에 게임에서처럼 창병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사실 게임상에서도 유저가 발컨이니까 창병에 대놓고 꼬나박는 거지 웬만큼 잘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창병 앞에 기병을 보내지도 않고

사실 이 기마 철포대가 진정으로 대단한 건 '기마 철포대'라는 발상이 아니라, 그 발상을 진짜로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 있다. 기마 한 마리를 유지하는 비용이 일반 보병의 3배에 달하는 시대에 기동력 빼면 묘하게 잉여스러운 기마 철포대까지 창설했다는 건 그만큼 다테 마사무네가 엄청난 돈지랄을 했었다는 국력을 보유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군마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 그의 영지였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5.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

인(仁)이 지나치면 약해지며
의(義)가 지나치면 완고해지되
예(禮)가 지나치면 아첨이 되나니
지(知)가 지나치면 거짓을 말하게 되고
신(信)이 지나치면 손해을 입느니라.

느긋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검약하여 재화를 쌓을지어다.
검약하는 방법은 자유롭지 못함을 견딜 줄 앎에 있으니,
이 세상에 객으로 온 것이라 생각한다면 무엇이 힘들겠는가.

세 끼의 식사가 맛없더라도
맛있게 먹을지어다.
원래 객의 신분이라 함은
찬의 맛있고, 맛없음에 따질 수 없는 것이니라.

오늘이 흘러감을 배웅한 후
자손형제들에게 두루 인사를 고하고
이 속세에 휴식을 청할지라.


사실 마사무네는 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유학 자체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막부 초기에 지배 수단으로 유학을 장려하던 것을 비꼬려는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

6. 기타 사항

워낙 말도 안 되는 짓을 많이 저지른 탓에 '삽질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며, 2ch 등지에선 전국시대의 거품 중 하나로 취급된다. DQN 4천왕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

남자 애인(!)에게 '젊었을 때는 몸에 상처를 내서 내 마음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 그런 짓까지는 못 하겠다. 대체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알아 줄래?'라는 내용의 편지가 남아 있어[22] 역사로까지 수비 범위를 넓힌 부녀자들의 좋은 떡밥이 되기도 한다.[23] 가장 유력한 사람은 시종인 타다노 사쿠쥬로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카타쿠라 시게나가[24]에게도 뽀뽀를 시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남자 애인이 오직 다테 마사무네만의 특이한 취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건 중도 항목을 참조하자. 그렇다고 남색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여색도 화려했다. 소실 중에는 조선 여자도 있었고 유럽 여자도 있었다. 다이묘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인 소실을 둔 사람이다.

한국에선 일본식 청주(淸酒)의 일종인 정종(正宗)이 다테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존재한다. 근거인 즉슨 마사무네의 이름을 한국 식으로 읽으면 "정종"이기 때문이라고. 나름 그럴듯 하게 들리지만 실상 청주인 正宗과 政宗은 한자부터가 다르다. 더욱이 正宗은 혼슈 남쪽 지방의 술이고, 마사무네는 혼슈 북쪽 지방 사람.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다면 정종 항목을 참조하자.

다테 마사무네가 즐겨 사용하던 마상총이 의병에게 노획되어 그 집안의 가보로 내려왔는데, 그것을 다시 박정희의 비서실장인 박종규가[25] 직접 감정한 뒤 사들였다는 소문이 국내의 전통 군사 관련유물 수집가들 사이에서 나돌았던 적이 있다.#. 다만 진실이 확인되지 않은 일화이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강항이 쓴 간양록에서도 마사무네가 언급되어 있으나, 일본어를 몰라서였는지 형과 자식을 살해했다는 오기(誤記)가 있다. 아마 아버지인 다테 테루무네가 니혼바스 요시츠구에게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마사무네가 조총수들을 시켜 두명을 쏴 죽여버린 일을 잘못 알아들은 듯.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무덤 일부가 파괴되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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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전국 바사라 3의 다테 마사무네 제 2복장이 보라색 바탕에 원색의 땡땡이물방울 무늬인 바람에 많은 유저들을 뿜게 했는데, 실제 마사무네가 즐겨 입었던 물방울 무늬 진바오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노부냐가의 야망의 다테 마샤무네도 이 진바오리를 입고 있다.


시대를 초월한 패션리더
이것이 센다이 시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실물.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일본 내의 팬들 반응은 "마사무네 공, 웃어서 죄송해요"(…). 또한 이 땡땡이진바오리가 의외로 유명한지, 다테 마사무네 관련 굿즈들 중에는 이 진바오리의 물방울 무늬를 사용한 것이 은근히 많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동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는데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함께 벌인 삽질은 명성이 높다.(…) 그리고 그 전투 후 다테 마사무네는 땅을 여기저기 주워모아서 기어이 100만석의 대다이묘가 되었으며 이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으로 많은 영지였다.[27]

이 사람의 후손인 다테 지카무네는 센다이 번의 번주가 되자마자 사망해서 센다이번의 폐지를 막기 위해 그의 이복동생[28]인 다테 나리무네가 대신 다테 지카무네 행세를 하며 3년 동안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숨겨야 했다. 이렇게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숨기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한 센다이번 다테 가문의 가신단이 벌인 기행활약은 은근히 코메디이다.

개그 콤비 샌드위치맨의 다테 미키오가 이 사람의 후손이다. 다만 종가가 아니라 분가 쪽 혈통.[29]

1991년 센다이 아야시 천체관측소에서 발견된 소행성에 다테 마사무네의 이름이 붙어 있다.

페르소나 3에서 등장하는 월광관 학교 고등부 역사교사인 오노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투구도 똑같은 걸 쓰고 있다.

현재 대전 시티즌의 플레잉코치인 김은중베갈타 센다이에서 활약하던 당시에 얻은 별명이 다테 마사무네의 별명인 독안룡이었다. 베갈타 센다이의 홈은 마사무네가 활약했던 지역인 미야기현인데다 김은중 역시 다테 마사무네처럼 한쪽 눈이 안 보이기 때문. 다만 마사무네가 오른쪽인 반면 김은중은 왼쪽이었다.

7. 창작물에서의 다테 마사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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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브라만(梵)을 남성형으로 인격화한 힌두교의 창조신을 뜻하는 '범천(梵天)'에 '丸' 자를 붙인 걸로 보인다.
  • [2] '지로'이지만 장남이다. 다테 가의 장남은 토지로라는 이름을 대대로 썼다고 한다. 앞에에 붙는 '토(藤)'는 다테 가가 오슈(奧州. 지금의 미야기 현~이와테 현 일대) 후지와라(藤原) 가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 [3] 다만, 이는 컴플렉스 때문이 아니라 마사무네가 "설령 병으로 잃었다 할지라도 부모에게서 받은 한쪽 눈을 잃은 것은 불효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초상화나 목상에 두 눈을 모두 그리거나 조각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 [4] 항목 상단의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약간 작게 묘사되어 있다.
  • [5] 일화 중에 5살인 마사무네에게 부동명왕은 험상궂지만 자비롭다고 말했는데 마사무네가 "다이묘의 모범이구나."라고 해서 재능을 간파했다고 한다.
  • [6] 이란 원래 당(唐)의 무장이자 후당(後唐)의 태조가 된 이극용(李克用)의 별명이다. 《자치통감》권제255에 "여러 장군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극용은 외눈이었고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독안룡이라 불렀다."고 하고 있다. 마사무네를 처음으로 '독안룡'이라고 부른 것은 1901년(메이지 34년)에 발행된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가 최초이다. 이 책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근대 디지털 라이브러리에서 원문을 읽을 수 있다.
  • [7] 완전 통일까진 아니고 한 절반정도는 통일했다. 오슈 지방은 크게 데와와 무츠라는 두 국으로 이뤄져 있는데 데와는 모가미가의 영지였고, 무츠 내에서도 소마가나 난부가와 같이 다테가 정복하지 못한 가문들이 있었다.
  • [8] 히데요시는 자신의 낮은 신분을 평생토록 수치스럽게 여겼고, 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출생 배경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당시 고급 문화였던 다도에 빠져 비싼 자기 등을 사들였다.
  • [9] 그도 그럴 것이 모자 간의 사이가 나쁘긴커녕 도리어 자기 어머니와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문헌상에 남아 있다.
  • [10] 십자가하면 가톨릭을 떠올리지만 원래부터 일본에는 십자가형이 있었다.
  • [11] 봉지, 즉 자신의 임지-영지를 옮기는 것. 보통 행정이나 처벌적인 의미로 명령되며 이 경우 사실상 땅을 빼앗겼다.
  • [12] 전쟁 중 다테 마사무네가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같은 동군인 난부 토시나오의 영지에 속한 잇키를 몰래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대해선 이에야스 측이 100만석을 주기 아까워 하여 마사무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설도 있다.
  • [13] 명목상의 고쿠다카는 64만 석이지만, 실질적인 수입이 거의 1백만 석에 달했다고 한다.
  • [14] 막말 4현후중 한명인 다테 무네나리가 후손이다
  • [15] 서양인이 아니라 조선인 같은 동양계 외국인 첩을 두었는데, 이 사실이 와전되었다는 말도 있다.
  • [16] 이 때문에 J리그 팀인 베갈타 센다이는 시내 나나키타 공원에 위치한 축구전용 구장인 유어텍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
  • [17] 계란에 생선살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을 으깨어 술과 함께 섞고 달게 간하여 두툼하게 부친 뒤, 그것을 김밥처럼 돌돌 만 음식.
  • [18] 이 일화는 다테 마사무네의 일화가 아니라 중국 불교 선종의 경전에 나오는 일화다. 해당 일화에서는 자기를 박살낸 사람이 중국의 장군으로 나오며 이 책은 당연히 다테 마사무네의 생존시기 보다 더 오래 전에 출간됐기 때문에 이 일화는 선종계열의 불교가 일본 사무라이 계층에 널리 퍼지면서 마사무네의 일화로 오해된 경우인 듯 하다. 이와 같이 일본 전국시대의 수 많은 일화들이 알고보면 다른 원전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난세라는 전국시대의 특징으로 공신력있는 역사서의 편찬이 이뤄졌던 시기도 아니고 대부분의 일화들이 각 가문들의 자화자찬용 기록에서 나온 것들을 조합한 것이다 보니 신뢰성이 떨어지는 일화들이 많다.
  • [19] 당시 우에스기 가문이 미쓰나리와 협공하기 위해 군비를 갖출 때 영입한 인물.
  • [20] 당시 유키무라는 처음부터 이에야스의 본진을 노리는 작전을 세웠다.
  • [21] 보통은 기마대를 상대로 돌진을 저지할 울타리를 세우거나 삼간창 등으로 사용한다.
  • [22] 이 말고도 '오늘 누구랑 뽀뽀했는데 절대 바람핀 게 아니니 안심해라.'(...)라는 편지도 있었다 한다.
  • [23] 이 때문인지 일부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의 정실인 메고히메가 졸지에 Bitch(...) 취급을 받는 일도 간혹 있다고 한다. 부녀자로 설정하는 경우도 제법 있지만
  • [24] 카타쿠라 카게츠나의 아들
  • [25] 일명 피스톨 박이라고 불리는, 총덕후로 유명한 인물이다.
  • [26] 2차 세계대전 말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79년에 복원되었다.
  • [27] 대충 시마즈 가문이나 마에다 가문의 영지와 비슷하다. 이들도 대체로 100만석 규모를 유지했다. 참고로 도쿠가와는 자기 직할령 400만, 하타모토의 영역 300만 해서 총 700만 정도다. 총 석고는 공식적인 수준으로 따지면 2800만 석이다.
  • [28] 나이는 동갑인데 생일은 몇개월 차이난다. 부친은 동일인물이지만 모친이 다른인물인 이복형제이다.
  • [29] 모친 쪽 가계가 다테 종가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개그맨을 할거면 가명을 쓰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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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9-06 22: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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