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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

last modified: 2015-03-18 23:51:48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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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항목 : 참수형

Contents

1. 개요
2. 목이 잘리면 어찌 되는가?
3. 왜 개발되었는가?
4. 해외로 수출된 단두대
5. 오해
6. 잡다한 사항

초성체로 ㄷㄷㄷ
세상에 단 두 대밖에 없다 카더라
위 두 사람부터 단두대에 올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1. 개요

斷頭臺. 기요틴(Guillotine). 처음에는 루이제트(louisette)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언제부터 기요틴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발명된 희대의 사형기구. 참수형의 발전형으로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두대라는 것은 그 용도에 의해 의역(意譯)하여 붙인 이름이고, 서양에서는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박사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부른다. 기요탱이 단두대를 발명한 것은 아니고, 단두대를 보고 그나마 인권이 보장되는 사형기구겠구나 해서 이걸로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서 그의 이름이 붙어 버린 것. 이 때의 주장이 같은 죄를 지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형벌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참수형을 할 때 뇌물을 주고 안 주고에 따라 위력을 달리하는 관행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단두대는 그런 관행이 거의 적용되기 힘들기 때문에 평등하다면 평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요탱 박사는 본래 대학교 해부학 교수였기 때문에 인체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몸을 고정시킨 다음 떨어지는 칼날의 무게를 이용해서 목을 자르기 때문에 별다른 기술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며, 필요한 에너지는 칼날을 끌어올리기 위한 약간의 노동과 처형인을 틀에 고정시키는 정도의 수고 뿐, 나머지는 간단한 물리법칙으로 끝난다. 작동은 순식간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고 하나 이는 아직도 논란거리인 떡밥이다.

2. 목이 잘리면 어찌 되는가?

목이 떨어졌을 때, 바로 의식을 잃느냐 마느냐에 대한 연구자료가 한가득 나오는데, 대부분 집행 당하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여, 잘린 다음 의식이 있으면 눈을 깜빡여달라 등등의 원시적인 실험에 근거하기 때문에, 신빙성 떡밥이 끊이지를 않는다.

의학계의 의견으로, 목이 절단되는 순간 혈류가 멎어 뇌 활동이 바로 정지된다는것이 대세이긴 하지만, 잘린 순간에는 피가 뇌에 남아있고 천천히 흘러 나오기 때문에 의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애매한 상태이다. 잔류 혈액으로 산소가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뇌에 공급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밝힐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

실험적인 방법으로 1905년에 발표된 논문으로 의사가 잘린 목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렀더니 잠시 눈을 뜨더라 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의식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사후경련인지 밝히는 데는 역부족인 방법이라 지지받고 있지는 못하다. 말해보라는 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지만 이는 발성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폐와 목근육이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애초에 잘린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도시전설이고 뭐고간에 이에 대한 정답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별별 희한한 괴담이 나오기도 했다. 잘린 머리가 움직이거나 말을 했다는 것부터, 심지어는 잘린 몸통이 일어나기도 했다는둥. 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잘린 몸통이 일어나 몇 걸음 걸어가기까지 했다는 영웅담일지 괴담일지 모를 호걸들에 대한 전승이 있기도 하다.

3. 왜 개발되었는가?

이 기구가 생겨난 이유는 역설적으로 인권평등 때문이었다. 수요가 많다거나 참수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잘못된 이유로 알려진 경우도 많은데, 위 상황이 발생하게 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본 기구와 당시 상황이 비인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착각이다. 수요가 많다는 이유에 반박으로는 교수형의 경우에는 다수를 동시에 처형하는게 가능하기도 한 것도 있다. 만약 명예와 인권을 따지지 않는 방식의 처형이라면 속도만으로는 단두대보다 훨씬 효율좋고 비용도 저렴한것이 많다. 애초에 단두대 특성상 한사람 한사람 처형해야 한다는것도 있다.

혁명 상황과 더불어서 범죄자의 인권 및 처벌의 평등 역시 중요 이슈중 하나가 되었는데, 특히 그중 논란이 된 것은 혁명 당시 '범죄자를 교수형에 처해야 하느냐, 아니면 참수형에 처해야 하느냐?'였다. 지금이라면 예송논쟁급 개소리로 들리겠지만, 이는 예송논쟁 못지 않게 당시에도 지금에도 중요한 논쟁인 게, 참수 항목에도 있듯이 참수는 귀족에 대한 명예로운 처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왜 범죄자를 끌어올리는 것이냐?', 혹은 '귀족을 인정하라는 거냐? 전원 교수에 처해서 모두 평등하게 끌어내려야 한다!'는 반론도 있는 와중에 결국 평등하고 명예로운 처형으로서 참수형이 채택되었다. 참수형은 그 이전까지는 귀족만 받을수 있는 처형방식이였다.

그러나 참수형은 고도의 전문성 + 전문 기구[1]+ 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고한 집행인이 직접 목숨을 손으로 빼앗아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 처형법 이며, 실패할 확률이 높고, 실패 시 고통과 명예가 논란이 되었다. 이 와중에 기요틴의 어원이 된 기요탱 박사와 일부 혁명 지지 의사들이 범죄자에 대한 인도적 처형(그것도 이후 점차적 사형제 폐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 안에서) 및 고통없는 처형에 대한 주장이 루이 16세로베스피에르 등 많은 친 혁명 인사들과 혁명세력의 지지를 얻어서 관련 법안이 통과되고 이는 앙투안 루이의 기요틴 개발로 이어지게 된다. 아래에도 적혀있듯이 루이 16세의 경우는 친히 연구실에 왕림해서 반월형인 칼날을 대각선으로 바꾸어서 흔히 알려진 길로틴의 모양을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런 루이 16세의 인권의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참고로 루이 16세는 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전까지 행해지던 범죄자의 처형 직전에 벌어지는 고문을 폐지한 왕이기도 하다.

이후 이것의 용도를 봤을 때를 생각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로 보이나, 그 당시에는 실제로 수레바퀴형이라든가 능지처참형, 기타 고문을 동반한 처형에서 이런 단두로 바뀌었다는 사실 역시 매우 급진적인 진보였다.

참고로 위와 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일지는 몰라도 현재 프랑스사형제도가 폐지된 국가 중 하나이다. 더불어 단두대 사용도 잔인하다는 이유로 1981년에 전면 폐지되었다.

4. 해외로 수출된 단두대

프랑스 외에는 인접국들이었던 벨기에독일에도 도입되었는데, 독일어로는 팔바일(Fallbeil-떨어지는 칼날)이라고 한다. 독일에서 원래 정치범에게는 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단두대형은 일반 흉악범에게 사용되었으나,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에서는 즉결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정치범의 처형에도 엄청나게 많이 사용되었다. 유명한 반나치 비밀결사였던 하얀 장미의 단원들도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고, 패전 후에도 사형이 폐지되는 1949년까지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나치의 경우 피형자를 엎드리게 해서 얼굴을 밑으로 가게 하는 프랑스식이 아닌, 피형자가 칼날을 똑바로 보도록 눕히는 방식으로 집행해서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 시켰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시절까지 단두대 처형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집행하던 사람으로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처형한 3165명의 이름과 처형 시기를 기록해 놓았다. 처형된 죄수들 중 대부분(2876명)은 1939-1945년 동안 나치가 2차대전을 일으키고 막장으로 치달을 때 처형당한 자들로 흉악범도 있지만 상당수는 정치범이나 저항 세력 구성원들이다. 하얀 장미 단원들의 처형도 이사람이 집행하였고, 나치가 유럽을 점령하자 유럽 각지에 단두대를 트럭으로 싣고 다니면서 (주로 나치에 반항하다가 체포된 자들의) 처형을 집행했다. 물론 정치범만이 아니라 연쇄살인,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중범죄자의 사형도 집행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종전 직후 나치 부역 혐의로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애시당초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사형을 집행하는 임무만 맡은 사람이라 엄한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얼마 후 석방된다. 풀려난 뒤에도 계속 그 교도소에 상주하며 연합군 사형 집행인들을 도와 156명의 나치 전범들을 처형했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의 처형에도 협력했다(다만 나치 전범들은 단두대형이 아니라 교수형). 이 사람은 처형을 집행할 때 꼭 전통적인 사형집행인의 복장(연미복, 나비넥타이, 신사용 모자, 흰 셔츠)을 갖추고 처형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왠지 종전 후에도 계속 애용되었다. 서독에서는 1949년 리하르트 슈흐(Richard Schuh)의 처형을 마지막으로 사라졌지만, 동독에서는 소리도 없고 좋다는 이유로 1965년까지 슈타지가 애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아우슈비츠의 군의관이자 SS 단원이자 인간같이 생긴 악마인 호르스트 피셔(Horst Fischer)이다.

이탈리아 교황령에서도 1816년부터 이걸 도입해서 썼다. 특히 '마스트로 티타'라고도 불렸던 사형 집행인 조반니 부가티(Giovanni Bugatti)가 이것의 대가로 명이 높았다. 훗날 마짜텔로(Mazzatello)라는 형법과 병행되는데, 이 마짜텔로라는 게 긴 나무 망치로 죄수의 머리를 세게 쳐서 죽이는, 19세기에 존재하기엔 매우 야만적이고 효용도 안좋은 정신나간 형벌이었다. 심지어는 잘 죽지도 않아서 나이프로 쓱싹쓱싹(...)하는 과정이 따로 필요했다고[2]. 때문에 이 단두대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벨기에에서는 앤트워프에서 도입하여 쓰였다. 1798년 수입(?)한 이후 1856년까지 19번의 단두대 처형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살인범 프란시스 콜(Francis Kol)이었다. 룩셈부르크에도 도입되었다.

의외로 스위스에서도 도입하였다. 마지막 처형은 1940년에 살인범 한스 폴렌바이더(Hans Vollenweider)가 옵발덴에서 처형된 것이다. 참고로 스위스는 참수검을 마지막으로 처형에 사용했던 동네이기도 하다.

스웨덴에서는 딱 한번(...) 사용된 적이 있다. 1910년 살인죄로 사형된 요한 알프레드 안데르손 안더(Johan Alfred Andersson Ander)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근대화되는 유럽속에서 도끼 참수형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프랑스에서 도입한건데, 마침 딱 한번 사용하고 그해 스웨덴에서 사형제가 폐지됐다(...) 참고로 이 안더라는 사람이 참 비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인데, 사형날 아침이 되자마자 동료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혀 긴장하는 기색없이 마치 기쁘다는 듯이 "굿 모닝 에브리바디!"하고 외쳤다고 한다(...).

아시아에서도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사형 집행에 쓰였는데, 이후 베트남이 독립하게 되면서 북베트남에서는 단두대형 대신 총살형이 도입되었고, 현재의 베트남에서는 약물주사형을 사용하고 있다(다만, 남베트남에서는 1975년 패망 당시까지 단두대형으로 사형 집행). 알제리에서도 알제리 전쟁 때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군을 처형하는데 썼지만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역시 사라졌다. 종주국 프랑스에서도 시대 변화에 따라 이것조차 너무 잔인하다는 비판 여론이 많았는지, 단두대를 이용한 공개처형은 독일 출신의 연쇄살인범 오이겐 바이트만에게 집행한 1939년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 단두대형은 이후 교도소 내의 처형장에서 비공개로 집행되었는데, 이것도 1977년에 튀니지 출신 살인범에게 마지막으로 집행한 뒤 집행 방법으로 존속하긴 했으나 추가 시행은 않고 1981년 사형제 폐지에 따라 같이 폐지되었다.

중국에서는 판관 포청천에서 보듯이 단두대 대신 커다란 작두로 죄인의 목을 자르는 것 같지만 이는 드라마상에서 처형 장면을 얼버무려 생긴 착각이며, 작두는 실제로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항목 참조.

미국에서도 1996년 더그 테퍼(Doug Teper) 조지아 주대표가 전기의자를 이 물건으로 바꾸자는 미친 계획에 지원을 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무산되었다.

5. 오해

기요탱 박사(1738~1814)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며, 단두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기요탱은 귀족임에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지 않았는데, 혁명의 시작인 '테니스 코트의 맹세' 당시 삼부회 의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직접 마련해주는둥 혁명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무사했으며 나폴레옹 정권 시절에도 고위직으로 잘 살다가 당시로선 장수한 76살까지 살다 갔다.

하지만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이 잘못된 설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이 기요탱인 다른 사람이 단두대에서 죽은 적이 있어서. 1861년에 쓰여진 영국 소설 "필립의 모험"(윌리엄 M. 새커리 지음)에서도 기요탱은 단두대에서 죽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런 설이 전해져옴을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나 유럽에선 그가 단두대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워낙에 정설로 전해져서, 불쾌해하던 기요탱 집안은 기요틴이란 이름을 바꿔달라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하면서 성을 아예 갈아버렸다고 한다.

사실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은 외과의사인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 1751~1825)이다. 처음에 불리던 단두대의 이름인 루이제트(louisette)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던 이름이다. 루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했고 다른 6명이나 되는 기술자들이 여러번에 걸쳐 만들고 개량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독일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루이를 비롯하여 7명 그 누구도 단두대에서 죽지 않고 다들 제 명대로 살다가 갔다.

6. 잡다한 사항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것 말고도 있다. 처음 개발된 단두대는 날이 반월 모앙이었는데, 기요탱 박사는 이것을 국왕의 측근들에게 보여주면서 앞으로 힘 안들이고 사형을 집행할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직접 그 축소모델을 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는데, 반월형 칼날을 보고 루이 16세는 "이렇게 반월형이면 중간에 목뼈가 걸려서 쉽게 안죽어. 그러니까 이렇게 약간 기울어진 칼날로 바꿔보는 게 어떤가?"라 말했다고. 오랜 기간 열쇠와 자물쇠 칼날 쪽으로 취미를 두고 있던 루이 16세의 전문가적 조언이었다.

쉽게 말해서 단두대의 최종 디자인 감수자는 루이 16세였던 것이다. 잘 알려진 소문인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말의 주인공은 사실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하지만 이것은 여러 이야기 중 하나일뿐, 공식적인 역사적 진실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프랑스 왕과 왕비가 이걸로 목이 베어진 게 소문나면서 유럽 전역에서 장난감까지 나왔다는 것. 그것도 놀랍게도 진짜 칼날을 넣은 작은 단두대 미니어처 였다. 이 정신나간 물건은 인기리에 팔렸는데, 당시 아이들이 벌레를 잡아 이걸로 베어 죽이거나 심지어 손가락을 넣고 놀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까지 벌어진 탓에 반발도 커서 허겁지겁 제조 및 판매를 금지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아들에게 선물할 단두대 장난감을 사주려고 했더니 제조가 금지되어서 찾기 어렵자 어머니에게 어찌 구할 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냈다가, 어머니에게 호되게 꾸짖는 편지를 받고 사과편지로 답장해야 했다고 한다.

"Heads will roll"라는 어떤 실수로 여러명이 잘리는 걸 뜻하는 영어 표현은 단두대 밑에 있는 바구니가 꽉 차서 말 그대로 머리가 굴러다니는 장기자랑스런 상황에서 나왔다.

한국에서는 절박한 경기를 두고 단두대 매치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목메달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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