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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조선)

last modified: 2015-10-22 17:24:55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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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국왕
5대 문종 이향 6대 단종 이홍위 7대 세조 이유

단종 어진[1]
묘호 단종(端宗)
시호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郭孝大王)[2]
홍위(弘暐)
휘지(輝之)
출생지 한성 경복궁 자선당
사망지 강원도 영월 관아 관풍헌
배우자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아버지 이향(李珦)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생몰기간 음력 1441년 7월 23일 ~ 1457년 12월 24일
양력 1441년 8월 9일 ~ 1458년 1월 9일 (16세 157일)
재위
기간
음력 1452년 5월 14일 ~ 1455년 윤6월 11일
양력 1452년 6월 1일 ~ 1455년 6월 25일 (3년 24일)
상왕 음력 1455년 윤6월 11일 ~ 1457년 6월 21일
양력 1455년 6월 25일 ~ 1457년 7월 12일 (2년 17일)

端宗(이 묘호는 남송 말기의 소년 황제 송단종과 함께 역사상 두 명 만이 존재한다)

Contents

1. 소개
2. 비운의 소년 왕
3. 비운의 죽음과 그 후
4. 그 외 가족들
5. 전설
6. 노산군일기와 단종실록

1. 소개

세종의 장손이자 문종장남. 조선의 제 6대 왕.

기록에 따르면 다른 남자 형제도 있었으나,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고명아들로 성장했다.

2. 비운의 소년 왕

조선에서 가장 귀한 아이로 태어나, 비참하게 죽어간 비운의 소년 군주

조선왕조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국왕. 적장자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조선의 왕은 아버지 문종이지만, 문종이 태어난 1414년은 백부 양녕대군이 아직 세자로 있을 때였다. 태어날 때부터 금지옥엽이신 왕의 적장손, 즉 원손으로서 원손-세손-세자-왕의 이어서 즉위한 그야말로 적법한 절차를 거치고 즉위한 조선의 유일한 왕이다. 이후에 이런 케이스가 없다. 인종숙종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두 왕은 각각 중종현종의 재위 시에 태어났기에 원손, 혹은 세손이었던 적이 없다.물론 적장자인 건 사실이라 정통성이 확실했던 건 사실이다. 연산군 역시 적장자였으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문제가 있었고, 단종과 함께 세손과 세자, 왕 테크트리를 밟은 둘뿐인 왕 중 한 명인 현종은 태어났을때 그저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큰아들일 뿐이었기에 큰아버지 소현세자의 의문사로 왕권이 그리 공고하지 못했다. 이어 헌종 역시 정통성은 꿀리지 않았으나 세손에만 올랐지 세자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왕이 되었다. 그야말로 정통성 측면에서 조선 역대 왕 중 최강. 게다가 계유정난 이후 실권을 다 뺏겼지만, 상왕까지 밟았다.(…) 이후 강등된 탓에 '노산군'이라는 팔자에도 없던 군호까지 받았다. 사후 숙종의 단종 복위 과정에서 노산대군이라는 대군호도 받았다.

태어나는 날부터 그의 앞날을 보여주는 듯한 불길한 일이 있었다. 단종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 세종이 기쁨에 겨워 2급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는 대사면 교지를 발표했는데 이 교지를 다 읽기도 전에 용상 근처의 큰 촛대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세종 역시 안 좋은 예감을 느꼈는지 그 촛대를 치워 버리도록 명했는데 다음날 단종의 생모 세자빈 권씨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것.

(전략) 교지를 읽기를 끝마치기 전에 전상(殿上)의 대촉(大燭)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으므로,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년) 7월 23일 기사.##

이 세자빈 권씨는 이후 현덕왕후가 되어서 소릉에 매장되는데, 단종복위운동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이 화가 여기에도 미쳐서 소릉이 강가로 이장된다. 이걸 다시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생육신 중의 남효온. 일각에서는 세자빈 권씨가 단종 출산 후 사망하지 않았다면 대비로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아들을 잠깐동안이나마 수렴청정을 하여 보호했을 것이고 단종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문종이 단종 이전에 두 명의 아들을 보았으나, 전 근대시절 높은 유아 사망률 덕분에 모두 죽었기에,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당시 문종이 소헌왕후의 3년상과 지나친 과로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문종마저 일찍 사망을 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대왕대비, 대비)이 없는 상태인데 손자는 너무 어리므로 여러 신하들에게 그를 부탁했고, 심지어 죽기 직전, 김종서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돌아오기까지 하라고 명을 내렸다. 문종 역시 김종서 등에게 부탁했을 정도로 염려하고 있었다. 단종을 직접 키운 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 단종이 막 태어났을 때, 단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혜빈이 아이를 낳은 상태라 소헌왕후의 혜빈 양씨가 단종의 유모가 되었다. 혜빈 양씨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직접 단종의 젖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혜반 양씨는 소헌왕후 사망 후 단종의 보호자로서 왕실에서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한다.

참고로 단종은 어릴 때 무척이나 총명했다고 한다. 총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종대왕이 감탄했을 정도였다. 문종의 재위가 좀 더 길어서 더 나이가 든 후에 왕이 되었거나,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잃지 않았으면 성군이 될 수도 있었을 이. 물론 세자나 세손에 대해서 총명하고 영특하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징그럽게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플일 수도 있으나, 황표정치 시절에도 할 말은 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 모습을 보아 세간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하고 어린 왕의 이미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실제로 실록을 보다보면 단종은 임금에 오르고 나서, 세종과 문종의 적통 임금답게 점점 군주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아마 수양대군이 단종을 상왕으로 빨리 몰아낸 이유는, 단종이 더 성장하기 전에 몰아내지 않으면 자기가 위험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즉위할 때 나이가 열두살이었으나 아주 어린 것도 아니었다. 성종은 열세 살에, 명종도 열두 살, 숙종은 열네 살에 즉위했다. 뒤로 가면 순조는 아예 열한 살, 헌종은 여덟 살에 즉위했다. 결국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왕실 안에서의 확고한 후견인의 존재 여부였다. 이후, 성종 시기의 신하들은 같은 이유로 왕족인 구성군을 경계하기도 했다. 쿠데타 벌인 놈이 더 잘 알지 그 당시, 후궁들 중에선 가장 지위가 높았던 혜빈 양씨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려 했지만,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 홍귀인의 작위를 높이면서 명분을 잃었다. 그녀는 후에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자식들과 함께 유배된 후 교형에 처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왕들은 모두 즉위할 때 왕실의 어른인 대비와 대왕대비가 살아있었고, 그 중 숙종을 제외한 네 왕은 그 당시 제일 서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아무리 가까운 왕족이라도 어린 왕이 즉위했다고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역모죄로 역관광당하기 십상이다.

이 탓에, 세종과 문종의 유지(단종을 보호해달라)를 받은 신하들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는데, 어지간한 신하들은 다 이런 상황에서 문종 때부터 있었던 집현전 학자들과 김종서 등의 고관들 사이의 갈등이 더 벌어졌다. 이는 김종서 등이 왕권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수양대군을 제대로 견제를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수양대군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을 지 맘대로 정했다. 단종실록의 기록처럼 문종의 능을 '수양대군이 손수 장서(葬書)를 쥐고 혼자 가부(可否)를 결정했다.'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문종의 능은 명당이 아니라 흉당이라고 한다. 또 자신이 보위에 오르고 나서는 형수인 현덕왕후를 폐서인 하고, 문종이 현덕왕후와 묻힌 현릉을 파헤쳐버리기까지 한다. 그러고도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문종이 수양대군이 국법을 어겼을 때도 대간들이 몇 번이고 상소를 올려 지적을 해도, 그때마다 '수양은 충직하여 다른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끝까지 실드를 쳐주며 보호해 주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문종이 수양대군의 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문종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 신권을 강화해 왕족을 견제하고 믿을 수 있는 신하들에게 단종의 보좌를 부탁했다. 다만 비를 들이지 않아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세력을 만들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평. 하지만 문정왕후의 경우를 보면 비를 들인다고 해서 꼭 후견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3] 수양대군을 좀 더 견제를 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있다. 우애로 수양대군을 대했지만 수양대군은 그걸 뛰어넘는 개막장이라 애초에 문종 본인의 왕권이 워낙 막강했던데다 문종은 훗날 사극에서 보여주는 유약한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 수양대군은 큰형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버로우타야만 했다. 문종 실록을 보면 수양대군은 사극에 나온 것처럼 전횡을 일삼는게 아니라 열심히 문종의 비위를 맞추고 다녔다. 사극처럼 문종이 수양대군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애시당초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은 왕과 비부터 인수대비까지 방송사 불문하고 사극들이 죄다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문종때부터 수양대군이 설치고 다니는 것으로 왜곡한 탓이다.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단종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이었다. 그래서 설마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수양대군의 세력내에도 주저하는 이들이 있어 수양대군이 직접 앞장섰다. 계유정난이 성공한 건 이런 인식 때문에 다들 방심하고 있었던 덕이 컸다. 솔직히 수양대군이 서찰을 읽고 있는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일은, 뒤에서 칼을 꽂은 것처럼 매우 비열한 일이었다. 이렇게 비정상적이고 비열하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수양대군의 세력이 정상적으로 싸우기에는 매우 약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당시에 수양대군은 김종서, 안평대군에 이어 제3당의 영수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문종의 입장에서 수양대군은 별로 신경 쓸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김종서나 안평대군도 권력은 갖고 싶어했지만, 보위를 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문종 입장에서는 그리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튼 계유정난 때 단종의 보호자이자 지지자인 사람들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유배당했고, 약 1년이 지난 후에 수양대군의 세력은 단종이 양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났다. 그 후, 그를 복위시키려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때 찾아온 성삼문에게 칼을 내려주어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계획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단종을 영월로 압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때의 심정을 남긴 시조가 유명하다. 그런데 이 왕방연이란 인물도 좀 복잡한 것이, 연려실기술에는 이 시조가 단종을 영월로 압송한 금부도사가 지은 시조로 나오는데, 숙종실록에는 바로 이 왕방연이란 인물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 역시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사실이라면 흠좀무. 그 때문인지 이 숙종실록의 기록에서도 그렇고 야사에서도 그렇고 사약을 내릴 당시 차마 사약을 올리지 못하고 엎드려 있기만 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에겐 장자 계승의 원칙과 세종이 하도 신경을 쓴 탓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많았다. 혜빈 양씨와 그녀의 아들들의 세력, 그 유명한 김종서, 황보인 등 세종의 고명대신들이 있었고 그 밖의 세종의 아들들 중 단종을 지지하는 이는 많았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었지만 그래도 왕족이라서인지 귀양을 갔다가 나중에 처형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단종이 총애하던 문종의 부마 전 형조판서 영양위 정종(鄭悰)(경혜공주의 남편)도 마찬가지로 귀양보냈다가 역모가 들통나 능지처참되었다. 거꾸로 수양을 지지하는 세종의 아들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세종의 4남이자 양녕대군을 닮은 걸로 유명한 임영대군이다. 그리고 양녕대군과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의 아들들도 이복형 수양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거의 고립되어 있던 소현세자보다는 몇 배나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큰 실정을 한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못 하고 숙부에게 왕위를 내놓은 것이 실정이라면 실정이지만)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적이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생육신 같은 이도 있다.

다만, 문제는 이 세력이 너무 많았고 각각의 의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로 뭉쳐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이 정승정치를 주도하면서 왕실들과 집현진 학자들은 모두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세조의 계유정난은 이들 고명대신들의 기존세력과 경쟁자인 안평대군을 같이 제거하려한 것이었고, 집현전 학사들과 안평대군세력에 속하지 않은 왕족들은 적어도 이를 방관했다. 괜히 정난공신에 집현전 학자들이나 왕실인물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수양대군이 사실상 단종을 폐위하고서 즉위한 거나 마찬가지고, 이 과정에서 왕권강화 시도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세조를 대체하거나 혹은 세조 사후에 어린 세자인 후일의 예종 대신에 단종을 옹립해야 한다는 의도를 품고 복위운동을 벌였다.

어쨌든 계유정난 이후,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이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는지 경복궁 자미당 난간을 보더니 서서 "세종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자미당에서 할아버지 세종을 떠올린 이유는, 세종이 말년에 자미당에서 거처했었기 때문. 이를 전해들은 수양과 그 부인 윤씨도 울었다고 실록의 이 날(1454년 11월 25일) 기록은 전하는데 이걸 믿으면 골룸하다. 단종이 세종을 떠올리고 울었던 것은 수양에게 핍박받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수양과 그 부인이 같이 울 리는 없다. 당연히 세조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신하들의 말장난이 가능성이 농후하다.

3. 비운의 죽음과 그 후

유배된 이후 고달픈 생활을 하다가 반정 세력들이 재반정을 두려워하여 죽이고 만다. 당시의 공식적인 기록은 세조실록에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후에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승정원 일기나 이후 시신과 무덤을 방치해 둔 것, 그리고 후대 왕들의 기록을 보면 타살이 확실해 보이고, 아마도 사약을 거부한 타살로 추측된다.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경연때 당시 단종 사망당시 영의정이던 정인지를 까면서 금부도사가 사약을 주었다고 말하고 그 근거로 사약기록이 금부에 남아있고 당시 사형장면을 현지인이 기록하였고 이것을 관찰사가 보았다는 것 등을 증거로 내세운 것으로 보아,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후 숙종실록에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가 단종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자 옆에 있던 하인이 대신 목을 졸라 죽였다고 나온다. 숙종이 직접 언급한 말로 진실이거나 가장 잘 알려진 전설로 보인다. 실제로 이건 사약을 내리는 장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약이 먹고 바로 죽는 것도 아니고, 사약의 약발이 잘 받지 않거나 반항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결국 활줄을 풀어서 목을 졸라 죽여야 했다. 또한 그 하인은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고 한다. 숙종실록에서 숙종의 언급 중에 나온다].참고로 이 설에 따르면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나는 정당한 왕인 자신이 사약을 마실 수는 없어서 자신은 방에 들어가고 활줄을 자신의 목에 감고 밖으로 내어 하인에게 당기라고 했는데 그 뜻을 몰랐던 하인이 당기자 죽었다는 것이 한 가지. 다른 하나는 단종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버티자 단종을 죽이면 상을 받으리라 생각한 한 하인(혹은 면천을 노린 천인이었다고도 함)이 단종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간에 죽은 뒤에도 중앙관리가 아닌 지방 아전인 엄흥도가 몰래 매장했고 무덤 크기도 작고, 위치도 단종의 무덤임을 숨기기 위해 다른 무덤이 많은곳에 묻은 것으로 보아. 실록의 예로서 장사지냈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죽은 후 금성대군과 같이 왕실 족보에서도 삭제당한 것으로 보아 타살이 거의 확실하다. 게다가 진짜 예로서 장사지냈다면 중종 때까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중종은 임진왜란 때 능이 도굴되어 시신이 행방불명되어 다시 찾지 못했다(...).

실제로 몇몇 사극에서는 그런 장면이 나왔다. 한편 한양에서 영월까지 따라와 그를 모셨던 궁녀들은 단종이 죽자 모두 강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 훗날 숙종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궁녀들을 제사지내는 단도 만들어졌다.

흔히 영월 청령포에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령포에는 얼마 머물다가 여름이라서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영월 관아 내의 객사로 옮겼다. 그래서 단종이 최후를 맞은 곳은 영월 관아의 객사.

시신은 영월의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강물에 떠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묻어두었다. 당시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몰랐던 자신의 노모를 위해 준비해둔 관과 수의를 썼다고 한다. 이에 관련해서는 생육신 중 하나였던 조려가 단종의 죽음을 전해듣고 영월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도 있다. 이 때,강물이 불어서 영월로 건너가지 못한 조려가 통곡을 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태워 강을 건넜다는 흠좀무한 설화도. 공식적으로 단종의 추모가 금지되었던지라 후환이 두려웠던 엄흥도는 매장을 마친뒤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그 길로 영월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실제로는 인근 주민들은 엄흥도 일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단종 복위 다음 해에 공조좌랑, 영조때 참의와 참판을 거쳐 순조 33년에는 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육부중에서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던 것은 왕릉을 팔 때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이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엄흥도가 한 일은 약소하긴 해도 어찌되었든 왕릉. 그리고 마침내 고종 14년엔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자리로 추증된다.엄흥도가 원래 아전 정도의 미관말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단종의 최후에나마 그 시신을 수습한 충의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만하다. 세조가 살기등등하던 시절이었으니.

궁중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이렇게 비참하게 죽고 왕실 족보에서도 제외되고 없는 단종의 제사를 왕실에서 지내줄 리는 없었다. 대신 생육신을 포함한 여러 충신이나 단종의 살아남은 일부 혈육들이 제각각 제사를 모시기는 했다. 공식적으로는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4]와 그 자손들이 단종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몰래 제사지내거나 사가에서 치르는 제사였을 뿐이다. 다만 단종이 죽은 영월 일대에서는 민간에서 태백산신제를 치렀는데 이는 단종이 죽어서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특기할만한 점은 태백산신제에서는 소를 잡아서 그 고기를 올렸다는 점인데 당시 소는 농업의 근간이라하여 함부로 잡지 않았고 소를 잡아 그 고기를 쓰는 제사는 왕에게만 올리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소를 잡는 제사는 태백산신제가 유일하다고 하는데 이 산신제의 대상이 단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민간에서 산신령에 대한 민간신앙으로 가장하여 단종에게 왕의 예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이삽십년전까지만 해도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낸다든가 할 정도로 소는 귀중한 재산이었고 전형적인 농업사회이면서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강원도 일대에서는 더더욱 귀한 재산이었다. 태백산신제는 상당히 규모가 큰 것이어서 영월만 아니고 인근 지역에서 이 산신제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관련된 지명도 남아있다.이것은 지금도 이어져서 영월군에서 매년 지내고 있다.

한동안 그의 폐위와 죽음은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다. 하긴 조선왕조 역사에서 가장 명분이 없는 정권 찬탈이었으니까.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의 계기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숙부에게 쫓겨난 어린 왕을 가엾게 여겼고 사림들도 말만 안할 뿐 단종을 복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숙종 7년 노산대군으로 승격 된 후 33년 복권되어 단종으로 추증되었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단종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이 없다고 한다. 숙종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지, 공정왕으로 불리던 정종도 이때 정종이 된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사육신의 설레발 때문에 얽혀들어간 것이지 본인의 허물 탓이 아니며, 세조도 본래 단종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단종의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여러 조선왕릉과는 달리 경기도가 아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다. 이전 버전에는, 장릉이 강원도에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제외되었다고 설명했는데 그렇지 않다.# 참고로 북한에 있는 태조의 비 한씨의 제릉·정종의 후릉, 그리고 왕릉의 제식을 갖추지 못한 연산군묘·광해군묘는 세계유산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장릉 주변의 소나무는 마치 절을 하듯 장릉 방향으로 굽어져 있다. 정말로 장릉에 가면 볼 수 있다. 특히 능역 근처에 가면 단종의 능을 향해 유난히 기울어진 소나무가 한 그루 남아 있는데, 이 소나무를 '충절송'이라고 부른다. 이런 건 자연 현상이지만, 단종의 비극적인 생애와 연관지어 보면 감상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때 종묘 신위명단에서도 당초에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종묘 신위에도 모셔지지 않고 세조가 왕실족보에서 빼버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던게 단종이 남아 있으면 세조에게는 치명적인 정통성 문제가 후대에 계속 남게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조입장에선 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숙종이 추증과 복위를 승인함에 따라 뒤늦게 가서야 공식적으로 종묘 신위명단에 포함되어 역대 선대왕의 신위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에 비해 반정으로 폐위처리된 연산군광해군은 아예 종묘 신위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4. 그 외 가족들

단종이 양위한 건 15세, 사망했을 땐 17세였으므로 결혼하지 못했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문종의 단 하나뿐인 적손이니만큼 일찍 결혼했다. 단종의 아내 송씨는 후에 정순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는 장수해서 중종의 치세 때까지 살아 있었다. 자세한 건 정순왕후 항목을 참고.

야사에 따르면 단종의 친누나 경혜공주 또한 남동생의 폐위 과정에서 휘말려 갖은 불운을 겪었는데, 이때 남편인 영양위 정종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에 처해지고 그녀는 노비로 전락하여 순천의 관비생활을 하기도 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순천 순암집에는 장흥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나마 이를 안쓰럽게 여긴 세조의 중전 정희왕후의 배려로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와 경혜공주의 딸은 면천될수 있었다. 정미수는 궁중에서 자라 후일 성종이 되는 자산군과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이 덕에 15세에 돈령부 직장에 오르고 형조정랑, 선전관 등의 벼슬자리를 거쳐 나중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까지 오르게 된다. 실록에 따르면 세조의 엄명에 따라 그리고 예종에게도 당부하여 경혜공주미수의 경우, 연좌시키지 말도록 전교를 한 기록이 있고 2012년 분재기(자세한 것은 경혜공주 참조)에서 볼 수 있듯이 공주신분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라도 광주로 귀양가거나 남편의 죽음은 실제. 게다가 남편의 죽음으로 비구니가 되어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경혜공주 본인도 이때 노비와 집을 하사받고 사실상 면천되었으나, 공주로 복위된 것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단종은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자신을 낳고 3일만에 죽은데다, 아버지인 문종이 죽고 즉위한 뒤에는 후일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그 외의 권신들에게 눌려 살았기에 자주 이 친누이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계유정난이 일어났던 날 밤에도 단종은 경혜공주의 집에서 묵고 있었다. 공주의 남자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단종이 누이의 병문안을 위해 경혜공주의 집에 방문한 날 계유정난이 벌어진다.

한편 단종의 삼촌이자 세조의 동생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계유정난에 반발,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본인을 포함하여 관련자들은 물론 해당 지역의 백성들까지 모조리 멸절당하기도 하였다.(정축지변)(피끝마을 항목 참조)

5.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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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 억울한 죽음 때문에 민중의 동정을 받았는지, 그의 떠도는 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며 무가에서 모시는 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 무속에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원한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남이, 최영, 임경업, 사도세자 등) 아니면 능력이 만렙이거나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거나(이순신, 박문수 등).

    전설에 따르면 성부윤 관직을 지냈으며 나이들어 은퇴한 후에 고향에 낙향해 있던 추익한이라는 이가 영월에 유배 온 단종에게 머루를 바치는 등, 단종이 친구처럼 꽤 가까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처럼 머루와 여러가지를 준비하여 단종이 유배된 곳으로 가는데, 강가에서 백마를 타고 있는 단종을 만났다. 그런데 단종은 서민복이 아닌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단종은 왕에서 강등되어 노산군이 되었으니 왕의 옷인 곤룡포를 입을 수 없다. 이에 놀란 추익한이 꿇어 엎드리며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여쭈었더니 단종은 간단히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고 대답하더니 사라졌다. 추익한은 불안한 마음에 단종의 거처로 달려갔지만, 단종은 사약을 받고 죽은 후였다. 추익한은 울면서 단종의 환상을 보았던 강가로 달려가서는 거기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이 때 추익한의 나이는 75세였다.[5] 이 때문에 추익한은 사후에 벼슬을 하사받았으며 이에 유래하여 단종은 민간신앙에서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여겨진다.덧붙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라고.#

  •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단종이 죽은 이후 영월부사가 부임하는 날에 급사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때문에 영월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영월은 폐읍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한 대담한 사람이 영월 부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였는데, 부임 첫 날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더니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소년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신임 부사가 곧 단종임을 직감하고 부복하니 단종은 자신이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있어 목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달라고 하려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영월 부사들은 겁이 많아 단종을 보자마자 죽었다는 것이다. 신임 부사는 단종의 옥체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엄흥도가 알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은 홀연 사라졌다. 다음 날 부사가 호장 엄흥도를 불러 전날의 이야기를 해주자 엄흥도는 자신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역사 기록이나 설화 양쪽 다 엄흥도가 단종을 장사지낸 후,자취를 감췄다고 하므로 이건 말이 맞지 않는데 설화의 다른 버전 중에는 꿈에서 단종에게 영월부사를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단종의 무덤을 파보니 과연 활줄이 목에 얽혀 있어 활줄을 푼 뒤 다시 묻고 정중히 제사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영월부사가 급사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 같은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월의 관리들이 여럿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영월 군수로 부임한 뒤 제문을 지어 단종의 넋을 위로했고 그 뒤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선조 14년 2월 1일 7번째 기사)

  • 전해져 오는 일화에 따르면, 엄흥도와 그의 아들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 할 곳을 찾아 헤맸으나 눈보라가 내리치는 엄중설한이라 땅이 모두 얼어 붙어 무덤을 파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때 어디선가 노루 한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눈밭에 앉아 잠시 쉬고 가니 그 눈 녹은 자리를 파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노루가 눈밭에서 알을 품고 갔을 리 없겠으나, 약관도 채 되지 않아 권력다툼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한 소년 왕과 눈보라 치는 설원의 갸날픈 노루 한마리는 어째 서로가 닮은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훗날 복위된 단종의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지관을 보내어 장릉의 지세를 살폈는데 실제로 가본 지관들은 엄흥도가 임시방편으로 모셨던 그 자리가 이미 천하길지라는 것을 알고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왕릉의 격식에 맞추어 고쳤다고 한다.

  • 단종 본인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만, 단종을 폐위시켰던 세조는 이후 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꿈 속에서 현덕왕후가 뱉은 침을 맞았고,히드라리스크 때문에 그 이후로 침 맞은 자리를 시작으로 온 몸에 종기가 생겼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큰어머니 유령에 시달리다 죽었다. 다만 이 내용은 야사이고, 정사의 기록에서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었다. 왕과 비에서는 "꿈에 형수님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서는 '네놈이 내 아들을 죽이려 하니 본보기로 네 아들을 데려간다'고 말했다"는 세조의 대사를 통해 정사와 야사를 적절하게 섞었다. 자세한 내용은 세조 항목 참고.

    단종이 유배된 후,때때로 단종이 인근 정자에 나아가 경치를 구경하곤 했는데 이를 영월부사가 사사건건 간섭하며 괴롭혀서 단종이 괴로운 마음에 그만두었다.그런데 이후로 영월부사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돌팔매가 계속 날아왔다.단종을 동정하던 인근 주민들이 괘씸한 마음에 부사에게 던진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단종에게 잘해줬다가는 조정에서 벌을 받을 수도 있어서 사람들이 영월부사 자리를 매우 어렵게 여겼다.또 그렇다고 단종을 괴롭히자니 민중의 시선이 싸늘하고...

  • 위의 야사나 민담들도 그렇고 전설도 그렇고 단종은 조선 왕 중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남긴 왕인데, 이것은 그만큼 단종의 생애가 민중들의 동정을 받았고, 세조 일파가 얼마나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았는지를 시사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숙종 때 복위를 논할 당시에도 단종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백성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도 보아 단종에 대한 동정심은 사림과 백성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여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아직도 영월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단종제는 영월의 명물로 흥보되고 있다.

6. 노산군일기와 단종실록

단종이 즉위하였던 시절 단종의 행적과 그 시절 왕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실록이었는데 단종이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당초에는 단종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후에 단종 이후에도 10대 왕이었던 연산군과 15대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왕권자격까지 상실하면서 당시까지는 연산군, 광해군과 함께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대 임금 숙종이 선대왕 단종 추존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승격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로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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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김호석 화백이 서울 인사동 골동품점 고도사 의뢰로 제작한 어진이다. 17세 때 단종을 묘사한 것으로서, 얼굴 윤곽은 현존하는 조선 왕들의 어진과 전주 이씨 왕족의 모습을 토대로 한 것이라서 실제 단종의 얼굴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2] 폐위되어 시호가 없었다. 이후 숙종 때 정종과 함께 묘효와 시호가 올려졌다.
  • [3] 정확히 말하면 좋은 후견인이 될 보장이 없다는 거지 후견인이 될 보장은 충분히 있다. 문제는 새로 들인 왕비가 아들을 낳은 경우 문정왕후처럼 단종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할 수도 있고, 아들을 낳지 못 한다고 해도 친아들도 아닌 단종을 얼마나 보호해줄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후궁이기는 하지만 문종이 생전에 총애한 홍씨는 단종이 아니라 수양대군의 편에 붙었다. 일단 결과적으로 후견인의 부재는 단종의 수명을 단축해버린 원인이 되고 말았다.
  • [4]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아들로,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그를 수양아들로 들여 단종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 역시 자손을 남기지 못 하고 사망해 노산군의 제사를 끊게 할 수 없다는 조정의 논의 끝에 사후양자를 들인다.
  • [5] 태백산 산신각에 걸려 있는 단종의 초상화가 바로 이 말을 타고 가는 단종에게 머루를 바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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