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당고의 금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분석


1. 개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관료와 환관(宦官)이 충돌하여, 환관세력이 관료를 금고(禁錮)에 처한 탄압사건. 당고의 옥(黨錮之獄), 당고의 화(黨錮之禍) 또는 당고의 금(黨錮之禁)이라고도 불린다. 시기적으로 보면 삼국지의 바로 앞 시대로 에서도 배경설명처럼 자주 인용된다.

2. 배경

충제질제가 살아있을때 간신이자 권신양기(梁冀)와 그의 부인 손수는 모든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껏 권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손수는 양기의 집 말고도 자신의 집을 따로 만들어 양기의 옆에 만들었는데, 양기가 집을 크게 지으면 손수도 따라서 집을 크게 짓고 손수가 크게 지으면 양기도 다시 크게 지으면서 병림픽을 벌이고는, 둘이 마차를 끌고 길 한복판으로 나와 신나게 놀고 즐기는 등 전횡이 극심하였다.

환제는 양기의 손으로 옹립된 위치라 힘이 없어 지켜보고만 있었다. 손수의 외삼촌 중에 양기(梁紀, 남편과는 한자가 다름)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양기의 부인인 선(宣)씨에게는 이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만든 딸인 등맹(鄧猛)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후 손수는 등맹의 성씨를 양(梁)씨로 바꾸고 환제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입막음을 위해 남편 양기를 시켜 선씨를 죽이게 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선씨는 살아서 궁궐로 달려갔다.

사정을 들은 환제는 이를 명분삼아 환관인 선초(單超)등과 손을 잡고 한번에 들이닥쳐 다 박살을 냈다. 양기의 집은 포위되었고, 양기와 손수는 절망해서 자결하였다.

환제는 이렇게 양기를 처리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에는 되려 이 사건에서 공을 세운 환관들의 세력이 막강해져버렸다. 그들은 막강한 권세를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았고, 내정에 간섭하고 자기들의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시켜 토지겸병을 벌였다.

3. 전개

당시 호족 세력과 이들이 향거리선제를 통해 진출하여 형성된 사대부 및 관료 계층은 유교를 통해 외척 및 환관의 세력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환관들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청류파들은 연일 환관들을 비판하였다.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환제에게 거짓말을 해서 청류당의 이응(李膺)을 비롯한 200여명을 잡아들였다.

헌데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진술을 택해서 환관들을 물먹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진짜로 큰일이 나겠다 싶은 환관들은 외척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에게 관직을 박탈하고 이후 평생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禁錮)형을 내렸다. 이것이 1차 당고의 금(166년) 사건이다.

이후 환제가 죽고 13살의 황제 영제가 즉위하자 두태후(竇太后)가 섭정이 되고 외척 두무가 실권을 잡았다. 두무는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외척 두씨 세력은 진번 · 이응 등 청류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을 등용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오히려 환관들에게 계획이 들통나 거센 역습을 받고 패배했다.

두무는 일찌감치 자살해버렸고, 이응을 포함해서 잡혀 죽은 자만 100여 명이 넘었고,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은 자는 600 ~ 700명이 되었다. 이것이 2차 당고의 금(169) 사건이지만, 단순히 금고형에 처했던 1차 사건과는 달리 아예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호족 및 사대부 세력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면서, 후한 정권에 대한 지지는 폭락했다.

당인(黨人)을 철저하게 말살하기 위해,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들 역시 연좌제를 실시하여 처형했다. 176년 5월에는 당인을 보호하던 영창태수 조란을 찢어죽여 사대문에 효시, 당인 및 그 보호자에 대한 연좌제가 시행되었으며, 이들의 문객과 고리[1] 그리고 5촌 이내의 친척 중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파면시키고 임용기회를 박탈하는 칙령이 내려졌었다.

수백명에 달하는 당인과 그를 보호한 사람들에 대해서 모두 조금이라도 연루되었으면 싸그리 몰아낸다는 것으로 당연히 피해자가 속출하였다. 환관을 공격할 청류당이라면 자연스럽게 관직도 명성이 일개 하급 관리 수준은 아닐 것이고, 그 간의 관료 생활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을 것이며, 후한은 친족 사회이므로 친척 역시 무척 많을 것이다.

이는 현대 대한민국 정부로 치자면 장관차관위 공무원국회의원 급 유력 정치인 가운데 100여명에게 누명을 쒸우고, 이 사람들과 친한 사람, 이 사람 밑에서 일했던 사람, 친척들은 모두 연좌해서 관직에서 몰아낸다, 도피를 도운 사람도 같은 죄로 사형한다는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터무니 없이 지독한 탄압이었다.


4. 결과

당고의 금의 가혹함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과감하게 저항한 무수한 ''들을 만들었다. 환관의 부패에 의롭게 저항하다 혹은 의리를 내세워 친지를 도와주다 오히려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었으니, 세간에서는 국가에서는 죄를 받았지만 이들을 의로운 선비라고 여겨 추앙하였고, 이러한 불의를 주도하는 후한 조정에 대한 혐오는 매우 강렬해졌다.

이 시기의 일화로, 어린 나이였던 공융의 집에 당인으로 몰린 장검(張儉)이 공융의 형 공포를 찾아왔는데, 마침 형이 부재하여 공융이 그를 대신 숨겨주었다. 이 사실이 적발되자 공포는 아우를 감싸며 자신을 찾아온 자이니 자신에게 벌을 물으라고 하고, 공융은 형을 감싸며 자신이 숨겨주었으니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융 형제의 어머니는 자신이 집안의 책임자이니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공포가 처형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공융의 명성은 높아졌다.

그리고 환관과 결탁한 탁류파 원씨 가문의 일원인 원소는 오히려 자신의 지위와 명망을 이용하여 당인들을 숨겨주고 보호하였다. 환관 세력은 자신들의 동맹인 원씨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다가는 제살깍아먹기가 되는 식이며, 당인들을 모으면서 은혜를 베풀고 있는 원소를 매우 경계하였다. 원소는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망을 얻어 '재야의 영수'격인 강력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당고 사건 이후 이후 환관들의 권력 독점은 더욱 심해졌으며, 삼국지의 시작을 알리는 '십상시의 전횡'도 당연히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초에 후한에서 인재를 등용하던 향거리선제가 사대부 세력에 근거하던 것이었는데, 사대부 세력을 탄압한 것은 새로운 인재 수급을 사실상 끊는 일이었고 권력 독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환관들이 끌어들인 자들은 무능하였고, 지방의 세력가인 호족이기도 한 사대부들은 환관을 혐오하여 중앙 정부에 협조를 하지 않았다.

이는 '조정'과 '지방'의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향거리선제나 속관-고리 제도를 통하여 지방의 호족들이 지방 관료로, 중앙 관료로 올라가면서 후한 조정은 지방 호족의 유력자와 지식인들의 '결집체'가 될 수 있었으며, 조정은 지방의 유력자와 지식인이 모이기 때문에 '중앙'의 역할을 하고 대신에 지방 통제력을 확보하는 '순환'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긍정적인 인재의 순환고리가 당고의 금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한 황실에서는 무능력한 영제매관매직이나 일삼고 사치에 몰두하였으니, 사회의 도덕적 권위는 무능, 부패, 불의, 잔혹한 '조정'을 더나서 청렴과 의리를 내세우는 ''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조정의 권위가 유지되기는 하였으나, 잠재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한에 대한 마음이 떠나고 있었다.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기존의 유교 도덕에 의지하였던 청류파와는 별개로 피지배 민중들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사상이 퍼져나갔다. 전국시대 묵가의 잔해, 전한시기 황로사상의 잔해, 아직 오지에 잔존해있던 이 융합하여 원시적인 '도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민생이 힘들어지면 대안적 공동체로서 종교가 힘을 얻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시대에는 도교가 이를 담당하게 되었다. 태평도, 오두미도는 유교에 근간을 두고 구축되었던 조정과 호족 '국가 공동체'의 균열을 틈타, 자생적인 '대안 공동체'로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활발하게 퍼지게 되었다.

결국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태평도 세력이 주도하여 후한 자체를 공격하며 황건적의 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환관이 주도하는 조정 세력은 부패한 인사들을 기용하여 황건적의 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호족 세력의 협조를 얻으려고 해도 당고의 금으로 죄다 조정에 등을 돌렸으니…. 게다가 이미 조정에 불만을 강하게 품고 있는 당인들이 황건적과 결탁하면 정말로 끝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조정에서는 황건적과 싸울 인재를 급히 모으고 황건적과 당인이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많은 당인들의 금고를 해체해주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대두한 하진은 이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게 된다. 기존 권력을 독점하던 십상시를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과 청류파를 끌여들인 새로운 외척 하진의 대립은 십상시의 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당고의 금이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십상시의 난으로 조정의 권위가 마지막으로 붕괴되자 황건적의 난에서 지방에 기반을 닦은 지방 세력이 일시에 후한에서 이탈. 한 순간에 국가가 붕괴되며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된다.

5. 분석

흔히 이 사건에 대해 환관 세력을 탁류(濁流), 사대부 세력을 청류(淸流)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탁이라는 말로 선악의 구도를 형성할 만큼 도덕적인 차이가 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사대부 세력은, 특히 태학과 관료계의 인재 등용이 지방의 여론에 의존해 인재를 중앙으로 뽑아 올리는 향거리선제에 의거한 상황에서는, 지방 유력 세력인 호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자연히 이들도 토지 겸병을 행하고 일반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던 대지주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단적으로, 당시 빈곤에 찌들린 농민들을 결집시킨 황건적의 난을 때려잡던 군벌(군웅)들은 대체로 군복으로 옷만 갈아입은 지방호족·사대부 세력이었다.

즉, 후한의 국가 지배권을 부식시키고 지방에서 각종 모순이 일어나던 상황은 당고 사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호족들은 지방에서는 대지주로서 소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이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한편, 중앙에서는 관료 계층에 대한 존중과 (지방 세력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법가 사상에 대한 반대를 위해 유교 사상으로 스스로를 무장시켜 사대부로서 활동하였다. 후한광무제 대부터 이들을 인정하면서 시작된 정권이었고, 때문에 황제가 직접 이들을 탄압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때문에 황제에게는 자신의 통치력을 확장시킬 측근이 필요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황제와의 관계 속에서만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외척과 환관 세력이었다. 때문에 외척, 환관 세력과 사대부 세력은 계속해서 대립했으나, 2세기 경에는 어린 황제의 연이은 즉위로 외척과 환관 세력이 득세하여 사대부들의 상위에 섰다. 문제는 이들도 부패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이용하면서도 정국을 통제해야 할 시대의 필요성과는 달리 황제권이 완전히 추락해버렸다는 것이다. 황통이 단절되어 어리고 무능한 황제가 외척들에게 옹립되는 불행이 이런 상황을 악화시켰다. 헌제동탁, 조조의 꼭두각시가 되었던 것처럼, 그 이전부터 후한 황제들은 권신들에게 대부분 농락당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척과 환관 세력들도 내부에서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이 시기에는 환관 세력이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사대부 세력들은 완전히 싹이 잘려 버렸다. 명망 높은 사대부들이 정부에 의해서는 오히려 탄압받고 관직으로의 출구가 봉쇄된 결과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은 사대부에게 오히려 권위의 출처가 아니게 되었다. 이후 사대부들은 중앙에 대한 관심을 끊는 한편, 신비주의 사상이나 아예 도교 계통의 신종교에 몰입했다.

교지(현재의 베트남 인근)나 등 벽지로 숨어드는 사대부들도 많았다. 그로 인해 사대부 세력이 협조하며 운영되던 지방 통치력은 말 그대로 폭락했다. 쉽게 요약하자면 지방 유력 세력은 이 사건으로 후한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외척이든, 환관이든, 사대부이든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바탕으로 대토지를 장악하고 민중에게는 압제를 가하는 대상이었음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정계의 자정 능력이 완전히 상실되고 중앙과 지방이 유리되면서, 후한의 멸망은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사대부 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지의 시대에 각지의 사대부, 즉 호족들은, 지방군벌으로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를 주도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위진남북조시대로 이어지는 귀족 정치의 모습이 한 대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닌 것이다.
----
  • [1] 문객은 자택에 출입하며 교류하던 사람, 고리는 속관으로 등용된 사람이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10-14 01:02:03
Processing time 0.1181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