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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last modified: 2015-03-27 02:22:57 by Contributors

당의 역대 황제
초대 고조 태황제 이연 2대 태종 문황제 이세민 3대 고종 성황제 이치

이 항목은 본명인 이세민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ɔ) User Hardouin on en.wikipedia from
고궁 남훈전 구장 역대 제후상(古宮南薰殿舊藏歷代帝后像) 중 당태종
묘호 태종 (太宗)
시호 문무대성대광효황제 (文武大聖大廣孝皇帝)
줄여서 문황제(文皇帝)
이(李)
세민(世民)
생몰년도 599년 1월 23일 ~ 649년 7월 10일 (50년 6개월)
출생지 수 경조군(京兆郡) 무공현(武功縣)
사망지 당 종남산(終南山) 취미궁(翠微宮) 함풍전(含風殿)
재위기간 626년 9월 4일 ~ 649년 7월 10일 (22년 10개월)
즉위식 626년 9월 4일
연호 정관 (貞觀)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1.1. 출생
2.1.2. 젊은 날
2.1.3. 진양기병
2.2. 천책상장(天策上將)
2.2.1. 장안 함락
2.2.2. 의 위협
2.2.3. 유무주, 송금강의 위협
2.2.4. 왕세충, 두건덕을 동시에 물리치다.
2.2.5. 이세민의 지휘 스타일
2.3. 현무문의 변
2.3.1. 이건성의 공격
2.3.2. 그날이 오다
2.4. 정관의 정치
2.4.1. 세력 흡수
2.4.2. 천하를 다스리는 문제
2.4.3. 현명한 내조자
2.4.4. 동돌궐과 고창국 정벌
2.5. 고구려와의 악연
2.5.1. 전쟁 원인
2.5.2. 패배
2.5.3. 결과
2.6. 그 외에
3. 자식 농사


1. 개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을 말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그야말로 먼치킨. 후대 원나라쿠빌라이 칸이 언급할 정도니 남송이 망해가는 그 시기까지 당 태종의 위명은 유명했다고 할 수 있다. 몽케 칸 사후 원 내부에서 대칸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때, 당시 태자였던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 쪽으로 귀순하자, 쿠빌라이가 "고려는 당 태종조차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인데, 이러한 나라의 태자가 제 발로 나에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할 정도면 당 태종의 명성이 후대에까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군주의 업적을 말하자면 눈부신 전공을 세워 영토나 국가의 위신을 크게 넓히거나, 뛰어난 정치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체제를 정비하는 것을 말할 텐데, 당태종은 시작부터 눈부신 군공을 세워 중원을 평정했고, 여러 신하들을 포용한 정치로 혼란스러웠던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돌궐 등을 공격해 국내외의 싸움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고구려 원정은 자기 대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다만 그런 업적의 이면에, 형제를 참살하고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기록상에서도 형제들이나 아버지 이연의 공을 가능한 작게 하고, 당 태종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업적을 과장했다는 의혹을 많이 받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라는 나라를 말하면서 당 태종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고, 또 당나라가 중국 역사에 남긴 발자취가 적지가 않은 만큼 중국 역사에 있어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름 이세민(李世民)은 피휘의 대표적인 예이기도하다.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 있다고 하다. 적절하다 하지만 世와 民이 모두 일상에서 매우 많이 쓰이는 상용한자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피휘가 걸리게 되었다. 세충이세적의 경우 '세'를 공란으로 만들었으며, 세가인도 절대(代)가인이 되었다. 관세음보살(→ 관음보살)도 희생자 중 하나. 6부 중에 민부가 호(戶)부가 되었으니 조선시대 6의 호조로 이어지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 외 수많은 세를 쓰는 단어도 대(代)로 고쳐졌으니(치세 → 치대. 세종(한무제) → 대종), 당의 멸망 이후 세라는 말과 합쳐져 세대가 되었다. 아버지 이연과 함께 여럿 고생시킨 이름 이렇듯 이세민의 경우는 피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재미있는 건 또 임금의 이름은 정작 직접 쓸 수 없어서 이세민은 비슷한 뜻과 모양의 이대씨(李代氏)로 표기되었다. 또 잉어를 '리(鯉)'라고 읽으니 당의 성씨와 겹친다며 이를 막고 먹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분이 격상(?)된 잉어는 이후로 붉은 비늘 선생(적선군, 赤鮮君)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자의 성씨가 이 씨니 그를 태상노군이라고 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2.1.1. 출생

이세민의 아버지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은 북주 팔주국(八柱國) 가문으로, 굉장한 가문이었고 당국공은 세습되어 내려온 지위였으며, 수나라의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과는 이종 사촌 사이였다. 그야말로 귀족 사회에서도 최고로 높은 수준이었던 것.

이연의 부인이 되는 두 씨도 가문 빨로 보면 ㅎㄷㄷ했는데, 두 씨의 아버지 두의(竇毅)는 신무공(神武公)에 봉해졌던 사람이고 황실과 결혼 관계를 맺어 인척이기도 했다. 두의의 딸 두 씨는 북주의 명군 무제(武帝)에게 어린 나이에 조언을 할 정도로 똑똑했고 궁궐을 드나들며 자라면서 귀족 사회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대립이나 문제에 있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북주의 정권을 찬탈했을 때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외삼촌의 나라를 구해야 했을 텐데!"

이런 여장부와 이연이 결혼하게 된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어느 날 두의는 딸이 혼기가 차자 독특한 방법으로 사내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 영감은 대문 앞에 두 마리의 공작 그림을 걸어놓고는, 백보 앞에서 화살을 쏘아 보라고 하였는데 게중에 공작의 눈을 맞추는 사람이 있으면 딸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 물만 먹고 있을때 이연이 나섰다. 활을 쏜 그는 백발백중하였고, 결국 현명한 미인을 얻을 수 있었다. 둘은 매우 사이가 좋았는데, 여기에서 나온 아이들은 4남 1녀였다.

  • 첫째 아들 이건성(李建成)
  • 둘째 아들 이세민
  • 셋째 아들 이현패(李玄覇) - 일찍 죽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당 관련 소설에서는 킹왕짱인 먼치킨 장수로 등장
  •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
  • 딸 평양소공주(平陽昭公主)

섬서(陝西)의 무공(武功) 지역, 599년 1월 23일. 수문제의 개황(開皇) 19년에 이세민은 태어났는데, 용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점쟁이가 이세민의 얼굴을 보고 "귀인이다" 라고 했다는 등, 이런 인물이면 거의 당연히 따라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특이한 것은 보통 이런 이야기는 개국 군주의 일대기에서 나오는 법인데, 당태종의 이야기에 이런 소리들이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즉 그만큼 이세민이 당나라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2.1.2. 젊은 날

어린 시절 이세민이 어떤 것을 하였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선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훗날 당태종이 된 이세민은 위징(魏徵)에게 "내가 공부를 안 하고 싸우는 기술만 익혀서 황제 노릇하기가 힘들다."라는 말을 했고, 도박하고 돌면서 무리 지어 다니기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책보다는 칼을 많이 다루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도움이 되었는데, 거리를 다니면서 익혀둔 얼굴들은 거병에 도움이 되었고, 칼을 잡으며 익힌 무예와 기술들은 전장을 휩쓰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2.1.3. 진양기병

616년 이연은 태원유수로 임명되어 진양에 기반을 잡았다. 우선 농민 봉기를 진압하면서 순조롭게 일을 벌였는데, 그 다음은 돌궐(突厥)이 문제였다.

돌궐의 공격에 이연은 져버렸고, 포악한 수양제의 보복이 두려웠기에 이연은 '처벌을 받느니 차라리 먼저 손을 쓰자'는 생각으로 하동(河東)에 있는 장남 이건성을 서둘러 불러들이는 등 준비를 벌였다.

이 진양에서의 일에 대해서 '이세민이 주도했다'와 '이연이 주도했다'라는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어찌되었건 결정을 내리는 건 이연이라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거병 과정의 중심인물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 태원유수 이연
  • 이세민
  • 이연의 가장 친한 친구, 배적(裴寂)
  • 진양령(晋陽令)유문정(劉文靜)

당시 진양에는 왕위(王威)와 고군아(高君雅)아라는 수나라의 충신들이 있었는데, 이연의 이런 움직임을 몹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 손순덕(長孫順德)과 홍기(劉弘基)가 눈에 띄었는데, 이 두 사람은 훗날의 능연각훈신들이다. 그런데 이때 이 사람들은 고구려 원정을 떠났다가 도망친 사람들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은 백성들의 눈에 시망 그 자체로 보였기에, 어떻게든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중 유홍기는 아예 일부러 농민의 소를 죽여서 죄를 짓고, 농민이 자신을 신고하지 않자, 스스로 상관에게 가서 "나 좀 잡아가세요"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자 이연에게 보호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냥 탈주했던 일반 병사들도 많았다. 이들은 사방에서 할거하는 군웅들이나 도적 떼의 병력으로 편입되었다.

이런 범죄자들이 이연의 보호 아래 어슬렁거리자 왕위와 고군아가 의심을 하게 된 것도 당연했다. 둘은 어서 손을 쓰기로 했는데, 평소 술 마시고 놀며 인심에 후하던 이연에게 마을 촌장이 달려와 이 계획을 알려주었다. 결국 일을 먼저 시작한 것은 이연이 되었고, 유홍기와 장손순덕에게 명해 왕위와 고군아를 가두고 죽여 버렸다.

"이 자들이 돌궐과 손을 잡고 모반을 꾸몄다!"

이렇게 일을 꾸미면서 또한 운이 좋았는데, 마침 돌궐이 근처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연의 명분은 강해졌는데, 대신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진짜로 돌궐이 공격하면?

굳이 지금은 아니더라도, 만약 이연이 다른 군웅들과 대립하는 중에 돌궐이 뒤를 치면 시망이 될 것은 너무나도 뻔했다. 이연은 여기서 후대에 비난을 받기도 하는 대응을 했는데, 동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신하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시필가한은 만족스러워했고, 어느 정도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2.2. 천책상장(天策上將)

2.2.1. 장안 함락

이연은 거병 후에 뜻밖의 선택을 했는데, 근거지인 태원을 버리고 관중 지방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판단이 가능했던 것은 수양제가 수나라의 정예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관중이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수도 장안이 있는 수 제국의 중심지인데다 마땅한 적도 없었기에, 이연의 세력은 곧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이밀이었다. 당시 최강의 세력을 가진 반란군이며 낙양을 공격하고 있던 이밀의 세력은 이연에게 부담이 되었고, 관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연은 이밀에게 "대제" 운운하면서, 자신은 용의 비늘을 잡고 봉황의 날개를 붙잡을 뿐이라는 식으로 공손하게 굴어 이밀에게 호의를 사 무사히 관중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연은 막내 이원길을 태원에 남기고 장남 이건성과 이세민을 앞세워 장안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유민, 반란세력들이 합류하여, 3만이던 군세는 무려 20만으로 증가하게 된다. 617년 11월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13살의 양유(공제)를 수나라의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우며 스스로 당왕(唐王)을 자처했다. 또한 그 해 퇴위당한 수양제가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기반을 잡고 있던 무렵, 첫 번째 난관이 닥쳐오게 된다.

2.2.2. 의 위협

천수 일대를 장악한 군웅 설거는 수나라의 신하로 돌궐을 막다가, 전국이 난리가 나자 재빨리 자신을 패왕으로 일컬었다. 그리고 남들이 감히 황제 칭호를 쓰지도 못할 때 "진나라의 제왕"이라고 자처하며 호기로운 모습을 보였다.

설거는 우선 자신의 아들 인고(薛仁皐)를 파견했다. 그런데 당나라는 이세민을 보내어 이를 무찔렀다. 그러자 설거는 기마병을 이끌고 직접 출정하였다. 그런데 이세민이 학질에 걸려서, 지휘를 개산(殷開山)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능연각 공신들 중에 한 명이다.

그런데 기마병을 다루는 데 능한 설거는 전투의 전문가로, 은개산은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살아났고, 이세민도 줄행랑을 놓는 굴욕을 맛보았다. 안시성에서 퇴각할 때를 빼곤, 이세민이 이렇게까지 몰린 적은 이때가 유일.

설거의 기세는 엄청났고, 아예 장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시도를 했기에 당나라로서는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되려는지, 618년 설거는 정말 어이없게 급사해버리고 만다. 후계자는 설인고가 되었지만, 이 정도는 아버지에 비해 그다지 대수로운 상대도 아니었다. 12월 설인고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세민은 우선 버티면서 교전을 벌이지 않았고, 적의 보급선을 괴롭혀 주다가 한방에 밀고 나가서 승리하여 설인고를 항복시켰다.

2.2.3. 유무주, 송금강의 위협

산서 일대의 군웅은 유무주(劉武周)로, 돌궐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당초에 유무주는 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송금강(宋金剛)이라는 장수가 자기 부하를 이끌고 항복한 이후에는 송금강의 말을 듣고 상당히 귀가 솔깃해져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송금강에게는 울지경덕(尉遲敬德)(尉遲는 울지로 읽는 게 정확하나 잘 알려지지 않음)이라고 하는 맹장까지 있었던 것이다.

유무주와 송금강은 산서성의 완전 병합을 노리고 마구 남하했고, 최종적인 목표는 진양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당나라 내부에서 문제가 생겨버리고 만다.

진양기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진양령 유문정이었다. 그런데 이연은 친구인 배적을 편애했고, 둘이 다툴 때마다 배적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유문정은 술을 먹고 불평하다 반역죄로 잡혀오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세민은 유문정의 편을 들어주는 말을 했고, 이연은 그 사실에 크게 분노하였던 것이다. 유문정은 결국 죽었고, 이때부터 조정─그리고 이연─과 이세민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불만이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배적이 공이 적다는 것이었기에, 이연은 배적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배적을 사령관으로 삼아 유무주를 상대하게 했지만……

망했어요……당연하게도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배적은 탈탈 털렸고, 심지어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패배를 겪었다(……). 결국 이연의 넷째 아들 이원길이 철수를 주장해서 당나라 군대는 태원을 버리고 달아나고 유무주와 송금강이 산서일대를 완전 장악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와 버리고 만다. 대신 배적은 처형은커녕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산서를 손에 넣은 유무주와 송금강은 미친 듯이 하동으로 몰려들어왔고, 이연은 하동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이때 이세민이 나섰다.

"3만의 군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619년 11월, 그야말로 당나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세민은 송금강을 막기 위해 출동하였다. 이때도 이세민은 설인고를 물리쳤을 때의 전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직접적인 교전을 피한 채 송금강의 보급로만 지독하게 공격했는데, 사실 파죽지세로 진격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길어진 보급로 때문에 송금강의 상황은 좋지가 못했던 것. 그렇게 6개월을 버티자 결국 송금강은 후퇴하고 마는데, 이 기회에 이세민은 곧바로 역공을 취해 파도와 같이 몰고 나아갔고, 결국 송금강과 유무주는 돌궐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은 이용가치가 없었고, 돌궐에서는 이 둘을 살해하였다. 원상, 원희로군

거기다 이세민에게는 기쁜 일이 있었는데, 울지경덕이라는 의 명수를 부하로 얻게 된 것이었다. 이세민의 부하들 중에는 울지경덕을 못 믿겠으니 죽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울지경덕을 거두어서 썼다.

서북 지역의 위협은 이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본래 하동을 지키는 임무에서 역으로 를 되찾고 의 유무주까지 박살낸 이세민의 엄청난 무공에 당나라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곧바로 이연은 이세민을 익주의 행대상서령(行臺尙書令)으로 임명하였다. 기세를 탄 이세민은 쉴 틈도 없이 620년 7월, 하남으로 남하하였다. 하남에는 세충이 있었다.

2.2.4. 왕세충, 두건덕을 동시에 물리치다.

이 무렵 이밀은 왕세충에게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낙양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낙양의 주인이 왕세충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워낙 이밀과의 싸움이 피해가 커서 세력이 아주 좋지는 않았는데, 이세민은 바로 그런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왕세충과의 전투는 혈전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세민은 승기를 잡고 왕세충을 낙양성 내에 가두는 데 성공하였다. 승기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두건덕이 군사를 몰고 왕세충을 도우러 온 것이다.

하북의 두건덕은 농민 봉기군 출신인데, 이전까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그는 이세민이 왕세충을 몰아넣는 모습을 보자 위기를 느꼈다. 본래 두건덕과 왕세충은 별로 사이가 좋지도 않았지만, 왕세충이 패배한다면 당나라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 자명했기에, 대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것이다.

이에 이세민의 진영은 엄청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왕세충과의 혈전도 쉽지가 않아 군사들이 많이 상했는데, 이 와중에 두건덕을 이기는 것은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퇴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단호한 방법을 취했다. 이세민은 동생 이원길에게 낙양의 포위를 맡겨 두고, 가뜩이나 완전치 않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재빨리 무뢰관으로 입성했다. 이런 요충지의 관문을 빼앗겨 정면 대결로 간다면, 이세민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단 무뢰관에 들어간 이세민은 두건덕이 싸움을 걸어도 또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두건덕의 병력은 한 달 동안 꼼짝도 못했고, 이때 두건덕의 책사 능경(凌敬)은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닙니다. 이세민에게는 무뢰관을 계속 지키라고 하지요! 차라리 하북으로 북상해서 당나라의 를 바로 칩시다. 그리하면 낙양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도 돌아갈 테니, 왕세충은 그러면 자연히 구원되겠지요"

이른바 전국시대 손빈방연을 물리친 "위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구한다"는 계책이었는데, 두건덕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자 두건덕의 부인마저 나섰다.

"대왕께서 당을 공격하고, 다시 돌궐이 관중을 공격하면 틀림없이 포위가 풀어질 터인데, 어찌 여기서 군비를 소모하고만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두건덕은 "아녀자가 끼어들 곳이 아니오!"라면서 그 충언을 무시했다(...).

한편 적진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을 때, 이세민은 다시 폭풍처럼 몰아칠 준비를 끝내놓았다. 정오가 되어 두건덕군의 전의가 많이 떨어졌을 때, 이세민은 기병을 동원해서 마구 적군을 휘몰아쳤다. 두건덕도 기병으로 적의 기병을 막으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이라 재빨리 대처를 못했고, 이때 이세민은 직접 나서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적의 사방을 헤집어 버렸다고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건덕의 주력은 궤멸되었고, 두건덕은 생포되었다. 낙양까지 끌려온 두건덕을 본 왕세충은 일이 다 끝장났다고 생각해서 항복하고 만다. 그 후 왕세충은 이연에 의해서 목숨만은 구하지만, 결국 자기가 처형했던 사람의 아들에 의해서 암살당한다.

유무주를 쳐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때려잡은 이세민의 무공은 어마어마했다. 620년 10월, 당나라 조정은 이세민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이 막대한 공 때문에 갈등이 벌어지고 만다.

2.2.5. 이세민의 지휘 스타일

전술 중 특기할 만한 것은 기동력을 중시했다는 것. 그의 군대는 무거운 철갑을 입은 중기병보다 최소한의 철갑에 가죽을 덧댄 갑주를 입은 경기병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그와 휘하 장군들의 전술은 대체적으로 일단 수비를 굳건히 하고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다가, 날랜 경기병을 이용해 상대의 보급을 무력화 시키는 와중 한순간에 승기를 잡아내어서 포...포풍 같이 몰아붙여서 이기는 형태였다. 적의 후퇴할 시에는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남은 적의 전력을 포위 섬멸하였다. 이것은 유목민의 빠른 기동력과 전술을 모방한 것으로, 이연, 이세민 세력이 기본적으로 돌궐과의 투쟁을 기반으로 힘을 길러온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전술로 이세민의 군대는 연전연승하게 되고, 이런 무공을 바탕으로 이세민은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세민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정예 기병 양성에 힘을 기울여, 통일 전쟁 때는 물론, 이후 돌궐, 서역 그리고 고구려 정벌에서도 효과를 보았다.

2.3.1. 이건성의 공격

당나라가 건국되고 안정되는 데 이세민의 공훈이 그야말로 막대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이는 이건성이 건국 과정에서 당고조의 본거지인 태원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건성이 손 놓고 앉아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역시 군사적으로 활동하여 당의 건국에 공적이 적지 않았다. 이세민의 공적이 크다고 하나, 이건성 역시 공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따로 심각한 결격 사유도 없었다.

이세민이 태자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만, 지금 태자는 이건성이었던 것이 문제다. 이건성은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세민에게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세민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세민 역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형을 공격해야만 하는 안 좋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갈등이 아직 표면화되기 전, 뒷날의 대결을 짐작한 이세민의 진왕부와 이건성의 태자 진영은 경쟁적으로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문학관(文學館)을 장악한 이세민은 18학사(十八學士)들을 자신 편으로 만들고, 일종의 참모양성소 비슷하게 꾸몄다. 또한 수하인 돌통(屈突通)을 낙양에 남기고, 장량(张亮)을 시켜 낙양의 호걸들을 알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또한 방현령(房玄龄) 등 역시 꾸준히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이세민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이세민이 정복전쟁을 하면서 그의 세력이 일치감을 가졌다는 것과, 이세민이 지나간 사방에 자기 세력을 남길 수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성도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고 자기편을 끌어모았다. 둘의 인재 풀(pool)은 대략 이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성에게는 매우 막강한 카드가 있었는데 바로 제왕 이원길이었다. 이연의 넷째 아들로 이건성과 이세민의 동생이 되었는데, 몹시도 잔혹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생긴 것도 추하게 생겼다고 하고, 부하들을 두 패로 갈라 진검을 주고 막싸움을 시키는가 하면, 자기에게 충고하는 유모를 부하를 시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하는 천하의 개쌍놈 같은 일화도 있다. 물론 이세민이 당 태종이 된 후에 일부러 안 좋게 왜곡시켰을 수도 있다.

이건성 휘하의 신하들이 이세민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워낙 공도 큰데다 무엇보다 황제의 아들이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 이건성 자신이 나서는 것도 좋지 않았는데, 태자가 진왕을 견제한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원길은 달랐는데, 제 3자 입장에 있는데다 황제의 아들인 이원길은 언제든지 이연 앞에서 이세민을 공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둘의 연합은 이세민에게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태자의 책사 위징도 위협적인 인물로, 깐깐한데다 영리한 위징은 뛰어난 참모였기에 진왕부의 가장 큰 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황제가 된 이연과 이세민이 사사건건 충돌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연은 여러 번 측근에게 "둘째는 사람이 달라졌다." "이제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마음이 많이 떠나버렸던 것.

그러다가 두건덕의 부하인 유흑달(劉黑闥)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초 조정에서는 이세민을 파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유흑달의 세력이 막강하여,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이세적이 패배하였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이세민을 파견하여 진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세민이 철수한 후 유흑달은 다시 돌궐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이건성이 움직였다. 바로 위징과 왕규의 간언 때문이었다.

"진왕의 공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태자께서는 동궁에 계시느라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흑달의 난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어마어마하니, 태자께서는 이를 무찌르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산동 호걸들이 지지해줄 것입니다."

이에 이건성은 당고조 이연에게 말해 출정하였고, 반란을 진압, 산동에 자신의 세력권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이세민의 대공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세상에 당나라에 진왕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할 순 있었다.

거기다 이세민은 아버지인 황제 이연의 비빈들에게 전혀 평판이 있지도 않았고, 평판을 키울 생각도 없었던 것에 비해, 이건성은 어느 정도 그쪽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비빈들은 계속해서 이연에게 이세민에 대한 험담을 해댔다.

이건성이 가지고 있는 이 힘이 여실 없이 들어간 것이 양문간(楊文幹) 사건이다. 양문간 사건으로 이건성은 큰 피해를 입을 뻔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결과가 나왔다. 길긴 하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면, 양문간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건성이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이건성의 소행인지, 진왕부 쪽의 책략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태자가 기를 쓰고 반란을 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아무튼 이 일로 이건성은 큰 공격을 받았고, 결국 이연은 이세민을 태자로, 이건성을 촉왕으로 하겠다고 말을 하였고 이세민은 양문간의 반란을 진압하러 떠났다.

한참 이세민이 싸우고 있었을 때, 갑자기 다른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 일 없뜸이라는 것. 바로 이 일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이원길, 그리고 황제의 비빈들이었다. 이연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이다. 이연은 위징, 왕규, 그리고 진왕부의 두엄을 처벌하는 것으로 이 일을 끝내버렸다.

처음에는 이세민의 대공에 기가 눌리던 이건성이지만, 점점 정치적인 투쟁에서 유리한 쪽을 점해가고 있었다. 태자 일파에서는 끊임없이 이세민에 대한 안 좋은 소리를 이연에게 하고, 이연은 그럴수록 치를 떨었고, 반대로 진왕부 쪽의 공격은 어느 정도 대처하면서 막아내고 있었다. 또한 진왕부의 인물들을 여기저기 흩어놓으면서 분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일대 전환점이 다가왔다.

2.3.2. 그날이 오다

626년, 돌궐이 당나라의 변방을 공격했다. 이건성은 이 기회를 이세민 일파의 일망타진 기회로 여기고, 이원길을 통병원사(統兵元師)로 추천하여 돌궐군을 막는 병사들을 지원하라고 권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실 목적은 이 지위를 이용해서 울지경덕, 진경등 진왕부의 사람들을 참전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전시의 사령관이면, 아랫사람 목을 베어버리는 거야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계획은 이세민 일파로 흘러들어가고 만다. 이에 진왕부는 격렬하게 들끓으면서 반발했다. 아예 이 계획이 현무문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세민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당시 방현령과 두여회는 조정의 신하라는 신분이었기에 이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신 장손무기가 중심이 되어 무력을 써서 단호하게 일어나자고 설득했다. 이세민은 어물거렸지만, 울지경덕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왕께서 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저도 대왕 곁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대왕께선 지켜보기나 하십시오!"

그때서야 이세민은 움직이며 자신의 칼을 울지경덕에게 주면서 방현령과 두여회를 불러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지 않을 경우, 베어버리라고 하면서 ㄷㄷ

626년 6월 3일, 이세민은 황제 앞에 나서서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연의 후궁들을 강제로 희롱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러면서 몹시 격렬한 언사를 취했다.

"저는 죽습니다만은, 그보다 죽어서 왕세충과 두건덕을 보는 것이 더 수치스럽습니다!"

조정에서는 다음날 대질 심문을 해보겠다고 입장을 밝혔는데, 이 고발은 물론 황당무계한 것이다. 하지만 이세민의 목적인 이건성을 불러들이는 데 있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이원길은 이건성에게 차라리 병력을 모으고 핑계를 대어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충고했지만, 이건성은 이미 준비는 철저하단 이유로 거절하였다.

6월 4일 새벽, 이건성과 이원길은 밖에서 서로 만났다. 그리고 현무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가던 이건성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갑자기 이세민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이건성을 불렀다고 한다.

"대형(大兄)!"

이세민은 전 무장한 채로 그 자리에 나타났는데, 이원길은 놀라 세 번 화살을 쏘았지만 너무 당황해서 모두 맞히지를 못했다. 반면에 준비를 하고 있던 이세민은 --선빵을 받자마자— 단 한 발에 이건성을 쏘아 맞혔다. 자신의 친형을 직접 죽여 버린 것이다. 그 즉시 이건성이 데려온 수하들과 이세민의 부하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숫자에서부터 이미 차이가 확연하게 나버렸기에, 싸움은 일방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형을 죽인 일이 이세민 본인도 워낙 놀랍고 떨리는 일이었던 것 때문인지 이세민은 나무에 걸려 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원길은 이때 이세민의 화살을 뺏어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울지경덕은 그런 이원길에게 달려들어 그를 살해하였다.

상황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울지경덕은 혈전을 벌이고 몸에 피칠갑을 한 그대로 이연에게 달려갔다. 마침 연못에 배를 띄우고 구경하고 있던 이연은 깜짝 놀라 누가 반란을 일으켰냐고 질문했는데, 울지경덕은 태자와 제왕(이원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왕(이세민)이 진압했으며, 이연이 놀라지 않기 위해서 진왕이 자신을 파견했다고 말했다. 겁에 질린 이연은 이세민에게 병권을 넘겨주었다.

며칠 후에 이세민은 태자가 되었고, 두 달 후에는 황제가 되었다.

2.4. 정관의 정치

2.4.1. 세력 흡수


이세민은 형과 동생은 물론, 그 가솔들까지 학살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 일파의 죄는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당태종의 일파가 기회를 잡아 눈엣가시이던 이건성 쪽 사람을 처리해버리는가 하면, 당태종을 따라 왕세충 등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장수 왕군곽(王君廓)은 이연의 사촌이자 이건성 일파인 유주대도독 이원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는, 왕군곽 스스로가 반란을 진압하고 조정에 보고해서 유주자사가 되었다. 흠좀무.

이런 혼란 속에 이세민이 해야 하는 것은 물론 민심을 얻는 일이었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이세민은 세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래서 맨 처음 취한 조치가 환속 중지였다. 그 당시 당나라는 정부 정책으로 불교와 도교의 절, 사원들 대부분을 밀어버리고 도사와 승려를 환속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사회에 부정부패가 심해지면 이런 쪽에서 땡중들이나 사이비 도사가 설치는 등 폐단도 있었기 때문에, 정책 자체는 나쁘다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려도사가 각각 20만을 훌쩍 넘는 엄청난 인원인데, 반발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신자들을 새로 즉위한 황제 당태종의 이름으로 다시 제 집을 찾아주게 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좋지 않지만, 일단 당태종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릴 수 있는 묘수였던 것이다.(이런 일이 삼무일종법난의 세 번째인 무종때 반복된다.)

둘째, 계급이나 서열을 크게 따지지 않고, 의견이 있는 신하들은 모두 상소로 정책을 올리도록 했다. 이건 모든 관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로, 황제의 눈에 들 기회가 생긴 관료들의 여론을 단기간이지만 좋게 만들 수 있었다.
위징

셋째, 3천명이나 되는 궁녀들에게 자유를 주고 풀어주었다. 이렇듯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당태종은 노력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과거 이건성의 일파였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건성과 이원길 일파에 대해 더 이상의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 그 일파들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설만철, 그리고 위징 등이 대표적인데, 위징은 이건성의 책사로서, 적극적으로 당태종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위징을 불러서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의 사이를 어지럽혔는가?"

"모시는 사람이 주군을 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 말을 따랐다면 이전의 태자께선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징의 말을 들은 당태종은 그를 벌주지 않고 중용했다. 당태종이 이건성 일파에 대해 포용과 화합을 목적으로 내세운다면, 위징만큼 적절한 대상도 없었을 것이다. 이건성 일파를 대표하는 사람이 위징이니 말이다. 위징을 끌어안으면 이건성 일파를 거의 다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당태종은 위징을 하북으로 보냈고, 위징은 그곳에서 별 무리 없이 이전 이건성의 사람들을 통제하여 현재 당태종의 체제에 복속되도록 도왔다. 물론 아주 완벽한 것은 아니라서, 이건성의 측근이었던 이예의 반란이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틈을 메꾸고 통합하는 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2.4.2. 천하를 다스리는 문제


당태종 즉위 두 달째, 위징과 봉덕이를 부른 당태종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현재의 세상이 아직 어지럽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강하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봉덕이의 주장이었고, 부드럽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위징의 주장이었다. 위징은 여기서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는데, 꽤 유명한 말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다스리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굶주린 자가 음식을 먹으면 금방 배 부르는 것과 같이 오히려 더 쉽기도 하지요."

일단 정책이 이렇게 결정되자 그에 따라서 많은 일들이 처리되었다. 우선 너무 많은 관리들을 정리하고 조직을 간소화했다. 그리고 많은 현과 주를 간략하게 합쳤는데, 너무 세부적으로 분할되면 백성들이 받는 고통이 많아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의창 제도를 실시해 식량을 비축해두고 빈민 구제에 사용했다. 흉년이 들면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

또한 사형을 극단적으로 줄였다. 오부주(五復奏)와 삼부주(三復奏) 제도를 실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소를 5번, 혹은 지역에 따라 3번을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으로 사형 당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는데, 동시에 사형 집행을 할 수 있는 날짜도 극단적으로 줄여버렸다.

보통 2월 4일인 입춘부터 대략 9월 23일인 추분까지 사형을 금지시켰는데, 그 외의 날도 다른 날도 제사가 있다, 초하루다, 상하현이다, 이다, 밤이다, 해서 사형을 금지시키니 사형 집행할 수 있는 날짜는 엄청나게 줄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밀리고 밀리다 보면 다시 사면이다 해서 사형수가 형이 감형되거나 풀려나기도 하였고, 정관 4년, 중국 전역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29명이었다.(이런 일이 또 청나라의 먼치킨 강희제 때 있었다.)

또한 소소하게 사람을 곤장을 때릴 때도 등 대신 허벅지를 때리도록 조치하는가 하면, 사형 대신 오른발을 잘라버리는 제도도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바꾸었다.

2.4.3. 현명한 내조자

그리고 언제든지 신하들이 자신에게 직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신하들은 거의 괴롭힘 수준으로 당태종에게 간언했는데, 물론 그 중 제일 심했던 사람이 위징이었다

"감히 간언했고 능히 간언했으며 훌륭히 간언했다."

위징을 바로 나타내는 말이다. 위징은 당태종 앞에서 목이 달아날 법한 소리를 하고도 얼굴색 한번 바꾸지도 않았고, 무슨 정책을 내려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통과시키지 않고 저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당태종을 쪼아대었고, 당태종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항상 대신들인 수나라를 예로 들어 말하며 말렸다. 참다못한 당태종이 폭발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내가 수양제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래. 하나라 이나 상나라 주왕하고 비교하면 어떤가?"

"국가에서 단 한사람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고, 단 한 푼의 세금도 거둬들이지 않아야 만족을 하겠군!"

가끔 참다 참다 못해 꼭지가 완전히 돌아서 맛이 갈 때도 있었는데, 이럴 때마다 당태종을 제어한 것이 장손황후(長孫皇后, 문덕황후 장손씨(文德皇后 長孫氏))였다. 태종의 부인인 장손황후는 후궁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특별히 악랄하고 질투심 넘치는 방법이 아니라 감싸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비빈들이 아프면 약을 주고, 그들이 낳은 아이는 자기 아이처럼 예뻐하면서 길러주었는데, 후궁들이 감격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후궁이 조용하고, 치열한 궁중암투가 사라지자, 당태종은 비교적 정치업무에 주력할 수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당태종을 제어하기도 했다. 어느 날 위징과 대화하다 엄청나게 화가 난[1] 당태종은 아예 그 자리를 빠져나와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돌아와서도 씩씩거리는 태종을 보고 장손황후가 묻자 당태종은 매우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시골뜨기 촌놈 위징 말이오. 내가 하려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를 해대니, 언젠가는 그 늙은이를 죽여 버려야지!"


그러자 장손황후는 축하하는 일이 있을 때 입는 옷을 입고 나와 태종에게 절을 했다.

"아니, 왜 그러시오?"

"전부터 위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충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폐하와 나라를 위해 정말 기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당태종은 껄껄 웃으면서 화를 풀었고, 황후는 위징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실제적으로 장손황후는 외척 개입을 막아버렸다. 장손무기는 당태종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장손황후가 외척이 정치에 개입을 하는 것을 거의 차단해버림으로써 뭔가 수를 쓸 수가 없었다. 장손황후가 죽고 나서야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소에, 장손황후는 당태종이 화를 내면, 덩달아서 "그렇군요.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같은 식으로 태종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다가 조금 화가 가라앉는 듯하면 천천히 변호하면서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 장손 황후는 40세가 되기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는데, 유언은 이러했다고 한다.

"방현령은 뛰어난 신하입니다. 중용하시지요. 그리고 외척을 중용하지 마세요. 제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주십시오."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당태종도 어이가 없어 애석해했다. 그런 그에게 궁녀들이 하나의 책을 가져다주었다.

"무엇이냐?"

"평소에 황후께서 아녀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하지 않는 일에 관한 득과 실을 모아 책을 쓰셨습니다. 글재주에 자신이 없다고 하시어 보여드리지 못했지요."

형제를 죽인 냉혹한 당태종도 그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는 울먹이면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당태종은 궁궐 내에 탑을 하나 짓고는, 틈만 나면 그 자리에 올라가 황후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징이 말했다.

"어느 쪽을 바라보십니까?"

당태종은 황후의 무덤인 소릉을 가리켰다.

"저기외다."

"아, 그러십니까? 전 폐하께서 선왕의 무덤인 헌릉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지요."

이 와중에도 위징은 황제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고 죽은 여인만을 그리워한다고 비판을 한 것이다... 배은망덕 그 말을 듣자 당태종은 신하들 앞에서 한바탕 대성통곡하고는, 눈물이 멈추자마자 탑을 때려 부셔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위징은 간언하고, 장손황후는 태종의 심기를 헤아릴 때, 실무에서는 방현령과 두여회가 많은 관료들을 줄이는 어려운 일을 맡아 완벽하게 해내었고 국고를 풍족하게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2.4.4. 동돌궐과 고창국 정벌


대외전쟁에서도 순조롭게 일이 풀려나갔다.

당태종의 가장 뛰어난 장수였던 이정은 철륵의 설연타 등과 손을 잡고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굴복시켰고(630년, 정관 4년), 몽골고원을 제압했다.(이위공문대를 남긴 그는 당나라 군대의 전법과 전술에 있어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이에 당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당 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 = )으로 추대하였고,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거란, 해, 습(飁) 등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서 당태종은 일전에 힐리가한이 장안으로 군대를 몰고 왔을 때 철군을 애걸한 원한을 갚고, 중원(천자)과 초원(가한) 양쪽 모두의 지배자가 되었다.

또한 640년 후군집과 소정방은 서돌궐에 복종했던 투루판에 위치한 고창국을 멸했다. 당태종은 위징(魏徵)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현(안서도호부)으로 편제하여 당 조정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삼았다. 고창국 멸망은 곧 당 제국의 북부와 서부에 있던 세력들이 모두 당에 복속되었음을 말한다. 이로써 당나라는 서쪽으로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게다가 이정의 당나라군은 티베트 고원 북편 경사면에 있던 토욕혼을 격파했고, 그 후, 635년에 티베트는 토욕혼을 정복했다. 한편, 서남의 티베트방면에 대해서도, 당은 641년 공주를 하가(下嫁)[2]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안정을 꾀하였다.

이제 동으로 황해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당의 주현으로 편제되었다. 이제 당은 무릇 동서 9천 5백 10리, 남북 1만 9백 19리에 달하는 대제국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당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당에 대적할 수 있는 정도의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다.

2.5. 고구려와의 악연

2.5.1. 전쟁 원인

그냥 남은 적수가 고구려뿐이었고, 당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였다.

어쨌든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신라를 괴롭히는 것을 전쟁의 핑계이유로 삼는다.
사실 집권 과정에서도 똑같이 쿠데타를 한 주제에, 고구려 정벌의 명분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였다고 하니 조금 당혹스럽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왕족이 아닌 사람이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다는 점이 다르다. 또,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고구려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지배계급의 내분으로 이어졌는데(안시성주라든가), 당태종은 이와 달리 즉위 과정에서 당태종이 인재들을 포용함으로써, 분열이나 아까운 인재손실을 방지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고구려 정벌의 명분일 뿐이었다. 당태종 자신도 단순히 명분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太宗顧謂侍臣曰, "莫離支賊弑其主, 盡殺大臣, 用刑有同坑穽, 百姓轉動輒死, 怨痛在心, 道路以目. 夫出師弔伐, 須有其名, 因其弑君虐下, 敗之甚易也."
이에 태종은 시신侍臣들을 돌아보며 "막리지(연개소문)는 그의 군주를 시해하고 대신을 다 죽였으며, 형법을 쓰는 게 함정과 같아서 백성을 움직이는 대로 죽이므로, 원한이 가슴에 사무치어 길가에서도 눈짓을 한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 구당서 동이열전 고려조 정관 17년 기사

훗날 당고종이 이것보다도 약한 명분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이건 양반이다.

이러한 빈약한 명분은 당 조정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논란이 있었다. 고구려가 당 제국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 자체는 중론으로 자리 잡았지만, 명분이 워낙 빈약하다 보니 굳이 전쟁까지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론도 등장한 것. 이 때문에 고구려 원정은 곤란하다는 중신들의 간언이 올라왔다. 특히 이제는 당연한 위징 또한 고구려 원정을 죽기 직전까지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어쨌든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인한 고구려군의 지휘체계의 혼란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태종은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실제 전투에서 적절히 이용하였다.

2.5.2. 패배

당태종은 건국 시절의 공헌은 물론이고 돌궐 정복에 성공하는 등 전무후무한 전쟁 영웅으로 유명하나, 안시성에서 패배하는 등 고구려 정벌은 실패했다.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은 연개소문이 당을 역으로 침공하여 가까스로 설인귀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는 과장된 스토리가 중국 경극에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1차 여당전쟁 참조.

고구려 침공에 동원된 당태종의 병력은 정예 10만, 항복한 병사들까지 합하면 20만이 될까 말까한 병력이었다. 그 정도 병력으로도 고구려를 쳐들어간 것은 수나라와 비교하면 실로 무서울 정도... 하지만, 정예 병력을 이끌고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하는 전술이 당태종의 전매특허였다.

일단 고구려군을 파죽지세로 깨뜨리지만 전쟁의 결과에 대해선 당나라가 패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택에서 겨우 돌아와 죽은 병사들을 위한 를 올릴 때 곡을 하니 신하들도 슬피 울었다는 기록을 보아 이세민이 패배를 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구려 원정 전까지 이세민은 연전연승과 영토 팽창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자신감에 충만한 상태였다. 애초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이유도 이세민의 고집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안시성의 승리를 통해 이세민이 처참하게 퇴각을 하게 함으로써, 이세민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더군다나 고락을 같이 했던 많은 정예 병사들을 잃고 그 자신은 에 걸렸다. 이것만으로도 당태종의 개인적 입장에선 비참하기 그지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던 위징의 주장을 회고하면서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며 크게 후회하였다.

이렇게 당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단 점에서는 당의 패배였다고 봐야 할 것이지만, 양국의 피해를 비교해봤을 때 결코 고구려의 피해가 당보다 적다고 할 순 없었다. 신당서에서는 고구려군과 야전으로 인한 당군의 피해를 육군 수천이고 수군이 수백이라고 한다. 게다가, 안시성의 승리 전까지 고구려군은 연전연패를 하면서 수많은 정예 병력이 포로가 되었다. 실례로 고연수가 안시성 구원군을 이끌고 참전했던 주필산 전투에서는 고구려군 수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당군은 말 5만 필, 소 5만 마리, 갑옷 1만 벌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주필산 전투에서 당군은 포로로 잡은 고구려군 3만 명을 다시 풀어준바 있다.) 당군은 적어도 요동성에서 사로잡은 1만 백암성+개모성+현도성+비사성에서 사로잡은 포로 약 3만 총 약 4~5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 포로를 당으로 끌고 올 정도로 여력이 있었다.

또한 당군은 이듬해 설연타와 전쟁을 벌여, 10만에 달하는 군대를 격퇴하고 설연타를 정벌했다. 고구려 원정에 당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정도였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 사건이다. 수십만에 달하는 정예병 피해는 결코 단시간에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만 명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대비천 전투 이후 당의 확장이 급속도로 움츠러들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요택에서 죽은 병사에 대한 제례는 황제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퍼포먼스고, 신하들이 울었다는 기록 또한 이 제례의 일종이다. 요택에서 당태종이 직접 풀을 베고 흙을 날랐다는 기록은 당군이 그 정도로 급박했다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이것도 태종을 솔선수범하는 성군(聖君)으로 포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사로 봄이 옳다. 태종은 요동성을 공격할 때도 직접 흙을 퍼 날랐고, 이를 통해 요동방어선의 간판인 요동성을 열흘 만에 함락시켰다. 요동성은 고구려에서 흔치 않은 평지성이자, 과거 여수전쟁에서 수양제의 100만 대군이 몰려 왔을 때도 함락되지 않았던 군사적 요충지로, 고구려의 요동 거점 중에서도 간판격이라 할 수 있는 성이었다. 따라서 이곳의 함락은 고구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군의 피해와는 별도로, 고구려는 이 전쟁으로 요동 방어선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앞서 말한 요동성은 물론이고, 도성, 백암성, 개모성, 비사성 등 요하에 있는 많은 성들이 당의 수중에 들어갔고, 많은 힘을 들여 쌓은 천리장성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 천리장성 공사의 마지막 책임자가 연개소문이었다. 결국 고구려는 1차 여당전쟁에서의 병력 손실과 요동 방어선의 와해로 당고종의 정벌(2차, 3차 전쟁)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2.5.3. 결과

결국 그 당시로선 실패한 원정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성공을 낳은 원정이라고 봐야한다.

한편 이 전쟁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하나 잃었다는 떡밥이 있는데,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태종 애꾸설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거의 천년 뒤인 고려 말기의 목은 이색의 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워낙 극적인 장면이라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줄기차게 애용되어 삼국기, 대조영, 연개소문 등의 드라마에서 당태종은 눈을 잃는다. 사실 신경이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눈은 화살을 맞는다면 즉사할 확률이 더욱 높다. 하후돈이 실제로는 깃발에 스쳐서 생긴 상처가 곪아서 눈을 잃은 것처럼, 실제로 잃었다고 해도 화살에 직통으로 맞아서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대조영에서는 양만춘이 당나라 깃발을 활로 쏴서 부러뜨리자, 거기에 맞아서 눈을 잃은 것으로 표현했다.

여하간, 자치통감에 따르면, 당태종은 "다시는 요하를 넘지 말라." 또는 '요동을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어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자치통감 권199, <당기>5, 태종문무대성대효대광효황제하지하, 정관23년 4월 임인조, 6268쪽, "罷遼東之役及諸 土木之功. 四夷之人入仕於朝及來朝貢者數百人,聞喪皆慟哭,翦髮、剺面、割耳,流血灑 地."

하지만, 구당서, 신당서의 기록에선 당태종은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 재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태종이 실제로 이와 같이 유언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고구려 따위에게 졌다라고 하면서 분개해 하기도 하고 '당분간 하지 마라'라고 유언을 남긴 것쯤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어쨌든 뒤를 이은 당고종은 즉위 6년부터 고구려 정벌을 다시 시작해서,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던 명군인 아버지가 실패한 그 고구려 정벌을 달성하고 만다. 대만일본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이것을 최대의 아이러니로 꼽았다. 이것은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로 인한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이 와해가 가장 큰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당태종 때만 해도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요동 일대에서 벌어졌지만, 요동 일대의 고구려 방어선이 태종의 침공으로 무너지면서, 고종 때의 고구려 침공 때에는 대부분의 전투가 압록강 너머 평안도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큰 성공 요인을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뒷치기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고구려 침공에서 신라는 당군의 보급부대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게다가 신라는 백제가 망한 마당에 고구려 침공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당태종의 침공 때 엄청난 국력손실을 입은 것도 있지만, 고구려 멸망 당시엔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내분으로 당에 투항한 연남생(연개소문의 장남)과 신라에 투항한 연정토(연개소문의 동생)의 경우, 자기 혼자만 항복한 게 아니라, 자신들을 따르던 국경지대의 성들까지 당과 신라에 넘겼기 때문에, 사실상 고구려의 허약해진 국경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된 셈이었다.

이 여당전쟁의 장본인이고, 삼국통일전쟁에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 이 시기를 다룬 한국 사극이 많다 보니,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외국 군주가 되었다. 한국 사극에 등장하면 야사 때문에 대부분 눈 한 쪽을 잃고 간다. 그나마 대왕의 꿈에서는 신라가 주인공이라 그런지 외눈 신세가 되지 않았다.

2.6. 그 외에

자신의 후궁 중 하나였던 재인(才人) 무 씨, 즉 무조(무미랑)는 훗날의 측천무후가 된다.

서예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는데, 왕희지의 글씨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때문에 전국에 있는 왕희지의 글씨를 삥뜯 헌납하라고 요구했는데, 왕희지의 글씨 중 걸작이라고 찬양받는 난정서만은 얻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왕희지의 7대손이자 승려였던 지영이 입적한 뒤, 그의 제자 변재가 가지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그를 황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래서 난정서를 내놓으라고(...) 신하들까지 동원하여 협박 설득을 하였으나 변재는 절대로 이를 팔지 않았고, 아예 존재 자체도 부인했다.

이에 당태종이 꼼수 머리를 써 감찰어사, 즉 국정원(...) 직원이었던 소익을 선비로 위장시켜 변재 스님에게 제자로 들어가게 한 뒤에, 몇 년 동안 극진히 모시자 마음이 동한 스님이 "자네에게만 보여주는 거야"라며 난정서를 보여주었는데, 이때 제자로 위장한 국정원 직원은 "님, 딱 걸렸음 나 사실 007 요원임 ㅋㅋㅋㅋ 감히 황제에게 거짓말을 해? 좋은 말할 때 내놓지?"이라고 하며(...) 난정서를 빼앗아 태종에게 바쳤다. 이후 태종은 난정서를 포함한 왕희지의 글씨를 자신의 무덤에 묻어달라고 했고, 결국 태종 사후 왕희지 작품은 태종의 무덤인 소릉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덤으로 변재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소익이 나쁜 놈이다 그나마 당나라 멸망 후 군벌 온도에 의해 도굴되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3. 자식 농사

(ɔ) Yan Liben from

그 외에 장손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하나같이 막장인 것도 유명하다. 당태종 사후의 제위 계승권은 문덕 장손황후에게서 난 세 아들들에게 있었는데, 장남인 이승건은 어렸을 적에는 머리가 총명했지만, 어느 날 열병을 앓은 이후로 몸이 불편해지고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성년이 된 이후부터는 돌궐족의 복장을 즐겨 입고 코스프레? 무엇보다 "내가 황제가 되면 나라를 돌궐족에 들어 바치겠다"투의 망발을 하여(...)역적 노무 시키 당태종의 눈 밖에 났다고 전해진다. 건국 초에 당나라는 언제나 돌궐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당태종은 그러한 돌궐과 정말 피터지게 싸웠다. 그런 돌궐을 두고 숭상하는 꼴이 되었으니 화가 날만 하다. 당나라판 소현세자? 또한 남색을 즐겨서, 아름다운 미소년 동심을 곁에 두고 아끼다가 그가 죽자 동상을 세우고 그 앞에 통곡하는 짓도 해서(...)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자리 근처에도 못 갔다.

둘째 아들인 이태는 성격이 괄괄하고 유난히 힘이 장사라, 당태종이 가장 아끼던 자식이었다.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비대해지고 게을러져서, 나중에는 황궁 내에서도 가마를 타고 이동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졌고, 그 역시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본래 당태종이 형제들을 주살하여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일을 무척 후회하였기 때문에, 괄괄한 성격의 태가 황제가 되어 그 형제들을 해칠 일을 염려하여서,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그 외에도 이승건과 이태는 아버지인 당태종에게 대드는 일이 잦아져서 차츰 관계가 악화되었고, 특히 이승건은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영영 폐태자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로 얼마 가지 않아 죽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암살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본래 병약했던 몸이라 요절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겠다만...

결국 당태종과 장손황후의 아들 중에서 3남으로 전체 아들로 치면 9남에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인 이치가 제위를 물려받아, 훗날의 당고종이 되었다. 애초에 마이페이스 기질이 강한 이승건이나, 성격이 거친 이태보다는 비교적 유약한 성격인 이치가 다루기 쉬워서 대신들이 당태종에게 치를 후계자로 삼도록 권했다는 말도 있다.

당고종의 군주로서의 평가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인 당태종이 워낙 먼치킨이다 보니 비교당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아내인 측천무후가 그의 사후 정권을 장악하여,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마누라 단속 못했다고 후세 사람들에게 지대로 까였다(...). 덕분에 이 후계자 문제는 고구려 원정과 더불어 당태종의 대실책들 중 하나로 꼽힌다.

확인되는 그의 유언을 보면,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과연 얘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품고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

"짐은 공들에게 대사를 맡기노라.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러운 것은 공들도 아는 바이니 그를 잘 보좌해 달라."
- 장손무기와 저수량에게, 신당서 장손무기전, 자치통감
"장손무기수량이 있으면 너는 천하에 관하여 걱정하지 말라."
- 당고종에게, 신당서 장손무기전, 자치통감
"장손무기는 나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니, 내가 천하를 갖게 된 것은 대부분 그의 힘이었다. 내가 죽으면 참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이간시키게 하지 마라."
- 저수량에게, 구당서 저수량전, 자치통감

안습...

일설에 따르면 3남이었던 오왕 이각이 문무에 출중하여 당태종은 그를 총애하였고, 이승건과 이태가 문제를 일으킨 후에는 이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었다고도 한다. (후궁에게서 본 아들들까지 포함하면 이승건은 장남, 이태는 4남, 이치는 7남(혹은 9남)이었다.) 이 얘기는 이각의 어머니가 수양제의 딸, 즉 수나라 공주이기 때문에 어불성설이 아닌가도 싶지만, 어차피 수황실이나 당황실이나 다 같이 관롱귀족 중에서도 무천진집단의 일원이라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무천진집단은 오랫동안 서로 통혼하던 사이라, 당태종도 따지고 보면 수황실과 인척 관계다. 문제는 장손무기가 이에 반대했다는 것. 장손무기의 위상이 갈수록 강화되어 가던 게 당태종 말년이니만큼, 장손무기의 반대는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다.

결국 장손무기의 의향에 따라, 그가 찬성한 진왕 이치가 후계자가 되고, 그가 반대한 오왕 이각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으며, 얼마 안가 역모죄로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의 친동생이었던 촉왕 이음 또한 마찬가지로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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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대의 소설(문학적 의미의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야사 형식) 수당가화(隋唐嘉話)라는 문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당 태종이 산남으로 놀러 가려고 했다가 위징이 성낼까 싶어 그만두었는데, 마침 성묘 갔다 돌아온 위징은 "사람들은 폐하께서 산남으로 간다는 소문을 들어서 채비를 했다고 하는데, 소문일 뿐이었고 실제로 가지는 않으셨다지만 애초에 이런 소문이 왜 났을까 모르겠습니다."라고 기어이(...) 한소리 했고 태종은 "그때 실은 마음은 있었지만 경이 성낼까봐 그만둔 것이다."라고 둘러대기 바빴다고. 이 일로 당 태종은 (너무 노한 나머지) 그날 조회도 일찍 파했다.
  • [2] 중국식 표현이다. 실제론 논란이 되고 있다. 티베트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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