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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last modified: 2015-07-02 02:20:26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실태
4. 붉은 군대에 대한 숙청
5.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6. 결과와 후폭풍
7. 수정주의
8.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


"네가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여버렸잖아!"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자신을 비난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돼지고기 요리가 담긴 접시를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깨버리고[1] 내뱉은 말.

1. 개요

death_note_soviet_edition.jpg
[JPG image (21.72 KB)]

소련판 데스노트


(ɔ) Soviet government from

대숙청 당시에 스탈린의 숙청 대상자 목록[2]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저지른 희대의 뻘짓 중 하나. 주도적인 위치를 담당한 니콜라이 예조프의 이름을 따 예조프시나(Ежовщина)라고 부르거나 피의 숙청이라고 불린다.
1935년~1938년 사이의 기간 동안 정치, 경제, 국방 등 소련 각계에서 스탈린과 좀 덜 친하다 싶은 사람들이 모조리 쓸려나갔던 사건이다. 하필이면 대숙청 직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이 전쟁에서 소련군이 막장스런 모습을 보여서 군부의 대숙청이 유명하지만 사실 군부는 대숙청의 후반기인 1937년 즈음에 쓸려나갔다.

(ɔ) Unknown from


왼쪽부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당시 국방장관), 몰로토프(후에 외교장관), 스탈린, 예조프. 제일 작은 땅꼬마가 니콜라이 예조프. 일명 피의 난쟁이로 불렸으며, 키가 163cm에 불과한 스탈린보다도 머리 하나가 작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51cm.

(ɔ) Unknown. from


그러나 이 숙청의 주도자였던 니콜라이 예조프조차 숙청당했다. 숙청된 뒤 저 사진에서 바로 삭제된다.

2. 배경

농업정책 실패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스탈린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그 대안으로 떠올랐던 인물이 레닌그라드 공산당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키로프였다. 세르게이 키로프는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 1934년 당 대회의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에서 나온 반대표가 단 3표[3]일 정도로 원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탈린파였지만 스탈린에게 몇 차례 산업화 속도를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고,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키로프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수도인 모스크바가 아니라 레닌그라드에 머물게 하였다.

키로프는 이렇게 레닌그라드 당사의 자신의 사무실에 머물다가 그 해 암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이를 공산당 내에 파시스트들과 연결돼 있는 제5열[4]의 소행이라고 선전하여 당내 첩자들의 색출작업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 같은 반(反)스탈린파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제외한 10월 혁명의 원로들과 경쟁자들, 최종적으로는 반(反)공산주의 계층들까지 모두 쓸려나가버려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스탈린 절대지배체제가 확고히 수립된다.

세르게이 키로프의 보안 문제에 스탈린이 직접 간섭하는 등[5] 키로프의 암살을 전후해 석연치 않은 문제가 있어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설이 있었다. 실제로는 키로프의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벌어진 치정극이라는 설부터 반소련 음모, 스탈린이 손수 사주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니키타 흐루쇼프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스탈린의 사주설을 주장했다.

사실 스탈린은 혁명 후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경고하며 대숙청 10년 전에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불구대천의 원수 레온 트로츠키를 처형하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그 이후에 대부분의 동지들이 처형된 것과는 달리 외국 추방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그렇게 인정이 많을 리가 없었고, 후에 멕시코로 망명한 트로츠키가 자신을 계속 까대자 자객을 보내 암살한다.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제정을 무너트리는데 같은 혁명동지였으나 방법론 차이로 갈라졌던 멘셰비키들을 처형하지 않고 대체로 망명을 허용할 정도로 혁명 동지들에 대한 처형은 매우 자제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축출한 스탈린이 농업을 집단화시키고 과격한 산업화를 추진하자 당내에서는 그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스탈린보다 경력이 화려한 혁명가들이 당내에 있었던지라 만약에 중앙위원회에서 불신임 투표라도 당하면 그는 그대로 정권을 잃고 정치계에서 묻힐 판이었다. 그래서 당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뿌리뽑아서 자신의 정책을 추인하는 거수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게 농업집단화였는데 농민들이 자기 땅을 빼앗기고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이 동원되었는데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과정이 정말로 참혹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은 윈스턴 처칠에게 독소전쟁보다 이 시기의 반란 진압이 더 참혹했다고 했다. 인민을 위한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탄압하니 장교들이 스탈린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원이었던 몇몇 장교들은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에게 용감하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하였다. 더욱이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러한 집단화 정책 실패와 자연재해가 겹쳐 대기근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이 아사하였는데(홀로도모르) 이 책임은 모두 무리한 산업화를 밀어붙인 스탈린이 져야 할 판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또한 여기서 산업화를 중지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독선을 가졌고 이건 스탈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식의 사고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계속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봐도 그 당시에 만약에 산업화를 포기했으면 몇 년 후 일어났을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생각이 스탈린 독재와 대숙청을 합리화했으며 결국 이는 실존하는 반대파 또는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서 대숙청 후에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를 기소하면서 넣은 죄목 중에 양성애[6]와 변태 성향을 넣을 정도로 새디스트 성향이 있는 예조프가 숙청을 감독하면서 막장으로 치달았다. 웃기는 것은 사실상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베리야도 로리콘 성향이며 새디스트였다는 것.

3. 실태

이 숙청이 얼마나 막장스러웠는가 하면, 이 시기에 숙청을 주도한 NKVD의 수장부터 두 명이나 숙청당했다. 키로프의 암살을 기도한 것으로 의심되며 초기 대숙청을 주도했던 겐리흐 야고다는 1937년에 체포돼 1938년 처형되었고,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예조프도 1938년 11월 실각한 이후 1년 만에 체포돼 1940년 2월 처형당했다. 물론 부장들만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부장이 바뀔 때마다 전임요원들 대부분이 숙청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숙청자는 내일의 피숙청자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피래미 요원들의 경우는 굴라그에 이송돼서 짧게 형을 살다가 굴라그 간수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평생 거기서 썩어야 한다는 점에서 좌천 및 귀양이라고 봐도 되는 것. 물론 고위인사는 얄짤없이 총살형이었다.

처음에는 당내의 스탈린 반대파들이 걸려들었다. 그리고리 지노비에프, 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부하린 등 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고참 볼셰비키들이 대부분 처형되거나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그 다음에는 이 숙청이 사회 전반에 이르렀고 학계, 예술계, 관리계급 등에까지 확산되었다. 일단 누가 반혁명분자로 고발하거나 혹은 정보기관의 의심을 사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바로 끌려와 고문당하면 죄가 없어도 자기의 죄를 불고 약식재판[7]을 거쳐 처형되거나 혹은 시베리아굴라그로 끌려갔다. 소련 정부가 밝힌 처형자 수만 60만. 굴라그에 끌려간 사람은 수백만. 물론 실제로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예조프가 벌인 이런 마구잡이 숙청은 많은 인재를 유실시켜 소련의 국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고, 예조프는 이 때문에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실각 당하고 처형된다.

4. 붉은 군대에 대한 숙청

군부에 대한 숙청도 있었는데 적백내전 중 양성된 노련한 장교들을 정치적 혐의로[8] 숙청해서 처형하거나 NKVD의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굴라그로 보내거나 해서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소련군은 몇몇 장성을 제외한 훌륭한 군인들의 씨가 말라버렸다고 알려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당시 고위 장교들 중 다수가 능력이 아닌 정치적 배경으로 출세했고 숙청으로 유능한 장교가 희생된 것은 맞지만, 고위층의 무능한 장교들 역시 대부분 날아가서 오히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30-40대 청년 장교들이 대거 승진이 이뤄지고 군의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다는 것. 2차대전 때 승진한 소련군 원수나 상장들 대부분이 이 시기의 지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관급에서 승진한 사람들이다.[9]

하지만 그것은 과정을 생각 안 한 결과론이며, 독소전이 개전하자 그때까지 죽지 않은 장교들을 다시 불러와서 복귀시키는 조치가 취해졌고, 죽은 사람 중에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 같이 유능한 장교들 역시 많았으며 대독승전의 주역 중 한 명인 로코소프스키 원수는 숙청 전에도 소장이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발가락이 다 뭉개지고 이빨도 절반이나 날아갔다가 독소전 때문에 살아났다. 주코프는 실제로 숙청 리스트에 올라갔다가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름이 슬그머니 빠졌으며, 이반 코네프는 인맥줄을 잘 타 스탈린의 술친구인 보로실로프 원수 라인으로 들어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현대전에서 정말 무능했을지는 알 수 없는 셈. 그리고 무능한 장교들이 싹 쓸려나갔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당장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원수 2명이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늬다. 둘 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에게 뼛속까지 처발린 다음 다시는 일선에 나서지 못했다(...). 대숙청 직후 벌어진 소련-핀란드 전쟁만 봐도 결과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독소전 초반 소련군을 반신불수로 만든 것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이 심했다.[10]

군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독일 방첩대(SD)가 소련군의 고위장교들이 독일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문서를 흘렸고 거기에 위조된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걸 본 스탈린이 "헐, 이 새퀴들이 내 뒤통수 깔 준비하고 있던 거야? 용서할 수 없다!"라면서 예조프와 함께 고위장교들을 줄줄이 쳐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NKVD가 일부러 군의 고위장교들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는 설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의심 잘하는 스탈린에게는 효과 직방이었으리라.

어떤 이유든 간에 실제로 스탈린이 군에까지 대숙청을 옮기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들은 꽤나 있는 편이다. 실제로 1937년까지는 민간에 대한 숙청은 많았어도 군대만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위의 이유들로 인해 스탈린이 군대에 슬슬 의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소련군은 고도의 기계화와 함께 신속한 기동력을 갖는 기동군을 창설하는 계획이 있었기에 군 지휘관들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고 당의 감시역인 정치장교 제도를 없애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위에 언급된 누명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된 것이다. 기동전 구상 자체는 스탈린도 동의한 것이지만 하필이면 굉장히 안 좋은 시기에 찍히기 쉬운 짓을 스스로 벌이고 있던 것. 대숙청 이전의 소련군이 킹왕짱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후사정이 어찌됐든 그나마 육성되기 시작한 장교들을 대거 제거한 것도 그렇고 장교들이 숙청에 대한 강한 공포감을 갖게 만들어 몸 사리게 만든 것도 소련군의 전투력이 내려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극단적으로 몸을 사린 결과 자기 판단대로 창의적으로 지휘하지 못하고 전투교범 등에만 매달리는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된 것. 덕분에 독소전 초기에 독일군이 감청한 유명한 대화도 나왔다.

"우리는 포격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들 미친 거냐! 왜 암호로 보고하지 않는 거냐! 암호로 다시 보고해라!"[11]너는?

따라서 우라돌격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이 숙청의 규모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소련에서 불과 다섯 명뿐이었던 원수들이 두 명만 남고 몽땅 처형되었다는 것만 언급해도 충분할 정도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12]와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가 이 기간 동안 '반혁명 분자', '독일의 첩자' 등 말도 안 되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비밀재판을 거쳐 목숨을 잃었다. 좀 어이없는 것은 예고로프와 블류헤르가 투하체프스키의 비밀재판을 맡았던 군사재판장이었다는 사실이다. 블류헤르는 고문 담당자와 싸우다가 살해당했다. 예고로프는 결국 두 경쟁자를 가지쳐내는데 성공했지만 그도 서기장 동무의 싸늘한 눈초리는 결국 피하지 못했다.[13]

결국 살아남은 원수는 위에서 언급했듯 무능하기 그지없는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보로실로프보다는 유능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늬 뿐. 여기에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술 친구이기도 할 만큼 개인적으로 스탈린과 친했기에 살아남았고[14] 보로실로프와 친하거나 그가 보호해준 장교들 상당수가 살아남아 독소전에서 활약했다.

그런가 하면 부됸늬는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그리고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원수급 이하 수많은 장성들, 영관급 장교들도 이 풍파에 쓸려나갔는데 투하체프스키의 추종자였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폴란드 스파이 활동 등의 혐의로 NKVD에 끌려가 발가락들이 전부 쇠망치로 짓이겨지고 아홉 개의 치아가 부러져나갈 정도로 극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독소전이 시작되고 무능한 장성들이 전사 혹은 해임되기 시작하자 임시로 소장 계급을 부여받고 군적에 되돌려졌다. 이후 군단장이 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역관광을 펼치면서 원수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금속제 틀니를 하고 살았고 금속 발가락이 내장된 부츠를 신고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했다고 한다.

대숙청은 다섯 원수 중 3명을, 군 지휘관 15명 중 13명을, 군단 지휘관 85명 중 57명을 포함해서 전체 장성들의 90%, 영관급 지휘관의 80%를 골로 보내버렸고 그 희생자는 35,000명에 달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보직해임으로 그쳤지만 1만 명가량은 NKVD에 끌려가 수감, 고문, 심하면 처형되었다. 특히 전투부대 지휘관으로서의 영관장교는 대부분 심해야 굴라그 수감으로 그쳤지만, 경험을 어느 정도 쌓은 참모장교 및 장성들은 총살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1941년이 되자 해임된 이들은 80% 가량 복직되었지만 조직관리 및 대부대 지휘통제 경험자가 거의 괴멸한 피해를 복구하기엔 턱도 없는 상황이었다. 특이한 것은 후일 적군 최고의 명장으로 거듭나는 게오르기 주코프는 예조프의 숙청 리스트에는 들지 않았지만 베리야가 실권을 잡은 뒤 숙청 리스트에 오른다. 그리고 그가 할힌골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자 베리야는 슬그머니 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운다.

당연하지만 이 숙청의 칼날은 육해공 병종을 전혀 가리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육군 외에도 소련 공군과 해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공군의 경우 스페인 내전 참전 등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조종 장교와 지휘관들이 대거 수감, 사형을 당했고 설계국의 주요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수감당하거나 사형을 당했다. 해군의 경우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포템킨 사건 등 러시아 혁명 과정에 깊이 관여해서 숙청을 피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런 거 없고 마찬가지로 주요 장교단이 대거 숙청당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등 일부 고위 지휘관들이 숙청 대상자들의 신원 보증을 해 주며 저항해 보았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 숙청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지 소련 해군의 경우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이전부터 듣보잡 수준의 전력을 가져서 상대적으로 그 피해가 적어 보이는 것 뿐이다. 그리고, 해군 및 공군의 경우 설계/정비 기술자나 조종사 등 숙련된 인적 자원의 비중이 더욱 컸기 때문에 그 피해는 육군에 비해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대숙청으로 인해 붉은 군대의 지휘체계가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소련군은 정규군인 붉은 군대만이 아니라 바로 저 숙청을 주도한 NKVD 산하 준군사조직마저 숙청의 후유증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연대대위소령[15]이 지휘하는 게 당연하다시피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때문에 대령 사단장이 속출했으며 여단장[16] 계급으로 군단을 지휘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것도 저 계급이 부족한 간부를 충당하기 위해 쾌속 진급시킨 계급이었다. 어떤 때는 1938년에 참모학교를 졸업하고 대위가 되어 사단 참모장교로 배치되고 보니 사단장부터 예하 연대장들까지 전부 숙청당한 상태라 대위가 사단 최선임자여서 월 단위로 진급을 거듭한 후 부임 2~3개월차에 대령으로 사단장이 된 경우도 흔했다. 더 불쌍한 건 사단장이 되고 나서 숙청의 칼날에 걸린 자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 참모였을 때 잡혀갔으면 수감으로 끝날 것을 사단장으로 잡혀가는 바람에 뒤통수에 바람구멍이 뚫린 사람도 꽤 많다고...

여담이지만 스탈린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는 군부 대숙청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출신 장교단이 자신의 말을 잘 안 따라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스탈린처럼 군부의 고집불통 짬빱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했는데...그래야 그처럼 군부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스탈린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시시콜콜 간섭했던 독소전쟁 전반기에는 달리 후반기에 간섭을 자제하여 소련군이 창의성 있게 움직여 잘 나간 건데 히틀러는 정반대로 해석.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히틀러는 정말로 그를 따라했다.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고 여겨진 장교들이 전선에서 소환되어 과장되거나 짜맞춘 결론으로 처형되었다. 그런 숙청재판을 주재한 재판관 롤란트 프라이슬러를 히틀러는 "프라이슬러는 우리의 비신스키[17]다."라며 스탈린식으로 숙청할 것을 주문했다.

5.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소수민족 전체가 반혁명세력으로 낙인찍힌 경우도 있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게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추방시켜 버린 사례[18]였는데 그게 보통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을 지날 때마다 시체가 쌓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무고한 고려인들을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유배했다고 알려졌으나 조사를 통해 좀 더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실제로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중에서 친일 부역자들이 꽤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자유시 참변 같은 것을 고려한다면 소련은 변명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참고로 대숙청 기간에 희생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도 꽤나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무장항일투쟁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김경천 장군과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의 선구자격이라 할 수 있는 박진순 등을 비롯해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고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던 김단야와 그의 아내 주세죽도 이 시기 일본의 첩자로 몰려 사형당한다(주세죽은 그래도 처형은 모면했지만 '반혁명적 분자'로 몰려 카자흐스탄 지방으로 유배당했다.). 김단야의 아내 주세죽은 원래 박헌영과 결혼한 뒤 소련으로 망명하여 박헌영은 국제 레닌대학(당시 국제 혁명가들을 양성해 내는 최고의 대학),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당시 국제 혁명가 및 활동가를 양성해내는 대학)에 다닌 뒤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에 대한 지시를 받고 상해로 이주한다. 상해에는 김단야가 먼저 와 있었고 이 세 명은 상해 조계지를 근거로 활동했지만 얼마 안 가 일본 밀정에 의해 박헌영이 검거된다. 박헌영이 옥신각신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김단야와 주세죽은 상해를 탈출하여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때가 1933년이었다. 그리고 김단야와 주세죽은 박헌영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재혼했으며 바로 몇 년 뒤 대숙청에 휘말려서 김단야는 사형, 주세죽은 모스크바 추방 및 카자흐스탄 5년 유배에 처해지게 된다.

6. 결과와 후폭풍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연히 수 많은 유능한 군인들이 좌천되거나 처형당하고 살아남은 장교들도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소련군의 급격한 약체화를 불러와 겨울전쟁독소전쟁 초기에 신나게 얻어터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거기다 이 숙청은 군인뿐 아니라 소련 각계각층 인사와 민간인까지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파장이 대단히 컸다. 고위층 장교 한 명 잡아 없애기 시작하니 가족 관계며 친분 관계까지 사다리 타고 계속 내려오는 걸 거의 다 가지쳤을 정도. 참고로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경우 아내와 아들까지 모두 처형되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역사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대숙청 직전인 1934년 17차 전당대회 참석자 명단에 실린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이 체포되고 그 반 이상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또한 당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위원 139명 중 110명이 처형당하거나 자살 또는 의문사했다. 당시 모스크바의 당 간부용 아파트 단지에서 대숙청 종결 때까지 가장이 무사히 남아있던 가구는 겨우 2집에 불과했다는 소름끼치는 전설이 있다.

반혁명 즉결 재판을 통해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만 해도 겨우 2년 동안 1,345,000명에 달한다. 게다가 정확한 숫자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소련이 멸망한 뒤 공개된 비밀해제 문서들에는 각 마을과 시마다 인구비율당 체포 할당량을 주기까지 한 것이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와 종전 후에도 별의 별 꼬투리를 다 잡혀서 끌려간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희생자 숫자는 더 많아지는데 대전 후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킬링필드 등과 함께 일당독재 국가가 막장테크를 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인 셈. 다만 흔히 알려진 2000만명이 죽었다(경우에 따라서는 4000만까지도 간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 대숙청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60만[19]명에서 200만명 사이로 보고 있으며 90만에서 130만명 사이로 보는 게 정설이다.

아무튼 이런 막장행위를 주선한 스탈린도 인재 부족에 대한 인식+예조프에 대한 견제의식+그외 잡다한 생각으로 인해 이 숙청을 완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1938년 '스탈린의 개새끼' 예조프를 자르고 NKVD 부장에 '스탈린의 힘러' 라브렌티 베리야를 임명한다. 예조프가 스탈린의 눈 밖에 난 결정적인 사유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NKVD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예조프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양 행세했고 그때 참석한 스탈린은 이를 보고 그의 정치적 야심을 의심, 숙청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결국 1940년, 스탈린은 예조프를 처형해버린다. 즉, 숙청 담당자가 너무 숙청했다고 숙청당한 것으로 이 대숙청은 대미를 장식한다. 물론 대숙청의 후폭풍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숙청이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 없다. 1939년 발트 3국이 소련에 합병되자 그곳에 있던 수많은 지배계급이 베리야에게 숙청된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을 대거 처형한 카틴 학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참고로 대숙청을 감독한 이가 베리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베리야는 예조프가 남긴 후유증을 뒷수습했다. 물론 그렇다고 베리야가 착한 놈은 절대로 아니며 전쟁기간 동안 베리야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이 예조프와 맞먹을 지경이다. 스탈린식 정치는 베리야에게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노선을 폐기하는 정책을 펴지만 결국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이렇게 예조프가 토사구팽당한 이유는 대숙청의 여파가 소련에 얼마나 심각했던지 누구든 이 책임을 져야 했고 이는 곧 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돌아올 판이었다. 베리야는 취임 후 솔직히 공안기관의 오버를 인정하면서도 그걸 모두 예조프 탓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베리야는 막장으로 치달아 국가에 큰 해를 끼친 대숙청의 책임론에 대해 스탈린에 대해 쉴드를 쳐준 건데, 예조프를 임명한 것은 스탈린이기 때문에 스탈린이 그 책임에서 피해나갈 수 없다.

여담이지만 당시 스탈린의 2번째 아내도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남편의 비정함과 잔인함에 절망해 자살한 것이었지만.

이 대숙청이 가져온 가장 큰 불행한 유산은 소련인들을 모두 명령과 규범에만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로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상부 지시 없이 훈련을 했다는 이유로 장교가 숙청되는 막장스러운 상황에서 다들 살아남기 위하여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런데 혁신적인 아이디어, 자발적인 도전 등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어떤 분야든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피드백이 계속돼야 하는데, 모두 상관의 입만 쳐다보고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에서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7. 수정주의

일부의 의견에 의하면 스탈린은 단지 소련의 사회적 분위기를 충실히 따랐던 허울뿐인 지도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즉 대숙청이라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소련 사회의 젊은 계층이 윗 세대를 처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고 스탈린은 거기에 맞춰 따라간 것이라는 이야기.

이 점은 트로츠키나 일반적으로 스탈린의 혁명에 대한 기여도가 없고 정치적으로도 찐따라는 주장에 발 맞춘 것이며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홍위병들의 자주적 의사결정 및 자유로움을 찬양한 부류의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파기된 설이다. 스탈린 자신이 혁명 과정에서 상당히 손을 담궜고 나쁜 의미로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스탈린이 그런 움직임에 피동적으로 따라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8.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

다른 한편, 스탈린이 독재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대숙청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물론 도덕적 측면에서야 끔찍하기 짝이 없는 행위고, 소련의 국익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막대한 인적 손실을 가져온 행위였음이 명백하지만 스탈린 일인독재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대숙청이 꼭 필요했다는 것. 이와 같은 관점의 근거는, 대숙청이 벌어진 30년대 후반 이전까지 소련에서 스탈린이 가진 권력은 이후 40~50년대의 스탈린이 가졌던 절대권력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3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를 보더라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려 300표 가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고, 독소전쟁발발 직후 패닉에 빠진 스탈린이 관저에 은둔해 있는 상태에서 몰로토프를 비롯한 심복들이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냐고 일 하라고 끌어내려고 쳐들어오자 자신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는 절대권력이 공고해 진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의 스탈린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점이나, 암살이나 테러는 두려워 할 지언정 공개적인 탄핵이나 체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분명 스탈린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만 하다. 즉, 대숙청과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스탈린이 설령 소련의 최대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권력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견제나 도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스탈린의 권력 획득 과정을 살펴본다면, 일단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1인자가 된 것은 20년대 중반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것을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25년 무렵에 트로츠키는 정치적인 권한을 거의 상실하고 실각하게 되지만, 정작 트로츠키가 국외로 추방당한 것은 29년의 일이었다. 최대의 정적이자 정치적 위험요소인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도 4년간이나 해외로 쫒아내지도 못하고 국내에 머물도록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기간동안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국외 추방을 실행했을 때 사람들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도록 소문을 미리 퍼트리는 등 다양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트로츠키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지노비예프의 제안에 대하여 스탈린이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예로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은 트로츠키를 처형했을 경우 돌아올 정치적 부담과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만약 정말로 순수하고 동지를 죽이기 싫어서 처형하지 않았던 거라면 실각시킨 후 바로 해외로 추방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었을 것이며, 국내에 계속 머물도록 할 경우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장 스탈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스탈린의 잔혹성이 두드러진 2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스탈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위기에 몰린 트로츠키를 염려한 군대 내 추종자들이 트로츠키를 권좌에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를 자발적으로 제의할 정도였고[20] 굴라그에서 살아 돌아온 행운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스로를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부르던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이 40년대 후반까지도 수용소에 남아있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29년에 트로츠키를 국외 추방함으로써 최대의 정적을 일단 제거한 이후에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을 비롯한 나머지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30년대 초반 내내 각종 누명과 음모로 이들의 당원 자격을 여러차례 빼앗기까지 했지만, 자아비판등의 절차를 거친 뒤 다시 돌려줄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러한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이들을 본격적으로 투옥하고 처형한 것이 바로 대숙청 기간인 30년대 후반이며, 추방당한 상태인 트로츠키를 암살한 것은 대숙청이 분수령을 넘은 1940년의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종합해 본다면, 권력 획득 이후 대숙청기 이전까지 10여년의 기간은 소규모 숙청과 음모로 다른 경쟁자들의 권력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그만큼씩 스탈린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독재 태동기였으며, 대숙청이 시작된 3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쟁관계의 다른 권력자들을 압도할만한 권력이 스탈린에게 집중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막강한 권력을 얻은 다음에 굳이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느냐는 것인데, 이 역시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그 전까지는 대규모 숙청을 벌일 힘이 없었고, 권력을 얻은 이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숙청한 것이다.

여기서는 스탈린이 당시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 당 지도자, 소위 말하는 '고참 볼셰비키'중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혁명 과정에서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잉여 찐따라는 이야기는 스탈린을 디스하기 위한 다른 볼셰비키 당 지도자(주로 트로츠키)들이 퍼트린 악평이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름대로 공적이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오만방자와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잘난척을 주된 정체성으로 삼는 트로츠키 같은 인물이라면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일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정도(...). 스탈린이 주로 활동한 영역은 사무작업이나 자금마련 같은 부분인데, 문필가로서 독일에까지 알려진 명성을 제외하더라도 10월 혁명 당시 적위대를 이끌고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주도하고, 이후에는 붉은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조직하여 반혁명군을 상대로 한 승리를 주도한 트로츠키에 비한다면 확실히 화려함이 크게 떨어진다.

뭐, 로자 룩셈부르크같은 해외 인물들조차 10월 혁명 이후의 볼셰비키 정권을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정부라고 부를 정도니 트로츠키는 그냥 못 이긴다고 치더라도, 그 외의 다른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도 스탈린의 경우는 화려함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부하린 같은 경우 뛰어난 이론가이면서 특히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전문가라는 명성과 함께 레닌에게 '당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인망도 높은 인물이었으며, 지노비예프는 일개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인 스탈린에 비해 명목상 전 세계 모든 공산주의 정당의 상위조직인 코민테른의 집행위원장이자 벽촌인 카프카즈 지방에서 활동한 스탈린과는 달리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바 있었고 카메네프 역시 수도인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탁월한 이론가+연설가 스킬을 기본 장착한 위 인물들에 비해 스탈린은 민족문제에만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네이티브가 아니라서 러시아어도 어눌한 편이었다.조지아어는 잘하는데

결론적으로, 문화대혁명이나 킬링필드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는것처럼 수 많은 독재자들이 일종의 '이념적 세탁'을 위해 대규모의 학살과 숙청을 자행하곤 하는데 스탈린의 대숙청도 이러한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스탈린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반대자나 잠재적 반대자, 반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포로 압도하여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정주의 관점에서 지적된 것처럼 대숙청에 세대간 갈등의 요소가 있는 것 역시 이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독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잡기 이전에는 초라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기성세대보다, 처음부터 자신의 세뇌 아래에서 성장한 신세대가 훨씬 다루기 편한 것이다.

그리고 대숙청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1) 소련 공산당의 정치국원들이 몰살당한 것처럼 권력조직 내부에 대한 숙청이 외부에 대한 숙청보다 더 심했다는 점과 2) 영관 장교의 80%, 장성의 90%가 숙청당한 것에서 보듯 군대에 대한 숙청이 몹시 두드러졌다는 점, 그리고 3) 특정한 집단에 대한 숙청이 아니라 별 말같지도 않은 이유를 핑계로 삼은 무작위성이 강한 숙청이었고 특히 엘리트 계층에 대한 숙청이 심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이 역시 위 맥락에 따라 많은 부분이 설명 가능하다.

1) 소련 공산당 내부에 대한 숙청이 특별히 더 지독했던 이유는, 위에 설명된 바와 같이 스탈린이 당 내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보다 잘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는 쉽지만, 남보다 딱히 잘난 점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자기와 동급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다 무력화 시켜야 하니까.

2) 대숙청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고급 장교 숙청일텐데, 붉은 군대의 지휘구조를 파탄지경에 몰아넣은 이 숙청 역시 스탈린의 입장에서 군대가 잠재적 위험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권력투쟁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행정부장관과 국방부장관 사이의 권력투쟁이니까. 더구나, 그 국방부 장관이 보통 장관도 아니고, 건군의 아버지라면? 당연히 정권을 잡은 행정부 장관으로서는 군대가 꺼림찍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줄 근거가 하나 있다. 군 내에서 주 숙청 대상인 영관~장성급의 고급지휘관들이라면 대략적인 연령은 40대~60대 정도였을 것이다. 소련의 건국이 1917년, 군부 대숙청이 1937년이니 이들 고급지휘관의 대다수는 소련이 건국될 당시에 이미 20~40대의 나이로 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 붉은 군대의 고급 지휘관의 주류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 출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혁명 직후 한번 군대에서 추방당했던 이들 제정 러시아군 출신자들을 다시 군대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이다. 요컨데, 당시 붉은 군대 고급지휘관의 상당수는 트로츠키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군 지휘관 중에서 가장 아까운 사례로 꼽히는 투하체프스키를 보더라도, 귀족 태생의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트로츠키에 의해 발탁된 것에 가까운 입장이었고[21], 내전기에는 트로츠키의 지휘 아래서 눈부신 공적을 쌓아 최고위직까지 승진한 입장이었다. 덤으로 폴란드 전선에서의 패배 문제로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쁘기까지 했지만... 투하체프스키 자신은 군인으로서의 입장에 충실한 것인지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총참모장에 취임하여 자기 책임을 다했지만, 이 역시 3년만에 보수파 장성들의 반대에 밀려 해임되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투하체프스키 개인에게 스탈린과 트로츠키 둘 중 어느쪽을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트로츠키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쪽이 오히려 더 적절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투하체프스키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붉은 군대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군대를 적으로 돌리고 무사할 수 있는 독재자는 없다.

3) 이 문제도 붉은 군대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당시 군대 내에서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세력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진짜 트로츠키파 자체야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미리 숙청해 버렸지만 트로츠키에게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지휘관은 그냥 장교의 대다수이고, 오히려 스탈린파가 일부 계파에 불과한 상황이었던 것. 그나마 이 비교에서는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의 경우에 한정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몹시 오만한 성격과 애초부터 주류 볼셰비키가 아니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상 트로츠키파는 차라리 특정해내기가 쉬운 상황이었고,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부하린 같은 유명한 고참 볼셰비키의 경우 그들의 지지자가 곧 볼셰비키 지지자였던 상황이었다. 스탈린 역시 고참 볼셰비키였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러시아어도 고등학생 수준으로밖에 구사하지 못하고, 생긴게 멀끔한 것도 아니고, 성실하고 꼼꼼하긴 하지만 특출나게 똑똑한 것도 아닌 데다가 성격까지 음침한 스탈린을 다른 지도자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듯. 결국,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명백한 스탈린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스탈린의 권력이란 볼셰비키당이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볼셰비키당을 정략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지, 그 권력에 상응하는 지지를 기반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독재권력을 얻기를 포기하고 말겠지만(...) 어떻게든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국 스탈린보다 다른 지도자를 더 선호하는 다수집단 전체를 숙청해야 하는데, 다수의 집단을 특정해 낸다는 건 의미가 없으니 결국 남은 길은 무작위 숙청뿐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반대파 전체를 물리적으로 제거했다기 보다는, 감히 반대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드는 방법으로 스탈린은 절대권력을 얻은 것. 특히 엘리트 집단에 대한 숙청이 잔혹했던 이유 역시 이들이야말로 스탈린이 평범한 당 지도자중 1人이었던 과거를 잘 기억하고 있을테니 그만큼 위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숙청이 없었다면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은 탄생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레닌 시대만 해도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은 꽤나 공공연하게 행해졌지만 최소한 당 내에서는 레닌에 대한 비판이나 레닌의 입장에 대한 반대가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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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식사 도중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에게 겨울전쟁의 졸전에 대해 비판하자 이렇게 항의하며 그릇들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 [2] 위 사진에 보이는 싸인은 스탈린, 몰로도프 등등의 싸인이다.
  • [3] 스탈린의 경우 반대표가 292표는 넘었다.
  • [4] 진격해오는 정규군에 호응하여 적국 내에서 각종 모략활동을 하는 조직적인 무력집단.
  • [5] 대숙청과 전혀 무관한 부됸늬나 볼로쇼프, 혹은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보안 문제 간섭이나 숙청과 무관한 병사 내지는 사고사에 대한 보안문제를 봐서 이 설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 [6] 10월 혁명으로 자유롭게 허용되었던 동성애낙태는 스탈린 집권 후 다시 범죄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는 사실 차르 체제와 다름없는 보수적인 체제였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건 뭐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유도 제한해선 안 된다는 것이였다.
  • [7] 사실 이것조차 생략한 경우가 많다.
  • [8] 대부분 누명이었다.
  • [9] 2차대전을 다룬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Heart of Iron 2'에서는 대숙청 이벤트를 진행할 경우 다수의 고위장교가 사망하여 원하는 장성을 진급시켜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숙청 대상의 선정 방식이 랜덤이라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도 처형당할 수 있다는 게 무섭다. DHR에서는 무조건 숙청이지만 숙청 대상이 정해져 있는 대신 시기가 랜덤이다.
  • [10] 어떤 식으로 당했냐고? 프랑스 침공,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등으로 단련이 되고 임무형 지휘체계 등의 우수한 시스템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된 독일 육군, 루프트바페 등의 공격으로 흩어져 있던 소련 육군은 각개격파를 당해 분쇄되고, 공군은 수천기의 비행기가 박살나 버려 제공권을 장악당해 초반에 수백만이 갈려나가 버렸다.
  • [11] 이미 공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암호로 다시 보고하라는 것도 어이없지만 평문으로 보고하고 같은 내용을 다시 암호로 보고하는 것은 적이 암호를 풀기 좋게 도와주는 꼴이다.
  • [12] 투하체프스키의 경우는 실제로 반(反)스탈린 음모를 꾸몄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투하체프스키와 스탈린은 적백내전 당시 사령관-정치장교의 관계 때문에 이후에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으며, 투하체프스키가 러시아 제국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산당 내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 [13] 예고로프는 1939년 2월 22일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재판 직후 즉결 처형당한 투하체프스키나 블류헤르에 비하면 낫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 기간에 당연히 극심한 고문이 있었으리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 하여간 옥사로 끝난 것으로 보아 투하체프스키보다는 죄가 덜하다고 판단되었던 모양. 참고로 투하체프스키는 1937년 8월에 처형당했다.
  • [14] 보로실로프는 스탈린과 굉장히 친해서 그와 접시를 던지며 싸웠다고도 하고 같이 뱃놀이를 갔는데 스탈린이 "너 독일(or 영국) 스파이지!" 하니까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뺨을 때렸다고도 한다. 추가로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들이 접시싸움을 하는 걸 구경했다고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싸워도 보로실로프는 열심히 스탈린 앞잡이를 했다.
  • [15] 영어로 Major라고 쓰니 소령으로 번역하는 게 맞지만 당시 소련군의 계급 분류로는 대위부터가 영관급을 가리키는 선임장교에 속했고 Major는 대령의 바로 아래 계급에 해당했다. 소련군에 중령 계급이 분화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이다.
  • [16] 당시 소련 장성 계급은 지휘 가능한 부대 수준으로 표기되어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 야전군 사령관(2급 군사령관, 대장급), 전선군 사령관(1급 군사령관, 원수급)으로 구분되었다.
  • [17] 모스크바 재판의 수석검찰관.
  • [18] 체첸인이나 잉구시족도 해당한다.
  • [19] 흐루쇼프 시절 소련정부의 공식발표. 당시 흐루쇼프의 주도로 스탈린격하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고의적으로 축소했을 가능성은 낮은 편.
  • [20] 물론 그 염려라는게 진짜 트로츠키를 염려한 것인지, 자신들의 후견인이니 지도자가 실각하면 자신들도 피해를 볼 것을 염려한 것인지야 알 수 없지만...트로츠키가 저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볼 때 자발적으로 제안했다는 것은 맞다.
  • [21] 정확히 따진다면 이후 트로츠키가 대거 영입한 구 제정 러시아군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투하체프스키는 미리 제발로 입대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제정 러시아군 출신자를 군대에서 배재해야 한다는 레닌이나 다른 혁명가들의 주장에 트로츠키가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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